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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중세 유럽의 암흑기 : 하층민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7629241
중세 암흑기의 도래

● 중세 유럽은 과연 암흑기였나?

우리는 흔히 
중세유럽(5세기~15세기)의 1,000년 동안을 

발전은 없고 퇴보만 있었던 
'암흑기'로 판단한다.
 

막상 대중들에게 
떠올려지는 이미지도

마녀사냥, 포악한 기사들, 영주들의 초야권
이런 부풀려진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세 역사를 들여다보면
억울한 측면들이 있다.

아무리 고대 로마가 찬란했고,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시대가 화려했다 한들,

인류 문명이 1,000년의 세월 동안 
전혀 발전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나 될까?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후손들은 조상들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더 나은 물자를 만들어 살아가야 정상이다.

사실 우리 역사도 
아무리 '헬조선'을 강조하더라도

삼국→고려→조선전기→조선후기로 갈수록
야금야금 발전해온 게 사실이다.

게다가 유럽의 고대 문명도 
발달된 로마문명 + 낙후된 켈트·게르만·슬라브문명을 합산하여 평균내면,
▲ 고대 게르만족의 가옥

중세시대보다 
앞섰다고 보기도 힘들다.

"사실 게르만족이나 슬라브족 입장에서 보면
고대시대보다 중세시대가 훨씬 더 발전된 시대가 아님?"

하지만 그렇더라도 중세 유럽이
암흑기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이유는,

앞선 로마시대가 
워낙에 돋보였고 ☞참고
 

그런 수준을 
중세 후기에 가서야 

겨우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복구하는데 걸린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 게르만족의 정착과 달라진 점

5세기 후반의 유럽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게르만족들이 쇠락한 로마제국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유린하고 있었던지라

로마제국 전역은 기근+전염병+약탈+전쟁 등이
끊일 날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한탄했다.

 
"오늘 봤던 사람 중 절반이 내일 죽어 있었고,
시체는 다 묻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제국이 멸망하자,

게르만족들은 대거 
로마 제국 내부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희한하게도 모든 도시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듯, 
동시다발적으로 크게 쇠락하고 활기를 잃고 만다.
 

가장 큰 이유는 게르만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다.

도시의 관리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문명의 이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도무지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의시설의 규모는 대폭 줄어들고,
삶의 질도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 문명의 빛나는 산물이었던
하수도 시설은 곧 마비가 되어

하수처리가 
당최 되지 않았고
 

상수도관은 파괴돼
사람들은 우물을 파서 살아갔다.
 

가옥들도 점점 초라해져서
사람들은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게다가 게르만족들은
로마 건축물들을 닥치는대로 부쉈다.

집을 짓기 위한 
건축 자료를 얻고자 했음이다.
 

오늘날의 예로 들자면,
동네에 조그만 빌라 한동을 짓겠다고

코엑스몰이나 
63빌딩을 부수는 것과도 같았다.

급기야 게르만족들은 
콜로세움마저 

건축 자재를 얻겠다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중엔 콜로세움을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했다.

 
"생긴게 
딱 쓰레기 버리면 좋게 만들어졌네."

그리고 비바람을 피하겠다고
부랑자들이 난립하였으니,

곧 콜로세움은
거지들의 집단 소굴로 전락했고
▲ 폐허가 된 콜로세움

잡초를 뜯어먹겠다고
소들이 난립을 하게되었으니,

화려했던 콜로세움은 
그야말로 거대한 흉물 덩어리로 변색되어

더 이상 로마 제국의 위세를 
찾을 길이 없게된다.
 

로마가 망하고 
불과 수십 년만의 일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의 삶을 빛내줬던
첨단기술, 교육, 의료, 무역과 같은 것들도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었다.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중세 유럽인들의 의식주

● 중세 유럽인들의 주거지

중세 초기에 
건물들은 매우 단순했다.

게르만족들이 살았던 허스름한 오두막집을
로마제국 내에서도 답습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옥의 기둥들은
썩기 쉬운 목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수명이 
50여 년 정도로 길지 못했다.

건물에는 창문이 부족했기 때문에
환기가 좋지 않았는데

그런 집에서 인간과 가축이 
함께 기거했다.

 

당시만 해도 인간과 가축의 공간은 
따로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은 곧 축사 겸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중세 후기가 되면
건축술이 보강되어

사람들은 로마시대처럼
복층 가옥에서 살아가게 된다.
 

물론 이런 모습은 로마시대의 유산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공부 좀 해봤는데,
로마시대 사람들은 집을 이렇게 만들고 살았다더라."
 
다만 당시의 건축물은 
철저히 영주들에 의해 터치를 받았기 때문에

집에다 창문을 내고, 문짝을 내고
화로를 두고, 우물을 파는 것 조차도

모두가 일일이 
세금의 대상이 되었다.


● 중세 유럽인들의 의복
 
중세 초기만 해도 귀족, 성직자, 농민의 복장은
크게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옷은 신분을 나타나게 되어
 
귀족의 옷들은 
점점 더 화려해져갔으나,

농민의 복장은 
시종일관 남루한 상태로 남게 된다.
  

농민들의 복장은 
크게 튜닉, 바지, 망토로 구분된다.
 

재밌는 것은 
켈트, 게르만, 슬라브족 등

당시 모든 유럽의 평민들이 
이런 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튜닉 : 양털이나 마섬유로 만든 중세시대 특유의 웃도리
 

바지 : 바지에는 벨트를 맸다.
 

망토 : 짐승의 털이나 가죽으로 만들어 보온성이 높았다.
 

여성의 옷은 
대략 이러했다.
 
튜닉 : 남성의 튜닉보다 조금 더 길다.
 

원피스 : 통이 넓고, 발목을 덮게 입었다.

당시에는 여성의 발목 노출을 
터부시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발목 노출을 
오늘날 알몸 노출 정도로 야하게 생각했다.

망토 : 남성의 것과 비슷
 

성직자들의 옷은 
초기에는 농민과 비슷했지만

점차 교회가 
재산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서
 
일반인들과는 
복장이 구분이 되어지는데
 
수도사들은 긴 튜닉을 입었고,
발목을 덮는 긴 망토를 입어
 

스스로 육체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과시하고자 했다.
 
물론 이런 허세는 
동서양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증표로
동양에서 손톱을 길렀다면
 
▲ 손톱을 길렀던 풍습은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도 있었다.

서양에서는 거추장한 긴옷을 입어가며
'비노동 신분'임을 한껏 과시했기 때문이다.
 

한편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면서
유럽인들은 자신들보다 발달된 문물을 가졌던

아랍과 비잔틴인들과 
접촉을 하게되는데,
 
덕분에 이후의 귀족들의 복장은
더욱 화려해진다.

 
"봤능가? 
이게 바로 비단이라는 거임."
 
하지만 여전히 농민들의 대부분은
회색이나 어두운 색상만 입어야 했다.

 
"감히 농노 주제에 
화려한 색깔 옷을 입어?"

심지어 귀족들은 
의복에 관한 법까지 제정하면서

철저히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고자 했다.


● 중세 유럽인들의 식생활 : 초기의 주식
 
중세 초기에는 목축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게르만의 전통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유럽은 
반농반목의 경제였고,

가장 선호하며 
기르던 가축은 돼지였다.
 

특히 돼지는 성장속도가 빠르고 
잡식성이어서 키우기 쉬웠기 때문에

주로 숲에다 풀어놓고 
방목하곤 했다.

반면에 소고기는 그닥 선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돼지고기가 더 맛있거든."

즉 조선시대처럼 농사를 위해서 
소고기를 금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중세 초기만 해도
유럽인들은 고기를 많이 먹었다.
 
곡물은 전체 칼로리의 
50% 정도만 차지했고,

나머지 50%를 
육류가 차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게르만인들의 정착생활이 안정화 되자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중세 초기 1,500만명에 불과했던 
서유럽의 인구가

중세 후기가 되면 4,500만명으로 
약 3배 증가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전처럼 고기에 집착할 수 없었다.

 
"땅은 부족하지, 인구는 늘어나지..
더 이상 가축을 기르는 것은 무리야."
 
실제로 가축을 길러 
인구 1명을 부양할 땅에

곡식을 심게 되면 
인구 6~7명을 부양할 수가 있다. 
 

때문에 방목지로 이용되던 땅이
점차 농경지로 전용이 되었고,

중세 후기가 되면
가축의 수가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이후로 중세 유럽인들은 
고기 대신에 곡식과 채소를 주로 먹게 된다.
 

● 중세 유럽인들의 식생활 : 빵과 죽

그렇다면 중세 시대 유럽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곡물을 섭취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빵!
 

그런데
아니다.
 
물론 로마시대부터 
시민들은 빵을 즐겨먹었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유명한 '빵과 서커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 로마시대 빵 (무료 배급)

하지만 중세 초기만해도
평민들에게 빵은 언감생심이었다.

빵을 먹으려면
밀가루를 빻을 수 있는 장비며, 
▲ 중세시대 제분소

빵을 구을 수 있는 
화덕이 필요한데,

제분소와 화덕은
영주나 교회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농노 
"제분소나 화덕은 
개인이 장만하기에 무리야."
 
때문에 중세 초기만 해도
농민들은 귀리와 수수로 만든 죽을 먹었고
 
▲ 귀리죽

빵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들만이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중세 후기가 되면
마을마다 방앗간과 공용 화덕(오븐)이 마련되어

평민들도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다만 마을의 방앗간과 화덕은 
철저히 영주들이 소유권을 독점하였으니,

 영주
"세상에 공짜 없는거 알지?"

 영주
"방앗간 이용료, 화덕 이용료 
모두 꼬박꼬박 내고 사용하라고."

만들어 먹더라도
세금은 내고 먹어야 했다.

게다가 그러한 빵 조차도
귀족과 성직자들은 철저히 차별을 두어
 
 
귀족과 성직자들의 빵은 
밀과 호밀로 만들었지만

농민들의 빵은 
귀리나 보리로 만들어야 했다.
 

● 중세 유럽인들의 식생활 : 고기와 채소

중세 후기로 갈수록 
육류의 섭취가 줄어들었다지만

돼지고기와 
닭고기의 인기는 높았다.
 
다만 말고기를 먹는 것은 금기시되어
기근이 들 때에만 특별히 잡아먹도록 하였다.

 농노 
"타고다니는 말은 
함부러 잡아먹어서는 안 됨."

쌀 문화권에서 농사를 짓기위해
소고기를 금기시하고

중동에서는 물을 아끼기 위해
돼지고기를 금기시했던 것처럼

유럽에서도 경제적인 이유로
말고기를 금기시했던 것이다.
 
특이한 것은 사냥이나 낚시도
모두 금기시 되었다는 점이다.
▲ 중세시대 사냥은 귀족들의 특권이었다.

왜냐하면? 날짐승과 생선 또한 
모두 영주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우유를 마시는 것이
평민들에게도 허용이 됐지만
 

버터는 중세 중기까지만 해도
오직 귀족들만이 먹을 수 있는 식품이었다.
 

 
"아놔, 왜 자꾸 
치사하게 먹는걸로 갈구는거임?"
 
한편 중세 후기가 되면 
곡물과 더불어 야채도 많이 먹게 되는데,
 
특히 순무와 양배추가 
선호되었다.
 
▲ 순무

그런데 이 중에 순무는 
하층민들이 주로 즐겨먹었기 때문에

당시에 순무는, 
하층민들을 부르는 별칭이기도 했다.

 
"어이, 순무!"
 
그밖에 과일로는 
사과, 배, 자두, 체리가 있었다.
▲ 과일은 주로 귀족층이, 뿌리채소는 하층민이 즐겼다.


● 중세 유럽인들의 식생활 : 술
 
평민들은 벌꿀 술을 즐겨마셨지만
이것 또한 만들어 마시려면, 세금을 내야만 했다.
 

반면에 귀족들은 
맥주를 즐겼다.
 

참고로 중세시대 귀족들은
일체 세금을 내는 일이 없었다.

조선시대 양반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오직 전쟁 목적으로 세금을 걷는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

또 마을의 교회에는 공동의 발효장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에서 포도주를 만들었다.
 

쉽게 말해 
교회가 양조장을 겸업한 셈이다.

다만 중세 초기에 포도주는
오직 귀족과 성직자들만이 마실 수 있었지만
 

중세 후기부터는
평민들도 포도주를 마실 수게 된다.

물론 세금을 내고 
마셔야 했지만..

이렇듯 중세시대에는
먹을 것 하나하나에도 철저히 신분차별을 실행했다.



중세 유럽의 장원경제

● 농업기술의 개선 : 철제 농기구
 
중세 시대 농업기술은 
완만하지만 꾸준히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
철제 농기구가 널리 보급된다.

중세 초기까지만해도 유럽인들은 
나무로 만든 쟁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 나무 쟁기

그 생산력이란 
대단히 조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차츰 
야금술이 전파되어

농기구들은, 목재나 석기에서 
차츰 철제로 바뀌게 된다.

특히 철로 만든 쟁기는
흙을 더 깊게 팔 수 있었고
 

도끼와 칼이 보급되어
숲이 대거 개간되게 된다.
 

때문에 로마시대 
울창한 삼림지대였던

오늘날 독일 지역은 
이 시기 대대적으로 개간이 되게 된다.

한편 중세 후기가 되면
땅을 긁기만 하는 갈퀴 쟁기에서

땅을 깊게 갈아 엎을 수 있는
쟁기날이 등장하게 되어,
 

농업생산력은 
더욱 더 향상되게 된다.

참고로 깊이 갈이를 하면서
중세 유럽의 생산성은 이렇게 변한다.

초기에는 소맥 한 알을 뿌리면
보통 3~4알을 수확했다.
 

하지만 중세 후기에는 소맥 한 알이면, 
보통 6~8알의 곡식을 수확하게 되었다.


● 농업기술의 개선 : 가축의 이용

쟁기가 발전했다지만
하루 종일 쟁기질만 하다보면 허리가 휜다.

 농노 
"젊어 노가다는 
늙어 신경통이여."

이런 고민은 가축을 사용하면서
그 해결책을 찾게 된다.
 

그리고 가축을 사용하면서
중형 쟁기가 등장하게 된다.

 농노 
"가축으로 하는 건데, 
쟁기 크기도 커져야지."

여기에 중세 유럽인들은
보다 창의적인 것을 만들게 되었으니,

바로 중형 쟁기에 
바퀴를 단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 많은 가축들이 

쟁기를 끌 수 있기에
땅을 보다 깊게 갈아엎을 수가 있었다.

이런 바퀴 쟁기가 등장한 것은 
중세 후기의 일이었다.

이리고 
그 효과은 엄청났다.

 농노 
"세상에 땅만 깊게 파헤쳤을 뿐인데
수확량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하지만 
뜻밖에 문제가 발생했다.
 

바퀴 쟁기는 장비가 거창했기 때문에
보통 쟁기들보다 훨씬 무거웠다.

 농노1 
"할 때는 좋았는데, 
이거 끌었던 가축들이 죄 다 골병들었어."

 농노2 
"말도 말게. 내 말은 혈액순환이 안 돼서
지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네."

당시 유럽인들은
가축의 목에다 '마구'를 걸쳤다.
 

그러다보니, 가축의 힘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고
가축에게도 신체적으로 부담이 많이 갔다.

그랬었는데, 중세 말기에 
매우 효율적인 '마구'가 고안된다.

 농노1 
"이게 바로 
새로나온 가슴받이라는 거임."

 

 농노2
"가슴받이?"

 농노1 
"이걸 사용하면, 
가축의 힘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니깐."

 농노1 
"그리고 피가 안통하는 문제도 없어지지."

 농노2
"오호라!"

 

이후로 
가슴받이 형태의 마구는

근대 시대 유럽의 짐마차를 끄는데도 
널리 활용이 되게 된다.
 
단순한 발명 같아도
이로인해 향후 유럽 사회가 얻게된

경제적 풍요와 편리를 생각해보면,
결코 쉽게 지나치고 갈 수 없는 부분이다.


● 장원 경제의 핵심 : 삼포제

중세 후기가 되면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덩달아 땅이 모자르게 됐다.

그래서 가축을 없애고 
방목지를 농경지로 바꾸게 되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밭에 뿌릴 비료가 없어지게 되었다.

 농노
"아놔, 가축을 다 없애버렸으니
똥을 어디서 구함?"

물론 중세 유럽인들도 
인분을 비료로 사용할 줄 알았다.

다만 중세 유럽에는 
동양처럼 전문적으로 인분을 모아두는
 
화장실이란게 
없었으므로,

가축이 없어지자
'비료 대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영주
"이를 어쩐담.
어디 해결책 없음?"

 참모
"어쩔 수 없슴돠.
주기적으로 땅을 묵혀둘 수 밖에요."

 영주
"휴경을 하자는 얘기군."

 영주
"그런데 그거 하다보면
어느 땅을 쉬고," 

 영주
"어느 땅을 농사를 짓고 하는 것이
너무 혼란스러워 지지 않음?"

 참모
"아예 영지 내의 모든 땅을 
몇개의 커다란 구역으로 나눠,"

 참모
"이번엔 이 땅을 쉬고, 저 땅을 경작한다는 식으로
법을 정하면 될 겁니다."

 영주
"듣고 보니 일리있네.
그러면 어떻게 나누면 좋겠나?"

 참모
"3개로 쪼개심이."

 영주
"어떻게?"

 참모
"춘경지, 추경지, 휴한지"

 영주
"아놔, 이거 세계사 시간에 배웠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함 설명해봐."

 참모
"아래 표를 보십시오."

 

 참모
"이렇게 하면 한 구역은 1년 반마다
한 번씩 쉬면 됩니다."

 영주
"이거 굉장히 알뜰한 방법일세."

그리하여 중세 후기의 장원에서는
'삼포제'가 실시되게 된다.
 

다만 이를 엄격하게 실시하려면
농민들이 제대로 따라줘야만 했다.

따라서 영주들은 
중간 관리급인 공무원(office-holder)의 권한을 대폭 높여준다.

 영주
"앞으로 니들이 알아서 잘 관리하라고."

 공무원 
"넵!"

한편 당시 
장원의 농민들은 

집 앞에 조그만 마당을
사적으로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이런 곳에는 예외없이 텃밭이 일궈져서
농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채소를 재배하고 있었다.


● 중세 유럽의 장원 구조

중세 유럽의 장원은 
그야말로 영주의 1인지배 체제였기 때문에

장원은 마치 하나의 조그만 
독립된 나라와도 같았다.
 

영주들은 기본적으로 
이웃한 장원들과의 교류를 싫어했는데, 이유는 이랬다.

 영주
"교역? 미쳤어?

 영주
"우리 지방 특산물로 
경쟁자들을 부유하게 해주는 멍청한 짓이야."

때문에 중세시대 장원은 
매우 폐쇄적었고,

행여 교역이 이뤄지더라도 
엄청난 통관세를 받아 먹었기 때문에

결코 쉽게 교역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장원에서 영주는 
사법권, 행정권, 입법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조선시대 악명높은 고을 사또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게, 중세 유럽의 영주였다.
 

마을 공동체의 모든 재산은 
곧 영주의 재산이기도 했다.

영주는 수하에 
기사 계급을 두어

농민들에게 무력을 휘두르는 등,
매우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그리고 자신의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성벽을 치거나 해자를 파놓는 식으로 신변을 보호했다.

한편 장원 내에서 
영주 다음으로 권세를 누리던 계층이 있었으니

바로 
성직자들이었는데,
 

성직자들의 교회는 
흔히 요새화되어

유사시 거주민들의 
보호소로 제공되기도 했다.


● 장원의 수탈 : 영주와 공무원

장원의 생활은 영주들의 취향에 따라
사는 수준이 천차 만별이어서

어떤 곳에서는 
마을의 결혼이나 집짓는 일까지도

영주의 터치를 
받아야만 했지만

어떤 곳에서는 그저 농사일만 협조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곳도 있었다.

장원에는, 흔히 영주를 보좌하는 
'공무원(office-holder)'라는 중간계층이 있었는데

 공무원

이들은 원래 마을회의를 거쳐 
농민들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지만,

영주가 동의하고 임명해야만 
역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영주의 
끄나풀과도 같았다.
 

마을은 이들 공무원들에 의해
세부 방침이 내려지고 감시활동이 이뤄졌으니,

조선시대로 치면 
마치 '아전'과 같은 신분이라고나 할까?

한편 장원에서 농민은
크게 3가지 의무를 부담해야 했다.

바로 토지에 대한 조세, 
인신에 대한 부역과 군역이 그것이다.

"어라? 동양과 같잖아?"

맞다. 원래 농경사회의 세금이라는게
모두 거기서 거기인지라..

다만 장원에서는 이외에도 
여러가지 잡다한 세금들이 있었는데,
 

동양에는 없었던 상속세, 
결혼세가 그 대표적이다.

여기에 어이가 없는 세금으로 
'장례세'가 있었는데

이는 가장이 죽었을 때 
영주가 돈을 떼가고, 

교회에서는 
가축을 한 마리 가져갔던 세금이었다.

조의금을 주지 못할 망정
사람이 죽으면 오히려 재산을 떼어갔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세금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세금은 
오직 농민들에게만 부과되었고

귀족들이나 성직자들은 
제외되었다.

참고로 당시 농민들은 
수확량의 1/3을 영주에게 세금으로 뜯겼고,

또 남은 2/3의 수확물 중 
10%는 십일조 명목으로 성직자들에게 뜯겼으니,

사실상 수확량 중 
60%만 챙길 수 있었다.
 

때문에 농민들은 
항상 기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중세 유럽의 사회 모습

● 결혼 풍습 : 결혼세와 지참금

중세 초기만 해도
게르만 풍습에 의해 결혼이 자유롭게 이뤄졌다.

"우리는 연애결혼이든, 중매결혼이든 
모두 다 인정!"

"조선보다 낫네."

"다만 신부의 결혼 지참금은 필수!"

"읭?"

그리고 이러한 결혼 지참금 풍습은
중세 말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남의 식솔 하나 책임져주는건데
당연히 대가는 받아야지."

하지만 중세 후기가 되면서 
결혼식을 전적으로 교회가 주관하게 되었다.

"세금을 뜯어먹으려는 수작이었지."

그간 교회가 결혼식을 주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따라서 교회 밖에서 한 결혼은
세금을 내지 않았으니, 모두 무효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수도사 
"누구 맘대로 
세금도 안 내고 결혼을 함?"

그런데 당시의 결혼은
남녀 서로의 형편이 비슷해야만 이뤄질 수 있었다.

특히 남녀 집안 사이에는 
비슷한 수준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이 강했기 때문에
결혼에서는 지참금의 액수가 상당히 중요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농민들은 
웬만해서는 결혼을 하기가 힘들었다.

 농노 
"집안 형편이 가난한데, 
수준이 맞는 상대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농노 
"결혼하면, 교회와 영주한테 내는 
세금은 또 어떻게 감당함?"

한편 많은 영주들이
농민들의 결혼에 일일이 간섭했으니,

 영주
"다른 마을의 외부인과 
결혼을 해서는 안됨!"

세금에 눈이 먼 영주들은
노총각들을 강제로 결혼 시키기도 했다.

 영주
"아직 결혼을 못 했으면, 
내가 일러주는대로 상대랑 결혼을 하도록!"


● 결혼 풍습 : 초야권의 오해

중세 유럽과 관련해서, 잘못 알려진 사실인데,
여전히 나돌고 있는 얘기가 하나 있다.

바로 
중세 유럽의 '초야권'이다.

"아, 글쎄.. 중세 유럽
에서는 신부가 결혼을 하면.."

"첫날밤을 남편과 치르는게 아니라,
영주랑 먼저 치르도록 했다는 거야."

이것이 흔히 알려진 
초야권의 실체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일은 없었다.

사실 초야권이라는 말은 
'결혼세'라는 세금 때문에 빚어진 오해다.

가령 한 농민 부부가 
결혼을 했다.

 공무원
"너님들 결혼했으면 교회랑 영주님한테
결혼했다는 세금을 내야할꺼 아니냐."

 농노 
"돈 없는데요."

 공무원
"그럼 뭐라도 대신 바쳐봐."

 농노 
"그렇다면 제 아내라도.."

이런 괴담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유럽의 초야권인 것이다.

그렇다면 초야권은 
정말로 역사적으로 없었나?

아니다. 사실 초야권은 원나라에서 몽골족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남송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일부 행해지기도 했던 관습이었다.

 
"한족 넘들 너무 인구가 많아.
이 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찌 감당히겠음?"

 
"그래서 한족끼리는 서로 뭉쳐있지 말고,
부엌칼은 10가구 당 한개씩만 가지고 있도록 하지 않았음?"

"그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도
허락받고 하라고 했지."

"그런데도 불안해."

"그럼 아예 
혈통을 바꿔보는게 어떠함?"

"어떻게?"

"몽골 씨를 퍼뜨리는거지."

"오호라!"

이런 식으로 원나라 때 초야권이
일부 행해지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

농민들의 특별한 경조사가 있는 경우,
영주가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오히려 혜택을 베풀었던 때는
오직 아이를 출산한 경우였다.
 

 영주
"마을의 인구가 늘어야
장원 경제도 좋아지고 하는 거지."

때문에 임신한 여자에게는 
여러가지 특권이 부여됐는데, 

대표적으로 
이런 게 있었다.

 공무원
"마을의 임신한 여자들이 원하면
어디서든 과일을 따먹을 수 있도록 허락함세."

 공무원
"출산한 가정은 
이번 해에 세금 감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이고,
중세시대 여성의 지위는 대체로 낮았다.

여자들은 흔히 
죽을 때까지 

남편의 보호를 받아야 했고,
남편을 주인처럼 섬겨야 했다.

또 남편은 아내를 
처벌할 권리까지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중세 농민 여성들의 대부분은
친정 집안의 양식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가급적 일찍 
결혼해야만 했고,

남편의 배려와 협조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을 출산해야만 했다.
 

하지만 열악한 
위생상태와 영양부족으로 

출산한 아이들 중에 
2/3는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었으며,

산모 또한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결혼한 여성들의 평균 수명은 
기껏해야 30대 중반에 머물렀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생물학적인 필요뿐 아니라 
경제적인 필요 때문이라도

배우자가 죽으면 
곧 재혼을 해야했다.


● 장원의 해체 : Go East!

중세 후기가 되면,
수세기 동안 유럽인들을 괴롭혀왔던, 

아시아의 유목 민족의 침공이 
급격히 사그라들게 된다.

그러자 중부유럽에 살던 게르만인들이
동쪽으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 사연은 
이렇다. 

 농노1 
"허구한날 영주가 괴롭히지, 
농사 지을 땅도 좁지.."

 농노1 
"어휴, 세상 살기 정말 힘들어."

 농노2
"소문들었는가? 
지금 동쪽 땅이 텅텅 비었다던데."

 농노1 
"어? 그 많던 아바르족이랑 
마자르족들은 다 어디 가고?"

 농노2
"아바르족은 비잔틴한테 쳐맞고 버로우타고
마자르족은 조용히 살고 싶다고 짱박혔어."

 농노1 
"그럼, 지금 동쪽 땅으로 
이사 가면 편히 살 수가 있는거임?"

 농노2
"당연하지!"

이런 풍문을 듣고 게르만족들이
대거 동유럽으로 이사를 갔으니,

동유럽의 체코, 폴란드 일대에는
거대한 게르만족 정착지가 생겨나게 된다.

 농노1 
"세금도 없지, 강제징용도 없지, 땅은 넓지.. 
이게 바로 지상낙원이 아닌가!"

그러자 소문을 듣고 더 많은 게르만족들이
동유럽으로 러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장원으로서는 
소중한 노동력의 유출이었기에

영주들은 이런 사실에 
안절부절을 못했다.

 영주
"아놔, 앞으로 이사가지 못하게
이주세를 왕창 올리도록 해!"


● 장원의 해체 : 흑사병

14세기가 되면, 장원 경제를 괴롭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터진다.

바로 
흑사병이었다.

이 흑사병으로 당시 유럽은 
유례없는 대재앙을 겪게 되면서

전 인구의 1/3을 
3년 사이에 몽땅 잃고 만다.

그러자 유럽의 장원들이 
텅텅 비게 되었고,

농업생산력이 급감하여 
영주들의 수입이 크게 떨어지면서

재정 상태가 
급격도로 악화되게 된다.

하지만 이럴 때 
영주들은 판단 미스를 하고 만다.

 영주
"요즘 돈이 궁하다능. 어쩔 수 없음.
세금을 팍팍 올리는 수밖에."

그러나 농민들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었고

 농노
"에잇, 더러워서 못 살겠네.
동쪽 땅으로 도망가던지 해야지."

또 다시 이탈 주민들이 
대거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먼저 무릎을 꿇은 쪽은 영주였다.

 영주
"미안하다능.
앞으로 잘 해줄게. 제발 돌아와."

그리하여 흑사병이 쓸고간 유럽의 장원에서는
오히려 세금은 줄어들고

농민들은 인구 감소 덕분에 
보다 넓은 땅에서 경작하게 되었고
 

중세 말기가 되면 농민들은, 
이전보다 훨씬 넉넉한 생활 속에서

잉여생산물을 판매하는 등
부를 쌓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면서 농민의 지위는 상승하게 되었고,
곧 장원의 경제는 무너지고 만다.


● 배고픔과 질병

중세 유럽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고

소수의 귀족을 위해, 다수의 농민들이 헌신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였다.
 

따라서 다수의 농민들에게
배고픔은 일상적인 고충이었다.

이럴 때 농민들은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빵을 만들 때 불순물들을 넣어
허기를 달래는가 하면 
(덕분에 농민의 빵은 까만색이 많았다.)
 

귀족들이 내다버린 썩은 고기도 
주저없이 먹었다.

한편 장원의 지배자들은 
농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양귀비빵을 권장하기도 했는데, 
이게 나름 효과가 좋았다.

 영주
"빵에다가 양귀비를 넣어서 먹어봐.
그럼 그까이꺼 배고픔.." 
 
이런 '뽕맛'을 통한 배고픔의 극복은,
어린 아이에게도 적용됐으니..

 영주
"아이가 배고파서 잠을 못자면
양귀비 가루를 먹여봐. 그럼 그까이꺼 배고픔.." 

하지만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일부러 병에 걸려 
죽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자살을 터부시 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굶어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일부러 아이를 죽이는 부모들도 있었다.

한편 전염병의 문제도 
매우 심각했다.
 

사실 당시의 전염병은 
질병 자체로 인한 것보다 

전염병의 공포로 인한 
희생이 더 컸다고도 볼 수 있는데..

만약 전염병이 마을에 퍼지면
마을에선 이단심판이 행해졌고,

사람들은 마녀사냥을 통해 
희생양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중세시대 말기에 시작되어 근대시기에 기승을 부린다)

 
"저 여자가 평소 그렇게도 품행이 음흉하더니
알고보니 마녀였다네."

"마을의 전염병도 
다 저 마녀의 소행이라며.."

이렇게 말도 안되는 논리로
엉뚱한 사람들이 마구 희생됐다.
 

그런가 하면 이웃마을에서 
전염병이 돈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마을의 거지와 유랑민들이 
가치없이 마을 밖으로 추방되곤 했고

이 과정에서 애꿎은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 되기도 했다.

"마을에 사악한 전염병을 퍼뜨리는
이방인들을 처단하세!"

한편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미신에 집착하기도 하였다.

 
"이 보석을 목에 걸고 있으면
전염병을 막아준다네."

특이한 것은, 
기생충(특히 회충)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몸 속의 적절한 기생충은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아지기 전까지는
좀처럼 치료를 하려하지 않았다.

"사람 몸 속에는 
누구나 기생충이 있어."

그러면서도 심각한 병에 걸리면 
몸 속의 기생충 때문에 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기생충은 본시 
악마가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온 것임."

"그런데 이 기생충이 지나치게 성장하면,
사람이 질병에 걸리거든."

"그럼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데?"

"굶어!"

"읭?"

"사람 몸에서 더 이상 먹을 게 안 나와야
악마인 기생충이 몸 속에서 떠나가는 거임."

때문에 당시에는 병에 걸리면
무턱대고 쫄쫄 굶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고 문헌 : 노예, 전쟁 등으로 읽는 세계사 (고지기),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페르디난트 자입트), HC 중세암흑시대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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