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씻는 것을 위선이라고 생각했던 중세 유럽인들 (5세기 ~ 12세기)
인류의 역사는
늘 일방향으로 발전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정체되거나
혹은 역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중세 유럽은
그 역행의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무엇보다 위생적인 면에 있어서
그러했는데,
대표적인게 목욕 문화가
사라졌다는데 있었다.
▲ 로마 시대의 공중 목욕탕
5세기 성직자
성 제롬은 이렇게 말했다.
성 제롬
"기독교식 목욕(세례식)을 한번 한 사람은
더 이상 목욕할 필요가 없다."
6세기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아라비아인 정원사는
불결한 기독교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씻을 줄을 모른다."
"기독교인들은 태어날 때
아기들 머리에 물을 쏫아 붓는 세례를 하는데,"
"이것이 일생 중
단 한번의 목욕이었다"
▲ 중근대 유럽인들의 평생 유일한 목욕일수도 있는 세례식
중세 유럽인들은
왜 이렇게 씻기를 싫어했던 것일까?
역사학자 중에는
기독교에서 그 원인을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성경에서 '씻는 것을 위선'으로
생각했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최초의 기독교인인
유태인들은 어느 정도 목욕을 중시했다.
다만 이들의 목욕은 육체적인 청결보다는
관례적인 청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배우자와의 성교, 시체와의 접촉, 분만,
간통, 살인, 동성애 등을 한 경우에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정화 용도로 몸을 씻곤 했던다.
▲ 유태인들의 목욕
그런데 성경에 나타는 예수는
더러움에 무관심했고,
병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병 환자, 출혈상태의 여인,
죽은 자의 시체도
거리낌 없이 만졌다.
예수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도 무시했다.
성경에서는 예수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빵을 먹자
외지인들이 당황해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하지만 예수는 기존의 관습을 비웃고
위선으로 꼬집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은 더러운 몸 때문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에 의해 불결해진다고 말한다.
예수의 생각이 이럴지인데
예수의 교리가
세상을 지배를 했던
중세 유럽인들의 관념이 어떠했겠는가?
목욕을 기피하는 현상은
관념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나타나지 않는가!
▲ 목욕을 하더라도 옷을 모두 벗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씻었던 조선시대 사대부
1075년 클뤼니 수도회 소속 수도사
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목욕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별로 없다."
"우리는 성탄절과 부활절 전에만
1년에 2번 정도 몸에 물을 묻혀보기 때문이다."
● 십자군 원정과 공중목욕탕의 부활 (13세기)
중세시대 목욕을
위선이라 생각했던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이슬람교도들은
위생에 대한 인식이 강했다.
특히 신에 대한 경건함을 유지하고,
죄를 씻어낸다는 관념적인 의미로
목욕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그런 이슬람 세계와
11~13세기에 걸친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차츰
발달된 이슬람의 과학과 문화를 흡수하게 되는데,
종이, 화약, 나침반은 모두 이 시기
이슬람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때 중동의 공중목욕탕과 한증탕과 같은
시설물도 들어오게 되는데
유럽인들은 이와 같은 시설은
터키인들의 목욕방식이라고 하여 '터키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상류층을 중심으로
점차 목욕 문화가 부활하기 시작하여
1주일에 1~2회씩 목욕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도원에서도, 늙고 아픈 수도사들에게만
특별히 목욕을 허락한 중세초기와 달리
13세기가 되면
'필요할 때면 언제든 몸을 씻어도 좋다'라는 규정으로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더러움은 하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라는 관념까지 나타나게 된다.
교회에서 향을 피우는 것도
점차 허용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중세시대에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심한 시대였다.
입냄새·땀냄새·암내·
소변냄새·똥냄새·음식냄새 등등
사람들마다
형언할 수 없는 냄새들로 가득했다.
당시 사람들이야
이런 냄새에 익숙했겠지만
그렇더라도 가끔씩 풍기는
고약한 악취는 도저히 참기가 힘들었다.
특히 교회같은
밀폐된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전까지 유럽의 교회들은
내내 그런 악취를 맡아가며 생활했는데
13세기가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고상한 인물조차도
교회에서 냄새 제거를 위해 향을 피우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고 동조하기에 이른다.
토마스 아퀴나스
"구린 냄새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고."
이렇듯 중세시대 말기가 되면
점차 사람들은 청결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중들에게 목욕은 기피대상이었는데
다만 손으로 음식을 먹어야 했던
중세 유럽인들이기에
식사 전 손 씻기만은
어느 정도 필요한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13세기에 쓰여진
어느 프랑스 기사 이야기에서는
노르웨이 사람들이 식사할 때 손을 씻지 않아서
당황해 하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또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물로 입을 행구는 것이 점점 에티켓으로 권장되기도 했다.
이 당시 스페인 같은 곳은
주로 소변으로 입을 행궜다.
● 흑사병의 도래 "죽고 싶거든 목욕해라" (14세기 ~ 15세기)
하지만 13세기 유럽에서의 공중목욕탕 인기도
한때의 유행으로 그치고 말았다.
원인은 선페스트라고 불리우는
'흑사병'의 창궐이었다.
문제의 질병은
역사상 유례가 없던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14세기 중반, 불과 4년만에
유럽 인구의 1/3 수준인 2500만명이 사망했을 정도였다.
희생자의 사타구니, 겨드랑이, 목 따위에
부어오른 검은 종기 때문에
'흑사병'으로도 불리는 이 병은
아시아에서 발생해 쥐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왔다.
보통 환자들은 종기가 생기면
사흘 만에 죽었고
어떤 종기는 림프절이 부어 올라
사과만큼 컸다.
어찌나 사망자의 수가 많은지
사람을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쌓아 매장했음에도
프랑스의 아비뇽 같은 곳은
더 이상 매장용 토지가 없어
강가에 버리는 일이 빈번해져서
교황의 골치를 썩히기도 했다.
1348년 프랑스의 필립 6세는
의학부 교수들에게 지시하여 역병의 원인을 규명하도록 했다.
필립 6세
"발명의 원인을 어서 알아내도록!"
그런데 이 당시
교수들이 밝힌 원인이 조금 골때린다.
돌팔이
"최근 갑자기 목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암만 봐도 이게 원인인듯 합니다."
돌팔이
"사람 피부가 물과 접촉을 하면 모공을 통해
쉽게 나쁜 물질이 체내로 들어올 수 있게되는데.."
돌팔이
"아마도 이런 경로로
역병이 옮아가는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이후 수백년 넘도록 먹혀들어,
유럽에서는 역병이 창궐할 때마다
전문가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하게 된다.
돌팔이
"죽기 싫으면
제발 목욕 좀 하지 말어!"
때문에 16세기까지 유럽에서는
많은 목욕탕이 폐쇄되었다.
특히 모공을 통해
물이 체내로 흡수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나쁜 것이 물을 통해
몸으로 들어올 수 있다라는 불안과 함께
혹시나 목욕 물에 떠다니는 정자 때문에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까지 생겨나게 된다.
또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영향을 주어,
행여 해로운 공기가
피부 모공 속으로 침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촘촘하게 짠 재질의 옷감이
크게 인기를 누리게 된다.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는
역병이 거의 해마다 돌았기 때문에
이러한 '모공 괴담'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 평생 씻지 않았던 근대 유럽인들의 모습 (16세기 ~ 18세기)
이탈리아 음악가의 불평
1576년 이탈리아의 음악가
카르다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몸에 벼룩과 이가 득실거리고,"
"겨드랑이 냄새가 나는 사람도 있고,
발냄새를 풍기는 사람도 있는데..."
"다 참을 수 있어도
입 냄새만큼은 못 참겠다."
독일 화가가 그린 귀족 부인의 '이 잡는 모습'
17세기 독일 화가 네처는
자녀와 집에 함께 사는 어느 부잣집 여인을 그렸다.
'어머니의 보살핌'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부티가 흐르는 방의 뒤편에 하녀가 보이고
한 가운데에
화려한 우단과 비단 의상을 입은 젊은 여인이 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옴폭한 손으로 빗을 쥐고
아들의 머리에서 이를 찾고 있다.
사실 이런 장면은
17세기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당시 아이, 어른, 특권층, 빈민층 가리지 않고
모두 이, 벼룩 따위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이었지만
옷을 벗기면
1년 내내 씻지 않은 몸둥이가 있었던 것이다.
여관은 이불만 깨끗하면 됐다.
16~17세기 여행기를 보면
여행자들은
위생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물의 사용 여부는 그다지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여관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불의 상태와 빈대의 서식 유무였다.
"물 좀 안 나오면 어때,
이불만 깨끗하면 되지"
1592년 독일로 여행을 떠난
영국인 여행가 모리슨은
어느 마을의 여인숙에 들려
하인에 내민 이불을 유심히 보더니 이렇게 따졌다.
"이거 이불이 더러워 보이는데?"
하인
"그럴리가요? 최근 이불을 덮고 잔 사람은
아흔 살 먹은 노파밖에 없었어요."
하인
"그러니 아주 깨끗한 거라구요."
한편 그 무렵 유럽에서
가장 깨끗한 동네로 소문난 곳은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주택가였는데
다른 곳보다 청소 상태가 잘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막상 만난
네덜란드인과 스위스인들은 예상과 달랐다.
"세상에 이들은
음식 먹을 때에 손을 씻는 법이 절대 없다."
"그토록 씻기 싫어한다는
프랑스 넘들도 음식 먹을 때만은 손을 씻는데.."
어쩔 수 없이 세수를 해야했던 프랑스 공주
1705년 8월 어느 더운 날 프랑스에서,
독일 태생의 팔라틴 공주는
먼지가 풀풀 나는 도로를
오랫동안 마차를 타고 달려
마를리에 있는
왕궁에 도착했다.
팔라틴 공주
"아! 더워. 죽겠어."
도착해보니 공주는 땀이 흥건했고
화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땀에 젖은 몸은
속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더러워진 얼굴은
가릴만한 천 같은 것이 없어서
당시 공주는
마치 회색 가면을 쓴 듯 했다.
팔라틴 공주
"이넘에 먼지가
내 얼굴을 죄다 덮었어."
결국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짓을
공주는 해야만 했는데,
그녀는 이 일이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될 거라 생각하여 편지에도 썼다.
팔라틴 공주
"오늘 어쩔 수 없이 세수를 해야만 했어염."
팔라틴 공주
"얼굴에 먼지가
너무 많이 묻었거든염"
당시 마를리 궁의 정원에는
물이 철철 흘러넘쳤지만
그곳에 손을 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마를리궁
프랑스 왕실 사람들은
팔라틴 공주처럼
아주 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피부가 물에 젖는 것을 피해왔던 것이다.
다만 맵시 있는 외양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인들은
옷 속의 더러운 몸을
우아한 겉모습으로 끊임없이 변장하고 있었다.
암내를 자랑하고 다니던 루이 13세
깔끔 떨기로 유명한 프랑스 궁정에서
국왕은 하루 3벌씩 옷을 갈아입고
궁정의 귀족들은
체취를 감추기 위해 틈틈히 향수를 뿌렸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도
목욕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었으니
프랑스의 앙리 4세는
체취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루이 13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이 13세
"에헴!"
한술 더 떠 루이 13세는 체취를 자랑스럽게 여겨
이렇게 말하곤 했다.
루이 13세
"짐은 선왕을 닮아
겨드랑이 냄새가 심한 거야."
● 당시 전문가들이 말하는 위생 수칙 (16세기 ~ 18세기)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절에 제기된
'모공 괴담'은 근대에까지 의학계를 지배해서
당시 의학계의 주류는
차단된 모공이 몸의 감염을 예방한다는 논리였다.
때문에 목욕은 질병에 전면 노출되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간주됐다.
이런 믿음은 17~18세기 내내
유럽 전역에 되풀이된 역병의 창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1665년 런던에서는
대역병으로 10만명이 사망했고
1710~11년 역병은
스톡홀름 인구의 1/3을 앗아갔고
1720~21년에는
마르세유의 인구 절반이 역병으로 숨졌다.
(역병으로 표현한 것은 당시 정확히 어떤 질병이 창궐한건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
때문에 역병이 돌지 않은
평화로운 일상에서도
사람들의 물에 대한 공포는
끊이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의사들이 앞장서서
목욕이 인체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1655년 한 프랑스 의사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돌팔이
"인체의 분비물이
피부에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는데,"
돌팔이
"이걸 벗겨내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돌팔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목욕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인간에게 매우 해롭다."
돌팔이
"특히 목욕을 하면 머리에 수증기가 차고
신경과 인대가 나빠진다."
때문에 이 당시 씻는 방법은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손은 슬쩍 대충 씻는 정도였고,
입은 재빨리 헹궈야 했고
얼굴은 마른 수건으로 닦는 게 전부였다.
전신 목욕의 경우도 마른 수건으로 닦을 정도였다.
17세기 중엽 몸 단장에 관한
전문 서적의 내용을 보면,
머리를 감을 때는
물로 씻기보다는
취침 전 머리카락을 분으로 문지르고
이튿날 아침에 빗으로 빗어 없애는 방법을 권했다.
씻더라도
신체의 노출부위만 씻도록 했으니
손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 대한 목욕법은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다 18세기 중엽부터
발 씻기가 언급되기 시작할 뿐이다.
오늘날 처럼 몸을 씻는 지침은
19세기 중엽, 최근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 프랑스 왕의 일생으로 보는 목욕 (1601년 ~ 1715년)
루이 13세와 루이 14세의 기록을 통해서
당시 왕족들은 얼마나 목욕을 자주 했는지 살펴보자.
루이 13세가 태어난 1601년
왕실의 외과 의사는
왕자의 목욕 기록을 남겼다.
기록은 짤막했다.
생후 6주 후에
왕자의 머리를 마사지했다.
7주 후 왕자의 지루성 피부염을 치료하고자
버터와 아몬드 기름을 발랐다.
태어난지 9달 지나서야
왕자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5살 때 처음으로
왕자의 다리를 미지근한 물로 씻어주었다.
왕자는 7살때
처음으로 욕조에서 목욕을 했다.
이때 모공이 벗겨질까봐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 어린시절 루이 13세
목욕물은 반드시 미지근 해야 했다
뜨거운 물은 체액을 흐리게 하여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루이 14세의 얘기다.)
루이 14세는 아침에 일어나면
2명의 주치의와 간호사가 왕의 침실에 함께 들어갔다.
▲ 당시 왕의 침실
주치의들이 왕의 몸을 문질러 닦고
셔츠를 자주 갈아입혔다.
왜냐하면 왕은
평소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시종이 왕의 손에
물을 조금 뿌려주면
왕은 그걸로 입을 헹구고 얼굴을 닦았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한편 루이 14세는 아침 기도를 마치면
펜싱을 즐겨하고
춤을 추고
군사훈련에 참가했던 터라
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늘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때도
왕은 절대로 씻는 법이 없었다.
대신 옷을 갈아입었다.
하루에도 보통 3번씩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대단히 깐깐하고 깔끔하다고 여겼을 테고
또 누구보다도
본인이 깨끗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루이 14세는 입냄새만큼은
본인도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짐은 곧 국가'라는
절대왕권을 상징하던 '태양왕'이었지만
궁정 안의 모든 사람들은
루이 14세 특유의 구취를 익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정부 몽테스팡 부인은
루이 14세의 악명 높은 입내를 자주 불평했고
자구책으로 자신의 몸에
향수를 엄청 뿌려댔다.
몽테스팡 부인
"몸에서 입 냄새가 배어
저도 어쩔 수 없었다구요."
그러자 도리어 왕은
그녀의 향수 냄새에 진저리를 쳤다
● 17~18세기 유럽인들이 생각하던 위생의 척도
근대 유럽인들에게
목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느냐에 있었다.
특히 깨끗한 아마포 옷을 입는 것만큼
안전한 위생 방법도 없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나름
근거도 가지고 있었는데,
▲ 아마포
아마포 옷이
땀을 흡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땀은 기름기와 소금기가
함유되어 있기 마련인데
아마포는 수분과 기름기를
흡수하려는 성질이 강하다는 논리였다.
때문에 당시 위생의 척도는 뭐니뭐니해도
"희고 고운 아마포 옷"에 있었다.
▲ 흰색 아마포 옷
당시 네덜란드 브라반트라에 사는 여인들이
유럽에서 아마포 옷을
가장 깨끗히 입는다해서
가장 청결한 동네로 꼽히기도 했을 정도다.
프랑스 왕실에서도
아마포 옷으로
곧잘 소녀들의
청결상태를 판단하곤 했다.
아마포와 관련해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
16세의 아름다운 숙녀 마리는
콩테 공작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한참동안 열심히 춤을 췄다.
마리
때문에 그녀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곧 슈미즈(아마포 재질)를 갈아 입으러 옷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슈미즈를 갈아입고
다시 연회장으로 나갔는데
때마침 머리를 빗으려고
옷방에 들어온 앙주 공작이
그녀가 벗어놓은 축축한 슈미즈를
수건으로 착각했다.
앙주 공작
"잇힝~ 좋은 냄새야."
그는 슈미즈로 얼굴을 닦자마자
페르몬이 가미된 냄새에 흠뻑 취했고,
곧 그 냄새의 주인공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 슈미즈를 입은 여인
실제로 사람의 몸 채취는
이성에게 페르몬으로 느끼게 해준다는데,
목욕을 매일같이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상당히 신기하고 낯선 광경일 뿐이다.
● 근대 유럽인들의 배변 치우기
마드리드의 밤과 요강 (1623년 영국의 궁정원 기록)
밤 11시가 되면
스페인 마드리드의 집들은 갑자기 분주해진다.
모두가 길거리에다
요강을 비웠고
이튿날 아침 10시 거리에는
똥과 오줌들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것은 내과 의사들의
처방이었다.
똥의 해로운 냄새와 수증기를
밤의 차가운 공기가 정화시켜 준다는 주장이었다.
베르사유 궁의 배설물 청소
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일이다.
당시만 해도 궁중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사람들은 요강을 이용해서 볼일을 봤다.
다만 급할 때
화단에 들어가 방뇨를 한다거나
요강의 변들을 화단에 뿌려
화단을 엉망으로 망치는 경우가 잦았다.
이에 화가 난 루이 14세는
이러한 법령을 반포하게 된 것이다.
루이 14세
"1주일에 한번 씩은
화단의 똥들을 치워라!"
용변을 누고 손 닦는 것은 실례 (1558년 갈라테오)
16세기 유럽에는
귀족들이 지켜야할 에티켓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용변을 보려고 하거나
인기척이 있을 때
옷을 갖춰 입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모임에서 볼일을 본 후
자리에 돌아와 손을 씻어도 안됐다.
손을 씻으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17세기 목욕문화가 발달된 중동을 바라보는 유럽인 시각
중근세 시대 중동인들은
여전히 매우 발달된 목욕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무엇보다
자주 씻어야하는 종교적 의무가 있었다.
특히 사원에 들어 가기 전에는
매일 저지르는 온갖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몸을 청결히 해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 블라운트가
1636년 출판한 '레반트 여행'의 기록을 보면
당시 터키인의 청결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터키인들은 어떤 도시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중목욕탕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1주일에 2~3번 목욕하지 않으면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또 소변을 볼 때면
이곳 사람들은 유별나게도 생식기를 씻었다."
"개가 손을 핥아도 손을 씻었다."
"기도를 드리기 전에도 손과 얼굴 씻었고
심지어 이들은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감는다."
영국인은 터키인의
이러한 특성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한다.
"아마도 더운 나라 특유의
조잡한 음식에 익숙해져 살다보니 그렇게 된 듯 함."
"터키보다 온화한 기후의
유럽인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짓임"
유럽인들이 보기에
1주일에 몇 번씩이고 목욕을 하던 중동인들은
특히 생식기를
규칙적으로 씻는 문화는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인,
때로는 야만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중동인들은
유럽인들의 씻지 않은 문화를 보고
아연실색 하며 조롱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영국인 한 사람이
배 밖으로 떨어져 물에 빠지자, 한 무슬림이 말했다.
"이제야 당신들의 신이
당신을 씻어주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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