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List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한중일 궁중생활사 : 궁녀들의 생활 비교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0767575
 

● 어떻게 궁녀가 됐나?

조선 
궁녀가 되고자 지원했던 사람들은
주로 10살 전후의 공노비 출신의 딸들이 많았지만 
간혹 양민이나 사노비 딸들도 있었다.

다만 노비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예의 모습은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총인구의 절반이 노비였고, 그 중에 공노비는 대우가 괜찮은 편이었다.
공노비 중에는 서당 훈장, 관청 서리, 예술인 등의 활동을 하던 이들도 많았다. ☞ 참고

궁녀가 되고자 집을 떠난 딸들은  
보통 요강, 수저, 무명이불이 든 보따리를 싸가지고 궁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조선시대 궁에는 따로 화장실이 없었다. 화장실이 만들어진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궁녀가 되기 위해 입궁을 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앵무새 처녀 감별법이었다. (사극에서도 많이 보여준 장면이다)
 

앵무새의 피를 팔뚝에 떨어트려서
흘러내리지 않으면 처녀,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해
다시 본가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중국
명나라는 환관이 직접 매년 2월경
10살 전후의 양민의 딸들을 대상으로 궁녀를 뽑았다.

이때 몸에서 냄새가 나거나 건강이 좋지 않으면 탈락했고
또 너무 예뻐서도 안 됐다고 한다.
황제의 후궁이 될까봐 그랬다는데..
 

일본
에도시대의 일본도 마찬가지로 
10살 전후의 딸들을 대상으로 여관(女官)을 뽑았다.

그런데 일본의 여관은 철저히 출신 성분에 따라 그 지위가 구분됐다.
 

무사나 관리의 딸들은 
처음부터 중급 여관으로 시작해서 상급 여관이 될 수 있었지만
평민들의 딸은 평생 하급 여관으로 궁에서 허드렛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평민의 딸들이 무사나 관리의 양녀로 들어가
중급 여관에 지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 궁녀의 선발과 배치

조선 
조선의 궁궐은 대전(왕), 중궁전(왕비), 대비전(대비), 동궁전(세자) 등으로 나눠져 있어서
왕족들은 각자의 처소에서 철저히 독립된 생활을 했다.
 

각 처소에 필요한 궁녀들은 개별적으로 배치되었다.
왕족들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궁녀를 역할과 종류를 파악해서 조달했다.

왕실의 가족 수에 따라 궁녀들의 수는 들쑥날쑥 했지만
대채로 대전, 중궁전, 대비전에는 각각 100명씩
세자궁에는 60명, 세자빈궁 40명, 세손궁 50명, 세손빈궁 30명 선으로
총 500명 정도의 궁녀가 있었다고 한다.
 

궁녀는 자신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처소의 주인을 상전으로 모시게 되는데
대전의 궁녀는 죽을 때까지 왕을 위해서만 살아야 했고
중궁전의 궁녀가 되면 왕비를 위해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제아무리 임금이라고 해도 다른 처소의 궁녀에 대해서는 관여를 할 수 없었다.

중국
명나라 궁녀는 한번 궁에 발을 들여 놓으면 죽을 때까지 있어야 했다.
이는 역대 중국 왕조의 전통이었다. (조선도 그걸 따라했고)

하지만 청나라 황제는 궁녀들이 불쌍하다고 해서
13세에서 25세까지고 그 나이를 제한했다.
25세가 되면 각자 출궁을 하여 결혼하고 살라는 뜻이었다.

때문에 명나라 때의 궁녀는 총 9천명 정도로 상당했지만
청나라 때는 그 수가 500~600명 정도로 줄어든다.

또 청나라 황제들은 자신의 처소에는 궁녀를 들이지 않고
오직 황후와 비빈들의 시중만을 들게 했다.

장기간 궁에 있어야 했던 명나라 궁녀들 사이에는 엄격한 계급이 있었지만
청나라에는 계급은 없고 
그저 젊은 궁녀와 늙은 궁녀로 나눠질 뿐이었다.

이러한 청나라의 궁녀제도는 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던 특이한 제도였다. 

일본
에도막부에서는 쇼군이 정무를 보는 공간과 
개인생활을 하는 공간이 확연히 분리되어 있었다.

정무를 보는 공간에는 여자들이 드나들 수 없었다.
반면 쇼군이 개인 생활을 하는 '오오쿠'에는 남자들의 출입이 제한됐다. ☞ 참고

바로 이러한 오오쿠에서 여관(女官)들은
쇼군과 쇼군의 가족을 보필했던 것이다.
 

여관들은 상급, 중급, 하급으로 구분되어 
총 1000명 이상이 근무를 했는데 
(사실상 하급 여관은 조선으로 치면 궁녀가 아닌 '무수리' 수준이었다)

상급 여관에는 모든 여관을 관리하고 통솔하는 5~6명의 '오토시요리'가 있었고
 

중급 여관은 오오쿠 밖의 일을 관리하거나
쇼군과 정실 부인의 오락을 담당하는 일을 했다.
 

하급여관은 밥을 짓거나 물을 퍼어고 빨래를 하는 허드렛일로
아침부터 밤까지 힘든 일만을 했다.
 
거기에 밤에는 화재 감시까지 했다. (당시 에도성에는 화재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 궁녀들의 교육

조선
조선의 궁녀 선발은 10년마다 한번씩 하는게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각 처소에서 필요한 인원을 그때마다 충원해서 충당하는 형식이었다.

이럴 경우 대부분 친척 궁녀의 소개로 들어오기 때문에
소개한 친척들의 일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궁녀인 생각시들은 선배 궁녀들이 하는 일을 
어깨 너머로 배우는 도제식 교육이나 현장실습을 하면서 업무를 익혔다.
(이러한 도제식 교육은 중국,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시 시절에는 업무 뿐만 아니라 
한글은 물론 소학, 삼강행실도 등 기본적인 학문을 익혀야 했고 규율이 엄격했다.
(이렇게 궁녀에게 학문을 수양하게 했던 것은 조선 궁녀만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특히 왕과 왕비를 모시는 궁녀는 방귀도 맘대로 뀔수가 없었는데
교육 중에 실수로 방귀를 끼면 
부모에게 연락해 음식을 장만해서 상전에게 대접하는 벌칙이 부과됐다.

중국
명나라, 청나라 궁녀들은 글을 알면 절대 안됐다.
따라서 입궁 하면 업무 실습만을 배웠을 분이다.

교육 담당자는 선배 궁녀들이었는데,
이들의 교육은 엄격했기 때문에 체벌도 서슴치 않았다.

오죽 했으면 당시 어린 궁녀들 사이에서는
"주인님을 모시는 것이 차라리 낫지, 선배를 모시는 것은 너무 어렵다"
라고 할 정도였다고.

명나라, 청나라 궁녀들의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는데
잠을 잘 때는 벌러덩 큰 대(大)자로 자면 재수가 없다해서
항상 옆으로 누워 다리를 말고 자야했다.

또 궐내에는 대화하는 자체가 일체 금지됐기 때문에
궁녀들끼리는 손바닥을 가볍게 치는 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일본
정식여관이 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가르치는 상급 여관의 능력에 달려있었던 것.

힘 있는 상급여관 아래 들어가면 5~6년 안에 정식여관이 될 수 있었지만
줄을 잘못 서면 평생 정식여관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었다.


● 궁녀의 근무 환경

조선
어린 생각시는 입궁 10년이 지나면 정식 궁녀가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정식 궁녀라는 뜻으로 '나인'으로 불리웠다.

조선의 궁녀는 나인이 되면 방이 주어지는데
보통 2~3명의 나인들이 같이 생활을 하여
상궁이 될 때까지 20년 간을 방동무로 지냈다.

나인이 되면 방청소와 심부름을 '무수리'도 방마다 한명씩 주어지게 되는데
때문에 조선의 궁녀들은 일상일보다 업무에 더 전념할 수 있었다.
 

조선 궁녀들의 근무 조건은 보통 8시간 일하고 
다음날 하루를 쉬는 격무제로 근무환경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다만 침실을 지키는 '지밀나인'들은 근무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
매일 12시간씩 3교대 근무를 했다.

이러한 로테이션이었다.
12시간 숙직→24시간 휴식12시간 주간근무→24시간 휴식12시간 숙직

밤 근무를 하는 지밀나인은 상전의 침실을 지켜야 하는데
8명씩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이때 지밀나인은 왕족들이 하는 말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됐고 
또 외부로 누설을 해서는 더더욱 안됐다.

궁궐에는 목욕탕, 화장실 등의 편의 공간이 없어서
목욕을 할 때면 방안에서 나무 대야에 물을 받아서 하고 
용변도 요강을 이용했다. 
 

격일근무, 3교대 근무로 비교적 여가 시간이 많았던 궁녀들은
놀이, 바느질, 글쓰기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광해군 때 수입되었던 담배를 즐겨 피웠다.

이러한 담배는 일정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즐길 수 있었는데
자격시험은 이랬다.
선배 상궁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선배가 그만 할 때까지 빨아야 했다.

그런데 이때 목이 아프거나 연기에 질려 중간에 포기하면
불합격 처리되어 다시는 담배를 필 수 없었다고 한다.
 

만약 합격되면?
이후로는 선배 궁녀와 장족을 물고 맞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일본
정식으로 여관이 되면 오오쿠의 숙소에서 
하급여관의 시종을 받으며 생활을 한다.

여가시간에는 주로 카드놀이와 
나무공을 막대위에 올리는 겐다마 놀이를 즐겨했다.
 

조선의 궁녀에게 담배가 허용됐다면
일본의 여관에게는 술이 허용됐다.
이들은 각각 방에서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들이켰다.
 

생활 수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통금시간이었는데
외출의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간혹 쇼군이나 정실부인을 대신해서 절에 참배를 가거나
그들을 대신해서 연극을 보러 외출할 수 있었다.
 

이 때 외출을 하면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물론 통금시간을 지키지 못해 처벌을 받는 사례도 종종 발생했다.


● 궁녀들의 월급

조선
조선의 궁녀는 궁에서 먹고 자고 입는 것 외에 기본적으로 월급을 받았다. 
처음이 나인이 되면 현재가치 15만원 정도(쌀 4말, 콩 1말 5되, 북어 13마리)의 월급을 받았고 
월급은 노동강도에 따라 달랐는데 
일을 많이하는 무수리는 쌀을 6말이나 받아 신참 나인들보다 더 받았다.
 

또 품계가 높을수록 월급이 많아져 정 3품 상궁이 되면
월급은 현재가치로 약 60만원(쌀 16말5되, 콩 5말, 북어 80마리) 정도를 받았다.

여기에 연말이나 명절에 받는 특별 상여금이 있어
나름 높은 수입을 올린 고액 연봉자였다.
(당시 하급관료의 월급 수준은 오늘날 우리 돈으로 50만원 수준)

바로 이런 이유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를 곯아야 하는 공노비, 양민들은
딸을 궁녀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
월급을 주로 쌀이나 금으로 받았는데

상급 여관인 오토시요리의 경우 지금의 엔화로 따져 
무려 연1500만엔~2000만엔, 우리 돈으로 2억 가까운 연봉을 받았다.
 

중급 여관들의 경우도 연봉은 수 천만원 정도로 상당히 높았다.

월급으로만 따진다면 가히 일본의 여관들은
한중일 삼국 중 가장 높은 월급을 받았던 것이다.

여관들은 이러한 월급을 본가로 보내거나, 저축을 하거나
옷이나 장식품을 사는데 썼다.
 

중국
명나라 시절만 해도 중국의 궁녀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었다.

하지만 검약을 중시하던 청나라 황제들은
궁녀들의 월급을 상당히 짜게 줬다.

오죽했으면 청나라의 궁녀들은
궐 내에서 굶주리며 어렵게 생활 할 정도였다.
 

식단도 철저하게 정해 놓았는데
하루에 돼지고기 1근 이하, 쌀 5수저, 약간의 곡식과 야채가 전부였다. 
(생선은 비린내가 난다고 금기시)

질도 낮아 늘 배고품을 참아야 했다고.


● 궁녀들의 외출

조선
궁녀들의 궐 밖 외출은 비교적 엄격하게 금지 됐지만
월급을 타면 친정 나들이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이 때 외출을 하려면 윗전 상궁에게 허락을 받고 
담당 환관에게 재차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출입 허가증으로 '出'이고 쓰여진 패를 받았다.

또 외출을 끝내고 돌아오면 이 패를 반납했다. 
이 때 출입장부에는 언제 나가고 들어왔는지 자세히 기록을 했다.

일본
오오쿠 안으로 가족을 불러올 수는 있어도 
나가서 만나는 것은 엄격히 통제됐다.

대신 일정기간이 지나면 짧은 휴가를 줬는데,
입궁한 지 3년이 지나면 처음으로 6일의 휴가를 줬고
6년째는 12일, 9년째는 16일의 휴가를 줬지만 그 이상의 휴가는 없었다.

휴가를 나갈 때는 반드시 다른 여관이 함께 나가 감시를 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면 편안해져 
오오쿠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명나라, 청나라 궁녀들에게는 외출, 휴가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가족을 만나러면 궁궐로 불러들이는 수 밖에 없었는데,
이마저 쉽지가 않아서 
궁녀들은 자신의 일을 돌봐주던 늙은 환관을 양아버지로 의지하면서 가족과 연락을 했다.

간혹 환관들의 도움으로 가족이 궐내로 들어올 수도 있었지만
얼굴을 맞대고 만나지는 못해 
천막을 사이에 두고 정해진 공간에서만 만났다.

혹시 궁녀가 가족에게 돈이나 물건을 전해주더라도 
천막을 사이에 끼고 이런식으로 줘야했다. ↓


● 궁녀들의 연애

중국
연애가 엄격히 금지됐던 명청의 궁녀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궁녀들끼리 대식, 즉 동성애를 했다.
'얼굴을 맞대고 같이 밥을 먹는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대식은 명청 궁녀들에게는 비일비재했다.

들키는 날이면 죽음을 면치 못하지만
명청의 궁녀들은 환관들과도 정분을 나눴다.

궁녀와 환관의 연애사건이 많아지자 조정은 처벌의 한계를 느껴
나중에는 알고도 모르는 척 묵인해줬다.

그러자 명나라 후기에는 궁녀와 환관들이 들어내놓고 연애를 하고
심지어 결혼까지 했다.

조선
조선 궁녀의 대식 사건으로 유명한 것은 
문종의 두번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침한 사건이다. 
이 일로 궁녀는 사형을 당하고 세자빈은 내쳐지게 되는데,

이 때 봉씨는 궁녀들끼리의 대식 행위를 보고 본인도 흉내낸 것이라 변명했다.
즉 당시에 궁녀들의 동성연애가 암암리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 궁녀들 역시 죄값을 엄중하게 다스려도 
목숨을 담보로 한 연애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궁녀들의 연애상대는 주로 별감과 환관들이었는데,
그러다 임신이라도 하면 
아이를 낳고 100일 동안 젖을 물릴 수있는 일반 여성 죄인들과는 달리 
출산과 동시에 사형에 처했다.

이러한 연애사건은 주로 '감찰상궁'이 궁녀의 뒷조사를 해 찾아내곤 했다.

일본
여관들의 동성애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당시 편지를 통해 여관들 간의 동성애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관들은 성 안에서는 남자들과의 접촉이 적었기 때문에 
성 밖에서 주로 남자들과 연애를 했다. 

연극을 보러 갔다가 배우한테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절에 참배를 갔다가 스님에게 마음을 뺏겨 스캔들이 생기기도 했다.


● 왕과의 동침, 궁녀의 승은

조선
궁녀가 왕의 낙점을 받아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하루 아침에 정4품이 되어, 
특별상궁 혹은 승인상궁이 되는 초고속 승진을 맞게 됐다.

특별상궁이 되면 내명부에 올라 왕과 잠자리를 갖고 
후손을 낳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후손을 낳으면 
바로 '후궁'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일약 왕족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중국
황제의 낙점을 받은 명청의 궁녀들은
황제의 침실로 갈 때는 옷을 모두 홀딱 벗고 알몸인 채로 가야했다.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명청의 궁녀는 황제와 잠자리를 해 임신을 한다해도 아이를 맘대로 낳지 못했는데
임신사실이 확인되면 환관이 출산의사를 물어보고, 
황제가 승인을 하면 그때서야 후손을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승인을 하지 않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유산을 해야했고 
다시는 황제와 잠자리를 갖지 못했다. 

일본
막부 여관들의 승은은 상급여관인 오토시요리에게 달려있었다.
쇼군이 직접 여관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에도 막도 중기부터는 전적으로 오토시요리가 추천해 준 여관만 
쇼군의 승은을 입을 수 있었던 것.

쇼군의 선택을 받은 여관은 침실로 불려가는 과정이 특이했는데
선택받은 여관이 쇼군의 침실에 갈 때는 

이미 쇼군의 승은을 입은 다른 여관과 
쇼군 가까이에서 사무를 봤던 삭발한 승려여관이 함께 침실에 들었다.

이들은 선택된 여관이 쇼군에게 하는 얘기를 잘 듣고
오토시요리에게 보고를 해야했던 것.

혹시 여관이 쇼군에게 자기 형제나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인사 청탁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에도막부의 여관은 
승은을 입어도, 심지어 후손을 낳아도 자신의 일을 계속하며 여관으로서 살아가야 했다.

만약 자신이 낳은 아들이 나중에 쇼군이 되면 
그제서야 쇼군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가지며 오오쿠 내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 외국인 출신 궁녀들은 없었나?

조선
조선의 궐에는 중국에서 온 궁녀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굴씨다.
굴씨는 명나라 마지막 황후의 궁녀였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 황제는 굴씨의 미모가 아까워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조선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조선에 와서도 궁녀로 지냈던 굴씨는
비록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조선의 궁녀들에게 중국말과 자수를 가르쳐줬다.

중국
중국은 전통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해서, 이웃 나라에서 공녀를 통해 궁녀를 상당수 충당했는데
우리나라만 해도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총 300명이 남는 양가집 규수를 공녀로 보냈다.

특히 명나라 영락제의 궁녀로 간 청주한씨는 
미모와 인품으로 영락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조선 외교에도 한 몫을 하기도 했다.

일본
일본 막부에도 조선 출신이 있었는데
임란 때 포로로 잡혀간 오타 줄리아가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하급 여관이었지만, 쇼군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는데
쇼군이 금지한 천주교를 버리지 못해 
그만 외딴 섬에 유배되어 쓸쓸이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 궁녀의 퇴직 (출궁)

조선
한번 궁에 발을 들어 놓으면 죽어서도 궁궐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궁녀들에게도 예외는 있었으니
조선 왕실에서는 나라에 가뭄이 들면 궁녀들을 출궁시켰다. 

결혼하지 못한 여인들의 한이 하늘에 닿아 날이 가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왕조 500년 통털어서 숙종, 영조 때 두 번 있었을 뿐이다.

중국
조선의 출궁 제도는 사실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나라의 재해가 되면 궁녀를 출궁시켜 왔었다.

청나라는 25세가 되면 반드시 출궁을 해야했고 
또 출궁한 궁녀들은 결혼이 가능했다.

이러한 출궁한 궁녀들은, 궁에서 생활했다는 이유만으로 신분이 상승하여
관직에 있는 높은 사람과 결혼하는 예가 많았다.

일본
여관들이 출궁한 예는 260년 에도막부 기간 중 딱 한번있었는데,
8대 쇼군이 오오쿠의 여관들이 너무 많다고 여겨서
여관들 중에 미인들을 골라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미인들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쉽게 결혼하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 궁녀들의 권력

조선 
승은을 입지 못하면 승진이라도 해야 하는 조선 궁녀들은
입궁해서 10년이 지나면 나인이 됐고 
나인이 되어 30년이 지나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무 기간에 의한 승진은 숫자에 불과했으니,
남들보다 빠른 승진 기회를 잡기 위해
궁녀들은 권력이 있는 환관이나 대신들과 종종 결탁을 했다.

궁녀 조직에서 최고 권력자는 제조상궁이었는데,
제조 상궁의 경우는 무려 품계가 정 1품이나 됐다. (영의정과 동급)

제조상궁은 당상관 이상의 관료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고 (현재 가치로 1억 이상)
심부름 하는 하녀와 옷을 만드는 침모까지 배정되어 
그야말로 권려과 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조상궁은 그 자리가 공석이 되면, 경합으로 선출되는데
선출 방식이나 시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제조상궁이 되기 위해서 온갖 권력이 동원됐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나오는 장면)

또 조정 대신, 중신들은 상궁들하고 의남매를 맺기도 했는데
이는 다분히 로비 수단이었다.

가령 누군가 왕 앞에서 자기를 모함했을 때
자기와 친한 환관이나 상궁이 옆에서 쉴드를 쳐준다면
이는 지방 유생들 수천명이 하는 상소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 중신들이나 당파들은 
자기쪽 궁녀, 환관을 왕옆에 밀어넣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일본
여관들의 승진 기회는 무사나 관리의 딸들인 중급 여관들에게만 주어진다.
하급여관들은 승진 기회조차 없다.
또 승진시험이나 절차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최고 수장인 오토시요리 눈에 들어야만 승진이 가능했던 것.

조선의 경우, 왕이나 왕비가 궁녀들의 인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은 오직 오토시요리가 그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토시요리에 대한 인사권만큼은 쇼군이 가지고 있었다.


● 궁녀들의 재테크

조선
조선의 궁녀들은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아서
주로 논, 밭, 집 등의 부동산을 구입했는데,
인조-효종-현종 3대에 걸쳐 상궁을 했던 모 상궁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사면서 국가의 공증까지 받기도 했었다.

상궁들의 경우 수 만평의 땅과
노비까지 부리는 지주가 되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정조실록에는 궁녀들이 기생이나 별감들을 데리고
꽃놀이나 뱃놀이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
오토시요리가 되면 쇼군에게 집을 하사 받았는데
그 집을 임대를 하여 재산 증식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했다.


● 모시던 주인이 죽으면, 궁녀들의 운명은?

조선 
궁녀 운명은 자신이 모시는 왕비, 왕 등의 상전에 따라 좌우됐다.
만약 모시던 상전이 죽으면 3년상을 치르고 출궁해 
결혼도 하지 못하고 오직 상전의 명복만을 빌며 외롭게 살다 가야했다.

중국
명나라는 모시던 황제가 죽으면 
가까이 있던 궁녀들을 황제와 같이 순장시켰다.
(이런 이유로 순장된 조선 출신 궁녀들이 꽤 있다. 인수대비의 언니도 그렇고)

이 때 죽음을 앞 둔 궁녀들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그리고는 올가미로 스스로 목을 매게해 생을 마감하게 했다.

하지만, 이런 순장 풍습은 15세기 중반 정통제 때 없어진다.
한 때 포로로 잡혀 몽골로 끌려갔던 원한으로 (토목의 변)
몽골족 풍습이었던 순장제도를 금기시켰던 것이다.

일본
주군이 죽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냥 자신의 위치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