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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세계 인구의 1/3을 가졌던 나라 : 청나라는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했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226085024
청나라의 탄생

● 누르하치의 만주족 통일

만주족은 
초원의 유목민들과는 다르다.

삼림지역에 주로 살며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심지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던 민족이었다.
 
▲ 만주 서쪽(거란족, 선비족, 몽골족)  vs 만주 동쪽 (말갈족, 여진족)

이들의 조상으로 추측되는 여진족은
한때 중국의 화북지방을 지배하기도 했었다.

다만 12세기의 여진족이 
16세기 만주족의 진짜 조상인지는 미지수다.

그냥 만주족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 16세기의 여진족

중국인들 역시 만주 벌판에 살던 만주족들을
여진족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항상 경계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워낙 호전적이어서
1만 명이 뭉치면 처치 곤란해진다해."

이렇게 말하며
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만 명나라 입장에서 여진족들은 
몽골족을 견제하는 '이이제이' 역할을 해야했기 때문에


너무 세력이 약해져서도 안된다는 식으로
적절한 선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너무 강해도, 
약해도 안된다해."

때문에 중국인들은 여진족들에게 자치권은 주되,
강력한 세력으로 규합되지는 않게끔 적절히 통제하고 있었다.

방법은 
대략 이러했다.

만주벌판은 
춥고 척박하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여진족들에게
농산물과 옷감을 제공하고

여진족들에게는 산삼을 캐고 말을 기르고
사냥을 해서 모피를 만들도록 시켰다.

특산물 생산만을 주업으로 하게 해서
여진족의 경제를 예속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가 건국하고 200년 넘게 만주 벌판에는
그 어떤 세력도 강하게 성장하지 못했다.
 
▲ 16세기 당시 뿔뿔이 흩어졌던 여진족의 세력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는 미쳐 만주 벌판을 신경 쓰지 못했다.
 
▲ '불랑기포'라는 신식화포로 평양성을 공격하고 있는 명나라군

그리고 그런 허점을 틈타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나타나더니

야금야금 만주 벌판의 여진족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가 정신을 차릴 즈음에는 

이미 만주벌판은 모두
누르하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여진족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여진족 대신에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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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문수보살에서 온 말임.
그만큼 불심을 표방하려는 의미였지."


● 후금의 탄생

유목민들처럼
북방의 수렵민족, 만주족 또한 태생적으로 인구가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부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력 충원이 시급했고
이를 위해 이민족들을 유입해야만 했다.

따라서 누르하치는 몽골족과 중국인, 
조선인들을 가리지 않고 대거 수용했다.

오직 '변발'만 하면
만주족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주었던 것이다.
 

 누르하치 
"변발은 곧 만주족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능."

그리고 이들을 통해 낙후된 부족국가 조직을 
관료제 조직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누르하치
"조선인들에게는 농사기술을 배우고.
몽골인들에게는 글자를 배우자능."

그리하여 몽골 문자를 본떠 만든 
만주 문자가 탄생하게 된다.

▲ 만주문자

애초에 몽골 문자는 아랍 문자를 본떠
칭기스칸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누르하치
"중국인들한테는 정치 제도를 배우자능."

그리하여 명나라의 법전을 참고하여
만주족의 법전을 만들었고

중국의 행정제도를 모방한 
제도도 만들었다.

그렇게 국가의 모습이 갖춰지자
누르하치는 곧 국가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1616년)

 누르하치
"이제부터 우리는 
금나라의 대통을 잇는 후금이라능."

그리고 넘치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 영토인 요동반도를 쳐들어갔다. (1618년)

황량한 만주벌판에서도 
요동반도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로
비옥한 농토가 많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2만 명의 기병으로 기습을 가하자

요동반도의 중국인들은 
미쳐 손쓸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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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누르하치
"곱게 항복하면 벼슬을 주겠어."

그러자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황급히 항복을 했고

이때 누르하치는 화포를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을 특별히 우대해줬다. 

 누르하치
"명나라의 성벽을 때려부수려면 
우리도 대포가 필요하다능."

그렇게해서 만주족들은 
서양식 화포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고

화포로 무장한 만주족의 군대는 
이후 더욱 강성해져서

과거 요나라의 수도 요양을 점령하더니
만주지역의 최대 도시 심양까지 차지하게 된다.

 누르하치
"이제부터 심양이 새로운 수도라능."

그리고 곧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본토를 차지할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 했다.

명나라의 번성을 공격하다가 
그만 중국인들이 쏜 대포에 맞고 크게 부상하였고

이듬해 부상 후유증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누르하치를 죽게 만든 영원성 전투

하지만 만주족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후손들이 못다한 뜻을 이루리라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중원을 점령하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홍타이지(청태종)가 후금의 왕에 올랐다.
 홍타이지 

홍타이지는 누르하치가 그랬던 것처럼
정복사업에 대대적으로 몰두하여

몽골을 복속하고 조선을 굴복시키면서
동북아 변방에서 일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 삼전도의 굴욕

중국의 선진 문화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어서

어느덧 만주인들의 생활 모습은 
중국의 것과 비슷해져 있었고

정부의 관료와 군인들 중에서
중국인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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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당시 만주족들은 
더 이상 야만스러운 여진족의 모습이 아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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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조선사람들이 보고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

명나라 장군들이 부대를 이끌고 
집단 귀순하는가 하면

수십만 명의 몽골인과 조선인들도 
국가의 인력 자원으로써 새롭게 충원되고 있었다.
▲ 끌려가는 조선인 포로들

그리하여 건국 초기, 수십 만명 정도밖에 안되던 인구가
어느새 수백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홍타이지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淸)으로 변경하였고

중원 대륙을 점령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였다.
▲ 청나라의 팔기군

당시 중원에서는 이자성의 농민군이 
내란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명왕조의 힘은 
급격히 쇠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 이자성의 반란군

때문에 청나라가 만리장성 안 쪽으로 침입하기는 
이전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홍타이지
"조선을 굴복시켰으니, 뒤치기 당할 일은 없을 테고
이제는 명나라를 맘껏 쳐보는 거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군대는
만리장성을 넘어 대대적으로 남하했다.

그리고 이때 이자성의 반란군에 붙어
국경을 수비하던 '오삼계'라는 장수는 

머릿속에서 재빨리 
주판알을 굴리고 있었으니,

 오삼계
"암만 계산해봐도 전쟁의 승리는 
이자성이 아닌, 만주족 넘들이야!"

오삼계는 이자성을 배신하고
만주족에 붙어서 합심해서 공격하여

결국 이자성의 세력은 
만주족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 청나라의 지배 방식 : 변발로 충성을 보여라

중원을 장악한 만주족들은
충성심이 약한 중국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북경을 장악한 이후
모든 중국인들을 북경에서 내쫓았다.

환관들도 내쫓았고
그 자리를 요동 출신의 중국인들로 채워넣었다.

 도르곤 (어린 순치제를 대신해서 섭정) 
"변발도 안한 중국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런 다음 화북지방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몰수하였고

빼앗은 토지는 
만주족 귀족과 황족들에게 할당하였고

나머지는 
군인들에게 나눠주었다.

"땅을 차지했으니, 전리품이 있어야지."

그런 다음, 
변발령이 내려졌다. (1645년)

 도르곤
"서열과 직위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은 변발을 통해 복종심을 보여라!"

 도르곤
"기간은 열흘 준다.
그때까지 변발을 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간다능!"

이렇게 무시무시한 
포고를 내린 것이다.

만주족 정복자들은 변발을 통해 
누가 자신들에게 복종하고

누가 저항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머리만 깎고 
뒷머리는 땋아 내리는 변발에 

중국인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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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짜증!"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복종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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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발부수지부모라 했거늘 "

한편 북부와 달리
남부지역을 모두 정복하는 데는 이후 15년이 더 걸렸는데

남부 지역을 장악한 만주족들은
지역의 향촌 사대부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보장해 주는 
유화책을 폈다.

 순치제 
"겁 먹지 말라고. 예전이랑 똑같아."

하지만 이곳에서도 변발령만은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으니

양저우 같은 곳에서는 
변발령을 거부했다가 

무려 80만 명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파괴를 맛보기도 했었다.
▲ 80만명이 살해된 양저우 대학살



청나라의 전성기

● 전성기의 도래

누르하치-홍타이지-순치제 등 앞선 세 황제는
50년에 걸쳐 청나라를 일으킨 건국의 주역들이었다.
  

이후 1660년부터 1800년까지 근 140년 동안 
청나라는 단지 세 명의 황제에 의해 통치되게 되는데
    
이 시기 중국은 
전례 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두 명의 황제가 무려 60년씩을 통치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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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가 61년 재위, 
강희제의 손자 건륭제가 60년 재위."

평균수명이 낮았던 당시, 
60살까지만 살아도 많이 살았다고 하던 때에 

재위 기간만 
각각 60년을 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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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18세기초)
조선의 영조도 52년을 재위하며 안정기를 구가했었다능."

명나라와 비교해서 당시 황제들은
확실히 보다 근면했고

권력의 독단을 경계시하며 
자기절제를 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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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의 이민족이 100명의 본토인들을 지배하려면
황제는 나태할 수가 없었던 것임." 

또 황제들은 효과 없는 제도와 폐습들은
과감히 폐지할 줄도 알았다.

이는 황제 스스로 중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있었다.
▲ 강희제

그리고 이들의 재위 기간 동안, 만주족들은 
사회의 집권층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중국 사대부들의 지위를 다시 인정함으로써
황제는 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게 된다.
 

물론 자존심이 강한 
중국인(한족)이었기 때문에 

만주족은 항상 긴장을 놓칠 수 없었고
실제로 반란은 수시로 일어났다.

때문에 황제들은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내부 단속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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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통제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청나라 후반부는 막장이 되고 말았던 것임."

또 이 시기에 
정복 사업도 활발히 일어나

만주족의 발원지인 만주지역과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영역 외에도 

대만, 서역, 몽골, 티벳이
새롭게 청나라의 영역으로 편입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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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를 제외한다면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
오늘날 중국보다도 1.5배는 더 넓은 영토였음."


●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강희제

강희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뽑히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평소 사냥과 여행을 좋아하고 
변방의 성들을 둘러보기 좋아하던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 사냥 하는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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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터에서 호랑이를 쏘아 죽일 정도.."

그런가 하면 학문을 좋아해서, 
중국의 전통 학문은 물론 

서양의 수학·과학·기계장치를 배우는 데에도 
편견이 없었던 인물이다.
▲ 젊은 시절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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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토할 정도로 책을 읽었다고 함."

평소 신하들에게는 
도량 있고 인자한 군주였지만

매사 원리원칙을 따져 일을 처리하는 
꼼꼼함도 있었다.

게다가 중국인 관료들과 사대부들을 후원하여 
이들의 신임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그의 집권 시기에 만주족들은 사회 지배층으로서 
보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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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야 했기 때문에
고리타분한 유교 경전이라도 열심히 익혔음."

관리 임용에 있어서는
중국인과 만주인들을 두루 섞어서 기용했고

지방의 관리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에게 맡기면서도

이들을 총 책임 하는 고위직에는 
만주족을 앉히는 등 적절한 수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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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에게는 말단직만을 강요하던
원나라의 몽골인들과는 분명 다른 행보였지."

또 서양 학문의 실용성을 높이사서
서양의 신부들을 대거 예우했는데,

여기에는 콧대 높은 중국인 신하들을
서양학문을 통해 기를 꺾어놓겠다는 정치적인 속셈도 있었다.
▲ 산교사들과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

 강희제
"서양 역학이 중국 거보다 더 정확하잖아.
앞으로 서양인 신부가 황실 천문대를 관장하도록."

이렇듯 
강희제의 면모는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군주의 모습과 동시에 
주도면밀하고 계산적인 모습도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신생 왕조의 주춧돌을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민족으로서, 
자신들보다 100배는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창기 청나라의 황제들은
매사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됐다.

명나라 황제처럼 정사를 멀리하고 
자기 취미생활만을 붙잡고 있다가는

호시탐탐 이민족을 몰아낼 생각으로 가득한 중국인들에게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반란 세력의 진압 : 삼번의 난과 대만 정벌

강희제는 영토 욕심이 
매우 많았던 군주였다.

그는 정복 사업을 통해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제국의 국력을 성장시키고자 했었다.

때문에 국경선을 따라 주둔지를 확장시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참고로 그가 어떻게 제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는지를 확인하다 보면

오늘날 중국이란 거대한 나라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삼번의 난 진압 (1673) 

강희제 집권 초기만 해도 
청나라는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해

남부지역은 지방의 거물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었던 터였다.

특히 운남성, 광동성, 복건성의 이른바 삼번(三藩)은
거의 독립국가라고 할 만큼 자유롭게 할거하고 있었다.
▲ 당시 청나라의 영역은 황토색, 남부지역에서는 삼번 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중 운남성의 '오삼계'는 티벳과 연계하여
실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오삼계

때문에 강희제는 청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삼번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고

먼저 
광동성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오삼계는 
명나라를 복권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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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는 이자성을 배신하더니, 
이번에는 청나라도 배신하는군."

티벳의 달라이라마, 
대만의 정성공과 세력을 규합하게 된다.

 오삼계
"모두 힘을 합하면 
만주족에게 이길 수 있다능."

하지만 20살 약관의 황제 
강희제도 만만치가 않았으니,

그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솔선수범하며
이후 8년간이나 전선을 누볐고

결국 반란을
진압되어

장차 대만과 티벳을 쳐들어갈 
명분도 마련하게 되었다.

 대만 정벌 (1683)

17세기 초까지 대만은
말레이계 원주민이 거주하던 섬이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 무역업자들이 
관심을 갖고 이 섬에 들어왔다.
▲ 18세기 사슴을 사냥하는 대만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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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사탕수수를 심어서 
유럽으로 수출하자능."

하지만 유럽인들의 꿈은 
반세기를 넘지 못 했다.
▲ 당시 네덜란드의 무역거점

17세기 중엽 명나라가 망하면서
이 섬에 명나라인들이 대거 이주해 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성공이었다.
▲ 정성공, 그는 한족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었다.

그는 명나라를 회복한다는 대의에 불탔지만
실상은 해적이었고

대만에 들어온 정성공 일행은
네덜란드인들을 섬에서 몰아낸다.
▲ 항복하는 네덜란드인들

 정성공
"썩 꺼저!"

이후 대만섬에는 약 20년간 
10만 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이주하게 되었고 

대만섬(서양인들은 포르모사라고 불렀다)은, 
하나의 국가 단위 공동체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강희제의 눈에 정성공 집단은,
호시탐탐 영토를 침입하고 약탈해가는 해적의 무리들이었고
▲ 정성공 해적의 활동지역 

명왕조를 복원한다는 구실로
반청(反淸) 감정을 자극하고, 

국가변란을 일으키고 있는 
위협적인 세력일 뿐이었다.

때문에 삼범의 난을 진압한 강희제의 다음 타깃은 
당연히 대만섬이었다.

고로 강희제는 해군 원정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게 되었고
▲ 배를 타고 직접 대만 순행길에 나선 강희제

정성공 세력을 물리치게 되면서
대만섬을 청나라의 영토로 복속시키게 된다.

 강희제
"앞으로 대만을 복건성의 한 주로 삼겠다능."


● 대외확장 : 티벳·신장 정벌과 네르친스크조약

③ 신장 정벌 (1696)

만주족은 초기에 후금을 창건하면서
몽골족을 복속시킴에 따라

장차 북방 유목민족을 모두 통합시켜야 된다는 
또 다른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몽골족 반쪽만 흡수할 수 없어.
모든 몽골 유목민족들을 다 흡수해야지."

그런데 화약무기가 주류를 이루던 18세기에
더 이상 유목민족은 예전의 위용을 과시할 수가 없었다.

말 타고 쳐들어와?
그러면 총을 쏘면 끝난다.

때문에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청나라 군대는
말 타고 활을 쏘는 유목민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 청나라 군대의 신장성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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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땅 짚고 헤엄치기잖아."

그리하여 최후의 몽골계 유목민 국가였던,
신장성의 준가르족을 복속하게 되고

이로써 지난 2천 년간 중국인들을 괴롭혀온
북방의 방위 문제를 한순간에 종식시켜 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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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00 년전만 해도 
중국의 황제가 유목민에게 볼모로 잡혀가고.."

▲ 토목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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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들에게 
수시로 엄청난 조공을 갖다 바쳤는데 말이지."

④ 티벳 정벌 (1721)

대만을 정벌하고 신장성을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티벳이었다.

 강희제
"니들이 오삼계랑 손잡고 우리 땅을 노렸겠다!"

그리하여 청나라 대군은 
티벳의 험준한 산맥을 넘게 되었는데

역시나 화약 무기 덕택으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끝났다.
 

당나라 때만 해도 중원을 위협하던 
용맹스러운 토번의 후예들이건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말 타고 쳐들어와? 총을 쏘면 끝남."

그리하여 조공국가였던 티벳은
보호국으로 전락되고 말았고

이후 청나라는 티벳에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여
직접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만주족들은 신장과 티벳의 주민들에게는

변발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신장성의 이슬람교도와 티벳의 라마교도들에게
고유의 종교 지도자를 섬길 수 있도록 하였고

고유의 풍습과 문화를 유지하도록 하는 등
최대한의 자율권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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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변발령은 
중국인(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채찍질이었으니깐." 

⑤ 네르친스크 조약 (1689)

청나라가 강희제라는 걸출한 인물의 지도 하에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던 무렵

공교롭게도 러시아도 표트르대제라는
걸출한 인물이 러시아의 개혁을 주도하고 있었고

이들 역시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대와 러시아 군대는 마주쳤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서로는 강력한 힘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능."

"좋다능. 
대신 국경선을 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자능."

그리하여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호 호혜적인 조약을 체결하게 되니

이는 조공 처제라는 관습을 무시하는
최초의 조약이었던 것이다.

1689년 여름 네르친스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 양국은 조약을 체결했고

조약문서를 통해 만주어, 한문, 러시아어, 라틴어로 새긴
비석이 국경선에 세워지게 된다.

"○○ 북쪽은 러시아땅, 남쪽은 청나라 땅."

"양국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며, 
앞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은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



● 옹정제의 내치 : 내적인 충실과 국가의 안정

강희제는 일면의 빛난 업적 외에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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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사업을 하면서 재정을 너무 탕진했음."

때문에 후대 황제가 
이를 제대로 수습을 하지 못했더라면

강희제의 업적은 
결코 화려하게만은 치장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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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정복 사업 때문에 
나라의 재정을 망친 군주."

이런 지탄은, 역사를 통해서 
한두 번 확인해보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45세의 나이로 즉위한 
옹정제(1722-1736)의 내치(內治)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잇게 해준 
또 하나의 숨겨진 원동력이었고
▲ 옹정제의 젊은 시절 모습. 유희열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그 역시,
중국 역사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집권했을 때에는
귀족 세력의 힘이 강성했기 때문에

그는 내치(內治)를 위해서라도
황족과 측근을 숙청하고

군벌 귀족의 
군사력을 억제하면서

문민 관료제를 통해
중앙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었다.

 옹정제
"앞으로 전쟁은 없다.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국가 재정을 건전하게 하는 게 최대목표임."

그는 권력 강화를 위해 
자신의 형제마저 숙청했기 때문에 

흔히 '무자비한 군주'로 
인식되기도 한다.
▲ 서양식 의상을 하며, 가발을 쓴 옹정제

하지만 그런 불만에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

 옹정제
"이 한 몸을 위해서 
천하를 희생시키지 않으리라."

즉 관료와 측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대의명분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실 그는 
독재자라기보다 

구도하는 수도자처럼 
매사 심혈을 다해 정치에 임했던 인물이었다.
▲ 서양식 의상을 한 옹정제

그가 명군으로 
추앙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부정부패의 근절'과 
'국가 재정의 확충'에 있었으니

옹정제는 무엇보다 중국 사회에 수천 간 뿌리 깊게 박혀온 
관료제의 비리를 개혁한 군주였다.

특히 세금을 착복하고 뇌물을 횡령한 관리들은
가차 없이 재산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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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관료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게 말은 쉬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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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물론 전통시대 대부분 나라에서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개혁임."

여기에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많은 이유가
지나치게 낮은 봉급 탓이라는 걸 간파하여,

관리들의 봉급을 올려주었던 
현실적인 군주이기도 했다.

 옹정제
"대신 앞으로 
백성들한테 삥 뜯어먹을 생각하지 마!"


● 지정은제 : 국고가 채워지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옹정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진된 국가재정을 빠른 시일 내에 확충했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 비법을 파헤쳐보면 
너무도 간단했다.

어떻게 말인가?

중국은 전통적으로 '조용조(토지세+노동세+특산물세)'라는 
3가지 조세를 통해 재정을 확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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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조는 7세기 당나라 때
만들어진 세제방식임."

그런데 시대를 거듭하면서 
모순이 불거져

명나라에 와서는 모든 세금을 은으로만 내게 하는
'일조편법'이 시행되게 된다.

"앞으로 몸으로 때우는 부역세 없다해.
그냥 은(銀)으로만 내라해"

▲ 은화는 무게만 중요했기 때문에
그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도 말발굽 모양이 가장 흔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조선말까지, 
근본적으로 '조용조' 체제를 벗어나보질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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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세와 특산물세를 하나로 합한
대동법이 있던 정도.."

그런데 이런 '일조편법'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모순이 불거지는 것이 아닌가!

가장 큰 문제는 
땅이 없는 사람에게 징수하던 '인두세'였다.

전통시대 중국은 
GDP의 대부분을 농업생산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땅이 없는 사람들은 
소수의 상인(商人)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한 소작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인두세'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내게 했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소작인들은 
호적에 신고를 안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국가 재정은 
오히려 구멍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강희제는 이렇게 조치했었다.

 강희제
"앞으로 인두세 걷지 말고
그냥 땅 있는 사람한테만 은을 거두라능."

이게 바로 '지정은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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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되게 간단하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조세제도가
예기치 않은 효과를 가져다줬으니

그 결실을 수확한 이가 
바로 옹정제였던 것이다.
(지정은제에 대한 반대가 엄청 심했지만, 끝까지 밀어붙였던 군주였다)
 옹정제

국가 재정을 모두 
땅을 가진 사람들한테만 거둬들이겠다니

지연스레 땅부자들의 
세금 부담은 가중되었고

반면에 소작농들은 그동안 인두세가 무서워 참아왔던
'인구 불리기'에 대대적으로 돌입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부자들의 재산은 잠식되었고

반대급부로 노동인구가 많아진 
소작농들의 생산 수입은 더욱 증가하여

이들은 조금씩 땅을 사들여 
스스로가 자영농이 되어 세금을 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지정은제'를 실시한 결과
바닥을 치던 국가 수입은 '대반전'을 가져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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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1억 명을 살짝 넘던 인구는
불과 1세기 만에 3억 명으로 증가했다!

                                                                                   (단위 : 100만명)
 
 중일 자료 : 가시모토 마오·미야지마 히로시, 2008 : 18 
 조선 자료 : 권태환·신용하 조선왕조시대 인구추정에 관한 일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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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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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을 거쳐 유럽인들에 의해 소개된
감자, 옥수수, 땅콩과 같은 구황작물의 역할도 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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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지정은제 실시에 있었다능."


● 건륭제 : 달도 차면 기운다

강희제가 외정(外征)을 통해 
제국의 영역을 넓혔다면

옹정제는 내치(內治)를 통해 
바닥난 국가 재정을 확충했다.

때문에 다음 왕 건륭제는 
시작부터 매우 유리했고
 건륭제

그는 할아버지 강희제를 본받아
다시 여러 차례 원정을 시도했다.

다만 강희제처럼 
일선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보다는

전쟁은 장군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뒤에서 독려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 젊은 시절 건륭제

사실 강희제 때 점령한 
변방의 영토에서는

시간이 흐르자,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손을 봐줘야만 했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대만, 티벳, 신장에서 발발한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다시 군대를 파견했던 것이고

그러다가 내친김에 다른 영토들도 야금야금 차지하면서
영역을 더욱 넓혀나갔던 것이다.

다만 미얀마, 베트남 등의 동남아 원정은
갑자기 전염병이 창궐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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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게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동남아 땅까지 
대부분 중국이 차지하고 있을 공산이 컸음."

어쨌든 18세기 후반, 

제국의 영토는 현재 중국의 1.5배나 되는
1470만㎢로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인구에 있어서도 3억 명을 넘기 시작해서
당시 세계 인구의 1/3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위기의 조짐은 
국가 재정으로부터 왔다.

정복 전쟁을 위해 그동안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던 터라
다시 국고가 바닥나고 있었다.

여기에 건륭제는 집권 후기부터 
급격히 무사안일에만 빠져

어느덧 관료들은 다시 부패를 일삼게 되었고
건륭제는 그런 관료사회를 눈 감아 주고 있었다.
▲ 사냥을 즐기는 건륭제

거대한 제국을 
거느리게 된 황제로서

더 이상의 위기의식은 느껴지지 않았고
이제는 좀 즐겨 보자는 심리였을까?

집권 후기의 건륭제에게서
이전의 청나라 황제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검소하고 절제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건륭제는 생일선물로 금불상 3만 개를 받고 흡족해하는 등
어느새 타락한 군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윗물부터 이런데
아랫물이야 어떻겠는가?

관료들은 다시 부패해졌고
그러자 민생이 휘청거렸다.

건륭제가 퇴위한 이듬해부터 
백련교도의 난이 발발하는 등 민란이 쉬도 때도 없이 발발했다.

이미 청나라는 덩치는 커졌지만
속은 곪아 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건륭제 말년의 문제들은 
고스란히 후대 왕들에게 전가되어

이후의 청나라는 
서양인들에게 '애처로울 정도로 딱하다'는 식으로

조롱을 받는 나라로 
전락하고 만다.

흔히 건륭제 시대를 포함해
강희제, 옹정제와 함께 

'강건성세'의 치세라고 미화되지만
실상 건륭제는 명군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문제점

● 보수적인 사회

청나라가 다른 이민족 왕조와 달랐던 점은
보수적이라는 데에 있었다.

흔히 이민족의 국가라면
당나라, 원나라처럼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모습을 그리기 쉽다.

하지만 청나라는 의외로 보수적이었고
오히려 중국의 명나라 때보다도 더욱 보수적이었다.

왜일까?

이는 명나라 때 흥행했던 
양명학과 고증학에 대한 반발심이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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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은 성리학의 형식화에 반발했던 학풍이고
고증학은 실증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학풍이었지."

하지만 
명나라가 망하게 되자

중국인들은 세상이 붕괴된 것을 
마치 양명학과 고증학과 같은 사상의 탓인 양 불평했다. 
(페트리샤 에브리, 케임브리지 중국사 p.249)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사회는 
이래서 위험하다해!"

가뜩이나 명대 후기부터
인구 증가가 자원의 성장을 앞지르고 있었고

사회가 더욱 경쟁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기득권층의 위기감은 고조됐다.
▲ '경쟁의 심화'는 이러한 부정행위도 낳았다.
당시의 컨닝용 속옷. 무려 70만자가 적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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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와 명청 왕조는 모두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는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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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자의 수는 초지일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 닮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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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선시대와 명청 왕조는 갈수록
보수화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

여기에 만주족 군주들은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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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명나라가 나빴다고
보수적인 사고가 만연하고 있는 건데 뭘." 

때문에 청나라 시기 사회 곳곳에서는 
보수적인 모습이 만연하게 된다.

원, 명 시기 만개했던 문인들의 희곡과 소설은 
음탕하다는 이유로 금기시되었고

여성의 순결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시대에는 열녀문들이 우후죽순을 세워졌다.
▲ 여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절패방

약혼만 하고 얼굴을 보기도 전에 죽은 남편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했던 

미망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게
바로 당시의 열녀문이다.

하지만 
열녀문이 워낙 많아지자,

정부에서는 여성이 자결을 하고 죽었을 때만 
'열녀문'을 세워주자는 식의 조치까지 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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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조선시대 후기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 청나라도 

유교의 경전만을 학문의 전부인양 
평생을 매진하던 사대부들로 넘쳐나 있었고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은
흔히 '잡스러운 것'으로 가치 절하되기 일쑤였다.


● 전통시대 왕조의 숙명과 정체성

전통시대 왕조의 대부분은
창업 군주와 이후 2~3대 왕까지는

솔선수범 정신으로 노력하고
근면 성실한 모습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턱에

대부분은 
태평치세의 업적을 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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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광종, 조선시대 세종 등을 보더라도."

하지만 '부자 삼대'라는 원리 때문인지
손자대에 가면 

왕들은 창업의 고난과 결핍, 
시련을 모르고 자란 탓에

쉽게 방탕해지고 
안락에 빠지고 만다.

그런 동시에 관료들은 부패하기 시작하고
민생고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이런 모순은 
숙명과도 같았다.

중국은 이런 패턴을 
200~300년 주기로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청나라는 1명으로 100명을 지배해야 하는
이민족 왕조였기 때문에

초기 황제들은 근 150년 가까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건륭제 시기, 
세계 인구의 1/3을 보유한 대제국을 건설하는 동시에

황제는 급격히 안주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거대한 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필 때마침 
서세동점의 시기였다.

상업혁명→과학혁명→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차원이 달라진 유럽인들은 

군침을 흘리며 
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던 때였다.

한때 나폴레옹은 중국의 엄청난 하드웨어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선 이렇게 말했었다.

 나폴레옹
"중국은 잠자는 사자임. 깨우지 마라!"

하지만 유럽인들이 직접 와서 목격한 중국은
그저 몸집만 큰 병약한 환자에 불과했다.

이후로 유럽인들은 
정체된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조롱했다. 

 헤겔
"중국에는 공간만 있고 시간은 없다능."

 칼 맑스
"중국은 정체된 나라임."

 엥겔스
"중국인들은 안일하기 그지없는 민족이다.
숙명론이 강해서 도저히 도전정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베버
"중국인들은 소심하고 둔하며, 
스스로 명예심도 없다."

수 천년 동안 
전혀 변화와 발전이 없다는 말이었고

사람들 스스로도 
발전 의지가 도통 없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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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그런 시기에 

중국에서 새 왕조가 시작되고 있었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각성하고 달려들었다면
이들도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중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 때문에
이마저도 불가능한 얘기였을까?

어쨌든 청나라의 몰락은 왕조의 쇠락기에 맞춰 
서세동점의 시기가 겹쳤다는 점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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