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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영국, 해적질로 세계를 제패하다 : 캐리비안 해적들의 삶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8303358
영국, 해적질로 세계를 제패하다

●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

1588년 거친 파도 속에서 
스페인 무적함대 vs 영국 함대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스페인의 작전은 영국의 주력 함선을 피해서
런던에만 상륙하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사실 누가 봐도, 이 싸움의 승자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것이었다.

 펠리페 2세
"우리 육군은 세계 최강임.
상륙만 하면 허술한 영국군 따위는 상대가 안됨."

영국을 몰살시켜 아예 그 땅에 눌러 살려고 
살림을 한가득 챙겨온 사령관도 있었다.

 스페인 사령관
"상륙만 해봐라. 
영국넘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은 모두 내가 차지해주지."

이렇게 
호언장담했는데

영국 함대의 함포 사거리에
스페인의 함포의 거리가 미치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스페인 사령관
"아놔, 왜 이렇게 허접한 대포를 사왔어?
영국넘들 대포는 저리 잘 나가는데.."

사실 영국이나 스페인이나 대포를 
다른 나라에서 사다 쓰는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갑작스런 기상 변화가 
스페인을 엿먹였다.

영국 함포에 쳐맞고 
침몰한 배보다

돌풍과 강풍에 의해 
물귀신이 된 경우가 더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영국 해안의 수위가 너무 얕아
제대로 해안으로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스페인 사령관
"짜증도 
이런 짜증이 있나.."

결국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제대로 힘 한번 못 쓰고
영국 함대에 무릎을 꿇게 된다.

예상밖으로 
영국의 승리였다.
 

이후 영국은 
빠르게 해상 패권의 1인자로 부상하여

해외의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고
결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 19세기 후반 영국의 영토

반대로 신대륙을 발견하며
전 유럽인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남유럽 국가의 시대는 급속도로 저물게 된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스페인과 영국은 
왜 서로 싸우려고 했던 것일가?
 

사실 오랫동안 두 나라는 
종교적인 문제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영국은 개신교를 맏었지만
스페인은 카톨릭을 믿었다.

그런데 영국이 왕위를 놓고 
개신교계 vs 카톨릭계가 다투고 있을 때
 

스페인은 내정을 간섭하며 
카톨릭 세력을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신교 세력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집권하게 되었으니,

 엘리자베스 여왕

스페인의 필리페 2세는 
내심 속이 상했다.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여서,
스페인을 증오하며

신대륙 발견으로 일취월장하고 있는 
스페인의 기세를 어떻게 해서든 꺾어놓고 싶었다.

 영국인 
"쳇, 누구 맘대로 
지들끼리 신대륙을 나눠가져?"

그랬는데, 영국의 바람이 
누군가의 뜻밖의 행동들로 본의 아니게 이뤄지고 있었다.

대체 누가 그랬는가?
바로 영국의 해적들이었다.


● 영국 해적, 국가적인 영웅이 되다

1562년 대서양의 이권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양분하고 있었다.

이럴 때 영국인 존 호킨스은 
귀에 솔깃한 얘기를 듣게된다.

 영국인
"소문 들었는가?
노예무역을 하면 그렇게도 짭짤하다던데."

 존 호킨스 
"어떻게?"

 영국인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구입해서.."

 영국인
"신대륙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에다가 파는거야.
그럼 부르는 게 값이지."

 존 호킨스
"에이, 그게 말이 쉽지.
스페인 정부 허가 없이는 무리야."

 영국인
"걱정마! 넓은 바다에서 
몰래 하는건데 걸리긴 왜 걸려?"

 존 호킨스
"헐, 정말?"

그렇게 시작한 노예무역이었는데
역시나 짭짤했다.
 

하지만 불법은 
불법을 낳기 마련이다.

 존 호킨스
"이왕 하는 도둑질이라면
폼나게 크게 해봐야 하지 않겠어?"

이런 생각에 
호킨스는 

다른 나라의 노예선들을 훔쳐서 파는 식으로
사업을 전환하게 된다.

이를테면 '불법 밀매'에서
'불법 강도'로 돌변한 것이었다.

 존 호킨스
"보라구! 돈 한 푼 안들이고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곧 스페인 정부는 노예선 해적질을 두고
공식적으로 영국 정부에 항의했다.

 스페인 관리
"아놔, 하루이틀도 아니고 
해적들 날뛰지 않게 관리 좀 똑바로 해주삼!"

 엘리자베스 여왕
"어? 금시초문인데요. 
그런 일도 있었나요?"

하지만 영국 여왕은 
속으로 신이났다.

 엘리자베스 여왕
"아이고 꼬시라 ㅋ
우리도 못한 걸 해적들이 해줬구나."

한술 더 떠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들에게
배까지 구해다주며 은밀히 지원을 해줬다.

그러자 힘을 얻은 해적들은 
더욱 가열차게 약탈을 자행했으니
 

엄청난 금은보화들이 
스페인의 창구에서 

영국인들의 주머니로 
스리슬쩍 이동하게 되었다.

심지어 해적 선장 호킨스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으면서 
해군 총감독에 임명되기까지 했고

 존 호킨스
"하하하" 

스페인과의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영국 정부는 해적 선장들에게 

스페인 선박의 나포 및 약탈 허가증을 
정식으로 쥐여주면서

해적들을 영국 해군의 의용군으로
간주했을 정도였다.


● 영국 해적, 국가주도 산업이 되다.

1550년에서 
1630년 사이에 영국은 

장차 세계 최고 상업대국을 
수립하는데 초석이 될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나씩 시행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있었다.

 북미 해안에 식민지 건설하기 : 뉴잉글랜드
② 카리브해에 식민지 건설하기 : 자메이카

 동인도회사 설립하기 : 인도
④ 아프리카, 중동에 무역 거점 설치하기


그리고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은 주식회사 제도를 이용하게 된다.

하지만 
투자자가 꼬이지 않았다.

 영국인1
"글쎄? 식민지 개척이
항상 돈벌이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영국인2
"아직까지 스페인 넘들이 강성하데..
식민지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하지만 해적 사업을 한다고 광고를 내면 
양상이 사뭇 달랐다.

당시 해적 사업은 영국 정부에서 면허를 내주고
직접 관리까지 하고 있었다.

 영국인
"이번에 카리브해에 있는 스페인 상선을 털고자 
드레이크 상사에서 투자자들을 모집한다네."

 영국인1
"우왕, 좋은 소식!"

이러면 금방 사람들이 몰렸다.
이유는? 

어떤 사업보다 확실한 마진을 
보장해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1585년에서 1603년까지 
영국의 해적 사업에 투자했던 주주들은 

평균 60%의 
투자수익률을 얻었다.
 

반면에 같은 기간 
단순 무역업에 투자했던 주주들은

평균 20%의 투자수익률 밖에 
올리지 못했다. 

때문에 당시 해외 확장을 위해 투자된 
총 1,300만 파운드의 금액 중

무려 1/3 이상의 자금이 
해적 사업으로 투자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영국 정부는 식민지 사업을 홍보하는데 있어

해적 활동의 떡밥을 
빼놓지 않고 사용했다.

"이번에 동남아에 
무역거점을 만들려고 하는데,"

"만약 일이 잘 안 되면, 주변의 중국 상선을 털어서라도
투자금을 매꿀테니 안심하고 투자하세요!"

"절대 손해 보는 일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 해적질은
영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애국심과도 같았다.

 영국인
"스페인 넘들 상선을 터는 것은
곧 영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야."

상황이 그러했으니
해적질을 가장 잘했던 사람에게는

국가적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하면서
명예를 칭송했고,

이들의 활약상은 당시 유행가의 노래 가사,
신문 기사의 주요 소재거리,

심지어 목사들의 설교 주제로 
이용되기도 했다.


● 해적질은 왜 그토록 중요할까?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빨리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알고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된다.

그렇다면 보자. 

16세기 초,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재산을 강탈해서

열심히 금, 은, 향신료 등의 
사치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영국 해적들이 훔쳐갔다.

 영국인
"어차피 도둑넘들꺼 훔치는건데 
뭐가 잘못임?"

그렇다면 왜 갑자기 16세기부터 
해적들이 극성한단 말인가?

"그 이전에 바이킹도 있지 않았음?"

아니다.
사실 중세시대 바이킹들은 

해적이 주업이 아닌, 
무역을 주로하던 상인들이었다.

기록을 보면 바이킹들은 
10세기 이후 300년 동안

총 340번의 
약탈만을 했을 뿐이었다. (1년에 한 번 꼴)

하지만 16세기 이후 범람했던 
대서양의 해적들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해적질이 갑자기 득세하게 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배 좋아졌지, 항해술 좋아졌지."

"콜럼부스, 마젤란 같은 탐험가가 나타나는 만큼
우수한 해적들도 비례적으로 배출되었던 거임."

"신대륙 발견 전까지 유럽은 가난했어.
그때 싣고가는 것들이야 변변치 않았지."

"그런데 스페인 넘들이 신대륙 발견하더니
금, 은, 향신료, 설탕.. 이런 걸 잔뜩 싣고 다니는거야."

"생각해봐. 이런 것들은 
한번 털이에 성공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이야!"

즉 16세기 해적의 창궐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적들이 
극성을 부리게 되자

곧 상선들은 화물의 부피 줄이는 대신에
더 많은 선원을 배치하고 함포를 달게된다.

 영국인1
"이렇게 하면 
운송비 낭비 아니냐고 걱정들 하겠지만,"

 영국인1
"어차피 사치품들은 값이 엄청나기 때문에
그깟 운송비 아끼겠다고 위험을 감행할 수는 없음."

 영국인2
"맞아. 안전운행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음."

그런데 상선들이 
무장을 하게되자,

오히려 해적행위를 확대 재생산하는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읭? 무슨 말임?"

"생각해봐. 모든 배들이 자기방어를 하겠다고
무장을 갖췄는데.."

"만약 그런 상선들이 
교역에서 벌이가 시원치 않음 어떻게 될 것 같음?"

"글쎄.."

"무기도 있겠다, 
마침 지나가는 다른 상선도 보이겠다."

"순간 해적으로 돌변하는 거지."

"아!"

결국 근대시대 해상에서
상선이 해적으로 돌변하는 경우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고 만다.

"이대로 돌아가면 
투자자들한테 뭇매 만든다."

"무역이 시원찮았다면, 
약탈이라도 해야한다능."

사실 상선이 무역업자와 해적질을 겸업하던 것은
영국인들이 최초는 아니었다.

중세시대 바이킹들도 그랬고
베네치아의 상인들도 그러했다.

동아시아에서 왜구들도 
실은 무역업에 종사하던 대마도 상인들이 주축이었다.

결국 전통시대 상인과 해적은 
한 끗 차이였던 것이다.

다만 중세의 해적과
근대 서양의 해적은 이런 점에서 달랐다.

"근대 서양의 해적들은 
주로 상선을 털었지만.."

"당시 아시아의 선박들은 
부피가 큰 곡식들을 주로 수송했지. 세곡선을 생각해봐."

"그런데?"

"이런 건 털어봤자, 싣고 가다가 힘 다빠짐.
그래서 곡식 수송선들은 원래 잘 안털려."

"대신 바이킹이나 동양의 해적들은 
해안가 마을을 덮치는데 보다 주력했지."


● 영국의 동반자, 네덜란드

16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가
카톨릭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게 그 이유였다.

이때 영국은 물심양면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왔다.

 엘리자베스 여왕
"스페인 망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돕는다!"

그리고 결국 네덜란드는 
독립을 하게 되었고

이후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 시키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16세기 들어 네덜란드는 
동유럽의 곡물들을 수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화물들은 해적들이 보기에 
메리트가 떨어졌다.

 해적
"쳇! 덩치만 크고 값은 싸고
미쳤어. 저런걸 털게?"

따라서 곡물을 수송하던 
네덜란드 선장들은

해적들의 도발 따위는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됐다. 

 네덜란드 선장
"털어봐! 말리지 않을게.
가마니, 포대 짊어지고 가는 것도 재미는 있을거야 ㅋㅋ"

하지만 곡물이나 목재를 싣고가는 일은
해적에게 털릴 일은 적었지만,

교역품들의 이윤이 낮았으므로
운송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이지 않으면 안됐다.

이럴 때 네덜란드에서는 플라이칩(fluitschip)이라는 
새로운 배를 건조하게 되었다.
 
▲ 플라이칩

최대한 많은 화물을 싣기위해 
바닥을 평저선에 가깝게 만들었기 때문에
 

배의 속도가 느리고, 
항해 능력도 떨어졌다.

배에는 승무원의 수가 적었고
함포 따위의 무기도 싣지 않았다.
▲ 플라이칩의 구조

하지만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플라이칩은 곡물과 목재를 수송하기에는 적격이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의 플라이칩은
곧 유럽 곳곳으로 침투하여

경쟁국들보다 
훨씬 싼 운송료를 제시하면서

유럽의 식료품 운송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들의
몰락만 더욱 가중되었다.

"유럽 내 교역에서는 
네덜란드의 플라이칩에 밀리고.."

"대륙간 교역에서는 
영국 해적에게 털리다보니.." 

때문에 17세기 이후 세계의 해상권은
신흥강자 영국과 네덜란드의 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토사구팽, 주식회사 그리고 식민지 사업

● 토사구팽 당하는 영국 해적들

시대가 변하고 트렌드가 변하면
한때 애용하던 물건이라도

쉽게 용도폐기 하는게 인간들의 심리다.
영국의 해적들도 그렇게 당했다.

영국이 해상을 장악하게 되자
영국인들은 머리를 굴리게 된다.

 영국인1 
"이젠 시대도 좋아졌는데 
배에 쓸데 없는 것좀 덜어내고.." 

 영국인1 
"그냥 비무장으로 다니면 안됨?"

 영국인2 
"맞아, 운송 비용도 장난 아니고.
쓸데없는 것 좀 덜어내고 싶어."

게다가 영국이 
패권을 차지하면서부터

신대륙 원거리 교역의 상품들은
값이 비싸면서도 부피가 큰 

설탕, 커피, 담배, 향신료와 같은
농산물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운송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영국은 
해군을 창설하기로 마음 먹었다.

 영국 관료
"해적들아, 이제 고마해."

 영국 관료
"앞으로 스페인 넘들이 집적거리면 
해군으로 상대할거니깐," 

 영국 관료
"이제 너희 해적들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른 직업을 알아보라고."

투자자들도 
더 이상 해적사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국인1
"요즘 스페인 상선 별 볼 일 없잖아.
해적 사업도 한물 갔어."

 영국인2
"요즘엔 신대륙 농산물에 투자하는게 대세임."

 영국인2
"사탕수수, 담배, 커피..
이런 것들이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이지."

이렇게 만들어진 
새 질서 아래

무장한 상선들은
어떤 배든 해적 혐의를 받게 되었으니,

그동안 자신들이 해적임을 
자랑스럽게 떠벌이던 영국 해적들은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 주식회사의 탄생 : 영국 해군의 존재 이유

17세기 유럽인들은 
세계 최초로 주식회사를 만들게 된다.
(네덜란드가 최초였고, 곧 영국이 수용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대륙 개척으로 큰 돈이 필요한 사업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최초의 주식회사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였다.
 
▲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당시 주식회사는 
오늘날과 거의 흡사했다.

투자자들은 철저히 익명성이 보장되었고
소유권과 경영권은 분리됐다.

회사 경영은 
선출된 이사들이 행했고,

투자자들은 경영자의 결정들을 받아들이거나
싫으면 주식을 팔아버리면 그만이었다.
 
▲ 영국의 동인도회사 전경

여기에 혁신적인 게 있었으니
바로 회사의 영속성이다.

 영국 관료
"주식회사는 파산, 강제해산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영원히 지속된다능."

물론 이전에도 주식회사와 비슷한 것이
유럽과 중국 역사에도 있었다.

다만 예전의 투자방식들은
애초부터 해산 날짜를 잡고 시작하여

사업 날짜가 종료되면
모든 재산을 동업자들에게 분배하고

회사는 
문을 닫는 식이었지만,

17세기의 주식회사는
영속적으로 장사를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주식회사 방식을
유럽인들은 도통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무려 19세기 중반까지도 그러했다.)

 영국인1
"생전 알지도 못한 낯선 사람들과 
사업을 같이 한다는 자체가 너무 위험함."

 영국인2
"맞아. 아무리 큰 사업이라도 
10명 정도 모이면 못할 사업도 없거늘."

 영국인2
"왜 굳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들임?"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당시만 해도 

대규모 프로젝트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사가 문을 닫지 않고
영속적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도 

투자자들에게는 
커다란 불만이었다.

 영국인1
"이거 이러다 돈 떼이는 거 아님?
그냥 내돈 돌리도.."

 영국인2
"맞아, 원금은 돌려주지도 않고
순전히 배당금만 챙겨먹으라는 소리 아니겠음?"

사실 당시의 배당금이라는 것은
수익이 생길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보통은 4~5년씩, 길면 10년은 기다려야만 했다.

가량 17세기 동남아시아까지 한번 갔다 오려면 
보통 3년 정도가 걸렸고
 

그 사이에 수익이 변변찮으면 
배당금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약 속에서도 
주식회사 제도는 

결국 성공했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유지되게 된다.

이유가 뭘까?

한마디로 군사력(해군)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영국 관료
"지금 스페인, 포르투갈 넘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영국 관료
"이럴 때 군비경쟁에서 지면 
지금까지 이룩한 식민지들을 다 빼앗기는 거임."

 영국 관료
"그러데 선박과 무기 만드는데 
돈이 좀 많이 들어감?"

 영국 관료
"그리고 식민지에서 요새 만들고, 
현지에서 보급품을 사고, 일꾼을 고용하려면.."

 영국 관료
"또 그게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줄 앎?"

▲ 무역 거점

 영국 관료2 
"맞아. 몇 사람만 가지고는 돈을 모을 수 없어.
그러니 익명을 기본으로 해야함."

 영국 관료2
"또 회사가 영속해야 
군대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거야."

 영국 관료2
"하지만 걱정말라고.
원금을 회수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해."

 영국 관료2
"주권 찍어줄게. 
팔고 싶으면 언제든지 팔라고."

그랬다. 영국은, 해적 대신에 해군으로 
바다를 지키려다보니..
 
▲ 17세기 영국 해군

자금 마련을 위해 
주식회사를 이용하게 되었고

투자자자들의 수익을 
확보해 주기위해

식민지를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moon_special-37



캐리비안의 해적들, 버커니어의 삶

● 캐리비안의 해적들, 버커니어의 탄생 

영국에서 해적질을 
금지하게 되자

17세기 중반부터 
바다의 해적들의 자리는,

캐리비안의 해적들로 대변되는
버커니어(Buccaneer)들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들은 바다를 떠돌며 살던 사람들로
다국적, 다인종으로 이뤄진 무리들이었다. 

출신은 
각양각색이었다.

표류자
도망 노예

탈주 범죄자
종교, 정치 망명자 등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서 살던 대표적인 곳이 

서인도제도의 
히스파니올라 섬이었고
(오늘날 아이티, 도미니카가 있는 섬)

이곳에서 그들은 구걸, 좀도둑질, 사냥질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들은 큰 말썽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총독은 
이들 버커니어들이

자신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스페인 총독
"이런 부랑자 넘들! 
모두 다 쫓아버려."

그리하여 결국 
스페인은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고

버커니어들은 투르투가(Tortuga)라는 
조그만 섬으로 도망쳐 들어와 

이곳에서 
해적 소굴을 만들고
 
▲ 투르투가의 밤 모습

앞으로는 스페인 선단을 공격하겠노라고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두고바라. 
원수같은 스페인놈들!"

실제로 이들은 스페인 상선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스페인 총독
"아놔, 영국 넘들도 모자라서
이젠 부랑자 녀석들까지 우릴 괴롭히고 있네."

때문에 스페인은 어쩔 수 없이 
대서양을 건너는 선단에 호위함을 붙이고

해안가에 요새를 짓는 따위에
엄청난 비용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식민지 항구도시들을
틈만 나면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기 일쑤여서

결국 스페인은 
카리브해의 대부분을 포기해야만 했고,

해안가의 식민 도시들은
해적들의 위협을 피하려고 

내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새롭게 도시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 민주주의 속에 살았던 버커니어들

17세기 중반 이후 
버커니어들의 수는 더욱 급증하게 된다.

이유는 이랬다.
한때 국가의 영웅으로 칭송 받았던 해적들이

전쟁이 끝나고 
영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가치가 없게되자 
토사구팽을 하게 되었다.

 영국 해군 제독
"해적들아 고만 하래도. 
앞으로는 더는 봐주지 않겠어!"

그러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해적선 선장들은 
하나의 패거리로 뭉쳤다. 

 
"아놔, 감히 토사구팽을 해? 
두고 봐라 영국 넘들."

그렇게 모인 이들은 
조직을 위해 단체 행동강령을 만들게 된다.

"선장은 누가 하지?"

"무엇보다 생사가 걸린 문제이니,
전쟁 경험이 많은 사람이 맡으면 좋겠어."

"존경을 받는 사람."

"능력있는 사람."

이런 기준으로 
먼저 선장을 선출했다.

여기서 가문, 학벌, 출신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이때 선출된 해적선의 선장은 
결코 독재자가 될 수가 없었다.

"선원들은 언제든지 
선장을 내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선장을 맡겼거든."

그렇다면 보자. 

당시 전세계가 왕정사회이자,
신분계급의 사회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캐리비안의 버커니어들은
세계 유일의 민주사회를 이룩하고 살았던 셈이다.


● 자유주의 속에 살았던 버커니어들

버커니어들은 대부분을 
철저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다.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매춘부를 상대해도 자유였고

심지어 동성연애도 
배에서 허용됐다.
 

다만 몇몇 반사회적 행위들은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예를 들어 
약탈물의 일부를 숨겼을 경우에는 

무인도에 내버리거나
사형까지도 내릴 수 있었다.

버커니어들의 해적 사업은 
본질상 조합원들이 무한책임을 지는

오늘날의 '합자회사'처럼 운영되었고
이들은 직급에 따라 각자 대가를 받았다.

"선장은 금 2개, 항해사는 1.5개, 
나머지 선원들은 1개"

이런 배분 방식이 
당시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전리품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만 해적선은 
선원들 모두의 공동재산이었다.

"배를 혼자서 훔친게 아니잖아."

"다같이 힘을 모아 훔친거지. 
그러니깐 공동의 소유야."

여기에 버커니어들은 
일종의 복지정책도 가지고 있어서

상해나 사망 사고에 
대비하고 있었다.

"몸의 일부를 잃었을 때는
금전적 보상이 주어짐."

"또 남편이 죽은 미망인들은
남편의 지분을 받을 수 있음."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꽤나 호의적이었다.

"나포된 배의 선원들이 승객들은
저항하지 않으면 굳이 죽이지는 않는다."

"나포된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게
식량은 남겨두고 떠나고,"

"만약 배까지 빼앗을 때는
안전한 항구로 데려다 준다."

이는 무조건 
도륙하고 살상하던, 

전통시대의 일반적인 해적들하고는
근본적인 마인드부터 달랐던 것이다.
▲ 카리브해의 해적 마을

상황이 이렇다보니
포로로 잡힌 선원들 중에서는

해적들의 민주적인 삶을 부러워해
해적단에 자청하여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400여 척의 배를 나포했던 
해적선 선장 바르톨로뮤 로버츠는 이렇게 말했다.

 바르톨로뮤 로버츠
"정직하게 일해야 하는 세상에서는
깡마른 평민들과 낮은 임금, 힘든 노동밖에 없는데.."

 바르톨로뮤 로버츠
"해적 생활을 하면 
마음껏 쓰고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바르톨로뮤 로버츠
"즐겁고 편안하게 살면서
자유와 힘을 만끽할 수 있다."

 바르톨로뮤 로버츠
"위험이라고 해봐자, 잡혀서 교수형을 당할 것 같을 때 
한두번 정도 줄행랑을 치는게 그만임."

 바르톨로뮤 로버츠
"이러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 
해적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참고 문헌 : 만들어진 역사 (조셉 커민스), 단숨에 읽는 해적의 역사 (뤼팡).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키네스 포메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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