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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술의 역사 : 술(酒)에 얽힌 세계사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3331841
● 농업혁명과 술

술은 자연 상태에서도 
만들어진다.

가량 과일나무 밑에 바위 틈새나 웅덩이로 
잘 익은 과일이 떨어져서 쌓이게 되면

과즙이 문드러져 고이게 되고
자연에 존재하는 효모에 의해 

발효가 일어나서
자연적으로 알콜이 만들어진다.
 
▲ 야생포도

이런 알콜을 주변을 지나가던 동물들이
목을 축이다가 마시게도 되는데

가끔 코끼리나 멧돼지 등이 이런 술을 마시고
휘청거리거나 뒹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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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취한 코끼리

인간도 아마 처음에는 이런 자연 발생적인 술을 
맛 보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위적으로 술을 빚게 된 것은 
농경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1만년 전 지구는 
마지막 빙하기를 끝내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식생도 변하게 되어
대형 포유동물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수렵생활에 의존하던 인류는 
불안을 느끼며 

대응책으로 주변에 있던 곡류, 감자류, 바나나 등을 
식량으로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즉 농업은 환경이 열악해진데 대한 
위기의식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때 곡식을 저장하게 되면서
인류는 불가피하게 발효가 된 곡식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맛을 보니 인간의 기호에 맞았고, 
또 취한 상태도 나름 괜찮았다.

때문에 인류 발전사에 있어 농사와 술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실제로 육식만을 주식으로 하는 
극지방의 이누이트 족들을 제외하고 

고유의 술을 
가지고 있지 않는 민족은 없다고 한다.

심지어 유목민족들의 경우도 
가축의 젖을 발효해서 

술을 빚어 마실 정도이니
술의 탐식은 인류의 본능과도 같았다.

 
▲ 몽골 유목민의 마유주


● 인류 최초의 술, 와인

과일은 당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술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곡물에는 당분이 적고 
녹말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술을 만들기가 힘들다.

이런 이유로 최초의 술은 
과실주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보다 먼저 벌꿀술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과실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포도주를 꼽을 수 있겠는데,

포도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때문에 와인은 원래 
중동,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져 성행하던 술이었다.

그런데 7~8세기 경 
중동과 중아아시아가 이슬람교화 되면서 

이 지역은 금주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쪽에서 와인 문화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대신 와인은 
유럽에서 성행하게 된다.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미 와인은 
대중적인 술로 자리 잡았다.
 

로마는 유럽의 영토를 정복하면서
정복지에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들어 먹었는데

당시 로마 병사들은 
하루 1리터 정도의 포도주를 배급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로마군이 들어오기 전 
프랑스에서는 포도주가 무척 비싸

노예 1명과 
포도주 1단지를 교환할 정도였지만

이후 로마제국 전역에 포도가 심어져
포도주는 모든 로마제국의 대중적인 음료수가 된다.
 

그리고 이런 포도주는 중세시대 
기독교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포도주를 피에 비유했던게 원인이라 한다)

수도원, 교회를 중심으로 
대량생산 되었고

근세 이후에는, 일반 농가에서도 
와인을 양조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호사를
모든 유럽인들이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4세기가 되면 
유럽에 소빙하기가 시작되는데

이때 잉글랜드의 포도 재배가 
급격히 쇠퇴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영국이 포도의 집산지인 
프랑스의 보르도를 탐낸 이유 중 하나가 되었고

나아가 백년전쟁의 
한 원이이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영국은 패배했고,

이후로 영국은 포도주를
전적으로 프랑스로부터 수입해야만 했으니

이때부터 영국 등 북유럽에서는
와인은 구하기 힘든 사치품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맥주가 새로운 서민들의 술로
각광을 받게 된다.
 

● 도시의 술, 맥주

와인은 대부분 
온화한 기후에서만 만들어진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이 
유럽에서 유명한 와인 산지다.
 

그런데 맥주는 
그런 제약이 없었다.

추운 지역에서도 맥주는 만들어지고
따뜻한 곳에서도 맥주는 만들어진다.
 

이유가 뭘까?

포도는 껍질이 얇아서 쉽게 터지고 
터진 부분에서 부패가 시작된다.

그래서 와인을 만들려면 
신선하게 충분히 익은 단단한 포도를 

신속하게 으깨서 
재빨리 발효로 이끌 필요가 있다.

따라서 와인은 
포도가 수확된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만들어야 했다.

때문에 와인을 
흔히 '그 지역의 풍토를 마신다'라고도 한다.
 
반면에 보리로 만드는 맥주는 
운반이 가능한 곡물을 원료로 하기 때문에 

도시에서 양조가 가능했고
이런 이유로, 도시적인 음료가 됐고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포도 생산이 어려운 곳에서는 

맥주가 와인을 
대처하게 되게 된다.
 

그런데 맥주 또한 
포도주 못지 않게 그 역사가 길다.

맥주는 이미 5천년 전에 
중동과 이집트에서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보리를 발효시킨 
탁주와 같은 것으로,
 

오늘날의 맑은 액체인 라거 맥주가 아닌
걸쭉한 죽과 같은 형태로, 

각종 비타민과 아미노산이 풍부하여
한끼 식사 대용품으로도 충분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맥주 문화는 
인근 그리스에도 전파되었지만

곧 포도주의 위세에 밀려 
크게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한편 맥주의 향과 삽쌀한 맛을 더하고
거품을 잘 일게 하는, 

'맥주의 영혼'이라는 홉(hop)은
16세기 독일의 수도원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시대 교회는 양조장도 겸업했던 것이다.)
▲ 뽕나무과 식물인 '홉'

사실 홉이 빠진 맥주를 현대인들이 마시면 
거의 맥주라는 느낌이 들지 않은데

오늘날 맥주의 독특한 풍미는 
그야말로 뽕나무과 식물인 '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설탕과 럼주 : 럼주는 왜 싼가?

중세시대까지 유럽인들은 단맛을 내기위해
무화과나 값비싼 꿀을 이용했다.
 
▲ 무화과

그러다가 십자군전쟁에 의해 
이슬람인들로부터

동남아 원산지의 사탕수수가 전해지면서
유럽인들은 설탕 맛을 알게 된다.
 
▲ 십자군전쟁

당시 설탕은 귀중품으로 감미료라기보다는 
값비싼 약재로 대접 받았다.

그런 설탕을 대중화시킨 것은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이었다.

이들은 이슬람을 통해 
사탕수수 재배 방법과 제당기술을 배웠고
▲ 사탕수수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들여 
브라질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게 된다.
 

이후 포르투갈이 사탕수수 재배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되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도
서인도 제도를 중심으로 

흑인 노예들을 이용해
설탕을 대량 생산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이른바 
'설탕혁명'이었다.
 
▲ 설탕혁명

오늘날 브라질, 서인도제도에 
유독 흑인들이 많은 것은 다 이런 역사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사탕수수를 원액으로 
발효시킨 술을 '럼'이라고 한다.

 
▲ 카리비안 해적들의 필수 아이템, 럼주

럼주는 
설탕을 만들고 난 찌꺼기,

즉 당밀을 '발효→증류→숙성'시켜서 만든 술이기 때문에
값이 매우 저렴했다.

참고로 당시 유럽의 무역상들은 
아래와 같은 식으로 엄청난 이윤을 챙겼는데,
 

①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부려먹기 위해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에 가서 사온다.
 
▲ 당시 노예선

 노예들을 수송선에 태우고 서인도 제도에 내려준다.
그리고 사탕수수 찌꺼기를 받고 배에 싣는다.

 그걸 가지고 북미 동부의 뉴잉글랜드 식민지로 간다.
그곳에 럼주 만드는 공장이 있었던 것.
 
▲ 당시 뉴잉글랜드

④ 사탕수수 찌꺼기를 하역하고 
대신 배에는 럼주를 채운다.

 럼주를 가지고 유럽으로 가서 판다.
 

이렇게 만들어진 럼주였으니,
가히 흑인 노예들의 고혈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hera_kim_01-36
"럼주 한방울에 노예의 피 한방울."

한편 18세기 영국 해군은 이 값싼 럼주를 이용해 
수병들의 기운을 돋우기도 했는데

당시 하루에 1인당 240ml의 럼주를 
수병에게 지급했다고 한다.

때문에 싫든 좋든 당시 군인들은 
누구나 알콜 중독에 빠지게 됐다.

그러나 과음의 피해가 많아,
1740년 해군 제독 에드워드 바논은 

수병의 건강을 배려해서
이렇게 명령을 내렸는데,

 에드워드 바논
"앞으로 럼주에 
물을 섞어서 지급하라"

그러자 화가 난 수병들은 폭동을 일으키며
'그로그 자식'이라고 해군 제독을 욕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로그'는 당시 해군 제독이 입었던 
그로그랭 천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훗날 과음한 상태를 나타내는 
'그로기'의 어원이 된다고..


● 빼갈(고량주)은 왜 독한가?

중화요리와 돼지고기는 
때려야 땔 수 없는 사이인데

전 세계 사람들이 먹는 돼지고기의 절반 정도가
중국에서 소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돼지 사육과 빼갈의 양조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빼갈은 
알콜 도수가 무려 60도나 되는데

그 까닭은 땅 속에서 발효시키는 
전통의 밀폐 양조법에 있다.

여기에 빼갈을 만들고 난 찌꺼기를 
돼지사료로 주고

그 돼지가 먹고 싼 똥을 
수수 밭에다가 주고

그 수수를 원료로 술을 빚기 때문에 
더욱 농도가 강해진다고 한다.
 

참고로 빼갈 찌꺼기는 
적당히 발효되어 있기 때문에 

돼지한테도 
소화하기 좋은 괜찮은 사료라고 한다.


● 술 소비를 늘리기 위해 고심했던 정치인

AD 8년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이라는 국가를 세운다.

 왕망
"에헴!"

그는 주나라의 왕조를 
이상형으로 삼아

주 왕조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에 맞추어 
사회를 변화시키려 하였으니,

호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토지를 공유화 하는가 하면,

노예 매매를 
전면 금지시켰다.

여기에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소금, 술, 철 등의 소비에 높은 소비세를 매겼다.

때문에 세금을 많이 징수하려면
이들 상품의 소비를 촉진시켜야 했으니

당시 왕망 정권이 외치던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왕망
"술은 명약 중에 명약"

 왕망
"소금은 곧 반찬"

인류 역사상 
금주령을 내린 경우는 많이 봐왔지만

술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선전구호까지 이용한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 미국에서 마피아가 탄생한 이유 : 금주법

1920년대 미국은 
금주법의 시대였다. (1919~1933)

1차 세계대전 후 
공전의 호경기를 맞던 미국에서 

약 14년간 음주가 금지되었다고 하니
조금은 의아한 일인데,

당시 호경기와는 반대로 
정치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주법을 시행했어도 
음주를 단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법률 발효 이전에 
사서 모아둔 술은 

단속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허술한 법규도 문제였다.

그래서 '밤의 시장'이라던 
알 카포네 등의 마피아가 등장하여

밀주를 제조하고 비밀 술집을 경영하며 
암약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당시 미국의 마피아는 
정치인, 경찰관 

심지어 재판관까지 매수하면서 
권리 독점을 꾀했고

조직끼리 기관총과 권총을 휘두르는 등 
요란한 폭력전을 펼치기도 했다. 

1929년 한 해에만 
500명의 조직 폭력배가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금주법은 
1929년 갑자기 일어난 세계공황으로 사라지게 된다.

의기소침해진 미국인의 의욕을 복돋아주기 위해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폐기된 것이다.

 

어쨌든 금주법 시기에 
가장 극성스럽게 활개를 쳤던 것은 '마피아였다.

원래 마피아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만든 범죄 조직인데,

이들이 범죄에 
발을 들여놓은 사연은 이렇다.


19세기말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을 왔지만

막상 미국 온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이미 먼저 온 유럽인들이 
좋은 자리는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어두운 현실 뿐이었다.

청소부, 막노동꾼, 외판원,
심부름꾼, 구두닦이, 접시닦이 등등.

도시의 비참한 슬럼가에 살며
싸구려 술집에서 우울함을 달래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범죄조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 조선시대 똥술, 정말 있었던가?

있었다. 다만 단순한 술이 아닌
약용의 의미가 더 컸다.

일제시대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당시는 분주(糞酒)라 하였다.
 
분주를 만들 때에는 소변이 섞이면 안되므로 
남자들만 드나드는 바깥 뒷간에서 만들었는데

만드는 방법은 
대략 이러했다.

뒷간에 조그만 변기를 두고 
그 위에 누룩을 매달아 놓아
 
남자들이 변을 보고 
나올 때마다 

누룩 조각을 떼어 가루로 부스러뜨려 
변 위에 뿌리고 뚜겅을 덮어놓으면

밑에서부터 
술이 익는데

잘 삭혀서 잘 거르면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 중국 TV에도 방영된 한국의 똥술

지금으로서는 놀랍겠지만 
당시에는 똥물도 약재로 취급되어

주로 열을 내리는 
해열제로 인식했다.

동양 약리학을 집대성한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서도

똥을 화기(火氣)를 가라앉히는 
좋은 약으로 소개하고 있다.
▲ 본초강목
 
판소리 명창도 소리를 익히다 목에서 피가 나오면
곧잘 잘 삭은 똥물을 마시곤 했다.


● 소소한 얘기

오늘날 술의 종류는 너무 많다. 
그리고 만드는 방법도 너무 다양하다.

여기서 간단히 
설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물론 꼭 
이렇지만은 않다. 

 

요즘 소주를 보면 쌀은 거의 쓰지 않고
카사바, 고구마 같은 것으로 만든다.

맥주의 전분도 
값 싼 옥수수를 주원료로 만든다.

한편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최초로 만든 술을
'벌꿀술'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당분이 많을수록 
쉽게 발효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로 벌꿀술 → 과실주   곡주 → 증류주 순으로
인류의 술은 변천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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