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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중세 유럽 경제의 흥망성쇠 : 이탈리아와 독일 상인이 망한 이유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9112311
● 들어가기 앞서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는 어디였을까?

바로 
중동이었다.

유럽에서는 이런 순서였다. ☞참고
비잔틴 > 이탈리아 > 프랑스 > 독일 > 영국

비잔틴은 중국과 비슷했고
이탈리아는 인도와 비슷했고

프랑스는 일본과 비슷했고
독일은 아프리카보다 가난했고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 가장 가난했다는 중세시대 영국

유럽에서는 동쪽으로 갈수록 
부유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시아인들의 1인당 평균소득은 466달러였지만
유럽인들의 1인당 평균소득은 427달러였다. (1990년 미 달러가치 기준)

물론 도토리 키재기 정도의 차이였기에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 도토리 키재기

그래도 당시 서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다.

전체 GDP로 따져도
당시 아시아는 전세계의 3/4을 차지하고 있었고

유럽보다 
7배는 더 규모가 컸다.

오늘날 아시아의 GDP는 
유럽보다 1.7배 더 클 뿐이다.
(인구는 아시아가 유럽보다 6배 더 많은데도)

그런데 어째서 500년 뒤에는
서유럽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고

700년 뒤에는 가장 가난했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하게 되는걸까?

▲ 영국의 산업혁명

물론 신대륙의 발견에 
그 힌트가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유럽인들이 바다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고

왜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던 
비잔틴이나 이탈리아가 침체하고

상업이 발달했던 독일이
근대화에 있어 후발주자가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는가?
해서 여기서는 그걸 설명해 보고자 한다.



중세 후기 상업의 발전

● 십자군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1092년 ~ 1272년, 근 200년 동안
십자군 원정이 총 8차례 발생했고
 
▲ 십자군전쟁

전쟁으로 유럽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게된다.

만약 그때 
십자군 원정이 없었다면?

아마도 유럽은 
그토록 빠르게 성장하기 어려웠을테고

어쩌면 오늘날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은
서양이 아닌,

중동이나 
동아시아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게도 의미있는 사건이었어?
그냥 단순한 종교전쟁인줄만 알았는데."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유럽은 많은 것을 얻게되었고
또 많은 것이 변하게 되었거든."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은 
왜 발생했던 것일까?

일단 여기서부터 알아본다.
때는 610년.

중동에서 마호메트(무함마드)라는 사람이 
혜성같이 나타나더니 이슬람교를 창시했고

 마호메트 
"에헴!"

이슬람교는 발흥한지 20년만에
중동 전역을 쫙~ 장악하더니

빠른 속도로 기독교 세계였던 지역들을
이슬람 세계로 바꿔 버렸다.

특히 고대의 로마 제국 이래 
유럽의 손아귀에 있던 지중해 지역들은

상당 부분이 
이슬람인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후로 400년이 지난 
유럽에서는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고

교회는 점차 세속화되어
재산을 탐닉하고,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이때 교황은 
이런 꼼수를 쓰게된다.

 교황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요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능."

 
"헐! 그게 정말인가요?"

 교황 
"이럴 때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교황 
"사악한 이교도들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성지를 탈환해야 한다능."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

 무슬림 
"아놔, 우리가 언제 박해했다는거임?
성지를 순례하든 말든, 아무 간섭도 안했는데.."

그러나 
교회는 속셈이 있었다.

 수도사
"십자군 전쟁이 곧 있을테니 
전쟁에 참여들 하라고.."

 수도사
"참여하는 대가로 면벌부를 나눠준다능.
천국 가야지, 응?"

 농노1
"오! 천국 가는 티켓!"

 농노2
"그런데 그동안 우리 재산은 어찌하나요?"

 수도사
"교회에 안심하고 맡겨."

 수도사
"나중에 돌아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스란히 돌려줄테니."

하지만 교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수도사
"오고 가는데만 10년이다.
어차피 돌아올 가능성도 낮고.."

 수도사
"결국 맡긴 재산 중 
대부분은 우리가 먹는거지.ㅋㅋ"


●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이 얻은 것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끝내 실패하고 만다.

당시 이슬람은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도 유럽은 전쟁으로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것들을 얻게 되었으니, 이런 것들이 있었다.

① 무역의 발달

"먼저 이탈리아의 무역이 활성화됨."

 
"왜 하필 이탈리아야?"

"당시 전쟁을 하려면
지중해를 왔다갔다해야 했는데,"

"그 지중해 교역을 담당했던게 
이탈리아(특히 베네치아) 상인들이었거든."

 
"그러니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팔았던거구나."

"그뿐이 아니야. 당시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슬람과도 교역을 하고 있었어."

 
"그게 가능함?"

"원래 돈에는 국경도 없는거임."

 
"하여간, 인간 사는 세상은 다 똑같네."

"그래서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동방의 후추와 설탕같은.." 

"진귀한 상품들이 
유럽으로 들어올 수 있었어."

 
"후추와 설탕이라면, 당시는 꽤 비쌌을텐데."

"그럼. 부르는게 값이었어.
하지만 유럽 귀족들은 맛을 알게되자 환장을 하게되지."

 
"그래서?"

"전쟁 후에도 무역은 지속되었고,"

"수입품을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유럽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지."


② 교회의 추락

 
"십자군 전쟁은 끝내 실패했고 때문에.." 

 
"전쟁을 사주했던 교회는 
크게 그 권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어."

 
"어떤 식으로?"

"타락한 교회를 바로잡자는 식으로
대대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거든."

"그렇구나."

"그랬더니 교권이 추락한 대신 
반대로 왕권이 강화되게 되었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거네."

"맞았어. 그리고 왕권의 강화로 
곧 근대국가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오늘날 영국, 프랑스, 스페인은
다 이때를 계기로 해서 만들어진거임."

"아!"


③ 선진 문물의 유입

"이 시기 이슬람을 통해서 
종이, 화약, 나침반이 들어오게 되지."

 
"어? 이거 전부 중국에서 발명한거 아님?"

"맞아. 중국에서 이슬람으로 전파된게
전쟁을 통해 기독교 세계에도 전파된거임."

 
"이런거 보면 
전쟁도 좋은 면은 있네."

"이중에 종이의 보급은 활자의 발명과 연계되어서
르네상스라는 문예부흥으로 이어지지."

 
"르네상스가 그래서 나타났구나."

"그리고 나침반으로
장차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게되고."

"화약으로는 
신대륙을 점령할 수 있게됨."


● 베네치아 상인

중세시대 베네치아 상인들은 
왜 유명했던 걸까?

사실 베네치아는 지형적으로 볼 때 
사람이 살기에 매우 부적합하다.

땅은 좁은데 
주변은 갯벌과 조그만 섬밖에 없어서

농사를 짓고 살기가 
너무도 옹색했다.
 

하지만 베네치아인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대신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기반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상인
"밀가루보다 
소금이 훨씬 남는 장사지."

그리고 소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배를 만들고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곳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무역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상인
"자, 여기 품질좋은 베네치아 천일염.
인도 후추랑 바꾸자능."

때문에 그들은 
십자군 전쟁 전부터 

이교도인 이슬람교도와도 
교역을 하고, 상업협정을 맺고 있었다.

 상인
"물론 교회에서는 
이교도랑 거래를 해서는 안된다지만.."

 상인
"이슬람과의 무역만큼 짭짤한 것도 없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자
유럽의 부호들은 동방의 진귀한 문물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이후로 베네치아 상인들의
무역은 더욱 더 활발해지고
 
▲ 중세시대 베네치아

향료, 염료, 후추, 차, 귀금속 등의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차익을 얻게 되었다.

 
▲ 향신료

그런데 이때 상인들의 자금 융통에 
도움을 주던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유태인들이었다.

돈을 보관해주던 은행업과
돈을 대부해주는 고리대금업을 전담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왜 하필 유태인인가?
한 중세의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자는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돈의 사용을 포기하고 받는 시간의 대가임."

'이자가 시간의 대가'라는 말은
현대 경제학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란 
신이 다스리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대가를 
함부로 챙겨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하지만 시간의 대가는 
오직 신만이 취할 수 있는 것임."

때문에 이자 수취를 금지하는 것을 
교회법으로 만들게 된다.

 
"헐, 말이 됨? 
세상에 누가 이자도 안받고 돈을 꿔줌?"

 
"제기랄. 급할 때 
누구한테 꿔쓰라는 말임?"

그래서 이런 교칙에서 자유로운 이들을 찾아보니
딱 한 부류가 있었다. 바로 유태인.

 
"이넘들은 기독교 안 믿잖아.
니들이 대부업이라도 해라."

그리하여 중세시대 금융업을 
유태인들이 도맡아 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상업 자금을 조달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콤파니아(Compania)가 생겨나게 된다.

 
"이번에 사업 좀 하려는데 
같이 좀 하자고."

 
"그럼 난 300댈게. 
넌 얼마 댈건데?"

 
"난 200."

 
"그러면 앞으로 수입은 6:4로 먹는거네."

이렇게 각자 출자배율대로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 한자 상인

베네치아 상인들이 
유태인의 금융 서비스로 지원을 받으며 

동방과 유럽 간의 중계무역으로
활개를 치고 있을 때

유럽 대륙의 북쪽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들은 
독일 북부를 거점으로 하여

영국, 네덜란드, 발트해 연안을 중심으로
북해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상인들을 
'한자 상인'이라고 했다.

"한자(漢字)?"

"그게 아니라, 중세 독일어로 한자(Hansa)라는 말은
'집단'이라는 뜻이야."

이들 상인들은 북해 지역의 특산물인
곡물, 목재, 생선, 모피, 직물, 꿀을 가지고

베네치아 상인들과 
교역을 했는데
 
▲ 한자 상인

이들은 해로보다는 육로에 의존했기 때문에 
북부독일과 이탈리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프랑스의 샹파뉴에서 
주로 상거래를 행했다.

당시 함부르크 상인들은 
이런 얘기들을 나눴다.

 상인1 
"아! 후추가 
독일 땅에도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인2
"이보라구, 후추가 밀처럼 값이 싸지면
마진이 지금처럼 커질 것 같은가!" 

 상인1
"그렇군 후추가 비싸니깐 
지금처럼 장사하는 재미도 있는거겠지."


● 샹파뉴 시장

오늘날 샴페인의 고장으로 알려진 샹파뉴 지역은
한때 유럽에서 제일 잘 나가던 장터였다.


이곳에 
정기시장이 생긴 건 딴거 없다.

남부의 이탈리아 지중해 상권과
북부의 독일 한자 상권의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 이곳에 
시장이 들어서려고 했을 때에는 교회에서 반대가 많았다.

 수도사
"장사를 하는 짓은 
재물을 탐내는 일과 같아서, 매우 부정한 짓임."

때문에 시장을 발달시키기가
여간 어려웠던게 아니었다.

하지만 웬걸?
십자군 원정으로 자금난이 발생하자

교회는 스스로 
도시를 상인들에게 팔아버리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샹파뉴는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은
아시아의 진귀한 향신료, 염료, 귀중품등을 팔았고

독일상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직물과 
알프스 광산에서 캔 은(silver)을 맞바꾸고 있었다.
▲ 샹파뉴 시장

그리고 상업이 번창하자
곧 샹파뉴시에서는 

금융업(대부업)이 활성화되고,
어음 등의 거래도 나타나게 되었다.



중세 후기 도시의 발전

● 도시의 탄생

중세 후기가 되면 
유럽에는 도시가 출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도시가 없었냐?
거의 그렇다.

'장원경제'라는 
농업 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상업을 위주로 하는 
도시가 자생하기에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전통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수도인 개경이나 한양을 빼놓고
딱히 도시라고 할만한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중세 후기에 도시는 
갑자기 어떤 이유로 형성되었단 말인가?

독일의 역사학자 
좀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좀바르트 
"일단 시장에 만들어지니깐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도시가 만들어졌던 거임."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

 피렌 
"안전이 보장된 성이 만들어지면서 
그곳에서 시장이 활성화되었던 거임."

즉 성곽 도시가 먼저 생겨나고
이후로 시장이 생겨났다는 얘기였다.

사실 이 주장이 
더 타당하다.

"시골 장날을 생각해보라고.
시끌벅적한 장터도 파하면 텅텅 비게됨."

"고로 시장 때문에 
도시가 생기는게 아님."

어쨌든 중세시대 도시는 
이렇게 생겨났다.

그런데 상업도시가 만들어지면
웬만한 장원보다 훨씬 수입이 짭짤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장세, 통행세, 관세 등등
여기저기서 뜯어먹을 수 있는게 장난 아니더군."

때문에 왕과 제후들은, 아예 대놓고
세금을 뜯어먹기 위한 상업도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시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자유도시'도 출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대략 이러했다.

 교황 
"십자군 원정으로 돈이 부족해." 

 교황 
"도시의 상인들이 돈을 마련해준다면,
대신 자치권 주겠음."

 영주
"후추, 향신료 구입하려는데 돈이 부족해."

 영주
"도시의 상인들이 돈을 마련해준다면, 
대신 자치권 주겠음."


● 부르주아의 탄생

도시가 생겨나자 
장원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농노들이 도시로 도망쳐 온 이유는 뻔했다.
그곳에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장원에서 도망쳐 나온 농노가 
'1년 하루'를 무사히 

도시 안에서 숨어 지내면 
자동적으로 자유인이 된다는 룰이 있었다.

 
"오! 쿨한데.
조선 같았으면, 평생 도망노비 신세인데."

그런데 당시의 도시는 훔쳐갈게 많았기 때문에
높은 성곽으로 담장을 둘러치지 않으면 안됐다.

"도시에는 은화가 넘치지.
후추와 향신료, 차, 설탕 등의 진귀한 물품들이 있는데,"

"이걸 제대로 커버 안하면, 도처에서 득실거리고 있던 
도적떼들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어."

때문에 당시에 만들어진 도시들은 
모두들 저마다 높은 담벼락을 쳤고

그래서 이런 도시들을 흔히 
'성곽도시'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부르주아(bourgeois)라는 말은

원래는 성(burg)에 사는 사람이라는 
'뷔르거(burger)에서 유래됐다.

즉 부르주아는 성 안에 기거하던 상인과 장인 중 
특히 부유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런 부르주아 계층이 
도시에서 성장하게 되자

부르주아들은 점차 자녀들에게 상업활동에 필요한
쓰기, 읽기, 산수들을 교육하게 되었고

그렇게해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원래 중세시대 유럽의 학문은
오직 성직자들의 독점물이었어.

"그런데 12세기 중반 이후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 중에 
부르주아도 참여하게 된 것이야."

 
"동양에서의 학문은 신분제도의 강화를 위한 
유학에만 치우치지 않았나?"

"그렇지. 그런 면에서 부르주아의 학문은
철저히 실용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둘 수 있어."

그 결과 
르네상스가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한마디로 르네상스는 도시의 부유한 상인, 
부르주아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 길드의 탄생

당시 도시들은 
배타적인 면이 강했다.

 
"이웃도시들은 그냥 적이야!"

 
"성 밖에 살면?
그냥 이방인일뿐이야."

이런 이기적인 심리는
페쇄적인 장원경제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배타적 마인드는
도시 정치가들의 기본입장이기도 했으니

상인들에게 길드라는 
수공업자 조합을 만들도록 종용했다.

 영주
"우리 도시의 길드가 아니라면 
여기서 함부로 장사할 수 없어!"

 영주
"길드는 세금을 낼 때도 
조합단위로 내라고!"

 영주
"공동체 의식을 느껴야 
너희 스스로도 단결하지."

물론 길드를 조직하면 
장점이 있었다.

"공동구매를 하게 되면 뭐가 좋지?"

 
"더 싸게 살수 있잖아."

"맞아. 길드 조직원들은 원료를 공동구매했어.
그리고 가격도 담합할 수 있었지."

 
"가격담합은 싫던데.."

"그리고 길드 조직원끼리는 
서로 협력이 깊었기 때문에,"

"기술을 공유하고 
일감도 공평하게 배분하고.."

"어떤 조직원이 생계가 빠듯하다고 하면
경제적으로도 도와주고 그랬지."

 
"오! 조직이 좋다는게 그런거군."

 

참고로 당시 이들이 
가장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것들은 이러했다.

"길드의 조합원들은 맞벌이 잘하는 부인을 두지 못한 경우
무척이나 부끄러워했다지."

"왜?"

"수공업자들이라 일감이 고정적이지 못해
수입이 들쭉날쭉했거든."

"그래서 부인이라도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래."

"헐, 세상에."

"그리고 도둑질에 대해 
무척이나 엄하게 다스렸어."

"어떻게?"

"만약 물건을 몰래 빼돌리다가 걸리잖아?
그러면 귀를 찢고 조직에서 내쫓았어."
(조합원들은 흔히 귀걸이를 차고 있었는데, 그 귀걸이를 잡아당겨 귀를 찢었다)

"헐!"

"때문에 당시 귀가 찢어진 사람들은
흔히 사기꾼으로 치부됐지."

"그러면 쫓겨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데?"

"별수있나? 
도시에서 몰래 무허가 장사를 할 수 밖에."



중세 상인들의 몰락

● 몽골의 출현 : 잠시나마 좋았던 유럽 상인들

십자군 전쟁이 끝나자 
곧 몽골이 나타났다.
 

당시 몽골인들은 
점령지를 닥치는대로 파괴하여,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곧 폐허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수백 만 명의 피로 얻어진 

실크로드와 초원길을 몽골인들이 장악하면서 
사상 유례가 없는 안전한 교역로로 탈바꿈 된다.


 
"황금 판자를 머리에 이고 다녀도
아무 염려가 없다능."

그렇다면 몽골 제국이 출현하기 전
유럽은 어떻게 교역을 하고 있었을까?

예로부터 
이탈리아의 지중해 연안 상인들은

중국, 인도 등지에서 온 
향료, 보석, 염료 등의 상품을 매개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교역은 
중간에 이슬람의 중계 없이는 불가능해서

이슬람이라는 중간상을 거쳐야만 했기에
유럽인들은 막대한 유통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의 통상로 정복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은 아랍인의 중계 없이도

다이렉트로 동방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됐다.

게다가 몽골군의 소탕으로
교역로를 통한 여정은 훨씬 더 안전해 졌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했고 

당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오가는 길목에서는 

저마다 이탈리아 화폐가 통용될 정도로
교역은 활기를 띠게된다.

때문에 몽골과 화친하기를 바라는 
유럽의 교황과 왕의 사절단이 오고갈 정도였다.

 마르코 폴로
"중국에 가니깐 엄청나더만."

 마르코 폴로
"유럽에서는 입지도 못하는, 
비단을 개나소나 입고 다니질 않나.."

그야말로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1368년 원나라가 패망하여 
만리장성 밖으로 밀려났고

중국에는 폐쇄적인 경제를 지향하는 
명 왕조가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다.

그러자 활발했던 유럽과의 교류는 단절되고 
동서양을 이어주는 대륙의 무역로 또한 봉쇄되고 만다.
 


● 화포의 등장 : 도시의 붕괴

몽골에 의해 유럽은 '흑사병'이라는 
재앙을 얻게 되었지만

동시에 '화포'라는 
문명의 이기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화포의 전래로 
유럽의 도시들을 일대 변환기를 맞게된다.

무슨 이유인가? 먼저 유럽 도시들의 
성벽이 변화하는 과정을 알아보자.

도시가 만들어지고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자

곧 도적들로부터 
도시의 재산을 지킬 필요성이 대두됐다.
(중세 유럽에는 도적들이 많았다.)
 
▲ 중세 노상강도들

때문에 중세 유럽의 도시들은
돌로 성벽을 두르면서 전체를 요새화했고
 

견고한 성벽은 
곧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장원의 경우에는 성벽이 없었다.)

당시 도시가 팽창하면
수시로 성벽을 조금 터서 새로 쌓았기 때문에

도시의 팽창을 
성벽이 가로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화포의 도입과 함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성벽 쯤이야 
화포로 부수면 그만임."

때문에 성벽을 두껍게 쌓아야 했기에
성벽 신축이란 거의 불가능해지고 만다.

 
"이 두꺼운 성벽을 
어떻게 부수고 새로 쌓겠음?"

그리하여 당시 도시가 생각해낸 것은
도시 안에 고층건물들을 여럿 쌓는 방식이었다.
 

 
"공간이 좁으면 
건물을 높게 지으면 됨."

하지만 대포는 더욱 발달하게 되었고
두꺼운 성벽도 더 이상 소용없어 져서
 

결국 성곽도시는 
사라지고 만다.

동시에 중세 말기가 되면, 
장원의 해체로 

시골에서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에

도시의 인구는 더욱 늘어갔고
결국 도시의 규모와 경제적 번영은

과거의 '성벽쌓기'에서
'인구의 밀집도'로 그 기준이 바뀌게 된다.
 


● 지브롤터 해협의 발견 : 샹파뉴 시장의 몰락

재밌는 것은 
유럽인들은 13세기말까지

지중해가 대서양으로 뚫려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영순 경제사 오디세이 p.46)

극소수만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어서

3차 십자군 원정 때에서야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들어가는 항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2차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점령하는데, 이때 정보를 취했을 수도 있음."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사실 지브롤터 해협은 대단히 협소해.
그래서 착각할 수 있지."

"그리고 7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어서,"

"유럽인들은 
그쪽으로 다닐 일이 없었거든."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끝난 1291년에야 
유럽인들은 공식적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알게 되었으니

"그래서 14세기초 지브롤터를 탈환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무진장 애를쓰고.."

"15세기 중반에 
겨우 스페인이 차지하게 됨."

말 그대로 '땅 가운데 있는 바다'로 여겨졌던 
지중해의 고정관념이 깨진 순간이었다.

그러자 지리적 발견은 
엉뚱한 곳으로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와 대서양이 
원래 연결됐다지 뭔가!"

 
"그러면 한자상인과 이탈리아 상인이
굳이 힘들게 육로로 왔다 갔다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그렇군."

때문에 곧 지중해와 북해를 
직접 연결하는 해상로가 개척되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육상교역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
 

때문에 상파뉴의 지리적 이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고
이후 급속도로 침체하고 만다.


● 오스만 제국의 등장 : 중세 상인들의 몰락

1453년 
동로마가 망하게 된다.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상권은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된다.

오스만 투르크는 
기독교 세계와 철저히 대립하였기 때문에

중계무역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 이젠 후추, 향신료, 설탕, 차 
모두 끝인가!"

그렇게 베네치아 상인들은 
절규했다.

그런데 모두가 체념하고 있을 때
서유럽의 변방,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은 모험을 감행했다.

 
"중동을 거치지 않고도 
인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지."

그리고 그런 노력은 
결실을 맺어,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횡단에 성공하게 되고
 

1498년 인도에 도착해
꿈에 그리던 후추와 향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 도착

또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대항해 시대가 개막되어
막대한 금·은을 유럽으로 가지고 오게 된다.
 
▲ 신대륙의 은광산 (16세기)

그러자 독일의 한자 상인들은 
급격히 몰락했다.

무엇보다 유럽 경제를 움직이던 
독일(알프스)의 은광이 경쟁에서 밀려

독일의 도시들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중세 후기를 양분하던
이탈리아와 독일 상인들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몰락하고 말았고,

반면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득세하게 되고
곧 영국과 네덜란드가 바톤을 이어 받게된다.
 



● 소소한 얘기

유럽의 길드는 과연 산업화에 긍정적이었나?

흔히 유럽의 전통 수공업의 
장인정신이 

이후 유럽의 산업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오히려 
악영향을 줬다는 견해도 만만치가 않다.

"고용자 수를 제한하고
공급량을 통제하고, 사업확장을 견제하고.."

"이만한 독점도 없었지."

"생산 방식도 틀에 박힌대로만 해야했고
진보된 경영방식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배격했어.

"무조건 전통만 고수하자는 방식.
그게 유럽의 장인정신이었어."


메디치가와 푸거가

당시 이탈리아 상인 중 가장 유명했던 가문이
피렌체의 메디치가(家)였다.

이들은 이슬람을 통해 
향신료, 비단, 모직, 후추, 설탕에서 

노예, 모피, 염료, 보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면서 부를 축적했고

그렇게 벌어들인 자금으로 
로마 교황의 자금 창구 역할을 맡게된다.

때문에 엄청난 권세를 바탕으로
두 명의 교황과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기도 하는 등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가문이었다.

그런가하면 독일에서는 
독일 남부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가(家)가 유명한데

이들 역시 후추, 계피, 인디고, 고무, 알로에, 비단 등을 
이슬람을 통해 들어와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알프스의 은광을 직접 경영하고
유럽의 금융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왕실의 자금줄 역할을 하였으니

유럽의 왕실로부터 제후에 책봉되며
만만치 않은 권세를 누리게 된다.


독일의 30년 전쟁

독일의 한자상권은 
한때 200개의 도시가 소속되어 있었지만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 엄청난 타격을 받고
70개 미만으로 폭락하게 되는데,

사실 이보다 
'결정타'를 날렸던 것은

신·구교도간의 종교적 갈등에서 시작된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이 전쟁으로 독일 전체 인구의 2/3가 사망하게 된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때문에 한자상권은 완전 붕괴되고
독일은 300여개의 군소영방으로 나눠지게 되는데

이로써 내륙 지방의 교역망은 
사실상 완전 붕괴되게 된다.

"독일 북부에서 남부까지 가는데만 
수십개 군소국가들을 거쳐야 하는데.."

"그때마다 내는 
통행세를 생각해봐."

 
"헉! 운송비 거품이 장난 아니겠군."

경제학자 슘페터는 
르네상스 이후 독일의 낙후된 경제를 이렇게 말했다.

 슘페터
"근대 독일의 산업화가 후진성을 면치 못했던 근본적 이유는
바로 이 30년 전쟁에 있었다."
 
 

참고 문헌 : 중세유럽의 상인들 (카를로 치폴라), 경제사 오디세이 (최영순), 중세 유럽 산책 (아베 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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