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문화의 중심, 프랑스
조그만 나라들끼리 다닥다닥 붙어있는 유럽에서
프랑스는 꽤 큰 규모의 나라다.
면적은 서유럽 1위로
동유럽의 발칸반도 전체와 비슷하고
한반도 영토의
리즈시절로 꼽히고 있는
고구려의 최대영토보다 더 넓고
발해 전성기의 영역과 비슷하다.
프랑스 본토 : 55만 km2
(남한보다 5.5배 더 크다)
고구려 면적 : 40만 km2
발해 면적 : 60만 km2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프랑스는 면적이 꽤 큰 나라다.
"아프리카나 중동의 나라들은
겉보기에 면적은 꽤 커보여도,"
"기후나 식생 등을 고려하면
결코 사람이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니거든."
"그런데?"
"프랑스는 기후적으로 살기좋고
지형적으로 이용하기 좋은,"
"알짜배기 땅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임."
사실 프랑스는
국토의 70%가 평야와 구릉지대로
평지의 면적으로만 따지면
우리나라보다 무려 13배 더 넓은 나라다.
"헐!"
심지어 경작지 면적으로 따지면
프랑스는 무려 캐나다의 절반 수준이다. ☞참고
때문에 유럽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현재 세계 4위의 밀 생산국이기도 하다. ☞참고
▲ 프랑스의 밀밭
국토의 모양이
육각형 모양이라
작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풍부한 경작지로 인해
19세기 중엽까지는
서유럽 최고의 인구대국이었고
18세기 중엽까지는
러시아를 제치고 유럽 최고의 인구대국이었고
중근세 시대 1,000년 넘게
전세계 인구 랭킹에서 늘 3~4위를 차지하던 나라였다.
▲ 17세기 각국의 인구
게다가 인접국들이 하나같이
역량이 높은 네임드 국가들이어서
이들 나라로부터 프랑스는 꾸준히
발전된 선진문화를 전수 받으며
르네상스, 상업혁명, 산업혁명, 제국주의 등등
뭐 하나 시대에 뒤쳐지지 않고
빠르게 흡수하며 활용해 나갈 수 있었던
지정학적인 이점도 갖고 있었다.
▲ 1939년 프랑스의 식민지
경제력도 상당해서
오늘날 프랑스는
유럽 2~3위의 경제대국이고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다. (명목 GDP 기준으로는 5위)
국력으로 따져보면,
중세시대에는 유럽에서
신성로마 제국과 더불어
유럽의 양강을 형성했고
영국이 부상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로는
영국과 함께 유럽의 쌍두마차였다.
그러다 19세기 초에는 한때
유럽 대륙 전체를 제패하기도 했었다.
▲ 19세기초 프랑스의 직할령(짙은색)과 보호령(옅은색)
다만 19세기 후반 독일의 성장으로
자주 독일에게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지위는
단 한번도 강대국의 면모를 잃은 적이 없었으며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참고
▲ 오늘날의 세계 7강 : UN 상임이사국 + 일본 + 독일
영국과 더불어 200여년 동안 강대국의 위치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던 나라
특히 전통적으로
'문화 강국'이라는 인식이 강해
우리가 흔히 유럽의 문화로 알고있는 대부분은
실은 프랑스의 문화를 의미한다.
"흔히 프랑스를
유럽의 중국이라고 하는데,"
"중국처럼 프랑스도
지역 문화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임."
"그런데 요즘은 유럽의 짱개라면서
부정적인 의미로 변색되지 않았나?"
"맞아. 사실 두나라 모두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해서 조금 얄밉게 보이긴 하지."
어쨌든 프랑스 문화라함은
근대시대까지 유럽 귀족들의 로망이었고
영국의 국력이 정점에 이르렀던
19세기 후반까지도
영국인들은 프랑스에 대해서
문화적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을 정도였다.
요즘도 미국에서는 최고급 문화의 아이콘으로
프랑스 문화는 먹어주고 있다.
"미국의 대부분의 학교들은
제 2외국어로 스페인어를 배우지만,"
"부유층 사립학교에서는
불어를 주로 배우고 있다지."
"아!"
어쨌든 유럽 문화의 중심,
프랑스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곧 유럽의 문화를 이해하는
첫 단계이기도 하고
또한 오늘날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 고대 ~ 중세의 프랑스
고대 로마인들은 프랑스를
'갈리아'라고 불렀다.
원래 이곳에서는 BC 1세기까지
켈트족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 당시 갈리아의 켈트족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이곳을 점령하자
이곳의 많은 켈트족들은
대부분 야만족(바바리안)으로 취급을 받아
대거 노예로 끌려가야만 했다.
▲ 평균신장이 175cm에 육박했던 켈트족
"당시 켈트족은 평균신장이 165cm였던
로마인들보다 10cm 이상 더 컸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야민인들의 하드웨어에
상당한 위압감을 느꼈다고 하지."
"2천년 전 사람들의 평균키가
175cm라면 꽤 큰데."
이후 켈트족들은
로마문화에 동화되었고
▲ 2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영토
수세기가 지나면서
자연히 로마제국 속으로 융합되게 되었다.
▲ 켈트족의 농가
그러나 5세기 무렵 로마는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로마인들을 대신하여
갈리아 영토에는
게르만족 일파인,
프랑크 족이 쳐들어 오게 된다.
▲ 게르만족의 침공
"유럽대륙으로 쳐들어온
다른 게르만족 국가들은,"
"대부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곧 멸망하고 말았지만.."
"프랑크족이 세운 국가는
남쪽에서 침입한 이슬람 세력을 무찌르면서,"
"나름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만들며
수세기를 유지할 수 있었지."
▲ 게르만족
이후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을 대표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9세기초 샤를마뉴 대제는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하사받으며
맹위를 떨치기도 하였다.
▲ 샤를마뉴 대제
하지만 샤를마뉴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3개로 쪼개지며 분열되게 되었고
이 중 서프랑크는
오늘날 프랑스의 발원지가 된다.
그리고 이 시점에
중세 봉건제 사회가 탄생하게 된다.
"왜 하필
이때 생겨나게 되는거지?"
"당시 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이슬람, 바이킹, 마자르족, 비잔틴 등등.."
"외적들이 사방으로
침입해 왔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의 왕은 변경의 방어를 위해
영주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각각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하도록 했거든."
"이렇게 해서 장원들은 각자 군대를 보유하면서
점차 독립인 세력을 형성하게 된거임."
"아!"
하지만 그럴수록
왕은 무늬만 왕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영주들은 그저 왕국을
명분상으로나마 존속시키기 위해서
프랑스(서프랑크) 왕을
인정하는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14세기까지 프랑스 왕은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지만,"
"공적인 대표자를
누군가는 해야했기 때문에.."
"명분상 있었던
직책이나 마찬가지였지."
그런데 14~15세기 중에 프랑스는
영국과 100년 전쟁을 치루게 되면서
점차 민족 의식을 깨닫게 되었고
왕권은 차츰 강화되기 시작했다.
"100년 전쟁은 사실 대포의 성능이 좋았더라면
훨씬 빨리 끝낼 수 있었던 전쟁이었지."
"왜?"
"당시에 유럽에
갓 도입된 대포의 성능보다.."
"두텁고 높은 돌성벽의
방어력이 훨씬 뛰어났거든."
"돌성벽 때문에 지루한 공성전이 계속되면서
전쟁이 꽤나 루즈해졌던 것임."
"마치 1차대전의 참호전과
비슷한 양상이네."
"전쟁은 잉글랜드가 계속 주도하다가
결국 프랑스가 막판 뒤집기를 하게됐지."
"그때 잔다르크가
유명하지 않았나?"
"맞아. 하지만 당시 잔다르크를 기억하던
프랑스인들은 많지 않았는데.."
"나폴레옹 때 반영(反英)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새롭게 영웅으로 만든 인물이 잔다르크였다지." ☞참고
● 왕정국가 수립과 종교전쟁
16세기가 되면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고
프랑스는 봉건국가에서
빠르게 중앙집권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강력해진 왕권으로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막강한 권세를 떨치던
합스부르크가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녹색)
하지만 16세기 후반이 되자 프랑스는
심한 내홍에 시달리게 된다.
당시 유럽을
한바탕 휩쓸고 갔던
종교전쟁의 저주를
프랑스도 피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근대초기 있었던 종교전쟁은
한마디로 개신교와 카톨릭교 간의 마찰이 원인이었지."
"원래 프랑스는
카톨릭을 믿던 곳 아님?"
"맞아. 그런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소수의 부유계층(위그노)들이주로 개신교를 믿고 있었어."
"그래서?"
"카톨릭교도들이 어느날 난데없이
수많은 개신교도(위그노)들을 작살낸거였음."
"아무런 예고도 없이."
▲ 카톨릭 세력들의 위그노 학살
"그러자 프랑스는 겉잡을 수 없이
엄청난 내전에 빠지게 됐고.."
"결국 전쟁의 결과, 개신교 세력은 크게 와해되고
신도(위그노)들은 대거 해외로 망명을 떠났지."
"아!"
"그런데 부유층이던 위그노들이
해외로 모두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에.."
"이후 프랑스 경제는
심한 타격을 먹어."
"왜?"
"산업을 일으킬만한
돈 있는 부유층들이 모두 떠나버렸으니,"
"이후 프랑스의 경제발전은
크게 정체될 수 밖에 없었던 게지."
▲ 위그노전쟁 (1562~1598) : 우리나라의 임진왜란 시기와 겹친다
하지만 종교전쟁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종교전쟁은 20년 후 이웃한 독일에서도
대대적으로 발발하게 되었다.
▲ 독일의 30년 전쟁 (1618~1648)
"독일에서의 종교전쟁은.."
"카톨릭계였던 합스부르크 왕가 vs
개신교 세력간의 전쟁으로 펼쳐졌는데,"
"당시 유럽인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독일의 개신교 세력을 도왔었지."
"그런데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잖아."
"그래서 웃긴거임."
"프랑스는 종교보다는
합스부르크 세력의 약화가 더 중요했지."
"그래서 카톨릭을 믿으면서도
개신교 쪽을 도와 전쟁을 했었음."
▲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에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아! 역시 국제관계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심지어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
"이슬람세력인 오스만과
동맹을 맺기도 했었음." ☞참고
▲ 프랑스 - 오스만 동맹 (1530)
"헐!"
어쨌든 독일의 30년 전쟁의 결과
개신교도들의 승리로 끝이 났고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고
독일은 여러 군소국가들로 나뉘게 되었지만
반면에 프랑스는
강력한 라이벌 신성로마제국을 몰락시킨 대가로
유럽 최강의 국가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
● 루이 14세와 절대왕정
17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는
6살 짜리 꼬마가 새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 어린 시절 루이 14세
바로
루이 14세였다.
하지만 새 왕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가 섭정을 했고
나랏일을 전혀 몰랐던 그녀는
죄다 재상에게 처리하도록 맡겼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왕실의 권위도 크게 추락했다.
때문에 청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정무를 맡게된 루이 14세는
무엇보다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보쉬에라는 인물이
루이 14세에게 바람을 잡아줬다.
보쉬에
"전하, 왕의 권력은
신이 주신겁니다."
루이 14세
"정말임?"
보쉬에
"그럼요. 그러니 백성들에게
왕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게 하세요."
루이 14세
"오!"
보쉬에
"자, 그럼 외우세요.
왕권신수설!"
루이 14세
"왕권신수설!!"
이후로 루이 14세는
재상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국사의 결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따라서
그의 집권기 프랑스의 정치는
비록 관료들이 그의 일을
보조해주기는 했지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오직 국왕 한사람 뿐이었다.
또 전통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대신에
부르주아 출신들을 대거 관료로 발탁해서
자신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삼았다.
일종의 거래였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야심이 가득했다.
행정개혁으로 권력을 높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루이 14세
"내가 곧 국가임."
루이 14세
"적어도 알렉산더 대왕 정도의
치적을 나도 남겨야,"
루이 14세
"만인이 우러러 보는
군주가 되는거 아니겠음?"
사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었다.
"경쟁 국가들보다
중앙집권국가 체제가 발달되어 있었지."
"2천만명이 넘는 거대 인구는
독일+영국+스페인을 모두 합쳐야 맞먹는 수준이었지."
"또 거대 인구에 비례한
엄청난 농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었지."
때문에 그의 그런 자신감은
곧 대외 정복전쟁으로 이어졌고
▲ 40만 대군을 이끌고 간 네덜란드 원정
당시에 네덜란드를 돕기 위해 독일, 스페인들이 가세했다.
곧 벨기에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그런가하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화려함의 극치를 만끽하며
그는 여생을 즐겼다.
그야말로 절대왕정의 절정을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물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을 두고
영국의 시인 윌리엄 쿠퍼는 이렇게 말했다.
윌리엄 쿠퍼
"허영심에 가득찬
겉만 번드르르한 독재자."
윌리엄 쿠퍼
"평소 시간과 돈이 남아돌지만
생각없이 살아갈 때,"
윌리엄 쿠퍼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지
바로 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선대왕들이 싼 똥 치우기
야심가 루이 14세는
유럽을 통치하기 위해
집권 54년동안 무려 31년이나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으로
프랑스의 국고는 바닥이 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조세제도는 문제가 많았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 3개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지."
"그런데?"
"이 중에 성직자와 귀족은 소수의 계층이었지만
사회의 기득권자들이었어."
"그런데 이들에게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었지."
"헐, 조선시대 양반 꼴이네.
권리만 있고 의무는 지지 않았던."
"그에 비해서 평민은 의무만 있고
아무런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늘 불만이 많았지."
그런 와중에 프랑스는,
재정 부족을 해결하고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꾸준히 올리고 있었으니
평민들의 불만은
더욱 더 쌓여만 갔다.
▲ 17세기의 평민들
그렇다고
당시 프랑스에는
나라의 불합리한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기구나 제도도 없었다.
때문에 루이 14세 말기에 접어들면
재정난 + 민생고 + 정치적 불안 등으로
절대권력을 둘러싼 전반적인 시스템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바톤을 이어받은
루이 15세 역시 전혀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고
루이 15세
"아몰랑"
오히려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보단
더욱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재정난을
빚을 져서 해결했어."
"그럼 빚은 누가 갚어?"
"후임자가 갚겠지 싶었던 것이지."
"하지만 루이 15세 역시
빚 내고 빚 갚는 방식으로 틀어막으려 했음."
"뭐야! 돌려막기 잖아."
"맞아. 결국 폭탄돌리기였지."
그러다 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루이 16세
"헤헤.."
하지만 그에게 남겨진 일은
오직 선왕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는 일 밖에 없었다.
"루이 16세 때는 국가예산의 반 이상을
선대 왕들이 남긴 빚을 갚는 데 쓸 정도였지."
"헐!"
게다가
설상가상의 일까지 터졌다.
루이 16세가 즉위하고
14년이 흐른 뒤
가뜩이나
민생고로 지친 프랑스에
대대적인 가뭄까지 겹쳐
극심한 흉년이 발생한 것이다.
흉년으로 밀가루가 금가루가 되자
빵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시민들은 겨우 굶주림을 달랠 수 있었고
농민들은 늘어나는 세금을 부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소작농들은
지주와 귀족들에게도 토지세를 내야만 했고
아직까지 농촌에서는 1,000여 년 전부터 존재한
낡은 봉건세제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여러가지 잡단한 것들에 세금이 붙었고
그 중에는 소금세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도 예전같으면 관습적으로 거둬가게 했던
이삭줍기까지 막아버렸다.
"원래 유럽에서는
수확 과정에서 떨어진 밀 이삭은.."
"주인이 아니어도
가져가도 된다는 관습이 있었는데,"
"민심이 흉흉하다보니
이제 그것마저 못하게 한 것이지."
"와! 너무 했는데."
"때문에 당시 프랑스에는
기근으로 식인까지 횡행하고 있었다지."
하지만 이런 판국에,
루이 16세는 상황판단 못하고
영국을 견제하겠다며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하고 있었다.
아래는 200여 년전
당시의 모습을 그린 풍자화다.
▲ 평민의 세금으로 호의호식 하고 있는 왕족과 귀족들
● 프랑스 대혁명
루이 16세 당시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예전에 부르주아였던 이들로서
루이 14세, 15세때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된 이들이었다.
▲ 당시의 귀족
그런데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귀족
"전하, 더 이상 부르주아들이
귀족층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삼."
루이 16세
"왜?"
귀족
"계속 받아주면,
세금 받을 사람이 점점 줄어들잖아요."
루이 16세
"아! 맞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줄어들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하자,
부르주아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했다.
부르주아
"국가의 세금은 전적으로 우리가 다 내는데
이젠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단 말입니까?"
루이 16세
"아, 미안.
그럼 앞으로 귀족이랑 성직자들도 세금 좀 내라."
이러자 이번에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노발대발했으니,
결국 1789년 년 5월 5일
삼부회를 소집할 수 밖에 없었다.
▲ 당시 삼부회
"삼부회가 뭥미?"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들 나와서
회의를 하는거임."
"그런데 당시 평민들은
사실 소수의 부르주아들이었지."
하지만 당시 3개 신분 대표들의 요구는
한치도 양보가 없었다.
표결 방식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타협점은 차지 못했고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평민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장에서 모여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의회를 만들어서
헌법제정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세금 정책 바꿔!
공평하게 모두가 내는 것으로!"
하지만 이때 루이 16세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루이 16세
"뭐라고?
불법 집회?"
루이 16세
"군대를 풀어서
얼른 해산시켜!"
이렇게 무턱대고
무력 진압을 시도했으니
화가 난 부르주아들이
순진한 시민들을 꼬드겼던 것이다.
"민중의 고혈을 빼먹는
왕실과 귀족들을 처단하자!"
1789년 7월 11일,
프랑스 대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때 성난 프랑스 시민들은
먼저 저마다 동네 근처의 무기고를 급습해서
총기를 획득했는데
나중에 보니 화약이 없었다.
"아놔, 총만 있으면 뭐함."
그럴 때
누군가 말했다.
"내가 화약 있는 곳을 알지."
"거기가 어딘데?"
"바스티유 감옥."
"오케, 가는거야."
그래서
바스티유를 턴 것이다.
다만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항간에 알려진대로 '억압의 상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 전용의 '럭셔리 감옥'으로
또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혁명군에 의해 해방된 인물들 12명은
흔히 알고 있는 혁명투사, 시대의 저항가,
체게바라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 바스티유 감옥을 점거한 혁명군들
근친 상간하다가 잡힌 귀족,
어음 위조범, 정신병자 백작 들이 그들의 면면이었다.
하지만
혁명의 닻이 올라간 이상,
이들 귀족 범죄자들은
혁명군들에 의해 '혁명의 영웅'으로 미화되기 시작한다.
"동지, 그동안 혁명을 위해
모진 고초를 당했군요.."
"에헤헤, 마이 아파... "
그리고
다음날 아침,
루이 16세는 신하로부터
놀라운 보고를 받게 되고
루이 16세
"뭐? 반란?"
신하
"아, 아닙니다. 이것은 혀..혁명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프랑스의 최고권력은
국왕으로부터 국민의회로 넘어가게 되어
루이 14세가 세워놓은 절대왕정이
120년만에 종식되고 만다.
● 살롱과 커피숍 : 프랑스 대혁명의 환경적 토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라는 말이 있는데
영국의 산업혁명도 그렇지만
프랑스의 시민혁명 또한 그랬다.
"백성이 수탈을 이기지 못하고 나라를 뒤집었던 예는
프랑스 대혁명 전에도 많았어."
"어떤 게 있는데?"
"중국의 진→한나라 : 진승오광의 난
원→명나라 : 홍건적의 난, 명→청나라 : 이자성의 난"
"모두 농민반란이 발단이 되어 구시대의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게 되었지."
"그런데?"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지만
그래봤자 권력의 주체는 민중이 아닌 또 다른 왕이었어."
"그런데?"
"하지만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로는
왕정이 아닌, 민주정치가 수립되었다는게 독특하지."
"아!"
하지만
이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사실 의아스러운 점은
18세기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가장 국왕의 독재권력이 강했던
완고한 중앙집권국가였다는 점이다.
그런 프랑스에서
인류 최초로 민주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사회의
내면을 뜯어보면
사회 저변에서부터 토론과 강연의 문화가
널리 자리 잡고 있어서
사람들은 늘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쉽게 접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루이 14세 시기 프랑스는
건축, 미술, 연극, 무용 등 모든 분야에서
유럽 예술의 최고봉에 군림하며
막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불어를 쓴다는 것을 하나의 자랑으로 여겼고
또 모든 외교협약을 불어로 작성할 정도로
프랑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런 프랑스로 유럽의 최신 사상과 학문이
가장 먼저 접수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프랑스에서는
살롱(응접실)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귀부인들이 예술가와 사상가들에게
자기 집의 넓은 객실을 강단으로 내주었고
이들의 강연을 듣는 것은
당시 하나의 고급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파리에서는 '커피숍'이 들어서서
시민들이 모여 자유롭게 토론을 나누거나
강연을 듣고 소견을 들어내는 장소로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바로 이런 살롱과 커피숍을 통해
당시 프랑스인들은
유럽에 널리 퍼진 다양한 사상들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볼테르와 루소 :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토대
볼테르는 정도전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정도전이 불교의 타락과 비합리성을
철저히 증오했었다면
정도전
볼테르는 기독교의 타락과 비합리성을
철저히 증오했었다.
볼테르
정도전은 성리학에서 그 해법을 찾았다면
볼테르는 자연과학에서 그 해법을 찾았고
둘 다 철두철미하게 종교를 비판했지만
그러면서도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간과하고
기득권(사대부, 부르주아)층에 편승해서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 볼테르
즉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실은 부르주아 계층들의
귀족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던 사상이었다.
▲ 볼테르
그러다가 혁명을 위해 시민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시민혁명으로 치장된 것이다.
한편 정도전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맹자를 읽었다면
볼테르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뉴턴의 과학이론을 탐독하고 있었으니,
그는
이렇게 평했다.
볼테르
"듣자하니 요즘 사람들은.."
볼테르
"카이사르 vs 알렉산더 vs 징기스칸 vs 크롬웰 중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사람인지 논쟁을 벌이고 있다지?"
볼테르
"내가 보기에
이런 논쟁은 다 틀렸어!"
볼테르
"진정한 영웅은
저런 전쟁광들이 아니야."
볼테르
"우리가 존중하고
받들어야 하는 사람은,"
볼테르
"폭력으로 사람을 노예화하는 자가 아니라
과학적 진리로 우리의 두뇌를 지배하는 사람,"
볼테르
"바로 아이작 뉴턴과 같은 사람이어야 됨."
이렇게 과학자 뉴턴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볼테르의 합리적인 사상은
종교적 세계관으로
깊은 잠에 빠져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과학과 이성의 세계로 인도하게 해줬으니,
그의 사상은 곧 한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
18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는
이렇게 평했다.
칼 맑스
"볼테르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사람임을 깨닫게 만들었으며,"
칼 맑스
"이것이야말로
프랑스혁명의 내재적인 동기가 됐다."
한편 볼테르가 낡은 제도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다면
당대 또 다른 계몽사상가 루소는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으니,
그의 사상적 핵심은 사회계약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루소
"인간은 본시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인데
지금은 어디에서나 전제정치라는 사슬에 얽매여 있다."
루소
"하지만 국민에게는 혁명의 권리가 있고
사회계약을 창조할 의무가 있으며,"
루소
"이런 사회계약은
왕이나 권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루소
"바로 국민의 뜻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즉 볼테르가 '너희들도 인간이었다.'라고
눈을 뜨게 만들어줬다면,
루소는 '너희들 힘으로 국가를 만들라.'고 하면서
행동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볼테르와 루소가 각각 세상을 떠난지 11년 뒤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폭발하게 된다.
즉 시민혁명은 결코 하루 아침에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고,
계몽 사상이 가장 강성했던 나라에서
결국엔 행동으로 표출되고 말았던
매우 개연성 높았던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 공화국의 탄생, 그리고 공포정치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제1공화국이 탄생되었고
군주도 군주제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4개월 후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만다.
"프랑스도
영국처럼 왕의 목을 날렸네?"
"그래도 영국보다 144년 뒤에 일어났지.
원래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무슨 뜻?"
"사실 혁명 뒤에 프랑스도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를 실시했거든."
"그런데?"
"프랑스 국왕은 혁명군이 무서워서
해외로 피신하려다가 붙잡혔고,"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친정집(오스트리아)에 도와달라고
편지를 썼다가 들통나고 맘."
▲ 마리 앙투아네트
"그래서?"
"왕실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혁명군은 왕과 왕비 모두를 처형했던 것임."
▲ 루이 16세 처형
"아!"
어쨌든 그렇게 왕을 죽이고
공화정을 선포하더니
프랑스 시민들 사이에서는
일대 해방감이 폭발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자유에
너도나도 주체할 수 없었지."
거리 곳곳에서는
들뜬 시민들로 넘쳐났고
여기저기서
격앙된 연설가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귀족들에게
'선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서로를 평등한 대상이라고 하여
'동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런 군중들의 환호성은
얼마가지 못했다.
이웃나라에서 반(反)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넘들이 유럽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어!"
"맞아! 가만 놔두면 혁명의 불씨가
사방으로 번진다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이웃한 모든 유럽의 군주국가들과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때문에 환희로 들떴던 혁명정부는
커다란 위기를 맞아야만 했고
그런 과정에서
내부 단속을 꾀하고자 했던 혁명정부는
갈수록 공포와
독재정치로 변모되어 갔으니,
급기야 공화정을 선포한
수개월 후,
파리는 더 이상 혁명의 도시가 아닌
공포와 폭력이 만연된 도시로 변해버렸다.
"조금이라도 혁명군의 반역자로 의심되면
목이 날아갔던 시절이었지."
"독재를 타도하겠다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면 스스로도 어쩔 수 없어지는구나."
"그렇지. 오죽했으면 당시 시민들은
더 이상의 혁명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어."
당시의 공포정치가
어찌나 극에 달했는지
한 망나니는 38분동안 21개의 머리가 잘라
이 분야의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고
그렇게 전국적으로 약 4만명이
공포정치로 인해 집단 처형됐으니,
당시 혁명군들은
4년 전 자신들이 바라던
시민혁명의 기본 가치를
모두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
하지만 공화정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만든
혁명군 세력들은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일대 소탕되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으니,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프랑스 성인 남성 중 357만명의 찬성표를 얻어,
무려 99.9%라는
만화같은 지지율을 얻게 된다.
"99.9%라니..
암만 그래도 이게 말이됨?"
"당시 투표시스템을
100% 신뢰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혁명군들이 워낙 개판을 쳐서
민심이 이반했던게 커다란 이유였지."
즉 당시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지도자만이
혼란한 질서를 잡아줄 수 있다고 믿었고
또 나폴레옹이 공약했던 사상들이
프랑스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고
전 유럽을 정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1804년 그는
프랑스의 또 다른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로써 프랑스는
짧은 공화정의 실험을 마치고
프랑스 제 1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그간 프랑스를 도발했던 이웃 국가들과
차례로 전쟁을 치뤘고
가는 족족
승승장구를 하게 되어,
(사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프랑스는 징병제를 통해
대규모 병력을 얻을 수 있었고,"
"군인들은
애국심으로 불 타 있었거든."
"또 병조림이라는 획기적 전투식량의 개발로 인해
병참과 보급에서도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지."
▲ 이러한 병에 음식을 밀봉한 '병조림'의 개발로
군인들은 훨씬 간편하고 신속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인들에게
메시아적인 존재로 추앙받게 된다.
"혼란스러운 질서를 잡았지, 무너진 국가의 권위를 회복시켜줬지,
그야말로 구세주였지."
하지만 그는
여느 황제들과는 달랐다.
형식적으로 황제였지만
스스로 '만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법을 만들도록 했으니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나폴레옹 민법전'이었다.
"나폴레옹은 비록 황제에 올랐지만
그것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였지,"
"나폴레옹 스스로
프랑스 혁명 사상의 정신을 잃지는 않았어."
"그래도 민주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가 됐다니, 왠지 모순이 느껴지는데.."
"개혁을 위한 독재자였지."
"나폴레옹 시절 프랑스는 국민교육, 은행법 설립,
교통망 정비, 공업화 정책 등으로 대부국강병을 꾀하거든."
●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
1811년 반 프랑스동맹의 연이은 실패로
유럽 대륙은 프랑스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 19세기초 프랑스의 직할령(짙은색)과 보호령(옅은색)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 독일 + 스위스를 통치하고
그의 형제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국왕이 됐고
폴란드 사령관으로는
그의 부하를 앉혔다.
또 그가 점령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그에게 굴복했고
러시아 제국도 나폴레옹에게
꽁무니를 뺐다.
가히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느 정복군주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저 땅 따먹기에만
혈안이 된 정복군주였다면,"
"역사는 그토록
나폴레옹을 칭송할 필요가 없었겠지."
"뭐가 달랐는데?"
"나폴레옹의 군대는 전유럽을 지배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사방에 퍼뜨리고 다녔거든."
"아!"
"이렇게 훌륭한 사상을 위해
프랑스가 그동안 혁명일 치뤄낸 것인데.."
"그동안 너희들은 왜 몰라줬냐?
뭐, 그런 심리였지."
그리하여 나폴레옹 군대가 정복한 곳에서는
빠르게 봉건제도가 폐지되어 갔다.
하지만
그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러시아 원정부터
불행은 시작됐고,
워털루 전투의
참패를 겪은 후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한 외딴 섬에서
자신의 휘황찬란했던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의 동장군도, 영국의 자본주의 파워도
프랑스의 결정적인 패인은 아니었다.
그보다 나폴레옹이 참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프랑스가 전파한
대혁명의 자유와 평등정신에 있었다.
"읭?"
"사실 유럽의 피정복민들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계몽사상을 알게됐지."
"그런데?"
"생각해보니깐 자유, 평등 외치면서
정작 나폴레옹 군대는 피정복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거야.
"이런 건 나폴레옹의 정신과는 상반되거든."
▲ 피정복지 주민들을 살상하고 다녔던 나폴레옹 군대
"아! 그래서 피정복민들은
나폴레옹 군대에게 그토록 반항했던 것이군."
"맞아. 오히려 독이됐지"
때문에 피정복 국가들에서는
'민족주의'가 새롭게 싹트게 되었고
침략자 프랑스를 무너뜨리는
근본적인 원동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 나폴레옹 군대에게 저항하고 있는, 스페인 주민들
● 정치 싸움에만 매진하다가 '패가망신'한 프랑스
결국 나폴레옹의 패망은
프랑스에게 허망한 영광과 혼란만을 가져다줬다.
이후로도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의 봉기와 혁명은 끊이지 않아서
프랑스라는 나라는
마치 정치철학의 실험장과도 같았으니,
1789년 이후 60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프랑스는 총 4차례의 굵직한 혁명이 발생했고
그로인해 2개의 제국, 2개의 입헌군주국,
2개의 공화국을 거치게 된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1789년 시민혁명 : 제국 → 입헌군주국 → 공화국
1799년 나폴레옹 혁명 : 공화국 → 제국
1830년 7월 혁명 : 제국 → 입헌군주국
1848년 2월 혁명 : 입헌군주국 → 공화국
"헐, 복잡하기도 해라."
"그야말로 혁명과 복귀의 반복이었지."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혁명의 사상은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결국 프랑스는 1875년에서야
제3공화국을 탄생하고서야
마침내 기나긴 정치적 혼란을
타개할 수 있었다.
▲ 3공화국 출범 (1875년)
그러나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동안 정치적 이전투구에만 치우쳤던 나머지
경제적 성장이 뒤쳐지고 말았다.
▲ 1890년 1인당 GDP (2010년 달러가치 기준 : 매디슨 논문)
1870년부터 1913년까지 약 40여 년 동안
프랑스의 GDP는 2배 성장할 수 있었지만
같은 기간 중 독일은 5배,
미국은 8배나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의 시민혁명은
민중들에게 민주정치의 기치를 심어줬지만,"
"한번 왕정을 무너뜨리고 나더니, 시민들은 재미를 느꼈는지
너무 이쪽으로만 신경을 썼던게 패착이었지."
"하긴, 오랫동안 봉건질서 속에서
살아왔던 소시민들이었으니깐.."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짜릿한 재미였겠네."
하지만 경제적 부진은
곧 국력의 저하로 이어졌다.
그동안 늘 하수로만 생각했던 독일에게
1870년 프랑스는 탈탈 털려야만 했고
▲ 보불전쟁 (1870)
파리시민들은 굶주림에 지쳐
개, 고양이 심지어 쥐까지 잡아먹는 처절한 상황을 연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성장하고 있던 프랑스의 공업은
대부분 부르주아의 뱃속만 채워줬을 뿐,
서민 노동자들은
가난과 수탈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다가 발생한 1914년 1차 대전에서는
'마지노선'을 통한 참호전을 통해
겨우겨우 독일의 침략을
막아볼 수 있었지만
1939년에 터진 2차 대전에서
마지노선에만 몰빵했던 프랑스 군대는
독일군의 우회작전에 제대로 한방 먹고
영혼까지 털려야 했고
▲ 파리로 입성 중인 독일군
'비시정권'이라는
괴뢰정부가 세워져서
프랑스는 역사상
최대 굴욕을 맛 봐야만 했다.
● 난세의 영웅, 드골
프랑스에서
괴뢰정부가 수립되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샤를 드골이라는 군인이
농성을 하면서..
드골
프랑스 본토의 '레지스탕스'라는
저항운동을 독려하고 있었다.
▲ 레지스탕스
그리고 미국이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프랑스를 되찾자
미국은 샤를 드골과 레지스탕스들에게
대대적인 지위를 보장했고
2차대전이 끝나자 중국과 더불어
프랑스를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앉히게 된다.
"사실 그대로 무너질 수도 있는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은,"
"샤를 드골의 외교술과
미국의 지원 하에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대전 후,
겨우 나라를 되찾은 프랑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알제리, 베트남 등 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고 전쟁을 벌이다가
▲ 베트남에서 패퇴하고 있는 프랑스군 (1954년)
결국 실컷 얻어 터지고
물러나는 추태를 보였다.
▲ 알제리 전투 (1954년)
때문에 전임 대통령이 물러나고
1959년 드골이
대중적인 인기를 기반으로
프랑스의 새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이후 대통령이 된 드골은 무엇보다
경제 성장을 꾀하게 된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드골
"프랑스는 그간 낙후된 경제력 때문에
독일한테 그토록 두들겨 맞았던 것임."
드골
"경제력이 곧 국력임.
일단 경제부터 살리고 보자능."
그러면서 그가 주력하고자 했던 산업은
항공산업, 핵기술, 기계산업이었으니,
(물론 드골 이전부터 항공, 기계 산업은 프랑스의 주력산업이었지만)
특히 핵기술은
핵무기 개발과도 연계되어 있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핵무기도 없는 2류 강대국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어."
"그래서?"
"드골은 프랑스가 진정한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핵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때문에 한해 국방비의 25%를
쏟아붓는 강경책으로
1960년 프랑스는
기어코 핵무기를 손에 넣고야 말았다.
▲ 프랑스 핵실험 (1960년)
또 드골의 이런 정책으로
프랑스는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매년 5~7%의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게 된다.
(다만 당시는 세계적인 호황기였다.)
하지만 독단적인 핵무기 개발은
미국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고
전통적으로 꾸준히 우방으로 생각하던
프랑스와 미국의 외교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 독립전쟁은
프랑스가 도와줬고,"
"2차대전 때 프랑스를 구원해준 것은
미국이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꾸준히 사이가 좋았거든."
"그런데 핵개발로 나빠졌다는 거네."
"사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유럽을 완전히 자기 꼬붕으로 두려고 했었어."
"그래서 프랑스는 불만이 많았음."
때문에 드골 정부는 1964년 중국과
서유럽 국가들로는 최초로 수교를 하게 되고
1966년에는 급기야
NATO의 탈퇴를 선언하게 된다.
여기에 드골은 식민지 정책에서도 전면 손을 떼어
알제리의 독립을 허락하게 되고
이후 다른 해외의 프랑스 식민지들도
연이어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때문에 드골은 프랑스의 독립운동가로,
경제를 부흥시킨 인물로,
자주적인 외교와 국방정책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제고시켰던 인물로 평가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처럼
방대한 현대국가에서
한 나라의 정치·경제가
특정 인물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고
환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드골은 프랑스인들에게
훌륭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 문헌 : 프랑스의 역사 (다니엘 리비에르), 강대국의 조건 (중국 CCTV), 엽기 세계사 (이성주), 종횡무진 서양사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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