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비상
● 고대 ~ 중세 이베리아 반도 : 1800년 간의 식민역사
피레네 산맥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 대륙과는 다른 문화적, 인종적인 특징이 있다.
그래서 "피레네 산맥의 서쪽은 유럽이 아니다"
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적으로 보면
고립된 공간 속에서
이베리아 반도는
숱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시대, 이베리아 반도는
지리적으로 유럽보다는 아프리카와 더 밀접했다.
유럽 본토와는 해발 3천m가 넘는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와는 너비 15km 밖에 안되는
협소한 지브롤터 해협만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
최초로 집단 정착한 사람들도
BC 3천년 경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들이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피부가 어두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후 BC 10세기 경 이베리아 반도에는
유럽 본토에서 켈트족이 유입되고
북아프리카인 + 켈트족의 혼혈이 거듭되어
오늘날의 이베리아인들을 만들게 된다.
그러다가 BC 6세기 경에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인들의 식민지배를 받게되면서
최초로 문명 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 카르타고의 식민도시
이후 카르타고가
BC 2세기 경 포에니 전쟁에서 패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은
로마제국으로 명패를 바꿔달게 된다.
▲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스페인)
그리고 AD 5세기경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이번에는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게된다.
이때 세워진 나라가
서고트 왕국이었다.
▲ 서고트 왕국의 유적지
하지만 AD 8세경에는 또 다시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이
바뀌게 된다.
▲ 알 함브라 궁전 (스페인)
결국 이베리아 반도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고대→중세 시대 동안
매번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 이베리아 반도 최초의 민족국가, 포르투갈
이슬람의
지배를 받던 시기,
로마제국 시대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던 토착민들은
종교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반도의 북쪽으로 모여들었고
이곳에 ☞나라를 세워
저항했었다.
그러면서 호시탐탐
옛 영토의 회복을 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은 강성했고
문화적으로도 우수하여
당시 이슬람인들의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로 번화하고 있을 정도였다.
▲ 이슬람 지배하의 스페인의 코르도바
"11세기 당시 코르도바에는
40만권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학자들로 넘쳐 났지."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려는
기독교인들의 야심을 이루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자
이베리안 반도는 다른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된다.
▲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공격 중인 십자군 ☞참고
"이유가 뭐임?"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은
지중해와 북유럽을 오가는 데 있어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군대의 물자 보급과 함대의 기착지로
매우 유용한 곳이었어."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 땅을 차지하고 싶었던게지"
그렇게 해서 1143년
이베리아 반도 최초의 민족국가라 할 수 있는
포르투갈 왕국이
탄생하게 된다.
"당시 포르투갈은
유럽의 여느 봉건체제 국가들과는 달리,"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체제로 운영될 수 있었어."
"아! 그래서
최초의 민족국가라고 하는 것이군."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이미 천년 전부터 행해지던 정치 시스템이었지."
어쨌든 포르투갈 국왕의 존재는
당시 국민들에게 강한 귀속감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르투갈의 장래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13세기 이후 다시
이슬람 세력들은 강성해졌고
기독교인들을 반도의 북쪽으로
다시 내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르투갈인들은
심각하게 장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땅덩이도 작고, 자원도 척박하고
게다가 이슬람인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삼키려들고.."
"그러게. 나라의 앞길이 걱정이네.
도대체 구멍이 안 보여."
"보이는 것이라고는
죽음의 바다라는 망망대해(대서양) 뿐이니.."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곧 대서양에 눈을 돌렸고
그곳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 포르투갈의 해안가
● 르네상스기의 유럽 : 지리학의 발견과 후추에 대한 갈증
14~15세기 당시 유럽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든 시점이었고
과학과 문학, 사상이
크게 개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1406년 유럽인들은
120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
'지리학'이라는 책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책 좀 보라고!"
"글쎄, 인도라는 나라에 가면
진귀한 향신료로 가득하다지 뭔가!"
"중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루트로 가면 되는구나!"
책에는 중세 유럽인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신기한 지리적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해서
↓이러한 세계 지도도 만들어지게 된다.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오류 투성이의 지도였지."
"그러게, 아프리카와 남극이 연결되어 있고.."
"적도에는 아예 동식물이
생존하지 않는 것으로 나와있어."
"하긴, 저 당시 유럽인들은
남쪽에는 사하라 사막만 있다고 생각했을테니.."
그렇더라도 당시 유행했던
허무맹랑한 신화에 비해
이 책은 믿을만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또 책은 인쇄가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유럽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넓혀주는 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후추'가
유럽인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유럽인들은 후추에 집착을 했던 거임?"
"흔히 맛 때문이라고 생각하가 쉬운데,
실은 저장된 식품을 먹기 위해서였어."
"읭?"
"중세 유럽에서는
고기를 소금에 절여 저장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누린내가 심해져서
도저히 먹기가 곤란했거든."
"그래서?"
"이때 허브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한 냄새를 지우기가 힘들었어."
"그런데 후추를 쳐보니깐
냄새가 말끔히 가시는거야."
"아! 그러니깐 후추는 맛보다는
냄새 제거 용도로 각광을 받았던 거네."
즉, 당시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향신료의 수요가 높았던 것이고
이러한 향신료는 유럽에서는
도통 구할 수 있는게 아니었기 때문에
가격이 폭등하여
고가에 거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향신료
게다가 이런 향신료 공급은
이슬람에 의해 전량 독점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
14세기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자
유럽과의 무역을
전면 중단시켰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향신료의 공급줄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 당시 향신료 무역을 담당하던, 베네치아 상인
때문에 향신료에 대한 갈증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 불세출의 영웅, 엔리케 왕자
역사는 영웅이 만들어 간다는 말이 있다.
물론, 역사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데 포르투갈의 엔리케(엔히케) 왕자는
정말로 뛰어난 영웅이었고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날의 유럽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온 장본인이었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그럴까?
엔리케 왕자
1394년에 출생한 엔리케는
포르투갈의 왕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을 접했기 때문에,
인도의 향신료와
아프리카 내륙부에 존재한다는 (에티오피아로 추정)
미지의 기독교국가,
'프레스터 존의 왕국'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엔리케 왕자
"정말 대서양은 막혀있을까?"
엔리케 왕자
"만약 뚫려있다면 배를 타고 가서
인도의 향신료와 중국의 비단을 얻을 수 있을텐데.."
엔리케 왕자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해서.."
엔리케 왕자
"우리가 프레스터 존의 왕국과 동맹을 맺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늘 이런 생각을 품고 있던
엔리케 왕자는
자신의 꿈을 실현해보기 위한 발판으로
먼저 북아프리카의 작은 반도, 세우타를 점령하게 된다.
▲ 세우타 : 현재는 스페인의 영토다
"작은 반도지만 이곳을 점령하면서
엔리케 왕자는 많은 것들을 얻게 되지."
"어떤 게 있는데?"
"바로 이슬람의 항해술이야."
"당시만 해도 유럽의 범선은
사각돛 한개만 달고 항해를 했거든."
"그랬어?"
"그런데 당시 이슬람의 범선은 돛을 여러개 달아
바람을 이용해서 보다 빠르게 항해할 수 있었지."
"그러면 대항해시대의 범선들은
모두 이슬람의 배를 본딴 거였네."
"맞아. 그리고 이슬람의 범선이 우수했던 것은
역풍이 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범주 능력이 있었다는 거임."
▲ 이슬람 삼각범선과 포르투갈의 카라벨선
"그런 훌륭한 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왜 이슬람은 세계를 제패할 생각을 못했던건지."
"원래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고.."
"당시 이슬람 사람들은 윤택했으니깐.
반면에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했었고.."
어쨌든 세우타를 점령하면서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전초기지를 마련하게 되었고
▲ 세우타 점령
이곳에서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이슬람의 뛰어난 항해술을 터득하게 된다.
● 해양진출의 두뇌창고, 사그레스 성
포르투갈의 최남단에 가면
사그레스라는 어촌 마을이 있다.
포르투갈인들에게는
'땅끝마을'로 불리워지던 곳이다.
▲ 사그레스
그런데 이곳에 엔리케 왕자는
해양 진출을 위한 전문 연구소를 세우게 된다.
"엔리케 왕자는 이곳에 연구소를 지어.."
"세계 각지의 우수한 조선기술자, 항해기술자,
탐험가, 지리학자, 천문학자 등을 초빙해서 연구를 하게 했지."
"엄청난 지원이네."
"그렇게해서 연구 자료가 축적되자.."
"나중에는 세계 도처에서 소문을 듣고
자연스레 전문가들이 모여들게 되었어."
"포르투갈이 뜬금없이
신대륙을 개척한 게 아니었네."
"그럼. 노력과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당시 만들어진 등대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용되고 있을 정도다.
▲ 15세기에 제작된 사그레스의 등대
"이곳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중국 나침반을 개선했고
이슬람의 범선을 개선하고,"
"수학과 천문학을 이용해서
항해술을 진정한 과학으로 발전시켰지."
"엔리케 왕자라는 사람 대단했구나."
"그렇지. 당시까지 항해술은
상업적 필요에 의해 개발되고, 항로가 개척되었는데,"
"당시 포르투갈의 항해술과 항로는
국가정책으로 개발되고 개척되었으니깐."
▲ 사그레스의 연구소
그리고 이런
엔리케 왕자의 노력 덕분에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대서양은
서서히 그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서아프리카 탐사와 발견
모든 준비를 마치자,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곧 아프리카로 떠났고
1434년, 프톨레마이오스가 세계의 끝이라고 했던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 곶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포르투갈 인들은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대서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바다였어."
그리고 세네갈과
카보베르데 섬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카보베르데 섬은
이후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착지가 된다.
그리고 기니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드디어 포르투갈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향신료와
진귀한 상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유럽으로 돌아온
포르투갈인들은
현지에서 구입한 향신료 등을 팔아,
커다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때문에 포르투갈의 국고는
나날이 늘어갔다.
그런데
행운이었을까?
포르투갈이 해양탐사를 하던 1세기 동안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은
중세의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끊임없는 암투를 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서로 치열한 전쟁 중에 있었고
독일의 군소국가들은
먼 국가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원교근공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북유럽 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전통 무역이 가져다주는
마지막 부귀영화를 즐기고 있었고
포르투갈의 이웃, 스페인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쉼없이 이슬람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포르투갈인들은 유유자적
아프리카의 해안 4천 km를 탐사하고
지도를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 주앙 2세, 희망봉의 발견
그런데 1460년
엔리케 왕자가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항해사업은
주앙 2세에 의해 계승된다.
주앙 2세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땅끝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주앙 2세
"기니만 밑으로
쭉 탐사해보라능."
바르톨로뮤 디아스
"넵"
그리하여 디아스는 범선 3척을 가지고
남쪽 아프리카 지역을 탐험하게 되는데
아프리카 최남단 부근에서
그만 거친 풍랑을 만나게 되고
13일 밤낮을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육지를 밟게된다.
바르톨로뮤 디아스
"휴~ 죽었다 살아났다능."
바르톨로뮤 디아스
"앞으로 이땅을
'폭풍의 고지'라고 이름 붙이겠다능."
하지만 보고를 들은 주앙 2세는
'희망봉'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주앙 2세
"목숨을 건진 땅인데, 폭풍이라니..
이름 좀 좋게 짓자능."
▲ 디아스의 항해
어쨌든 희망봉의 발견으로,
포르투갈은
꿈에 그리던 아시아를 향한
디딤돌을 마련하게 된다.
새로운 강자, 스페인
● 스페인의 통일
12세기 경
포르투갈 왕국이 세워졌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슬람(그라나다)의 세력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13세기 초,
프랑스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 두 왕국은
야금야금 영역을 확장하여
15세기 중엽이 되면, 남쪽의 그라나다를 제외하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1469년,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을 하면서
두 나라는 통일이 된다.
"헐! 이렇게 아름다운 통일이 있나!"
"하지만 연합 왕국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통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고.."
"1716년에야 완전한 통일 국가가 되지."
"그런데 지금은
다시 갈라서려고 하지 않나?"
"맞아. 카탈루냐(옛 아라곤) 지역이
줄기차게 독립을 외치고 있지."
▲ 스페인 카탈루냐 독립시위
어쨌든 세력을 합한 스페인은 더욱 강성해졌고
결국 1491년 그라나다를 함락하게 된다.
▲ 그라나다 함락 (영화의 장면)
"이때 그라나다의 수도에는
그 유명한 알 함브라 궁전이 있었음."
"아! 찬란했던 이슬람 문명이
그렇게 사라졌구나."
"무려 700년간에 걸친 싸움이었어."
그렇게 이베리아 반도의
기나긴 전쟁은 끝이 났고
이사벨 1세는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알 함브라 궁전에 입성하게 된다.
▲ 페르난도와 이사벨 여왕
● 콜럼버스의 착각 : 신대륙 발견의 원동력
그런데 이사벨 여왕이
알 함브라 궁전에 입성할 때
그곳에서는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던 이가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콜럼버스
당시 유럽에서는 '지구는 둥글다는 게'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졌고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지식인들은 에라토스테네스가 측정한
지구의 둘레를 어림잡아 알고 있었다.
"다만 중대한 착각이 있었어."
"어떻게?"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 둘레가 '2만 밀리어'라고 했거든."
"그런데?"
"1 밀리어가 원래는 약 2km의 거리를 의미하는데
콜럼버스는 1 밀리어를 1.5km 정도로 알고 있었어."
"그러했으니 실제 지구 둘레는 원래 4만 km인데
콜럼버스 생각에는 3만 km 정도였던게지."
"아! 그래서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로 착각했던 것이군."
"맞았어.
지구 둘레를 3/4 정도로 작게 예측했으니.."
하지만 컬럼버스의 착각은
신대륙 발견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됐다.
실제보다
지구 사이즈를 적게 생각한 탓에
그는 서쪽으로 조금만 항해하다보면
아시아 대륙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은
포르투갈에서는 크게 신임을 얻지 못했고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앙 2세
"글쎄, 우리 쪽 전문가들은
자네의 계산보다 지구의 지름을 크게 보고 있던데.."
콜럼버스
"어? 아닌데요.."
주앙 2세
"그보다 우리는 아프리카를 돌아 동쪽으로 항해해서
아시아에 도착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네."
이렇게 퇴짜를 맞았던
콜럼버스였다.
사실 따지고보면,
포르투갈 전문가들의 의견이 맞았다.
하지만 그들은 정확한 예측 덕분에
역사에 길이 남을 절호의 찬스를 날리고 만 것이고
퇴짜 맞은 콜럼버스는,
차선책으로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 스페인 여왕의 지원
1491년 1월 스페인의 통일을 달성한
여왕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와
3개월에 걸쳐 장시간 협상을 했다.
▲ 이사벨 여왕을 설득하고 있는 콜럼버스
사실 당시 포르투갈은 해상권을 통해
급성장 하고 있었던 터라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를 몹시도 질투하고 있었다.
이사벨 1세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이웃이 잘되니깐 더 배가 아프다능."
때문에 콜럼버스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사벨 여왕이었다.
하지만 항해에는 많은 양의 물자와
인력, 그리고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신생 통일국의 스페인 여왕은
강한 국력에 대한 욕망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여왕의 마음을
콜럼버스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콜럼버스
"글쎄, 저만 믿으시라니깐요.
제가 포르투갈에서 8년간 항해한 경력도 있거든요."
이사벨 1세
"그래서 뭘 원하는데.."
콜럼버스
"식민지를 차지하게 되면,
그 땅은 모두 여왕님께 드리겠습니다.
콜럼버스
"대신에 거기서 나온 수익금 중 얼마는
저에게 떼어주셨으면.."
사실 콜럼버스는
협상의 달인이었다.
때문에 장시간 협상 끝에
그는 식민지 수익의 10%를 차지할 수 있다는 조건을 보장받게 된다.
● 신대륙의 발견
1492년 8월 3일, 콜롬버스는
여왕이 하사하는 총사령관의 임명장을 가지고
여왕이 제공한 3척의 배를 이끌고
직접 출항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쪽을 향해 나갔고
한 달 후에는 대서양의 한복판에 도달하게 된다.
콜럼버스는 오랫동안 육지를 떠나온
선원들의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항해거리를 속여
실제 보다 적게 발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꼼수도 2달이 넘자
한계에 이르렀고
"아놔, 두달 넘게 티끌마한 땅도 안보이는데..
우리 이러다가 모두 물고기 밥 되는거 아님?"
결국 불안감에 휩싸여 격분한 선원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만다.
"에잇 XX 당장 돌아가요!"
콜럼버스
"알았어. 대신 딱 3일만 참아줘.
그때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조건 돌아갈테니깐.."
그랬는데 신기하게도
정확히 3일만에 육지가 발견됐다고 한다. (정말일까?)
"오!육지다!"
그날이 바로
1492년 10월 12일이었고
바로 그 순간, 인류 역사상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영웅'이 탄생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은
서인도제도의 바하마 군도였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다.
콜럼버스
"보라고! 피부색이 누리끼리한게
아시아 사람 맞잖아!"
당시 아메리카에서는, 1만 년 전 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으니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콜럼버스의 결정적 실수
스페인이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곧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스페인 여왕은 10월 12일을
국경일로 지정할 정도였다.
환영식은 성대했다.
여왕 이사벨 1세는 약속대로 포상을 했고
콜럼버스는 6명의 인디언을 대동한 자리에서
성대하고 화려한 환영 행사를 받았다.
그러나 쾌거를 이루고 돌아온 콜럼버스를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당초 그의 제안을 거절했던
포르투갈의 주앙 2세였다.
주앙 2세
콜럼버스가 귀환 후 첫번째로 방문한 곳이
바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었기 때문이다.
주앙 2세
"오랜만이야. 그동안 뭐했어?"
콜럼버스는
괜히 자랑하고 싶어졌다.
콜럼버스
"인도에 갔다 오는 중인데요."
주앙 2세
"뭣이? 정말로 인도에 갔단 말인가?"
콜럼버스는 함께 데려온
인디언들을 보여줬다.
주앙 2세
"오! 정말로 처음 보는 모습들이다."
주앙 2세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고..
이들이 정말 인도인이던가!"
콜럼버스
"보신 대로입니다."
주앙 2세
"그러면 혹시
아프리카를 돌아서 갔나?"
콜럼버스
"아뇨. 그냥 서쪽으로 갔는데요."
주앙 2세
"헐, 결국 그랬단 말인가!"
하지만 주앙 2세는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정말로 그러한지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주앙 2세
"그래도 믿지 못하겠는걸."
주앙 2세
"어디, 여기에 있는 콩을 가지고
너희들이 온 신대륙의 모양을 그려보거라."
그렇게 콜럼버스와 인디언 모두에게
콩으로 신대륙을 그려보도록 했다.
주앙 2세
"..."
하지만 곧 콜럼버스는 가슴을 치며
두고두고 이 일을 후회하게 된다.
콜럼버스
"어익후! 내가 바보 멍충이지."
콜럼버스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함부로 퍼뜨렸으니.."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두 나라의 항해 경쟁은 이미 시작되고 만 것이다.
● 토르데시야스 조약 : 세계를 반띵하다
당시 바다에 대해서는
'공유'라는 개념이 없었고
새로운 해역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주인이라고 여겼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그 누구도 스페인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콜럼버스에 의해 포르투갈은
귀중한 정보(서쪽 항해길)를 얻게 되었으니,
스페인에게는
일종의 압박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1년 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리스본 교회의 작은 마을에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마치 지구에 선을 긋듯, 수박을 반으로 쪼개듯,
세계를 반으로 나눈 것이다.
"서경 46도를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갖고
서쪽은 스페인이 갖기!"
"좋아. 그러면 서쪽 항해길은 양보할게.
너희들도 동쪽 항해길은 노리지 말라능."
하지만 정확한 계산은
별 의미가 없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 모두
유럽 이외의 대륙에 대한 정보는 부정확했고,
미지의 대륙이 얼마나 크며
세계 규모가 또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조약은
이후 강대국의 식민지 분할에 있어 나쁜 선례가 되고 만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경선을 보면
마치 자로 잰듯한 모양이 많은데,"
"열강들이 자기들 맘대로 합의해서
선을 나눠버렸기 때문이야."
"우리나라도 그랬잖아. 38선."
"맞아. 이런 독단적인 선긋기 때문에.."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민족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지."
아무튼 이렇게 조약은 체결되었고
게임의 룰은 정해졌다.
이들 국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두 아시아의 '인도'에 있었다.
서쪽으로 가든, 동쪽으로 가든
인도에 가서 더 많은 향신료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성공과 쇠퇴
● 바스코 다가마, 포르투갈의 숙원을 풀다
1498년 5월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지휘하는 선박이
인도 코지코드(캘리컷)에 도착한다.
고국을 떠나온지
꼬박 10달만이었고,
포르투갈이 1세기에 걸쳐 간절히 원하던 꿈이
실현되고 있는 벅찬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인도인들의 태도는
사뭇 차가웠다.
"니들 여기 왜 왔음?"
바스코 다 가마
"기독교 좀 전파하고
향신료 좀 얻어 가려고.."
"뭐, 종교?
우리는 이미 믿는 종교가 있는데.."
결국 포르투갈인들은 포교는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향신료만을 얻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아랍 상인들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아놔, 기독교 넘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인도애들이
향신료를 팔지 못하도록 막아야해."
이렇게 방해공작을 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결국 3개월만에
겨우겨우 약간의 향신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장차 인도 교역의 초석이 된다.
"당시 포르투갈과 인도를 오가는 데에는
2년 이상이 걸리는 힘든 항해였어."
"엄청 심한데..
신대륙은 왔다갔다 6개월이면 뒤집어 쓰잖아."
"아프리카를 끝까지 돌고
인도양을 가로질러야 하니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는
마진이 원가의 무려 60배나 달했어."
"헐!"
"때문에 해마다 인도 무역은 확대됐지."
● 마젤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넓혀주다
포르투갈이 동방에서 성공을 거두자
스페인도 재도전을 시작했다.
1519년 9월 20일, 포르투갈에서 외면 당했던
탐험가 마젤란은
선박 5척에
선원 260여명을 태우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사실 스페인 사람들은
1507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아시아가 아닌 신대륙이었음을 알게 됐어."
"그래서?"
"당시 스페인인들은 무진장 실망했어."
"왜?"
"스페인인들이 원했던 것은
아시아의 향신료와 비단, 금과 같은 것들이었으니깐."
"그래서 마젤란에게 서쪽으로 가서
아시아의 향신료를 구해오길 바랐던 거야."
그래서 마젤란은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에 들려
향신료를 가져오고자 했었다.
"몰루카 제도에 가면
향신료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마젤란은 세계 일주에 앞서 10년 전에
포르투갈 배를 타고 몰루카에 갔었으니깐."
"그러면 서쪽으로 간다고 해서
어떻게 정확히 몰루카 제도에 다달을 수가 있는거지?"
"나침반이 있으니깐."
"아!"
하지만
마젤란의 탐험은 불행했다.
장장 1080일,
만7천km에 달하는 기나긴 항해였지만
도중에 들렸던 필리핀에서
원주민에게 살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 마젤란의 최후
하지만 그의 세계일주로 인해
유럽인들에게 펼쳐진 세상은
기존의 1/4 짜리가 아닌,
세계 전체로 시야가 확대되게 된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멈칫거렸던 탐험은
이후로 급속도록 활기를 띠며
유럽인들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새로운 지도를 요구하게 되었고
발견된 신항로 덕분에
유럽인들은
곧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열쇠를 거머쥘 수 있게 된다.
●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전성기
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무역로를 개척하게 된다.
먼저, 포르투갈은 대서양에서 인도양에 걸쳐
50여개의 거점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는 전세계 무역항로의
절반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아프리카에서 인도, 동남아, 중국의 마카오까지
포르투갈은 무역 거점을 설치했지."
때문에 16세기 초기 5년 동안
포르투갈의 무역 거래량은
22만 파운드에서 230만 파운드로
대폭 증가하게 되고
더불어 포르투갈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다.
▲ 녹색 : 포르투갈의 식민지, 붉은색 : 포르투갈의 무역거점
그런가 하면 같은 시기
스페인의 활동은 더욱더 적극적이었다.
"포르투갈은
주로 구대륙을 공략해야 해서,"
"강압적인 식민지 건설 보다는
우호적인 무역거점 건설에 주력하게 되지만,"
"스페인은 대부분 신대륙을 공략했기 때문에
강압적인 식민지 건설이 가능했지."
▲ 스페인의 식민지
때문에 스페인은
신대륙을 마음껏 수탈하며
1502년에서 1560년까지
은 18,600톤과 황금 200톤을 얻을 수 있었고,
16세기말에는
전세계 금·은 총생산량 중 83%를 소유할 수 있었다.
"다만 스페인의 세력 확장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비극이었지."
"어떻게?"
"질병과 학살로 당시 신대륙의 원주민 중
90%가 사라지게 되거든."
"헐!"
실제로 16세기 멕시코의 인구는
2500만명에서 265만명으로 감소했고
페루의 인구는
900만에서 130만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전례 없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 포르투갈의 몰락
인도와의 향신료 교역에서
엄청난 잿팍을 터뜨렸던 포르투갈의 왕실은
이후 해외 무역에
국가 경제를 올인하게 된다.
주앙 2세
"농사 필요 없어.
무역 한방이면 팔자를 고치는데 그깟 농삿일.."
때문에 국내 경제는
사실상 파탄이 나고 말았다.
▲ 당시 포르투갈
더욱이 당시의 해외 무역은
매우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다.
"성공하면 인생역전을 할만큼
매력적인 일이었지만,"
"문제는 탐험 도중에 많은 수가
질병이나 풍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야."
"어느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워낙 남자들이 많이 죽어서
군대를 운영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지."
"그래서?"
"흑인이나 해외 용병으로
군대를 꾸릴 수 밖에 없었고.."
"결혼할 남자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들과 결혼한 여자들도 점차 나타나게 됐지."
"그래서 포르투갈에
흑인들이 많이 사는건가?"
▲ 16세기 포르투갈의 흑인들
"맞아. 일찍부터 혼혈이 이뤄졌던 탓에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지."
하지만 포르투갈의 몰락에는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포르투갈이 상대하기에는
인도는 너무 강한 상대였다는 것이다.
▲ 16세기 인도의 포병
"당시 인도는
강력한 화약무기로 이뤄진 군대를 가지고 있었어."
"게다가 인구가 1억 5천만명이었지."
▲ 16세기 인도의 포병
"뭐야? 엄청나잖아."
"반면에 포르투갈은
인구가 200만명 정도였고.."
"서양의 무기 수준으로는
당시 인도를 압도하기엔 무리가 있었지."
"애초에 게임이 안됐네."
"맞아. 그런데도 인도에 식민지를 얻어보겠다고
왕실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전쟁에 매달렸던게 화근이었지."
▲ 포르투갈과 인도의 해전 (1535년)
"사실 포르투갈이라는 소국이
여러 해외식민지를 개척한다는 것부터 애초에 무리였어."
그런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부정축재를 일삼고 있었다.
때문에 나라꼴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고
백성들은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에 허덕이게 됐다.
▲ 16세기 포르투갈 농민
결국 힘을 잃게된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개척했던 해양 무역로를
영국과 네덜란드 상선들에게
차례로 빼앗기게 되고
16세기 후반에는 스페인에게 복속되었다가
17세기 후반에 겨우 독립을 하게된다.
그리고 이후 포르투갈은
서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살아가야만 했다.
● 스페인의 몰락
스페인의 몰락도
포르투갈과 양상이 비슷했다.
갑작스레 생긴 재물들을
종교 전쟁과 식민지 확장 등에 쏟아부었을 뿐
국내 산업 부흥을 위한 상공업 발전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목축업을 하던 나라여서
농업의 발전을 통한 자영농 육성을 꾀하지 않았어."
"그러면서 툭하면
이단재판, 마녀사냥을 행했지."
▲ 16세기 스페인 군대
"그래서?"
"이 나라는 워낙 종교가 강성해서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유태인이 금융업에 종사하는 것조차 막았어.
때문에 금융업이 사실상 없던 나라였어."
"당시에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주식회사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맞아. 그런 차이가
북유럽과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간의 운명을 갈라놓은 거야."
"그런데 스페인의 경제를 가장 도탄에 빠뜨렸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대륙에서 유입된 금과 은이었어."
"읭? 왜 그런데?"
"금과 은이 가치가 높은 것은 바로 희소성 때문이야.
그 자체로는 한낱 금속에 불과하지."
"그런데 금과 은이 너무 많이
유럽 내부로 흘러 들어간게 화근이었어."
"아! 결국 금, 은의 가치가
폭락했다는 얘기군."
"맞아. 오직 금과 은이 많아지면
국부가 쌓일 것이라 착각했던게 당시 스페인 왕실이었지."
그러니 화폐가치가 떨어지자
스페인의 경제는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기초 산업을 등한시 하면서
오직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스페인 사람들이었으니,
심각한 경제 위기에
봉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 격으로
16세기 후반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스페인은 대외 식민지 경쟁에서도 주춤하게 되어
더욱 빠르게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밀물같이 밀려왔던 재물들이
썰물같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게 된 것이었다.
참고 문헌 : 강대국의 조건 (중국 CCTV), 대항해시대 (주경철), 종횡무진 서양사 (남경태), 모자이크 세계지리 (이우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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