중일전쟁의 발발
● 2차 국공합작 (1937)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쉽게 지방에서 군벌들이 난립하게 된다.
그래서 BC 202년
한(漢)나라가 건국된 이래,
중국 왕조의 수명은
평균 64.8세에 불과했다.
"황제의 재위 기간을 15년이라고 할 때
보통 4~5대에 가면 멸망했던 것임."
"헐!"
그런데 이런 현상은
놀랍게도 현대에 와서도 계속됐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봉건 제국 청나라가 붕괴한 뒤에
중국 곳곳에서
군벌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라곤
칼과 활에서 총과 대포를 들었다는 점."
때문에 거대 공룡 중국은
제대로 힘을 결집시키지도 못하고
열강들에게
이리저리 쥐어터지고
주권과 이권을
침탈당해야만 했다.
그런 혼란을
20년 가까이 치르면서
군벌을 통일했던 게
바로 국민당의 장제스였다. (1928)
장제스
"나도 사실 광동성의 군벌 출신."
하지만 중국 대륙은
워낙 땅도 넓고 인구도 많아서
국민당의 영향력이
중국 전체로 퍼지기엔 한계가 있었고,
그런 틈을 타서
이번엔 공산당과 일본이 파고들었으니,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접수하여
다음 해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워버렸다.
같은 시기
중국 남부의 장시성에서는
공산당들이 대범하게도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건국하고 있었다.
장제스
"뭐? 공산당 놈들이
감히 나라를 세워?"
이때 장제스는 상대를 선택해야만 했다.
누구를 먼저 칠 것이가?
당연히 공산당을 먼저 쳐야만 했다.
일본은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다.
때문에 장제스는
일본과 협정을 맺은 다음, (1932, 상하이 협정)
국민당
"달라는 대로 해줄 테니,
앞으로 더 이상 집적거리지 않기다."
일본
"알았어."
전력을 다해
장시성의 공산당을 토벌했으니
"100만 대군에
폭격기 200대 대동!"
공산당 세력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달아나게 되는데,
이때 포위망을 피해
달아난 거리만
3년 동안
무려 9600km에 달했고, (대장정)
"11개의 성(省)과 18개의 산맥,
17개의 큰 강을 건너며,"
"무수한 병사들이 쓰러져 죽었던
고난의 행군."
결국 산시성의 '연안'에 도착해
새로운 터를 잡을 수 있었다. (1936)
장제스
"흥! 제깟 놈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구먼."
1936년 12월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친히 시안을 방문했다.
시안에는 장쉐량이 있었다.
장쉐량(장학량)이 누구인가?
바로 일본에 의해 열차 폭사 사고로 숨진
만주 출신의 군벌, 장쭤린(장작림)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평소 장쉐량은,
장제스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장쉐량
"왜 총통께서는 일본과의 싸움에
이렇게 소극적인 거지?"
장제스가 자신을 방문해 오자,
기회를 놓칠세라
장제스의 처소를 덮쳐
감금시켜버리고
공산군과 협력을 해
일본군과 싸울 것을 강요하게 된다. (1932, 시안 사건)
장제스
"장쉐량, 네가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냐?"
장쉐량
"총통,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총을 먼저 겨눌 곳은 일본입니다."
장쉐량
"공산당과 손을 잡고
공동의 적 일본을 쳐야만 합니다."
장제스
"뭐야?"
결국 장제스는
일단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금 2주 만에
승낙을 하게 되고,
장제스
"좋아! 대신 공산당은 그놈의 혁명인지 뭔지를
당장 중단하도록 해!"
이때부터 공산당은
국민당 산하의 군대로 편입되게 된다.
장제스
"어쨌거나 공산당 놈들과
협력하기로 했으니,"
장제스
"국민당의 8번째 지방군에
편입시키라능."
"그리하여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군의 8번째 지방군이라는 뜻으로,"
"팔로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됨."
▲ 팔로군
● 중일전쟁의 발발 (1937)
1936년 2.26 사건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가 완성되어
확고한 군부 독재 체제가
만들어졌고,
이후 전쟁기계 국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러던 때 중국에서의 '국공합작' 소식은
일본 군부의 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뭐야? 우리에게 맞서기 위해
국민당이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고?"
"좋아, 한 번 해보자는 거지?"
그리고 1937년 7월 7일
늦은 밤,
중국 베이징 교외
노구교(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찍이 마르코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말한 곳."
훈련 중이던 일본군들이
누군가로부터 총격을 받아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사실은
곧바로 상부로 전달됐고
행방불명이라는 사병은
나중에 귀대했지만,
다음날 아침 일본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중국군을 공격하고 말았다.
"좋았어. 제대로 건수를 건졌네."
이것이 바로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초기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화북지방의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하더니
전투기를 투입해
상하이와 수도 난징을 잇달아 폭격했다.
▲ 난징 공습 (영화 존 라베 中)
하지만 헐렁헐렁한
화북과는 달리,
강남에서의 중국의 저항은
만만치가 않아서,
"어라? 이게 아닌데.."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막대한 군대를 파병할 수밖에 없었고
상하이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에만
무려 석 달을 소모해야만 했다.
▲ 영화 난징 난징 中
일본군은
자존심이 상했고,
"아놔, 두고 봐라."
중국의 수도, 난징 함락을 통해
실추된 자존심을 만회하고
적의 기세를 단번에 꺾어놓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좋아!
다음 목표는 난징이다!"
● 난징대학살 (1937)
하지만 난징으로 가는 길은
더욱더 일본군의 화를 돋웠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데다가
게릴라의 습격도 잦았고
"식량과 보급품이
모두 폭파되었습니다."
"또냐?"
"이 놈들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렇게 된 거, 먹을 것이든 뭐든
필요한 것은 모두 현지 조달한다!"
중국군의 저항도
만만찮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사상자 수는
급격히 늘어만 갔고
그럴수록 일본군은
독이 바짝바짝 올랐다.
▲ 영화 난징 난징 中
"석 달이면 전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수 있다더니.."
"이래 가지고는 석 달이 아니라
3년으로도 모자라."
"중국 놈들이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게
무서운 맛을 보여줘야만 해."
"맞아. 인정사정 볼 거 없어."
▲ 난징 공격 (영화 난징 난징 中)
때문에 일본군의 잔혹함은
더욱 배가 되어,
사로잡힌
중국인 포로들은
식량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모두 다 죽음을 당해야만 했고,
난징에 입성한 이후로도
5만여 명의 일본군은
'패잔병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40여 일 동안
광란의 학살극을 연출하게 된다. (1937년 12월)
군인·시민·어린아이·부녀자
가리지 않았고,
총살·난자·생매장·불태워 죽이기 등
살해 수법도 매우 잔혹했으며,
학살된 피해 숫자만 해도
30만 명에 달했다. (중국 측 발표)
▲ 참고로 중일전쟁을 통해서 총 1200만 명의 중국인이 희생됐다
당시 현장에서 참상을 목격했던
미국인 에드가 스노우의 얘기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편 p.212)
에드가 스노우
"적어도 여자라면 10세부터 70세까지
모두 강간을 당했어요."
에드가 스노우
"술에 취한 일본군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 누구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지요."
에드가 스노우
"대낮에 벌어지는 성폭행도
낯선 일이 아니었고요."
▲ 영화 난징 난징 中
'난징의 강간'의 저자,
미국인 아이리스 장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리스 장
"일본군은 선량한 양민을 대상으로
목 베기 경쟁을 벌이고,"
▲ 목베기 시합 : 106 vs 105로 두 장교가 벤 목이 211개였다
아이리스 장
"신병들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중국인을 총검술의 표적으로 삼았아요."
아이리스 장
"산 채로 매장하기, 불태우기 같은
인종청소가 벌어지기도 했고,"
아이리스 장
"여성 2만 명 이상이
강간을 당한 후 살해됐습니다."
▲ 영화 존 라베 中 (영화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학살은
외신을 통해서 전 세계로 알려졌기 때문에
일본은 국제적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고,
중국인들에게는
항일의식만 더욱 고취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물러가라!"
한편 일본은
1938년 중반부터
전선에서
독가스를 살포하기 시작하는데,
▲ 방독면을 쓴 일본군 (상하이 전투)
총 2천여 차례에 걸친
화학무기 사용으로
9만여 명의 중국 군인들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한중일 3국공동역사편찬위,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사 p.155)
장기전이 되어버린 중일전쟁
● 3개로 분할된 중국 대륙
1937년 여름부터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1938년 초, 중국 동부 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지만
거대한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이 지배할 수 있었던 지역이란,
겨우 점과 선으로 연결된
제한된 영역일뿐이었다.
60만의 대군을
투여했다지만
중국이란 대륙은
워낙에 컸던 것이다.
때문에 1938년부터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중국 대륙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게 된다.
먼저 점과 선으로 연결된
일본의 점령 지역,
"중국의 상공업 지대와 교통의 요지,
주요 대도시가 몰려 있었지만,"
"끊임 없는 게릴라의 기습이
일본군을 괴롭혔다능."
다음으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지배하는
중국 남서부 지역,
"장제스는 충칭에
임시수도를 세우고,"
"사실상 일본과의 전면전을
혼자서 모두 막아내고 있었음."
그리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변방 지역과 배후지역.
"공산당은 북부의 변방 지역과
일본군이 점령한 배후지역을 파고들면서,"
"농촌 해방구를 건설하며
열심히 세력을 불리고 있었음."
결국 중일전쟁은
일본과 국민당의 지루한 소모전이 펼쳐진 가운데,
공산당이 야금야금
힘을 비축하던 전쟁이라 할 수 있었다.
"헐!"
한편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지구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
"일본이 아무리 강해도 중국은 넓다해.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해!"
마오쩌둥
"이 전쟁은 누가 오래 버티느냐가
승패의 결정이 된다해!"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일본의 속을 바짝바짝 태웠다.
일본군이 진격을 하면
후방에서 교란을 펼쳤고,
"진격하라!"
"후방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뭐?"
기껏 국민당을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하면
공산당의 배후세력도 전진해서
공산당의 해방구만 커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아놔!"
더욱이 서구 열강들은
일본을 고립시키기 위해
암암리에 중국을 도와주고 있었기에
일본의 상황은 더욱더 난처해졌다.
● 중국 내 괴뢰정부
결국 1938년 말,
일본 정부도
중국에 대한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우리도 굳히기 작전이다!"
"중국을 점령하기 위한
더 이상의 소모전을 멈추고,"
"우리가 점령한 지역만 확실하게
우리 것으로 만드는 작전으로 선회한다!"
그리하여 일본은,
만주국과 같은 괴뢰정부를 여러개 만들어
국민당 정부를 압박하려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국민당 정부에
이런 제안을 하며 꼬드겼다.
일본
"앞으로 일본 제국은
국민당과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겠으며.."
일본
"공산당을 때려잡는 데에도
힘을 합쳐 공동전선을 펼치겠음."
일본
"또 중국의 발전에 협조하며
경제적으로도 적극적으로 제휴할 것임."
일본
"그러니 서로 손을 잡고, 영미 제국주의를 능가할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만들어보자능!"
장제스
"뭐야?
대체 무슨 수작인거지?"
그러더니 일본은 점령 지역에
잇달아 꼭두각시 정부들을 세웠다.
베이징에 세워진
중화민국 임시 정부
내몽골에 세워진
몽강 연합 위원회
난징에 세워진
중화민국 유신정부
일본
"하하하. 이로써 인구 3억의
거대한 엔 블록 완성!"
장제스
"누구 맘대로
사이비 국가들을..!"
그러나 일본의 계획은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괴뢰 정부의 지도자들은
부패한 인물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민중의 호응을 얻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오히려 민중들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침략자 일본을 몰아내자!"
"매국노들은 물러가라!"
● 국가총동원법의 제정 (1938)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는 '물자 통제'를 시행하게 된다.
부족한 자원을 결집하고
낭비를 줄이기 위해 방안이었다.
"앞으로 사치품의 수입을
집중 단속하고,"
"기업 대출도 군수산업 부문에
최우선적으로 허용하겠음."
그렇게 시작된
'전시 통제경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
본격화되는데,
국가총동원법이란,
정부가 의회의 승인 없이
각종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도록 만든 법이었다.
"전시 상황인 만큼,
절차를 따지는 건 시간 낭비!"
그리하여 일본의 국방비는
GDP의 20%까지 치솟게 되고
"재정의 20%가 아니라,
GDP의 20%!"
'국민징용령'을
시행하여
군수공장과 탄광으로
노동력을 충원하는가 하면, (1939)
"다만 태평양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강제징용은 없었고, 모집의 형식이었음."
노동자의 임금, 회사의 이익 배당,
회사의 자금 조달까지 모두 국가가 개입하도록 했다.
"임금 통제!"
"기업들은 여유자금(유보금)을 모두
군수산업에 투자하라능!"
때문에 이러한 조치에
재벌들의 저항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재벌
"뭐야? 국가가 우리들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하지만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군수산업의 특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재벌들은 모두들
군소리 없이 군부에 협조했고
미쓰이, 미쓰비시, 닛산 등의 재벌들은
오히려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하하하. 뭐, 나쁘지 않네."
한편 민간의 경제 생활에도
통제가 강화되었고,
"앞으로 생필품의 가격을
모두 국가에서 통제하겠음." (1939)
"사치품 판매를 제한함!" (1940)
"쌀은 모두 국가가 수매하고
배급을 통해서만 정량의 쌀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겠음!" (1941)
사상 통제와 대중매체에 대한 검열도
한층 더 강화됐다. (1940)
"모든 언론, 출판물들은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하며,"
"국가와 정부를 비방하고
유언비어를 살포하는 사람들은 모두 엄벌에 처함!"
● 조선과 대만의 황민화 정책
중일전쟁 직전부터
일본 군부에서는
'조선인 병역 문제'를 두고
한바탕 설전이 오고 가고 있었다.
"외지(조선과 대만)인들도
황국의 신민이 아닙니까?"
"왜 그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겁니까?"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총을 건네주는 것은 위험합니다."
"조선 병사의 총이 아군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
어찌 장담할 수 있습니까?"
결국 이런 논리로
조선인 징병은 불발에 그치고
대신 조선총독부로
이러한 명령이 떨어진다.
"선인(鮮人)들의 삼천 년에 걸친
구관습을 떨쳐버리도록 해서,"
"무의식까지 황민으로 만들어서
잠꼬대로 일본어를 말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1937년 10월부터
조선의 모든 학교에서는
수업 시작 전에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여
동쪽(일본 쪽)으로 참배하도록 했고,
▲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는 학생들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며.."
관공서, 은행, 회사, 공장 등
모든 직장에서도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고
신사참배를 하도록 했다.
또 1938년부터는
조선의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가 사라지고
일본어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일본 육군은
조선에서도 '지원병'을 모집하게 된다.
▲ 조선에서도 국가총동원법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지원병을 모집하자
의외로 경쟁이 치열했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총 1만7천 명 모집에
무려 80만 명이 지원,
평균 50:1의 경쟁률을 보인 것이다. ☞ 참고
경쟁률이 높았던 이유는
각 지역의 관공서에서
공무원들이 나서서
'지원'을 부추겼던 이유도 있었지만,
마땅한 직업도,
비전도 없었던 저소득 층에서
군인의 신분을
나름 안정된 직업으로 생각하고
경제적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과는 달리
대만에서는 '황민화 작업'에 소극적이었다가
"아무래도 중국인들은
미덥지가 못해서.."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본격적으로 행해지게 되는데, (1941)
1942년 육군,
1943년 해군의 지원이 실시되게 되자
대만에서도
그 지원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 대만의 황민화정책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청년들이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신체를 손상해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식민지 청년들은
자청해서라도 군인이 되고 싶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빈곤했고
동등한 관계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
●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삼국동맹 (1940)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어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유럽에서 뜻밖의 소식이
들려 온다.
"뭐? 유럽에서 전쟁이 났다고?"
"글쎄? 좀 이상한데요."
상황은 이러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히틀러
"지난 달에 소련과
불가침 협정도 맺었겠다,"
히틀러
"이참에 눈엣가시 같은
폴란드를 접수해야지."
"그러면 영국과 프랑스에서
불만이 많을 것 같은데요?"
히틀러
"괜찮아. 오스트리아, 체코를 병합했을 때도
투덜대다가 말았다고."
하지만 이번엔 오산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히틀러
"뭐?"
다행히 그건 말뿐이었지만 말이다.
문자 그대로 '기묘한 전쟁'이었다.
해를 넘어 수개월이 지나고도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
히틀러
"칫, 겁쟁이들!"
오히려 이듬해,
독일의 침공으로
유럽 국가들은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4월 노르웨이, 덴마크 접수
5월 베네룩스 접수
6월 파리 함락
"뜨아! 마지노선이 무용지물 됐다!"
이때 독일의 '전격전'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진격적이란,
공군의 지원하에.."
"탱크를 앞세워
신속히 적진을 무너뜨리는 기동작전!"
"와!"
그러자 일본의 군부는
기겁을 하기 시작했고,
군부 내에서
'친독파'가 급격히 불어나게 된다.
"와! 히틀러 짱!"
"독일 정말 대단함."
그러면서도 일본 군부는
이런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가만,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는 다 어떻게 되는 거지?"
"독일이 몽땅 가져가겠지, 뭐."
"어? 그럼, 동남아 전체를
독일이 차지하는 건가?"
"헐!"
"앙대!"
"차라리 이참에 우리도
독일 편에 서서 전리품을 챙겨 먹는 게 어떻겠음?"
"음, 그게 좋겠어!"
그리하여 일본은 1940년 7월,
베를린으로 날아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유럽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차지하고
아시아는 일본이 차지한다."
"제3국(사실상 미국)과의 무력 충돌 발생 시
동맹국은 상호 군사적 원조를 한다."
"하하하"
● 인도차이나 진주, 그리고 미국의 경제봉쇄 (1940)
이후 일본은, 독일의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와 협정을 맺는다.
"우리가 인도차이나를
지켜주겠다능."
"지금 같이 어수선할 때
월남에서 독립운동이라도 일어나봐."
비시
"..."
"그러니 동맹국인 우리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군대를 보내주겠다 이거임."
비시
"..."
이런 논리로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사실상 차지하게 된다.
당시 영국은
인도차이나의 보급로를 통해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원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곳을 차지해
보급로를 끊고
중국을 고립시키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하하하.
드디어 영국 놈들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주는,
미국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미국
"아놔, 이것들이.."
미국
"중국도 모자라서
이제는 동남아까지 쳐묵어!"
(아껴 둔 내 밥인데..)
때문에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일 수출을 금지했고
미국
"앞으로 너희들한테는
철강, 설철(고철 부스러기)을 안 팔겠어."
일본은 미국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적극적인 수습에 나섰으니,
41년 4월,
미일 교섭이 벌어졌다.
미국
"우리와 다시 교역을 하고 싶으면
당장 중국에서 발을 떼라능."
일본
"뭐? 중국?
아니, 그건 너무 하잖아!"
미국
"싫으면 마!"
일본
"에잇!"
하지만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고,
결국 일본은 강경한 태도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말았다.
도조 히데키
"철병은 우리의 심장과도 같음.
이대로 철병을 하게 되면,"
도조 히데키
"지나사변(중일전쟁)의 성과를
우리 스스로 걷어차는 셈이 되고,"
도조 히데키
"그렇게 되면 만주국도 위험하고
조선 통치도 위험해진다능!"
● 소련을 쳐야 하나?
미국과의 협상이
결렬되자마자
일본은 남방 진출을 결심하고
소련에게 접근했다.
남방 진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쪽 전선의 안정이 필요했고,
또 중국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서라도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봉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41년 4월
일본과 소련은
상호 불가침을 약속하는,
'일소중립조약'을 조인한다.
일본
"이로써 독소불가침에 이어
일소중립조약도 체결."
일본
"하하하. 국민당 놈들
똥줄이 타겠구나."
일본
"이참에 너희도 추축국에 합세해서
4국 동맹을 맺지 그래?"
소련
"글쎄?"
당시 일본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가
뭐가 다른데?"
"전체주의는 위로부터의 통치지만
공산주의는 아래(노동자)로부터의 통치였으니깐."
"읭? 스탈린도 독재는 마찬가지잖아."
"그건 스탈린이
공산주의를 왜곡해서 그런 것임."
그러는 동안, 유럽의 정세는
커다란 전기를 맞고 있었다.
40년 8월부터 독일은
영국 본토 상륙을 위해 공습을 시도했지만,
영국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영국 공군의
격렬한 대응으로
독일 공군은
좀처럼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제해권은
애초에 독일이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영국 군함
히틀러
"아놔, 영국 상륙은 다 물 건너갔네."
그러자 히틀러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41년 6월부터
소련을 침공하게 된다. (바르바로사 작전)
일본
"읭? 독일, 갑자기 왜 저래?"
때문에 일본이 구상한
사국협상은 완전히 쪽이 났고,
대신 일본의 군부는
독소전이 유리한 방면으로 전개되면
언제든 소련을 침공할 수 있게금
만주에 대단위 병력(관동군)을 주둔시키게 된다.
▲ 관동군
● 석유봉쇄
독일의 소련 침공이 있은 후
미국은 일본에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미국
"미국 내 일본인의 자산을
모두 동결하고,"
미국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한다!"
일본
"뜨아!"
이러한 조치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석유의 80%를
미국에서 사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일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애써 대량의 석유를 비축해 오긴 했지만
수개월이 지나면
비축분은 모두 동이 나고
그렇게 되면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일본은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했다.
도조 히데키
"석유가 없는데
무슨 수로 전쟁을 한단 말인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의 석유를
우리가 차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지금 네덜란드는
우리의 동맹국인 독일에게 넘어간 상태가 아닙니까?"
도조 히데키
"음.."
▲ 동남아시아의 석유 생산지 : 인도네시아에 집중되어 있다
"또 석유 수송의 안전을 위해
적대국인 영국의 식민지도 우리가 접수해야만 합니다."
"특히 말레이 반도를 차지하면
군수품에 필요한 고무를 얻을 수 있게됩니다."
도조 히데키
"고무는 왜?"
"병사들의 군화, 판초우의, 텐트,
고무 보트 등을 만드는데 아주 요긴합니다."
도조 히데키
"그런데 영국을 치면
미국이 가만히 있을까?"
사실 그랬다. 미국의 뿌리는 유럽이고,
그중에서도 영국이었다.
미국 정부에서 아무리
중립을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유럽의 전쟁에
미국인들은 크게 동요를 할 수밖에 없었고
▲ 악당으로 묘사된 독일군
그것은 1차 세계대전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던 부분이기도 했다.
미국인
"헉! 고향의 부모님들은
모두 무사하실까?"
그러니 영국을 건드리면
미국은 결국 영국을 돕기 마련이다.
도조 히데키
"휴~ 미국이라.."
● 전쟁 결정
군부의 기나긴 회의와
4차례의 어전회의 끝에
41년 11월, 결국 일본은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 쇼와덴노(가운데)와 군인들
국력 면에서
압도적인 격차가 있는
미국을 건드린다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지 못한 처사였지만,
▲ 1941년 미국과 일본의 국력 비교
군부는 이런 이유를 들어
자신감을 내비쳤다.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47~48)
"우리는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모든 자원을 군비로 결집시킬 수 있지만,"
"미국은 다원주의 국가여서
응집력이 떨어지고.."
"전비를 쓰는 일 하나하나
의회를 거쳐 결정해야 하며,"
"예산의 한도 내에서
군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쇼와 덴노
"오!"
"우리가 초장에 밀어붙여
속전속결로 끝내면,"
"충분히 전쟁에서
승산이 있습니다."
쇼와 덴노
"스바라시!"
이때 결전에 앞서,
중요한 부분은 전쟁의 '대의 명분'이었다.
쇼와 덴노
"신민들이 감격해하고 분발할 수 있는
그런 대의 명분이 필요하지 않는가?"
도조 히데키
"맞습니다. 명분이 좋아야,
국력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효과가 큽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일본의 전쟁 명분이란, 이러했다.
정부
"미영에 의한 대일 포위망이 강화되어
제국의 존립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
"때문에 제국의 자존을 위해
우리는 일체의 장애를 깨부수기로 결심했다."
▲ 일본은 적개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귀신과 짐승같은 미국과 영국으로 불렀다
하지만 감격스러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곧 이런 명분도 보태졌다.
정부
"아시아를 백인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키기 위한,"
정부
"대동아 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쟁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읭?"
하지만 이런 명분은
기만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일본은
조선, 대만을 식민지로 삼고
만주를 꼭두각시로 삼고
중국을 침략하고 있으면서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의 독립 의지를 한창 꺾고 놓고 있었으면서
대동아를 구원하고 해방시키겠다고
말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또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를
의식할 수밖에 없어
백인과의 성전은,
이후 앵글로색슨족과의 성전으로 말이 바뀌게 된다.
● 전쟁의 발발, 남방 진출
어쨌든
미국과의 개전을 확정짓고
군부(대본영)는
다음과 같은 점령지 정책을 발표한다.
도조 히데키
"점령지를 차지하게 되면
군정(軍政)으로 통치하고,"
도조 히데키
"이후로는, 현지의 치안 유지와
전쟁 자원 획득에 치중할 것이며,"
도조 히데키
"파병된 군의 물자 공급은
전적으로 현지에서 조달하라능."
"헐! 현지 조달.."
도조 히데키
"또 원주민의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황국에 대한 신민 사상을 고취시키도록!"
그리고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
일본 육군은
영국령 말레이 반도에 상륙했다.
그리고 1시간 후
일본 해군은 진주만을 공습했다.
이어서 1942년 1월,
일본군은 필리핀을 삼켰다.
미국 식민지인 필리핀은
본토에서 동남아로 가는데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여간 걸리적거리는 게 아닐 수 없었고
이곳을 방치하면
미국이 군사적 거점으로 삼을 수 있었던 지라
무조건 초장에
접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2월에는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싱가포르는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3월에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섬들을 점령했다.
"와! 석유다!"
같은 시기에,
버마도 접수했다.
이곳에 영국이
중국으로 보급품을 조달하는
또 다른 보급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독립국이던 태국과는
동맹을 맺었다.
▲ 태국 전 총리(맨 좌측)와 도조 히데키 (앞줄 가운데)
도조 히데키
"태국의 독립을 보장해주겠으니,
일본군의 무상 주둔과 통행을 보장해주라능."
태국 총리
"알겠음."
그렇게 일본은 불과 4개월 만에
동남아 전역을 싹쓸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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