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농사 진화과정
● 신석기시대의 농사 방법
만년 전 인류는
최초로 농사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 농사짓는 방법은 화전농법이었다.
방법은 이러했다.
원시인1
"요즘 사냥거리도 예전같지 않고,
나도 이참에 농사나 짓고 살려고 하는데.."
원시인1
"방법 좀 알려줘."
원시인2
"먼저 숲을 태워서
농사 지을 땅을 만들어."
원시인1
"왜 태우는데?"
원시인2
"그럼 저 많은 나무를
혼자 다 벨수 있음?"
원시인1
"아!"
원시인2
"땅이 만들어지면, 돌이나 나무 막대기를 이용해서
땅에다가 구멍을 파."
원시인2
"그리고 씨를 뿌려."
원시인1
"아! 님좀 짱인듯."
하지만 이런식으로 농사를 짓는 것은
1회용에 가까웠다.
한번 농사를 짓고나면, 곧 지력이 소모되어
다른 땅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농사를 지었던 곳에는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신석기시대 | 생산력 | ||
만약 여의도 면적만한 땅(290헥타르)이
모두 농토로 주어진다면,
당시 농업기술력으로
8가구가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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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시대의 농사 방법
청동기 시대라고 해서
농기구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청동기 시대니깐
청동으로 농사 졌던게 아님?"
"청동은 구하기도 힘들지만,
생각보다 약해서 농기구로 적합하지 않았어."
"또 워낙 귀해서
귀금속과 장신구로 이용됐지."
"그럼 신석기시대랑
다를 바도 없지 않음?"
"대신 청동기 시대에는
혁신적인 농법이 발명되지."
바로 이랑을 만들고 곡식을 파종하는
'이랑농법'이 등장하게 된다.
원시인1
"요즘 첨단농법이 나왔다는데,
방법 좀 알려줘. 대신 양 한마리 줄게."
원시인2
"헤헤헤. 소문은 또 어찌 듣고."
원시인2
"잘 봐. 그냥 심기보다는
돌이나 나무로 땅을 쭉 파줘."
원시인1
"그리고?"
원시인2
"판 흙은 한줄로 올려놓아.
그리고 씨를 거기다가만 뿌리는거임."
쉽게 말해 밭고랑을
만드는 것이었다.
"왜 그러는데?"
"이렇게하면 지력이 쇠한 땅을
좀 더 이용할 수 있고,"
"물을 저장하기에도 좋아서
작물이 자라는데 유용하지."
"와! 신기. 이런걸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5천 년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터득한 지식이겠지."
하지만 당시에는
금속제 농기구가 없어서
땅을 깊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력의 소모는 어쩔 수가 없었다.
때문에 한번 농사를 짓게되면
여러 해 동안
지력이 회복되도록
땅을 방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신석기시대에 비해서는
기다리는 시간은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한번 농사를 짓고
5년 정도 땅을 묵히는
청동기시대의 농경법을
'휴경법'이라고 한다.
청동기시대 | 생산력 | ||
만약 여의도 면적만한 땅(290헥타르)이
모두 농토로 주어진다면,
당시 농업기술력으로
15가구가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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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기시대의 농사방법
철기시대에 들어오면
농업생산력이 급속히 늘어나게 된다.
이유는
철제농기구에 있었다.
"청동은 농사도구로
쓰기에 부적합했지만."
"철제 농기구는 단단하기 때문에
농기구로 쓰기에 제격이었지."
▲ 2천년 전 고구려의 철기 농사도구 (압록강 중상류 유물)
그렇다면 철제농기구를 쓰면
왜 농업생산력이 크게 늘어난다는 걸까?
"땅을 더 깊이 갈아
엎을 수가 있거든."
"돌이나 나무로는
최대 10cm까지 땅을 팔 수 있었다면,"
"철을 이용하면
그보다 더 깊게 팔 수 있게 됨."
"그런데 왜 땅을 깊게 파면
농사가 잘 되는거임?"
"메카니즘을 알려줄게."
"새 흙을 밑에서 꺼내고
지력이 쇠한 흙은 잡초와 함께 땅속에 묻어."
"그렇게되면 지력을
좀 더 고르게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밑에 파묻은 잡초들은
나중에 거름 역할을 하게되지."
그렇게 하면, 지력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단축되게 된다.
그리하여 철기시대에는
2~3년 정도만 땅을 묵히기만 해도
새로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으니..
이전에 불규칙적으로
땅을 묵히던 휴경법에서
정기적으로 일정 기간만 땅을 묵혀서 농사짓는
'휴한법'으로 바뀔 수 있었다.
철기시대 | 생산력 | ||
만약 여의도 면적만한 땅(290헥타르)이
모두 농토로 주어진다면,
당시 농업기술력으로
30가구가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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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시대의 농사방법
그런데 철제농기구를 이용해
땅을 파는 방법에도 한계가 있었다.
"왜 그러는데?"
"보통 작물의 뿌리는
20cm 깊이까지 뻗어있거든."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는
그 정도 깊이까지 흙을 파헤치기가 쉽지 않아."
때문에 지력이 쇠한 땅을
완전 갈아엎으려면
가축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이런 깊이갈이에
동양에서는 주로 소, 동남아에서는 물소,"
"서양에서는
말이 사용되었지."
그렇게 하면 지력은
보다 빨리 회복될 수 있어서,
1년 경작하고 1년 휴작하는 형식으로
경작이 가능했다.
이런 방법을 깊이갈이,
즉 '심경법'이라고 한다.
이러한 깊이갈이는
동서양 모두 고대시대에 나타나서
중세시대에
널리 보급되게 된다.
우리나라도 6세기경 도입이 되어
통일신라기 과도기를 거쳐
고려 초기가 되면
일반화 된다.
고대시대 | 생산력 | ||
만약 여의도 면적만한 땅(290헥타르)이
모두 농토로 주어진다면,
당시 농업기술력으로
70가구가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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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의 농사방법
중세시대에는
땅을 보다 집약적으로 활용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윤작법'이다.
농민1
"땅을 그냥 묵히는건 너무 아까움."
농민2
"그래 맞아. 작물 중에서는
지력이 약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농민2
"지력을 회복시켜주는
것들도 있거든."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작물의 돌려심기, 즉 '윤작'이었다.
그리고 쌀농사 지역에서는
이보다 혁신적인 방법이 나왔으니,
바로
논농사였다.
"논농사를 하게되면 뭐가 좋은데?"
"식물이 자라는데 필요한 영양소는
토양에만 있는게 아님."
"사실 관개용수나
빗물로 공급되는 것도 상당하거든."
"그랬어?"
"논이나 밭에 화학비료를 주지 않고
천연비료만으로 길렀을 때,"
"논벼에서는 78%, 밭벼에서는 38%, 보리는 39%의
수확을 올렸다는 연구결과도 있어."
"아! 논 자체가
영양분 덩어리였군."
"맞아! 그래서 쌀농사 지역에서는
유럽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냈던,"
"'이모작(1년에 같은 땅에서 2번 농사짓기)'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래서 쌀농사 지역은
전통적으로 인구가 많았던 것이고."
하지만 이보다 획기적인게 있다.
바로 거름주기(시비법)였다.
"동서양 모두
중세시대부터 시비법이 보편화되지."
"떨어진 지력을
똥의 영양분으로 채워주는 것이네."
"맞아. 그런데 유럽에서 인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어.
가축의 똥만 이용했지."
"왜 그럼?"
"유럽은 혼합농업(농업+목축)을 했기 때문에
가축의 변을 쉽게 얻을 수 있었거든."
"반면에 동양에서는 가축이 부족했음.
그래서 인분을 주로 사용했지."
"억! 인분이 더 더럽지 않음?"
"하지만 인분을 사용했기에.."
"동양에서는 화장실(똥을 모아야 했기 때문)문화가
중세시대부터 발전하게 되는데,"
"서양에서는 중세시대 내내
화장실을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중세 유럽 거리가
똥천지였구나."
"다만 인분을
주된 비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중근세 동양사람들은
만성적으로 기생충에 시달려야만 했어." ☞참고
중세시대 | 생산력 | ||
여의도 면적만한 농토(290헥타르)에
당시 농업기술력으로 120가구가 살 수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가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옮겨심기(이앙법)가 보급되어 수확량이 폭증하는데
당시 농업기술력이면
200가구가 살 수 있었다.
오늘날의 화학비료를 이용하면
1,000가구 이상을 부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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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농사진화 과정의 키워드
이상의 농업발전 과정을 보면
한마디로 요약된다.
농업발전이란, '소모된 지력을 얼마나 빨리 회복시키는가'
라는 기술력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인도의 농부
그리고 수수께끼는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풀리게 된다.
장 바티스트 부생고
"작물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원소는
무엇보다 질소임."
유스투스 폰 리비히
"여기에 인산, 칼륨(칼리)도
중요한 원소임."
이렇게 해서 1840년경에는
식물성장의 3대 요소라는 질소+인산+칼륨이 밝혀지게 된다.
질소 : 작물의 성장초기와 잎의 성장에 중요함
▲ 질소 부족
인산 : 열매 성장에 중요.
▲ 인산 부족
칼륨 : 성장과 뿌리 발달에 중요.
▲ 칼륨 부족
그리고 3대 요소가
밝혀지자
서구인들은 그걸 찾기 위해
전세계를 샅샅이 뒤지게 된다.
'질소'야 자연 중에도 풍부하기 때문에,
퇴비와 거름만 가지고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 질소비료 퇴비 : 전통시대에는 대부분 이것에만 의존했다.
하지만 문제는
인과 칼륨이었다.
지금에야 인공적으로 화학비료를 만들 수 있어
그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농업경제가 중심이던 19세기까지
인과 칼륨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는 인과 칼륨을 전량 수입 중이다.)
▲ 인산비료 뼈 : 무덤가에 유난히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랐던 이유
특히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천연 인산(인광석)은
오늘날의 석유자원과 비등할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황금 비료, 새똥 : 황금인가? 재앙인가?
● 새똥을 찾아라!
때는 조선시대.
농부 돌쇠가 푸념에 잠겨있다.
돌쇠
"세상에 뭐가 문제냐고요."
"왜 그러심?"
돌쇠
"아 글쎄. 소똥, 개똥, 사람똥 가리지 않고
열심히 뿌려서.."
돌쇠
"벼도 무럭무럭 잘 자랐는데.."
"그런데요?"
돌쇠
"나중에 수확해보니,
죄다 쭉정이 밖에 없잖아요."
"아! 그건 인이 부족해서임."
돌쇠
"인(仁)이 부족하다뇨?"
돌쇠
"유교나라 조선시대에 인이 부족하면..
다른 나라들은 어쩌라고."
"그게 아니라 인(Phosphorus)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돌쇠
"그 인은 어디서 구할수 있죠?"
"뼈에 많은데, 뼈는 구하기 힘들죠.
새똥에도 많은데."
돌쇠
"새똥 찔끔 가지고 그걸 어따 써요?"
"동굴에 가면 박쥐똥 많잖아요."
돌쇠
"아놔, 농부라고 무시하나.
박쥐는 포유류임."
"올~ 님좀 짱인듯.
아무튼 박쥐똥에도 인이 많아요."
그랬다. 곡물 소출량을 늘리려면
무엇보다 인(P)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인은
세상에 아무 데나 있는 게 아니었다.
● 새똥 천국, 친차군도
페루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친차군도라는 곳이 있다.
태평양 전체로 보면
불모의 작은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곳은
차가운 바닷물(훔볼트 해류)이 흐르고 있어
대기가 아래는 차갑고(밀도가 높고)
위는 따뜻하여(밀도가 낮다)
좀처럼 수증기를 머금은 대기가 상승하여
비구름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1년 내내 건조한 날씨로 인해
당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 친차군도
반면에 차가운 밧닷물은
엄청난 물고기 떼를 유인했기 때문에
새들에게는
이만한 낙원도 없었다.
게다가 섬에는
새들을 잡아먹는 천적도 없었다.
그러했으니 이 조그만 섬에는
무려 1km2 당 220만 마리라는
엄청난 새떼들이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수 백만년을
살았을테니
섬에 쌓인 새똥의 양은
100~200m급의 산들을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새똥이 쓸려갈 일도 없어
똥들은 더욱 높게 쌓여만 갔다.
▲ 19세기 친차군도의 똥덩어리 산들
19세기 이전의
서양인들이라면
이 거대한 새똥섬을 보고
그저 기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수 백전부터
잉카인들은 이 새똥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
잉카인
"이 섬의 똥을 퍼서 농사를 지으면
옥수수 수확량이 장난이 아니라능."
때문에 잉카인들은
똥을 구하기 위해 수시로 섬을 찾았고
그런 똥들을
'후아누'라고 불렀다.
이게 나중에 유럽인들에게 전파되면서
구아노(인광석)로 불려지게 된다.
▲ 구아노 채취
하지만 스페인의 잉카제국 정복 이후
구아노 사용은 중단되었다.
질병 때문에 인디오들의 인구가
멸종 수준으로 줄어든 데다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스페인 정복자들을 피해
깊은 산으로 숨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 숨어들어 살았던 곳, 마추픽추
이후 구아노섬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에
300년동안 철저히 무관심 속에 방치되게 된다.
● 페루, 새똥으로 벼락부자 되다.
19세기 초가 되면
유럽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
유럽 대륙의 인구 부양은
한계에 다다르고 만다.
식량의 수요는
다른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리고 이때 유럽의 과학자들은
식물의 영양분 흡수 메카니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식물 성장의 3대 요소를
비로소 알게되었기 때문에
전세계에 흩어져 있을,
황금(특히 구아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이다.
(구아노에는 인산 뿐만 아니라, 칼리도 다량 포함되어 있다)
그러했으니 당장 주목한 곳이
페루의 친차군도였다.
"섬 전체가 거대한 인광석이라니
대단하네."
"이걸 모두 팔면
대체 돈으로 얼마야?"
때문에 독립 이후 20년간 내전에 시달리고
은광마저 모두 고갈되어서
▲ 페루독립 (1821년)
경제난에 허덕이던, 19세기 중반의 페루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이번 사업은 딱히 투자할 필요도 없어.
왜냐고? 섬 전체가 그냥 인광석 덩어리거든."
"그냥 파서 배에다 실어. 그러면 끝!"
서둘러 개발독점권을 따낸 영국은
페루 정부에 판매가의 65~70% 정도를 주기로 약정하고
일꾼으로 중국의 노동자(쿨리)들을
데리고 와서 채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페루 정부는 감옥에 복욕 중인
국내 기결수들을 일꾼으로 투입했고
그렇게 채굴된 구아노들은
유럽 전역과 미국의 목화 밭에 뿌려졌다.
그러자 페루는 곧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오늘날로 따지면
아랍의 산유국과 같은 경우였다.
● 새똥 전쟁(태평양전쟁) 발발
구아노로 벼락부자가 된 페루는
대대적인 투자를 시행했다.
거국적으로 사탕수수 플렌테이션을 만들었고
철도를 건설했다.
전적으로 새똥을 담보로
돈을 꿔서 이룩하게 된 사업들이었다.
하지만 페루의 경제는
곧 이런식으로 무너지고 만다.↓
흔히 자원빨로 벼락부자가 된 국가들이 밟게되는,
교과서적인 루트였다. (☞네덜란드병)
① 요즘 페루경제가 새똥 때문에 전망 좋다더라.
② 페루 화폐가치 상승
③ 화폐가치 올라가자, 페루인들의 수입(import) 증가
"수입품도 싸졌는데
품질도 떨어지는 국산꺼 왜 삼?"
④ 페루 국내산업 침체
"물건이 당최 팔리지를 않아!"
⑤ 기업도산, 실업자 급증 → 경제 거덜남
게다가 친차군도의 구아노는
19세기 후반이 되자,
지나친 체굴로
바닥을 들어낼 조짐마저 보였다.
때문에 페루는
앞날이 깜깜했다.
페루 정치인
"새똥 담보로 많은 돈을 꿨는데.."
페루 정치인
"새똥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니
대체 무슨 수로 그 돈을 다 갚지?"
그러던 그 때
친차군도의 아랫동네에서
친차군도보다 훨씬 많은 양의
구아노가 발견되게 된다.
장소는
볼리비아의 사막 (아타카마 사막)이었다.
원래 이곳은 페루, 볼리비아, 칠레 3국의 접경지대였는데,
이곳에서 구아노가 발견되자
칠레의 사업자들은
재빨리 볼리비아에 채굴권을 사게된다.
▲ 아타카마 사막
그러면서 볼리비아 정부로부터
관세를 올려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볼리비아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곧 관세를 올렸다.
"생각해보니, 너무 헐값에 팔았어.
지금 우리나라 재정 사정이 너무 좋지 않다능."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칠레는
급기야 전쟁을 선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서구 열강들은
일방적으로 칠레를 도왔다.
물론 여기에는
이런 꼼수가 있었다.
"너희들을 밀어주는 대신,
전쟁에서 이기면 구아노 개발권을 우리한테 넘겨줘야함!"
그렇게 영국은 칠레의 해군을 지원했고
프랑스는 칠레의 육군을 지원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볼리비아는
페루를 끌어들였다.
볼리비아
"지금 사막 전체를 칠레 넘들이
서구열강을 앞세워 전부 강탈하려고 하고 있음."
볼리비아
"우리를 도와주면
너희에게도 이권을 나눠주겠어."
이런 제안에
페루가 얼마나 설렜겠는가!
그리하여 볼리비아와 페루는 손을 잡고
칠레에 맞서게 된다.
하지만 전쟁(1879~1883)의 결과는
서구 열강의 후원을 받고 있던 칠레의 승리로 귀결됐다.
▲ 페루 군함을 공격 중인 칠레 군함 (1879)
반면에 새똥 전쟁으로
페루는 폐허가 되고 말았고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가는 통로를 모두 잃어버리고
내륙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 전쟁 전, 후의 볼리비아 영토 변화 : 내륙국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새롭게 영토를 확장한 칠레는
갑작스레 부유해졌지만
곧 페루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이후에 열강들의 관심은
새똥에서 석유로 바뀌었고
그 무대는 남미에서
중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 새똥섬 나우루의 비극
이런 새똥섬은 남태평양에도 있었다.
나우루라는 작은 섬이다.
원래 이곳은 미크로네시아계 원주민들이
2천 년 넘게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통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평화롭게 살던 작은 섬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섬이 구아노로 가득하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나우루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무엇보다 나우루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 나우루 섬 : 가로 4km, 세로 5km의 작은섬, 강남구 절반 사이즈
이곳의 구아노는 곧 호주와 뉴질랜드의
농산물 생산을 크게 증가시켜 줄 수 있었고
그렇게되면,
호주와 뉴질랜드의 식량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영국 경제에도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때문에 당초 독일령이던 이곳을
1912년 막대한 비용을 대고 영국은 사들였다.
▲ 독일 식민지 시절 (1884년)
그리고 대대적으로
섬을 파헤쳤으니
섬의 숲을 전부 없애고
땅을 15m가량 팠기 때문에,
곧 섬 대부분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로 변하고 말았다.
▲ 노동자들 중에 원주민들은 없었고, 중국의 쿨리가 동원됐다.
그리고 1968년에 독립한 나우루는
영국이 했던 그대로 인광석을 캐다 팔았다.
그런데 섬 전체의 인구가
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우루는 곧
세계 최고의 부자국가가 된다.
1970년대 나우루는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의 1.5배가 될 만큼 부유한 나라였다.
1980년도 나우루의 1인당 소득은 3만불로
미국, 일본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이때 우리나라보다
무려 15배나 더 높았다.
(현재는 우리나라가 나우루보다 10배 더 높다.)
당시 나우루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초호화 주택에서 고칼로리의 수입 식품을 먹으면서
걸어서 네 시간도 안되는 섬을
최고급 승용차로 돌아다니는 것 뿐이었다.
1인당 승용차를
평균 두 대씩 보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용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 홍콩, 싱가포르로 쇼핑을 하러 갔을 정도였다.
세금도 없고 주택도 공짜에,
학비도 외국 유학까지 국가에서 대주고
병원도 모두 국가에서 대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무사태평했다.
그러면서도
일은 하기 싫었기 때문에
광산의 노동자는 물론이고,
공무원들까지 전부 외국인들로 썼을 정도였다.
▲ 나우루 시내
하지만 천년만년 갈 것 같았던 인광석은
90년대 들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인광석을 캐낸 자리에는
온통 상처투성이뿐인 황무지만 남게 되었다.
▲ 현재 나우루
여기에 또 다른
재앙이 닥쳤다.
그동안 파낸 인광석만큼 고도가 낮아진데다,
지구온난화가 곁들여져
섬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수백만 년에 걸쳐
생성된 자원이 고갈되는 데는
불과 몇십 년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우루가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우루 섬 대부분은 현재 황폐해져서
농사짓는 것은 물론, 관광도 어렵다.
● 소소한 얘기
왜 흑토지역은 농사가 잘 될까?
전세계적으로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한 곳들은
전부 반건조 지역의 흑토지역이다.
이런 곳은 딱히 비료를 뿌리지 않아도
농작물이 잘만 자란다.
이유가 뭘까?
스텝으로 불리는
키 작은 풀의 초원 지역에서는
매년 새로운 풀이 자라고 죽으면서
토양에 영양분을 풍부하게 공급한다.
▲ 스텝의 흑토지대
그런데 이곳에는
비가 적게 내리기 때문에
토양 속의 영양분이 그대로 남아
썩은 풀들 때문에 토양이 검은색을 띠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가 그런 땅이다.
히틀러가 괜히 우크라이나 초원을
곡창지대로 눈독을 들였던게 아니었다.
▲ 독일군의 우크라이나 침공
한편 유럽의 흑해는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를 흐르는 강물이 흘러들어
검은 바다라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직접 가보면 바닷물은 파랗다고)
왜 열대지역은 농사가 잘 안될까?
흔히 열대 지방하면 작물이 잘 자랄거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다. 알고보면
농사에 매우 부적합한 땅이다.
때문에 19세기초까지
남아 전체 인구는
일본 전체와 비슷했고
조선의 2배 수준에 불과했다.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동남아 전체인구가
조선과 비슷할 정도였다.
(현재 동남아 인구는 7억명에 육박하고 있다.)
▲ 1820년 아시아 주요국 인구 : 매디슨 논문, 2001 (단위 : 만명)
화학비료가 개발되고,
저습지가 개간되면서
동남아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열대지역에는
농사가 잘 안된단 말인가?
열대 우림은
일단 비가 많이 내린다.
그렇게 되면 토양이 가지고 있는
여러 영양분이 빗물에 쓸려가기 때문에
토양에 남는 것이란,
철이나 알루미늄 같은 무거운 광물질 뿐이다.
때문에 이들 물질이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서 녹이 슬기 때문에
적도 지역의 땅은
흔히 붉은 색을 띠게된다.
이런 붉은 토양은
매우 척박하여 농사짓기에 불리하다.
다만 좋은 점도 있다.
철분이 풍부한 이런 흙을 잘 빚어 말리면
단단한 벽돌이 되어
건물을 짓는데 쓸 수 있는데
앙코르 와트도
바로 그런 벽돌로 지어진 것이다.
볼리비아의 해군
120년전 칠레에게 아타카마 사막을 빼앗기고
내륙국으로 전락한 볼리비아는
현재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
▲ 오늘날 볼리비아
때문에 볼리비아인들에게,
고토를 회복하는 일은
그야말로 국가적인
염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볼리비아는 티티카카 호에서
170여척의 함정으로 군사훈련을 하면서
여전히 태평양 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 볼리비아 해군
2010년 볼리비아 대통령은
이렇게 열변을 토했었다.
모랄레스 대통령
"볼리비아가 태평양을 향한 출구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남미의 안데스 국가 : 자원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16세기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장 먼저 개발에 열을 올렸던 것은
은(silver)광산이었다.
▲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산 (16세기)
페루와 볼리비아의
스페인인들은
안데스의 풍부한 은 광산 덕분에
한때 세계를 호령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은이 끊길 즈음 나타난 것이
바로 구아노(인광석, 초석)였고
▲ 페루 친차군도의 구아노 채취 (19세기 중엽)
페루와 칠레가
짭짤하게 이익을 봤다.
그리고 구아노 효과가
사라질 무렵
칠레에게는 '구리'라는
엄청난 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 칠레 구리 광산
현재 구리는 칠레 수출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 칠레의 수출품 : 약 60%가 구리다.
전세계 구리 생산량의 1/3 이상이
칠레라는 나라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페루 역시 구리 생산이 전세계 2위다.
칠레가 최근 고도성장을 만끽하며
남미 최초로 OECD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구리빨'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기에 볼리비아는
세계 최대 '리튬' 보유국이다.
리튬은 건전지를
만드는 주요한 자원으로
만약 전세계가 전기 에너지로
대체 에너지를 찾게 된다면
앞으로 볼리비아의 소득 수준은
오늘날의 카타르가 될 지도 모른다.
▲ 1인당 GDP (PPP) 순위
그야말로 자원의 마르지 않는 화수분,
이것이 안데스 국가들의 축복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그런 자원빨에만 도취해서
기간산업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자원이 고갈되면
곧 후진국으로 회귀하는 모습들은
이들에게 주어진
자원의 저주가 아닐까 싶다.
참고 문헌 :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포메란츠), 현대인문 지리학 (루벤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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