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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중국은 왜 거대한 나라가 되었나 : 남북을 통일시킨 '대운하' + 서역으로의 확장 '실크로드'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377050545
거대 국가 중국의 형성

● 중국은 왜 거대한 나라로 성장했나?

세계 최대 민족 집단 한(漢)족은 
13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한다.

하지만 한족은 
단일한 혈통이 아니다.

북부지방 사람들의 모습은
단번에 보기에도 남부지방 사람들과 다르다.

북부지방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인들과 닮았고
▲ 베이징의 주민

남부지방 사람들은
베트남인들과 더 닮았다.
▲ 광둥성의 주민

그런데도 이들을 
하나의 민족이라 일컫는 이유는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정치체제 안에서 살다 보니

사람들의 문화와 
의식구조가 서로 닮아

하나의 동질성을 
형성하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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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닮아가는 과정을 
한화(漢化)과정이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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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중국인들의 동질성은
그들의 '유교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능."

그렇다면 전 세계 수많은 민족 중에서
왜 하필 중국인들만 

이렇게 유별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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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이유는 
중국 문명이 

광활한 평원 위에서 
세워졌다는 데 있다.
▲ 중국의 광활한 평원

여기에 농사짓기에 적당한 
천혜의 기후까지 더해졌다.

사실 전 세계에서 
중국 평원만큼

인구부양력이 높은 기름진 땅이 
드넓게 펼쳐진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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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세계지도를 펼쳐보라능."

낮고 평탄한 고원(데칸 고원)으로
이루어진 인도 반도가

중국 평원에 
견줄만한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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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유사 이래
중국과 인도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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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인구 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임."


만약 중국 대륙이
유럽 대륙처럼

요철(凹凸) 모양의
구불구불한 지형에

험준한 산맥이
중앙을 가로막고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국가가 들어서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사방으로 뚫린 
광활한 평야에서 시작된 문명은

서로 먹고 먹히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최종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 진시황의 통일


● 중국이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은 이유

하지만 중국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양쯔강이었다.

실제로 581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중국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된 시기보다
남북으로 분할된 시기가 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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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나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통일하기까지 360년 동안,"
(중간에 서진이 50년간 잠깐 통일을 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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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남과 북은, 문화와 체제가 다른 
사실상 별개의 문명과도 같았음."

어쩌면 기후와 풍속이 
전혀 다른 두 문명이 
▲ 북방의 소박한 호한문화

하나의 정치체제로 통합된다는 자체가
오히려 더 어색할 수 있다.
▲ 강남의 화려한 귀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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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문화권과 
쌀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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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 두 문명은
또다시 통합했는가?
▲ 7세기 초 수나라

누구 때문인가?

바로 수나라를 세운
수문제 양견 때문이다.
 양견
▲ 수문제 : 그는 순수 한족이 아닌, 선비족 혼혈이었다.

400년 만에 중국을 
재통일한 그는

두 문명을 
통일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남북으로 거대한 운하를 
뚫어버렸기 때문에
(운하는 후대왕 수양제 때 완성된다)

이질적이던 
중국의 두 문명은

이후 활발한 
이동과 교류를 통해

빠르게 하나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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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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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은 수문제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능."

구체적으로 이렇다.

황하에서 양쯔강까지
총 길이 2천 km를 연결한 대운하를 통해

강남 지역의 풍부한 
농업 생산물이

인구가 조밀한 화북지방으로 
대량 유입될 수 있어

화북 중심의 중국 문명은 
더욱 번창할 수 있게 되었고

변방(특히 중국 동북쪽)으로의 병력 수송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되어

영토를 더욱 튼튼하게 
방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당나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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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요동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게 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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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대운하를 
만들고 난 이후부터였음."


그렇다면 
중국의 대운하란,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코 달갑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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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왜 북방의 한랭한 땅까지 차지했나?

농경민족들은
농사가 되지 않는 

척박한 땅에는 
관심이 없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한사코 대동강을 넘으려 하지 않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역시 

백제와 신라의 영토는 
그토록 차지하고 싶었어도

고구려의 영토는
끝내 욕심을 내지 않았다.

"춥고 황량한 땅 가져서 뭐 함?
유지비만 들어가게.." 

반대로 척박한 땅에 살아가던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특히 한파와 가뭄으로
초원에 풀이 말라죽거나

전염병으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면
 

이들은 살 길이 
막막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굶어죽지 않으려면
농경국가를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유목민족은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허구한 날 말 타고 사냥질하면서
배운 게 싸움질 아님?"

"맞아. 우리가 힘을 합치면
평소 쟁기질이나 하는 농사꾼 따위는 문제도 아니지."

때문에 이들의 도발을 막는 게
농경국가들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으니,

그런 이유로 일찍이 중국은
만리장성을 둘러치며 담을 쌓고 살았다.
▲ 중국의 만리장성(좌), 고려의 천리장성(우)

하지만 배고픈 유목민들은
그런 장성을 뚫고서라도 쳐들어왔으니

이때 물건을 훔치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냥 눌러앉아
내친김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풍요로운 농경 문명을 
만끽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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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요·금·원·청
모두 그런 경우라능."

그러다 보니 장성 밖의
유목민족의 땅은

자연스레 이민족 왕조의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고
▲ 12세기 금나라의 영토

그런 이유로 
농경민족이 

평소 쳐다보지도 않았던 
척박한 영토까지 

모두 중국 제국의 영토로 
포함되곤 했던 것이다.
▲ 13세기 원나라의 영토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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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세워진 이민족 왕조들의 수도는
항상 '베이징'이었다는 것이다.

요·금·원·청 모두
예외 없이 수도는 베이징이었다. 
▲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곳

왜 그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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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은 연평균 강수량이 500mm 정도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접경 지역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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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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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한족이 사는 동네 한가운데 
둘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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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략적으로 건설한 곳이 
베이징(연경, 대도)이었음."

다만 유목민족 중 
가장 보수적이었던 몽골인들은

화북지방을 점령한 후 
50년이 지난 뒤에야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게 된다.
 

 쿠빌라이
"초원의 카라코룸은 
제국의 수도가 되기에는.."

 쿠빌라이 
"주변 인구도 적고 
물자도 부족하고.."

 쿠빌라이 
"이런 이유로 앞으로 수도를 
대도(베이징)로 옮기겠다능."

▲ 카라코룸 : 베이징 천도 이후, 여름철 수도로 사용됐다.

한편 베이징은 수나라 때 만들어진 
대운하의 북쪽 기점이기도 했다.

여기에 몽골인들은
베이징에서 바다로 나가는 운하를 뚫고

베이징에 항구를 만들어
직접 물길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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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몽골인들의 응용력은 대단!"


● 윈난성이 중국 영토로 편입된 사연

오늘날 중국은 
전체 인구의 90%가 넘는 한족을 비롯해 

총 56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51개의 민족들이
윈난성에서 살고 있다.

윈난성의 면적은 39만㎢로 
중국 전체 면적의 4%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이리 많은 소수민족들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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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지형적인 요인 때문이다.

윈난성 일대는
전체 면적의 95%가 

평균 고도 2천m가 넘는 
고원과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 윈난성의 험한 산세

그 사이사이로 1,400여 곳의 
계곡과 분지가 있어 읍락을 이루고 있다. 
▲ 윈난성의 읍락

그런 읍락 중에는
수백만 명이 사는 곳도 있지만, 

면적이 좁은 곳은
겨우 수천 명이 사는 곳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읍락끼리 
왕래하기 위해서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며칠을 가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요즘에야 산을 헐거나 터널을 뚫어 
도로를 만들 수 있지만, 
▲ 윈난성의 고속도로

20세기 이전에는 
길을 내는 것조차 어려운 곳이었다.
▲ 윈난성의 험준한 산맥

그러했으니
이런 험준한 환경에서

통일된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윈난성에도 남조(649~902), 대리(923~1253) 
등의 나라가 있었다.

다만 이들은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부족 연합에 가까웠다. ☞ 참고
▲ 13세기의 대리국 (보라색) : '대리석'의 명칭은 이곳의 특산물에서 유래됐다.

지형적인 특성상
내부 통합이 어려웠기 때문에

연맹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대리국 시절 축조되었던, 높이 70m의 파고다

무엇보다 도로가 
너무도 비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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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협곡 사이에 나 있는
길이 5,000km의 비좁은 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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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쥐나 겨우 지날 수 있다고 해서 
조로서도(鳥路鼠道)라고 부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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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의 차와 티벳의 말이 교환되는 곳이라 해서
차마고도(茶馬高道)라고 불렀다능."


그런 비좁은 도로를 뚫고
수천, 수만의 군대가 쳐들어오기란 쉽지 않았으니,

그렇기 때문에
유독 윈난성에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험준한 땅에

군대를 파견하고
복속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정복의 야심을 가졌던 
몽골 군대였다.

무려 4천m의 산을 타고
쳐들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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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그리고 몽골인들의 
불굴의 노력에 힘입어

이후로 윈난성은
중국 왕조의 영토로 편입되어

명·청 왕조 모두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며 통치하게 된다.
▲ 15세기 명나라의 영역


● 티벳의 복속

농경 국가였던
중국의 왕조들은

만주·몽골·윈난 등의
척박한 땅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 땅을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던 이들은

항상 보면
이민족 왕조들이었다.

"땅은 일단 먹고 보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말썽이 안 생김."

티벳 역시 마찬가지였다.
▲ 티벳의 초원

척박하고 험준하기로 따지면
만주·몽골·윈난에 결코 뒤질 바가 아니었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티벳고원은 
해발고도만 평균 4,500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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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백두산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겠군."

하지만 이곳을 편입한 것 역시,
만주족의 청나라였다.

물론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만주족이 중원 대륙에
'청나라'라는 거대 제국을 세울 무렵,

중국 남쪽에는 
반란 세력이 집결해 있었고

이들은 '타도 만주족'이라는 기치 아래
티벳·몽골·대만의 해적들과 손잡고

합심해서 청나라를 
공격하고자 했었다.

 오삼계
"모두 힘을 합하면 
만주족에게 이길 수 있다능."

이때 재밌는 것은, 이런 합심 공격에 
조선도 끼어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청나라의 강희제는
이들 반란 세력들을 차례로 박살내면서

겸사겸사 영토 확장까지
단행했던 것이다.

 강희제 (당시 청년시절)
"이것들을 아예 복속시켜 
나라를 없애버려야만, 후환이 안 생기지."

따라서 반란군의 수장이던
오삼계라는 인물이
 오삼계

티벳·몽골·대만 등을 
꼬시지 않았더라면

청나라가 애써 이들 지역으로 
원정군을 보낼 리 없었을 테고

그러면 지금쯤 
티벳·대만·신장성 일부는

독립국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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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으로의 확장

● 동양의 콜럼버스, 장건

동서양의 경계는 어딜까?

이렇게 물으면,
흔히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부인

터키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세계사적으로 동서양의 경계는
히말라야 산맥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서양 문명은

이집트, 인도, 동 지중해
등지로 퍼져나가

이들 문명들은 상호 교류를 통해
서로 유사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지만

동아시아의 외딴 중국 문명은 
히말라야 산맥에 가로막혀

다른 문명들과는 
철저히 차단된 채

독자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문명은
2100년 전까지만 해도

서양 세계를 
거의 모르고 살다시피했다.
▲ BC 400년 경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인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개척했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BC 130년경
한나라 사람 장건이었다.
▲ 장건의 서역 여행길

사실 그의 발견은
그야말로 우연적이었지만,

문명을 바꾼 파급력으로 보자면
결코 콜럼버스에 뒤지지 않았다.
▲ 콜럼버스가 가져왔던 작물들 : 호박, 고추, 토마토, 감자, 카카오, 강낭콩, 땅콩, 해바라기, 옥수수


● 월지를 찾아라

BC 206년 
한나라의 유방은

초나라의 항우를 무너트리고 
중원 대륙을 통일했지만

북방의 흉노족만큼은 
감당해낼 수가 없었으니
 
▲ 흉노족 기병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된다.

"매년 술과 비단을 갖다 바칠 것."

"또 매년 이쁜 공주를 보낼 것."

"아 눼눼.."

▲ 흉노왕의 첩이 된 한나라 공주

때문에 훗날
한무제 (BC156~87)

유목 국가 흉노를 제압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대외 정책으로 삼게 된다.

 한무제
"두고 봐라. 
그동안의 굴욕을 반드시 되갚아주겠다!"

때마침 이런 소문이 들렸다.

"폐하, 깐수성 부근에
월지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번에 흉노한테 패해서
서쪽 어딘가로 쫓겨났다고 하옵니다."

▲ 월지는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인도로 들어간다.

 한무제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월지랑 손을 잡고
양쪽에서 협공을 하면.."

 한무제
"흉노를 제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 한무제는
월지에 보낼 사신으로 장건을 선발했다.

 한무제
"너가 좀 갔다오라능."

 장건
"넵!"

그리하려 장건은
100여 명의 사신단을 이끌고 

BC 139년 경
장안을 출발해 서쪽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출발부터 
문제가 생겼다.

 장건
"월지가 대체 어디에 있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흉노 서쪽에 있다는 것만.."

그렇게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월지를 찾아

"월리를 찾아라?"

장건 일행은 
흉노의 영토를 지나가고 있었고,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족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니들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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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그렇게 붙잡힌 장건은 
무려 10여 년을 억류당하게 된다.

 장건
"아놔.."

하지만 장건은 기회를 엿보다가
탈출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월지에 도착하게 된다.

 장건
"드디어 도착했구나!"

 장건
"헐, 그런데 여기 사람들
생긴 게 왜 이럼?"


어쨌든 장건은 
월지왕을 찾아가게 된다.

 장건
"지금 한나라가 
흉노를 치고자 하는데.."

 장건
"월지가 우리와 힘을 모아
흉노를 협공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월지왕은 거절했다.

 월지왕
"미.. 미쳤어? 
흉노가 얼마나 센 넘들인데.."

그렇게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 월지의 후예로 추정되는 소그드인(페르시아 계통)

일 년 남짓 월지에 머물던
장건은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또 흉노족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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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그런데 또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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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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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역 점령 : 실크로드의 시작

장건은 비록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당시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보고했고, 
▲ 서역인

이는 한나라가 대외 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한무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서역의 말(馬)이었다.

 한무제
"오! 그래?"

 한무제
"서역에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馬)이 있단 말이지."

 장건
"그렇사옵니다. 폐하."

 한무제
"그래! 그걸 타고 싸우면
흉노를 물리칠 수 있겠어.."

그런 욕심에 한나라는, 
BC 104년 서역을 공격하여

말 3천 필을 
약탈해 오게 된다.

 한무제
"하하하.."

결국 장건의 여행이 
서역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서역 말(馬)의 
효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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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나라 군대는
흉노를 물리치게 되었고

내친김에 서역을 점령하여
서쪽 멀리까지 영토로 복속하게 된다.

그러자 한나라 상인들이 
진귀한 물건을 찾아 서역으로 향했다.

당시 서역은 인도·페르시아는 물론
로마와도 거래를 하고 있어

중국인들이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김용만, 세상을 바꾼 길 p.117~118)
▲ 서역을 통해 중국으로 전래된 포도

포도·아몬드·목화·무화과·참깨 

플룻·오보에·비파
▲ 서역의 악기, 플룻과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8세기 당나라 궁녀들

인도에서 전래된
배·시금치·후추 등의 식물들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대추야자·호두·서커스·유리·석면 등등

▲ 후한시대의 서커스

대신 중국도 서역에
종이·복숭아·수수·국화 등을 전파했다.

이때 무엇보다 서역인들을 
매료시킨 상품은 '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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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렇게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옷감이 있을 줄은.."

그런 비단의 소문은 
곧 페르시아를 거쳐 로마에까지 퍼졌고

비단을 얻고자 멀리 로마의 상인까지 
서역으로 찾아왔으니,

덕분에 서역의 상인들은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결국 장건의 서역 여행은 
동서간의 교류를 발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덕분에 인류 문명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실크로드의 확장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문물 중에는
'불교'도 있었다.

불교는 서기 1세기 경 
중국에 전파된 이후

5세기 경 한반도,
7세기 경 일본으로 퍼지게 된다.

그리고 '불교'의 전파야말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일대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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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불교는 
사상적 통일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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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강화와 사회적 안정을 가져와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게 된다능." 

때문에 실크로드가 
개통되지 않았더라면

불교는 보다 늦은 시기에 
전파되었을 것이고
▲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불교와 같은 '국가 종교'가 전파되기까지는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의 발전 속도도

그만큼 더
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실크로드는 
동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지나 

이후로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연장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통일신라 유물 가운데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돌 십자가, 마리아 관음상 등이
발견되기도 하고

또 로마의 유리와 
로마의 보검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 신라의 유리 그릇


●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변한 서역

사실 서역 땅에는
사람이 살기 힘들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 라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모래 폭풍이 불면, 무려 300m 높이의 
거대한 모래 언덕을 만들어 내고

겨울에는 밤의 온도가 영하 40°C,
여름에는 한낮의 온도가 50°C를 웃도는

극한의 기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주변의 높은 산맥의 만년설에서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내리기 때문인데,
▲ 타클라마칸 사막을 둘러싸고 있는 톈산산맥

이러한 물줄기는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땅 밑으로 흡수되어 
지하수로 흐르게 된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카나트(카레즈)로 불리는 터널식 지하수로를 파고

그 물을 농토와 마을까지 끌어들여 
농사를 짓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개농법은
농토를 크게 늘릴 수 없어

부양 가능한 인구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크로드가 개통되면서
동서 교역이 활발히 이뤄지자

서역 지역에는
갑작스레 특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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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이야말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경지라 할 수 있지."

특히 7~8세기,
당나라 시기에는

화려한 광택과 
세 가지 빛깔을 내는 

'당삼채'라는 도자기가 
비단만큼이나 인기를 누리며

유럽에서 엄청난 고가에 
팔리고 있었다.

그러했으니 서역으로 
비단과 도자기를 얻고자

수많은 대상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고

그만큼 서역 땅은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주변의 강대국들은

서역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경쟁을 했다.

중국(한) → 돌궐 → 중국(당) →
페르시아 → 티벳(서하) → 몽골(원)

등이 번갈아 가며
이곳을 지배했던 것이다.

다만 15세기 이후 
바닷길 시대가 도래하면서

실크로드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어

이곳은 가난한 유목민들의 땅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 19세기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마을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중국의 영토로 
각각 분할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서역의 서쪽은
'스탄'국가들로 독립을 하게 됐지만,


▲ 중앙아시아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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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가 밭을 갈고
한가인이 소를 몬다는 그곳?"


서역의 동쪽은 여전히
중국의 변방으로 남아있다.

다만 중국인들이 자신있게
고유 영토라 주장할 수 있는 까닭은,

2천 년 전부터 이곳을 개척했던 
과거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 장건의 서역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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