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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2천년 전 로마시대 놀라운 기술력 : 왜 로마인가?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199927961
● 로마의 포장도로

 
 
우리나라의 포장도로 역사는 
언제 부터였을까?

1932년 경이다. 
이때 처음 아스팔트가 들어선다.

최초의 고속도로는 
1968년 서울~인천 구간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2천년 전에 
지구를 4바퀴나 돌 수있는 

총 15만km 길이의 
차량(마차) 전용 포장도로를 닦았다.

그리고 지금도 당시 닦여진 도로가 
유럽 곳곳에서 

원형상태를 고스란히 보존하며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당시 로마의 도로는 
차도와 인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고 

도로 가장자리로는 
배수로가 설치돼 하수도로 흘러갔다.

또 도로 곳곳에는 
오늘날 횡단보도와 같은 시설도 설치되어 있었다.


● 로마의 수도 시설 : 배관

 
▲ 로마시대의 배관
 
우리나라에 수도시설이 
처음 개통된 시기는 언제일까? 

1908년이다.
이때부터 오늘날과 같은 상하수도 시설이 설치된다.

하지만 로마는 오늘날의 방식과 
거의 흡사한 상하수도 시설과 수도시설을 

2천년 전부터 
완벽히 운용하고 있었다.

총인구 100만명이 었던 당시의 로마시는
평균 40km의 거리의 파이프 라인을 이용해 

9개의 취수원에서 
물을 끌어썼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매일 로마시로 
9억 5천만 리터의 물을 실어날랐다. 

"9억 5천만 리터의 물은, 
올림픽 경기용 수영장을 매일 450개씩 채울 수 있는 양임."

다만 당시의 배관은 
납을 사용했었다.

물론 20세기 후반까지도 
유럽 곳곳은 납을 이용한 배수관을 사용했다.

그때까지 납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말이다.

참고로 배관을 의미하는 
영어 플러밍(plumbing)은 

납이라는 뜻의 
라틴어 플럼버스(plumbous)에서 유래됐다.


● 로마의 수도 시설 : 수도교

 
 
이 당시 물은 
대부분 지하관을 통해 흘러갔지만 

"참고로 로마시의 경우 총 418km이르는 수로 중 
47km구간만이 지상으로 나와 있다능."

지형적 장애물을 만나면
'수도교'로 알려진 거대한 수로 시설을 설치해 물을 날랐다.

수도교는 교량으로써의 기능도 있었지만
그보다 우선적인 것은 수로의 기능이었다.

BC 19년 경 세워진 
프랑스의 가르 교의 경우는 

길이가 275m, 
높이 49m나 되는 거대 수로였지만

다리 양쪽의 고도차는 
불과 1.3cm밖에 안될 정도로 정밀하게 만들어졌고,

"참고로 로마시대 수로들은 
평균 기울기가 약 0.4~0.5도 정도 밖에 안됐음."

이러한 수로는 
내부 통로를 통해 흘러 그 오염을 막았다.
 
▲ 식수로 사용되는 물은 내부를 통해 흘렀고 빗물을 받은 상단부의 수로는 주로 목욕탕이나 화장실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 시설은 
제국 곳곳 어디에서나 있었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 프랑스, 

중동, 영국에까지 
모든 '식민 도시'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때문인지 로마시대에는, 전통시대에 세계 어디서나 흔했던
'수인성질병'에 대한 기록을 찾기 힘들다. 
 

● 로마의 수도 시설 : 지하수도 (상수도용)

 

현재 로마시의 지하에는 
2천 년 전 건설된 수많은 지하수도가 있다.

그 중 AD 19년에 지어진 
로마의 지하수로의 경우 

깊이가 무려 43m에 달하는데
터널의 폭은 평균 1.2m정도이고

이곳에서 
초당 약 1,175리터의 물을 운반했다.

터널의 벽면은 시멘트를 바르고
특수 모르타르를 덧대어

물이 닿는 부분의 마찰을 줄여 
물이 원할히 흐르도록 했다.

이들 수로는 대부분 공중목욕탕으로 통했고
황제가 사는 황궁에도 물을 공급했다.

오늘날 트레비 분수는 
아직도 그때 만들어진 수로를 이용해 운용되고 있다.
 


● 로마의 공중목욕탕


 
우리나라의 최초의 공중목욕탕은 언제 생겼을까? 
1924년 평양에서다.
실제로 근대화 이전 
목욕 문화가 발달했던 문명은

전세계적으로 로마시대와 일본의 에도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로마인들은 
거의 매일 같이 목욕을 즐겼고

목욕문화가 발달되어 
냉탕, 온탕, 증기시설까지 모두 구비하고 있을 정도였다. 

"사용료? 공짜였음."

"로마는 빵도 공짜였고 서커스도 공짜였지."

우리나라의 온돌과 같은 바닥 난방식 시스템이 
로마의 공중 목욕탕에도 가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중목욕탕 역시 
제국 전체에 걸쳐 어디서나 구비되어 있었다.


● 로마의 수세식 화장실

  
 
로마의 화장실은 
보통 공중목욕탕 건물 옆에 설치했는데

이렇게 설치한 이유는, 목욕탕에서 사용된 물을 이용해
화장실을 씻어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당시에는 프라이버시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화장실은 남녀공용이었고
칸막이도 없이 나란히 앉아서 용무를 해결했었다.

이때 화장지 대용으로 
막대기에 젖은 스펀지를 끼워 뒷처리를 했다고 한다.

다만 이걸 각자 하나씩 가지고 다녔을지, 
아니면 공용으로 사용했을지는 의문이다.

참고로 백제시대에는 
공용(한 사람이 쓰던거 다른 사람도 쓰고)으로 사용된 나무 막대기가 있었다. 
 


● 로마시대의 하수도

로마는 하수도 시설도 훌륭했다.
도로 곳곳에 배수로를 설치하고
 
▲ 도시 지하에는 이러한 하수도가 있었다.

목욕탕이나 화장실의 분뇨는
도시 지하 곳곳에 설치된 하수도 시설로 흘려 보낸 것이다.

거리 곳곳에 
맨홀 뚜껑도 있었다.
   


●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

 
 
오늘날에도 5만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은 
'대형 경기장'으로 취급 받는다.

하지만 2천년 전 로마는 
최대 8만명 수용의 

거대 경기장 콜로세움을
불과 9년만에 제작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층별, 각 섹션별로 
입·퇴장 게이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대규모 인원이 관람해도, 
5분만에 모든 인원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대단히 효율적인 
구조를 갖췄다는 것이다.

이 경기장에 쓰인 물량만 봐도 
석회석 10만톤, 300톤의 철근이 소요됐다.

특히 이곳의 콘크리트 수준은 
오늘날과 같은 강화 콘크리트로

물 속에서도 굳을 정도로 
그 성능이 우수하다.

당시 로마인들은 이런 콘크리트를 '시멘텀'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시멘트의 어원이기도 하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1920년대에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이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원형경기장도 
제국 곳곳에 세워졌었다.


● 콜로세움 지하의 승강기


콜로세움의 지하에는 
검투사들의 방과 

수백마리 맹수들의 우리가 있었다.
사자, 표범, 호랑이, 코끼리, 기린, 늑대, 곰 등의..

이들의 운반은 위와 같은 
도르레 장치를 이용한 승강기를 이용했다.

승강기는 맹수 뿐만 아니라,
경기장의 현장감을 극대화 하기 위한 

소품들의 운반에도 이용됐는데,
아래는 야자수를 운반하는 방법을 모형화 한 것이다.
 


● 로마시대의 건축술 : 축압축 공법

원형경기장의 구조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경기장은 아치형으로 
층마다 뚫려 있기 때문에

첨단 공법이 아니면 그 하중을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2천년동안 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 공법의 비밀은 이렇다. 
아치 상단에 수직방향으로 적재물이 올려지는데
 

이위 같은 공법으로 쌓게되면
그 무게가 양쪽으로 분산되기 때문에 

기둥으로 
무게가 전달된다고 한다.

이런걸 공학적 용어로 
'축압축 공법'이라고 하는데

2천년 전부터 로마인들은 
이런 걸 터득했기 때문에

로마시대의 대형건축물에는 
아치와 복도로 이뤄진 벌집 구조형이 많다.


● 로마 건축술의 백미, 콘크리트 돔

 
 
불가능할 것 같지만, 
1900년 전 로마인들은

콘크리트만을 이용해서 
직경 43m의 거대 실내 돔을 만들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비강화형 콘크리트 돔이다. 

바로 AD118년에 지어진 
판테온 신전이다.

그 비법은 이렇다.
안정적인 구조를 위해 외벽을 무려 6m 두께로 만들고

하중을 견뎌내기 위해 
지붕은 위로 갈수록 가벼운 물질의 콘크리트를 썼던 것.
 

"높이마다 콘크리트의 무게를 달리하기 위해 
무거운 현무암, 중간 무게의 돌맹이, 물에 뜨는 부석 등을 각각 혼합재료로 썼음."

다만 꼭대기 부분만큼은 
지름 9m의 창을 내어

가장 취약한 부분에 하중이 생기는 것을 막아주고 
판테온 내부에 빛이 들어오도록 해줬다. 

 
특이한 건 
돔의 만곡부를 따라 원을 그릴 경우,

네모난 건물의 내부에 
거의 정확히 들어맞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 로마시대 아파트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언제 지어졌을까? 
1930년 서울 충정로의 유림 아파트다.

하지만 로마는 2천년 전부터 
아파트를 짓고 살았다.

당시 시민들은 
대부분 2~5층의 아파트에서 살았고

가장 높았던 것은 
높이 24m의 8층짜리 아파트였다.

로마는 도시화로 인구는 급증했지만 
주거지가 부족하다 보니

이러한 복층 아파트가 성행했던 것이고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 로마시대 이중 창문

 
 
로마인들의 발명품 중에는 
유리창도 있다.

이는 BC 1세기 중반 
유리 불기법이 고안되면서 가능해졌는데

로마인들은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 
단열효과가 뛰어난 이중창을 고안해내게 된다.

이중창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양식은 1970년대 와서야 

현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로마의 창틀에는 
유리창을 끼울 수 있는 홈이 

두 줄 씩 파여져 있었는데
그 홈의 간격은 약 1.3cm 정도였다.

이러한 이중창으로 로마인들은 채광은 물론 
단열효과까지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 비키니의 시초

 

1960년대 서양에서는 
혁신적인 수영복 패션이 나오고

그 충격이 비키니섬의 수소폭탄 실험과도 
맞먹는 정도라해서 '비키니'라고 지었는데,

사실은 그 원조는 
2천년 전 로마인들이다.
 

놀라운 기술이라고 할 건 없지만
그냥 이런 것도 있었구나 싶어 올려본다.


● 로마시대 신발

로마시대는 생활용품 하나하나가
높은 수준에 있어, 사람들을 놀래게 할 때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신발을 들 수 있다.
▲ 위로부터 아기 신발, 엄마 신발, 아빠 신발

당시 신발 밑에는 
미끄럼 방지책으로 징이 박혀있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미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크게 이질감이 없다.


● 선거제도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당시 선거 포스터다.

후보들의 이름이 있고,
대략 선거 후보자는 6명이었다.

 

당시 로마 시대의 민주화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금권선거로 얼룩지긴 했지만.. 

참고로 로마시대는 
지방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황제도 대중적 지지(현실은 군인들의 지지)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그래서 가끔 하층민 출신이 황제가 되거나
경매를 통해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 황제가 되기도 했다.


● 화폐

오늘날 현대 화폐(주화)의 모습은
고스란히 2500년 전부터 만들어진 로마 화폐의 영향을 받았다. 


● 의료도구

로마시대의 놀라운 발명품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부분이

바로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의료도구들이다.

현대의 외과 수술용 도구와 견주어 보아도
그 형태나 기능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당시 로마에는 오늘날과 같이 전문의들이 나눠져
약사, 내과의, 외과의, 마취전문의 등이 있었다.

특히 외과술과 마취 쪽은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백내장 수술, 뇌수술, 정맥류 제거수술 등을 했었다.
특히 지혈과 봉합수술은 매우 탁월했다.
 
수술 중에는 아편과 사리풀을 이용한 마취제를 이용했고
노보카인이라는 진통제도 발명했다.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행해지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 눈꺼풀이 잘 수축되지 않아서 
밑으로 처지기 마련인데,

이 당시에는 눈꺼풀 조직을 살짝 잘라내고 
세밀하게 꿰맸던 수술이 유행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의료술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평균수명은 길지 않았다.

영유아 사망을 제외하고 봐도 
40세 중반 밖에 살지 못했다. (영유아를 포함하면 평균수명은 21세)

재미있는 건 당시 군인의 대우가 좋았던 탓에 
남자가 여자보다 더 수명이 길었던 특이한 현상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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