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보다 앞섰던 동양
● 서양보다 앞섰던 동양의 정치체제
기차가 널리 도입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물자와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어
말이 달리는 속도를 능가할 수 없었다.
중앙의 명령이
지방에 전달되는 속도도
말이 달리는 속도를
넘기 힘들었다.
"비둘기(전서구)나 봉화가 있었다지만
제한적이었으니.."
때문에 어느 한 지역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소식이 중앙정부로 전달되기까지는
적어도 며칠이 걸렸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 앞바다를 침략한
왜적의 소식을 알리는 데에만
꼬박 사흘 반나절이 걸렸으니,
임금이 소식을 들을 무렵
이미 왜적은
부산을 모두 장악하고
상주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때문에 전통시대의 국가들은
중앙의 명령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행정의 범위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들은
중앙집권 체제가 아닌,
봉건체제로
영토를 경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란과 반란이 잦았다능."
하지만
동양은 달랐다.
서양의 역사가들이
크게 놀라게 되는 사실 중 하나가,
중국에서는 2천 년 전부터
그 커다란 영토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인도도 거대 제국을 세웠지만
기본적으로 봉건체제였음."
BC 221년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뒤부터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까지
2천여 년 동안이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제국 체제가 유지된 것이다.
"헐! 2천 년 전부터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고,"
"중앙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군대를 징발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면
각 지역에까지 하달되는 데
아무리 빨라도 며칠,
혹은 몇 주일, 몇 달까지 걸리는데도
중국에서는 2천 년 전부터
중앙집권 체제가
성립하고 유지되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도 사이즈는 작지만
'문치주의'만으로
군대도 거의 없이
무려 500년이나 국가를 경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년 가까이 전쟁을 모르고 살았다.
일본도 형식적인 자리였지만
덴노의 가문이 2천 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었고
에도시대 이후, 250년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며
세계에서 4~5번째로
인구가 많았던 일본 열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서양에서라면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 절대권력이 통용되던 동양의 역사
서양의 국가들은
'명령'을 통해 운영되었지만,
동양의 국가들은
명령보다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사실 동양의 경우,
행정구역이 광범위했기 때문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현지의 주민들과
의사소통조차
원활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동양 3국 중 가장 영토가 작았던
조선만 하더라도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수령들이
현지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통역이 필요하는 경우가 잦았고,
그만큼 아전(구실아치)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가 많았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아전에게 따로 급료를 줬던 게 아니어서,
고을 수령과 백성들 간의
의사소통을 구실로
불가피하게
뇌물을 뜯어먹어야 했고
의도적으로 소통을 왜곡시키는 식으로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아전
"에헴!"
즉 이 정도로 중앙과 지방은
소통이 부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앙의 권력이
각지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동양의 경우 지배의 논리가
명령하달 체계가 아닌,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인정하는
'유교적 세계관'에 의해
운영됐기 때문이다.
"천자의 권위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이는 천리(天理), 즉 하늘의 도리임!"
"그러니 천리를 거역하면
그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행위임!"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군주는 살아나야 했고
사직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그러한 생각은
백성들에게도 내면화되었다.
"임금이 살아서 종묘사직을 지켜야
나라가 계속될 수 있는 거지."
"그래, 맞아!"
그래서 백성들은
생전 일면식도 없는
중앙 지배자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숭배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동양의 국가는
하나의 커다란 '가부장제 사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군주를
국부(國父)라 했다능."
그에 비해 서양의 역사에서는
한 번도 동양의 왕조처럼
지배자가 절대 권력을
누린 적이 없었다.
절대왕정 시대라는
유럽의 17~18세기에서도
동양과 비교해보면
그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유럽의 군주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지 못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태양왕 '루이 14세'조차도
궁정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에게 매관매직을 하자,
어떤 신하에게
이런 조롱을 들어야만 했다.
폰 샤르트란
"황제가 관직을 새로 만드실 때마다
신은 그것을 살 바보를 만드신다."
게다가 루이 14세가 죽자
국민들은 애도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추락한 태양왕이 드디어 죽었구나.
우아! 기분 좋다."
동양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헐! 어떻게 신하와 백성들이
군주를 험담할 수가 있지?"
● 유교사상의 양면성
그렇다면 보자.
전통시대 동양과 서양 중
어느 쪽이 더 발달된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었겠는가?
또 어느 쪽이 내란과 반란에서
더 안전적이고,
국력을 결집시키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었을까?
당연히
동양이었다.
바로 그런 근거로
15세기까지, 혹은 17~18세기까지
동양이 서양을
앞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민주주의 체제가 있었다던
고대 그리스는
절대로 높이 평가할 대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동양의 역사만 해도
고대국가 초기에서는
여러 군장들이 회의를 해서
의결하는 '연맹왕국' 체제였다.
▲ 신라의 화백제도
그러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운영의 효율성을 좇아
지휘자 한 사람에게
권력을 결집시키게 되었고
대신 군주는
부족장들에게는 관직을 하사하며
그들의 권위를 지켜주는 식으로
'왕정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동양의 왕조는
여러 모순과 분란을 극복하면서
'무력'에 의해서가 아닌
'논리'에 의해서 통치를 하기 위해
국가 운영 철학을 고안하게 됐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바로 '유교사상'이었다.
"쉽게 말해 문치주의를
시작하게 된다능."
동양이 서양을 정치·행정적으로
앞섰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밖으로는 '사대자소(事大字小)'에 의한 방법으로
무력 충돌을 최소화하고
"사자대소란,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살핀다는 뜻임."
내부적으로는 '충효사상'으로
중앙집권적 체제와 안정된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어버이게게 효도하듯
나라님에게도 충성을 다하라능. 그게 백성의 도리임."
하지만 서양에서 동양의 수준으로
국내외적인 안정을 도모하려면
막대한 돈과
군대가 필요했다.
▲ 로마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상당한 재정을 쏟아부어야 했다
문명 발전사에 있어 동양은
구대륙에서 가장 후발주자였지만,
빠른 시일 내에
서양(유럽과 중동, 인도까지 포함한 범주)을 앞지르고
세계사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도
'유교'라는 탁월한 통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점은
단점이 되기 쉽다.
동양의 정치가들은
유교사상의 안락함에만 너무 안주했고,
때문에 2천 년 간
정체되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겠어?"
반면 서양의 경우는
왕정, 과두정, 공화정, 민주정 등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실험을 했고,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양식 민주정치에 의해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서양의 자본주의 탄생
● 자본주의의 맹아
15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 지역은
8세기부터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 이슬람 지배하의 스페인
800년 동안이나 계속된
독립운동 끝에
이베리아는 드디어
무슬림 세력을
북아프리카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1492년)
이를 기념해
스페인 여왕 이사벨은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에게
대서양 항해에 필요한 지원을 약속했고,
덕분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콜럼버스
"좋았어. 인도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기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도
아프리카를 남하하여
인도에 도착하는 항로 개발에 주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모두
인도 항로를 개척하려 했던 것은
'향신료'를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 후추는 같은 양의 금과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고가품이었음."
이전까지 향신료 무역은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차지였다.
▲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던 베네치아 상인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아랍 상인들이
인도의 향료,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시리아 연안까지
육로로 실어 오면
북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선박으로 싣고 가
▲ 중세 베네치아
서유럽(특히 프랑스) 시장에
내다 파는 형식이었다.
▲ 프랑스의 샹파뉴 시장
그리고 여기서 얻은
부를 기반으로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은
14세기부터 '르네상스'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베리아의 신생국들은
동방무역이 몹시나 탐이 났고,
그래서 과감하게 모험을 시도하여
'본의 아니게' 신대륙을 발견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회항하는
인도항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특히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은
이탈리아의 독점이 무너진 결정타였다.
"하하하. 이젠 우리도
향신료 무역을 할 수 있게 됐음."
"아프리카에서 얻은
노예와 상아는 짭짤한 부산물."
배 6척을 보내고
5척이 난파하고 1척만 돌아와도
떼돈을 벌 정도로
수익성이 좋았던 사업인지라
▲ 16세기 후반 리스본 : 인도의 물건을 싣고 도착한 포르투갈 상선
포르투갈의 청년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낫과 쟁기를 집어던지고
망망대해로 떠나게 된다.
▲ 16세기 포르투갈 농민
다만 향신료 무역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될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 무렵의 해도를 보면
바다 곳곳에 괴물이 그려져 있는데
소용돌이나 암초가 있는 해역을
그렇게 묘사한 것이다.
"잘 되면 대박
잘못되면 황천!"
오늘날로 따지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벤처 기업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런
모험의 과정이 있었기에
유럽에서는 비로소
자본주의가 새싹을 트게 되는 것이다.
● 주식회사의 탄생
향신료 무역을 하려면
최소한 배 3척에
한 척 당
선원 20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적어도 6개월,
길면 1년 이상을
바다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인건비와 보급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향신료 무역이
대박 아이템이란 걸 누가 모르겠나."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물론 왕실이나 부호들은
자비를 들여 선단을 꾸릴 수 있었지만,
그럴 만한 돈이 없는데
무역에 참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자본주의의 싹'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상업과 무역의 이득이
왕실과 소수의 부호들만의 전유물이라면
자본의 성장은 제한될 수밖에 없고
자라난 새싹은 곧 시들고 만다.
"동양에서는 이 문턱을 통과했던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능."
그런데 16세기
포르투갈 상인들은 기발한 생각을 한다.
중소 상인들끼리 돈을 모아
공동으로 투자를 한 것이다.
▲ 16세기의 리스본
이때 노련한 선장을 고용하면
성공률이 높아졌지만,
상인들이 챙길
배당금은 줄어들었고
신출내기 선장을 고용하면
성공률이 낮았지만,
상인들이 챙길
배당금은 많았다.
"흠, 고민되네.
어떤 선장을 고용할까?"
그리고 나서는
투자한 몫만큼 증서를 발행했다.
장거리 무역인 만큼
자본의 회임 기간이 길기 때문에
투자한 선박이
돌아오기 전에
투자자가 다른 일로
급전이 필요할 수도,
아니면 도중에
사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투자 증서를 매매하거나
자식에게 상속시킬 수 있도록
'증권'을 발행한 것이다.
"주식회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익명조합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지만,"
"증서를 발행하고
매매·상속·담보를 할 수 있게 한 적은 없었음."
이것이 바로
주식회사의 시초였고,
"본격적인 주식회사는
16세기 후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시작되지만.."
▲ 영국의 동인도회사 전경
한정된 자본을 결집시킬 수 있게 해준
'주식회사 제도'야 말로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시켜준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다.
● 보험업과 은행업의 탄생
향신료 무역은
워낙 위험성이 큰 사업이라
일이 잘못되면
선원들이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
투자자들의 돈도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뭔가 획기적인 제도가
나타나야만 했다.
그럴 때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걱정된다면
나한테 투자액의 5%의 돈을 떼어줘."
"미쳤어? 내가 왜?"
"대신 선박에 사고가 발생해서
돈을 날리게 되면,"
"그때는 내가 투자액 전액을
모두 보상해주겠음. 어때?"
"흠, 듣고 보니,
괜찮은 것도 같고.."
이것이 바로
보험의 시초였다.
보험의 원조가
'해상보험'인 것도
바로 16세기 대항해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험업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불확실성을 떨칠 수 있어
주식회사의 규모는
더욱 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은행도 발전하게 된다.
사실 은행업은
이미 13세기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북이탈리아에서 나타나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상인들의 돈을
관리해주는 일을 주업으로 했기 때문에
맡긴 돈을 떼어먹고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돈을 맡은 이들에게
대출'을 통한 이윤사업을 허용해줬더니
'
"쉽게 말해 고리대금업"
돈을 들고 튀는 행동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은행은 '예금'과 동시에
'대출' 업무를 맡게 되었고
17세기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오늘날의 은행과 같은 기관이 등장하게 된다.
▲ 16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은행
은행의 출현으로
자본주의가
더욱 성장의 박차를
가하게 됐음은 물론이다.
고로 서양의 근대화는
어느 순간에 이뤄진 게 아니었다.
수백 년에 걸쳐
주식회사, 보험업, 은행업 등의 시스템이
제도적으로
나타났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1638년 프랑스의 항구도시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서양의 자본주의 성장 과정은
정부나 특정 개인이 의도한 일이 아니라,
모두 그때그때의
필요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탄생하고
숙성되었다는 점이다.
"동양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라면
으레 지배층이 계획하고 결정하기 마련인데.."
왜 동양은 스스로 근대화를 할 수 없었나?
● 왕토사상과 그 문제점
동양(한중일)의 전통사회에서는
모든 땅은 군주의 것이었다.
백성들이 가진 땅은
전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땅만 그랬던가?
재산도 그랬고,
인적재산이라는 '사람'도 그러했다.
모두가
군주의 소유였다.
중국의 천자는
천하의 주인이었고,
한반도의 임금과 일본의 쇼군은
왕국의 단독 주인이었다.
군주는 그런 땅을
백성들에게 빌려줘서는
세금을 받는다는 논리로
영토를 경영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3천 년 전
중국 주나라 때부터 나타난 아이디어였고,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에 의해
이론적 지지를 얻게 된다.
"일명 왕토사상!"
"한반도는 8세기 초 성덕왕 때,
일본은 8세기 중엽 나라시대 때부터,"
"통치논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능."
고려의 '전시과', 조선의 '과전법'은
모두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심지어 19세기 후반까지도
한중일 3국에서는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때까지 동양에서는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임."
왕토사상이 나타난 배경은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서였다.
화폐경제가 부재했던 과거에
관리의 급료는
돈이 아니라
토지로 지급되었고,
관리들은 그 토지에서
수확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징수해 먹을 수 있는,
'수조권'을 군주로부터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급료제도'로
출발한 토지수조권은,
이후 '토지제도'와 '조세제도'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땅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것이지만,"
"그 중 일부를 신하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나라 재정으로 쓴다."
"바로 이런 논리!"
때문에 군주는 언제든지
신하들의 땅을 환수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신하들은
더욱 군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농사를 짓는 백성들조차도
땅을 빌려준 군주에게
은덕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전통시대 국가의 안전성에서 보자면,
동양의 왕토사상은
서양에 비해 매우 탁월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 일본의 구분전
하지만 '왕토사상'은
그 자체로 내부모순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완벽한 소유자가 없었기 때문에
'토지겸병'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토지겸병이란,
남의 땅을 자신의 땅으로 합쳐버린다는 뜻임."
처음에 백성들은
나라로부터 경작지를 배당받고
생산물의 일정률을
'세금'으로 납부하면 됐다.
관리에게 납부할 수도
나라에 납부할 수도
혹은 국경 부근의 농민들은
군대에 납부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누구에게 납부하든
기본 세율은 같았다.
"자, 여기 수확물의 10%요."
하지만 백성들에게 배분된
토양의 질은 제각기 달랐고,
어떤 곳은 용수로를 끌어오려면
십 리도 넘는 땅을 파야만 했다.
"젠장, 이런 땅을 주면서
해마다 세금을 갖다 바치라고?"
"그냥 농사짓지 말라는 얘기네."
또 흉년이라도 쓸고 가면
제대로 수확량을 얻지 못한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혹은 갖다 바치고)
다른 부유한 지주(대부분 지배층)의 밑으로 들어가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났다.
농사를 잘 짓고 있던
농민일지라도
지배층에게 땅을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제대로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땅의 본래 주인부터가
나라님의 것인데,
농민이 무슨 권리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보니 농민들 대부분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고,
영토의 상당수를
지배층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하하"
그러면서 나라의 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군주의 권력도 더불어
갈수록 약화되는 것이었다.
고려와 조선 중기부터 진행되는
황폐한 토지 겸병은 바로 이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중국의 경우에도 번영기가 지난,
왕조 중기에 이르면
늘 토지 겸병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일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토사상으로 지배되던
동양의 3국은
건국 후 50~100년이 지나면
경제 구조가 붕괴하면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쇠퇴일로에 섰던 것이다. 예외가 없었다.
▲ 동양 국가들의 수명주기 : 도입기에서 성숙기까지가 평균 50년 정도였고, 이후 200년 가까운 쇠퇴기를 거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한 반복!"
● 사유재산의 부재
귀족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고달파졌고
참다못한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의 경우
세도정치기인 19세기 초중반,
홍경래 난, 제주민란, 진주민란 등
잇달아 민란이 터지기도 했다.
"더 이상 못 살겠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민란에 참여한 백성들은
관아를 털고 곡간을 털었을망정
군주에 대한 불평은
결코 토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지만
백성들은 결코
들고일어나지 않았고
자신들을 수탈해온
신분제 국가 조선을 위해,
"당시 조선의 국민들 중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음."
오히려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겠다며
많은 이들이 '의병'에 투신했던 것이다.
▲ 과거에 민족주의란 없었다. 다만 백성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인륜'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할 당시
사대부들은 이렇게 호통을 쳤었다.
"너희들은 본시 조선의 백성으로
입고 먹고 나고 자란 것이 모두 다 나라님의 은혜인데,"
"어찌 부도덕하게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이것이 바로
조선 왕조를 500년이나 유지시켰던
유교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충효사상'이었다.
"백성들은 자신이 피땀 흘려
먹고살았음에도,"
"나라가 자신을 먹여 살렸다는 생각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으니.."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때문에 흉년을 맞아
조세의 징수가 연기되거나 액수가 적어지면
나라님이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베푸는 시혜라며
하야와 같은 군주의 성은에
감개무량하며 고마워할 뿐이었다.
즉 조선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미우나 고우나
군주의 재산인데
군주가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탓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서양의 역사에서는
'사유재산'의 관념이 일찍부터 존재했고
역사가 진행될수록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물론 서양 역시
신분제 질서로 운영되어
지배층이 일반 백성들을
불합리하게 착취하는 사회였다.
다만 착취의 근거가
동양과는 확연히 달랐다.
유럽의 중세 봉건시대만 보더라도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대였으므로,
신분이 다르더라도
누구나 신 앞에서 동등했다.
그래서 농노를 착취하기 위해
영주는 '명분'을 내걸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방앗간, 화덕, 양조장
같은 시설을 독점하고
그 이용료를
터무니없이 높게 받는 방식이었다.
▲ 화덕을 이용하는 임차료가 워낙 비싸, 많은 농민들이 죽을 만들어 먹었다
여기서 생겨난 개념이
바로 임차료(rent)다.
영주
"사용했으니깐, 당연히 사용료를 내야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다고!"
하지만 동양의 역사에서는
임차료라는 개념이 없었다.
높은 신분이 낮은 신분을
'소유'의 개념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령이나 구실아치(아전)들은
백성의 재물 중에서 탐이 난다 싶으면
마음대로 탈취해가던 게
일상적인 모습이었고,
때문에 백성들은
수탈이 두려워서라도
쉽사리 재산을
축적하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동양에서는
'정치적 성공'은 곧 경제적 성공을 의미했고,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고관'이 되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데
더욱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 계약의 부재
1491년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1세는
이탈리아 출신 선원 콜럼버스와
3개월에 걸쳐 장시간 협상을 했다.
▲ 이사벨 여왕을 설득하고 있는 콜럼버스
콜럼버스
"저에게 투자하시면
식민지의 땅을 모두 폐하께 드리겠습니다."
콜럼버스
"대신에 식민지에서 나온 수익금 중
10%는 저에게 떼어주셨으면 합니다."
이사벨 1세
"음.."
이러한 계약을 통해
콜럼버스는
여왕으로부터 3척의 배를 하사받고
탐사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는가?
군주와 신하가
계약을 맺는다?
동양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신하도 군주에게는 인적 자산,
즉 일종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약이란,
당사자들 간에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가!
"평등 관계가 아니라면
언제든 계약 파기가 일어날 수 있는 법."
그러니 동양에서는
서양과 같은 '계약'의 관념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서양의 역사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계약'의 관념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인근 리비아와 알제리에 해당하는
누미디아 지역의 기병들을
자주 용병으로 고용했었다.
▲ 누미디아 용병
그런데 이집트의 군주
파라오가 누구인가?
절대 권력자를 넘어
신으로까지 추앙되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국토방위를 위해서는
이민족 용병과 대등한 계약을 했던 것이다.
로마의 황제 역시 국경의 방위를 위해
게르만 용병과 '계약'을 맺었다.
때문에 용병이
배신을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 그것은
'계약파기'라 불러야 한다.
그만큼 서양 문명에서는
아주 일찍부터
'계약'의 관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중국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천자)로서
세상의 모든 재산과 권위를 다 가졌기에
용병 따위를 쓸 이유가 없었다.
권력의 최상층에서
계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
사회기저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계약이 체결되었다 하더라도
'계약파기'로 인한 손해를
대체 어디서 하소연하고,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동양에서 계약 행위란
원천적으로 나타나기가 힘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래 행위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 세금에 대한 편협된 생각
18세 후반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정치적 권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 보스턴 차사건
"의회 대표 한 명도 선출 안 해주는 영국을 위해
세금을 납부할 수는 없다!"
사실 당시의
세금 대상이나 세율로 봐서
아메리카의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의 본토인들보다
훨씬 낮은 세금을 요구받았는 데도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다.
▲ 독립전쟁
왜 그랬던 걸까?
서양에서의 세금은
바로 '명분'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국민의 납세는
국방·치안·행정·SOC 확충·복지 등의
상응하는 혜택을
대가로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식민지의 자치 의회와 형틀 : 당시 아메리카의 식민지인들은 엄청난 자율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하지만 동양에서의 세금은
오직 '의무'만 있을 뿐이었다.
국가의 모든 재산은
군주의 소유였기 때문에
군주의 땅을 빌려서
경작을 하는 백성들은
의당 세금을 내야만 했고
감히 다른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재정은
백성이 아닌,
군주의 효용을 위해
사용되는게 기본이었고,
▲ 황실을 권위를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정화의 남해 원정
▲ 상업적 이득을 위해 출항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 호
그만큼 국가는 대중의 욕구에
등을 지게 된다.
▲ 황제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진시황의 병마용갱
▲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원형경기장
우리나라의 경우,
민주공화국 체제에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금에 대한 전통적 인식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다.
정부에서 농촌마다
시멘트와 철근을 던져주자
농촌 주민들은
건설 자재를 가지고
마을 길도 넓히고, 교량도 짓고
마을공동 빨래터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에서 마땅히 해야만 했던 공공사업을
국민이 무료로 노력봉사하고 있었음은
대부분 깨닫지 못했다.
"국민들이 납부하는 세금에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임."
지금도 관공서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드물다.
"아, 급해. 화장실이 어딨지?"
"저기 파출소 보이잖아.
저기 화장실 사용하면 되잖아."
"읭? 저길 사용해도 돼?"
"너 평소 세금을 왜 내?"
이렇듯 동양의 '관치(官治)' 의 관념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그래서 관공서에서 일하는 공무원을
국민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보다는
국민을 '관리'하는 이들로
인식할 때가 많다.
● 왜 동양은 스스로 근대화를 할 수 없었나?
왜 서양은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동양은 스스로 성공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부재에 있었다.
서양의 근대화 과정만
봐도 그러했다.
16세기 상업혁명
17세기 과학혁명
18세기 산업혁명 순으로 일어났다.
먼저 돈이 쌓이고, 기술이 고안된 다음,
산업으로 응용된 순서였다.
돈이 쌓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자본주의인 것이다.
"자본(돈)이 지배하는 경제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라능."
반면에 동양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했다던
11세기 송나라와
17세기 일본의 에도막부 시대는
모두 상업의 발달에만 머물렀지,
거대 자본이 출현하는
'자본주의'로는
단 한 번도 진척되지 못했다.
100년, 1000년이 지나면
진척됐으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 지배층에게 유학(특히 주자학)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학문이었다
사실 서양에는 있었지만
동양에는 없었던 것들,
즉 주식회사, 은행업, 보험업,
사유재산의 개념, 임대차, 계약 등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자본주의'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도래를 막았던 것은,
바로 오랫동안
동양의 정치·사회를 안정시키고
동양을 세계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던,
고대에 있어서
가장 발달했던 통치철학인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남경태), 금융으로 본 세계사 (천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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