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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유럽에 전파된 감자, 그리고 끔찍한 아일랜드 감자기근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5704029
● 대항해 시대와 옥수수

15세기 후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아메리카를 정복하려는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이때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탐을 냈던 것은
금과 은이었는데,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무너뜨리면서 그 꿈은 실현됐고
 

이후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를 꿈꾸며 물밀듯이 찾아왔다.

포르투갈도 빠르게 동참하여 브라질을 획득하면서, 
신대륙을 스페인과 양분하게 된다.
 
▲ 서경 46도를 경계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먹겠다는 한 조약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됐고,

소식을 들은 유럽 각국은 
엄청난 충격과 흥분에 달아오르게 된다.

이때 가장 배를 아파했던 이들은,
대서양 연안의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였다.

 영국인 
"쳇, 누구 맘대로 
자기들끼리 신대륙을 나눠가져?"

 엘리자베스 여왕
"무적함대 넘들 
싸워보니 별 것도 아니더만.."

때문에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싸움을 걸었고

기어코 신대륙의 이권을 뺏어오는데 
성공하게 되어
 
▲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에 격퇴당하는 스페인 군함 (16세기 후반)

17세기가 되면 식민지 사업에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도 가세하게 된다.

이때 유럽인들은
굳이 힘들게 금과 은을 탐하지 않았다.

금과 은이 없더라도
그만큼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담배, 커피, 코코아, 설탕 등의 기호식품이었다.
 

모두 신대륙이 원산지거나
혹은 열대~아열대 기후에서만 재배할 수 있는 작물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건강에 좋은 식품은 아니지만

한번 맛을 들이면 탐닉에 빠지고 마는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었다.
 

때문에 맛을 알게 된 유럽인들은
이들 기호품들을 몹시도 갈구하고 있었고

그런 수요에 발맞춰
신대륙에는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건설되었고,
▲ 서인도 제도의 커피 농장

노동을 위해 흑인 노예들을 수입했으며,
화사들이 잇따라 설립되었고,
▲ 사탕수수 농장

유럽의 왕실들은 
이들 회사를 지원하면서

왕실의 재정을 충당하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근대 시기, 부르부아 계층과 왕실과의 협력관계는 
바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배고품을 구원해 줄

신대륙으로부터 전해져 온 
'훌륭한 식량 작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으니,

대표적인 게 
바로 옥수수였다.

 

옥수수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자라고 있던
단위생산량이 매우 큰 식량 작물이다.

예컨대 1헥타르 당 생산량이
쌀 4톤, 밀 3톤이라면 옥수수는 5톤이 넘는다.

 

게다가 생육기간도 120일 정도여서, 
옥수수는 1년 3작이 가능하지만

쌀과 밀은 150일 이상이어서, 
1년 2작이 한계였다.
 
▲ 옥수수 수확

하지만 처음 도입될 때만 해도
옥수수는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려워서,

한동안 찬밥 신세를 
면키 어려웠고

유럽의 농부들이 옥수수의 진가를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옥수수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기후, 강수량, 해발고도 등을 가리지 않았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추위에도 잘 견뎠다.

게다가 노동력은 1년 기준으로 
50일만 투여하면 될 정도로, 재배하는데 손이 덜 갔다.

때문에 옥수수의 장점이 알려지자
유럽 전역에서 옥수수 심기가 진행되었고

곧 전세계 농부들도 
옥수수 농사를 널리 이용하게 된다.
 
▲ 전세계 옥수수 산지 : 추운 만주지역에서, 열대지역까지 기후를 가리지 않는 특이한 작물
 

● 유럽에 소개된 감자 : 오해와 푸대접

옥수수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취급을 받았던 것은,

16세기 중반 스페인 군대가 
안데스 산맥에서 발견한 감자였다.
 
옥수수는 그래도 신대륙의 인디오들에게는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감자는 현지의 인디오들에게까지
찬밥 신세를 받았던 작물이었다.
 

때문에 감자는 
콜롬비아 북쪽을 넘어가 본 적이 없어서

북아메리카 대륙에 
전혀 소개된 적이 없었고

잉카인들도 
감자를 심어도 

산비탈 쪽의 쓸모없는 땅에
어쩌다가 드물게 심는 정도였고
 
▲ 잉카인들의 감자 심기

수확한 감자는
저지대의 작물이나 그릇, 과일 따위와 바꾸거나

저지대 사람들에게 
특산품으로 상납하는 용도로 쓰일 뿐,
 

대부분 잉카인들이 
감자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감자를 처음 본 스페인인들도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니

 스페인인
"함 줘봐. 가져는 가볼게."

그저 '이런 것도 있더라'라는 식으로 
유럽에 소개했던 게 당시의 감자였다.
 

하지만 유럽인들 역시 
감자를 보고는 대부분 손사래를 쳤고

 
"이걸 먹으라고?"

꽃이 예쁘게 폈기 때문에
오히려 관상용으로 더 인기가 있었다.

고추가 조선 땅에 와서 
열매가 예쁘다하여,

처음에 '관상용'으로 재배됐던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 참고
 
▲ 감자꽃(좌), 고추열매(우)

때문에 신대륙의 감자를 위해
따로 회사를 차리거나 하는, 그런 일 따위는 결코 없었고

오히려 이상한 풍문에 시달려
'혐오의 대상'으로 한동안 오해를 받아야만 했다.

특히 그 모양이 
나병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1630년 프랑스 의회에서는 
이런 판결까지 내린다.

 프랑스 의회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리므로
이 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를 금함."

 프랑스 의회
"만약 이를 무시하고
작물을 재배하면 벌금형!"


● 전쟁과 흉작이 감자를 널리 퍼뜨리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유럽 곳곳에 흉년이 들어, 
심각한 식량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유럽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감자를 먹기 시작했고
 
▲ 18세기 대기근

그런 소문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자
감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일부 국가에선 정부가 나서 
감자 심기를 권장했을 정도였고

감자를 나병을 옮게하는 작물이라고 하여
법으로 금기하기까지 했던 프랑스에서도

18세기 후반 '파르망티에'라는 학자를 통해
적극적으로 보급하기에 이른다. 

 

그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중 
포로 신세가 되어

그곳에서 처음 감자를 알게 되었고
귀국과 동시에 감자 보급에 적극 앞장섰던 것이다.

 파르망티에 
"내가 포로 생활 하면서 감자 맛 좀 봤는데,
뭐, 먹을만 하더만."

 파르망티에
"감자는 영양도 풍부하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할 때 이만한 구황작물도 없다고."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열어

감자 빵, 감자 샐러드, 감자 쿠키, 
감자 수프, 감자 술까지

모든 요리를 감자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감자 맛을 알도록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노력으로 
오늘날 프랑스에서 감자요리는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 페스트푸드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식 감자튀김

한편 19세기가 되면, 
유럽에서는 

토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하여
단위 생산력을 높이려는 노력이 가속화 되는데,
 
▲ 19세기 유럽의 농업혁명

이때 휴경지에서 재배되는 용도로 
감초처럼 애용되던 것이 바로 감자였다.

생육기간이 100일 정도로 짧고, 
기후와 토양 가릴 것 없이 잘 자랐기 때문에

감자를 잘만 활용하면 
1년 3모작이 가능했던까닭이다.
 
▲ 유럽의 윤작 : 생육기간이 짧고 단위생산량이 높은 감자는 윤작의 필수요소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감자는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감자는 전세계에서 
3번째로 많이 먹는 식용 작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위 쌀, 2위 밀)


● 감자의 장점 : 엄청난 단위생산량!!

감자의 장점을 
몇가지 짚어보자면 이렇다.


① 추위에 엄청 잘견딘다.
 
옥수수가 추위게 강하다지만, 
감자에 비할 바가 못된다.

서리에도 잘 견디고
엄청나게 높은 지대에서도 건강하게 자란다.
 
▲ 시베리아의 감자밭

때문에 옥수수도 자라기 힘든 시베리아 벌판에도
감자만큼은 꾸역꾸역 잘 자란다.
 
▲ 감자 생산지 : 내한성이 탁월해서, 주로 추운 지역에서 많이 기른다.

빙토의 땅 그린란드에서도
감자 재배가 가능할 정도다.
▲ 감자를 수확하고 있는 그린란드 농민들

우리나라에 감자가 보급된 경로도 
'시베리아 → 만주 → 함경도'의 루트였다.


 단위생산량이 엄청나다.

농작물들의 단위생산량은 
대략 이렇다. 

1년 1번만 생산한다면, 
1헥타르 당 (사방 100미터의 면적)


 : 5톤 
 : 4톤
옥수수 : 6톤
감자 : 16톤

그런데 쌀과 밀은 생육기간이 150일, 
옥수수는 120일, 감자는 100일 정도다.

다만 쌀과 밀은 기후에 민감하기 때문에 
1년 내내 생산이 어렵다.

대신 옥수수는 1년 3모작이 가능하다.
감자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옥수수는 1년 3모작하려면 조금 빡센 감이 있지만..)

따라서 이렇게도 볼 수 있다.
1년에 생산할 수 있는 양 (톤 / ha)

 

 : 5톤
 : 4톤
옥수수 : 18톤
감자 : 48톤


한마디로 감자는 
사기 작물이다.


 인구부양력이 탁월하다.

한 농부가 
1헥타르의 땅을 가지고 있는데

쌀-보리, 밀-보리, 옥수수 3모작, 감자 3모작의 
옵션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이때 1년 수확물을 
칼로리로 환산해 보면 이렇다.


쌀-보리 : 3,100만 kcal
밀-보리 : 2,600만 kcal
옥수수 : 6,500만 kcall
감자 : 3,700만 kcal

사람이 하루 2,800 kcal를 소비한다고 볼 때,
1헥타르 땅으로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은 이렇다.

쌀-보리 : 31명
밀-보리 : 26명
옥수수 : 65명
감자 : 37명

감자는 칼로리가 
여타 곡물에 비해 낮기 때문에

생산량이 높지만 
열량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이다. (수분이 많기 때문에)

그렇더라도 
쌀, 밀보다는 부양력이 좋다.


④ 노동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옥수수 정도는 아니지만, 
감자 농사는

쌀농사와 비교하여 
4~5배 정도 노동이 적게 든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감자는 특히 광산촌에서 많이 재배되었는데, 

탄광일을 하면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이 가능했던 작물은

감자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곡식처럼
탈곡을 하고 빻고 하는 

일체의 과정이 필요 없기 때문에
감자는 수확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⑤ 보관이 쉽다.

감자는 특별한 창고가 없이
대충 광주리에 넣어 보관해도 괜찮다.
 

직사광선만 
피하면 됐다.

햇볓을 쐬면 
감자가 퍼렇게 변하는데

이는 '솔라닌'이라는 감자독이 생성됐기 때문으로
이런 건 먹으면 골로 간다.
 

하지만 시퍼런 감자라도
삶아 먹거나, 익혀 먹으면 독성이 제거된다.
 


● 하지만 유럽인들은 여전히 감자를 기피했다
 
17세기 이후 유럽은 삼각 무역을 통해
부를 쌓게 되었고

식량자원을 포함한 
물질 문명이 풍족하게 되자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여, 
인구의 증가로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인구가 
너무 빠르게 증가했던 게 문제였다.

전례 없었던 호황에만 취해
유럽인들 아무런 대책이 없었고,

18세기 들어 
유럽에 커다란 흉년과 전쟁이 닥치자

곧 엄청난 규모의 
식량위기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이론이, 
바로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맬서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맬서스 
"식량자원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니..
이러다가 인류는 쫄망한다능."


 

때문에 학자들은 발벗고 나서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이때 해결 수단으로 
가장 각광을 받았던 작물이, 바로 감자였다.

하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 사람들의 감자 기피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1770년 기근 구호를 위해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감자를 실어 보냈을 때도

사람들은 당최 
감자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감자 전도사, 파르망티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도 감자가 나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미신이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감자가 조금이라도 
이용되었다면 

그것은 대부분,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굶주림에 직면했을 때 뿐이었다.

"정 먹을게 없으면, 
최후로 먹게 되는게 감자임."

영국 같은 곳에서는
'감자 = 하층민이나 먹는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창피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쉽게 감자를 먹으려 들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가가 나서서 
강제로 감자를 재배하도록 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게 
독일이었다.
 

1774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농민들에게 강제로 감자를 재배하게 하면서, 

이런 무시무시한
명령까지 내렸다.

 프리드리히 대왕 
"만약 감자 재배를 거부하는 농민이 있으면
앞으로 코와 귀를 잘라라!"

세르비아에서도 정부가 나서서
감자를 심지 않으면 곤장을 치도록 했다.
 

그만큼 당시 유럽은 
식량난 해결을 위해서라도

감자는 강제적으로라도 
보급하고 싶은 작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감자가 인기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이 당시 감자는 
너무도 맛이 없었다.

 

지금은 품종 개량이 되어 
당분이 많아졌지만,

19세기까지 감자는 
그저 밍밍한 맛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런 상소문을 받기도 했다.

"감자 얼마나 맛 없는지 아세요?
개도 안 먹거든요."


● 아일랜드를 살린 감자

그렇더라도 이런 감자를
유럽에서 최초로 주식으로 삼았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아일랜드였다.
 

어쩌다가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주식이 되었을까? 사연을 알아보자.

12세기 후반 이후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당시 영국은 토양이 척박해서 
자급자족이 어려웠기 때문에
 

아일랜드는 영국인들을 위한 
일종의 식량 창구로 전락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수탈량이 엄청났다.
특히 밀의 경우, 거의 전량을 영국에서 털어갔다.
 
▲ 일제의 쌀 수탈 

때문에 참지 못한 아일랜드인들은
17세기 들어 대대적인 독립 운동을 하게 되었고

영국군은 반란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아일랜드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했으니,
 

완강하게 저항하는 지역에서는 
먹을 것을 완전히 없애 버려, 

사람들을 모두 
굶어 죽게 만들 심산이었다.

그리하여 농경지는 물론이고
곡물 창고나 방앗간 등을 모두 불태워 버렸고

가축들은 모두 
도륙해 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초토화를 시킨 가운데서도
유독 감자만은 죽지 않았다.

당시 감자는 도랑으로 둘러싸인 
좁고 축축한 땅에서 자랐기때문에

여간 불태우기가 
어려웠던 게 아니었다.

 영국군 
"뭐, 저런 쓸모없는 작물은 
불태워 봤자지."

하지만 그것이 아일랜드인들에게 
뜻하지 않은 구사일생의 길을 만들어줬다.
 

당시 영국인들은 쟁기를 끌 짐승은 물론이고,
쟁기 마저도 닥치는대로 회수해 갔지만

감자를 심기 위해서는 
가래 한 자루만 있으면 족했다.
 

또 창고와 방앗간이 모두 불태워졌지만,
감자는 특별히 빻거나 탈곡을 할 필요가 없어서

그저 농부의 오두막 안에 
안전하게 꽉꽉 쟁여 넣으면 그만이었다.


● 하루 3kg의 감자를 먹던 아일랜드인들

17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 독립 운동은 더욱 격렬해진다.
 
한 기록에 따르면, 
1641년에서 1652년까지 계속되던 반란 중에

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80%가 죽거나 해외로 도망갔을 정도였다.
 

그리고 17세기 말이 되면 
감자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식량 공급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당시 성인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3kg의 감자를 먹었는데 (2,300 Kcal)

이는 중간 크기 감자를 기준으로 할 때
한끼에 8개씩을 먹는 정도였고
 

우유를 제외하면 
다른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아일랜드의 인구가 
빠르게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18세기 들어서
본래 인구보다도 늘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감자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창고나 쟁기 끌 짐승도 필요 없고, 
연장 몇 개만 있으면 될 만큼 

감자 농사를 시작하는데에는
자본이 거의 들지 않았던 탓에

식민지 아일랜드인들에게
이보다 적격인 농사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도 있었다.

"밀은 심어봤자 
영국 넘들이 다 쓸어갈테고,"

"호밀이나 보리를 심어봤자 
세금을 떼어가려 할테고.."

"맞아. 
그러니 감자를 심는게지."

"영국 넘들은 아무도 감자를 안 먹잖아.
세금을 떼어가고 싶어도 못 가져갈 걸."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지주의 땅을 소작하면서

그 대가로 땅 한 뙈기씩을 
빌릴 수가 있었는데

그런 땅에는, 이런 이유로
예외없이 감자만을 심었다. 

감자만큼은 수탈과 징세의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아일랜드인들은 씩씩하게 적응했고,

오히려 안정적인 감자의 수확량 덕분에
18세기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일지라도,

영국이나 프랑스의 농부들보다 
더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있었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일랜드는 
가난하기로 소문난 동네인데.."

 
"오히려 이곳에서 
인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어."

"감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작물인듯."

"기후에 상관없이 
늘 일정한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평생 감자만 먹는데도 
아무런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 것을 보면,"

"감자만큼 영양적으로 
균형잡힌 작물도 없는 듯."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의 감자는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었고,
 

어떤 이들은 감자에서 
굶주린 유럽을 구원할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
 

● 그외 유럽에서의 감자 보급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에서는
희한하게도 

자본가들에 의해 
'감자 보급'에 대한 주장이 불거졌다.
 

그 이유는 
이랬다.

 자본가 
"감자같은 싸구려 작물이 
널리 보급되어야,"

 자본가 
"노동자의 최저생계비가 떨어져서, 
더 낮은 임금을 줘도 됨."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
영국 노동자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노동자 
"젠장, 우리한테 
아일랜드 넘들하고 똑같이 먹으라니."

더욱이 당시 영국 노동자들은, 
짐승처럼 살기를 마다하지 않던 아일랜드인들을 

저임금 경쟁자로 여기고 있어서
반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노동자 
"이런 건 
돼지들도 안먹는다고!"

때문에 감자를 먹이려는 시도는 
항상 격렬한 저항을 맞아야 했다.
 
하지만 밀의 상당수를 
수입해 먹어야 했던 영국이기에

국제적으로 밀 값이 뛰자,
빵 값이 생활비에서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감자를 조금씩 입에 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남은 돈으로 
쇠고기, 돼지고기, 치즈, 

칠면조, 닭고기 등을 살 수 있었기 때문
곧 이런 방법은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노동자
 "매일 빵만 먹는 것보다,"

 노동자
"감자를 먹어주는 대신, 
고기를 먹는게 더 낫지."

한편, 전쟁과 기근이 만연했던 
중유럽과 동유럽에서도 

감자가 식생활에서
빠르게 파고들고 있었는데,

이곳에서의 감자의 대중적 보급은
군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 프로이센 군대

감자는 생산량이 많고 
보관이 쉬었기 때문에

군량미 때문에 골치를 썩혀왔던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매력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를 실천하도록 했던 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지금의 동독과 폴란드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에서 
감자 농사를 하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프리드리히 대왕
"군대는 자고로 
배가 불러야 진군할 수 있는거임."

 프리드리히 대왕
"배를 채우는 데 감자만한 게 없음.
그러니 열심히 감자 농사를 짓도록."

그런데 감자의 유용함은 프로이센의 라이벌이었던
오스트리아도 익히 알고 있어서

▲ 오스트리아 군대

1778년 바이에른계승 전쟁을 치르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두 양국은,

군용 식량을 
오직 감자에만 의존하다시피 하여

사람들은 이 전쟁을 
'감자전쟁'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실제로 전쟁은 
보헤미아 지방(오스트리아 영토)의 감자 수확고가
 
모두 다 떨어진 이후에야 끝이났으니
정말로 감자전쟁이었다.
 
이러한 감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으로
동유럽의 더 깊숙한 곳까지 보급되게 되는데,

이후 러시아 역시 정부가 주도하여 
감자 농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게 된다.
 
참고로 오늘날 동유럽 지역은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감자 소비가 많은 지역이다.

탑 10 소비국 중에 
8개 국가가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니 말이다. ☞ 참고

 

특히 세계 1위 소비국인 벨라루스의 경우 
1인당 연간 181kg의 감자를 소비한다니,

1년 동안 한 사람이
1500개씩의 감자를 먹는 셈이다.

재밌는 것은, 요즘엔 아일랜드 사람들보다
영국인들이 더 감자를 즐겨먹는다는 것이다.


●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불패신화'와 같았던 
아일랜드인의 감자는

뜻하지 않는 참변을 맞고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북미 대륙이었다.

1842년 미국에서 발생한 '감자 마름병'은 
순식간에 북미 지역의 감자를 초토화 시켰고

1845년경 
아일랜드에 상륙하게 된다.
 

이때 상황을 보고 받은 
영국의 수상 로버트 필은

아일랜드의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서둘러 옥수수 가루를 수입했다.

 로버트 필 
"이거라도 
대신 먹으면서 버텨."

그런데 당시 감자 외의 
다른 곡물들은 오히려 풍작을 거둔 터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영국은 밀 수탈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듬해도 
감자 역병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고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영국 수상은 
부랴부랴 미국에 식량을 수입해 오려고 했지만,

미국으로부터
퇴짜를 받고 만다.

 
"지금은 계절적으로 
빙산의 위험 때문에 항해가 어려운데요."

"지금 식량난이 
어디 아일랜드 뿐인줄 아세요?"

그리고 겨우 겨우 
곡물을 수입해 오더라도

자유방임주의가 팽배했던 
당시의 영국에서는

수입한 곡물은 
전량 돈을 주고 사먹어야 했다.
 

그러나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에게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곡물을 수입하더라도
돈 없는 아일랜드가 아닌, 

돈 있는 영국으로 
입항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상황은 
너무도 긴박했다.

게다가 이상 한파까지 겹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아일랜드 사람들은
극심한 기근을 겪어야 했고, 

830만 명이던 인구가
650만 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100만명은 조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이민을 갔고
나머지 80만명은 굶어 죽었다.

흔히 아일랜드 감자 기근을 
감자 역병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영국의 가혹한 식민 지배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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