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아시아는 인구가 많을까?
쌀은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식량자원이다.
그 이유는 맛과 풍미가 좋으면서
탈곡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옥수수는 맛이 사라지는 기간이
너무 짧다는 단점이 있고.."
"밀은 맛과 풍미는 좋지만
빻아서 먹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음."
무엇보다 쌀은 칼로리가 굉장히 높으면서
단위 면적당 생산력 또한 높다는 장점이 있다.
이모작,
심지어는 삼모작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면적에서 재배할 경우
밀에 비해 3배 이상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시대 기준)
옥수수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쌀보다 높다지만
워낙 지력소모가 심해,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에는
결코 쌀보다 생산력이 높은 작물이라 할 수 없었다.
"옥수수를 심은 지역에는 지력소모가 워낙 심해
3~4년 동안 다른 농사를 할 수 없었을 정도였음."
때문에 쌀 재배야말로
보다 높은 생산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되어
전통시대 몬순 아시아의 국가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쌀농사를 독려했고
▲ 몬순 아시아 : 붉은 점은 쌀 농사 지역
농민들도 가장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쌀농사를 최우선적으로 받아들였다.
▲ 태국의 전통적인 쌀농사
그렇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 인구밀도가 높다.
작은 땅으로도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세계 인구밀도
다만 쌀을 재배할 수 있는 곳은
물이 풍부한 곳이어야만 했기 때문에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은
한정되었다.
▲ 세계 쌀농사 지역 : 쌀농사 지역은 인구밀도가 높다
"만약 쌀이 비가 적게 내리는 곳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면
유럽이나 중동에서도 밀 대신 쌀을 재배했을 듯."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밀농사가 가능했더라면 굳이 양떼를 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인류는
논농사(쌀)가 불가능해 밭농사(밀)를 했고
밭농사가 불가능해
유목민이 되었던 셈이다.
역사가 도래한 이후부터 18세기까지
중국과 인도가 전 세계 인구와 경제력의 절반을 차지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쌀이라는
엄청난 생산 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물론 강수량이 적은 중국과 인도 북부에서는 밀농사를 지었지만)
▲ 1500년경 세계 인구 : 인도와 중국의 인구가 전세계 50%를 넘었다.
● 왜 아시아인들은 체구가 작을까?
하지만 이렇듯 훌륭한 쌀에도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으니
바로 단백질 함유량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밀에 비해서 비타민 함유량도 낮다.)
쌀의 경우 단백질 함유량은 보통 7% 수준이지만 (건조 백미 기준)
밀의 경우 12%를 넘는다. (밀가루 기준)
"다만 쌀의 단백질은
흡수력이 높기 때문에.."
"밀의 불용성 단백질(글루텐)이
몸에 맞지 않아 .."
"밀가루 음식만 먹으면 폭풍설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쌀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음."
이런 이유로 밀 문화권의 사람들은
빵만으로도 식사가 가능하지만
쌀 문화권에서는 부족한 단백질 등을 보충하기 위해
반찬은 필수적이다.
밀 문화권의 사람들에 비해
쌀 문화권의 사람들의 체격이 왜소한 것은 이런 탓도 있다.
▲ 1900년도 세계 각국의 군인들 : 맨우측이 일본군
게다가 유럽인들은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체격은 더욱 커졌다.
물론 유럽인들이 고기를 먹었던 이유는
단위 면적당 인구부양력에서
쌀은 밀보다 3배 높고,
밀은 목축업보다
6배 이상 높았다.
쉽게말해,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6배의 땅을 희생하면 됐지만
아시아인들은
18배의 땅을 희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쌀 문화권에서 목축업이 발달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이런데 있었다.
하지만 전통시대는
인구는 곧 국력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변한건 아니지만)
유럽의 군주들도 또한
한정된 땅에서 인구를 최대한 늘려
세금을 바칠 노동인구를 늘리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사 수를 늘리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축은 일반적으로 사치였고
고기는 부유층의 특권이었다.
그러다가 유럽인들이
일반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한 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에 거대한 농장을 만들고 난 이후부터였다.
▲ 신대륙의 광활한 밀밭
값싼 곡물이
유럽으로 쏟아져들어오자,
유럽의 농부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부가가치가 큰 목축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18~19세기 무렵이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냉동선이 발명되면서
목축업마저 신대륙에 내어주고
더 부가가치가 높은
낙농업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기와 우유를 마시던 서구인들의 체격은,
동양인에 비해서 더욱더 커지게 됐다.
▲ 같은 쌀문화권인 조선이 일본보다 키가 컸던 이유는
조선은 육식이 허용됐지만, 일본은 생선 외에 육식을 금했던 탓도 있었다.
● 왜 아시아의 음식들은 먹거리가 다양할까?
쌀 문화권의 아시아 사람들은
쌀이 가져다준 높은 생산력 때문에
바글바글 모여서
살아가게 되었고
▲ 19세기 말 한양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단백질 섭취원이 부족해졌다.
가뜩이나 쌀을 주식으로 한 까닭에
단백질 섭취량도 부족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유럽인들처럼
신대륙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북방 유목민족의 규모는 워낙 작아서
이들과 무역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아시아 농경민족의 인구가 유목민족보다 100배는 더 많았다.)
그러했으니 단백질원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들을 강구해야만 했었다.
선택의 방법은
단순했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자!"
"네 발 달린 건 책상만 빼고 다 먹자해!"
먹을거리의 범주를
대폭 넓혔던 것이다.
유럽인이나 중동인들은 꺼려하는
파충류, 연체동물, 곤충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바퀴벌레 튀김이
동남아에서 물방개 스낵이
▲ 각종 벌레 튀김
한국에서 번데기 통조림,
일본에서 메뚜기 통조림이 존재하는 이유도
모두가
이런 데서 연원한다.
반면에
같은 아시아인들이라도
초원의 몽골인들은 생선조차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단백질원이 풍족했기 때문이다.
▲ 햄버거, 소시지, 순대는 모두 몽골 음식이 세계로 퍼진 것들이다.
한국과 중국인들은 개고기를 먹었지만
만주인들은 금기시했던 이유도
그들 스스로 반농반목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단백질원이 풍족했기 때문이다.
"뱀도 먹고 벌레도 먹고
기르던 개까지 잡아먹던,"
"아시아 쌀 문화권의 육식 문화가
오늘날 혐오 문화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대형 가축이 없어서 인육을 먹어야만 했던
아즈텍 문명과 비교하자면, 그래도 양반이었지." ☞ 참고
● 콩은 어떻게 고기의 대체재가 되었을까?
그렇게 아시아의 쌀 문화권은
다양한 먹거리를 찾는 방법으로
부족한 단백질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동남아시아는 무더웠기 때문에
단백질원들은 금방 부패했고
동북아시아는 추운 겨울이 있어서
이 시기 단백질원을 찾기란 요원했다.
때문에 보다 안정적으로 보충할 수 있는
단백질원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콩의 발견은 축복과도 같았다.
콩(대두)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바로
한반도와 만주지역이다.
(완두콩은 중동, 강낭콩은 멕시코가 원산지다.)
하지만 그냥 콩만 삶아먹어서는
쉽사리 고기를 대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뜻임?"
"우리가 고기를 맛있어하는 이유는
바로 감칠맛을 느끼기 때문임."
"그런데 그냥 콩만 씹어서는
당최 고기 맛을 느낄 수가 없거든."
때문에 콩이 가진 단백질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콩 단백질 속에 묶여있는
감칠맛이 나는 글루타민산을 분해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기 전까지 콩은
그냥저냥 일반 곡식에 불과했던 것이고
오히려 맛이 없다고
가축 사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이런 이유로 콩의 발견이
즉각적으로 고기의 대체재가 되지는 못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획기적인 발견이 나타난다.
2,500년 전 고구려인들의 조상 격인
예맥족들에 의해서였다.
▲ 동호는 몽골, 숙신은 만주족의 조상격이다.
콩을 삶아 두었더니
걸쭉해지고 끈적해지고
이걸 또 며칠 삭혀서 맛을 봤더니
의외로 감칠맛이 돌았던 것!
이는 반농반목을 하며
유목민의 습성이 남아있던 예맥족들이
요구르트 치즈 가공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쉽게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캬~ 이런 감칠맛을 봤나!"
● 두장(豆醬)의 기원은 한국이다.
그렇게 쌀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쌀로는 부족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콩을 발효시킨
'두장'이 고안되자
이윽고 한반도 전역은 물론
중국과 일본으로도 빠르게 퍼져나가게 된다.
"밥맛 없으면 이거랑 같이 먹어보라해.
완전 밥도둑이다해."
사실 1세기 이전까지 중국은
단백질원을 오랫동안 보관하여 먹기위해
주로 육장을
만들어 먹고 있었다.
육장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소, 양, 사슴, 노루, 토끼, 꿩 같은 고기에
소금을 넣고 곡물을 들이붓는다.
▲ 4세기 고구려의 푸줏간
그리고 한 달 가까이 숙성시키면
소금은 부패를 막고
곡물은 젖산발효가 일어나
시큼하면서도 짭짤하고 감칠맛 나는
장기 보관용 음식이 완성되는 것이다.
"와~ 맛있겠다!"
하지만 두장이 보급되면서
점차 육장의 인기는 사라지게 된다.
"육장을 만들려면 좀 비싸야지."
때문에 6세기 이후로 두장은
중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소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지금은 중국 요리를 만드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소스가 되었다.
"춘장, 또우츠
모두 콩으로 만든 중국식 된장이라능."
▲ 춘장(좌)과 또우츠(우)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낫토가 유명하다.
잘 발효된 낫토는 발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나름 최고의 영양식이다.
"콩과 콩 사이에 끈적끈적한 실이
얼마나 많이 생기느냐에 따라 낫토의 질이 결정되무니다."
그런데 이런 낫토가 전래된 것도
6세기 이후 백제인들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였다.
이전까지 일본도
육장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국교화하고
7세기 말 이후로 대대적인 육식 금지령이 내려지게 되자
일본에서도 두장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살생을 금한다능."
8세기 헤이안시대에 두장을
'고려장'이라 불렀던 것도
바로 이런
역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두장이 한중일 삼국을
그토록 지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재료 공급이 쉬웠고
육고기나 생선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으니깐."
이후 두장에서 액체를 뽑아 만든 간장 또한
한중일 3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치며 크게 애용되게 된다.
● 동남아 음식이 짭짤한 이유
생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생선을 발효시켜 저장한 것이 어장의 기원이다.
▲ 태국의 다양한 어장
생선과 소금을 발효시켜 만든 어장은
아미노산이 특히 많으며
그중에서도 감칠맛과 가장 관계가 깊은
글루타민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길래 그렇단 말인가?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다에서 잡힌 생선을
비늘을 벗겨내고 내장을 빼내고 난 뒤
바로 소금에 절인다.
동남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냥 오랫동안 항아리에 넣고 삭히면
그것으로 끝난다.
"읭? 초간단!"
이렇게 하면
처음에는 소금기로 인해 짠맛밖에 안나지만
수개월이 지나면 생선에 함유된 효소의 작용으로
단백질이 분해되고 각종 아미노산을 생성하게 되어
짠맛과 감칠맛이 도는
어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장 중,
크기가 큰 삭힌 생선은
살이 맛있어서 주로 튀김요리에 사용되고
작은 생선으로 만든 젓갈이나 어간장은
각종 태국 요리의 소스로 사용된다.
태국식 김치인 쏨땀의 경우
마늘, 고추, 파파야에 태국식 젓갈을 넣고 버무리는데
그러면 맵고, 짜고, 시고, 달콤한 맛이 어우러져
무척이나 맛이 오묘해진다.
▲ 태국 김치, 쏨땀
"태국인들이 쏨땀을 즐겨 먹는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쌀과 야채만으로는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기 위해서라능."
한편 라오스는 동남아 유일의 내륙국으로
바다가 없고 소금이 귀하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어장은 만들어지고
없어서는 안될 필수 식재료로 인식되고 있다.
읭?
어떻게?
라오스에는 메콩강이라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어
쉽게 생선을 잡을 수 있고
▲ 라오스의 어부
어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소금을 적게 넣는 대신
쌀겨를 첨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곡물이 발효하면서 유산균을 생성해
생선의 부패를 억제하게 된다.
"와! 신기! 이런 이치를 어떻게 알았지?"
"오랜 경험의 산물이지."
사실 소금을 적게 쓰고 곡물을 첨가하는 방식은
쌀 문화권 어디에나 존재한다.
또 그렇게 만들어진 태국과 라오스의 어장은
모든 음식에 빠짐없이 사용되기 때문에
동남아 음식들은
'짭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 라오스의 식탁
● 일본의 스시는 서민들을 위한 패스트푸드였다
어장 문화권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남아, 중국 해안가, 한반도, 일본을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인 일본의 어장은
붕어를 쌀에 넣어 발효시킨 후나즈시가 있다.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생선을 손질하고 소금을 넣고 절인다.
그리고 수개월 뒤 끄집어내어
붕어 속을 가르고 밥을 채워 넣는다.
이렇게 하면 쌀밥 속의 전분이 유산을 형성해
신맛을 내면서 생선의 부패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선의 종류는 달라도
동남아와 발효 원리와 똑같다능."
그리고 다시 수개월 지나면
붕어는 시큼한 냄새의 발효음식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시의 조상 격이
후나즈시라는 음식이다.
"스시는 밥과 생선을 함께 먹지만
후나즈시는 발효를 위해 첨가했던 밥은 버리고 생선만 썰어 먹었다능."
이런 후나즈시는 10세기 전후에 처음 등장하여
왕족과 귀족만 즐길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고거참 시큼하고 감칠맛 나는게 일품이네."
그러다가 17세기 에도시대 들어
식초가 발달하게 되면서 지금의 스시가 탄생한 것이다.
▲ 에도시대의 스시
식초를 이용해
밥에 신맛을 더한 스시는
후나즈시처럼
오랜 발효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후나즈시가 귀족의 음식이었다면
에도시대 스시는
평민들이 즐겨먹는
일종의 패스트푸드였던 셈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소금으로 절인 생선 젓갈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일본 음식들이 밋밋하고
식재료 자체의 맛이 집중하는 이유가.."
"알고 보면 젓갈 문화가 없었기 때문임."
● 역사 속 우리의 장문화
어장이 발달한 동남아,
두장이 발달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어장과 두장이
함께 발달한 측면이 있다.
그중에서도 두장(된장)을 만드는 일은
아낙네들에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콩을 삶고 메주를 만드는 일은
보통 날벌레가 사라지는 11월에 행해졌었는데..
이때 여인네들은
목욕재계는 물론
상가에 찾아가는 것도 자제할 정도로
마음을 경건하게 닦았다 한다.
"예전부터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든다고 할 정도였으니.."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갑자기 장맛이 변했다고
임금이 근심에 빠지고
고관들이 안절부절못하고,
궁중의 상궁들은 원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된 모습이 아니었다.
당시 관료들에게 지급된 봉급도
가장 기본이 되는게 쌀과 콩이었을 정도다.
역사 속 기록을 보면 이렇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집을 떠나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었던 김유신 장군은
집안이 걱정되어
부하를 시켜 집에서 간장을 떠오도록 시켰고,
이후 간장의 맛을 보니
김유신
"우리 집 장맛이 여전하구나"
라며 집안의 무탈함에
안심했다고 한다.
"읭?"
"장이 변했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 장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김유신의 판단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음."
삼국사기에
신라 신문왕의 기록을 보면
왕비를 맞으면서 납비 품목으로
간장, 메주, 포, 젓갈 135수레를 줬다는 기록이 있다.
▲ 신라의 수레 토기
"당시 장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
그보다 앞선 시기의, 중국의 후한서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장을 잘 만들었다고 나와있다.
▲ 혹시 이 항아리들 속에 장이 담겨져 있지 않았을까?
"된장의 발원지가 고구려 영토였으니.."
고려 때 장의 흔적은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된
보물선 3척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2009년 발굴된 보물선에서는
도자기, 곡물, 생선뼈와 같은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그중에서 물품의 목록을 상세히 적은 목간이 발굴되었고
물품 중에는 메주가 기록되어 있었다.
▲ 목간
또 밴댕이 뼈와 게 껍데기 등
어장의 흔적도 발굴됐었다.
"아마도 메주와 어장은
중국으로 수출하려던 것 같은데.."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선조는
피난을 떠나기 전에
장을 준비하는 합장사를
먼저 피난지로 보낼 정도로 장맛에 신경 썼다 한다.
"피난 가면서도 입맛은 챙겼군."
조선 왕실에서는 장고마마라고 해서
궁중의 장만을 관리하는 상궁이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 왜 서해안에는 젓갈, 동해안에는 식해가 발달했을까?
우리나라 어장의 특징을 보면
서해안에는 유독 젓갈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바로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염전
이곳에서 나는 젓갈은
새우젓, 멸치젓, 까나리액젓, 명란젓, 어리굴젓
그 가짓수도
매우 다양하다.
그렇다면 소금이 귀한 지역에서는
어떻게 어장을 만들었을까?
동해안에서는
젓갈 대신에 식해를 만들었다.
"헷갈리기 쉬운데,
식혜는 밥알을 삭혀 만든 전통음료이고.."
"식해는 생선을 삭혀 만든 저장음식임."
바다는 있지만 염전이 없어 소금이 귀했던 이곳에서는
생선을 발효할 때 밥을 첨가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곡류의 전분들이 발효하여
유산균을 형성해
독특한 풍미를 낼 뿐만 아니라
생선의 부패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게되는 것이다.
게다가 발효 후에도 생선의 육질은 그대로 살아있어
장기 보존 음식으로 제격이었다.
"어? 동남아, 일본하고
만드는 방식은 다 똑같았네."
그렇다! 소금과 유산균의 힘으로 음식을 장기 보존하면서
짠맛, 신맛, 감칠맛을 내는 방식은
신기할 정도로
쌀문화권 모두에서 발견되고 있다.
● 식탁의 혁명을 가져온 고추장
두장 중에는
청국장을 빼놓을 수 없는데
청국장은 콩을 삶는 것까지는
된장과 같지만
메주를 만드는 대신에
발효를 촉진하기 위해서
따뜻한 아랫목에서 2~3일 만에 숙성시킨
속성 인스턴트 된장이다.
원래 피난살이하는 전시에
단기 숙성으로 먹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후 가난한 서민들에게 애용되어
된장이 떨어지는 시기에 흔히들 청국장을 만들어 먹게 되었다.
한편 고추장의 경우
그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가 않았다.
고추는 15세기 후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면서 구대륙에 알려진 작물로서
▲ 콜롬부스가 신대륙에서 갖고 온 작물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이후 유입되고
한동안은 독초로 오인되기도 하고,
관상용으로 쓰이다가
18세기 이후에서야
식재료로 널리 사용되게 된다.
"당시 이앙법으로 쌀 수확량이 많아지자
밥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
맵고 짠 반찬을 찾다 보니
소비가 늘었다는 썰도 있고.."
그리하여 고추장이 나타나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은
대략 이렇다.
메주에 찹쌀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고
소금물을 부어준 다음 항아리에 보관한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면
자연 발효가 나타나
맵고 감칠맛 나는
고추장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추장의 등장으로
밥상은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됐다.
반찬의 가짓수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고추장 장아찌는
어떤 재료로도 만들 수 있지."
모든 식재료들은
고추장을 통해 새롭게 탄생했다.
더덕에 고추장을 더하면 더덕 고추장 장아찌가 되고
굴비와 같은 생선도 고추장만 있으면 장아찌가 되었다.
▲ 더덕 장아찌
감과 같은 과일도, 오가피와 같은 약초도
고추장 장아찌의 재료가 되었다.
▲ 감 장아찌
참외도 고추장에 버무리면
오래도록 먹을 수 있는 훌륭한 반찬이었다.
▲ 참외 장아찌
매실도 장아찌로 담그면
1년 내내 매실의 신맛을 즐길 수 있게 됐다.
▲ 매실 장아찌
그야말로
고추장이 이룩한 창조경제였다.
참고 다큐 : 아시아 음식의 비밀, 장(醬)
참고 문헌 : 문명의 씨앗, 음식의 역사 (찰스 B 헤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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