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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중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던, 당나라 : 경이적인 통치 시스템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8889838
오늘날 거대한 중국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 수당제국, 오늘날 거대 중국이 있게해준 장본인

오늘날의 거대공룡 중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헐, 진짜?"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중국은 지형적으로 볼 때 
거대한 하나로 통일될 수 밖에 없었음."

 남경태 
"유교적 전통 때문에 
언제고 다시 뭉치려 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패트리샤 에브리
"오늘날 중국의 모습은
6세기 후반 수당대의 통일이 없었다면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을지도.."

사실 581년 수문제 양견이 
중국을 재통일 하기까지

중국 대륙은 근 300년 동안 
북부와 남부의 여러 국가들로 분할되어 

각자 따로 놀기 형태로 
왕조를 이어왔던 상태였다.

수당대 이전의 상황을 
돌이켜 보아도

중국은 통일된 시간보다는
분열된 시간이 오히려 더 길었다.

"주나라 이후부터 계산해보면
중국은 분열된 시기가 1000년인데 비해
통일된 시기는 500년 정도였지."

당시의 중국 북부와 남부의 
문화적, 지리적인 차이점을 고려해 볼 때

유럽의 로마가 동서로 분할되었듯이
중국도 영속적으로 분할된 상태가 굳어져 

북부와 남부가 독립된 문명 공간에서
쭉~ 그대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랬으면 좀 좋아."

"중국, 너무 커서 문제야."

우리나라를 비롯, 아시아 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웃에 거대한 나라가 있다는 것은
불편하고 위협적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중국의 북부와 남부는 
통일되었고,

이후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는 
보다 강화되었고

중국인들의 공동체 의식과 사상은 
더욱 확고해져 버렸다.

이후 중국인들은 
분열된 상태를 부자연스럽게 생각하고

한·당대를 모델로한 
통일된 모습이

자신들이 추구해야할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고 인식하게 된다.


● 중국을 재통일 한 것은 중국인이 아니었다?

때는 3세기 무렵, 
만주 서쪽 요하강 상류에

선비족(모용 선비족)이라 불리우는 
조그만 유목 부족이 있었다.

이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이웃 부족들을 하나씩 흡수하더니,

4세기 초가 되면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여
화북지방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자 몽골초원에 살던 
유목민족들이

자신들의 부족 이름을 
저마다 '선비족'으로 세탁하기 시작했다.

 유목민
"요즘 선비족이 대세임.
우리 부족도 이제부터 선비족이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에 
흉노족으로 불리던 이들의 후손들이었다.

어쨌든 좋다.

사실 부족의 이름 사칭은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참고

한편 4세기 당시, 동아시아는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게 된다.


소빙하기였다.

이 시기 초원의 풀들은 싹이 돋지 않고
가축들은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

때문에 몽골초원의 짝퉁 선비족(탁발 선비족)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1. 남는다.
2. 농경민족을 약탈한다.

여기서 1번을 선택한 이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겠지만,

다행히도 명맥을 유지하여 
200년 후에는 돌궐족으로 불리우게 된다.

그리고 2번을 택한 이들은
중국으로 내려와 화북지방을 약탈하더니

그대로 눌러 앉아 
270년 동안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고,

종국에는 중국 대륙을 
모두 하나로 통합하는 통일의 주역들이 된다.

결국 중국을 다시 하나로 만든건
오리지날 중국인이 아닌, 

선비족, 
아니 짝퉁 선비족들이었던 것이다.


● 선비족들의 정체성 : 우리도 중국인인데?

581년 선비족 출신인 양견(수문제)에 의해 
중국은 270년만에 다시 통일되게 된다.
 양견 

그리고 618년,
또 다른 선비족 출신인 이연(당고조)에 의해
 이연 

중국은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명패를 바꿔 달게 된다.

사실 당나라의 이연은 
수황제의 이종사촌으로서

성격상 보자면, 애써 수나라와 당나라를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당나라는 수나라의 시스템을 
대부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수당시대 선비족들의 정체성이다.

"과연 그들은 스스로를 중국인들과 다르다는 식으로
차별의식을 갖고 있었을까?"

사실 중세시대 이후 
중국을 지배했던 이민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각시켰고

중국 한족들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면서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0세기~13세기의 요금원의 유목민족이나
17세기~19세기의 청나라의 만주족들 모두가 그러했다.

 몽골족
"몽골인 지상주의! 남송인 차별!"

 만주족 
"만주족과 한족의 통혼불허! 
만주족 우대정책!"

하지만 4세기~9세기 경의 선비족들에게는 
그딴거 없었다.

 선비족 
"어차피 선비족이라는 것도 짝퉁인데
뭘 그리 선비족 출신이라고 유세를 떨고 다니나?"'

이랬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수당 통치자 중에 
어떠한 이들도, 

자신들이 유목민족 출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거나 내세우려하지 않았다.
▲ 당시 선비족 귀족들 (6세기)

사실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중국인과 융합되어
그들 고유의 언어를 잃었고,

풍습도 중국인들의 것으로 대거 융화되어
딱히 중국인과 다른 모습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들에게 남아있던 것이란,
자신의 조상들이 과거에 선비족 출신이라는 것 뿐이었다.
 
▲ 당시 선비족 귀족들 (6세기)

사실 그들은 중국인들과의 통혼을 통해
혈통적으로 보아도

딱히 선비족의 후예라고만 
볼 수도 없는 이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무예를 즐기고 
말타기와 사냥에 대한 애정이 깊었지만
 
▲ 6세기 선비족 

그렇다고 그러한 것들을
중국인들과 다른 모습들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당수 선비족 후손들은 
5세기 말에 얻었던 중국 성씨를 사용하였고

무관보다는 
문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4세기 화북지방의 귀족들

때문에 수당왕조는 
더 이상 이민족의 왕조로 보지 않는게 현실이다.



혁신적인 통치 방법 : 당나라는 이런식으로 성장했다

● 수당제국, 천재적인 시스템으로 국가를 통치하다

전통시대 모든 국가들의 공통된 골칫거리는
바로 국방과 재정, 그리고 민생이다.

"국방이 튼튼해야 나라가 존속되고
재정이 풍부하고 민생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번영하지."

그런데 알고보면 이들은 
서로 상생하기가 도통 힘든 게 아니다.

세금을 많이 거두면? 
민생이 힘들어지고..

국방을 튼튼히 하려면? 
역시 민생이 힘들어지고..

국방을 튼튼히 하려면? 
재정이 바닥나고..

민생을 좋게하려면?
재정과 국방이 약화된다.

고로 3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격이다.

때문에 이 3가지를 모두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그리 많지가 않았다.

 
"송나라는 민생은 좋았지만, 국방이 쥐약이었지."

"로마는 재정이 부족해서 망했어."

"조선은.."

그런데 수당시대에 
이 3마리 토끼를 일거에 취할 수 있는

천재적인 시스템이 등장하게 된다.
그게 바로 균전제다.

균전제(均田制)란 
국가가 모든 땅을 소유하고

땅을 균등하게 백성들에게 나눠줘서 
경작하는 제도를 말한다.

주나라 때 
정전제(井田制)와 흡사하다.

고려말 정도전이 꿈꾸던 
토지제도이기도 했다.

 정도전
"땅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8가구가 가장자리를 경작하게 하고,"

 정도전
"가운데 땅은 공동 경작하여 
수확물을 나라에 바치는 제도를 말한다능."

즉 생산물의 1/9를 
균등하게 국가에 징수하는 제도다.

백성들은 세율이 낮아 좋았지만,
대신 납세대상자의 수는 늘었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세수는 보다 늘어났다.

민생과 재정을 일거양득에 취할 수 있는
이상적인 토지제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전제는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기득권층의 반발, 
그게 항상 걸림돌이지."

하지만 4세기 이후 화북지방을 지배했던 
선비족 왕조들에 의해

그도안 이상향으로만 생각되던 '정전제'가 현실화 되었으니
그게 바로 '균전제'였던 것이다.

 
"왜 선비족 왕조에 의해 
균전제가 가능해졌어?"

"사실 중국은 한나라가 멸망한 후로 
거의 100년 넘게 지옥이었어."

 
"어떻게?"

"삼국지 봤지?"

 
"당연하지."

"그런데 사람들은 삼국시대하면 영웅들만 생각하지,
당시가 얼마나 끔찍한 시절이었는지를 잘 알지 못해."

"계속된 전쟁 통에 농지는 화폐화되고
농민들은 유리걸식하면서.."

"중국의 인구가 1/3 수준으로 
대폭 폭락하는 시기야."


 
"그 정도였어?"

"그뿐 아니야. 호족들은 농민들이 버리고간
토지를 싹쓸이하면서 대지주가 되었고,"

"그래서 삼국을 통일한 진(晉)나라 때까지 
중국대륙의 빈부격차는 엄청났어."

 
▲ 사마염의 양수레 : 그의 궁녀는 1만명이었기 때문에, 
양이 도착하는 쪽의 궁녀와 하룻밤을 잤을 정도다. 일명 양수레 로또

 
"서진시대 황제들의 
엄청난 호화사치는 들어봤어."

"맞아, 백성들이 굶어죽자, 
곡식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던 사람들이 당시의 귀족들이었어."

"그래서 그런 중국을 차지한 선비족들은 
무엇보다 빈부격차를 해소해야했지."

"때문에 강제로 귀족들의 땅을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눠줬던 것이고.."

 
"오! 그런거 보면 유목민족이라고 
마냥 무시할게 못되네."

"그렇지. 수확한건 공평히 나눠 갖는다는
유목민족의 관습이 중국제도와 결합되었기에.."

"균전제라는 시스템은 시행될 수 있었어."


● 이보다 훌륭할 수 없다 : 1석 3조의 통치방식

그런데 균전제에서만 
끝난다면

중국인들이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정전제와 크게 다를 바도 없었다.

하지만 선비족들은 
여기서 하나 더 생각했다.

바로 국방의 문제까지
균전제를 통해 해결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나라 관료 
"니들 세상에 공짜 없다는거 알지?" 

 당나라 관료 
"땅을 줬으니깐 
몇년동안 군생활 좀 해야되겠어."

이런 식으로 땅을 나눠주는 대가로
군역의 의무를 짓게한 것이었고

그렇게해서 농민들은 수도 또는 변방의 군대에서 
교대로 복무하게 됐다.
(당시 그들이 상대했던 주적은 돌궐족이었다.)
▲ 당나라 군

그래도 백성들은 만족했다.

 농민
"땅을 공짜로 나눠주고 
세금을 낮춰주는데, 뭐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때문에 수당제국 당시 농업생산력은 폭증하고, 
인구는 대폭 증가하고

국가재정은 풍족해지고, 
민생은 좋아지고

그러면서 군비부담은 줄고, 
국방은 강화되는 등

엄청난 사회, 경제적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예컨대 수당제국 초반 4,500만명이던 인구는
200년 뒤에는 8천만명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15세기 명나라 때 보다 
높은 수치다.

당시 세금(곡물, 옷감, 노역)을 
부과하던 납세자 수는

7세기초 450만호(2,300만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50% 수준이었지만 

100년이 지나면 총 900만호(5천만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70% 수준까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납세 대상자 수는
50%는 커녕, 30%를 넘기도 힘들었다.



중앙집권화 : 당나라는 이런 식으로 강화했다

● 황권 강화를 위한 수단 : 과거제의 시작

전통시대 중국 황제들의 
정치적 과제를 하나로 요약하자면 이랬다.

"어떻게 하면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중앙 통치를 강화할까?"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처음에는 힘으로 윽박질렀다.

 진시황 
"철권통치! 분서갱유!" 

하지만 
한계에 봉착했고

사람들은 '무력행사'라는 낭비 없이도
자발적으로 중앙집권 통치를 따르게 하기 위해

'유교'라는 사상을 
도안하게 된다.

"충효사상이란 알고보면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술책이고."

"인의사상이니 성리학이니 하는 것도
크게 보면 황권강화책이고,"

"좁게 보면 신분제도의 고착을 
꾀하는 것이지."

즉 폭력 대신 철학을 주입해서
스스로 평화와 안녕을 꾀했던게 유가사상이었다.
 공자

때문에 황제들은 유가적 가치가 배어있는
인재들을 등용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걸 최초로 행동으로 옮겼던 왕조가
바로 수나라였다.

 수문제
"어떻게하면 지방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황권을 강화시킬꼬?"

 신하 
"유학자들을 인재로 등용하소서."

 수문제
"어떻게?"

 신하
"과거시험을 치루는 겁니다." (선거제)

 수문제
"그게 뭥미?"

 신하
"유교적 소양과 지식이 높은 사람을 뽑기위해
공무원 시험을 치루는겁니다."

 신하
"그리고 뽑힌 사람들을 
지방에 관리로 파견하소서."

 수문제
"옳거니!"

 신하
"대신에 지방관들을 너무 한곳에 오래 있게하면
필시 토착 호족과 유착하게 될 것이니.."

 신하
"주기적으로 관리들의 부임지를 
옮기게 하는 겁니다."

 수문제
"오케!"

이렇게해서 수나라때부터 
과거제가 실시된다.

그리고 과거제를 실시하자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관리가 지방으로 파견될 수 있었고

지방관에 대한 감시비용,
반란으로 인한 토벌비용, 

관료의 부정부패로 인한 폐해 등의 
제반적인 비용(일종의 시장실패)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수대의 과거제도는 
당대에 와서 크게 개선되었으니,

당나라 때는 
전국적으로 유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해

유학 전문기관을 설치하고 경전을 발행하는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게 된다.


● 사대부 귀족의 등장

하지만 수당시대 
과거 합격자 수는 적었다.

당대에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은 
1년에 평균 20~30명에 불과했다.

다만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출세는 확고히 보장됐다.

 당태종 
"이왕이면 유학적 소양이 출중한 사람이
높은 관직을 맡아야 나라가 평안해지지."

때문에 과거제는 곧 관료제도 내에서 
계층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유학적 지식을 길러
과거제로 출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나라 관료
"요즘은 스펙시대야.
입사만 하면 뭐하나? 승진을 못하는데.."

 당나라 관료
"어서 과거제를 패스하라고."

그리고 과거제를 통과한 귀족들은
국가적인 특권에 힘입어

장차 '사대부'라는 
귀족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사대부는 곧 모든 귀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와! 그 어렵다는 과거시험을 패스하다니.."

또 과거제로 인해, 예전에는 전혀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을
비천한 가문 출신들에게도

능력만 있으면 
크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한 예로, 이전에는 시골 변방에만 떠돌고 다녔을 
광둥성 출신의 선비도

과거제도를 통해 출사하여
조정에서 최고 직위까지 오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당시의 과거시험은 

대부분 명문가의 
귀족 출신 집안에서 주로 배출됐다.

 
"이유가 뭐임?"

"예나 지금이나 잘 사는 집안 자제들이 공부도 더 잘하기 마련임.
괜히 강남 8학군이라 하겠어."

당시에 명문가 귀족 출신들은
관직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좀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쪽집게 과외였다.
 
▲ 수나라 당시 귀족들

게다가 상류층의 자제일수록
보다 교육에 집중할 수 있었던 환경도 있었다.

때문에 
수당시대 이후로 귀족들은

점점 승마술, 궁술, 검술 등과 같은 
군사적 기술을 배우려는 것은 기피하게 되고

유가적 학문수양에만 
정진하게 된다.



사상과 경제의 통합 : 당나라는 이런식으로 통합했다

● 통일된 율령제 실시

수당제국 때는 
통일된 법을 만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라 관료
"물건을 훔치면 화북지방에서는 곤장 30대인데
왜 강남에서는 곤장 50대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가장 먼저 북부와 남부 양쪽의 전통적인 법률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나라 관료
"앞으로 물건 훔치면 
어느 지역이든 곤장 40대임."

그리고 그러한 법률은
당대에 가면 보다 정교해지는데..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653년의 법전(당율)에 보면,

약 500가지가 넘는 
형벌 규정 조항이 나타나 있다.

"죄에 따라 어떤 형벌을 내리느냐가 주된 내용인데
가령 좀도둑은 가벼운 몽둥이질,"

"보다 무거운 죄는 곤장질, 노동형(도형), 유배형이 있고
가장 무거운 죄에는 사형을 내렸지."

 
▲ 중국의 곤장질

이런 법률은 성문화되어 
중국 전역으로 공표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는 
보다 통일된 모습으로 통합될 수 있었고

또 지방관의 형벌 남용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황권에 복종적일 수 있게 됐다.

"벌은 황제가 내리는 것이지, 
지방관이 내리는게 아님."

그런가하면 당시의 법률은 
신분제도의 질서를 잡는데도 유용했다.

"당시 법은 
신분간에 불평등적으로 집행되었어."

 
"어떻게?"

"노예가 주인을 구타하면 사형에 처했지만
주인이 노예가 구타하면 그 형벌은 훨씬 가벼웠어."

"부인이 남편을 구타하면 큰 형벌이 부과됐지만
남편이 부인을 구타하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

그리고 이런 법률은 
이후 중국의 형법 틀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우리나라와 일본까지 
이를 두루 모방하게 된다.


● 대운하 : 경제·정치적 통합의 요인

중국이 남북으로 통일되는데
가장 견인차 역할을 했던게 있다.

바로 
대운하다.

7세기초 막대한 노동력을 징집하여 
수나라는 대운하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러한 수송을 위한 수로는 
진(晉)나라 때부터 건설되기는 했지만,

이와 같은 대규모의 공사는 
전례가 없었다.

어쩌면 수나라때 대운하를 만들어서
남과 북의 수로가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후로 중국대륙은 
더욱 하나로 견고화 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대운하는 
불과 5년동안 건설되어

수도인 낙양에서 
양쯔강의 양저우까지 뚫었다고 하니

그 기술력과 동원 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실제로 100m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쌓았던 이집트인들도

1,500년동안 운하를 뚫어보려 노력했지만
번번히 실패를 겪었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그걸 단숨에 성공했고,

대운하가 건설되자 
수나라의 2대 황제 수양제는 의기양양하게

길이가 105km나 되는 선박행렬을 이끌고 
낙양에서 양저우까지 친히 행차를 하게 된다.
 

그리고 운하는, 
곧 남쪽으로 항저우와 

북쪽으로 베이징까지 확장되게 되니
그 길이는 총 2천km나 됐다.

이후 운하를 따라 도로가 닦이고
역참도 마련되게 된다.
 

이로써 중국은 풍부한 강남의 곡물 생산력으로
인구가 조밀한 화북지방을 먹여 살릴 수가 있게 되었고

변방(특히 중국 동북쪽)으로의 
병력 수송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되어

영토를 더욱 
튼튼하게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운하가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은?"

"중국이 보다 강성해지고 거대하게 됨."

"그리고 중국이 요동을 차지하는데에도 
강력한 지원군이 되어줌."

 

"결국 우리 역사로 보면 
굉장히 좋지 못한 일이었어."



글로벌 제국 : 당나라는 이런식으로 개방을 했다

● 중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었던, 당나라

수당 이후 중국은 급속도로 
개방적인 사회로 변모하게 된다.

여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미 4세기 이후부터 중국은 유목민족의 문화과 어우러지면서
혼합된 문화로 발전하고 있었어."

"때문에 문화적 포용력이 
대단히 높았던 시절이었지."

또 이런 이유도 있었다.

"5세기 이전만해도 
동아시아에서는 중국만 유일한 문명세계였고,"

"나머지 주변국가들은 많이 낙후됐어.
그러니 중국인들이 무시했지."

 
"하긴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만 봐도.."

"그런데 당나라 시기가 되면
중국인들은 보다 넓은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됨."

 
"어떻게?"

"불교가 발달하면서 
인도를 왕래하게 됐고.."

"비단길이나 바닷길이 발달하면서 
서역의 상인들이 왕래하게 됐거든."

 
▲ 6세기에 그려진 인도인 (북제의 목우도)

"또 신라, 발해, 일본, 티벳 같은 나라는
중국의 문물과 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당나라 때가 되면 
모두 문명국으로 성장을 하게되는 거야."
▲ 당시 티벳

이런 이유로 당대가 되면, 중국인들은 
보다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또 배타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물들을 적극 수용하게 된다.

"당나라가 포용력 있는 사회였다는 것은.."

"측천무후라는 여성 황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대목에서도 읽을 수 있어."

 
"그전에 중국 역사에 여왕은 없었어?"

"당연하지. 상상하기도 힘들었어.
하지만 당나라니깐 그게 가능했지."


● 국제국가 당나라의 모습

개방적인 당나라 시대의 사회상은 
곧 국제 무역의 활발함으로 이어졌다.

수도 장안에는 
늘 조공국 사절단, ☞ 참고
▲ 각국의 공양 사신단 

상인, 순례자들의 왕래로 활기를 띠었고
▲ 당나라의 티벳인들

먼 지역에서 온 
가축, 보석, 악기, 직물 등의 상품들은

황실과 귀족들을 
끊임없이 매료시켰다.
  
▲ 각국의 상인들 (페르시아와 동남아 상인들)

귀족들은 외국의 머리 모양과 
의복을 모방하는 경우도 많았고
▲ 8세기 당나라 여인들 

타구 경기와 같은 오락은 
부유층이 가장 선호하는 놀이가 되었다.
 
▲ 8세기 당나라 여인들 : 애완견 

그런가 하면 페르시아의 세공술이나
서역의 악기들이 이 시기 대거 전래되었다.
▲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쌍륙놀이를 즐기고 있는 당나라 여인들 (8세기)

해금, 비파, 생황, 피리 등의 악기는
모두 이 당시 서역이나 동남아를 통해 전래된 것들이다. ☞참고
 
▲ 비파와 필률(서역 피리), 생황을 연주하고 있는 당나라 여인들 

마루와 돗자리에 앉던 
좌식 생활이 

의자에 앉는 
입식 생활로 바뀌게 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다만 이는 유목민족의 관습으로, 5세기 이후 차츰 바뀌게 된 모습이다.)

   
▲ 6세기 화북지방의 귀족 모습과 '호상'이라는 접이식 의자

당대의 개방성은 
당시의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교(경교) 등등

모든 종교의 자유가 
인정됐던 것이다.

이방인들의 정치적 참여도 
자유로웠기 때문에

안록산과 같은 이민족 후손이 
고위 정치인이 될 수가 있었고
 

신라의 최치원 같은 이가 
과거에 급제하여 문관으로 활약할 수도 있었다.
 최치원 


● 경제 발전 : 강남지역의 개발

번영이 당대의 활력을 
촉진시켰음은 물론이다.

국토의 통일
남북을 잇는 대운하 개통

중앙아시아의 비단길을 통한 무역
바닷길을 통한 교역 증가

등등으로 
당나라 시대 경제는 유례없이 성장했다.

특히 당시는 강과 하천을 따른 
편리한 수상 교통에 힘입어 

'남부의 경제 발전'이 
두드러졌는데

강을 이용한 통행량이 워낙 급증한 나머지
 721년~751년 동안 양저우의 도시에서만

폭풍우로 피해를 입은 선박이
총 1000척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활발한 교역의 결과, 

남부가 원산지인 차는 
더 이상 귀족들의 각성제로만 사용되지 않았고

전국에서 
대중적인 음료로 마시게 된다. 
 
▲ 차를 마시는 여인들

또 광저우, 푸저우 등 남부의 항구도시에는 
아랍 상인들이 들락거렸고
 
▲ 아랍 상인들

중국 상인들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돌며 
활발히 해상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강남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7세기 초 중국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했던 강남 지역의 인구는

이후 8세기 중엽이 되면
전체 인구의 40%를 넘게되어 
▲ 8세기경 중국의 인구분포

더 이상 중화 세계에서 강남이 차지하는 비중은
부속품이나 변방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송나라 때가 되면 강남의 인구가 화북을 앞서게 된다.)

다만 당시의 경제적 번영이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당나라 시대 중국사회는 
늘 귀족 중심의 사회였고
 

농민들은 화려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몰락 : 당나라는 이렇게 망했다

● 균전제와 부병제의 모순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다.

처음에 괜찮게 보였던 제도도
시간을 거듭하게 되면 

차츰 내부 모순으로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 훌륭하다던 
균전제와 부병제도 그랬다.

균전제의 모순은
토지의 비옥도가 다르다는데 있었다.

 당나라 관료
"누구든지 땅 만평씩 줄게. 
농사 짓거든 곡식 3섬씩 세금으로 내도록."

이것이 당시 당나라의 기본적인 조세제도였다.
하지만 그랬더니 문제가 발생했다.

 농민1
"누구는 황무지를 떼어주고, 
누구는 비옥한 옥토를 떼어주고.."

 농민1
"이게 대체 뭐냐고요!"

 농민2
"이참에 농사 때려치우고
남의 농장에 가서 소작질을 하던가 해야지."

그러면서 사회는 
점차 빈부격차가 생겨나고

균등하게 나눠줬던 토지도
소수의 지주들에게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데
땅은 한정되다보니, 

갈수록 내어주는 
땅의 면적은 줄어들고

급기야 내어줄 토지마저 
없어질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부들이 가야할 곳은 뻔했다.
바로 소작농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균전제의 붕괴는 
곧 부병제의 붕괴와도 같았다.

갈수록 땅을 버리고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세금을 거둬들일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의 수는 
자꾸만 줄어들어 갔다.

8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납세대상자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자 한번 호적에 등재된 사람은
모자라는 군역자들을 대신해야 했기 때문에

허구한날 군역에 차출되는 
모순을 낳게 되었다.

 농민
"나라에서 주는 땅을 받는 순간 
노예가 되는거임."

 농민
"한번 호적에 올라봐. 
평생 변방의 군인으로 끌려다니기 십상이지."

이러면서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도망을 쳤고

결국 그들은 지주들의 소작농이나
권세가들의 농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다버린 땅들은
고스란히 지주들의 땅으로 들어갔으니..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 절도사들의 횡포

당나라 정부는 군역의 모순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8세기 이후 외부적으로 
당나라를 노리는 이민족들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이다.
 

티벳에서는 토번이 그랬고
운남에서는 남조가 그랬고

북방에서는 돌궐이 그랬고
서역에서는 이슬람이 그러했다.

만주에서는 
발해와 거란도 발흥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나라는 
어쩔 수가 없었다.

부병제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고
모병제라는 직업군인제를 실시하게 된다.

그리고 
모병제를 실시하기 위해, 

지방 곳곳에 번진을 설치하여
절도사에게 운영권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 번진이 위치한 지역에서는
조세의 일정부분을 번진으로 바치도록 했다.

 황제 
"군인들 봉급줘야지, 
군량미로 써야지.."

 황제 
"중앙에 모두 올릴게 아니라
일부는 번진에 직접 갖다 주도록"

애초에 이런 취지였는데 
(조선시대 잉류지역처럼)

절도사들은 갈수록 세금을 착복하게 되었고
점차 중앙으로 흘러가는 조세가 줄어들어
 절도사 

나중에는 중앙으로, 땡전 한푼 조세를 납부 하지 않는 
지역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비대화된 절도사들은 스스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이민족의 용병도 스카웃하고)

지역 내에서 관리도 직접 임용하고
그 권력을 자손에게 넘겨주는 등

마치 독립국의 군주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로 당나라의 지방은
이런 식으로 여러 절도사들이 설치고 있었으니,

당나라는 가히 
거대한 봉건국가와도 같게 변질되었다.

그러자 당나라는 
균전제마저 전면 폐지하게 되었다.

 황제
"당최 균전제로는 세금을 받을수가 없으니
아예 토지매매를 자유롭게 인정하고,"

 황제
"실제로 보유한 토지수만큼 
앞으로 세금을 걷을거임."

 황제
"대신 절도사들은 재량권 팍팍 줄게.
1년에 두번씩만 할당된 세금을 중앙에 보내줘."

 황제
"그럼 절대 터치 안하겠어."

이러자 당대 후반의 대토지소유제는 더욱 만연되고
빈부격차는 더욱더 커지게 되었다.


● 당나라의 멸망으로 유교적 국가건설을 다짐하게 됐다

당나라 후반, 
불교는 크게 타락하게 된다.

"종교가 권력의 비호를 받게되면
늘 세속화되기 마련이지."

당시 불교사원들은 막대한 토지와 
엄청난 수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제분소와 같은 사업을 일으키고 
고리대금업과 전당포와 같은 금융업도 겸하고 있었다.
▲ 8세기 당나라의 둔황석굴

다만 종교계가 영리사업을 한다는게 
과연 경제적으로 잘못인지는 큰 의문이다.

"타락하지 않는 종교가 
경제적으로 볼 때 오히려 더 큰 죄악임."

 
"왜?"

"경제활동을 전혀 안 하잖아."

사실 당나라 시대 불교는 
농업과 상업과 금융업 등 여러 사업에 투신하면서

당대 화폐경제를 
크게 일으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마인드는

오늘날의 현대경제학을 배우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 당나라의 현장 법사

당시 세속화된 불교는, 당나라 말기 쇄락의 시기와 맞물려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여기에 절도사들의 횡포 역시
당대 지식인들의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 나라가 점차 쇄락하고
황권이 무너지고, 이민족들이 설치는 것은,"

 
"모두가 충효사상도 모르고 
길길이 날뛰는 절도사넘들 때문임."

지식인들은 중앙집권의 퇴보가 
나라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당나라 멸망의 결정타 : 9세기 황소의 난

때문에 당나라가 무너지고 60년간의 혼란 끝에
다시 송나라가 세워졌을 때는

유교가 대대적으로 부흥하여
건국의 기치가 되게 된다.

결국 당나라의 내부적 모순이 
유교국가 송나라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 송나라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고려시대의 타락한 불교와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인해

똑같은 양상으로, 우리나라에도 
조선이라는 유교국가가 건국되게 된다.


참고 문헌 : 캠브리지 중국사 (존 K. 페어뱅크), 종횡무진 중국사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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