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의 역사적 인물
서양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아시아의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1번 석가모니
2번 징기스칸
3번 진시황
4번 아틸라
정답은 4번 아틸라.
유럽인들에게는 악명높은 테러리스트다.
아틸라
그런데 아틸라가 누구인지 동양사람들은
의외로 잘 모른다.
누구냐고?
바로 훈족의 대왕이다.
5세기 경 혜성같이 나타난 그는
순식간에 로마의 찬란한 문명을 파괴하는 동시에
유럽인들에게
뿌리 깊은 상처와 공포를 심어줬다.
흔히 아이가 울면
동서고금 막론하고
가장 무서운 대상을 인용해서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호랑이,
일본 규슈 지방에서는
무쿠리(몽골군), 고쿠리(고려군),
▲ 일본인 마을을 습격한 여몽연합군
그런데 중세시대 서양에서는
그 대상이, 바로 아틸라였다.
그만큼 아틸라의 명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인 것이다.
아틸라의 명성이
대단했던 만큼
그를 낳은 민족인 훈족 또한
유럽인에게는 영원한 악몽이었다.
그래서 1차대전 중 유럽인들은
독일군을 훈족에 비유하곤 했다.
이런 훈족을 두고
최근에는
흉노족의 후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흥미롭다.
다만 훈족(Huns)을 흉노로 해석하기에는
아직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현재로서는 훈족과
중국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흉노족과의
관계를 밝혀 줄
확실한 근거가 없다.
중국 학자들은
흉노족과 별개로 취급하면서
가능성을 열어 두기 위해 훈족을,
흉인(匈人)이라 표기하고 있다.
● 헝가리인들의 가짜 족보 만들기
서양인에게 훈족은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극단적인 공포와
극단적인 경멸이 그것이다.
아틸라가 죽은 지
1,500년이 지났지만
훈족과 그의 이름은
여전히 유럽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9~10세기경 동유럽 평원에
금발과 파란 눈의 유목민족이 침입했을 때,
유럽인들은,
이렇게 소리치며 혼비백산했다.
"500년 전에 왔던
후... 훈족이 또 쳐들어왔다!"
이들의 생김새는
그 옛날 아틸라의 부족과는 전혀 달랐지만
놀란 유럽인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훈족이었다.
▲ 마자르족 기병
이들은 동유럽
판노니아 평원에 뿌리내렸고,
유럽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곧 '헝가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헝가리란
바로 '훈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헝가리는
엄청난 오해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헝가리 분지에 정착한 유목민족은
핀란드인과 뿌리가 같은 마자르족으로
이들은 유전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훈족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침입에 너무 놀란
중세 유럽인의 오해 때문에
마자르족에게는
오랫동안 '훈족'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 마자르족
그런데 헝가리인 역시 이 오해의 꼬리표를
스스로 즐겨 쓰기도 했다.
민족의 호전성, 진취성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보다 좋은 소스가 또 어딨겠는가.
▲ 훈족의 광할한 영토
특히 18~19세기에
헝가리인들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 자결을 부르짖고 있었을 때
수많은 헝가리의 정치가, 학자,
일반 대중 할 것 없이
모두가 훈족이 자신들의 조상이며
아틸라가 헝가리의 국부임을 강력히 주장했고
▲ 헝가리의 아틸라 석상
헝가리의 우국 시인 페퇴피는
아틸라를 찬양하는 수많은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헝가리가 독립을 쟁취한 뒤
헝가리인들의 훈족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사라졌고,
오늘날 헝가리인들은
다시 예전의 마자르족으로 돌아갔다.
● 1, 2차 대전 중의 훈족, 독일군
유럽 사람들이 말하는 훈족이
반드시 마자르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유럽 사람들은 꼴 보기 싫은 사람을
경멸의 의미를 담아 '훈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그 꼴불견이 동쪽에 있으면
더욱 그러했다.
1차대전이 발생하자, 서유럽의 연합군 측은
일제히 독일군을 '훈족'으로 묘사했다.
한국전쟁 다시 우리가 북쪽의 중공군을
'오랑캐'라고 비하하면서
역사적인 적개심을 불태우고,
스스로 정당성을 높였던 것처럼
유럽인들도 같은 취지로, 동쪽의 동맹군을
'훈족'이라 비하했던 것이다.
이런 멸칭은
2차대전 때도 이어져
당시 영국 사람들 대부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불렀다.
1942년 11월 4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북아프리카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 군단에 반격을 가해 커다란 승리를 거두자,
다음날 영국 신문의 타이틀은 이러했다.
"롬멜의 훈족 집단은
정신없이 도망가기 바빴다."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로,
오랫동안 영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 온
퀸 마더 엘리자베스는
퀸 마더 엘리자베스
무려 50년 넘도록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공개 석상에서까지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영국 왕실과 정부가
큰 곤혹을 겪기도 했다.
지금도 유럽 사람들은
일탈 행위를 일삼는 펑크족을
'훈족'이라고 부르는 등
여전히 '훈족'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훈족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면서,
정작 자신들도 동쪽의 소련군을 두고는
훈족이라고 비아냥질을 했다는 것이다.
▲ 독일군에게 훈족이라 불렸던 소련군
● 흉노족은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4세기 중반, 혜성처럼 등장해서
100년 간이나 유럽 전역을 헤집고 다녔던 훈족은
온 유럽을 폐허로 만들더니,
어느 순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때문에 과거 1,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과연 어디에서 온 종족들인지
궁금해 했는데,
최근까지도 뾰족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더라도
최근의 연구결과는 대략 이렇다.
① 사료로 볼 때 : 훈족은 흉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AD 89년 한나라와 북흉노는
몽골 초원 중서부 일대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렀는데,
이때 북흉노가 패배하여
북흉노의 부족들은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대거 도망을 치게된다.
▲ 장건의 서역 원정
이때 이들이 도망을 친 곳은 아랄해 동쪽,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부근(강거)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훈족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남러시아의 볼가강 유역에서
약 1,500km 떨어진 곳이었다.
그 사이에
별다른 지형적 장애물도 없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우랄 구릉지와
카스피해 북쪽의 습지대 뿐,
대부분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지대다.
때문에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동했다면
200년 뒤에는
충분히 훈족의 발원지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역사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흉노의 '흉'과 훈족의 '훈'의 비슷한 발음이다.
이런 발음의 유사성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학자들은 아시아의 흉노족이
유럽 훈족의 조상격이라고
문헌을 근거로
강하게 믿어왔던 터이다.
② 고고학적으로 볼 때 : 흉노와 훈족은 그닥 관련성이 없다.
훈족의 발원지로 알려진
러시아 남부의 볼가강과 돈강 유역 유적지에는
중국 북방 유목 민족이 사용한
흉노 솥과 한나라의 구리거울이 발견됐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훈족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흉노 솥과 한나라 구리거울은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시 유목민족은
약탈과 무역이 활발한 민족이므로
이러한 문물들은
초원길을 통해 충분히 전수될 수 있고,
▲ 유라시아의 초원길
또 유라시아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중국의 선진 문물은 고대로부터 매우 인기가 좋았다.
오히려 최근의 고고학적 자료들은
훈족의 발원지에서
페르시아, 카자흐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된 점과
흉노족은 천막을 치고 살았지만
훈족은 소가 끄는 수레에서 살았던 점을 들어
1~2세기경 볼가강 유역의 유목민족은
흉노족과는 별개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③ 언어적으로 볼 때 : 흉노의 후손이라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언어학 연구로
훈족의 기원을 찾는 일은
역사 문헌을 토대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부분인데
어쨌든 연구 결과, 훈족의 언어는
알타이제어에 속한
투르크어와 유사하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견해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어와는 관련성이 적고
볼가강 유역의 투르크어와 더 비슷하다고 한다.
여기에 우랄 어족의 영향도
다소 섞였다고 하니,
훈족은 이동이 잦은 유목민족의 특성상
'다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어쨌든 언어로 봤을 때,
중앙아시아 쪽의 언어를 썼던 흉노족과
볼가강 인근의 언어를 주로 썼던 훈족과는
크게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는게 사실이다.
④ DNA 연구 : 몽골리언 계통으로 추정된다.
DNA 연구 결과가
최근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 같았지만,
이것 또한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고 한다.
러시아 유적지에서 발굴된 훈족 유골이
진짜 훈족 유골인지 아닌지, 쉽게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러시아 남부에만 100여개
유목민족이 거주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투르크족, 페르시아인, 슬라브족
여러 민족들이 짬뽕되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유골이 나온다한들
그게 훈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다만 헝가리에서 발굴된 유골의 흔적을 통해
훈족이 몽골리언 계통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 훈족의 유골 : 우리나라의 삼한시대처럼 편두를 한 흔적이 있다.
당시 유럽인들의 역사적 기록도
훈족은 몽골리언의 특징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작고 탄탄한 체구
짙은 피부와 찢어진 매서운 눈
하지만 몽골리언이라고 해서
흉노의 후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남러시아의 평원에는
여러 몽골리언 계통의 유목민족이 거주했었다는 사실이다.
● 최근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 : 훈족은 다민족 집단이었을 듯
종합해 볼 때 유럽의 훈족은
한나라 북쪽에서 활약하던 흉노의 후예일 수도 있고
2~5세기 동유럽 평원에서 활약했던
100여개 유목민족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당시 유라시아의 스텝 지역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뒤섞였기 때문에
사실 훈족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당시 초원의 유목 민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날 때마다
너도나도 그 민족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사례를 들어 본다.
① 선비족 사칭 사례
3세기경 선비족(모용선비)이
요하강 중상류 지역에서 등장하여 중국 북방을 장악하자,
고비 사막 주변에 수많은 부족이
모두 '선비족'을 자처했다.
"요즘 선비족이 먹어준다며?"
"그렇담 오늘부터
우리 부족 이름도 선비족이다."
이런 식으로
탁발선비족이 생겨나게 된다.
이들은 원래
흉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역사 기록을 봐도, 흉노가 쇠퇴할 무렵
일부 흉노 부족이 스스로 '선비'라 칭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5호 16국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여러 북방민족이 '선비'를 자처하게 된다.
선비족의 전신인 모용선비의 경우
원래 수만 명 규모의 '부락' 집단이었는데,
주변의 다른 유목민족을 통합해서
수십 만으로 커지고,
나중엔 다른 유목민족들이
너도나도 이름을 차용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수백만 명을 거느린
'거대 집단'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② 투르크(돌궐) 사칭 사례
7~8세기가 되면
유목민족 중 가장 잘 나가던 세력은
거대 제국을 형성하던
투르크족(돌궐족)이었다.
그러자 중앙아시아의 유목 부족들은
재빨리 투르크족을 사칭하기 시작했다.
"선비족도 한물 갔어. 요즘은 돌궐이 대세임."
"우리 부족도 앞으로 돌궐(투르크)이다."
이렇게 사칭을 하는 통에
심지어 인도-유럽어족인 샤카족과 토하라족까지
투르크족을
자칭하기에 이른다.
원래 순수한 몽골리언이던
투르크족이었지만,
나중에 코카시언 계통까지 투르크족이 되어버린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동 투르키스탄'이라 불리우는
중국의 신장성의 여러 민족들이
오늘날 위구르라는 '투르크인'들로 지칭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같은 이유에서였다.
▲ 스스로 투르크인(돌궐인)임을 자처하고 있는 위구르족
③ 여진족 사칭 사례
17세기 중국 동북 지역에서 흥성했던 만주족은
500년 전 흥했던 여진족의 후예라고 스스로 자처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이들은
같은 민족이라 보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
만주족과 여진족은 언어학적으로는 관련이 있지만
유전적으로 볼 때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진족은 실은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집단으로
퉁구스계였던 만주족과는 민족적으로 달랐다.
하지만 새롭게 흥기한 만주족에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정통성을 부여하고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과거의 잘나가던 국가와 민족을 들먹거리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유목 민족들은
중국 왕조를 사칭하기도 했으니,
선비족은 연나라, 위나라를 자처했고 (전연, 후연, 북위)
티벳족은 진나라, 한나라를 자처했었다. (전진, 성한)
④ 훈족은 흉노의 사칭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훈족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훈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피가 뒤섞인 혼혈집단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당시 훈족은
과거 중앙아시아 초원을 누비던,
흉노를 닮고 싶은 마음에
그들의 이름을 빌렸을는지도 모른다.
● 훈족의 유럽 침략
동유럽의 장악
360년경 훈족은 볼가강을 건너
최초로 유럽 땅에 등장한다.
강을 건너고 처음으로 만난 건
페르시아계 유목민인 알란족이었다.
훈족은 알란족을 가볍게 제압하고
375년에는 드네프르강 유역까지 진출한다.
그곳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고트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동고트족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역에 해당되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훈족의 등장으로
동고트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훈족은
서고트족까지 몰아내며
405년 경엔 우랄산맥 ~ 헝가리에 이르는
동서 3,000km의 거대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쫓겨난 서고트족은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와서
로마제국 곳곳을 약탈하고,
제국 여기저기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명동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를 한 격이었다.
그리고 서로마는 서고트족에 의해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로마제국으로의 침투
한편 헝가리 초원까지
영역을 넓힌 훈족은
434년 새황제 아틸라가 즉위하더니
로마제국 내부로 진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제일 먼저 쳐들어간 곳은
로마제국에서도 가장 발달된 곳인, 동로마였다.
아틸라가 지휘하는 훈족의 군대는
로마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지나가는 마을마다 약탈과 학살을 일삼고
철저히 파괴했다.
유럽인들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잔인함이었다.
결국 동로마 황제는 사신을 보내
강화 협상을 맺었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면서
훈족을 돌려보내야 했다.
그렇게 전리품을 챙긴 훈족은
방향으로 틀어 서로마(이탈리아)로 쳐들어 갔다.
훈족 일당은
어김없이 잔혹했고
살인과 약탈을 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었고
서로마 역시 막대한 공물을 상납하고
미모의 공주까지
훈족의 대왕에게 바쳐야만 했다.
서로마의 공주는 '일디코'는
아틸라의 새 부인이 될 여인이었다.
그런데 첫날 밤에
아틸라는 뜻밖에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 아틸라의 죽음과 일디코
당시로서는 고령이라 할 수 있는 53세의 나이에
폭음을 하고 첫날밤을 치렀으니
복상사를 당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추측이다.
그리고 영웅 아틸라가 죽자
유럽에 진출했던 훈족은 구심점을 잃고 허둥지둥하다가
어느 순간 썰물 빠지듯이
종적을 감추게 된다.
● 흉악한 야만인, 훈족의 일상
역사에 기록된
훈족의 일면은 이렇다.
훈족의 모습과 일상
훈족은 매우 흉악하고
야만적이었는데,
어른이 되면 수염이 자라지 않도록
사내 아이의 뺨에 일부로 깊은 상처를 냈다.
음식은 익히지 않고
맛을 내지도 않았다.
나무 뿌리와 고기 부스러기를
말안장에 넣어 두고 먹으며, 1년 내내 떠돌아다녔다.
어려서부터
추위, 배고품, 갈증을 견디며 자랐다.
이들은 마로 짠 속옷과
동물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하나로 붙인 옷을
즐겨 입었는데
보통 속옷은 짙은색으로 만들었으며
한 번 입으면 떨어져 버릴 때까지 갈아입지 않았다.
또 두건이나 모자를 뒤로 늘어뜨려 쓰고
다리는 양가죽으로 감쌌다.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싸맸던훈족이지만,
유독 신발만은 형편 없었다.
신발은 형태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신고 다니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는데,
애초에 말 위에서만 생활하는지라
도통 걸어다닐 일이 없었기에 그러했다.
때문에 훈족은 그들의 작고 못생긴 말과
마치 한몸과도 같았다.
훈족의 전투력
훈족의 말은 쉽게 지치지 않았고
언제나 번개처럼 질주했다.
일생을 말 위에서 보내는 훈족 기병들은
심지어 말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이들은
천둥 같은 고함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다 전투에서 밀리는 조짐이 들면
뿔뿔이 흩어져 빠르게 후퇴했다.
이들은 전진할 때도, 후퇴할 때도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대로 파괴했다.
이런 훈족의 최대 약점은
요새나 성,
특히 해자가 놓인 성을
어떻게 공략하는지 몰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훈족은
활 쏘는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놀라울만큼
먼 거리까지 화살을 날렸고
화살 끝에는 쇠붙이처럼 단단한 것이 붙어 있어
살상력이 매우 컸다.
아틸라에 대한 기록
아틸라는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머리가 크고
눈은 눈두덩 속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피부색은 아주 짙고 코는 납작하고
수염은 듬성듬성 났으며
어깨는 특별히 넓었다.
단단한 체격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몸매는 아니었다.
아틸라는 언제나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번뜩였는데,
이때 자신의 눈빛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사람들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 한다.
● 유럽의 훈족, 무엇을 남겼는가?
오늘날 훈족의 진짜 후예는 누구인가?
아틸라가 죽은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유럽의 훈족은
실은 흑해의
아조프해 연안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투르크계 유목민인
불가르족과 융합되게 되는데
7세기 이후가 되면,
불가르족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을 하여
발칸반도 남쪽에
국가를 세우게 되고
▲ 불가르족
이후 불가르족들이 토착민인 슬라브족과 혼혈하여
불가리아인들이 되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불가리아인들이
훈족 최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오랫동안 훈족의 후예 행세를 했던
헝가리인(마자르족)은
역사적으로 볼 때
훈족과 접촉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훈족의 역사적 의의
훈족은 오직
약탈과 파괴를 일삼아 온 민족이다.
그들이 인류 문명 발전에 이바지한 것이라곤
강력한 군사력뿐이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그다지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훈족의 서진으로 시작된 대혼란 때문에
로마 문명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훈족의 잔혹성은
훗날 수많은 야만 행위의 본보기가 되었을 뿐이다.
대신 아틸라의 격언을
후대의 유럽 정치인들이 종종 써먹었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때
병사들에게 했던 말이다.
아틸라
"앞으로 로마인들이
훈족의 이름을 1000년 동안 잊지 않도록 짓밟아서,"
아틸라
"다시는 훈족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1900년,
중국에서 8개국 연합군(미영불러독오이일)이
의화단 운동을 무참히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 의화단 운동 (1899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아틸라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독일 병사들에게 전했다.
빌헬름 2세
"앞으로 중국인들이
독일의 이름을 1000년 동안 잊지 않도록 짓밟아서,"
빌헬름 2세
"다시는 독일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최근에는 일본의 한 야구선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치로
"앞으로 한국이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구나
라고 느낄 정도로 이겨버리고 싶다."
참고 문헌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쎄), 역사를 뒤흔든 7가지 대이동(중국 북경대륙문화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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