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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몽골의 중국 지배 : 원나라 통치시절 중국인들의 비참한 삶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7977376
몽골은 어떻게 중국을 잡아먹었나?

● 농경민족 vs 유목민족의 대립

동아시아의 내륙지역은 (몽골+만주+티벳)
중국 본토의 2배 이상 큰 땅덩어리를 가졌었지만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인구가 희박했다.

11세기 경 중국 본토의 인구는 
대략 1억 명이었지만

동아시아의 내륙지방은 
약 500만 명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 시기 농경국가였던 
고려는 400만명, 일본은 700만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500만명이라는 인구도
농경국가의 접경지대에 거주하면서

반농반목(반은 농사 반은 유목) 생활을 했거나,
 
▲ 오늘날의 접경지대 : 내몽골 지역의 반농반목 지대

농경국가(중국, 고려)와 교류를 했거나

혹은 약탈을 했기 때문에

겨우 유지할 수 있었던 
수준이었고

유목 민족들은 기본적으로
가축과 축산품을 

농경국가의 곡식, 비단, 도자기 등과 
맞바꾸며 살아가야만 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농경국가(특히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교역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하면

유목민족들은 
살길이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초원에 가뭄이 들어 풀이 죽고,
한파나 가축의 전염병으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면

유목민족들은 
눈이 뒤집혔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농경국가를 약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우리는 허구한날 말 타고 사냥질 하면서
배운게 싸움질 아님?"

"맞아. 우리가 뭉쳐서 힘을 합하면.."

"평생 농사만 짓고 사는 
약골 넘들 터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

따라서 유목민족들은
주기적으로 농경국가들을 침입했고

이들의 도발을 막는게
중세시대 농경국가였던, 

중국과 고려의 
가장 큰 지상과제 중 하나였다.
▲ 중국의 만리장성(좌), 고려의 천리장성(우)


● 유목민족은 이런 식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은
BC 4세기 흉노의 출현 이후 

18세기까지
무려 2,200여년을 지속하면서

여러 민족들이 출현하고, 
또 여러 이름으로 불려져 왔지만

그렇더라도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던 것은
늘 '부족사회'를 중심으로 했다는 것이다.
 

모든 남성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익혔으며, 곧 잠재적인 전사였다.
 

가족은 대부분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로
남자들은 권위적이고 여자들은 순종적이었고,

이들은 대개 씨족 단위로 
천막을 치고 이동생활을 했다. 
 

그리고 씨족들은 
모여서 부족으로 연합하곤 했는데,

이때 부족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부족장은 대개 싸움으로 선출됐다.

"힘이 센 자가 곧 부족의 대장임."

철저한 
약육강식 논리의 사회였다.

때문에 유목민족의 사회에서는
힘없는 노인이 되면 서러워진다.

호전적이고
약탈하는게 일상인지라

씨족간에 혹은 부족간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그러다 싸움에서 진 쪽은
이긴 쪽에게 

가축과 여자들을 모두 빼앗기고
남자들은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칭기즈칸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칭기즈칸 
"적을 학살하고 
적의 말과 소를 몰수하며.."

 칭기즈칸 
"적의 여자를 강탈하는 것보다 
더한 인생의 즐거움은 없다."

참으로 살벌한 사회였다.
그러했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 중에는 매우 잔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호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싸움에 대한 대안으로 
부족들끼리 서로 손을 잡기도 했는데,

동맹을 맺거나 제휴를 맺게되면
보다 빠르게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성장한 세력들은
최종적으로 '유목국가'로 진화할 수 있게 된다.
▲ 몽골의 세계 정복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유목국가의 우두머리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권위있는 독재자가 아니어서

중요한 결정사항은 
부족장들 간의 합의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우두머리
"이번에 송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떰?"

사실 우두머리가 하는 일이란,
군대를 규합하고 

전쟁을 통해 얻어진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정도였다.

다만 그렇더라도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유목사회이기에

우두머리들은 늘 반란과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후계자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조직은 늘 반목과 대립에 시달려야 했다.


● 유목국가들의 농경국가 잡아먹는 과정

유목민족의 조상 격이라 할 수 있는
BC 3세기의 흉노족은 

농경국가인 중국을 약탈하고 
전리품을 획득하게 되면,

곧바로 다시 
초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4세기 경 동아시아 일대가
갑작스런 한파에 시달리게 될 때

중국은 내란으로 
분열된 상황이 왔고,

생존을 위협 받게된 유목민들은
대대적으로 쳐들어 내려와 중국인들을 약탈했다.

그런데 이때 유목민들은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돌아가면 뭘해? 
여기가 더 살기 좋은데."

그리고 중원 깊숙히 내려와
터를 잡고 살게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5호 16국 시대의 유목민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머물던 유목민족들은
대부분 한족에 동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 6세기, 5호 16국 시대의 귀족

그리고 10세기 경이 되면
또 다시 유목민족들이 

대대적으로 궐기를 해서
릴레이 식으로 

중원을 약탈하게 됐으니,
거란족→여진족→몽골족이 그러했다.

다만 이때는 
중국(송나라)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송나라는 인구가 1억이 넘었고, GDP는 전세계의 40%를 차지하던 
엄청난 경제 대국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의 전투력은 강력했기에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중국의 왕조를 압박해 들어갈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907년~1125년, 
거란족의 요나라는

중국 북쪽의 변경을 차지하여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성공한다.

1125~1234년, 
여진족의 금나라는

땅을 좀 더 확장해서 
화북 일대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1234~1368년, 몽골족의 원나라는
마침내 중국 일대를 모두 차지하게 된다.

장장 3세기에 걸친 
땅 따먹기 사업이었다.

동시에 유목 국가들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스스로를 진화시켜 나갔다. 

어떻게 하면 
점령지의 중국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지에 대한
기술을 터득하게 된 것이었다. 

"중국인(한족)에게는 장치참여의 기회를 
아예 주지 않는게 최선임."

"중국인에게는 벼슬을 줘서도 안됨."

"거주 이전의 자유도 줘서는 안됨.
이넘들은 모여다니면 항상 반란을 꾀하거든."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몽골의 중원대륙 지배 방식

중세 유목민족의 최종보스 격인
몽골인들은 

가장 인구가 많았을 때도
150만명을 넘지 못했다.
(소스 : 케임브리지 중국사 p.188)

그런데 그 숫자로 
1억명과 맞섰던 것이다.

아무리 몽골족이 쌈질을 잘한다해도
쉽게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다.

시쳇말로 
1:100의 싸움이다.

"까짓껏 일당백이지."

하지만 여기에는 성공의 비법이 있었으니,
유목민 특유의 '포용력'이 그것이다.

몽골인들은 
이방인일지라도

자신들에게에게 도움이 되는 이라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성벽이 너무 높아서 공격하기가 힘드네.
누구 도와줄 사람?"

 거란족
"제가 해볼게요. 
제가 투석기 좀 만들어봤거든요."
  

이런 식으로 공성무기를 만들어 
금나라의 성벽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는가 하면

"아놔, 강을 건너야하는데
배를 만들어봤어야지. 누구 도와줄 사람?"

 여진족
"제가 해볼게요. 
제가 배 좀 만들어봤걸랑요."

 

이렇게 배를 만들어
송나라와 해전에서 겨룰 수 있게 되었다.

국적이 어디든지 간에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고

몽골인에게 
충성만 약속하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몽골인들의 포용력과는 반대로
점령지의 통치방법은 대단히 무자비했다.

"원래 점령지는 철저히 짓밟아 주는게
우리 유목민들의 전통임."

때문에 닥치는대로 
부수고 약탈하고 학살했고
 

전리품에 눈이 먼 몽골군은 
가축은 물론, 

곡식까지 죄다 털어갔기 때문에
굶어죽는 아사자들도 속출했다.

1236년 중국의 사천지방을 
손에 넣게 된 오고타이는 

 오고타이 
"에헴!"

청두 주민을 포함한 100만명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점령한 땅들은 
군인과 귀족들에게 각각 분배되었는데

이때 땅을 차지하게 된 
몽골인들은

피점령지의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노예로 부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몽골인들은 곧
좀 더 세련된 통치 기술을 얻게 된다.

중국 북부지역(금나라)을 정복한 후
오고타이는 원래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오고타이
"이곳의 도시들을 모두 쓸어버려서 
목초지로 만드는거야. 어때?"

그러자 귀화한 
거란인 야율초재가 극력 반대했다.

 야율초재 
"폐하, 그보다 농사를 짓게하여 
세금을 정기적으로 받으면.."

 야율초재 
"훨씬 더 큰 이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고타이
"어, 그래? 
그럼 그렇게 해보자."

그랬는데, 
과연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오고타이
"오호! 세금이란게 
바로 이맛으로 걷는구나."

하지만 맛을 알게된 몽골인들은
곧 탐욕스럽게 변했으니,

 오고타이
"이봐, 서역인들!" 

 오고타이
"보아하니 니들이 돈버는 상술은 좋더라. 
어때, 세금 걷는 일도 잘하겠지?"

 서역인
"세금하고 돈버는거랑 무슨 상관이신지?"

 오고타이
"시끄러. 내가 보기엔 
세금이랑 돈버는거랑 같은데 뭘."

 서역인
"암튼 시켜만 주세요. 
세금 팍팍 걷어오겠습니다."

그리하여 몽골인들은 
세금 징수권을 

서역인들에게 전담하게 하여 
더 높은 수탈을 하도록 지시하게 되었으니,

이후 원나라 시대 세금징수자들은 
탐욕의 대명사로 지칭되었고

중국인들은 몽골의 군인들만큼 
서역의 세금 징수인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몽골의 중국 지배 + 남송인들의 삶

● 몽골인들의 중국에 대한 두려움

몽골인들은 앞서 중국을 지배했던 
거란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문명에 동화를 
한사코 거부했다.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쪽수에서 피지배층인 중국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여진족넘들이 
그렇게도 중국식을 따르더니,"

"금나라 무너진 순간 중국 넘들한테 
무참히 학살됐다는 걸 잊어서는 안됨."

"맞아. 우리가 몽골인임을 잊을수는 있어도
중국넘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아."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함."

 백안
"옳소! 어떤 중국인들도
요직의 관직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몽골인 정치인들은
중국 문명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즐기는 동시에

중국의 여러 사회적, 정치적 관행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자 했으니,
 

황제는 중국 황실의 제도를 일부 따랐지만
이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고

몽골어로 정무를 보는가 하면
몽골 초원에서 정기적으로 여름을 보냈다.
 
▲ 여름 수도, 카라코룸

특히 쿠빌라이 칸은 몽골인과 중국인들의 
통혼을 삼가하도록 하였고

궁중에는 
몽골 여인들만 들이도록 했고

공녀로 온 고려인과 서역인 여인들 역시
궁녀로 포함될 수 있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몽골인 왕자들 중에서는 
북경에 건설된 웅장한 궁궐에서보다

궁정 마당에 세운 천막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다.


● 중국인(남송인)들에대한 가혹한 차별

몽골인들은 
피지배층에게

자신들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몽골의 지배를 받게된 이후로도
중국의 사대부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책을 읽고
자신들의 조상을 숭배하고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었다.
▲ 원나라 때의 중국인 사대부

오히려 몽골인들은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풍습을 따라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저넘들이 신분을 세탁하려하네."

사실 고려왕실이 몽골말을 사용하고, 
몽골식의 옷을 입었던 이유도

충렬왕 이후 고려왕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지
원나라가 강요해서 했던 일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인(남송인)들을
자신들의 전통대로 살도록 내버려뒀다고 해서

그들이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몰수당하거나 
노예신세가 되었고,

때로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만 했다.
 

"너희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집을 잘 짓는다면서.."

"잘 됐구나. 모두 카라코룸(몽골의 여름 수도)으로 가서 
신도시 개발에 참여하도록."

 
▲ 카라코룸

더욱이 가혹한 조세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당시 화북지방의 경제가 크게 몰락하여
강남에서의 가혹한 수탈로 

이를 매꾸고자 했었기 때문에
남송인들의 부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북경의 운하 : 강남에서 수탈한 곡물이 들어오던 수로
원나라 때 운하는 북경까지 이어지게 된다

"걱정하덜마!
남송인들을 쥐어짜면 그만임."

그뿐인가,
중국인(남송인)들은 법적으로 

최하층 신분 취급을 받았던지라 
모멸감은 더욱 심했다.

당시 원나라에서 20년 동안을 보낸 (1275-1295)
이탈리아 베니스의 상인 마르코 폴로 역시 

중국인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음을 알고있었다.

 마르코 폴로 
"모든 중국인들이 
원나라의 지배를 혐오했다."

 마르코 폴로 
"자신들은 
노예신세가 됐지만.."

 마르코 폴로 
"지배자인 몽골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더 미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근시안적인 상업 활성화

기본적으로 유목민족 정복자들은 
재정을 극대화하는데 모든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경제에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뭐, 중국인들의 민생 따위는 
어찌돼도 상관없어."

"황실만 부유해지면 장땡."

오히려 상업을 크게 장려하려 했다가
그 정도가 지나져 농업경제가 피폐해진 면이 있다.
 

이는 교역을 중시하던 
유목민족의 전통이기도 했고

농업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기도 했다. 

▲ 기근이 들면 인육도 횡행했다

때문에 중국에 유목민 왕조가 들어서면서
무역은 크게 활성화 됐지만

오히려 농업경제는 크게 파탄을 맞게되어 
민생은 훨씬 힘들어지게 됐다.

민생 경제를 
더욱 힘들게 하는 원인으로는

유목민족의 미숙한 경제 마인드도 
한몫을 차지했다.

여진족은 송나라의 화폐제도를 
적극 수용했지만

지나치게 '주조차익'이라는 
공짜 맛에 취한 나머지

무대뽀로 화폐를 찍어내는 바람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고 말았다.

"어? 찍는대로 공짜 이익 아니었어?"

몽골인들도
송나라의 화폐를 그대로 허용하였고

지폐(교초)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역시 주조차익에 
맛을 들여

14세기 경에는 심각할 정도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고 말았다.
 


● 원나라의 카스트제도 

원나라 황제의 
최대 걱정거리는

중국인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있었다.

때문에 그런 위협을 줄이고자
민족간의 위계질서를 명확히 구분하고자 했다.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질서는
사회 제도 전반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되는데..

예를들어 
세금을 징수할 때는 이러했다.

"북쪽 출신들에게는 세금은 
가구당 일정량만 거둔다."

"대신 남송인들에게는
소유한 토지별로 비례적으로 세율을 적용하겠다능."

절도죄의 경우는 이랬다.

"북쪽 출신들의 도둑넘들은 
그냥 몇대 때리고 보내줘."

"남송인이 그랬어?
그러면 얼굴에 문신을 새겨버려."

폭행사고의 경우는 이랬다.
가령 중국인과 몽골인이 싸움을 했는데,

몽골인이 먼저 중국인을 구타해서
중국인은 정당방위만 했을 뿐이라고 하자.

그래도 
판결은 이랬다.

"어딜 중국넘 따위가 고귀한 몽골인을 건드려!
이넘을 매우 쳐라!"

반면에 몽골인이 중국인을 심하게 구타해서
중국인을 살해했다면 이랬다.

"좀 심했네. 그러게 살살 좀 치지.
벌금 좀 내야 되겠어."

이러한 조치는 
색목인에게까지도 적용되어

중국인들은 색목인 앞에서도 
벌벌 떨어야만 했다.


● 남송인에 가해진 철저한 탄압

몽골인들의 탄압은 
일상에서도 타이트하게 적용되었으니,

남송인들은 공개적 집회를 갖거나
무기를 소유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대나무조차도 
거래를 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다.

 쿠빌라이
"대나무로 활과 화살을 제조하고
죽창을 만들 수도 있다지."

 쿠빌라이
"이것도 허용해서는 안됨."

심지어 가정에 요리할 때 쓰는 부엌칼 조차
갯수를 통제했다.

"앞으로 10가구 당 부엌칼 1개임."

위험해 보이는 
여가활동도 금지시켰다.

"함부로 무예를 단련하지 마!
앞으로 무술을 수련하고 사냥하는 것도 금지임."

방화를 두려워하여 
이런 조치도 내렸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더라도
반드시 몽골인의 허락을 받을 것!"

그러면서 '20가구 1갑'이라고 하여
중국인 20가구(100명)가 몽골인 1명을 부양하도록 했으니,

20가구를 보유한 몽골인들은
해당 가구의 재산은 자신의 것과도 같았고

모든 주민들은 
자신의 노예와도 같았다.

따라서 마음대로 주민들을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초야권'도 종종 행해졌으니

초야권이란, 결혼한 처녀들이 
먼저 몽골인 주인에게 처녀성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는
첫 아이를 낳으면 고의로 죽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광범위한 혼혈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

"전국에서 결혼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잡아간다지 뭔가?"

 
"중국인들을 말살시키려고
가장 흔한 중국 성씨인.."

 
"장(張)씨, 왕(王)씨, 유(劉)씨, 이(李)씨, 조(趙)씨들을
모두 잡아다가 죽일거라지 뭔가?"

하지만 이런 가혹한 탄압은
중국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2등 시민을 자처하는 
서역인들의 횡포도 민족 의식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티벳의 승려인 양연진가가 
막강한 권력을 쥐고, 

항저우의 궁궐들을
모두 불교 사찰로 개조하고자 했는데

이때 사찰을 짓기 위한 건축 비용은
송나라 황제의 묘를 도굴하여 캐낸 보물로 충당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된 
중국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남송인들은 송 황제의 유골을 은밀히 찾아 
다른 곳에 이장하기도 했다.


● 남송 귀족출신들의 호구지책

그렇다고 중국인들이 
전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목 민족만으로는 도저히 
방대한 관료제를 운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놔, 이것들이 순 무식해서..
도저히 일을 맡길 수가 있어야지."

때문에 중국 출신의 문인들을 
'서리'라는 하급 관료로 채용하게 되었고

중국인들도 점차 일자리를 찾아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동안 마땅한 직업도 없이 놀고 먹기만 했는데
하찮은 서리직이면 어떤가!"

 
"그러게, 이런거라도 해서 잘 보여야
우리 중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바껴지지 않겠어?"

1315년 경에는 과거제도 실시되었다.
이를 제안한 이는 고려의 충선왕이었다.

 충선왕 (당시 원제국 서열 2~3위)
"폐하, 좋은 인재를 등용하셔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과거제를 실시하소서."

그렇게 시작한 과거제였지만
여기에는 쿼터가 있었다.

"합격자의 수는 몽골인인 1/2
기타(색목인과 화북 출신) 1/4, 남송인 1/4 이렇게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는 수는
전체의 2%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서리 직급에서 
승진을 통해 진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관료직도 
싫다고 마다하고 있던

중국인 문인들도 많았으니,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살았을까?

 
"먹고는 살아야지. 
우리라고 언제까지 자존심 내세울 수 있겠나."

때문에 남송시대의 문인들은 
상당수가 의사, 점쟁이, 승려가 되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의 훈장이 되었고,

혹은 희곡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 원나라 당시 사대부들

괜히 원나라 때 나관중 같은 이가 등장하여
삼국지연의와 수호지를 집필한게 아니었다.



● 소소한 얘기

왜 원나라의 황제의 수명은 짧았나?

원나라가 수립되고 망하기까지 95년간
총 14명의 황제가 즉위했으니

이들의 평균 재위기간은 
6.7년에 불과했다.

왜 이렇게 황제들의 수명이 짧았단 말인가?
바로 유목민족의 전통 때문이다.

 

몽골인들은 기본적으로 
피로 얼룩지기 일쑤인 

무력 경쟁을 통해
군주를 선출하였다.

때문에 쿠빌라이 칸 이후의 계승과정은 
암살, 쿠데타, 무능력한 어린 황제 옹립,

형제 살해, 귀족들의 지배 등으로 
얼룩진 이야기 투성이다.

드라마 기황후가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다.


원나라 때 인구가 반토막 난 이유는?

1207년 1억 2천만명이던 인구는
몽골제국이 들어선 뒤로 급격히 줄어드는데

1290년에는 6,000만명으로 
절반 이상이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급격히 
인구가 감소한 이유는

몽골 군대의 무차별한 학살이
커다란 이유였다. 
 

그리고 줄어든 인구는 
원나라 시절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명나라가 등장하고 
농촌사회가 안정이 되고나서야

다시 예전의 수준으로
겨우 회복할 수가 있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질병(흑사병)을 들 수 있다.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교류의 증대로

원나라는 역병의 확산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만 했던 것이다.


원나라 황제는 과연 강력했을까?

우리는 칭기즈칸을 떠올리며
흔히 그렇게들 생각한다.

하지만 대단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여진족이나 몽골족들의 경우,
그들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중국 황실의 시스템을 이어받아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도입하고 있다고

귀족들의 불만이 
상당했다.

"우리 유목국가들은 
애초에 부족을 연합한 연맹시스템 아님?"

"맞아! 군주가 혼자서 독재를 하는 것은
중국넘들이나 하는 짓임."

게다가 유목민족의 귀족들은
문서화된 규칙과 법률 따위에는 골치만 아팠다.

"그냥 말 안 들으면 쥐어패면 되지
무슨 자질구레하게 법을 따짐?"

이렇게 폭력과 공포로 
통치 하기를 원했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원제국은 상당히 분권적이었고
제국 곳곳이 봉건제도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왜 허풍선이가 되었을까?

오늘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견문록으로 인기가 대단한 책이지만,
 마르코 폴로

당시에 발간되었을 때만 해도
한낱 허풍선이의 '모험소설'쯤으로 치부되었다.

이유가 뭘까?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의 이야기가

당시 유럽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느 유럽의 도시와도 비교도 안될만큼
엄청난 도시 규모와 인공 수로, 

발달된 상업과 지폐의 사용 등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쳇! 말도 안돼."

 
"기독교도 믿지 않은 이교도들이
무슨 그런 문명을 이루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참고 문헌 : 케임브리지 중국사,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케네스 포메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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