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List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산업혁명 일보직전까지 갔던(?) 송나라 : 발전 비밀과 한계점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8428149
● 들어가기 앞서

송나라는 경제적인 부분으로만 따지자면
중국 역사의 리즈시절로 평가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다.

 토인비
"송나라는 인류의 생활에 가장 적합한 왕조다."

 토인비
"만약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중국의 송나라 시절도 돌아가 살겠다."

'전쟁의 세계사'를 쓴 
윌리엄 맥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윌리엄 맥닐 
"외세의 침략만 없었다면 
송나라는 산업혁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케임브리지 중국사'를 쓴
패트리샤 에브리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패트리샤 에브리
"송나라 당시 유럽은 발전적인 면에서 보자면
중국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아! 그 정도였어?"

"저명한 학자들의 말인데, 
일단 믿어!"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해서 송나라는 갑작스레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단 말인가?

또 정말 
산업혁명을 이룰 뻔 했었나?

여기서는 이런 궁금증에 대해서
풀어보고자 한다.



송나라의 경제는 어떤 식으로 발전했을까?

● 1단계 농업 생산 증가 : 송나라 경제발전의 시발점

중세시대 송나라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얘기하려면
우선 쌀 얘기부터 해야한다.

사실 송나라의 발전은 
쌀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쌀이 중국인들의 주식이 된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주로 밀이나 조, 수수, 콩과 같은 
잡곡을 먹었다.

이유는?
기후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벼는 원래 
늪지에 사는 식물이기 때문에

건조한 중국의 북부지역에서는 
잘 자랄 수가 없다.

"뭐야? 삼국지에 나온 군량미는 
쌀이 아니었어?"

"그럴 가능성이 높지."

물론 중국에서 
벼농사 자체의 역사는 길다.

양쯔강 유역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했을 정도다.

하지만 중국 남부 지역은 
송나라 이전 시대까지는

많은 땅들이 
개발이 안 된 곳으로 남아 있었고
▲ 8세기경 중국의 인구분포

쌀농사는 대부분 양쯔강 하류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시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송나라 때 와서야
남부지역을 개척하면서 

쌀 농사를 
대대적으로 행하게 된다.

"왜 하필 송나라 때부터야?"

"이 시기에 가뭄에 강하고 빨리 성장하는 
벼 품종(점성도)이 동남아에서 들어왔거든."

"그래서 예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땅에도
벼를 심을 수 있게 된거야."

그렇다면 쌀이 대체 뭐길래,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인가?

"쌀은 일단 맛이 좋아. 소화도 잘되고."

"칼로리가 풍부하지. 
부족한 단백질은 콩을 섞어 먹으면 해결되고."

"먹기에 가장 간단한 곡식 중 하나지.
애써 빻을 필요가 없거든."

"요리하는 법도 상당히 간단하지.
빵을 만드는 과정과 비교를 해봐도."

"무엇보다 단위 생산량이 높아.
인구부양력에 있어서 다른 잡곡들보다 우수하지."

"기후만 적당하면 한 논에서 이모작, 
심지어 삼모작까지 가능하다능."

때문에 한정된 땅이 주어졌다면
이왕이면 쌀을 재배하는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여기에 송나라 때 남부지역이 개발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물대기 기술'의 발전이 
그것이다.
 

사실 쌀농사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물 문제였다.

"쌀농사는 뭐니뭐니해도 
물관리가 핵심이야."

 
"그럼. 물대기 잘못하면 
농사 완전 망치는거지."

그런데 송나라 때 와서는 
저수지 축조 기술이 크게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호수나 늪지대에 
제방을 쌓아서 물을 가두게 되면,"

"홍수가 났을 때는 
논이 잠기는 것을 막아주고.."

"가뭄이 났을 때는 
저수지의 물을 이용할 수가 있게 되지."

여기에 수차도 
만들어진다.
 
▲ 송나라의 수차

 
"수차가 있으면 
저수지의 물을 쉽게 퍼내어 쓸 수 있고,"

 
"또 높은 곳까지 물을 운반할 수가 있어서
계단식 논을 만들어 활용할 수도 있음."

▲ 계단식 논

고로 송나라 때는 
저수지 + 수차의 개발로

'물대기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송나라 수차

여기에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앙법'의 도입!

▲ 송대 이앙법

이앙법(모내기법)의 
골자는 이렇다.

모판에 어린 벼를 심어서
논에다가 옮겨심기를 하면

논에서 길러지는 
벼의 생육기간이 단축되어 

같은 논에서 1년에 두번 농사를
지을 수가 있게된다.

때문에 같은 땅에서
쌀→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오! 옮겨심기.
이거 생각한 사람 완전 천재."

이러했으니, 송나라 때 농업 생산력은 
크게 증가하게 되었고,

특히 쌀농사 지역의 인구는 
급속도록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2단계 농업의 분업화 : 상업작물의 전문화

중국의 남부지역이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쌀 수확량이 대폭 증가하면서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난 현상은 
바로 인구의 증가였다.

중국의 인구는 8세기 경 
대략 5천만명이었다.
▲ 8세기경 중국의 인구분포

그런데 이 수치는 600년 전인 
2세기 때와 비슷한 정도였다.

하지만 강남이 개발되면서
벼 재배가 확장되어 식량공급이 꾸준히 증가하자,

12세기초 인구는 
약 1억 2천만명에 육박하게 된다.

당시 전세계 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그리고 인구가 증가하고,
인구밀도가 높아지자

전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일들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다.

 
"이봐, 술 좀 담가놓은거 있나?
쌀 서말 퍼줄게 술 한동이만 줘."

집들이 
가깝게 붙어있다보니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물물교환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수확량이 늘어나
집집마다 곡식이 남아돌았던 이유도 있었다.

 
"집에 쌀이 넘쳐. 
남는 건 팔아먹는게 상책."

그렇게 사람들은 남는 쌀을 가지고
숯, 차, 기름, 술 등과 바꿔 먹었다.
 
▲ 차를 파는 상인

그러자 농부들은, 농사 외에 부업거리를 
한가지씩 가지고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전에는 
거의 자급자족이었지만,"

 
"요즘에는 뭘 자꾸 바꾸자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건지.."

 
"그럼 우리도 바꿔먹을 거리를 
하나 만들면 좋잖아."

 
"어떤 부업이 좋겠어?"

 
"왕서방네는 술을 빚고
장대인네는 종이를 만든다니.."

 
"우리는 숯을 만들어 볼까? 
아니면 비단을 짜볼까?"

이런 식으로 농민들은 
부업에 차츰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예 
쌀농사를 때려치우고

부업을 주업으로 
전업을 한 농민들도 나타나게 된다.

 
"요즘 쌀농사 안 짓는다고 굶어죽나?

 
"오히려 농사 짓는 시간에
술을 빚어서 파는게 더 이익이겠던데."

 
"나도 그래. 쌀농사는 내 취향이 아님.
나는 이참에 과수원이나 크게 해볼려고."

 

이런식으로 
송나라 때는

쑤저우(소주) 지방의 농민들은
누에를 치고 비단을 뽑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복건성, 사천성, 광둥성의 많은 농민들은
쌀농사 대신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된다.

또 차, 야채, 귤, 목재, 대나무 
직물용 마와 모시 등도

이 당시 주요한 상업작물로 
재배되게 된다.

또 13세기 경에는 목화까지 들어왔으니,
상업작물의 종류는 더욱 다양해진다.

참고로 이런 상업작물의 전문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후기에 담배, 인삼 등에 한정되어 
겨우 나타나게 되는 모습이었다.


● 3단계 유통의 발달 : 수운교통의 발달

상업작물의 출현과 맞물려
전문 중개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농부들에게 상품을 떼어와
최종 소비지의 상인에게 넘겨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해준 것은
바로 발달된 수운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물건을 자주 유통하자면
선박이 많이 필요했다.

때문에 송나라 때는 배를 만드는 선박 산업이
크게 활기를 띠게 되는데,
 

덩달아 선원들에게도 
고용의 기회가 제공되었고

해안가와 내륙 운하 주변에는
선원들을 위한 숙박시설들도 번창하게 된다.

고로 농산품 유통업에 있어 
한정적으로 나타난 모습이긴 하지만,

농업의 발전 → 상업의 발전 → 제조업의 발전 → 서비스업의 발전이라는
연쇄적인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전방연관효과)

비록 송나라가 망하고 난 뒤였지만,
13세기말 베니스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양쯔강의 배 통행량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르코 폴로
"이곳의 강은 엄청 큰데
강둑마다 도시들이 널려있다."

 마르코 폴로
"그리고 그 사이를 
엄청난 수의 배들이 지나가고 있다."

 마르코 폴로
"솔직히 말하자면,
유럽 대륙의 모든 배들의 통행량보다,"

 마르코 폴로
"이곳 강에서 이뤄지는 통행량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안에서 차게되면
밖으로 넘치기 마련이니,
 

주변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송나라의 넘쳐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고려 상인
"송나라 비단이 좋다길래, 
고려인삼하고 바꾸려고 왔음."

 여진족 상인
"송나라 쌀이 좋다길래
말(馬)하고 바꾸려고 왔음."

 아랍 상인
"송나라 도자기 좋다길래
향신료 좀 가지고 왔음."

그런가 하면, 송나라 상인들도 직접 큰 배를 타고
동남아, 인도, 중동까지 나가게 되었다.

당시 만들었던 
송나라의 무역선은 대단했다.

노와 돛으로 동력을 더하고 
기본적으로 수백 명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119년 세계 최초로 사용된 나침반도
대양 항해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4단계 화폐경제의 발달 : 자본의 집중화

그렇게 유통과 무역이 증가하자
곧 화폐 수요가 폭증하게 되었다.

 상인
"아놔, 돈이 있어야 장사를 할꺼 아님.
제발 돈 좀 찍어! 팍팍 찍어!"

그래서 송나라는 
열심히 찍는다고 돈을 찍었다.
 
▲ 송나라 화폐, 천희통보

997년 송 정부는 
연간 8억개의 돈을 찍었는데..

이는 당나라 시절, 최고로 많이 찍었을 때보다
2.5배나 더 많은 양이었다.

 상인
"그래도 택도 없다니깐!"

1085년에 송나라는 
1년에 60억개나 찍어버린다.

 상인
"이것도 부족해!"

그러자 송나라 정부는
은화도 유통시켰다.

 상인
"여전히 부족해!"

화폐는 늘상 찍어도 찍어도 부족했다.
이유가 뭘까?

당시에는
고액권 화폐가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지금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긴 하다.

"세상의 돈이 전부 
100원짜리 밖에 없다고 생각해봐."

"흐억!"

"그게 바로 당시의 송나라였어."

결국 화폐가 부족하여, 
사람들은 고액의 거래에는 

비단과 차 등의 
물품화폐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물품화폐는 
문제가 많았다.

 상인1
"너무 무겁다 해. 
그리고 중간에 도둑 만나면 다 뺏긴다 해."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게
바로 '어음'이라는 문서였고

 상인2
"오, 이거 편리하구만. 
생각해낸 사람 완전천재!"

원거리 무역에서는 
곧 어음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당시 어음의 사용 방법은 
대략 이러했다.

예를 들어 상해에서 항저우로 
소금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때 소금을 전달하고 상인은 
대금으로 비단이나 구리를 받는게 아니라,

어음 쪼가리를 
하나 받는다.

 
▲ 송나라 상인

그리고 고향에 도착했을 때 
비단이나 구리로 교환할 수 있는

종이 쪼가리(어음)를 
제시하면 됐다.

그런데 이런 어음은 
필연적으로 문제점이 발생했다.

 상인1
"아놔, 이거 진짜인줄 알고 교환해줬더니
알고보니 사기였어."

 상인2
"아니, 비단 100필이라고 했는데
왜 70필 밖에 안줘?"

 환전업자
"30필은 수수료 모름?"

 상인2
"이런 날강도 같은 넘들. 
가만히 앉아서 30필이나 뜯어먹어?"

이런 사기꾼과 높은 수수료의 문제로
점점 문제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중국 정부는 사태를 파악하고
강력하게 나섰다.

 황제
"이제부터 어음은 
공정하게 국가가 발행해 주겠어."

 황제
"이걸 사용하면 사기꾼에게 당할 염려도 없고,
높은 수수료에 뜯길 염려도 없을거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게 
송나라의 지폐였다. (1024년)

 
▲ 송나라 지폐

중국 정부는 이 지폐를 
어떤 물품과도 교환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상인들에게도 다른 어음을 발행하는 대신에 
정부의 지폐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렇게 고액권 화폐인, 
지폐가 통용되게 되자

지역간의 교역은 더욱 활발해지고
상인들은 더욱 전문화되고 조직화 되게된다.
 

그러자 
큰 사업을 굴리기 위해

종잣돈을 얻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게 된다.

먼저 
동업(행, 작)이 나타났다.

 상인1
"우리 둘이 돈을 합쳐 크게 차리는거야.
그리고 수익은 5:5로 뿐빠이."

 상인2
"오케"

그리고 주식회사의 초기단계라 할 수있는
☞익명조합이 나타났다.

 물주
"돈 필요해? 
내가 투자해줄게."

 물주
"대신 장사하고 벌어들인 수익 중
앞으로 50%는 항상 내몫임."

 상인
"오! 굳 아이디어"

뿐만 아니라 돈을 꿔주는 
전문적인 '대부업'도 늘어났다.

 사채업자
"얼마 필요한데?"

 상인
"100냥이요."

 사채업자
"담보는?"

 상인
"논마지기 3천평이요."

이런식으로 송나라 때는
커다란 사업을 하기 위한 

목돈 마련의 시스템이 
어느정도 구비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규모의 경제도 
이전 시기보다 쉽게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 5단계 산업의 발전과 도시의 발달

종잣돈을 이용하여 
다양한 사업에 뛰어들게 되면서

산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니,

비단, 칠기, 도자기 등과 같은 전통 산업은 
기술적 완성에서 최고 수준에 달하게 되었고
▲ 방앗간

책, 문서, 화폐, 포장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종이 생산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 유황과 초석 공장

철 생산 역시 
눈부시게 증가하였는데,

1078년의 철 생산량은 800년의 생산량보다 
6배 증가한 연간 12만 5천톤 정도였다.

"와! 방법이 뭐임?"

"물레방아를 이용해서 
풀무질을 하고.."

"화약을 터트려서 광산을 굴착했기 때문에
대량생산할 수 있었던 것임."

▲ 송나라의 화약

이는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18세기 후반 영국의 철강 생산량과 맞먹는 수준이었고
(다만 송나라 시절의 철강은 품질이 조악했다.)
 
▲ 물레방아를 이용한 풀무질

그렇게 생산된 철들은 
연장, 무기, 선박용 못, 현수교 체인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심지어 불상을 제작하는데 사용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리고 상업과 산업의 확장은 
결국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키게 되었으니,

송나라 때는 여러 도시에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기 때문에

이전 시대에 만들어졌던 성곽 도시에서는
반 이상의 인구가 성 밖에서 살아야만 했다.
 
▲ 찻집 정문 : 외발 수레를 주차하고 있는 상인들

특히 1126년까지 
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은

인구 100만명의 거대 도시로
당시 세계 최대 인구의 도시 중 하나였는데..

도시는 인공 운하로 연결되어 있었고
거리마다 복층가옥들이 즐비했고

24시간 시장이 개방되어
밤에도 환한 불이 꺼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불야성)
<embed src="//www.youtube-nocookie.com/v/Ju0f0oTDuP8?version=3&hl=en_U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320" height="240" allowscriptaccess="never" allowfullscreen="true" invokeurls="false" allownetworking="internal" enablehtmlaccess="false" allowhtmlpopupwindow="false"></embed> 
▲ 11세기 카이펑의 모습 (3D 복원모습)

송나라가 북부를 잃은 후에는
새로운 수도인 항저우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는데

항저우 역시 
인구와 경제면에서 

카이펑과 비슷하거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발전되게 된다.
▲ 항저우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 폴로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찬란한 도시다."

 마르코 폴로
"유럽 사람들이 
이 도시의 엄청난 인파를 보면.."

 마르코 폴로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릴 만한 음식을 
대체 어디서 구할까 의문이 들겠지만,"

 마르코 폴로
"도시에는 마차와 선박으로 
엄청난 물품과 음식들이 들어오고," 

 마르코 폴로
"항상 상인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당대 상업과 산업 발달의 
진수를 보여주던 곳이

북송 시대 카이펑과
남송 시대의 항저우라는 도시였던 것이다.



송나라 사람들의 삶 : 부유하지만, 보수적이던 사람들

● 귀족 : 사대부 사회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고민이 많았다.
 

당나라 멸망 후 60년에 가까운 전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또 언제 지방 군벌(절도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명령들을 내린다.

 조광윤
"앞으로 모든 사병들을 철폐하고
군대는 오직 황제만 통솔할 수 있음."

 조광윤
"관리 선발도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제로 선발하겠음."

그리고 과거제로 선발한 관료들에게는
막대한 특권을 부여했다.
 

문치주의를 위한 
일종의 인센티브였다.

"과거에 급제하면 
조정에서 정치를 할 수 있지,"

"토지와 녹봉이 나오지,
자손들은 관료 등용에 있어 특권을 누릴 수 있지."

"오! 완전 굳!"

이렇게해서 사대부의 시대가 열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했으니,

 
"출세하고 싶어?
그럼 과거시험부터 통과해!"

11세기 초에는 3만 명의 수험생들이 
매년 행성에서 개최하는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11세기 말이 되자
수험생의 수는 8만 명 가까이로 증가하였고

왕조의 말기에는 
무려 40만 명 정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관직의 수는 변함 없었다.

때문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시험과목은 유교경전, 중국 역사, 문학이 있었고
기본적으로 달달달 외워야 함."

"그리고 외운 걸 답안지 작성 할 때 
여기저기 인용해서 적는 시험이었어."

"조선시대랑 비슷한데?"

"조선시대랑 거의 같지. 
조선왕조가 벤치마킹한게 송나라의 문치주의니깐."

하지만 과거제를 통과한 사대부들은 
곧 문벌귀족으로 변하게 된다.

한 번 손에 쥔 권력을 
놓고 싶지 않는게 인지상정 아닌가!


● 농촌 경제 : 부유해진 소작농

사실 송나라 이전 중국 농민들의 생활은
수세기가 지나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사는게 뭐 있어? 
항상 똑같지."

"밭 갈고, 씨 부리고
그러다 수확하면 세금 내고.." 

"그냥 평생 먹고 살기가 빠듯해. "


그러던 농민들이 송나라 때 와서는
생활이 대폭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유가 뭘까?

 

농업 생산력이 늘어서라고?
하지만 땅들은 기본적으로 지주들의 차지다.

생산력과 생활수준의 괴리는
조선후기만 생각해도 답이 나온다.

 
"이앙법 보급으로 생산력은 급증했는데
왜 생활은 나아진게 없어?"

사실 신분제 사회였던 전통시대에
내 땅을 가지며 맘놓고 농사 짓던 농민들은 

전세계 어디를 가봐도 
그리 많지가 않았다.

왜냐? 힘있는 귀족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다 내 땅임. 
나라에서 내 땅 하라고 문서를 만들어줬거든."

이런 식으로 권력을 앞세워 농민들의 땅을 
쓸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쫓겨난 농민들은 
귀족들의 땅(장원)에 예속되어 

집단적으로 농사를 짓고 
정기적으로 세금을 갖다바치는

'농노'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들이 송나라 이전,
농촌 사회에서 나타났던 일반적인 모습이었고 

송나라 때도 내륙지방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쌀농사 지역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무리하게 
대토지 농장(장원)을 운영하여

단체로 농노들을 부리는게 
오히려 더 손해였기 때문이다.

"쌀농사는 엄청난 노가다임.
보통 밀농사의 3배 노동력이 들어간다고 하니.."

 
"그러게 말야. 
논에 물대야지, 논갈이 해야지," 

 
"모내기 해야지, 김매기 해야지.. 
손이 엄청 많이 가는 농사지."

"그래서 힘든 쌀농사를 여럿이서 짓게하면
서로 눈치 보면서 농땡이 치기 바쁨."

 
"그런데 논을 조그맣게 떼어내고 
각자 소작을 맡기고,"

 
"수확량의 일정량을 주인에게 갖다 바치고
나머지를 농민에게 가져가라고 하면.."

 
"이놈들이 동기부여가 됐는지
완전 쌔가 빠지게 일하더군."

"그뿐인가, 쌀을 수확하고 나면
기어코 보리까지 파종하여, 이모작을 하던데.."

 
"그렇게 이모작으로 벌어들인 보리는 
전부 이놈들의 보너스가 되니.."

때문에 강남의 쌀농사 지대에서는
장원이 아닌, 

소작농 형식으로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소작농들은 대부분 열심히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저마다 재산을 축적할 수가 있게 되었다.

다만 사유재산이 축적되고,
상업과 산업이 발달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빈부격차가 나타나기 마련이었으니,

당시에도 이런 빈부격차가 
사회적인 문제였던 모양이다.

민가에서는 
도둑질이 횡행하고
▲ 판관 포청천이 활약하던 시기

부유한 집안의 자녀를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는 범죄가 기승했기 때문이다.
▲ 소설 수호지의 시대적 배경은 송나라 때다


● 여성 : 유교적 가치관으로 억압된 삶

송나라의 자료를 보면 
당시에는 여러 부류의 여성들이 있었다.

여관을 경영하는 과부,
학대하는 주인을 피해 달아나는 하녀,

70세가 되어서도 아기 출산을 돕는 산파,
귀부인들에게 설교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 비구니,

도시에서 여흥을 돋우는 노래하는 소녀들과 기생들,
돗자리 짜는 기술을 가진 농민의 딸,

시 짓기를 좋아하는 지식인의 딸,
재산을 훔쳤다고 딸들을 비난하는 나이 든 과부 등등

다양한 여성들이 있었고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도 빈번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면의 모습들이다.

송나라 때의 여성들은 
유교의 영향으로 

보수적이었고 
억압된 삶을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여성들은 집안 살림과 자녀 양육에 
자신의 일생을 바쳐야만 했다.

다만 경제적 발전과 인쇄술의 발전으로 
책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당시 상류층 여성들 중에서는 
독서를 즐기는 이들도 많았고

그런 여성들은
자식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한편 이 당시 여자들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신랑집으로 적잖은 결혼지참금을 
들고가야 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 유럽에 있었던
신부의 결혼지참금 시스템과 매우 흡사했다.

특히 상류층 여성들의 경우
장차 관직에 나갈, 전도유망한 사위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더욱 더 막대한 
결혼지참금이 필요했다.

"당시 우리나라(고려)는 거꾸로 신랑이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와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그러게, 시월드보다는 
처가살이가 나은데.."

그런가 하면 여성들에게는
유교적 윤리가 강요되어서

당나라 때까지 타구(격구)를 즐길 정도로
육체적 활동이 왕성했던 중국 여성들은
 
▲ 당나라때 여인들

송나라 때부터는
다소곳하고 정숙하게 

몸가짐을 하는 것이 
어느덧 미덕이 되어버렸고,

이 시기부터 여성들은
외출시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니
▲ 당시 여인들

길을 다닐 때는 
막이 쳐진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다.

또 의원이 진찰을 할때도
환자가 사대부 가문의 여성일 경우에는

얼굴을 쳐다봐서도 안되고, 
질문을 해서도 안됐고,
 
▲ 송나라 당시의 의원 : 환자의 종기를 치료하고 있다.

맥을 짚기 위해서는
커튼 사이로 내민 손을 짚어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조선보다 나은데.
조선시대엔 팔목을 실로 묶어서 맥을 짚었잖아."

"그건 왕족의 경우에만 그런거고
조선의 사대부 부녀자들도 송나라 때와 비슷했어."

그리고 이러한 유교적 마인드는
급기야 '전족의 확산'으로 이어지게 됐으니,
 

원래 전족은 무용수들이 신던 신발이었지만
곧 상층 계급으로 확산되어버린 것이다.

"발이 작고 좁으면 
웬지 다소곳해보임."

"그러게.
걸을 때도 훨씬 조신하고 보기 좋네."

이런 왜곡된 가치관으로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5~6세때부터 발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게
발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싸매고 다녀야 했다.

강화된 유교사상은
여인들에게 이런 것들도 강요했다.

"여자는 자고로 지아비를 섬기고
과부가 되면 아들을 따르는게 도리야."

"여자들은 자기 재산을 가져서는 안되고
남편이 첩을 들인다고 질투해서는 안됨."

"남편이 죽은 뒤에도 재혼이 어딨어.
시부모님 잘 모셔야지."

 

 
"글을 읽고 쓰는 것 가지고는 뭐라 않겠는데..
시를 짓는 등의 것은 삼가해야함."

웬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교국가, 
조선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 사상 : 보수화되는 사회

송나라는 경제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런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귀족과 관료들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 송나라 사대부들

"왜 한나라, 당나라 때처럼 못하는거지?"

"이게 다 무능한 정부 탓이야."

"그보다 흉악한 오랑캐 탓이겠지."

송나라 때는 늘 북방의 유목민족의 위협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최 여유가 없었고
점점 더 보수적이고 국수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급기야 지식인들 중에서는 
불교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교는 외래 종교임.
왜 우리 것도 아닌데, 이런걸 굳이 믿으려고 하지?"

"맞아. 사실 불교는 서하, 요, 금나라 같은
순 오랑캐들이 믿고 있는 종교잖아."

 손복 
"우리 성인들의 가르침(유교)을 무시하고
야만족의 가르침(불교)을 따르는 것은 치욕이야."

 석개 
"불교를 신봉하는 것은 우리 조상을 잊고 
야만족의 귀신을 섬기는, 도리에 어긋난 일임."

그리고 이러한 반불교의 정서는 
곧 중국 전통 사상인, 유교사상의 강화로 이어지게 되고

"사람들이 유교사상이라고 하면
그저 예법이나 학문으로만 생각하는게 문제임."

"맞아. 불교에 도전할 대항마로서
유교의 철학적인 틀을 마련해야 한다능."

이러한 고찰을 
거듭한 끝에, 

당시 유교는 
관념적인 이론들이 새롭게 추가 되었고

그리하여 만들어진게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리학'이었다.

 주자 
"세상은 이와 기로 나눠지고
이것을 토대로 세상만사를 깨우칠 수 있음이야."

하지만 중국의 전통적 중심지였던 
화북지역을 상실한 남송인들은

남쪽 변방으로 내려와 
중화 세계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스스로도 
왠지 처량했다.

때문에 명분론적 사고가 
두드러지게 된다. (주리론)

"비록 화북 땅은 빼앗겼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오리지날 중국인들은 
지금 강남땅에 살고 있잖아."

"맞아. 현실 따위는 중요한게 아니야.
원래의 전통을 잊지 않는게 중요하지."

그리하여 사회는 더욱 더
보수주의와 관념주의를 강조하게 되었으니,

성리학이 폐쇄적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사고가 투영되어 
만들어진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시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과연 송나라 때 산업혁명이 가능했을까? 

사람들은 흔히 대충 알게되면 
쉽게 과장을 하게 된다.

송나라 때의 경제적 성과도 
사실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송나라 때 전세계 GDP의 50%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었지."

"그럴지도 모르지.
40%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하지만 인구가 30%였다는 걸 생각해야 함."

"쳇! 그때 송나라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모르네."

"명청시대보다 오히려 잘살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게 알고보면 오류 투성이야."

"어떻게?"

"자기들 주장에 
이로운 자료들만 취사선택했걸랑."

"예를 들면 송나라 때 어떤 땅에서 1년에 5만석을 생산하고, 
명청 때는 2만석 밖에 생산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알고보면 가장 수확이 잘된 시기의 자료만
골라서 취사선택 하는 식이었어."

"흉년이 들 때는 1만석을 겨우 생산했으면서
그런건 싹 다 무시했지."

"그래도 화폐 경제 수준을 보면
송나라는 명청보다 확실히 번영했거든."

"그것도 알고보면 오류투성이지."

"송나라 때 화폐량이 300만관이었는데
명청 때 30만관이라고 단순 비교했지만..

"송나라 때 화폐는 저질 동화
명청 때는 비싼 은화."

"읭?"

"도량형에도 문제가 많아."

"가령 송나라 때 쌀 1섬이 80kg이라면
명청 때는 120~160kg이거든."

"그런데 송뽕 걸린 사람들은 
그걸 똑같은 기준으로 대입하니깐 문제야."

"뭐야? 헛점 투성이네."

그런식으로 
자료를 짜맞추다보니

중국 학계에서는 송나라 때 1인당 GDP를 
2천불로 계산하게 되는데

그에반해 명, 청시대 때는 600불,
1980년대 중국때는 1천불로서

2천년대 초반에 와서야 중국은 
송나라 때와 

1인당 소득이 비슷해지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나오고 말았다.

"기계화 되고 비료농법이 이뤄지는
현대보다 어떻게 더 수확량이 좋을 수 있음?"

사실 이렇게 송나라 경제가 
뻥튀기 된 이유에는

중국 공산당들의 
날조와 선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맑스의 역사발전론에 의하면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산주의가 온다는데
우리 역사에 자본주의가 언제 있긴 있었음?"

한때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면서,
중국 혁명의 주체는 

농사꾼이라고 주장했던
마오쩌둥이었지만 (이른바 농민의 맑시즘)
 

스스로도 
그런 사실이 너무도 불편했다.

 마오쩌둥 
"정말로 중국역사에 
자본주의 맹아는 없었나?"

"아닙니다. 
당나라, 송나라 때 얼마나 잘 나갔는데요."

 마오쩌둥
"그래? 
그럼 한번 설득력있게 만들어봐!"

그렇게해서 송나라 시대 강남발전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이 만들어졌고

당시는 중국은 폐쇄적인 
죽의 장막(1960~1980년)이던 시절이라

중국측의 발표는, 딱히 검증할 방법도 없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 송나라 시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러나 이런 중국 측의 주장은 
대중적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급기야 일반인들의 
통념 수준까지 와버린 정도다.
▲ 24시간 영업을 하던, 불야성의 카이펑 

그렇게 된 
이유에는,

서양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라는
'냉정한 자극제'가 필요했고

동양인들에게는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할 때 
'유용한 카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라구! 
동양은 원래 서양보다 잘 나갔다니깐.."

그런 이해관계가 맞물려  
송나라 리즈시절에 대한 테마는 

동서양에서 공히 
대중적으로 빠르게 수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송나라 때 발전상은 허상이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 참고
당대 최강인 것은 분명하고

요즘으로 치면 
90년대 미국+일본을 합친 정도,

최근에 미국+중국을 합친 정도의
엄청난 경제력을 지닌 국가였다. 
▲ 송나라 시대 수력을 이용한 생산 방식

다만 산업혁명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근대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었다는 식의 주장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 영국의 산업혁명

뚜렷한 한계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학문은 실용학문이 아닌
관념적 철학 수준이었고, 사람들은 보수적이었다.

물론 유교적 이상정치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긍정인 효과가 있어

송나라 집권 내내 
환관과 외척이 기승을 부리지 않았고

궁중암투도 심화되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었다.
▲ 송나라 황궁의 인공호수

하지만 정치적 안정이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유교적 이상정치를 꾀했던
조선도 정치적으로는 꽤나 안정적인 편이었다.
 

때문에 송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도,
유럽의 근대화 시기처럼

합리적인 사고와 
실용적인 기술이 우대를 받아

지식과 자본이 축적되어
산업혁명의 단계로 나아갔을런지는 대단히 의문스럽다.

사실 송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인 
사대부들부터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유학사상에 앞장섰다.

기득권층부터 
그러한데

사회 기층에서 근대 자본주의나 산업혁명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


참고 문헌 : 케임브리지 중국사 (페트리샤 에브리), 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리보중)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