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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수레의 발명 역사 : 왜 고려시대 이후로 수레는 사라졌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275261221
수레의 발명

● 최초의 수레, 통나무 굴림대

옛날에 원시인들은 
수백 kg이 넘는 거대한 짐승을 잡는 날이면 

엄청난 고깃덩어리에 기뻐하다가도
걱정이 교차될 수밖에 없었다.

 원시인
"아놔, 이 무거운 걸 어떻게 운반하지?"

가족들이 기다리는 동굴까지 
사냥감을 옮기기 위해서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야 할 판이었다.

들고 갈 수는 없으니
땅에다 질질 끌면서 낑낑대며 운반해야 했다.

 원시인
"으라차차차.."

하지만 쉽지가 않았고,
원시인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원시인
"고깃 덩이를 조각내서 왔다 갔다해?"

 원시인
"아냐, 그러다가 
누가 도둑질이라도 해가면?"

그러던 중 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덩이를 문뜩 바라보게 된다.

 원시인
"그렇지! 
사냥감을 굴려서 가져가는 거야."

하지만 모든 사냥감이 
굴리기 좋은 둥근 모양일 수는 없었다.

 원시인
"제길, 안 굴러가잖아."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화가 난 원시인은 
주위에 널브러진 통나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런데 
그만 실수했다.

발을 헛차서, 통나무의 윗둥을 밟았고
그대로 뒤로 홀라당 자빠지고 만 것이다.

 원시인
"어이쿠!"

하늘에서 별이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원시인
"그래! 바로 이거야."

원시인은 자기가 미끄러졌던 것처럼
통나무를 여러 개 주워서 사냥감 밑에 깔아봤다.

그리고 끌어봤더니,
어라! 술술 잘 끌려오는 게 아닌가!

 원시인
"하하하!"

이것이 바로 
인류가 최초로 고안한 수레였다.


● '통나무 굴림대'가 만든 문명 : 피라미드, 모아이 석상

둥근 막대기를 깔아 
물건이 땅에 닿는 면적을 줄이게 되면

마찰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물건을 보다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둥근 형태의 막대기는
한번 굴러가면 회전운동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물건은 보다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최초의 수레라고 할 수 있는
'굴림대'가 운반 도구로 이용되게 된다.

이때 굴림대로 제격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둥근 통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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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지, 쉽게 구할 수 있지.."

그리고 이런 
통나무 굴림대를 통해 고대인들은,

영국에서는 스톤헨지를 세우고
이스터 섬에서는 모아이 석상을 만들고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한반도에서는 4만여 개의 고인돌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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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 굴림대야 말로
고대 인류가 발명한 첨단 운송장비!"

하지만 이런 방법은 
통나무를 매번 바꿔주어야 했기 때문에

벌목과 운반 등에 있어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또 많은 나무가 소비됐다.
 

때문에 심각한 
자연 파괴를 초래하기도 했으니,

이스터 섬이 황폐화된 이유도
이집트 지역에 사막이 확대된 이유도

모두 굴림대로 쓰겠다고,
무분별하게 나무를 벌채했기 때문이었다.

남태평양의 외딴 섬, 

이스터섬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부터의 일이었다.
▲ 초기 이스터섬 (상상도)

갑자기 외부 종족이 유입해오더니
선주민들에게 모아이 석상을 만들도록 시킨 것이다.

"우리 추장님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라능."

문제는 
모아이 석상의 크기였다.

높이 3~15m, 무게가 20~90톤이나 나가는 
어마어마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걸 운반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통나무가 필요했던 것이다.

석상을 하나 만들어 운반하려면
잘려지는 나무의 수만 수천 그루가 넘었다.

게다가 모아이 석상 쌓기는 
무려 400년 가까이를 지속하고 있었으니

그 사이에 잘려진 나무의 수만 
수천만 그루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토양은 
쉽게 침식 당하고 빠르게 황무지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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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사라지니 
비가 곧장 바다로 흘러들어 지하수가 부족했던 것임."

특히 이스터섬은 남회귀선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강수량 대비 증발량이 많은 곳이라 

한번 황무지가 된 땅은
좀처럼 회복하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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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이스터섬에는 
나무가 거의 자라지 못하고 있음."

그렇게 황무지가 된 섬에는, 
농사가 불가능해졌고 바닷새들도 사라지게 된다.
▲ 오늘날 이스터섬

게다가 나무가 없어
배를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주요 식량자원인 
고래사냥도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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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앙이 심해질수록 
이스터섬의 사람들은 

오히려 더 높고 더 거대한 석상을 
만들고자 했었다.

"신이 노해서 그렇다능.
더 큰 석상을 만들어야만 재앙이 그칠거야."

결국 이런 광기는 최후의 나무가 베어지고
더 이상 석상을 쌓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든 나무가 잘려지고 난 다음,
더 이상의 먹을거리도 사라진 그때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 쟁탈전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처참했던 역사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이스터인들의 속담 중에는
이런 표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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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빨에 
너네 엄마 살조각이 끼어있어."


● 수레의 등장

통나무 굴림대는 엄청난 노동이 들어가고, 
또 엄청난 자연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무를 적게 사용하면서도
무거운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무식한 방법 말고 
좀 더 괜찮은 방법 없을까?"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5천년 전 쯤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에 살고 있던 수메르인들은

토기를 만들기 위해 
물레를 창안하게 된다.

 수메르인
"이렇게 물레를 돌려서
그릇을 빚으면 훨씬 형태가 좋아진다능."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토기 제작 방식이었다.

 수메르인
"자, 돌리고 돌리고.."

그런데 이걸 지켜보던 한 사람이
불현듯 깨닫게 된다.

"맞았어! 그 방법이면 되겠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지."

물레의 원리처럼
고정된 축에 둥근 굴림판을 붙여서 굴리게 된다면

나무의 추가적인 소모 없이도
거의 반 영구적으로 굴림판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수레의 발명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초로 수레가 만들어졌던 것일까?

사실 메소포타미아는 
수레뿐만 아니라

인류 최초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문자를 사용하고, 문명국가를 만든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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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이라고 하는 그곳.."

바로 이곳에서 
야생 밀이 자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농경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잉여생산물이 늘어남에 따라 
정착 인구가 늘어나니, 

곧 문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수메르인들은
소 두마리를 이용해 쟁기질을 하는 농사법을 

이미 6천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었던 터라

가축을 이용한 운송 도구가 등장할 수 있는 조건까지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 전차(戰車)의 고안

하지만 초기 수레는 
운반용으로는 크게 활용되지는 못했다.

워낙 수레바퀴가 
무거웠던 탓이다.

당시 바퀴라고 해봐야
통나무를 두께 4~5cm로 크기로, 그대로 자른 것이어서

바퀴 1개의 무게만 
거의 10kg를 차지했다.

그런데 당시 수레는
4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축의 무게까지 따지면 
바퀴의 무게만 50kg를 넘었다.

따라서 수레 자체가 무거웠기 때문에
짐을 싣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통나무 원판으로 된 바퀴는
시간이 지나면 나뭇결을 따라 갈라졌기 때문에

쉽게 쪼개진다는 
단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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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무거운 물건을 싣고 다니면 
더욱 쪼개지기 쉬워짐."

여기에 연장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겨우 돌도끼로 제작했던 수레였으니

정교하게 만들기도 힘들어
느릴 뿐만 아니라, 회전도 부자연스러웠다.

"삐걱삐걱.."

하지만 그렇더라도 쓰임새는 있었다.
바로 전쟁터에서 전차(戰車)로 사용하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쟁터에 
가축이 동원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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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3천 년 전부터의 일이었음." 

그런 상황에서 
창병과 마부가 함께 탄 사륜전차 수십 대가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격해 온다고 생각해보자.

마치 16세기에, 
스페인 정복자들의 말(馬)을 보고 크게 놀란

아즈텍과 잉카인들의 상황과도 
비슷했을 지도 모른다.

초기 사륜전차는 
바로 이런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 바퀴살의 등장

하지만 곧 사륜전차는 
그 위력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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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느려터진 고물딱지는.."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이라크 북부에 살고 있던 아카드인들에 의해

보다 혁신적인 전차가 고안되었으니,
바로 이륜전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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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빠르다!"

바퀴는 두 개뿐이었고, 
통나무 대신에 4~6개의 바퀴살을 사용한 것이었다.

바퀴살로 만든 바퀴는
무엇보다 무게를 대폭 줄여줄 수 있었다.

가벼웠기 때문에
빠르게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우수한 기동성 덕분에
다소 울퉁불퉁한 지형에서도 운용할 수 있어

보다 장거리 이동이 
가능해졌다.

수레의 활용도가 
크게 높아진 것이다.

때문에 이후로는 
짐을 운반하는 것은 물론

사람을 수송하기 위해서도, 
수레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바퀴살이 많으면 
바퀴가 더 튼튼해진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으니,
▲ 4세기 중국의 수레

바퀴살의 개수는
16~24개로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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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살을 홈에 넣으려면, 각도를 잘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나름 정밀한 기술이 필요했었다능."

또 바퀴의 형태도 
점점 보완되어 가는데,

나무로 만든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길을 만나면
부서지거나 마모가 되었기 때문에

쉽게 바퀴가 
망가지고 쪼개지는 단점이 있었지만

나무 바퀴 테두리에 
짐승 가죽이나 구리판 등으로 씌웠더니

바퀴 손상이 
훨씬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쇠테를 만들어 씌우게 되었으니

수레바퀴는 
더욱 튼튼해졌다.



동양 문명에서의 수레

● 중국으로 전래된 수레 

중동에서 최초로 발명된 수레는
4천 년 전에는 인도로 전파되게 된다.
▲ 4천 년 전 인도의 수레

하지만 묘하게도 
중동과 더 가까운 이집트에는

좀처럼 수레가 
보급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집트는 모래사막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수레가 다니는 것이 불편했고

이집트 문명 자체가 
폐쇄적인 성향이 강하고

또 나일강을 중심으로 수로가 발달되어 있어서 
굳이 수레를 사용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600년 전 이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이집트에서도 수레가 보급되게 된 것이다.

이집트에 수레가 보급되던 시기,
중국에서도 수레가 들어오게 된다.

당시 수레를 전래해 준 것은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고 있던 유목민들이었다.
▲ 스키타이인의 수레

유목민이 사는 넓은 초원은 
수레가 다니기에 좋은 환경이었고

수레를 끌 소와 말도 풍부해서
이곳에서는 수레를 사용하기에 적격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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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유목민들은
거의 말을 탈 줄 몰랐었다능."

그런 유목민들로부터
은나라(상나라) 사람들은 수레 사용법을 배우게 되어서
▲ 은나라의 주민들

갑골문자에서는 전차를 탄 군인과 
수레를 탄 귀족의 얘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군대의 주력 또한 전차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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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 군대가 전차병이라 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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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고대국가 시절부터 중국에서는 
수레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는 방증."

그렇다면 왜 중국에서는
이렇게도 전차가 널리 보급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지형적인 원인이 있었다.

넓게 퍼진 
화북 지방의 대평원 때문이었다.
▲ 주나라 시대의 영역

넓고 평탄한 대지였기 때문에
수레가 달리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남선북마(南船北馬)의 중국

이후 중국은 2500년 전 경,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일상생활의 교통수단으로서도
수레가 널리 사용하게 되는데

이런 까닭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통일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문자·화폐·도량형 외에도
수레의 크기를 통일시키게 된다.

아니, 수레의 크기를 통일하는 게
왜 그리 중요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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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수레가 다니는 도로의 
메카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보통 수레가 여러 번 지나간 자리는 
움푹 파이기 마련인데
▲ 로마 시대의 도로 : 수레 자국

이 자국을 따라 다른 수레들도 
계속 같은 길을 지나다니다 보니,

수레가 지나가는 도로는
'W자 모양'으로 수레의 길이 형성되게 된다.
▲ 수레가 다니는 도로

이럴 때 바퀴의 폭이 다른 수레는
좀처럼 지나가기가 쉽지 않게 된다.

때문에 진시황은 
수레의 크기를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한 번에 15만 대의 수레가 
동원됐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레를 사용하는 문명으로 부상하게 된다.

중국이 이렇게 
수레를 많이 사용하게 된 이유는,

100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대부분 화북 대평원에 밀집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 2천 년 전 인구밀도 (붉은 점 1개당 2만 5천명)

이곳은 건조한 대평원이 펼쳐져 있는 반면
수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규모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수레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 중국의 드넓은 화북평원

반면에 10세기 이후 
새로운 중심권으로 부상하게 되는

양쯔강 유역의 강남은, 강과 호수가 발달하여 
이곳에서는 배가 널리 사용되게 됐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부 지역에서는 배가 수레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 항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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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배와 수레가 
동시에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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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더 싼값에 더 많은 짐을 수송할 수 있기 때문에,
배의 사용이 수레를 능가하게 된다능."

여기에 북부 지역은 
밀을 비롯한 밭농사 중심이었지만, 
▲ 화북지방의 밀밭

남부 지역은 논농사 위주의 지역인 만큼
수레가 다니기에 불편했다는 점도 

이곳에서 수레가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이런 탓에 17세기 
명나라 송응성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송응성 
"남방에서 태어난 사람은 큰 수레를 보지 못하고,
북방에서 늙은 사람은 큰 배를 보지 못했다."


● 왜 우리나라는 전차(戰車)를 사용하지 않았나?

우리나라에서는 BC 7세기
고조선 시대에 수레가 전래된다.
▲ 청동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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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레바퀴 파편이
평안북도에서 발굴되었다능."

하지만 전차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좀처럼 없었다.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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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수레가 보급되는 시기에
바로 말을 탄 기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 청동갑옷을 입은 고조선 기병

사실 인류가 말을 처음 사육했을 때에는
타기 위해서 길렀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소처럼 
쟁기질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3천 년 전까지 말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사람이 타고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3천 년 전을 전후해서,
중앙아시아에서 의도적인 교배를 통해 

덩치가 큰 말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 13세기 칭기스칸의 기병도 굉장히 작은 말을 탔었다.

다만 당시의 말은 
여전히 힘이 약했던 관계로

사람이 탈 때면 지금처럼 허리 부분이 아닌, 
엉덩이 부분으로 타야만 했었다.
▲ 당나귀를 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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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나 노새를 탈 때처럼.."

기동력과 체력 또한 
현재의 말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시 전차를 보면, 
여러 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당시 말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의 품종이 개량되면서, 
유목민을 중심으로

말을 타고 전투에 참가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살던
스키타이족들이 그러했다.

다만 그렇더라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어설펐다.

당시만 해도 안장이나 등자가 없었고
오직 고삐만으로 말을 조정해야 했기 때문에

말 탄 기병이라 할지라도
말을 타다가도, 

적이 나타나면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시쳇말로 '말 탄 보병'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BC 7세기 경 
안장이 발명되게 되면서


기병들은 말 위에서도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안장이 
고조선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초기부터
굳이 전차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고조선의 기병


● 고려시대 이후 수레는 왜 퇴보하게 되었나?

고구려는 한국 역사상 
수레를 가장 활발히 사용했던 나라다. 

현재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수레가 등장하는 그림만 총 18개라고 한다.
▲ 안악 3호분 귀족 저택의 모습

이렇게 고구려에서 
수레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고구려에는 수레를 끌 
소와 말 등의 가축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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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가 척박했던 탓에
농업 외에도 목축업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러함."

다만 고구려가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 고구려는 
농업을 위주로 했고

배를 타고 살아가던, 
수상(水上)국가였다.
 
▲ 압록강의 지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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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의 지류를 따라 
고구려는 성장했었지."

그러던 것이 
영토를 확장하게 되면서

수상국가보다는 
내륙국가 형태로 스타일이 변하게 되어

배보다는 수레를 
좀 더 활용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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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에서 평양성까지 물건을 수송하는데
배를 타고 갈 수는 없잖아."

그런가 하면 신라에서도 기록을 통해서 보면, 
수레가 자주 등장한다.
▲ 신라의 수레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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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대의 수레를 동원했다는 기록도 있고.."

이는 신라의 지형이 
비교적 하천이 발달하지 못한, 
(낙동강만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에 위치했다는 점이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반면에 백제의 경우에는 
수레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워낙 자료가 미비하기는 하지만)

중국 문헌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마한(백제) 사람들은 
가축을 거의 사용할 줄 모른다."

사실 백제가 위치한 한반도의 서남 지역은 
하천과 바다가 발전했기 때문에
▲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성(풍납토성)

백제는 일찍부터 
해상왕국으로 성장했었다.

 
"배로 운반하면 되지,
힘들게 왜 수레를 사용함?"

그리고 이러한 
해상왕국의 특징은,
 
나루터

3면의 바다를 모두 차지하게 되는
고려와 조선 왕조로 가면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 조선시대 세곡선(조운선)

가뜩이나 한반도는 산이 많고
구릉지가 많아서 수레가 다니기에 힘든 지형인데

여기에 군데군데 하천과 개울은 
좀 많은 게 아니다.

강수량도 많고,
상당수가 논농사 지역이다.

반면에 3면이 바다로 이루어졌고
수운이 나름 잘 발달되어 있었으니,

어느 모로 보나 
수레가 발달하기에는 힘든 조건이었다.
▲ 한강의 용산 나루터

이는 우리와 처지가 비슷했던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역시 국토 중 80%가 산지인데다가
강수량이 많고 논농사 위주의 국가였다.

반면에 섬나라 특유의 해운이 발달되어 있었고,
대도시에는 운하도 발달되어 있었다.

굳이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수레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에도시대에는 소달구지가 다니는
수레 전용 도로가 별도로 설치되기도 했었지만,
▲ 소달구지 전용 도로

"소 똥 때문에 장난이 아니무니다.
소달구지는 앞으로 이곳으로만 다니도록!"

소달구지 정도는 조선에도 있었다.
전용 도로는 없었지만..


참고 문헌 : 세상을 바꾼 수레 (김용만),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정연식), 문명의 붕괴(제레드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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