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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목숨을 걸어야 했던 과거 여행길 : 풍토병, 도둑, 맹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310328579
목숨을 걸어야 했던 과거 여행길

● 풍토병

중세 유럽에서는 성지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떠나기 전에 
대부분 유서를 쓰곤 했었다.

여행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도중에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순례자들을 위해 수도회가 각지에 지은 
'구빈원'은 질병의 소굴이기도 했다.
▲ 구빈원

그러니 이들의 순례는
목숨을 건 모험과도 같았다.

여행객이 병에 걸리기 쉬운 이유는 
'풍토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토착민들의 경우에는 
풍토병에 대한 내성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의
심각한 질병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콜레라, 페스트
아프리카의 황열

열대 지역의 말라리아, 뎅기열 등이 
이방인들에게는 치명적인 풍토병이다.

알렉산더 대왕도 말라리아 때문에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고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여행 도중에 결핵에 걸려 고생을 하고

여행가 이븐바투타도
여행 도중에 이질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된다.

고로 의학이 발달되지 못했던
전통시대에서의 여행길이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마의 위험 속에서
목숨을 걸고 감행했던 고행길이기도 했다.
▲ 등짐을 지고 인도를 여행하던 혜초

그런데 이런 풍토병이
다른 세계로 퍼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sally_and_friends-18

14세기 몽골군에 의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던 페스트로
 

유럽 전체 인구의 절반이 
증발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봉건제도의 기반을 이루던
장원경제가 몰락하고

중세를 지배하던 교회가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교회도 덩달아 몰락하게 됐으니,
결국 유럽의 중세시대가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구대륙의 
풍토병인 천연두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는데,

16세기 스페인 군대가 소수의 병력으로
거대한 두 제국을 무너뜨리게 된 원인도

따지고 보면 총과 칼이 아닌,
바로 천연두의 힘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를 정벌할 때도
천연두균이 이용되었으니

영국인들은 천연두에 오염된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던 것이다.

 제프리 암허스트
"내가 그랬다능."

19세기 초에는 
인도의 풍토병인 콜레라가
 

영국 군인들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당시 전염의 속도가 엄청나서
3년 만에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조선과 같은 폐쇄적인 나라까지 오는 데에도
불과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는 
명칭으로 불렀을 정도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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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자는 호랑이의 기세로
밀려드는 병이라는 뜻임."

전파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의주에서 콜레라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파발을 띄워 조정에 알리려고 했는데

말을 타고 한양에 도착해보니
이미 도성 안팎으로 콜레라가 퍼져 있었다고 한다.
moon_special-24

당시 콜레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도합 20~30만 명 정도로

이는 조선 인구 100명 중 
1~2명 꼴로 사망한 셈이었다.
▲ 한양에서만 100명 중 3명 꼴로 사망했다.

이토록 이방인의 풍토병은
무섭고도 끔찍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척하고자 했던데 반해,
▲ 신대륙의 농장

아프리카에서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거점 요새만을 설치했을 뿐

내륙으로의 개척을
한사코 꺼렸던 이유도

바로 말라리아, 황열 등의 
풍토병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목숨 걸 필요 있나.
아프리카는 노예 공급만으로도 족함."


● 산적

전통시대의 도둑들은 
대부분 생계형 도둑들로 

한때 농사를 짓던 
농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농민들이 집과 경작지를 버리고 
유랑을 하게 되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호구책은 
도둑질 말고는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인데
도둑질 좀 하면 뭐 어때서?"

이때 초적(들판의 도적)보다는
산적이 되는 길이 보다 안전했다.

산에 들어가 고갯길을 막고
여행자의 재물을 약탈하는 식으로 하면

보다 높은 확률로
벌이를 할 수 있었고

관군에 쫓기더라도, 산으로 숨어들어가면 
보다 쉽게 은신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깊은 산중의 은신처를 
(寺)로 가장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악산 기슭의 남태령이 
산적이 들끓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곳으로 한양으로 올라오는
유동인구가 많았던 탓이다.

때문에 과거 남태령에는 
비명횡사하던 수많은 과거길 선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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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남태령 산적이 무서울까, 
호랑이가 무서울까라는 말도 있었다지."

그런데 도둑들이 힘을 합하면
보다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국가나 대형 상단의 물자는
반드시 호위 병력이 지키고 있었기에

혼자서 이것을 약탈하는 것은
그림의 떡과도 같았지만

도둑들이 여럿 힘을 합한다면
못할 이유도 없었다.

때문에 도둑들이 힘을 합해
나라의 세곡을 털어가던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대표적인 게 구월산 산적과 
지리산 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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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장길산 등은 
모두 구월산 산적들이라능."

물론 이런 식으로 약탈을 하게 되면
반란으로 간주되므로 

국가로부터의 토벌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농민반란은 

도둑들의 반란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역사 기록에서도 농민군은 
대부분 도적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원종 애노의 난 
고려시대의 김사미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조선시대의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 
동학농민운동 등의 기록들을 보면

항상 농민들은 양민과 귀족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야 이러한 반란들은 
'민중 저항운동'으로 재해석 되고 있지만 말이다.


● 해적

산적과 초적이 무서워
바다로 여행을 하겠다고 해도

바다 역시 오랜 옛날부터
도둑들이 설치고 있었던 곳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해적들이 있었고

해상 무역이 활발하던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해상 무역로를 따라 
해적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때 재밌는 것은 무역선은 
언제나 쉽게 해적선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페니키아 상인이었다.
이들은 상인인 동시에 해적이 되기도 했다.
▲ 페니키아인들의 배

장사를 하다가 공을 치게 되면
본전 생각에, 쉽게 약탈의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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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바다는 치안이 미치지 않는
무법 천지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바이킹, 왜구, 영국의 상선들도 
그렇게 상인과 해적을 겸업했던 이들이다.

19세기 조선의 평양에서 해적질을 하려던
제너럴 셔먼호도 원래는 상선이었다.
▲ 제너럴 셔먼호

 셔먼호 해적
"어서 쌀, 금, 은, 인삼을 
가지고 오라능!"

특징이라면 중세시대까지 해적들은 
상선을 약탈하기보다는

육지에 상륙해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잡아가는 행위를 주로 했었다는 점이다.

바이킹이나 왜구들은 해상 약탈보다는 
해안가 약탈을 즐겼던 해적들이다.

다만 유럽인들은 
바이킹의 피해를 막기 위해

높은 요새와 성곽을 짓는 식으로
적극적인 방비를 했는데 비해,
 
▲ 바이킹의 약탈을 막기 위한 슬라브족들의 요새 건설

조선과 명나라는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는 해금정책과

해안가 마을을 
비워버리는 공도정책으로

소극적인 방비를 했다는 게 
두드러진 차이점이었다.
▲ 당시 왜구의 침입로

때문에 서양은 이후로도 
해상 활동에 적극적일 수 있었지만

조선과 명나라는 
바닷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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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들이 해상에서
상선을 털기 시작했던 것은

신대륙이 발견되고 신항로가 개척된 
16세기 이후부터였다.

이때 유럽과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선박의 출입이 빈번한 항로마다
해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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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게 캐리비안 해적들." ☞ 참고

그런가 하면 영국이 아편을 
중국에 대량으로 몰래 팔던 19세기 초에는 

남중국해의 중국 해적들이
영국의 아편 무역선을 자주 털곤 했었다.

"어차피 나쁜 넘들 물건 훔치는 건데, 
뭐가 어떠냐해!"

하지만 이런 해적들은 
근대적 해군이 등장하는 

19세기 후반에
대부분 몰락하고 만다.


● 맹수

전통시대 여행객들을 노렸던 것은
질병과 도둑 외에도 맹수가 있었다.

다만 평야가 발달한
유럽과 중국에서는 

야생동물이 서식할 수 있는 숲이
대부분 농경지로 개간되었기 때문에
▲ 중세 유럽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맹수들이 살기 힘들어서

호랑이, 사자, 곰 등의 피해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 중세 중국

문제는 
우리나라였다.

국토의 70%가 산지인데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말까지도 호랑이로 인한 피해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 1909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의 호환도

19세기 후반
이사벨라 비숍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이사벨라 비숍
"주막에서 잠을 자게 됐는데, 
불을 어찌나 때는지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사벨라 비숍
"너무 숨이 막혀서 문을 열었더니
주인이 급하게 소리치며 닫는 게 아닌가!"

 주모
"그러다 호랑이 들어옴매"

 이사벨라 비숍
"어쩔 수 없이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라 비숍
"지금 방안의 온도는 40도다.
조선은 정말 호랑이가 많은 나라다."
 
 이사벨라 비숍
"한 여인이 물을 길러 간다고 잠깐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변고를 당했는데.."
 
 이사벨라 비숍
"나중에 보니 사람은 없고
핏자국과 사람 다리 한 짝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예전 중국에서는 
이런 속담도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1년의 반은 
호랑이한테 물려죽은 사람 문상을 다니고.."

"나머지 1년의 반은 
호랑이 사냥을 하러 다닌다해."
 
"조선에서는 1년의 반은 
사람이 호랑이 사냥을 다니고.."

"나머지 1년의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해."

▲ 조선시대 호랑이 전문 사냥꾼 '착호갑사'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면
호환의 피해는 수두룩하게 나온다.
▲ 태백산의 호식총 (호랑이한테 잡아먹힌 사람들의 무덤)

거의 매년 호랑이 출몰과
호환의 피해가 등장할 정도다.

그중에 몇 개를 꼽아본다.
1402년 (태종 3년)의 장계 내용이다.

"전하, 경상도에 호랑이가 많아
석 달 동안 수백 명이 물려죽었나이다."

 태종 
"헐! 그게 정말인가!
큰일이로구나."

 태종 
"여봐라. 
전국 각도의 관찰사에게 알리거라."

 태종 
"앞으로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포상을 내리겠노라고."

1638년 (인조 16년)에는
평안도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벽을 타고 넘어와 

시내를 활보하며
사람과 가축을 죽이는 소동이 일어났기에

의주 일대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1701년 (숙종 27년)에는
강원도에서만 

300여 명이 
호랑이에 물려죽었다는 기록이 있었으니,

숙종은 대대적인
호랑이 토벌을 명령하며 이렇게 말했다.

 숙종 
"앞으로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는.."

 숙종 
"양인의 경우 군역을 면제해주고
수령의 경우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라."


임진왜란 때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라는 왜장에게 
아주 아끼던 애마가 있었는데

함경도 어느 마을에서
그만 호랑이한테 물려 죽게 된다.

이에 가토는 화가 잔뜩 났으니,
즉시 수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가토
"당장 호랑이를 찾아서 잡아 죽여랏!"

하지만 평소 호랑이를 말로만 들었지
실제 본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으니,

왜병들은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섰다가
도리어 수도 없이 비명횡사하고 만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조선의 호랑이가 어찌나 큰 지

왜병들을 한입씩 
차례로 삼켜버렸다고 하는데..



폐쇄적인 사람들

● 접근 금지

2천년 전 강원도로 추정되는 곳에는
예족(동예)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는 산이 많아 
사람들은 계곡별로 모여 살았는데

이웃과의 왕래가 뜸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웃을 경계하게 되었다.
▲ 강원도의 지형

때문에 동예에는
'책화'라는 풍습이 생겨났다.

책화란 무엇일까?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보면 이렇다.

"동예 사람들은 산과 개천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그 벌로 사람과 소, 말을 부과해야 하는데, 
이를 책화라고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제3의 침팬지'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뉴기니 서부의 엘로피족 마을에서
재레드가 머물던 때였다.

 재레드
"이웃 부족인 파유족의 
영토를 가고 싶은데 괜찮겠삼?"

그랬더니 
엘로피족은 웃으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셈."

 재레드
"그게 무슨 소리임?"

"파유족들은 무단 침입자는 
당연히 죽일 겁니다."

그랬다. 뉴기니의 원시부족도 
과거 동예의 사람들과 같았다.

이방인은 그저
자신들의 사냥감을 약탈하고

여인을 범하고, 
질병을 옮기고

자신들의 영토를 정탐하려는
위험한 적일 뿐이었다.

하지만 강원도의 산골짜기나
뉴기니의 우거진 정글이 아닌,
▲ 뉴기니섬의 정글

몽골 초원과 같은
탁 트인 개활지에서 살아가던

유목민들의 경우에는 
어떠했겠는가?

이런 환경에서는 이방인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쉽사리 막을 방법이 없지 않는가!
 

때문에 유목민들의 경우에는
외부인이 공격하지 않도록 

오히려 외부인에게 호의적으로 
대접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말인가?

대표적으로
'아내 빌려주기' 풍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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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신장성 지역을 여행하던 일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마르코 폴로
"낯선 나그네가 
자신의 집에 머물려고 오면.."

 마르코 폴로
"집주인은 굉장히 기뻐하면서 
자기 아내를 2~3일간 맡기고선, 자신은 집을 나와 있는다."

 마르코 폴로
"그러면 나그네는 집주인 부인과 
집안에 있으면서, 마치 자기 아내인양 동침하기도 한다."

 마르코 폴로
"그들은 나그네를 친절히 맞아주는 것을
신의 가르침이자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마르코 폴로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물건과 
자식과 재산이 불어나고.."

 마르코 폴로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다만 유목민들의 아내 빌려주기 풍습은
외지인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외부에서 온 귀한 사람의 씨를 받아
종족의 질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유목민들의 경우
워낙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소수의 집단 내에서 
혼인이 이뤄지기 십상인데, 

근친혼이 잦아지다 보면
열성 유전자로 유전병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방편으로
아내 빌려주기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성벽 쌓기

외부와의 접촉이 두려운 사람들은
인위적인 시설을 만들어서라도 이방인들을 막고자 했다.

인류의 그런 의지는
8천 년 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인류 최초의 도시
터키 남부의 차탈 후유크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이곳에서는 골목길이라고는 전혀 없이 
흙벽돌로 된 벌집처럼 빽빽한 집들이 있었다.
▲ 건설 장면

이런 집들은 지붕에 뚫어 놓은 구멍이 
유일한 출입구였고,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고 다녔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이유는?

당연히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적이 쳐들어 오면 사람들은 사다리를 치우고 
집 안으로 잽싸게 숨었던 것이다.

중국 내몽골에서는 
4천 년 전 초기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성벽의 
유적지가 있는데
▲ 싼쥐뎬(三座店) 유적

축구장보다 조금 더 큰 둘레의
성벽 내부에는 

수십 개의 건물 흔적과 
기왓 조각이 있어

이곳에서 수백 명 정도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성벽의 구조가 凸와 같은 모양으로
불쑥 돌출된 형태라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성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방어 형태였고,

적이 성벽을 공격할 때 
3면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고구려의 치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외적의 침략에 시달렸던 것이고

그걸 막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게
바로 凸 형태의 성벽이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2500년 전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의 
송국리 유적지가 있는데

특징이라면 주변에 해자를 두르고 
목책으로 방벽을 세웠다는 점이다.

물이 흐르는 해자는
맹수나 외적이 쉽게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목책은 성벽 역할을 했다.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당시 송국리 사람들은

함께 모여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짓다가도
적이 습격을 하면 

재빨리 목책 안으로 들어와 
방어를 했을 것이다.

당시에 적들이 노렸던 것은 
식량·의복·농기구·옥과 같은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약탈 전쟁은
잉여생산물이 많아지는, 

청동기, 철기시대로 갈수록 
그 양상은 더욱 격렬해졌을 것이다.

AD 2세기 경에 만들어진 
백제의 풍납토성은

둘레 길이 3.5km, 성벽의 폭 40m, 높이 15m의 
거대한 성곽도시로

토성 안에서만 약 8천여 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초기 한강 유역의 작은 나라인,
백제의 도성치고는 매우 큰 편인데

이렇게 엄청난 노력을 들여 
견고하게 성벽을 만든 것은
▲ 토성을 축조하고 있는 백제인들

그만큼 성 안에 
지켜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 풍납토성 내부

또 그만큼 이방인들의
약탈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 왕이 살던 궁궐

한편 중세 유럽의 경우에도
성을 쌓고 둘레에 해자를 파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징이라면 해자를 통해
배설물까지 방출했었다는 것이다.

서양 중세의 성을 보면
성벽 꼭대기에 돌출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곳은 화장실이다.

이곳에서 변을 싸면 
바로 해자로 떨어지게 되었으니,

해자의 물은 
곧 똥물이었다.

하지만 냄새가 날지언정
적을 막기에 효과는 그만이었다.

유사시 적들은 똥독을 무릅쓰고
똥물을 헤엄쳐 건너야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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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가 주는 심리적 압박이란
상당했을 것이다.


참고 문헌 : 세상을 바꾼 길 (김용만),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정연식),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화장실의 역사(야콥 블루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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