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이 이룩한 자본주의
● 설탕 : 대항해시대의 선봉장
11세기 유럽인들은 십자군원정을 통해서
설탕이라는 이국적 조미료를 알게된다.
▲ 십자군전쟁
그러자 곧 유럽인들은 단맛이 가지는
엄청난 매력 속으로 빠지게 된다.
(사실 설탕은 중독성이 있어서 먹을수록 탐닉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쉽사리 설탕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사탕수수는 동남아 지역이 원산지인 식물로
유럽의 기후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거든."
"아!"
"의외의 사실인데,
사탕수수는 실은 벼과의 식물이야."
"헐! 벼과라고?"
아무튼 15세기까지 유럽인들에게
설탕은 몹시도 귀한 식재료였고
때문에 유럽인들은 설탕보다 값싼(!) 꿀을 먹으며
단맛의 유혹을 다스려야만 했다.
"값싼 꿀?"
그랬는데..
신대륙이 발견되자
유럽인들은 그동안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엄청난 기회들이
갑작스럽게 자신들에게
찾아왔음을 직감하게 된다.
"설탕, 커피, 향신료와 같은 기호품들은.."
"그동안 이슬람의 상인들을 통해서
제한적으로 유럽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그런데?"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인들은
'새로운 인도'를 얻게된 것이었지."
사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애초에 유럽인들은 설탕과 향신료를 얻기 위해
그토록 '인도 타령'을 했던 것이었으니
설탕과 향신료를
재배할 수 있게 해준 신대륙은
어찌보면 '새로운 인도'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새로운 인도(신대륙)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고
이때 유럽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재배하고자 했던 작물은
사탕수수,
바로 설탕이었다.
▲ 사탕수수
● 삼각무역 : 근대 자본주의의 발판
그런데 유럽인들에게는
신대륙에 이어
또 하나의 선물이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였다.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들에게 자원과 토지를 줬다면,"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에게 귀중한 노동력을 공급해줬지."
사실 유럽인들에게 신대륙만 덜컹 주어지고
아프리카가 없었다면
유럽이 그토록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운이 좋았고
제대로 활용할 줄도 알았다.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
1세기가 흐른 16세기 말부터
'삼각무역'이라 불리우는
대륙별 '특화 시스템'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인가?
바로 이렇게 말이다.
아메리카 : 토지
아프리카 : 노동
유럽 : 자본
"각 대륙별로 하나씩 생산요소를 전담했으니
역사상으로도 이런 장대한 스케일도 없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졌는데?"
"먼저 유럽인들은
럼주, 옷감, 화약 등을 싣고 아프리카로 갔어."
"그리고 아프리카의 추장들한테
가지고온 상품을 내주고,"
"그 대가로
흑인 노예들을 받아갔지."
▲ 당시 노예선
"그리고?"
"그렇게 받은 노예들을
신대륙의 사탕수수, 목화밭, 광산 등에 데리고 가서.."
"혹독한 노동을 시켰던 거야."
"그리고 생산된
사탕수수, 목화, 초석 등을 들고.."
"유럽으로 가서
설탕(럼주), 옷감, 화약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을
다시 아프리카로 들고가고.."
"아, 결국 돌고 도는거네."
"맞아. 계속 돌다보면.."
"결국 유럽에서는 돈이 쌓이고
신대륙에서는 노예가 쌓이게 되는 구조였지."
때문에 맑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칼 맑스
"삼각무역이야말로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될 수 있게 한 근원이었다."
결국 유럽인들이 삼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던 16~18세기, 300년 동안
1,200만명에 이르는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옮겨져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흑인 노예들의
신대륙에서의 평균수명은 고작 3년(!)에 불과했다.
● 노예노동 금지법 : 앞선자의 꼼수
1833년 영국 의회에서는
노예노동 전면 금지 법안을 통과시킨다.
"앞으로 대영 제국의 식민지에서
노예노동은 전면 금지임."
조금 의외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표방하며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불리우던 영국이
스스로 노예제도를 폐지하겠다니?
▲ 당시의 풍자화
"와! 영국 멋지잖아.
180년전부터 박애주의를 표방하다니."
하지만 여기에는
이런 꿍꿍이가 있었다.
"사실 그게 아님."
"읭?"
"노예들은 거의 헐값이라서.."
"노예의 값싼 노동력 때문에
영국에서는 실업자들이 급증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노예제도가 지속되는 한
영국의 자본가들은,"
"영국의 임금노동자 대신에
값싼(거의 공짜) 노예들만 고용하려 들테고.."
"그렇게되면 영국의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없어지게 되잖아."
▲ 영국의 석탄 광부
"아!"
"때문에 당시 영국의 정치가들은.."
"정치적 지지율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했어."
따라서 영국은 노예노동을
금지하려고 했던 것이고
또 박애주의라는 가면을 쓰면서
다른 나라에서도 따라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 노예노동 금지법을 형상화한 벽화
"자기들만 손해 볼 수 없으니깐
다른 나라에서도 노예제를 없애라고 한 것이었지."
"이건 마치 오늘날 선진국들이
환경오염 운운하면서,"
"후진국들에게 무분별한 개발을
하지말라는 논리와도 같네."
"그렇지. 그동안 선진국들은
환경을 오염시키며 그렇게도 성장해놓고선.."
▲ 중국의 환경오염을 비판하고 있는 서양 언론의 사진
사실 영국은 19세기 말에
보호무역을 비판하며
자유무역를
대대적으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론적으로만 보면
매우 훌륭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실은 여기에도
비슷한 꿍꿍이가 있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완수한
선도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앞선 생산력을 기초로 만들어진 제품을
보다 쉽게 내다 팔아먹기 위한 꼼수에서
자유무역을 하자고
주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인 노동자, 쿨리
● 흑인노예를 중국인으로 대체하다.
하지만 19세기 초 영국에서
노예노동 금지법이 실행되자
대영제국의 농장주들은
막막했다.
"아놔, 노예들을 없애라니.."
"그러면 당장 무슨 수로
농장의 노동자들을 구함?"
때문에 상당수의 농장주들은
법령 이후에도 암암리에 노예노동을 감행하려 하거나
새로운 대안으로 값싼 일꾼을 찾기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그랬더니
곧 답을 얻었다.
"찾았어! 값싼 일꾼들을.."
"그게 누군데?"
"바로 중국과 인도인."
당시 중국의 인구는 3억명,
인도는 2억명으로
두 나라 인구를 합하면
전세계 인구의 50%를 넘고 있었다.
(19세기 초 전세계 인구는 약 10억명이었다.)
또 워낙 많은 인구 탓에, 당시 중국과 인도에서는
일자리가 매우 부족했던 터였다.
▲ 인도 출신 노동자
때문에 중국과 인도의 노동자들은
기꺼이 영국인들이 제시한 싸구려 임금에 계약을 했고
동남아, 신대륙의 영국인 농장에서 일을 하기위해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는
노예에 의한 노동이
점차 계약 노동자들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노동자들은
반(半) 노예와 다름 없었어."
"어떻게?"
"원래 계약기간은 5년만 일하고
고국으로 보내주는 형식이었지만,"
"영국인 농장주들은 하루 12시간 씩의 고된 노동을
무려 10년 넘게 부려먹기도 했고.."
"임금도 애초에 계약한만큼 주지 않고
떼어먹기 일쑤였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당시 중국과 인도는
너무도 인구가 많았고, 기회는 적었기 때문에
그런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해외 노동을 하다가 돌아오면
마치 '금의환향'이라도 한 것처럼
고향에서 땅을 사고, 농사를 짓고 살아갈 수 있었으므로
중국과 인도인들은 스스로 '계약노동자'가 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 19세기 유럽인과 중국인의 해외이주
16~18세기 유럽은 삼각무역으로
부를 차곡차곡 축적하더니
비례적으로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본래 전통시대, 유럽이라는 한정된 토지에서
부양할 수 있었던 최대 인구 수준은 1억명 정도야."
"그런데?"
"신대륙에서 들어온 식량들로 인해서
유럽은 본래 수용능력을 훨씬 초과하게 됐지."
"19세기 초 유럽의 인구는
2억명을 넘어섰음."
때문에 폭발하는 인구를
견디다 못해
19세기가 되면 유럽인들은
대대적으로 신대륙을 향해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딱 같은 시점에서
아시아의 중국인들도
본격적으로
해외 이주를 시작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목적은 오직, 유럽인들이 기피하는
빡센 노동을 위한 이주였다.
"즉 유럽인들은 새삶을 찾기 위해 간 것지만
중국인들은 새 일자리를 얻기 위해 간 것이었지."
대부분 막노동꾼이었던 이들을
'쿨리'라 불렸는데
이는 '노동자'를 뜻하는 중국말이다.
苦力(쿠리) → 쿨리
그리고 이 말은 유럽인들에게까지 퍼져
나중에는 인도 노동자까지 '쿨리'로 불리게 된다.
"어쩌면 쿨리의 1등공신은
신대륙의 구황작물일런지도 몰라."
"무슨 뜻?"
"중국과 인도에서 17~18세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주요한 원인은.."
"바로 고구마, 옥수수, 땅콩과 같은
구황작물에 있었거든."
● 동남아의 쿨리
사실 중국은 15세기부터 이미
푸젠성과 광둥성의 상인들이
동남아의 태국, 베트남 등지로 진출해서
현지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다만, 불교문화권인 이곳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비교적 현지인들과 융화하며 잘 살고 있었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같은 종교가 다른 지역에서는
자주 현지인들과 마찰을 일으키며
나중에는 철저히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꾸리며 살게 되었다.
"종교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인들은 피부색이 짙은 말레이계인들을.."
"자신보다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하며
깔보기도 했었지."
그러던 중, 1819년 영국은
싱가폴을 국제 무역항으로 만들기 위해
수만명의 중국인 쿨리들을
모집하게 되었다.
▲ 19세기의 싱가폴
"오늘날 싱가폴 사람들의 3/4 이상이
중국계인 이유는, 바로 이런 탓임."
그러더니, 말레이시아에서
엄청난 주석 광산이 개발되고
▲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의 쿨리
인도네시아에서는 사탕수수, 담배 농장이
대규모로 조성되면서
▲ 인도네시아 사탕수수 농장의 쿨리
유럽인들은 지속적으로 노동력을 위해
중국인 쿨리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현지 원주민이나
인도의 노동자들도 있을텐데?"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말레이인들이나 인도인들은 게을러서
유럽인들이 싫어했어."
"그에반해 중국 쿨리들은
열심히 일을 했음."
때문에 19세 중국의 쿨리들은
동남아 뿐만 아니라
일꾼이 필요한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 가리지 않고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1833년
영국의 노예노동 금지 법안은
그런 중국인 쿨리에대한 수요에
화룡점정을 찍는 사건이 되었다.
● 아메리카 대륙의 쿨리
미국에서는 1807년 노예무역이 금지됐지만
노예제도는 계속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목화와 사탕수수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들을
함부로 해방시킬 수는 없었어."
하지만
남북전쟁이 터지자
1863년 링컨 대통령은
미국 남쪽의 농장에서만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미국 북쪽의 공장에서도
임금 노동자로 활용하기 위해
노예제도를
전면 폐지하게 되었다.
"무슨 뜻이지?"
"링컨은 미국이 분열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방의 통합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었어."
"그런데?"
"당시 북부의 상공업자들은
남부의 노예제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링컨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느라
노예해방을 주장했던 것이지."
▲ 동기가 어떻든간에, 링컨은 노예해방의 선구자다.
그런 취지에서 행해진
노예해방 선언 이후,
미국에서도
계약 노동자의 이주가 본격화되게 되었으니,
19세기 후반에만
무려 500만명의 중국인 쿨리들이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과
캘리포니아의 금광으로 대대적으로 몰려들었다.
▲ 미국의 캘리포니아로 가는 배안의 풍경
"미국 대륙횡단 철도 건설에는
중국인 쿨리의 노동력이 절대적이었고.."
▲ 대륙횡단 철도건설 작업장의 쿨리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만들다
희생된 노동자들의 상당수도 중국의 쿨리들이었지."
"흑인 노예들이 사라지니
그 자리를 중국인들이 차지했던 셈이네."
쿨리에 대한 수요는
여타 아메리카의 국가에서도 넘쳐났다.
캐나다 횡단 철도의 부설
파나마 운하 공사에도
중국인 쿨리들이 투입되었고
페루의 구아노(인광석) 채집장에서도
1만명의 중국인 쿨리가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인들만 그렇게
외노자로 일했음?"
"아니, 1870년대부터 일본 역시
하와이 농장으로 노동자들을 수출했고.."
▲ 하와이의 일본인 쿨리들
"구한말 조선에서도
멕시코, 쿠바 농장으로 노동자들을 수출했지."
"아!"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이주한 노동자들을
애니깽이라고 불렀어."
"흑인 노예가 사라진 자리를.."
"아시아의 노동자들이 대신했다는 건
왠지 서글픈 역사인데.."
▲ 멕시코의 조선인 쿨리, 애니깽
사실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에 대한 시각은
철저한 인종주의 논리에 입각하고 있었다.
▲ 멕시코의 조선인 쿨리, 애니깽
당시 미국은 유럽으로부터는
수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의 경우엔
1882년 법령까지 만들면서
시민 취득권을
철저히 금지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는
심지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클리블랜드
"중국인들은 미국의 평화와 복지에
위험한 존재들이다!"
하와이는 미국땅, 대만은 중국땅이 된 사연
● 사탕수수 농장이 된 하와이
1778년 영국의 쿡 선장이
태평양의 한 가운데서 여러 섬들을 발견하고
쿡 선장
이곳을 '샌드위치 군도'라고 이름붙였으니,
바로 오늘날의 하와이였다.
▲ 하와이 군도의 전체 크기는 남한의 30%정도다
하지만 이곳에는
유럽인들의 눈길을 끌만한 작물들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애써서 식민지화 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영국인들은 자기들 맘대로
'영국령'이라 선포하기도 했지만..
▲ 쿡선장 일행과 하와이 원주민들
다만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서구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어서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느 아시아 국가들보다
더 근대화의 길을 가고 있었던 곳이다.
때문에 서양인들도
이를 인정해주고
하와이는 식민지의 길을 가지 않고
나름 정식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 하와이 왕
하지만 하와이의 이런 행운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사라지게 된다.
19세기 중엽, 미국 서부에
엄청난 금광이 발견되자
미국에서는
이른바 '골드러시'가 이뤄지는데..
이때 금광 개발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독일 출신 이민자 슈프레켈스는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다.
슈프레켈스
"하하하"
하지만 슈프레켈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곧 다른 사업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이다.
"오늘날 기업들로 말하면
다각화 모색이구만."
"맞아. 그런데 당시 가장 짭짤했던 사업은
설탕 정제업이었어."
"그래서 그는 미국 서부 해안에
설탕공장을 만들려고 했지."
▲ 당시 미국의 설탕 정제업
"그런데?"
"미국은 그때까지 서인도제도나 미국 동남부에서
사탕수수를 공급받아 설탕을 가공하고 있었거든."
"당시에는 파나마 운하도
뚫리지 않았던 때였고.."
"막상 사업을 하려고보니,
사탕 수수를 미국 서부로 공급해줄 농장이 필요했어."
"그래서?"
"지도를 펼쳐보니
떡 하니, 하와이 섬이 눈에 들어왔지."
때문에 슈프레켈스는 하와이에 엄청난 땅을 사고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플랜테이션을 위한 인력으로
중국인 쿨리가 대거 하와이로 들어오게 됐다.
▲ 하와이의 중국인 쿨리들
19세기 후반이 되면
중국인 쿨리는 10만명이 넘는데
하와이 현지인은
3만명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하와이 원주민들은 자기 땅에서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 슈프레켈스는
대대적으로 정치 로비를 했고
슈프레켈스
"하하. 좋은게 좋은거라고.."
결국 1876년에는 미국과 하와이는
호혜통상조약(쉽게 말해 FTA)를 추진하여
하와이산 설탕을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하와이의 사탕수수 사업은
엄청나게 호황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당시 그런 혜택을 누렸던 사람들은
오직 미국인 농장주들과.."
"그들에게 정치자금을 타먹고 있었던
하와이 왕(칼라카우아왕) 뿐이었지."
▲ 하와이 왕실
미국인 농장주들은, 현지인들에게는
농장의 일거리를 당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당시 하와이 원주민들
● 하와이 미국 땅이 되어버리다.
그런데 1890년 미국에서는
새로운 관세법을 제정하게 된다. (맥킨리 관세법)
중남미와 유럽과의 교역을 늘리기 위해
미국은 무관세 협정을 대대적으로 체결한 것이다.
그러자 하와이의 사탕수수 사업은
제대로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게
혜택을 베푼다는 것은.."
"하와이가 지금껏 누리던
특별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깐"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하와이에게
가혹한 조건을 내걸며 압박하고 있었다.
해리슨 미국 대통령
"우리한테
진주만 사용권을 주라능."
칼라카우아왕
"그렇게는 못하겠다능."
해리슨 미국 대통령
"그러면 니들한테 그동안 베풀었던
설탕 무관세 철폐할거라능."
그러자 하와이왕과 미국인 농장주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라카우아왕
"이런, 순 날강도 같은.."
하와이에서 설탕 수출이 끊긴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돈줄'이 끊긴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미국 정치인과
하와이왕은 밀담을 나눴다.
"그냥 미국과의 합병을 수락하삼."
칼라카우아왕
"..."
"그러면 앞으로 하와이는 무관세는 물론이고
정부의 보조금까지 타먹을 수 있삼."
칼라카우아왕
"오! 그래?"
그 말에 하와이왕은 귀가 솔깃해졌고
합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웃긴 것은, 당시 미국의 농장주들이
한사코 합병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주의 정책으로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꺼려하여
미국에서는 중국 노동자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프레켈스
"아놔, 중국인 쿨리 없으면
농장의 노동력은 어디서 구하라고."
또 이런 걱정도 있었다.
슈프레켈스
"만약 하와이가 미국 땅이 되면
설탕 공장들이 아예 하와이 땅에서 차려질 텐데.."
슈프레켈스
"그렇게되면 우리가 애써 만든
미국 서부의 공장들은 어떻게 되는거임?"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하와이 왕이 죽고
여왕(리리우오칼리니 여왕)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런데 새 여왕은
'민족주의'가 강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리리우오칼리니 여왕
"합병은 절대로 안 함.
하와이는 독립국임."
슈프레켈스
"오! 다행!"
하지만 여왕은
또 이렇게 말했다.
리리우오칼리니 여왕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사탕수수농장을
앞으로 하와이인들이 돌려받아야 한다능."
슈프레켈스
"에잇. 좋다 말았네."
그러자 얍삽한 하와이 농장주들은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합병을 하는게 낫다면서
미국 해군과 짜고
쿠데타를 감행하고 말았고
▲ 하와이를 점령한 미해군
결국 여왕은 물러나고
그렇게해서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고 만다.
● 설탕 식민지, 대만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원동력은
뭐니뭐니해도 설탕이었다.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열대의 섬들을 닥치는대로
사탕수수 농장으로 갈아엎고 있었고
울창하던 열대 숲은 그런 식으로
하나씩 둘씩, 노예 플랜테이션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심지어 식민지 플랜테이션에는
오직 사탕 농사에만 매달리느라
식량까지도 다른 곳에서
수입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설탕이 곡물보다
훨씬 비쌌으니깐.."
"식민지 땅에는 사탕수수만 재배하고
곡물은 수입해서 먹는게 훨씬 남는 장사였거든."
하지만 이런
(서양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몰빵식 경제는
이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들에게는
커다란 족쇄가 되고 말았으니
과거 설탕 식민지로 경영됐던 곳들은
오늘날에도 하나같이 가난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 필리핀의 사탕수수 밭
예컨대 당시 유명한 사탕수수 농장들이 있었던
자메이카, 아이티, 쿠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는
현재 모두
가난한 후진국들이다.
그런데 오직
예외인 곳이 있다.
바로
대만이다.
사실 이 섬은
17세기 초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말레이계 원주민들만 살았던 원시의 섬이었다.
▲ 18세기 사슴을 사냥하는 대만 원주민 (중국인의 그림)
그러나 이걸 놓칠
유럽인들이 아니었다.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들은
이곳을 포르모사(Formosa) 라고 불렀지."
1610년 네덜란드인들은
이 섬에 요새와 무역거점을 건설하고
▲ 당시 네덜란드의 무역거점
대대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으로는
현지의 원주민들을 이용했다.
그러자 1650년이 되면 대만은
세계 최대 설탕 생산지의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한편 17세기 중엽 중국에서는
커다란 내란이 발생하고
그 와중에 북쪽에서 만주족이 쳐들어오자
1644년 명나라는 무너지고 만다.
▲ 명청전쟁
그러자 정성공이라는
푸젠성의 한 장사꾼의 아들은
▲ 그는 한족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었다.
조그만 섬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정성공
"오랑캐 만주족 따위의
지배를 받을 수는 없다능."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그는
중국 해안도시들은 물론,
양쯔강까지 올라가서 해적질을 하고 있었다.
▲ 정성공 해적의 활동지역
그러다가
청나라 관군에 대파를 당하게 되자,
1661년 수백척의 배와
2만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그곳에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 항복하는 네덜란드인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수적으로 훨씬 적었고.."
"무엇보다 가혹한 지배 때문에
원주민들 대부분이 등을 돌린 상태였지."
▲ 대만 원주민을 강권 통치하던 네덜란드 인들
그리고 몇 달 뒤 대만은
정성공의 손에 완전히 떨어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서양을 무찔렀다면서,
굉장히 좋아할만한 소스인데?"
"맞아.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의 성전 쯤으로 선전하고 있지."
"하지만 당시 정성공에게
네덜란드는 안중에도 없었어."
"그저 대만으로 피신해 왔는데
하필 그곳에 네덜란드인들이 있었던 것이지."
"그에게 적은
오직 청나라였음."
● 청나라의 대만 정복
하지만 본토 재정복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되면서
정성공은 점차 이성을 잃고
폭군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렇지만 정성공의 대만 점령은
중국 역사에서는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정성공이 이때
대만을 점령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대만은 중국과는
전혀 상관 없는 나라였을 가능성이 99%임."
하지만 대만이 '반청의 소굴'이라 생각했던
청나라의 황제였던 강희제는
이 섬을
완전히 정복하기로 결정하게 되고,
결국 1683년 청나라는 섬을 침공하여
대만을 최초로 중국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
▲ 배를 타고 직접 대만 순행길에 나선 강희제
그렇다면 이후로도
대만은 사탕수수의 농장으로 '올인'되었을까?
사실 중국인들도
단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1인당 설탕 섭취량은
여전히 중국이 유럽인들보다 많았을 정도였다.
"그랬어?"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광둥성이나 푸젠성을 중심으로
사탕수수 농업이 활발히 행해져 왔으니깐."
"아! 역시 중국은 대륙이네."
하지만 청나라는 대만을 점령한 후에
원주민들에게 철저히 자율권을 주었고
굳이 설탕 농사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쌀농사를 권장했을 정도다.
▲ 대만 원주민
또 숲을 보존해야만 원주민들이
이전의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래야 원주민들이
불만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대만 원주민
이런 역사적인 면면을 보면
동양이 서양에 비해
비록 근대화는 늦었지만
훨씬 인간다웠던 것 같다.
그런데 만약
만주족이 침입하지 않았고
또 정성공 같은 인물이
대만으로 거점을 옮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대만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필리핀과
굉장히 유사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참고 문헌 :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사이토 다카시), 경제사 오디세이 (최영순), 설탕 커피 폭력 (케네스 포메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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