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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한때 선진국, 아르헨티나의 빛과 그림자 : 가우초의 몰락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5610613
● 스페인 사람들이 버리고 간 팜파스
 
남아메리카 대륙 남동쪽에 보면
'팜파스'라고 하는 드넓은 초원지대가 있다.
 

면적이 남한의 약 8배나 되는 이곳은
비옥하지만 나무는 거의 자라지 않는 곳이다.
 
▲ 팜파스

이땅을 최초로 찾았던 사람들은
금과 은을 찾던 스페인 정복자들의 원정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돈이 될만한 것은 당최 발견하지 못했고,

대신 가지고 왔던 
소 떼만을 남겨놓고 돌아갔다.

 
"젠장, 엘도라도는 어디에도 없었어.
아르헨티나는 얼어죽을.."
(아르헨티나는 은(銀)을 뜻하는 라틴어, 아르헨툼(Argentum)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렇게 스페인 사람들은 
투덜대며 돌아갔지만

뜻밖에도 소 떼가 장차 아르헨티나에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줄 줄은 전혀 몰랐다.

천적 따위는 없었고 
오직 광활한 목초지뿐이어서

소 들은 엄청난 기세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에 팜파스에 살던 스페인 정착민 인구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은이나 금은 전혀 없었고 

사납고 거친 
원주민들만 널려있었던 터라

스페인 사람들에게 팜파스라는 곳은
전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때문에 19세기까지 팜파스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땅으로 방치되게 된다.
 
원주민들과 소수의 스페인 사람들만이
이 땅을 놓고 아옹다옹하기는 했지만

팜파스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무섭게 늘어나고 있던 소 떼였다.

그런데 그러한 시기
아르헨티나판 카우보이라 할 수 있는

가우초(gaucho)가 
등장하게 된다.
 


● 목동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혼혈 인간, 가우초

사람들은 
순전히 일을 시키기 위해서

말과 당나귀의 혼혈인 
'노새'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사람도 일을 시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혼혈을 만들었다면 믿겠는가?

그런데 있었다.
스페인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가우초가 그랬다.

이들은 팜파스에서 
말 여러 마리를 끌고 다니면서

짚시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그러면서 소 떼를 감시하고 
소를 도축하는 일을 도와주며

목장주에게 수고료를 받으며 생활했던, 
일종의 목동이었다.

이들은 하루 종일 말 위에서 살다시피 해서
다리가 활처럼 휘어버릴 정도였는데,

음식도 쇠고기 외에는 
다른 것은 거의 먹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런 가우초는
오늘날 미국의 카우보이처럼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정서 속에서 
아련한 동경의 대상으로 잡리 잡고 있어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의 상징으로, 
또 남성성의 상징으로서 로망이 상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초 기록을 보면 
사뭇 다르다.

당시 팜파스를 찾은 외지인들은 
가우초를 보고 이런 식으로 경멸했다.

 
"하루 종일 말 타는 거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놈들일세."

 
"맞아. 게으르고 지저분한 놈들이야." 

 
"마치 반인반마(半人半馬)가 아닌가?
반쯤은 짐승같은 놈들이야."

그러면서도 가우초가 말을 타는 장면을 보고는 
경외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말 타는 솜씨 하나만큼은 대단해."

 
"그러게. 세계에서 가우초보다 
말 잘타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맞아. 하지만 말에서 끌어내리기만 하면 
곧 아무 것도 아닌 놈들이지. 거의 걷지도 못하니깐."

실제로 가우초들은 거의 모든 것을 
말잔등에서 해결했다.

씻고, 고기를 잡고, 미사에 참석하고, 
물을 긷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걸까지도 말이다.


● 19세기까지 아르헨티나의 축산업 : 가우초에 절대 의존하다.

그래도 19세기 막바지까지 
팜파스에 필요했던 것은 

말 탄 사람들이었지
농장에서 일 할, 날품팔이 노동자들은 아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축산업은 
오늘날과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소들은 반야생 상태에서
울타리도 치지 않은, 

넓디 넓은 초원에서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고,

가우초는 목동이라기 보다는,
이런 소들을 

정기적으로 올가미로 잡아 죽이는,
사냥꾼에 가까웠다.

애초에 사람도 살지 않는 
드넓은 초원이었기에

부동산 소유권이라는 것은 
명목상 개념에 가까웠고,

목장 주인들이라고 해봤자
축산업자라기보다는 장사꾼에 훨씬 가까웠다.

 목장주
"오늘 소 몇마리 잡았어?
3마리만 줘."

이런 식으로 목장 주인들은 가우초에게 
사냥해 온 소의 시체와 가죽을 넘겨받고

대신 가우초들이 좋아하던
담배, 마테차, 술, 설탕 따위를 건네 줬다.

이런 방식이 
아르헨티나 축산업의 현주소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국내 시장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초반 인구는 고작 100만 명 밖에 안됐고
인구밀도는 0.3명/㎢ 밖에 안됐던 것이다.

그렇다고 넘쳐나는 고기를 수출하자니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신선한 고기를 실어봤자 
배가 적도를 지나 유럽에 도착하면

이미 그전에 배 안의 고기는 
모두 썩어 버렸다.

때문에 수출을 하자면, 오직 방법은
소금에 고기를 절이는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품질이 형편 없어서
 
이것저것 고를 처지가 아니었던 
브라질과 쿠바의 노예들이나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런 시장도 
별로 큰 게 아니었다.

따라서 사냥한 소들은 
그냥 내버려져 썩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가우초들은 혀만 잘라서 먹는가 하면,
가죽만 수출용으로 벗겨낼 정도였다.

즉 소를 한마리를 잡으면 
대부분은 그냥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생산 비용이 거의 공짜였으니
이렇게 하더라도 남는 장사였다.


●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가우초를 징집하기 위한 꼼수

19세기 후반까지 
아르헨티나의 축산업은

가우초의 사냥에 
절대 의존하는 낙후된 방식이었지만,

19세기에 접어들자
가우초들은 커다란 삶의 제약을 받게된다.

이유는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내전에 있었다.

19세기 초가 되면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이

유럽의 자유주의 운동의 영향과
신생국 미국의 지원 등으로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데,

이 시기 아르헨티나도 
독립을 하게되었으니, (1810년)

전국 곳곳에서 독립전쟁이 발생나고
여기저기서 지방 군벌들이 탄생하고 있었다.
▲ 아르헨티나 시민전쟁

하지만 독립이 된 후에도 
지방 세력들은

서로의 패권을 위해서 
다툼을 계속하게 되어

군벌들 사이에서 
전투가 일상이 되어 갔는데,

이때 말 타는 솜씨가 뛰어난 가우초들은 
쓸모 있는 전사로 각광을 받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꼭 저놈들이 필요해."

하지만 팜파스의 가우초들은
태생적으로 

누구에게도 속박받지 않았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조직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국심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탓에

군벌들은 이들을 
강제로 징집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도 아르헨티나 국민이 됐으니, 
이젠 밥값을 해야지."

그리고 군벌들은 가우초들의 이동을 제한하고자
통행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또 의회에서는 
'부랑자법'을 통과시켜 

목장에 고용되지 않은 가우초들을 
두 강제로 군대로 끌고갔으니,
▲ 가우초

군벌들의 이기심 때문에 
가우초들은 자유를 억압받고

기존의 생활을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 로또당첨 되다

하지만 이보다 
가우초들을 더 위협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유럽의 굶주림이었다.

즉 아르헨티나 축산업의 발전이 
가우초들의 몰락을 불러온 것이었다.

아르헨티나가 세계 최대의 육류 수출국이 된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우선 도시화가 진행 중이던 유럽에서 
고기 수요가 크게 늘어났던 데 있었다.
 

또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기술의 발전도 크게 한몫을 했다. 

증기선은 대서양 항로를 
좀 더 빠르고 안전하게 만들었고

훨씬 커진 적재량 덕분에 
운송비가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때문에 소들을 
산 채로 유럽까지 실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런 방법은 위험도 컸고, 
비용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가 

19세기 식료품 분야의 최고의 성과 중 하나로 꼽히는
'고기 엑스'를 개발하면서 중요한 돌파구를 열었다.
 
▲ 19세기 후반 고기엑스 광고

그리고 이 고기 국물 덕분에 
수천 만에 이르는 유럽의 가난한 가구들이

이전에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고기 맛을 맛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더 혁신적인 것은 
냉장고의 발명이었다.
▲ 1907년의 냉장고

19세기 중반 발명된 냉장고는
이후 미국에서는 

냉동열차로 발전이 됐고,
곧 선박에도 활용되게 되었다.

즉, 엄청난 양의 손질한 고기를 
냉장이나 냉동 상태로

대서양 건너편까지 
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냉동 화물선은 
19세기 말부터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하고

20세기 초에는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한 상태까지 개량되게 된다.

그러자 아르헨티나의 위상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곧 엄청난 벼락부자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 울타리 처지는 팜파스 : 가우초의 몰락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아르헨티나 쪽에서도 
고기의 질을 높여야만 했다.
 
거친 팜파스에도 나름 잘 적응했던 
기존의 소들은 육질이 질긴 편이었다. 

때문에 목장주들은 훨씬 살이 풍부하고 지방질이 많은 
유럽산 소들을 수입하여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다 확실한 선택 육종을 위해 
평원을 가로질러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울타리를 통해 
소유권이 나타나게 되었고,

품종 개량을 위해 
시간과 돈을 들인 목장주들은 

도둑질을 막으려고 
소에 낙인을 찍는데 집중하게 된다.
 

또 가우초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노동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고
 
결국엔 목장을 떠돌며 일하는 행위가 
사실상 범죄로 취급되면서

가우초들은 
평원의 최하층 계급으로 전락하고 만다.
 
1904년 한 논평가는 
이들의 처지를 동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논평가
"땅을 가지지 못한
이 불쌍한 혼혈인들은, "

 논평가
"군인이나 농장 노동자, 소도둑이 되는 것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하지만 농장의 날품팔이 일자리도 
이들에게는 결코 많지는 않았다.

울타리로 둘러쳐진 
목초지에서는 

소몰이 개 한마리에 
목동 한 명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우초들을 
한층 더 궁지로 몰아놓은 것은 

팜파스의 농장주들이
양떼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순한 양떼를 치는데, 
굳이 가우초를 고용할 필요는 없었다.


● 20세기 초 아르헨티나, 세계 10대 선진국 반열에 들다

19세기 후반 
로또 당첨을 맞은 아르헨티나는

이후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20세기 초가 되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0개 나라 중 하나가 된다.
▲ 192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당시 아르헨티나의 성장은
가난한 남부 유럽인들을 자극했다.

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이탈리아 꼬마 주인공이

이역만리의 엄마를 찾아 간 곳도,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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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만 해도'아르헨티나 드림'을 꿈꾸며 
이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때문에 19세기 후반 
200만 명이던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30년 만에 5배로 증가하여, 
1920년대에는 천만 명을 넘게 된다.
▲ 192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한편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곡물로도 짭짤한 재미를 보게된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증가된 유럽에서는

인구가 폭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난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고,

아르헨티나는 고기와 함께 곡물도 수출하면서
유럽의 식량 창구를 자청했던 것이다. 

참고로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초원은
작물이 가장 자라기 좋다는 흑토지대였다.

비가 잘 오지 않는 팜파스 대지에서는
토양 속의 죽은 풀들이 

씻겨 내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썩어 

비료 없이도,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팜파스의 비옥한 흑토 (말을 타고 있는 것은 가우초)

이렇듯 천혜의 환경으로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부를 쌓아갈 수 있었던 게
당시의 아르헨티나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아르헨티나의 경제 속에서
가우초들만큼은 불행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숨통을 조이게 했던 대상은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온 유럽의 이민자들이었다.

▲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 : 이과인은 스페인, 메시는 이탈리아, 에인세는 독일계다.

학교 교육이라고는 거의 배우지 못한 
가우초들이었기 때문에

농장주들은 이왕이면 작업 이해도가 높은 
유럽 이민자들을 더 선호했던 탓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당시 유행하던 말이 있다.

 농장주
"말을 탈 수 없게된 가우초들은," 

 농장주
"거름더미 지는 일 정도밖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후 가우초들은 
더욱 외진 곳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러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 대공황의 충격과 포퓰리즘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구조적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식량 창구를 담당했던 까닭에
유럽의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가령, 소 5마리를 생산하면
1마리만 아르헨티나에서 내수용으로 먹고

나머지 4마리는 
유럽으로 수출을 하던 식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목장

때문에 유럽으로의 
수출이 끊기면

아르헨티나 경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염려하던 부분이 
기어코 발생하고 말았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을 시작으로
전세계가 거대한 경제 불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이때 유럽인들은 
가장 먼저 쓸데없는 소비를 줄이려했다.

비싼 고기를 먹는 대신에
감자와 같은 값싼 곡물을 찾게 되었으니,

아르헨티나의 수출은 폭락했고
나라 경제는 심각한 공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위기 상황을 틈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하게 됐다.

그러던 중 2차대전이 끝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뜻밖의 전후 특수를 맞으면 
잠깐 동안의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전쟁으로 유럽이 황폐해지고 
량이 부족졌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유럽 지역으로 
식량과 육류를 수출하여 

다시금 부를 
축적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47년 1인당 GDP 순위는 세계 10위였다. ☞ 참고)

하지만 좋은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고
또 다른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격변이 일어난다.
 
▲ 후안 페론과 그의 부인, 에바 페론

군인 출신이던 그는, 
권좌를 잡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고 

파격적으로 복지를 확대하는 등 
정부지출을 대대적으로 늘려나갔다.

이른바 인기 정치였고 
소위 말하는 '포퓰리즘'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책에 
반감을 품은 부유층들은 

부를 외국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경제 사정이 좋지못해 
가난한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자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급식의 혜택을 주기로 했다.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도가 
크게 올랐다.

하지만 재원을 
기업들에게 뜯으려고 하자

기업주들은 반발하며 
다른 나라로 회사를 이전하기 시작했으니

나라 경제는 
더욱 침체되게 되었다.

차라리 애초에 
건드리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바로 이런 포퓰리즘(페론 대통령이 했다고 해서 페론주의)으로 
아르헨티나는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 1인당 소득 비교 : 캐나다와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서로 비슷했다.


● '막장' 경제의 대명사, 아르헨티나

부유층의 자금이 빠져나가자
아르헨티나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됐다.

이럴 때 방법은?
돈을 외국에서 꿔오던지,

아니면 
화폐를 찍어내는 것이 있다.

구한말 개혁을 할 돈이 없어
'돈을 찍자' vs '외국에서 차관을 빌려오자'라는 식으로

정치권이 싸우던 것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었다.
▲ 구한말 당오전 발행을 두고 민씨정권과 김옥균의 개화파가 다퉜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이 둘을 모두 다 한다.

빚을 엄청나게 져서 
한 때는 브라질, 멕시코 등과

세계 빚쟁이 국가 순위, 
'금은동'을 다투기도 했고,

화폐를 무리하게 찍어내면서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최근까지 아르헨티나는 줄곧 연 10% 이상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율을 보였다.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툭하면 휘청거렸고

IMF의 구제금융만 
10년 새 두번이나 받으려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본다면, 
막대한 국가부채, 높은 인플레이션, 

반복되는 디폴트 선언 등
좋지 못한 꼴은 죄다 보여준 셈이다.
▲ 디폴트 선언으로 화가난 군중들

여기에 농업 일변도의 산업도 
문제가 있었다.

2차대전 이후로 세계는 급변하고
기술 집약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1차상품 위주로만 생산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었다.

가령 아르헨티나는
1년에 밀생산으로 총 12억 달러를 벌지만,
▲ 아르헨티나의 거대한 밀밭

이는 헐리웃 영화 '아바타' 매출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28억 달러)

그러면서도 
제조업의 발달은 매우 취약하다.

흔히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원인으로 
포퓰리즘을 크게 들지만

포퓰리즘이 없었다 한들
아르헨티나가 지속적으로 잘 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아르헨티나의 수출 품목 : 노란색 : 곡물, 연두색 : 곡물 가공품, 베이지색 : 육류, 
1차 산업의 상품이 8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크게 보려면 클릭)

취약한 산업구조로 볼 때
경제적 몰락은 필연적인 수순에 가깝기 때문이다.
 

● 그렇더라도 저력있는 나라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저력이 있는 나라다.

영토는 남한의 28배나 될 만큼 광할하며 
농경지만도 남한의 14배가 넘는다.

경제규모(PPP)는 세계 22번째이고
G20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여전히 농업 기반이 튼튼해서
1인당 쇠고기 소비량은 연간 55kg로 세계 탑 수준이다. ☞ 참고

밀가루는 어찌나 풍부한지,
우리나라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면 김치가 공짜로 나오듯,

이 나라는 
빵이 공짜로 나온다.
▲ 아르헨티나의 밀농사

게다가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의 
지하자원도 나름 풍부하다.

기후적으로도 문명과 경제가 번성하기 
가장 좋다는 온대기후 지역이다.

▲ 헌팅턴 이론 : 진한 색일수록 인간의 신체활동이 활발해지는 기후다.

강대국이 되기 위한 
하드웨어는 모두 갖춘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 좋은 소프트웨어만 장착되면
또 다시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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