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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영국의 성공 비밀 :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탄생했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10550652
● 해적과 여왕 : 가난한 영국을 구원하다

중세시대까지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고

유럽의 역사에서 영국을 거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영국은  

국력도 약하고 인구도 적은
볼품없는 유럽의 변방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 
유럽의 인구는 이러했다.


게다가 14세기 이후로 유럽에서는
소빙하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기후는 점차 추워졌고
척박한 땅에는 농사 짓기도 불리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영국인들은 
영국이 번영하는 길은

섬 밖으로 나가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 100년 전쟁 (1337~1453) : 프랑스의 포도농장을 빼앗고자 했던 영국군대

하지만 대륙에서는
강력한 프랑스가 버티고 있었고

바다에서는 이미 신대륙을 발견하고
대서양을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영국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놔, 깝깝하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면
영국은 막강한 군대를 갖춰야만 했지만

사실 
군대도 부실했다.

"돈이 없는데, 
군대가 강할리가 없지."

하지만 영국에겐 충직한 해적들이 있었고
또 융통성있는 군주가 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들의 활동을 부추겼지."

"해적들에게 배도 만들어주고
무기랑 식량도 지원해주면서.."

"열심히 스페인 무역 상선을 
털어주길 바랐어."

 
"헐! 국가에서 도둑질을 지원하다니."

"하지만 그런 식으로 
스페인의 힘을 빼놨기 때문에,"

"나중에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임." ☞참고

 
"하긴, 힘이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상대하려면 
이런 것도 한가지 방법이겠네."

결국 해적들의 힘, 
행운이 곁들여져서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게 되었고

이후 영국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빠르게 대외로 진출하며 급성장하게 되었으니

여왕은 
재위기간 45년 동안

영국을 유럽의 극빈국에서 
최강국의 반열로 올려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이 그토록 
여왕을 칭송하던 이유가 있었군."

"맞아. 독일의 비스마르크, 중국의 강희대제,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견줄만한 인물이지."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른 입지적인 영웅들과는 달리
스스로는 그다지 포스가 없었어."

 
"왜? 
여자라서 그랬던 거임?"

"아니, 원래 영국의 전통이 그랬어."

사실 영국의 군주는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전제주의적인 통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당시 셰익스피어는 여왕이 자신의 연극을 
자주 관람하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매번 군주의 모습을 포악하게 묘사하곤 했을 정도였으니,
▲ 당시의 극장

왜 그랬냐고 그에게 물어보면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셰익스피어
"나는 리얼리티 드라마를 추구한다능.
왕도 어차피 똑같은 인간인데 뭘.."

하지만 여왕은 결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금지시킨 적이 없었다.

 

심지어 햄릿 같은 작품 중에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인'이라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여왕을 도발하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무 반응없이 
관람석에 앉아서 관람만 했을 뿐이었다.

 
"동양의 전제왕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유럽에서도 
흔치 않았던 광경이야."

그랬다. 영국 군주들은 
오히려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고

때문에 수많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대헌장 : 영국이 합리적 사회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

영국의 군주들이 만인에게 
관용적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국의 뿌리 깊은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전통은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에
300년 전부터 내려져왔던 산물이었다.

11세기 중엽 윌리엄 1세가
영국 왕실을 건국한 이후

 윌리엄 1세 

영국은 여느 유럽의 대륙과 마찬가지로
봉건제도 체제에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유럽의 봉건제도는 
장원이 기본 단위이고.."

"영주는 장원에 대한 
사법권+행정권+군사권까지 있었기 때문에,"

"장원은 사실상 
하나의 독립된 왕국과도 같았지."

▲ 중세 영국의 장원

때문에 봉건제도를 따르고 있던 
영국 역시, 권력은 

대단히 분권적이었고
국왕의 힘은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3세기 초 존 왕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질서가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존 왕에게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프랑스에 있었는데.."

 
"그런데?"

"무능력해서 
땅을 다 빼앗김." 

"그래서 존 왕의 별명을 
'모든 땅을 잃어버린 군주'로 부를 정도였지."

 
"꽤나 치욕적인 별명인데.."

"그래서 존 왕은 자존심이 상했어.
전쟁을 계속해서 땅을 되찾고 싶어했지."

 
"어떤 방법으로?"

"세금을 팍팍 올려서 
군자금을 마련해서 전쟁을 하려고 했지."

때문에 전쟁을 위한 
돈이 필요했던 존 왕은 

상속세를 100배 넘게 인상했고
병역 면제세를 15배나 올렸다.

하지만 존 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세금을 만들어 냈고

 존 왕 
"아놔, 돈이 필요하다고!"

결국 제후와 귀족들은 
폭발하고 말았다.

"아놔, 언제부터 영국이 
국왕이 지맘대로 독재하는 나라가 됐지?"

 
"맞아. 우리가 섬나라여서 독특하기는 하다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잖아."

결국 화가 난 귀족들은 
국왕에 반항하며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리고 전쟁에서 
존 왕은 패배하고 만다.
 

그리하여 
1215년 6월 15일.

막다른 길에 직면한 존왕은
귀족들과 어쩔 수 없이 협약을 맺고 말았다.
▲ 대헌장에 서명하고 있는 존 왕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헌장'이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① 국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며 
타인의 권리를 착취하지 않는다.

 법정 판결 없이는 타인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착취할 수 없다.

"즉 국왕 맘대로 함부로 백성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었어."

"세금도 귀족들의 동의 없이는 
거둘 수가 없었고."

 
"헐! 13세기부터 
그런 법령을 만들다니 대단한데."

▲ 800년 전에 쓰여진 대헌장이다.

이후 대헌장은 3세기 동안 
40차례가 넘는 수정 보완 작업이 이뤄져서

군주의 독단을 막는 도구로 
끊임없이 활용되어져 왔다.

"영국인들의 대헌장에대한 기치는
후대 왕들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

 
"어떻게?"

"대헌장을 만들게한 당사자, 
존 왕은 워낙 이미지가 개판이라.."

"이후의 영국 왕들은 절대 
존(John)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거든."

"그래서 제임스 2세, 찰스 2세는 있어도
존 2세같은 이름은 없지."

어쨌든 대헌장은 이후 영국인들에게 
계약과 법제의 기본정신을 심어주게 되었고

영국은 그런 제도를 통해서
매우 합리적인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 전제군주를 꿈꾸다 목이 날아간, 찰스 1세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대헌장의 약정을 
철저히 준수하고 

왕권과 귀족간에 
균형을 유지해 갔기 때문이다.

비록 엘리자베스는 1세는 권위적이긴 했지만
독재자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 당시 영국의 의회

공인된 법과 규칙에 따라 
통치하려고 노력했고

귀족들이 원하는 쪽으로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사후, 영국의 군주들은
한사코 전제정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당시 유럽의 대륙에서는.."

"국왕과 부르주아 계층간에
왕권신수설과 중상주의의 교환이 오고가면서.."

"유럽 대륙의 군주들은
절대왕정의 지도자로 거듭나고 있었거든."


 
"아! 그래서 영국 군주들도
따라하고 싶었던 것이구나."

하지만 대헌장 전통에 물든 영국에서는 
그걸 그대로 따라하기란 힘이 들었다.

그런데 17세기 초 왕위에 오른 
찰스 1세 (1600~1649)는

 찰스 1세
"에헴!"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인물이었고
영토 확장에 대한 야심도 컸다.

"그래서 찰스 1세는 
야심을 실현시키기위해,"

 찰스 1세
"스페인, 프랑스와 종교전쟁을 일으켰는데
국고만 고갈시킬 뿐이었지."

 
"그래서?"

"전쟁을 유지시키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따라서 세금을 인상하려고 했지."

 
"어? 대헌장에 보면 
함부로 세금 인상 못하게 되어 있잖아." 

"맞아. 그래서 찰스 1세는 
의회를 강제 해산시켰어."

 
"헐!"

때문에 귀족들은 다시 대헌장의 정신을 살리고자
대대적으로 궐기를 하게 됐고

그리하여 의회파 vs 찰스 1세의 왕당파 간의
내전(영국내전, 1642~1643)이 대대적으로 발발하게 됐다.

 

그리고 전쟁은 
결국 크롬웰이 이끈 

의회파의 승리로 귀결됐고  
찰스 1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 목이 잘린 찰스 1세

 
"헉! 세금 좀 올렸다고 
국왕의 목을 자르다니.."

"맞아. 당시 영국이 아니라면 
전세계 그 어떤 곳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

그만큼 대헌장 정신이 영국인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크고 작은 궁정에서는 
소문을 듣고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 입헌군주제의 시작 : 민주주의의 근간

찰스 1세가 죽고난 이후 
의회는 크롬웰의 손에 들어 가지만

 크롬웰 

영국인이 기대했던 세상은 
결코 오지 않았다.

크롬웰은 
곧 군사독재를 실행했기 때문이다.

"아놔, 독재정치 짜증나.
차라리 찰스 1세때가 좋았지."

"그러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사실 1인 독재에대한 
반항에서 시작된 혁명이

또 다른 이의 독재로 이어졌던 사례는 
역사적으로 매우 흔했으니,
 

결국 크롬웰은 찰스 1세가 했던 것처럼
1653년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크롬웰이 죽자
영국인들은 

민간인 정치로는 답이 없다고 느꼈고
다시 왕정으로 복고하게 되었으니,

"발전 뒤에는 
반동(反動)이 있기 마련이지."

1658년, 하필 왕위에 오른 군주는
찰스 1세의 아들, 제임스 2세였다.

 제임스 2세 
"난 아버지처럼 
허무하게 당하기 싫음."

그래서 제임스 2세는 집권 후
꾸준히 군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런데 당시 영국 국민들은.."

 
"지난 내전의 후유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원치 않았어."

"그래서 그저 제임스 2세가
이성적이고 관대하게 정치를 해주기만을 바랐지."

 
"그런데?"

"역시 부전자전이라고 
그 또한 능력이 부족한 군주였어."

특히 제임스 2세는 
카톨릭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절대 다수가 개신교를 믿고 있던
영국인들에게 커다란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의원들은 또 다시 
독재 정치를 갈아엎을 준비를 하게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전쟁은 겪어봤잖아."

"그렇게 쿠데타를 일으켜봤자
크롬웰같은 독재자만 양성할 뿐이고.."

"맞아. 평화적인 방법으로
왕한테 따끔하게 훈계를 해야함."

결국 의원들은 이런 식으로 의기투합하고
제임스 2세의 자진퇴진을 강요하게 되었고

그러자 제임스 2세는 
식은 땀이 절로 났다.

 제임스 2세
"아놔, 이러다 
나도 아버지처럼 목이 날아가겠네."

결국 제임스 2세는 
야반도주를 했고

이번에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혁명을 성공시키게 됐다. 

"이게 그 유명한 명예혁명이지.(1668년)"

이후 영국은 왕권 국가를 종식시키고
☞권리장전이라는 법령을 만들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해나가게 된다.

 
"입헌군주제가 뭥미?"

"의회가 왕권보다 
더 높은 권한을 갖는 정치."

 
"아! 의회정치를 뜻하는구나."

그렇다면
당시를 살펴보자.

조선은 예송논쟁(1659년)으로 
'왕이 상복을 몇년 입느냐'는 문제로

정치인들이 당파 싸움으로
국력을 소진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의 
작은 섬나라에 있던 정치인들은

'의회정치'라는 오늘날 민주정치의 근간을 
실현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1688년 영국 의회


● 항해법과 삼각무역의 독식 : 자본주의의 근간

1588년 스페인과의 해전 승리부터 
1688년 명예혁명까지, 정확히 100년 동안

영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실현하고 있을 무렵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변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스페인을 격파시킨 이후, 영국은 빠르게 해상권을 장악하고
해외식민지를 개척하게 되었지."

그리하여 17세기 후반이면
대외무역은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가 되었고
 
▲ 17세기 영국 상선

농업국가였던 영국은
상업과 수공업 위주로 변모하게 되었으니,

당시 프랑스 사상가인 볼테르는 
나날이 발전하는 영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볼테르 
"오늘날 영국을 
강대하게 변화시킨 것은,"

 볼테르
"국왕을 단두대로 보냈던 정치인들이
해외무역 일에만 온종일 신경 쓰느라.."

 볼테르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 변화에 
집착할 겨를도 없이

영국의 경제는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1651년 영국의 국회는
'항해법'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항해법이 뭥미?"

"영국과 그 예속국가들이 
화물을 수입할 때면.."

"반드시 영국 선적이나 수출국 선적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임."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 일임?"

"당시에 화물운송은 전적으로 
네덜란드 상선이 도맡아 했거든."

"그런데?"

"영국은 강압적으로 네덜란드에게
자신들의 항해법을 받아들이도록 했기 때문에,"

"항해법의 적용은 사실상 유럽 전역의 화물 운송을
영국이 도맡아하겠다는 심보와도 같았어."

▲ 네덜란드 상선

"완전 영국만 이로운 조항 아님?"

"이미 영국이 
해상에서 세계 최강이었으니깐."

"이제 자기들이 국제적인 룰을 만들며 
다른 나라에게 강요할 차례가 왔던 것이지."

"아! 힘이 곧 법이군."

당시 영국인들의 눈에는 프랑스 외에 다른 국가들은
이미 적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 
서인도제도, 서아프리카라는

삼각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라는
'삼각무역'의 대부분 수익을 독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벌어들은 수익으로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전통 시대 '경제 발전의 바로미터'는
인구의 증가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16세기 후반 500만명에 불과했던 영국의 인구는
18세기 후반이면 1500만명에 육박하게 되지."

"2세기만에 인구가 
3배 증가했다니 대단한데!"

또한 상업과 무역을 중시하면서
영국인들에게는 

개방적인 사상이 
폭넓게 자리를 잡게 되었고

누구나 노력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게 된다.

"신대륙이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으니.."


● 7년전쟁 : 영국, 유아독존이 되다

17세기 후반 명예혁명 ~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전까지

1세기 동안의 영국은 그야말로 
삼각무역이 가져다주는 돈 맛에 듬뿍 빠져 있었으니,

어느덧 사회는 부의 창조와 이윤추구를 
최대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고

영국인들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곧 신의 뜻에 따르는 길이라 믿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돈버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헐! 당시 조선과는 
완전 반대인데?"

"그렇지. 
당시 조선은 상업을 기피하고.."

"이윤 추구를 죄악으로 삼았고
폐쇄경제를 지향하고 있었지."

당시 영국은 전세계 해상무역의 절반 이상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 무역 거점

모든 유럽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영국이 승승장구하는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 국민들은
자연스레 정부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어."

"그래서?"

"무역에 종사하는 영국인들은 
해군의 쉴드가 필요하기 때문에.."

"기꺼이 정부에 
세금을 낼 용의가 있었고,"

"또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국왕의 사치나 부정부패로 
도용될 염려도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

▲ 17세기 영국 해군

때문에 영국은 18세기 초반 
프랑스, 스페인과 한창 전쟁 중일 때에도

상인들의 
헌신적인 헌납으로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군자금 조달로 인한 곤궁을 겪지 않아도 됐다.

"정치가 투명해지면
이런 장점도 있구나!"

그런 영국의 힘은
1763년 7년간의 영국-프랑스 전쟁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 7년 전쟁

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영국은 
더 이상 주변국가들을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다."

즉 영국은 더 이상 
유럽의 한 국가가 아니었고

더 이상 독일, 프랑스, 러시아와 같은 나라는
영국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영국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스스로를 최강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영국-프랑스의 7년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지위는 일대 격상했지."

"당시까지 프랑스가 일반적으로
유럽의 최강국으로 인식됐거든."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2,500만명으로 유럽 최고였다.)


● 뉴턴의 과학혁명 : 산업혁명의 근간

17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중세의 자연관, 세계관에 반하는

여러 자연철학적 사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산업혁명'을 본따 흔히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당시 유명한 과학자가 누가 있는데?"

"뉴턴, 갈릴레이, 데카르트. 케플러.."

"에게.. 솔직히 많은 수도 아닌데
과학혁명이라고 하는건 너무 하지 않음?"

"맞아. 
그래서 명칭에 대한 논란이 좀 있어."

"하지만 이 시기의 
과학적, 수학적 지식이,"

"이후 산업혁명을 일으키는데 
이론적 토양이 되었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는거임."

"또 무엇보다 '뉴턴'이라는 천재 과학자가 활동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강조하고 있는지도 몰라."

"뉴턴이 그렇게도 대단해?"

"뉴턴이 없었으면 
산업혁명도 없었을 거란 말도 있어."

"헐!"

도대체 뉴턴이란 인물은 어떠했길래 
그토록 대단하게 취급한단 말인가?  
 아이작 뉴턴 

"뉴턴은 자연 현상을 
수학적인 법칙을 이용해서 설명했지."

"만유인력의 법칙, 
운동의 3대 법칙 등의 이론들은,"

 
"인류가 이룩한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들이지."

"또 뉴턴은 미적분을 창시한 
수학자로서도 유명하고."

"와! 그랬어?"

그런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뉴턴
"모든 자연계는 규칙에 따라 존재하며
그런 규칙은 측정될 수 있는 것임."

때문에 뉴턴의 발견은 인류에게 
전에 없던 자신감을 가져다주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말인가?

그동안 인류는 종교의 지배를 받으며 
피동적으로만 살아가는 존재였지만

뉴턴의 말에 따르면, 자연도 물건처럼 
측정될 수 있는 존재일 뿐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이용할 수 있는 존재라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맑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칼 맑스
"뉴턴의 발견 이후 
100여년 동안 창조된 인류의 생산력은,"

 칼 맑스
"이전 모든 역사가 창조한 
전체 생산량보다 많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뉴턴의 사상은
어느날 갑자기 뜬금포가 터진 것일까?

만약 뉴턴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났어도

그의 이론이 후대에 깊은 감명을 주고
혁명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럴리가 없잖아!"

그렇다. 당시 영국은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사상을 
중시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뉴턴은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해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고

또 그런 뉴턴을 
영국 왕실은 마땅히 존중하고 

국가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었던 터이다.
 

심지어 뉴턴이 죽자
영국 왕실은 융숭한 국장을 치렀고

그는 과학자의 신분으로 최초로 
왕실의 묘지였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게 된다.

또 그의 장례식 날에는
만여명이 넘는 일반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과학자의 마지막 모습을 
추모했을 정도다.

한 국가의 과학자에 대한 태도와
과학에 대한 태도가 이런 수준이었던 것이다.


● 초과수요의 시대 : 수차 방직기의 등장

18세기 영국인들은
식민지의 확장과 

해외무역의 확장으로 
돈이 넘쳐났다.
 

하지만 쌓여가는 돈의 속도만큼
상품의 공급이 따라오질 못했다.

수공업 생산으로 
지탱하던 생산 능력은

더 이상 부유해진 영국인들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 18세기 영국인들의 식탁

때문에 18세기가 되면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인들은 거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방법을 찾으려 했으니,

당시 영국의 한 방직업자는
런던의 대리상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신이 만든 옷들은 수량이 얼마인지 상관없이
내가 몽땅 다 사겠소."

"그러니 얼마나 많이 
만들 것인가만 생각해 주삼."

당시 이런 초과 수요의 양상은
무엇보다 방직업에서 나타났다.

"이유가 뭐임?"

"의식주는 생활에 기본이니깐."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기호품, 곡물만큼
의복은 빨리 만들어지지 못했던 탓이지."

때문에 당시에는 더 빠른 속도로 생산하기 위해 
장인들의 지혜가 총 동원되기 시작했고

발명품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영국은 점차 산업혁명의 도화선에 접근하게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뚝딱 
산업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이야."

"왜?"

"당시 영국인들은 산업혁명 전에 풍차와 수차를 이용해서
여러 방직기들을 만들기 시작했었거든."

 
▲ 수차를 이용한 방적기

"어? 이것도 굉장한데.
왜 굳이 증기기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

"수차를 사용하면 강의 하류 주변에만
공장을 세울 수 밖에 없어서 한계가 있었거든."


● 지적재산권 : 제임스 와트를 낳게하다

1773년 3월 제임스 와트는
회사가 부도나고 쫄딱 망해서

러시아로 
이민을 가려고 하고 있었다.

 와트 
"딸린 자식들만 6명인데, 안정적인 수입이 떨어졌으니
이젠 뭐 먹고 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러시아로 가지 않았던게
천만 다행이었다.

당시 수학자이자, 엔지니어였던 와트에게 
일확천금을 가져다 줄 나라는

전세계에서 영국 외에는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뜻임?"

"당시 영국은 특허제도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발명가들이 보호를 받고 있었거든." 

사실 특허제도는 16세기에 처음 시작되었지만
17세기까지는 신청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특허가 보편화되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였다.

▲ 18세기 초의 특허권

당시 특허의 목적은 
발명품과 발명자를 보호하고

새로운 발명품임을 
인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발명자에게는 
약 15년 정도의 보호기간을 부여해서

이 기간 동안 발명품을 보호하고 
그 누구도 함부로 복제할 수 없게 하였다.

 
▲ 18세기 후반의 특허권

때문에 증기기관의 특허를 통해
말년에 와트는 매우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헐! 이런 특허제도가 
당시에도 있었다는게 놀라운데!"


● 자본가(공장주) : 산업혁명의 물주

사실 18세기 영국은 공업 기술에 대한 
전 국민적인 숭배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고

이들 중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인 것은 
영국의 부르주아 계층들이었다.
 

기술과 발명은 그들과 
가장 밀접한 이익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계층을 당시에는 '공장주'라고 불렀으며
오늘날에는 '자본가' 혹은 '기업가'라고 부른다.
 
▲ 19세기의 자본가들

그런데 그런 자본가들 중 
1773년 제임스 와트가 러시아로 떠나기 전

와트를 만류하며 
영국에 붙잡아 둔 위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매튜 볼튼이었다.
그는 와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매튜 볼튼
"발전기를 만들어보려는데.."

 매튜 볼튼
"님이 수학, 엔지니어링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으니
저 좀 도와주삼."

 매튜 볼튼
"내가 당신이 필요한 투자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고,"

 매튜 볼튼
"나중에 당신 제품을 
전세계에 소개할 것임돠."

그러자 와트는 기꺼이 수락했고
증기기관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와트 이전의 기술자들도 
이미 증기 기관에 착안하여 발명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그런 증기기관들은 무겁고 투박한데다
열효율량이 뛰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와트는 전통시대의 기술쟁이들마냥
무대포 식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됐음."

"그게 무슨 뜻임?"

"와트에게는 뉴턴을 통해 이룩된 
과학, 수학적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실린더의 열효율을 정확히 계산해낼 수가 있었거든."


결국 18세기 후반 영국의 산업혁명은
특허권의 보호 + 자본가들의 투자 + 과학이론

이라는 정치+경제+과학의 3박자가 이뤄낸 
복합적인 산물이었던 것이다.


●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 자본주의의 시작

와트의 증기기관이 
발명되자

영국은 이미 선두에 있던 자리에서
더욱 더 앞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증기기관을 응용한 
여러 대량생산 기계가 만들어지게 되자

영국은 빠르게 
분업화 사회로 나아가게 됐다.
 

"이전에는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공정을 책임졌던 일을," 

"전문화된 제조공정으로 나누면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공정만 계속 반복하면 되는 것이었지."

"어? 모던 타임즈에서 나사만 조이던 
찰리 채플린을 말하는건가?"


"맞아. 
한 사람이 핀을 만드는데 있어.."

"모든 공정을 혼자서 한다면
하루에 3개의 핀 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만약 여러 명이 하나의 공정만을 도맡아 한다면
1인당 100여개의 핀을 만들 수 있다는 실증도 있었지."


그렇게 경제적 '분업'을 주장하던 이는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였다.

그는 1776년 '국부론'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아담 스미스 
"사람들이 경제 활동을 하는 동기는
철저히 개인의 이익추구에 있다."

 아담 스미스
"도살업자나 양조업자, 제빵사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은,"

 아담 스미스
"그들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로부터 이윤을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개인들이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갈 때

경제 전체는 
쓸데 없는 낭비 없이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담 스미스의 이런 철학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시장경제의 초석이다.

"쓸데 없이 정부가 나서서 
경제에 개입하는 것보다,"

"시장에서의 자율적인 거래에만 맡기면
그게 훨씬 더 자원을 낭비 없이 사용할 수 있고.."

"경제 전체의 소득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이었지."

이론이 발표되자
영국의 자본가들은 쌍수를 들고 찬양했고

이후 그들에게 아담 스미스의 이론은
일종의 바이블과도 같았다.
 

그들이야말로 아담스미스의 이론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라능!"

또 이런 자본가들이 영국 의회의 
대다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영국은 국가 정책에 있어서도
철저히 시장경제(자유방임) 체제를 추구하게 된다.


● 자유무역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19세기 초에는 
이웃나라 프랑스도

영국의 성공을 벤치마킹하면서
빠르게 근대화 작업을 이루게 되며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 등장하자
한바탕 전유럽을 흔들어 본다.

하지만 그런 나폴레옹의 야심도
1815년 영국인 웰링턴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영국 군대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의 승리'라고도 
평가했다.

웬 시장경제?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나폴레옹은 유럽을 휘젓고 다니면서도
영국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엄격한 
봉쇄정책을 시행해도
 

영국의 상품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입었던 군복 역시
영국제 면방직 제품이었다는 사실."

당시 영국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군복과 무기들을 팔고 있었다.

솔직히 온 유럽이 영국에서 
물건을 사들였던 때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했으니, 결국 전쟁을 하면 할수록
영국에게는 돈이 쌓여갔던 것이다.
▲ 나폴레옹 군대

그 결과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세계 어느 국가와도 

비교도 안 될만큼 
세계 최강의 산업대국이 되어버렸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네."

하지만 이후에 
영국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우리 물건을 수입하지 않겠다면 어쩌지?"

"수출이 끊기면 
국내 공장들이 문을 닫고,"

"그러면 실업자들 문제도 장난 아닐테고..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지는데."

"어? 이거 안되겠어.
무슨 조치를 써야지."

그렇게해서 영국인들은
'자유무역' 정책을 부르짓게 되는 것이다.

"보호무역 그거 최악이야.
너희들도 아담 스미스 책 좀 보라고."

"우리도 공장 만들고 산업 일으켜야 하는데
너네 물건만 수입하면, 우리는 언제 성장함?"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나오면
영국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한사코 우기며

심지어 무력을 사용해 
차례로 대문을 열도록 만들었다.

▲ 아편전쟁

그리고 자유무역의 탈을 쓴
신속한 확장으로 

영국은 곧 
'해가 지지않는 제국'이 되었다.
▲ 19세기 후반 영국의 영토

1865년 영국의 경제학자인 
제본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본스 
"북미와 러시아의 평원은 우리의 옥수수밭이며
캐나다와 발트해는 우리의 숲이다."

 제본스
"호주는 우리의 양목장이며, 페루는 우리에게 은을 보내오고
아프리카와 호주는 황금을 보내오지. "

 제본스
"인도인과 중국인들을 
우리를 위해 차를 심고,"

 제본스
"우리의 커피와 설탕, 향신료 농장은
동인도 제도에 퍼져있다."

 제본스
"우리의 면화는 오래전부터 
미국 남부에서 재배됐지만.."

 제본스
"지금은 지구의 모든 
온난한 지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 세계의 공장

그렇게 해외 무역과 식민지 확장은
영국 공업화의 발전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때문에 19세기 중엽 
영국을 보면

과거와 같은 전원 풍경은 
더 이상 온데간데 없고

대신에 공장들이 들어서고
높이 솟은 굴뚝들이 어디서나 보였고

공장에서는 요란한 기계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퍼졌다.
 

1850년 무렵 영국의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60%를 넘었으며

철 생산량은 전세계 모든 국가의 
합계를 넘어섰다.

석탄은 
전세계 총 생산량의 2/3,

면직물은 전세계 총 생산량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산업화의 진전은 영국인에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꿔놓았는데,

당시 영국은 인류 최초로 
초를 단위로 정확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기차와 기관사는 
마차와 범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1830년에 민간 증기기관차가 
세계 최초로 철로 위에 투입돼 운행되기 시작하더니

1851년 영국은 22개 노선에, 
총길이 만3천km에 달하는 철로를 보유하게 된다.

중국의 역사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첸청단 북경대 교수
"산업혁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사회는 없었을 것이다."

 첸청단 북경대 교수
"산업혁명은 영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첸청단 북경대 교수
"그 강대한 공업생산 능력은 19세기 중엽까지 
영국 vs 전세계 구도로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다."


● 쇄락하는 제국

그러나 대영제국이 전성기에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을 때

국력은 
점차 쇄락하고 있었다.

갈수록 방대해지는 식민지는 
영국에게 점점 더 거대한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1911년 영국왕의 인도 방문

특히 19세기말 ~ 20세기초에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민족 해방운동의 고조로 
영국이 겪는 부담은 엄청났다.
 
▲ 세포이 항쟁 (1857~1859)

1850년대를 넘어서자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새로이 편입되는 식민지는
그다지 제국에 큰 이득이 되지 못했다.

"이유가 뭐임?"

"계속해서 관리,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손만 더 갈 뿐이었지."

1850년 이후의 
통계에 의하면

식민지에서 얻는 이윤보다
관리유지 비용이 더 많았다고 한다.

결국 1940년대에 이르자 
영국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① 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에 계속 막대한 예산을 소비한다.

② 식민지에 쓸 돈을 
차라리 본국 발전에 투자한다.

당연이 영국인들은 후자를 선택했고
대영제국은 해체되게 된다.

"사실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미국과 독일이 따라붙으면서.."

"세계 최강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지."

"그래도 작은 섬나라가 
한때 세계최강에 군림했다는건 대단해."

어쨌든 영국의 산업혁명은
한 순간 이루어진 역사적 우연이 아니었으며

수세기에 걸쳐 이룩해낸 발전의 소산이자
인류의 빛나는 유산이었다.



참고 문헌 :  강대국의 조건 (중국 CCTV), 종횡무진 서양사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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