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성로마제국과 영방국가체제
5세기 후반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프랑크왕국이
떡 하니 자리잡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은
9세기 후반 3개로 쪼개지게 된다.
서쪽은 오늘날의 프랑스,
남쪽은 오늘날의 이탈리아,
동쪽은 오늘날의 독일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이 중에 동쪽의 프랑크왕국은
100년이 지나자
'신성로마제국'으로
명패를 바꿔달게 된다.
처음에 신성로마제국은 나름 황제의 권한이 강했고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도 있었다.
오토대제
▲ 10세기 후반 , 오토대제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후 신성로마의 황제는
여러번 왕조가 바뀌게 되어
그 때마다
중앙집권화가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지형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근세 독일은
왜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리적으로 보자면
영토가 알프스산맥을 가로지르며 있었기 때문임."
"특히 산세가 높고
계곡이 깊은 곳에 위치한 국가들은,"
"이웃들과 교류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어."
반면에 평원으로
넓게 펼쳐진 프랑스는
쉽게 통일국가로 발전할 수가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중세 후기가 되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제대로 제국을 통치하지 못했고
여기저기서 군소국가들끼리
군웅할거를 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그야말로 무늬만 제국이었어."
"란트(land)라 불리는 도시국가들이
무려 314개나 산재해 있었거든."
"우아! 엄청났네.
그 군소국가들은 모두 독일 계통이었음?"
"대부분은 독일 계통인게 맞지만
이탈리아, 보헤미아(체코), 슬리브족도 있었지."
"때문에 '신성로마제국=독일'이라고 말하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님."
그런데 중세 후기가 되면
군소국가들은
각자 독립된 힘을 바탕으로
틈만나면 서로가 치고박고 싸우게 되었고
그러다 1618년 종교전쟁에서 유발된
30년 전쟁이 터지자,
싸움은 절정에 이르러
독일 전체 인구의
2/3가 사망하게 되는
끔찍한 참변을 겪게 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하나의 민족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유럽 중부에
거대한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어."
"그래서?"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유럽 각국은.."
"신성로마제국 내 군소국가들의
독립된 주권을 대대적으로 보장하게 되지."
▲ 베스트팔렌조약 (1648년)
"아! 분열을 고착시키기 위한 것이구나."
"맞아. 이런 체제를 두고 흔히
'영방국가'라고 하지."
"영방국가랑
연방국가랑 뭐가 다른데?"
"영방국가는 독립된 군소국가들이
형식적으로 황제를 선출하는 식의 국가를 말함."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랑 비슷하네."
"반면에 연방국가는
상위에 연방정부를 두고.."
"군소국가들을 통합하는 형태를 말하지.
오늘날의 미국과 같이."
● 나폴레옹의 침공과 독일연방의 탄생
그렇게 만들어진
영방국가 체제 속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축이 된 오스트리아가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고 있었다.
▲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는 16~17세기 오스만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의 기독교세력을 지켜낸 강력한 나라였지."
또 16세기 절대군주제 시기에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에헴!"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나름 제국의 기틀을 공공히 하고 있었다.
"16세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보면
상당히 후덜덜한데.."
"헐! 엄청난데. 비법이 뭐임?"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여기저기 왕실들과
정략결혼을 맺으며 제국의 영토를 넓혔던 거임."
"당시 유럽은 왕과 여왕이 결혼하는 식으로
나라를 서로 합치기도 하고 그랬거든."
그런가 하면
독일의 북쪽에서는 프로이센이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해가며
독일 영방에서 2인자로 급부상 하고 있었다.
▲ 17세기 프로이센의 영역
"얘넨 비법이 뭐임?"
"프로이센은 잘 조직된 상비군과 관료제도로
막강한 중앙집권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빠르게 북부 독일의 깡패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임."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이 되면
신성로마제국 내에는
남쪽의 오스트리아와 북쪽의 프로이센이라는
강력한 영방국가가 공존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봤자
말짱 허사였다.
1806년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했을 때
두 나라는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고
프로이센은 영토의 절반을 빼앗기고
전쟁 배상금으로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 군청색 : 원래 프랑스, 파랑색 : 나폴레옹이 확장한 영토
그리고 이후 신성로마제국 체제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만다.
나폴레옹
"앞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그냥 오스트리아 황제로 부르겠다능."
때문에 독일의 시인의 쉴러는
이렇게 탄식을 했다.
쉴러
"아! 독일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당최 그곳을 찾을 수가 없구나."
그러자 쉴러의 친구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괴테
"이보게, 친구.
이젠 독일은 잊어버려."
괴테
"만약 비엔나(빈)에 가서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그 땅은 오스트리아고,"
괴테
"베를린에서 묻는다면
그 땅은 프로이센일뿐이지."
슬픔에 찬 독일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봤다.
▲ 1800년도 유럽 지도
영국과 프랑스는
통일된 민족국가와
입헌국가라는 민주정치를 이룩하면서
크게 번영하고 있었다.
"아놔, 우리도
통일국가를 이뤄야 할텐데.."
"그래. 썩어빠진 전제 왕정부터 없애버리고
우리도 민주정치로 가야함."
"맞아. 그래야 열강의 침략에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음."
나폴레옹 강점기 독일에서는
그렇게 민족주의(통일)와
민주주의(입헌국가)라는
염원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묘하게도 당시는 괴테, 쉴러, 베토벤, 칸트 등
쟁쟁한 독일의 거장들이 활약했던 시기지."
그런데 그러던 중
1815년 나폴레옹이
유럽 여러 나라로 구성된
동맹군에게 패하게 되자
▲ 워털루 전쟁 (1815)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소원이
드디어 실현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빈 체제 :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 회의
39개의 연방국가로 구성된
새로운 독일연방이 설립될 뿐이었다.
"연방의 수가 300개에서
39개로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 말고는,"
"느슨한 영주국 연합체라는 점에서
신성로마제국의 답습이었지."
"이유가 뭐임?"
"유럽 열강들은 하나로 통일된 독일이
유럽 중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민주주의(입헌국가)도 실현되지 못했지.
그냥 다시 왕정으로 복고를 해버렸으니.."
● 리스트의 현실적인 통일방안 : 경제통합론
나폴레옹은 독일인들에게 굴욕을 줬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의 통일을 촉발시켜주었다.
'독일연방'이 수립되면서
독일은 다시 옛 체제로 회귀했지만
그러면서도 독일인들은
마음 한 편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얻어낸
자유와 평등을 동경하고
통일국가로의 출범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였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요지는 이렇다.
리스트
"독일은 통일을 해야만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음."
리스트
"그리고 통일은 혁명에 의존하기 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져야 한다능."
리스트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하냐?
바로 경제동맹부터 하자능."
당시까지만 해도,
한 국가의 통일은
무조건 혁명 아니면
전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말한 경제동맹을 통한
통일 구상은
단연 앞서가는 생각이었고
대담한 주장이기도 했다.
"사실 리스트의 주장은
대단히 현실적이었어."
"왜?"
"당시까지 독일 경제가 낙후된 가장 큰 원인이
분열된 경제에 있었거든."
"어떻게?"
"당시 독일은
여러 군소국가로 나눠져 있었기 때문에.."
"사용되던 화폐의 종류만
6천 가지가 넘던 시절도 있었음."
▲ 독일 영방제국 당시의 다양한 화폐들
"헉!"
"또 영방국가 간에는
독자적인 관세를 물게했기 때문에,"
"베를린에서 스위스까지 가는 데에만
19세기초에 10개 나라를 거쳐야만 했음."
"그럼 관세만
10번 지불해야 했겠네."
"당연하지. 그래서 지불한 관세가
운반하는 물건의 가격을 뛰어넘을 때도 있었고.."
"여기에 서류심사와 환전만 10번씩 해야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짜증나는 일이었어."
▲ 당시 국경의 세관
결국 이런 관세 체제는
독일의 무역 발전을 크게 방해했고
더 나아가 독일의 경제발전과
독일 제품의 경쟁력까지 해치고 있었다.
때문에 리스트는
통일에 앞서
가장 먼저 독일연방 내의 관세부터
폐지부터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관세동맹 : 경제적 통일의 완수
하지만 리스트의 주장은
묵사발 당했다.
심지어 독일 연방국가들은
그를 국경 밖으로 내쫓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를
위험한 선동자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왜 그랬던거임?"
"당시 영방국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가 관세였음."
"그런데 그걸 폐지시켜봐."
"아!"
결국 리스트는 10년 동안
직접 연방국가들을 찾아 다니며 설득을 해야만 했고,
결국 그러다가
프로이센을 찾아가게 됐다.
그랬는데.. 마침내 프로이센은
리스트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프로이센은 야심이 큰 나라였거든."
"쪼잔한 관세 수입에
얽매이기보다는,"
"관세를 철폐하면 경제 전체적으로
더 큰 이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거지."
결국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은 관세동맹을 이루게 되고
이때부터 물건을 가득 실은 마차가
자유롭게 독일 영토 내에서 교역을 할 수 있게 된다.
"관세 동맹을 맺은 나라들끼리는
상품, 자본, 노동력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필요한 원료나 노동력을
다른 곳에서 보다 빠르게 보충할 수 있게 되었고,"
"또 팔고자하는 물품은
보다 쉽게 다른 곳에 팔 수 있었기 때문에.."
"관세 동맹을 체결한 나라들은
모두 빠르게 경제가 성장할 수 있게 되었지."
"그렇구나."
"그리고 소문이 퍼지자 계속해서 여러 연방국들이
잇따라 관세 동맹에 가입하게 됐어."
그렇게 관세 동맹이 성공을 거두자
프로이센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지게 되었고
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에서는 철도망이 대대적으로 건설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이면
독일 내 관세동맹 지역의 GDP가
유럽 내에서 영국, 프랑스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로써 독일은 사실상
경제 통일을 완성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3월 혁명과 좌절
1848년 프랑스에서는
성난 민중들이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며
이른바 2월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 프랑스의 2월 혁명 (1848)
그러자 혁명의 소식은
곧 유럽의 인접 국가들로 번졌다.
3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 독일의 3월 혁명 (1848)
이때 독일인들은
30년 전 이루지 못했던
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당시 혁명은 부르주아라는 자산 계급이
시민들을 주도하고 있었고
혁명은 짧은 시간 내에
성공을 거두게 된다.
▲ 프랑크푸르트 의회 (1848)
그리고 각 연방국에서는 대표를 선발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을 의회로 저마다 내보냈다.
의원1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입헌국가임!"
의원2
"또 미국과 같은
통일된 연방국가임!"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혁명은 끝내 실패하고 만다.
"애초에 의회 구성부터 잘못이었지."
"어떻게?"
"당시 각 연방국가들이 대표로 보낸 이들은
상당수가 공무원들이었음."
"때문에 극단적인 혁명과는 거리가 먼
온건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
"공무원들 보수적인건 어딜가도 똑같았네."
"원래 철밥통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때문에 의회의 급진파 의원들은
온건파 공무원들에 화가났고
밖으로 나와서
강력 시위를 계획했으나,
도리어 이 과정에서
연방 정부군의 공권력 앞에 강제로 진압되고 말았다.
때문에 독일은 또 다시
낡은 봉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게 된다.
"독일은 또 다시
군주 독재의 길로 돌아선 것이었고,"
"의회의 의원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연방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음."
하지만 그러면서 독일의 지식인들이
깨닫게 된 한가지 사실이 있었다.
"독일의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무리임."
"무력 통일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음!"
●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한번 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런데
괜히 유명한게 아니다.
새로 세워진 나라의 지도자들이라면
가장 흔하게 정치적 멘토로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독일의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대신 이홍장이
일본에서는 메이지 정부의 내무장관 오쿠보 도시미치가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의 박정희가
각국의 비스마르크로 불려지거나
불려지고 싶어했었다.
왜 그는
이토록 존경받는 것일까?
"그가 바로 오늘날 '통일 독일'과
'경제대국 독일'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지."
"아! 하나도 힘든데
통일과 경제대국 모두를 만들었네."
1862년 9월 30일.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의회에 들어와
이러한 연설을 했다.
비스마르크
"우리가 염원하는 독일의 통일은
정치적으로 풀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비스마르크
"불가피한 투쟁, 즉 칼과 철로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요."
그리고 이때부터 비스마르크는
'철혈재상'으로 불리우게 된다.
물론 군대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사실 프로이센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 프로이센 군대
전통적으로 프로이센은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강력한 독재자가 되어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키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군대의 최고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사리사욕에 앞선 독재자들과는 달랐다.
국가를 위한
확실한 비전이 있었고
비스마르크
"그동안 독일이 뭉치지 않아서
매번 얻어 터졌던 것이지. 제대로 뭉치기만 해봐라."
비스마르크
"독일의 포텐셜로 보면,
영국, 프랑스도 두렵지 않다고!"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통일의 과업을 하나씩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외교술에 탁월하여
(실제로 그는 전쟁보다 외교를 중시했다.)
전쟁이라는 무력 사용에 앞서
각국으로부터 암묵적인 승인을 받아내는 데 주력해서
끈질긴 대화로
영국의 간섭을 막을 수 있었고
러시아 정부의 폴란드 봉기진압을 지지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는 침묵을 얻어낼 수 있었고
또 룩셈부르크와 벨기에의 영토를 넘긴겨준다는 구두약속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중립을 얻어낼 수 있었다..
● 독일통일을 위한 전쟁 :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그렇게 외교를 통해
사전 포석을 모두 마친 뒤
비스마르크는 본격적으로
철과 피의 맹세를 실천하게 된다.
1866년. 먼저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향해 총구를 겨누게 된다.
(사실 선빵은 오스트리아가 했음)
▲ 보오전쟁 (1866)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랑스도 함께)
공동의 적 덴마크를 물리쳤던 사이라는 것이다.
"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라더니.."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려면,"
"연방 내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오스트리아를 제압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이야."
그렇게 두 나라는
전쟁을 치뤘고
전쟁은 7주만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 싶었는데..
▲ 보오전쟁 (1866)
그때 돌연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때문에 소식을 들은,
정계와 군부는 물론 시민들까지 크게 격분하게 된다.
"아니, 다 잡은 고기를 왜 놓아줌?"
"뭐야? 전쟁에서 이겼는데
왜 오스트리아의 땅 한평도 받지 못한건데?"
"심지어 배상금도 뜯지 못했다던데.."
하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독일을 완전 통일하려면
독일 통일을 강력히 반대하던
프랑스의 반대를
물리쳐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때 오스트리아를 제압해 버리면
향후 오스트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나는데
오죽했으면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얘기할 정도였다.
비스마르크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보오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독일 연방에서
완전 탈퇴하게 되었으니
독일로서는
끝내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 1800년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비엔나)
그리고 4년 후,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은 시작됐다.
이 전쟁에서도 독일군은 승승장구했고
프랑스 군은 철저히 개박살났다.
▲ 보불전쟁 (1870)
급기야 프랑스 황제는
전쟁 중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 보불전쟁 (1870)
이로써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마저 제거된 것이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화려한 축포가 터졌다.
신이 난 독일군은
남의 나라의 수도,
그것도 남의 나라 궁궐(베르사유 궁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 베르사유 궁전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독일군 : 가운데 흰색 제복이 비스마르크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의 개국을 선포하게 된다.
또 프로이센의 황제였던 빌헬름 1세는
통일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이후 독일은
어떻게 변했을까?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게 되지."
"어떻게?"
"인구, GDP, 강철생산량, 석탄생산량
철도의 길이 등 모든 면에서 프랑스를 크게 앞서게 되면서.."
"당당히 영국과 함께
유럽의 양대강국으로 부상하게 됨."
"19세기 말에는 이미 세계 3위의 강대국이었고
20세기 초에는 세계 2위의 강대국이 되었지."
"역시 통일이 되니
역량이 발휘되네."
● 교육의 힘 : 독일이 강대국이 된 원동력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군 총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센의 승리는
초등학교 선생들의 강단에서부터 결정된 것임."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사실 프로이센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가 침략했을 당시
독일의 앞날을 교육에서 찾고자 했었고
이에 앞장선 인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로이센은 현재 가난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교육에 집중해야만 한다능."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교육에 집중한 나라가
더 가난해진 것은 본 적도 없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또 그런 나라가 망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거든.."
그리하여 그는 국민들을 상대로
의무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참고로 1820년 당시
프로이센의 초등학생들은,"
"세계지리, 자연, 산수, 독일어,
글쓰기, 종교, 체조 등의 과목을 배웠어."
"조선의 선비들이
한참 맹자왈, 공자왈 하고 있었을 때였네."
당시 초등학생들의 수업료는
거의 무료였다.
"대신 결석을 하면
학생은 벌금을 내야만 했어."
"와! 200년 전부터
전국민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니 굉장한 걸."
"사실 먼저 실시한 것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였지."
"하지만 교육에 대한 열망에서
프랑스인들은 독일인들만 못했어."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19세기 중엽 프로이센이 통일되기 직전
초등학교의 아동 취학률이 97.5%였음."
"뜨악!"
그런가하면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는 상황에서도
대학교를 만드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 당시 만들어진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
"국왕이 자신의 재산까지
탈탈 털어서 대학교를 만들고,"
"왕실의 땅을 대학설립 부지로
기꺼이 내놓을 정도로 열성적이었지."
"그학생들의 과학 연구를 위한
물질적인 지원도 아낌없이 해줬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교육과 학술활동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음."
그러면서도 국왕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상기시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디 우리 민족을 위해 공부해주길 바란다능."
그리고 곧 독일은
수많은 과학자들을 양성해내게 된다.
베를린 홈볼트 대학에 가면
본관 앞에 수많은 흑백 사진들이 걸려있는데
이들 중 노벨상을 받은 인물만
무려 29명이라는 것.
▲ 아인슈타인도 이 대학 교수출신이다
"헐! 한 대학에서만?"
즉 교육이야말로 독일이 짧은 시간에
강대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게된 계기였다.
"다른 나라는 안 그랬어?"
"근대화 과정에 있어
교육을 중시했던 경우는 독일이 유별났지."
"반면에 미국, 영국, 프랑스의 근대화 과정은
자본주의가 견인했다고 볼 수 있고.."
● 2차 산업혁명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산업화 과정은
영국에 뒤졌지만
독일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근대화를 이루게 된다.
"전국민적 교육은
자질높은 국민을 배양해냈고,"
"독일의 대학은
수많은 발명들을 가져다줬지."
"결국 교육은 후발주자가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네."
"어쩌면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해외 식민지가 많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더 악착같이
교육에 집착했는지도 몰라."
"이건 마치
가난한 집안의 고시생인가?"
어쨌든
독일은 빠르게 성장했고
급기야 19세기 후반이 되면
2차 산업혁명의 선도적 역할을 맡게된다.
"2차 산업혁명이 뭥미?"
"19세기 후반부터 세계 산업의 중심이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차츰 바뀌게 되는데,"
"이런 현상을
2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는거임"
"중화학 공업이라니 어떤게 있는데?"
"당시에는 전기와 화학공업이 대표적이었지."
실제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2차 산업혁명이 대두되던 시기에
독일은 총 202가지의
혁신과 발명을 하게 되는데
▲ 2차 산업혁명 당시의 독일의 발명품
이는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발명을
합한 것과 비슷한 수치였다.
그리고 그런 전통은
여전히 유효해서
오늘날에도 독일은
전세계 과학 기술 대국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중이다.
▲ 2차 산업혁명 당시의 독일의 발명품
"결국 독일는 1871년 통일이 된 후
40년 동안 경제가 고속 발전을 거듭하게 되어,"
"1910년 경에는 영국을 제치고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이 되지."
(다만 곧 소련에 독일은 유럽 최고 자리를 내주게된다.)
● 왜곡된 성장 : 우경화
19세기 후반 세계인들은
놀랍고 부러운 시선으로
급속도로 부상하는
독일을 바라봤다.
발전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권력의 정점에서도
절제의 미덕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무슨 뜻임?"
"그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군대를 이용해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어."
"어? 흔히 알고 있는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른데?"
"철과 피는 독일을 통일할 할 때만 필요한 소스였지.
대외팽창을 의미하지는 않았어."
그는 오히려 여러 나라를 파괴하고
국제 관계를 악화시키는
나폴레옹 시대와 같은 혼란을
애써 피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비스마르크도 나이가 들어
정계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했던 것은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였다.
▲ 비스마르크의 퇴진을 내려다 보고 있는 빌헬름 2세 (1890)
그리고 이때가 독일 국가전략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고 만다.
"이후로 독일은 급속히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되거든."
"왜?"
"당시 독일인들은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자신감으로 충만했었어."
"하긴 과학도 발달했고
우수한 인력들도 넘치고, 군사적으로도 강했으니.."
"그런데 독일인들은 늘 불만스러웠어."
"자신들도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대접을
국제적으로 받고 싶어했지."
때문에 독일인들의 이러한 바람은
급속히 군국주의로 연결되게 되었고
경제성장과 군국주의는
서로 결합하여
곧 독일을 침략성을 갖춘
호전적 국가로 발전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앞장섰던 인물이
하필 새 황제 빌헬름 2세였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빌헬름 2세
"나와 군대는 한 몸이며
독일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르겠다능."
빌헬름 2세
"게르만인은 다른 민족들보다 우수함!"
빌헬름 2세
"고로 신의 뜻으로 우리 독일인이
장차 모든 민족을 지배하고 통치하게 될 것임."
결국 독일이 통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어슴프레 나타났던 군국주의가
빌헬름 2세에 의해
수면 위로 전면 떠오르게 된 것이었고
▲ 군대를 시찰 중인 빌헬름 2세
이후로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독일의 야심은 빠르게 드러났으니,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고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독일은 1, 2차 세계대전의
모든 발원지가 됐고
빌헬름 2세의 군국주의를
히틀러가 바톤을 이어받자, 곧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라 본다.
전쟁으로 독일은 쫄딱 망하고
나라는 강제로 분단되었지만
40여 년이 흘러
독일은 다시 통일을 하게 되었고
폴란드에 잘못했다고
총리가 과거를 싹싹 빌면서
독일은 유럽인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현재는 EU의 회원국이자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이다. (PPP GDP 기준)
"전쟁으로 가루가 된 독일이
불과 한 세대만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뭐임?"
"눈에 보이는 건축물 들이 사라졌다고
사람들의 지식과 기술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깐."
"여건만 주어지면 언제고
빠르게 다시 일어설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지."
● 소소한 얘기 : 독일 연방이 상실한 영토
칼리닌그라드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연방의
491개 주 가운데 하나이며
면적은 우리나라(남한)의 1/6 정도 크기이고
인구는 약 100만명 정도인 곳이다.
그런데 원래 이곳은 2차 대전 전까지
독일의 영토였던 곳이다.
"원래 칼리닌그라드는
일찍부터 프로이센의 영토였어."
"어, 그래?"
"독일 철학자 칸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그는 평생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함."
"그런데 왜 러시아 땅이 된거임?"
"독일이 2차 대전에 패망하자
소련이 전리품으로 강제로 차지했던거임."
"하필 왜 저 땅임?"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서유럽으로 가는 창구를 확보할 수 있거든."
"무엇보다 소련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발트해 남쪽의 항구가 절실했었음."
"그렇다면 저기 사는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 아님?"
"독일인들은 다 강제 추방시키고
러시아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지."
"그래서 현재 저기 사는 사람들 중
80% 이상이 러시아 사람들이라고 함."
그런데 사실 칼리닌그라드는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다.
▲ 소련 시절 영토
"이유가 뭐임?"
"소련 때만해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는 모두 같은 나라여서.."
"저기에 사는 사람들은
맘놓고 러시아 본토를 오갈 수 있었으니깐,"
"특이하게 보일 여지가 없었어."
"지금은 자유럽게 왕래할 수 없음?"
"지금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에서 땡깡 부려서
비자 없이는 마음대로 통과 못함."
"그래서 저기 사는 사람들은
대단히 살기가 불편하다고 함."
그런데 이곳을 잃은 독일로서는
땅을 치고 아쉬워할 일이 하나 있다.
"하필 여기서
엄청난 석유가 발견됨."
▲ 칼리닌그라드의 원유 시추
"헐!"
"여기서만 발트해 원유의
90%가 생산된다니 말 다했지."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최근 칼리닌그라드에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고
이곳을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하면서
'발트해의 홍콩'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2018년 월드컵도 치뤄진다.
오스트리아 : 왜 영세중립국이 되었나?
1866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화가 나서
독일연방에서 탈퇴하고 만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시 독일과 동맹하여 전쟁을 치르게 되고
▲ 1차대전 중 오스트리아 군대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오스트리아 출신)가
게르만 통합주의를 내세워
독일의 영토로 편입하게 되어
▲ 오스트리아에 입성 중인 독일군 (1938)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독일 편에 가담하여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지만
패전국이 되어
종전 후 연합국의 통치를 받게된다.
이후 열강들은
오스트리아에 무리한 요구들을 하게 된다.
"너희들 앞으로 독일과는
절대로 합방 금지임."
"넵."
"또 군대를 갖는 것도 금지임."
"그건, 좀.."
하지만 연합국들은,
생각해보니
오스트리아는 조그만 나라여서
다시 전쟁을 일으킬만한 힘도 없어 뵈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좋아. 대신 앞으로 어떤 열강의 편에도 서지 않는
영세 중립국으로 있어야 함."
이렇게 해서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중부 유럽의 영세중립국이 된 것이다.
참고 문헌 : 독일 근대사 (김장수), 강대국의 조건 (중국 CCTV), 모자이크 세계지리 (이우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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