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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노예 무역 : 왜 흑인들은 신대륙으로 갔나? + 조선시대 흑인 노예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5521084
● 아프리카는 노예의 대륙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의 일이다.

아프리카를 처음 방문한 한 
문명인 탐험가는

현지 이교도들의 헐벗음, 식인, 가난함을 보고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그의 저서에 
이렇게 서술했다.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짐승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이후 문명인들은 
아프리카 현지에 교역 기지를 세우고

그곳을 통해 흑인 노예들을 구입해서
자신들의 문명세계로 팔아 넘겼다.
 

여기까지 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같다.

그리고 그 문명인을 놓고
대부분은 유럽의 백인들을 생각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 문명인들은 
이슬람 세계의 '아랍인'들이었다.
 

사실 아프리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노예를 구대륙의 유럽과 중동으로 
공급해주던 창구와도 같았다.

이미 2천년 전 로마제국시대부터
아프리카의 노예상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며
백인들에게 흑인 노예를 팔기 시작했었다.
 

본격적으로 노예 거래가 활성화된 것은
10세기 이슬람인들에 의해서였는데,

당시 이슬람 상인들은 동아프리카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고

자신들의 상품을 
현지 흑인 노예와 바꾸는 식으로 거래를 했고

구입한 흑인 노예들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전역으로 팔아 넘겼다.

오늘날 케냐, 탄자니아를 비롯하여
동아프리카 10개국에서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스와힐리'라는 언어는,

실은 이슬람 상인들의 전초기지였던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섬에서 사용되던,

아랍어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동아프리카 인들의 언어였다.
 
▲ 스와힐리어 사용 국가들

즉 오늘날 스와힐리어는, 
중세시대 이후로 활발했던 

이슬람- 동아프리카 간의 
노예 무역의 흔적을 나타내는 상흔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팔려갔을까?

10세기부터 19세기까지 
근 900년 가까이 

도합 400만 명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 19세기 이집트의 흑인 노예 시장

그래서 요즘도 중동과 축구를 하게 되면
희한하게도 흑인 선두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들은 이민자들이기보다는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흑인 노예의 후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사우디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


● 왜 유럽은 대서양으로 눈을 돌렸는가?

중세시대 유럽은 
흑인 노예의 두번째 소비지였다.

주로 동유럽의 비잔틴에서 
흑인 노예를 소비했는데

당시 서유럽은 가난했기 때문에 
노예를 크게 수입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까닭이다.
 
▲ 비잔틴 제국의 흑인 노예들

하지만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 이후로 
화약, 나침반, 종이, 항해술 등을 전수받아

기술적으로 
진일보하게 되었고

여건만 주어진다면
동유럽처럼 부유해질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다만 내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딱히 돌파구가 없었다.

당시 동유럽과 중동 지역에는
오스만 투르크라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오스만 제국의 영토

오스만이 그렇게 대단했나?
대단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와 
체계적인 관료제도,

단일 종교로 무장된 
강력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국가였다.

그리고 군대와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계무역'이라는 

'캐쉬 카우'를 가지고 
없이 젖을 짜내고 있었으니,

 
▲ 오스만 제국의 교역 루트

당시 유럽으로 수입되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진귀한 특산물은

모두가 이슬람 세계를 거쳐서 
유입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무역으로 얻는 중계차익이란 
실로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오스만의 교역선
 
때문에 서유럽인들은 
바다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가장 먼저 
바다로 진출했던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당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는 
황금과 노예라는 

매혹적인 상품이 있어서 
유럽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일대는 오스만 제국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무역을 위해서라면 
멀리까지 나아가서

직접 현지에서 
교역거점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됐는데,
 

그걸 포르투갈인들이
기어코 실천했던 것이고

그래서 만들어진 무역거점이 
오늘날 서아프리카의

상아해안(코트디부아르), 황금해안(가나), 
노예해안(나이지리아)과 같은 곳이었다.


● 교역보다 더 좋은 것은 폭력이었다

우리는 흔히 
교역(무역)이라고 하면

부를 창출하고, 
문명화를 촉진시키고,

사회후생을 높이고,
서로 싸우지 않고도 나눠가질 수 있는

평화롭고 
유용한 수단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폭력이다.

 

남의 재산을 빼앗고 
강제로 노동을 시키는 것은

자발적인 교환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통시대 역사를 보면 
한 국가의 부는, 생산 기술이나 시장 따위보다는

군대와 세금 징수관(=지방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 러시아에서 악명 높았던 몽골의 다루가치

실제로 몽골 원정군이나 
바이킹들이 휘두르는 칼은

무역으로 얻을 수 있는 수십 년 치의 이득을
단 하룻밤 사이에 일궈낼 수 있었고
 

수백, 수천만 명의 
거대한 농경문명은 

고작 수천, 수만 명의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착취를 당하기도 했다.

인구 천만 명 규모의 
중견급 농업국가 조선도

수십 만의 인구밖에 되지않은 만주족에게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당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노예를 사러 간
유럽의 상인들도 곧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

처음에는 교환 방식으로 
노예를 사갔지만

나중에 유럽인들은 
폭력을 스스로 주선하게 된다.
 

현지의 노예 사냥꾼들에게 
성능 좋은 총을 쥐여주게 되면

더 많은 노예를 
보다 싼값에 사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노예무역은 왜 발생했나?

오늘날 미국은 
이민자들이 창조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을 우리는 흔히 
백인들의 개척정신 때문이라고 배워왔다.
 
▲ 서부 개척시대

하지만 19세기 이전에 대서양을 건너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 중

3/4 정도가 아프리카 흑인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당시 1200만 명의 흑인들은 가축 운송보다도 더 열악했던, 
'노예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 당시 노예선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유럽인들은

굳이 힘들게 흑인들을
신대륙까지 데리고 와야 했는가?

사실 흑인들을 아프리카 현지에서 
바로 써먹었더라면 

중간에 새어나가는
인력 손실이 크게 줄어들어, 더 큰 이득이지 않는가!

실제로 신대륙으로 끌려온 흑인들 중 
3년 이상 생존했던 비율은 30%도 되지 못했다.

수송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예들을 화물 적재하듯 쑤셔넣었던 탓에

항해하는 도중에만
20%가량이 죽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프리카 현지에서 
노예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게다가 현지 생산을 하게 되면
노예들은 이미 기후와 풍토에 길들여져 있어 

학습이나 적응을 하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된다.

혹시 현지민들의 폭동을
유럽인들은 두려워했던 걸까?

하지만 노예제는 
아프리카에서 꽤 오랫동안 운영되어 오던 체제여서

실제로 사하라 이남의 
말리, 송가이, 가나와 같은 흑인 국가들은

모두 노예제로 
운영되어 오던 국가들이었다.
 
▲ 당시 서아프리카의 흑인 왕국들

때문에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숙명론이 강했다.

현지에서 수많은 노예을 부려 
농장을 운영한다고 해도

결코 그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힘들게 
흑인들을 데리고 가야 했던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백인들 입장에서는 이미 신대륙이라는 
식민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신대륙은 자신들의 소유지였지만

아프리카는 
남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단 말인가?

사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아프리카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중세시대 유럽으로 흘러든 금의 대부분도
실은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 공급된 것이었다.
 

근세가 시작되고
유럽인들이

최초로 식민지를 건설한 곳도
아프리카의 세우타였다.

포르투갈이 이곳을
1415년에 정복한 것이다.

이후 포르투갈은 항로의 개척을 위해
열심히 아프리카 해안의 지도를 그려왔고,

아프리카의 해안 지리를
어떤 이들보다 더 정확하게 알게 된다.
▲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

그리고 최초로 
흑인 노예들을 이주시켜 

설탕 플랜테이션을 건설했던 곳도
아프리카의 상투메라는 섬이었으니,
▲ 상투메 섬의 위치

16~17세기 동안 
약 1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이곳의 사탕수수 밭과 
정제소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신대륙에 활용했던 게, 바로 브라질의 농장이었다.

어쨌든 지리적인 조건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또 논리적으로 보나 

신대륙으로 
흑인들을 끌고 가는 것보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부리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이 철폐되는 
1880년 이전까지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대규모로 노예농장을 경영했던 사례는 전혀 없었다. 

왜 그랬을까?


● 질병 때문에 신대륙의 원주민은 증발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식민 경영을 할 수 없었던 몇가지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강한 상대였다.

아프리카인들은 오랫동안 
말과 바퀴, 철을 사용해 왔고

교역을 통해 
총기류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유럽인들이 
확실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대포는

당시의 기술로는 결코 아프리카 내륙 깊숙한 곳까지 
이동할 수가 없었다.
▲ 영국군을 곤경에 빠트렸던 줄루족 전사들

그러니 근세 시기, 아프리카를 점령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과 대가가 따르는 일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교역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오랫동안 
유럽인들과 교역을 해왔기 때문에

교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했던 방식처럼
애써 피를 흘리며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교역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바꾸는 편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무려 천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을 건너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질병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구대륙의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스페인인들과 함께 
천연두, 홍역 등의 질병이 들어오자

원주민들의 군대와 제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다.

상당수 지역에서 정복된 지 수 십년도 지나지 않아
인구의 90% 이상이 죽어나갔다.

카리브해 지역의 피해는 
더욱 참혹해서

50년 사이에 원주민이 100% 가깝게 소멸해서
카리브해 섬들이 완전히 텅텅 비어 버렸다.

반면에 아메리카 대륙에는 
토착 전염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풍토병에 대한 걱정이 거의 없었다.

신대륙에 토착 전염병이 적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가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축이라고 해봤자
안데스 산맥의 라마가 전부였다.
 

즉 인간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은
가축과 함께 공생하면서 발생한 것이 대부분인데,

구대륙에는 여러 가축들이 있었지만
신대륙에는 가축이 없다보니,
  

원주민들은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은 멀쩡했던 것이다.

 [인간의 질병]

 인간은 1만 년간이나 
 가축과 공생하면서

 개와는 65종, 소와는 55종, 
 양과는 46종, 

 돼지와는 42종이나 되는
 질병을 공유하며 살아왔다.

 특히 천연두와 결핵은 소에게, 홍역은 개에게, 
 독감은 돼지와 닭, 나병은 물소에게 비롯되었다.


● 질병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과 번영하는 것은 
별개의 개념이다.

신대륙 사람들이 
자연스레 소멸하면서

스페인 사람들과 이후의 유럽인들은 
손쉽게 대륙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신대륙을 차지한 유럽인들은 
결코 스스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살아남은 인디오들에게
설탕 플렌테이션의 일을 시켜봤지만

인디오들은 크게 저항했고,
농사 경험도 미천하여 일도 서툴렀다.
 

때문에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의 노예라면
질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는 
일찍부터 교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유럽의 질병과 접촉해 왔던 터이다.
 

따라서 천연두, 홍역과 같은 질병에
유럽인만큼 면역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준 것도 질병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들의 질병에 
똑같은 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말라리아아 황열병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풍토병에는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식민지 건설에
크게 주저할 수 밖에 없었고

식민지를 경영하는 대신에
해안가에 작은 무역 거점을 설치해서 

그 안에 머무는 식의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 삼각무역 : 유럽이 부유하게 된 원동력

흔히 생산의 3요소를
토지, 노동, 자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생산요소들이 
각각 대륙마다 하나씩 특화하여

엄청난 스케일로
분업을 극대화 했던 시기가 있었으니,

바로 17~18세기의 
대서양 삼각무역이 그것이었다.
 

토지는 신대륙의 농장,
노동은 아프리카의 노예,

자본은 유럽의 사업가들에 의해 
전담되어 돌아가는 

당시의 삼각무역의 방식은
이러했다.

① 노예를 신대륙의 농장으로 보내어
원료를 생산하게 한다.
 

 생산된 원료는 유럽의 공장으로 가져가서 
공산품으로 만든다.
 

③ 공산품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가서
노예와 맞바꾼다.

④ 다시 노예를 신대륙의 농장으로 보내어
원료를 생산하게 만든다.

 

무한 루프였다.
이런 순환을 계속 하다보면 

결국 유럽인들은
돈이 쌓이게 된다.
 


이런 삼각무역의 선두주자는, 
포르투갈이었는데

포르투갈인들은 15세기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고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플렌테이션 농장에 팔고,

농장에서는 사탕수수를 생산하여 
유럽인의 공장에 팔고

공장에서는 설탕을 생산하여 
소비지로 파는 식으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게 된다.
 

그러자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도 
이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
브라질의 담배 농장, 페루와 멕시코의 은 광산이 그랬다.
 

다만 유럽의 최강국이라 할 수 있었던 
프랑스는 

이들 국가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에 동참하게 된다.
 


● 아이티의 비극 : 잘못된 식민지 정책

카리브해에는 
'히스파니올라'라는 섬이 있는데,

이곳은 카리브해에서는 2번째로 큰 섬으로
남한 면적의 3/4 정도 크기다.
 

이 섬은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제일 먼저 도착한 땅이기도 한데,

특이한 것은 
한 섬에 두 나라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섬의 1/3은 아이티, 
2/3은 도미니카 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데

오늘날 국경선을 경계로 
대조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어 흥미롭다.
 
▲ 좌측 : 아이티, 우측 : 도미니카 공화국

섬 동쪽의 도미니카는 
우거진 숲으로 이뤄졌는데, 

서쪽의 아이티는 
민둥산처럼 황량한 것이다.

전혀 같은 섬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는 자연환경에서 비롯되었다.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쪽은 
'바람받이 사면'으로 다우지역이나

서쪽의 아이티는 
'바람의지 사면'이라 비가 적다.

또 강은 대부분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흐르는 반면에 

아이티는 산지가 많고 강과 평야는 적으며, 
석회암층이 발달하여 토양이 척박하다.

그러나 두 나라의 차이는 
단순히 자연환경 탓만은 아니었다.

원래 아이티는 200년 전까지만 해도 
숲으로 우거졌던 곳이었다.
▲ 18세기 당시 아이티의 수도, 포트오브 프랭스

그런데 산림이 황폐화된 이유는 
잘못된 식민지 정책에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조성되면서

아프리카에서 일할 노예들을 
대거 수입해 왔는데, 

프랑스는 당시 삼각무역의 후발 주자라
중남미에서 가진 땅이라고는 아이티가 대부분이었고

서인도 제도의 조그만 섬이 
몇개 더 있는 정도였다.
(18세기 후반에 남미의 기아나도 차지하게 되지만)
 

그런데 프랑스는 욕심에 눈이 멀어
그 좁은 땅에 노예들을 꾸역꾸역 집어넣게 된다.

때문에 인구 부양력이 
감당할 선을 넘어서게 된다.
 

게다가 프랑스는 
선박들에 사용될 목재를 마련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아이티의 삼림을 벌목했다.

그 결과 현재 아이티는 
전 국토의 2%만 숲이라고 한다.

반면에 도미니카는
그들을 지배하던 스페인이 국력이 쇠퇴해 

식민지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도미니카의 환경보존에 도움이 되었다.

현재 아이티는 중남미 국가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구밀도가 높다. (제곱 킬로 당 350명)

1천만 명의 전체 인구 중 
80%가 하루 1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진흙과 버터를 섞어 만든 진흙쿠키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 되다시피 했다.
 
▲ 진흙, 버터, 소금으로 만들어 먹는다는 진흙쿠키

한때 아이티는 고난을 딛고 세운 
최초의 흑인 국가로 유명했지만,
 
▲ 1804년 아이티 혁명

요즘 그런 타이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냥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을 살펴보면

거의가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10개국 중 
7개가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과연 우연인가?)
  

어쨌든 아이티인들은 
일자리와 땔감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도미니카의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도미니카에만 
200만명의 아이티인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현재 도미니카에서는 
아이티인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상당하다고 한다.
 
▲ 도미니카에서 인종차별에 시위하고 있는 아이티인들

조금 골때리는 것은,
도미니카인들은 아이티인들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더욱 차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미니카 인구의 3/4이 
백인의 피가 섞인 물라토인들인데

아이티인들은 
인구의 95% 이상이 흑인이라서

도미니카인들은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더 백인이라고 생각하며

아이티인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 좌 : 도미니카인, 우 : 아이티인


● 조선시대의 흑인 노예들

서양인들이 흑인 노예 5명을 
조선 땅에 버리고 도망간 초유의 사건이 있었다.

1801년(순조 1년) 10월 30일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이양선이 나타나 흑인 5명을 던져버리고
곧바로 도주해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기록은 이렇다.

제주 대정현의 당포에서 
국적불명의 큰 선박이 지나가다가 

5명의 이방인을 
내려놓고 그냥 떠나버렸다.

그런데 내려놓은 5명은 
모두 옷차림과 모습이 괴이했다.

옷은 통이 좁아서 
몸을 묶은 것 같았으며,

발에는 버선을 신지 않았고,
머리에는 모자를 썼다.

얼굴과 몸이 모두 검어
그 형상이 마치 긴팔 원숭이 같았다.

그들의 언어는 
왜가리가 시끄럽게 지절대는 듯했고

 

글을 쓰도록 해보니
오른손에 붓을 잡고 왼쪽부터 옆으로 쓰기 하는 것이

난잡하기가 그지 없고, 
글씨는 엉클어진 실 모양 같았다.

흑인들은 아마도 
알파벳을 썼던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오직 글이라면
한자(한글 포함)만 알고 있었고,

다른 문자가 있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조정에서는 이때 상륙한 흑인들을
전원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들여보냈다.

청나라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나라 용병으로 흑인들도 전쟁에 참전했다.

1598년 5월의 
어느날이었다.

 팽신고
"전하, 얼굴색이 다른 
색다른 신병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명나라 장수 팽신고가 선조에게
신기한(?) 용병을 소개했다.

이들은 포르투갈의 흑인 노예로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된 명나라 용병들이었다.
 

당시 이들의 
인상착의에 대한 내용은 이렇다.

노란 눈동자에, 몸 전체가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양털처럼 곱슬거렸다.

이들은 바닷속에서 헤엄을 잘 쳤기 때문에
해귀(海鬼 : 바다귀신)라고 불렀다.

팽신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흑인 용병을 자랑했고

 팽신고
"이들은 바다 밑에서 수중 동물을 잡아 먹으며 
적선의 밑을 뚫어 침몰시킬 수가 있습니다."

듣고 있던 선조는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선조
"오!"

 팽신고
"무예도 뛰어나고, 
조총과 칼도 자유자재로 다룰줄 압니다."

 선조
"정말 대단합니다!"

당시 흑인 용병의 존재는 
1599년 2월,

명나라 군이 철수할 당시를 그린 
그림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몸집이 너무 커서 말에는 타지 못하고
이렇게 수레에 몸을 실었다 한다.
 

그런데 적군에까지 
용병들의 소문이 났는지

'엄청난 수의 해귀가 출전했다'는 말에
왜병들은 두려움에 떨며 

서둘러 철군 준비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전과는 
그리 신통치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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