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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중세 유럽 최하층민들의 삶 : 매춘부·거지·망나니·유태인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8034845
중세 유럽의 매춘부

● 중세 유럽의 매춘업 :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중세초기만 해도 여성들의 성윤리는 
상당히 보수적이었으니, 대략 이러했다.

여자의 허락없이, 손을 잡으면? 
벌금 15실링

팔을 만지면? 
벌금 30실링

가슴을 만지면? 
벌금 45실링

이러면 
실감이 전혀 안된다.

그런데 당시 1실링이면 수소가 1마리, 
2실링이면 암소가 1마리였다.

헐!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는지
십자군전쟁에 참전했던 남편들은

부인에게 정조대를 
채우고 나가기도 했었다.
(십자군전쟁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이토록 보수적이던 성관습은
14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무너지게 된다.

바야흐로 르네상스의 시작과 
맞물리는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유럽 곳곳에는
공창제를 실시하게 되었고

도시에는 앞다투어
매음굴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매춘부들은 대부분이
가난 때문에 몸을 판 하층민이었다.

혹은 유리걸식하는 
거지생활을 하다가

포주의 꾐에 넘어와 
매춘부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혼전임신이나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흘러 들어와
매춘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인신매매범에게 잡혀 
사창가로 팔려나간 이들도 있었다.

이런 매춘부들은 
쉽게 성병에 걸렸을 뿐만 아니라
 

천박하고 불순하다고 하여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했다.

그리고 병에 걸리거나 
포주의 눈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언제든지 거리로 내쫓겨
거리를 떠돌며 살아야만 했다.


● 사회적 차별

매춘부가 되면 일반인과 확연히 구별되는 
차림을 해야 하고 다녀야만 했다.

이들은 외출할 때 
의무적으로 

빨강, 노랑, 녹색 등의 색깔로 
매춘부 표시를 해야만 했는데

이는 도시마다 
구분법이 달랐다.

대략 이런 것들이 있었다.
A도시의 매춘부 : 빨강 두건을 쓸 것

B도시의 매춘부 : 녹색 숄을 어깨에 걸칠 것
C도시의 매춘부 : 노랑 코트를 의무적으로 입을 것

D도시의 매춘부 : 검은 띠를 두른 모자를 쓸 것
E도시의 매춘부 : 신발에 노란 리본을 달 것

"왜 이렇게 한거임?"

"당시 매춘부는 불경한 사람이라고 해서
손이 닿는 것조차 꺼려했어." 

"그래서 일반인들이 길을 지나가다가
피해갈 수 있게 표식을 하도록 한거임."

교회에서도 
이들은 철저히 버림받아서

미사에도 참석해도 
일반 교인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야 했다.

"에잇, 재수없으니 떨어져 앉아!"

그런데 재밌는 것은
교회의 일반 신자들보다 

매춘부들이 
훨씬 많은 헌금을 냈다는 것이다.

"어라? 교회 입장에서는 VIP 고객이잖아!
도대체 왜 그런거임?"

"매춘부들은 
스스로 지은 죄가 많다고 생각해서,"

"헌금이라도 많이 내야
죽어서라도 천국에 갈수 있다고 믿었음."

"그런데 이런 우수 고객한테
교회는 너무도 애프터 서비스가 부족했지."

"읭?"

"매춘부는 죽어도 
교회로부터 축성식을 받지 못했고,"

"그냥 마을 뒤쪽 공터에 
쓸쓸하게 묻혔거든."


● 매춘을 허용한 목적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토록 매춘부를 불경한 죄인 취급하면서
왜 중세 도시들은 공창제를 실시했던 걸까?

사실 목적을 뜯어보면 
조선시대 기생의 존재 이유와 매우 흡사했다.

 조선 사대부
"기생을 없애면 사대부들이 양가집 여자들을 탐하여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것임."

중세 유럽인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공창제를 만들어야 강간사범을 막을 수 있고
일반 여자들을 보호할 수 있음."

 아우구스티누스
"창녀는 하수구 같은 것이라, 더럽다고 없애버리면 
온 궁전이 더러워진다능."

 토마스 아퀴나스
"매춘부가 없으면 미혼 남자는
대체 어디서 성욕을 분출하란 말인가!"

실제로 중세 유럽도시에서는 
강간 범죄가 잦았다.

인구 2만 명의 도시에서 
연간 강간범죄가 200번 정도 있었으니,

성인 여자들의 4%가 
매년 강간범에게 피해를 당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뭐니뭐니해도 공창을 함으로써
도시는 짭짤한 재정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로마의 교황청에서도 
이런 소문을 듣고 대대적으로 매음굴을 조성해

거기서 조달한 자금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상황이 그랬으니,
중세 말기가 되면

도시들은 저마다 세수 증대를 위해
매춘업을 적극 장려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세말 
매춘부의 수가 급증했던 것이다

15세기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당시 독일령 슈트라스부르크)
인구는 약 2만명이었는데

이곳에서만 
30개의 매음굴이 있었다.

각 매음굴에는 
보통 20명의 매춘부가 있었으니,

무려 전체 여성 인구의 
6%가 매춘부였던 셈이다.
(오늘날 현대 국가도 대부분 이 정도 수치이긴 하다.)
 

때문에 업소들은 과잉공급으로
서로 경쟁을 하다가 

싸움질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아니, 왜 우리 손님을 뺏어가고 난리임?"


● 매음굴의 운영

포주

매춘업을 하려면 포주는 
일단 도시에서 허가증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벌어들인 수입 중 일정액을 
꼬박꼬박 도시에 갖다 바쳐야 했다.

포주들은 들어오는 수입을 관리하고
화대의 가격도 적절하게 정했다.

또 매춘부들을 
새롭게 고용하는가 하면

문제 있는 매춘부들은
직권으로 퇴출시켰다.

 포주
"어디서 더러운 성병을 걸려가지고는..
앞으로 여기에 나오지 마!"

하지만 포주의 경영실적이 안 좋으면 
시에서 내쫓기도 했기 때문에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포주들은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었다.


어깨

매춘 사업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인력들이

바로 매춘부를 가드해주는
이른바 '어깨'들이다.

이들은 거지나 천민으로 살던 중
포주에 눈에 들어 스카웃 된 경우가 많았다.

 포주 
"오! 저넘 체격 한번 다부지네.
일 맡기면 잘 하겠어."

이런 식으로 
체용되었다.


화대

매춘부의 외모에 따라 화대가 달랐지만
보통 가격은 이러했다.


기본 : 5페니히 (독일화폐)
숙박 포함 : 10 ~ 15페니히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8페니히 정도였으니
결코 비싼 편은 아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지나치게 공급이 과잉된 상태였다.


단골

원칙적으로 성직자들은 출입할 수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성직자들 없으면 
장사가 안 될 정도였으니,

보통 매음굴 수입의 20%가
성직자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한다.

도제들도 주요 고객이었다.
도제라니 어떤 사람들인가?

중세 유럽에서는 장인 밑에서 일을 배우던 
도제들이 있었는데,

장인(master)이 죽어 그 부인이 과부가 되면
도제가 그 미망인과 결혼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렇게 하면 도제들은 
힘들지 않고 

장인의 재산을 취할 수 있어 
빠르게 신분이 상승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보통, 
아내 되는 사람의 나이가 훨씬 더 많았다.

때문에 
이런 고민에 쌓이게 된다.

"돈은 좋지만, 늙으신 마누라는.."

그래서 중세 매음굴의 주요 고객으로
도제들도 빠질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전 박대

유태인들의 출입은 
철저히 거부됐다.

 포주
"아니, 이교도 주제에 
감히 어딜 기독교 여자를 품겠다는거야!"

만약 이를 어기고 적발된 유태인들은
엄중한 벌을 받아야만 했다.


임신

매춘부가 
자주 임신을 하는 것도 골치였다.

이럴 때 매춘부는 포주로부터 꾸중을 받고 
독초로 만든 약을 마시고 낙태를 하곤 했는데

만약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는 영아살해죄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 매춘업은 이렇게 없어졌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을 한 뒤로
유럽은 여러 유용한 작물들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여기에는 '매독'이라는 
달갑지 않은 질병도 포함되어

15세기 말부터 
유럽에 발생하기 시작한 매독은

16세기 초 
무서운 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그러자 유럽의 매음굴도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매음굴엔 얼씬도 하지마. 
살이 썩는 병에 옮게될거야."

그리하여 16세기 말이면 
유럽의 매음굴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사라지고 만다.



중세 유럽의 거지

● 중세유럽의 거지 : 넘쳐나는 거지들

중세 유럽의 도시에는 
어디를 가나 거지로 넘쳐났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을까?

1700년 경 독일 쾰른의 인구가 약 4만명인데 
그 중 거지가 약 1만명이었다.

무려 25%가
거지였다는 얘기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는 약 11만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그 중 1만 7천명이 거지였다.

약 15%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출신은 주로
실업자, 노인, 병든 환자(특히 나병환자), 장애인,

흉년이 들어 농사 망한 농부, 
유태인 등이었다.

1552년 개혁가 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는
도시의 거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
"온 천지에 거지로 가득하다."

 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
"시골과 도시의 길목길, 성당과 시장 앞,
도시 외곽, 매춘부들이 사는 곳까지 온통 거지들로 우글거린다."

이렇게 거지들이 많았으니
당연히 거지들의 구걸 경쟁도 엄청났다.

'어떻게 하면 더 불쌍하게 보여 어필할까'가 
당시 거지들의 당면 과제였다.

어떻게 어필했을까?
153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문서에서는 이렇다.

"거지들은
가짜 장애인 투성이다."

"여자들은 더 비참하게 보이기 위해서 
갓난아이를 데리고 다니거나,"

 

"어떤 여인은 
가짜로 임신한 것처럼 꾸몄고.."

"어떤 이는 간질병 환자처럼 보이려고 
비누거품을 입에 물고는 거리에서 뒹굴기도 했다."

 

1494년 세바스티안 브란트는 
이렇게 썼다.

 세바스티안 브란트
"어떤 거지는 구걸한 돈을 이용해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다."

이 중에는 
특별한 거지도 있었다.

당시 성직자 중에는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따르고자

애써 가난을 실천하려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래서 등장한 것이 '종교적 거지'였다.

이들 역시 스스로 거지가 됐으니
당연히 구걸로 연명했다.

하지만 이들 종교적 거지들은 
곧 이단으로 몰려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요즘 왜 교회 헌금이 줄어드나 했더니,"

"글쎄, 종교거지 넘들이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거였음."

 
"아니, 이넘들이 누구 맘대로.."


● 구걸하려면 허락받고 하라 : 거지증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뭉쳐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 도시 거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거지 조직'을 결성해서
외부에서 온 다른 거지들을 몰아내기도 했다.

 거지
"이것들이 감히 
누구 나와바리에서 영업을 해!"

거지 조직들은, 
동료들이 죽으면

함께 촛불을 켜주고 미사를 올리는 등
서로의 결속을 다지기도 했다.

그렇게 거지 사회가 
조직화되고 집단화되자
 

거지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불어나서

당국에서는 도저히 수수방관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15세기 이후 도시들은
새로운 대처 방안을 내놓았다.

 
"잘 들어, 거지들아.
이제부터 구걸을 하려면 거지 증서가 있어야 됨."

 거지
"헐, 그러면 
그런 것도 자격 시험 봐야하나요?"

 
"걱정마. 
여기 도시 출신들한테는 모두 나눠줄테니."

"단, 앞으로 구걸할 수 있는 시간은
오전에만 가능함." 

"점심시간이 되면
모두  퇴근들 하라고"

이랬던 
중세 유럽이다.


● 거지가 많은 이유

그렇다면 왜 이토록
중세시대에는 거지가 많았던 것일까?

커다란 이유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었다.

사실 사회가 종교에 심취하면
수많은 비노동 잉여계급을 양상하기 마련이다.

고려시대에도 
전 인구의 10%가 승려들이었다.

당시 중세 유럽은 
훨씬 더 심각했다.

일단 거지들만 봐도
인구의 20% 수준에 가깝지 않았던가!

거지가 많아진 
이유는 이렇다.

 부자
"내가 부자임." 

 부자
"그런데 부자가 천국 가는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니, 나 어쩜 좋니?"

"방법이 있지."

 부자
"어떻게?"

"자선을 많이 해."

 부자
"누구한테?"

"밖을 봐라. 거리에 널린 게 거지들임."

이런 논리로 부자들은 
거지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자 도시의 하층민들은 
곧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소문 들었어? 
우리가 평소 쌔빠지게 일하는 것보다,"

 
"도시에서 구걸하면 
그게 훨씬 벌이가 좋다더군."

"이참에 나도 거지나 되볼까?"

"근데 그것도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던데..
난 불구자도 아니고."

 
"얌마! '종점의 기적'이라는 말도 몰라?
연기력으로 승부하면 됨."

▲ 종점의 기적

이랬던 것이다.
일종의 상부상조 시스템이었다.

부자들은 거지들이 있기에
자선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좋고

거지들은 부자들 덕분에
빌어먹어서 좋고

대신 거지들은 부자들에게 
보답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거지
"신께서 갚아줄 겁니다."

그리하여 중세 도시들은  
늘 거지들로 넘쳐나게 된다.

한편 거지에 대한 자선은
앞으로의 행운을 암시하기도 했다.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거나 
갓난아이를 처음 목욕시킬 때, 가축을 샀을 때 

나타난 거지들을 
더욱 더 환영했다.

 
"거지한테 적선했으니, 
앞으로 건강하게 잘 자랄거야."

강아지가 태어나면 거지에게
개 이름을 지어 달라는 이들도 있었다.

결혼식 피로연을 열 때
이른 아침에 문을 나설 때

새해 첫날 아침
이런 날에도 거지들은 대환영이었다.

이런 날 거지에게 적선을 하면 
행운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초상집에 온 거지에게는 
자선을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거지에게 빵을 주더라도
가장 윗부분이나 

가장 아랫부분을 
떼어주는 일은 삼가했다.

 
"거기 떼어주면 
너도 나중에 거지가 된다능."



중세 유럽의 망나니

● 공개처형과 망나니의 번뇌

중세 유럽인들은 
광장에서 공개처형이 이뤄지는 날이면 

모두 축제처럼 
이 광경을 보고 즐겼다.

평소 볼거리가 없는 이들에게
공개처형은 특별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처형장에서 사형수의 목을 베던
전문 망나니가 중세 유럽에도 있었다.
 

당시 망나니들은 대부분 
집안 대대로 대물림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망나니는
결코 쉬운 직업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망나니야 
술에 잔뜩 취해서 타점이 빗나가 

사형수의 어깨를 썰거나 
여러번 목을 치는 경우가 잦았다. ☞ 참고
"아놔, 미안... 다시 칠게."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는데..

중세 유럽에서는 
얄짤 없었다.

무조건 사형수는 
원샷 원킬을 원칙으로 했고

만약 그렇지 못했다가는 
망나니는 군중들에게 호된 야유를 들어야만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15세기 중엽 독일 아우쿠스부르크에서는 
단칼에 목을 베지 못한 망나니가 

군중이 던지는 돌을 맞고 성 밖으로 쫓겨났고
결국엔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16세기초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같은 이유로 화가 난 군중은

망나니를 죽여서 
그 시체를 들고 온 도시를 돌아다녔다.

"왜 한방에 못 죽이는거야? 
몹쓸 망나니!"

16세기 후반에는 술에 취한 망나니가 
도둑의 목을 한방에 베지 못했고

두번째도 목 대신에 
몸을 치는 실수를 범했다.

그러자 화가 치민 시민들은 
망나니를 돌로 쳐 죽었다.


● 사회적 차별

망나니는 불명예스러운 직업을 가진 
최하층 천민에 속했고

외출할 때면 반드시 자신이 망나니라는 
징표를 드러내야만 했다.

길거리의 일반인이 
의도적으로 이들을 피할 수 있도록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쟤네들 몸에는 사악한 기운이 있어서
행여라도 접촉을 해서는 안됨."

선술집에 들려 술을 마실 때에도
이들은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먼저 가게 주인에게 
본인이 망나니임을 밝혀야 했고

자리에 앉기 전 일반 손님에게도 
양해를 구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제가 망나니걸랑요.
술 한잔 마시러 왔는데, 앉아도 되남요?"

그리고 승낙받았다 해도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아야만 했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식기와 컵도 사용할 수 없어서

술집에는 망나니만 쓰는 식기와 컵이 
따로 가게 벽에 사슬로 묶여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중반
술에 잔뜩 취한 한 수공업자가 

이런 금기를 어기고 
망나니와 같은 자리에서 

우연히 음식을 먹었는데 
나중에 이런 일이 발각이 나자

수공업자는 자격증을 빼앗기고 
조직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치욕을 감당하지 못한
수공업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망나니는 일반 주거지에서도
살 수 없었고

성곽 안에서도 
살 수 없었다.

교회에서도 일반인과는 
다른 장소에 앉아야만 했다.

이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또한
교회에서 거부당하기 일쑤였고

일반인과 결혼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결혼도 망나니 집안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외적으로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박피공'과는 서로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박피공들은 항상 동물의 가죽을 벗기느라
역겨운 냄새가 몸에 베어 있었고

부패한 동물의 껍질을 벗길 경우 
전염병을 퍼뜨릴 소지도 다분했다.

그래서 이들 역시 
성곽 바깥에서 살았고 

일반인과 교류가 
금지되었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망나니의 자녀들 역시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일반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없었다.

망나니의 부인은 아이를 낳을 때에도 
조산원을 부를 수가 없었다.


● 그래도 망나니가 좋았던 점 : 의외로 부자였다

다만 도시에서 
자주 공개처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통 한 도시에서 
1년에 1~2번 정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혼자서 3천명의 목을 벤 망나니도 있었지만,
예외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망나니들은 
평소 잡다한 부업을 하며 살았는데,

어린아이를 죽인 살인자를 생매장 하는 일
거리의 똥을 치우는 일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는 일
주인 잃은 떠돌이 개를 잡는 일 

좀도둑에게 체벌을 가하는 일 
나병환자를 도시 밖으로 쫓아내는 일

도시에서 일어나는 
온갖 더럽고 어려운 잡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이런 잡일들은 
의외로 수입이 짭짤했다. 

그래서 망나니들 중에 
가난에 시달리는 자들은 흔치 않았다.

또 사형수를 사형하게 되면
특이하게도(!) 시체의 소유권은 망나니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망나니들은 시체로 얻는 
부수입이 매우 짭짤했다.

부수입이라니?
어떻게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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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들은 사형수의 시신으로
여러가지 약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몸에서 뽑아낸 기름을 재료로 
연고를 만들어서 팔기도 했고,

사형수의 피는 피부질환이나 간질병에 좋다하여 
특효약으로 만들었고,

피부는 
관절염 환자에게 제공했다.

또 사형수의 뼈는 
부적으로 만들어 팔기도 했다.

특히 당시에는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의 뼈 속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듬뿍 남아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망나니들은 이걸 이용해
뼈부적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돈벌이를 하곤 했다.

또 망나니가 쓰던 칼이나
시체의 복사뼈 관절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미신이 있어
망나니는 이런 것들도 기꺼이 내다 팔았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정형외과 의사를 자처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들이 사형집행을 하면서
사람의 뼈 구조에 대한 지식을 몸소 습득했던 탓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다리 뼈 부러진거 아직도 낫지 않은거임?"

"그럼 망나니를 찾아가봐.
의사도 못고치면 그때는 망나니라고 하잖아."



중세 유럽의 유태인

● 유태인 마을 : 게토(Ghetto)

유태인과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적대 관계 속에서 살았는데

12세기 후반이 되면 유럽에서는
유태인들과 유럽인들이 함께 사는 것이 금지된다.

그리고 14세기부터 유태인을 강제적으로 
특정 장소에 모여 살게 법으로 정했는데,

이 장소가 바로 
유태인들의 마을이었던 게토(Ghetto)였다.
 

원래 게토라는 말은 
'유태인이 모여사는 골목'이라는 뜻이다.

이런 게토는 유럽인들의 성곽이나 
시장 가까이에 주로 위치했는데

유태인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더라도
기독교인들이 사는 땅에서는 살 수가 없었고

그저 평생을 
게토 안에서만 살아야만 했고

오직 그곳에서만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 게토의 좁은 골목

만약 유태인이 
게토 밖으로 나가려면?

특별한 옷이나 징표로 
자신이 유태인임을 표시해야만 했고
▲ 가슴에 단 증표

성내로 들어갈 때에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기 때문에

밤 10시 안에 반드시 
게토로 돌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기독교 축제일이나 일요일에는
이런 자유도 규제되어

유태인들은 절대 
밖으로 돌아다녀서는 안됐다.
 
▲ 13세기 유태인

그런데 게토에 사는 유태인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폭증하게 된다.

사료를 보면 게토의 인구는,
15세기 무렵에서는 100단위였지만

16세기 후반부터는 
무려 1,000단위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 사회적 차별

유럽인들은 
유태인들을 흔히 이렇게 불렀다.

 
"우물에 독약을 넣는 넘들." 

"인류의 적"

"신을 살해한 자"

"종교의식 살인자"

 
"고리대금업자" 

'우물에 독약을 넣는 넘들'이라는 멸칭은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전 유럽을 강태했을 때 붙여졌다.

절망한 유럽인들은 
신의 노여움으로 

혹은 이교도에 의해
자신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 우물에 유태인들이 몰래 독약을 넣어서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소문이 흉흉하고 있어서
 

터무니없는 오해로
수많은 유태인들이 맞아죽기도 했다.

"신을 살해한 자"로 
붙여진 이유는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때문에 유태인들은 수많은 세월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종교의식 살인자"로 
붙여진 이유는

이들이 기독교를 모독하려는 의도로
살인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기록에 보면 
유태인들은,

기독교 어린이를 유괴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짜냈다든지,

갓난아이와 어린이를 유괴해서 
자신들의 신에게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의식이 끝나고 죽은 아이를 먹고,
피를 마셨다고 한다.

사실인지의 여부는 
미지수이지만

이런 얘기가 기독교인들에 의해 부풀려져
유태인을 탄압하는데 있어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근현대까지 쉽게 고쳐지지 않았으니,
 

1891년 유럽의 한 도시에서 
어린이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이때 의심받았던 이는 
푸줏간에서 일을 하던 한 유태인이었다.

하지만 고발 당한 유태인은 심문을 받았지만 
알리바이가 완벽해 풀려났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가 법정을 나오기도 전에 

성난 군중들은 
그가 살았던 집을 모두 부숴버리고 난 뒤였고

더 이상 푸줏간 일을 할 수 없었던 억울한 유태인는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이렇듯 유태인들에게는
비방과 중상모략, 박해, 추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고

결국 유태인에 대한 혐오는 
2차대전의 대학살로 귀결되게 된다.
 

흔히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를 
독일인들의 인종주의에 의한 피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 연원을 따져보면, 유럽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종교간의 반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참고 문헌 : 중세의 뒷골목 풍경 (양태자), 중세 유럽 산책 (아베 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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