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었나?
● 동서양 문명사의 중요한 차이점
때는 BC 6세기 ~ BC 3세기의 시기다.
이때 유라시대 대륙 서쪽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시기 대륙 동쪽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활동시기가 비슷했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인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해석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다.
동양철학은 말 할 것도 없다.
지금도 논어는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 두 문명의 사상적 연원이
모두 같은 시기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대략 이렇다.
BC 5세기 경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았다.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뤄졌을까?"
"세상 만물의 시초는
아르케(Arche)라고 하던데.."
"맞아,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결국 원질은 하나에서 출발하고 있어."
"그럼 그 원질이라는게 뭔데?"
탈레스
"내가 볼 때는 물이야."
헤라클레이토스
"틀렸어! 내가 볼 때는 불이야."
이러고
놀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때 중국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이 많았을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인생을 가치있게 살아가는 방법이 뭐임?"
"조상을 숭배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식으로
예(禮)를 지키는게 사람답게 사는거지."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거임?"
한비자
"자고로 매에는 장사없어.
강력한 법이 쵝오임."
노자
"뭔소리? 그냥 자연 그대로 냅둬."
공자
"덕으로 다스리면 됨."
이러고
놀았다.
즉 같은 시기에 서양철학자들은
자연철학에 관심이 깊은 반면
중국 철학자들은
인문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동서양 문명사에 중요한 차이를 빚게된다.
● 왜 중국은 경쟁이 없었나?
중국은 지리적으로 볼 때
축복받은 나라다.
넓은 평야의 영토,
농사 짓기에 적당한 기후대,
또 지형적인 원인 때문에
일찍이 거대 제국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중국이라는 땅은 시작 단계부터,
하나의 커다란 제국이 들어서기에 매우 좋은 입지조건을 지녔다.
중국의 동쪽은 그야말로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다.
중간에 장애물이란, 몇개의 큰 강이 전부다.
때문에 초기 형성된 군소국가들에게
대륙은 마치 서바이벌의 장과도 같았다.
▲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사방으로 뚫린 지형을 통해
너무도 쉽게 상대를 침략 할 수 있었고,
또 쉽게 침략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각의 링 안에 사나운 맹수들을
여러 마리 풀어놓은 꼴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이기는 넘 하나가 전부를 차지하는거야.
그게 중국 대륙의 운명임."
결국 서로 먹고 먹히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중국 대륙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는 마치 우주에서 작은 돌 덩어리끼리 충돌하면서
점점 커져서 원시 행성을 만드는 과정과도 같았다.
그에 반해 유럽이라는 대륙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좀처럼 하나의 강력한 국가가
들어서기 힘든 지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요철(凹凸)과도 같은 구불구불한 지형에
중간에는 험준한 산맥도 가로막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드넓은 영토를 형성한 나라는
유럽 동쪽의 대평원에 위치한 러시아 뿐이다.
고로 중국이라는 나라는
기후 + 넓은 땅 + 강력한 제국이라는 3박자의 조화로
일찍부터 번화한 문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중국에게는
경쟁상대란 없었고
유일한 걱정거리는
북방의 배고픈 유목민족에게
자신들의 값진 물건들을 약탈 당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때문에 중국은
문명이 어느 수준까지 발달한 뒤로 부터는
과거만 바라보면서
안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통시대 중국인들의 이상향은
늘 과거에 있었다.
"요순시대의 태평성대, 그게 바로 낙원이지."
반면에 유럽은 상황이 달랐다.
기후적으로 척박했고,
지형적인 특성상 조그만 세력끼리 자리잡을 수 있게 되어
서로 치고받는 역사가 꾸준히 반복되게 된다.
여기에 동방에는 자신들보다
강력하고 발전한 이슬람이라는 세계가 있어서
늘 신변을 위협하는
골칫거리였다.
때문에 유럽인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스스로를 개발하고자 했다.
신대륙 발견, 식민지 개척,
화약무기의 개량, 항해술의 발전, 지도의 제작 등등
모두가
그런 도전과 개발의 산물이었다.
중국은 왜 세상을 지배하지 못했는가?
● 중국의 보물선
산업혁명 이전에
가장 큰 배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13세기부터 15세기 초까지 있었던
중국의 보물선들이다.
당시 중국의 보물선들은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를 거쳐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항해하고 있었다.
이 보물선들 중 가장 컸던 것은
15세기 초에 만들어진 정화의 보물선으로
크기가 7,800톤급으로 (길이 137m, 너비 56m)
19세기 영국 해군이 보유했던
가장 큰 전함보다도
무려 3배 이상이나 더 컸다.
▲ 정화의 보물선과 콜럼부스의 산타마리아호 크기 비교
하지만 선박 건조와 항해술에 있어
서양보다 일찍 우위를 차지했던 중국은,
15세기 중엽 이후로는
단 한번도 해양 강국으로 군림한 적이 없게 된다.
명 왕조가 1433년 이후
보물선 운항에 대한 지원을 전면적으로 철회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중국 배들은
지금의 싱가포르 동쪽,
즉 중국인들이 동양(東洋)이라고
불리던 곳까지만 항해를 하게된다.
그러자 20~30년이 지나지 않아
해양의 주도권은 곧 유럽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상황은 이랬다.
정통제
"요즘 흉년이 들어,
백성들 삶이 궁핍해지고 있다 들었는데.."
내시1
"그렇습니다. 폐하."
내시1
"이제는 보물선을 만들어
재원을 낭비하는 일을 삼가하셨으면 합니다."
내시2
"맞습니다. 지금 북방 오랑캐가
호시탐탐 중원을 노르고 있는데.."
내시2
"쓸데없이 남쪽 바닷길로
재원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
그랬다.
당시는 북방에서는
원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오이라트가 새롭게 흥기하여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터였다.
내시1
"보물선 만들 돈으로
차라리 만리장성을 보수했으면 합니다."
정통제
"그러자꾸나."
이로써 중국 조정이 후원하던 보물선 항해는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 쇠퇴하는 중국의 해상활동
정부가 해상활동에
손을 떼더니,
곧 민간의 해상활동까지
크게 줄어들게 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가장 큰 이유는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상인1
"요즘 쓸만한 나무는 모조리 베어서
나무 값이 너무 올랐어. 완전히 금값이라니깐."
상인2
"그러게. 올 겨울 땔감부터가 걱정이네."
상인2
"예전에는 석탄도 사용했다는데,
요즘은 뭐든 없어지고 말아."
그랬다.
당시 중국은 넘쳐나는 인구로 인해서
석탄은 이미 바닥을 보였고,
목재마저 크게 부족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륙의 사천지방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양자강이나 운하를 따라 수천 km 떨어진 곳에
목재를 공급하는 상황까지 연출하게 된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서 베트남, 태국에서까지
바다를 통해 나무를 사들여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목재의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자연스레 선박 제조비는
폭등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배를 만들더라도
큰 배는 언감생심이었다.
상인
"요즘 나무가 금 값인데, 큰 배는 무슨?
그저 풍랑에 뒤집히지 않을 크기로만 만들면 되지."
때문에 이후의 중국 선박들은
자연스레 선박의 크기도 작아지고,
선박의 소유도 줄어들고,
더 나아가 해상활동도 크게 위축되게 된다.
▲ 청대 선박
결국 이런 상황에서 중국 상인들은
배를 얻기 위해 꼼수를 쓴다.
나무가 많은 태국이나 베트남까지 직접 가서
현지 발주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발주된 배라고
가격이 싼 것은 아니었다.
"현지 인건비에 운송비 생각해야지.
그리고 그 나라 관료들한테 뇌물 안 줄 수 있어?"
때문에 동남아에서 발주를 한 배라도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배의 사이즈는 좀처럼 크기가 어려웠고,
배가 작은 까닭에 먼 바다를 항해하는게 어려워져
동남아 일대에 무역거점을 만들어
중개무역을 하는 형식이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예전에는 배가 커서
원샷에 인도나 페르시아까지 갔는데,"
"지금은 그랬다가는
물귀신 되기 십상이지."
"그냥 도자기랑 비단 가지고 가서
월남이나 섬라고국(태국) 땅에 내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인도의 면화와 맞바꾸면 되는거임."
고로 이때부터 중국 상인들은
동남아 등지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동남아 화교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이 된 것이다.
● 복건성의 화교
복건성은
지형적으로 특이하다.
중국의 지형을 보면, 서쪽을 제외하면
동쪽은 넓은 평야로 이뤄졌다.
특히 중국의 동부 해안가는
드넓게 펼쳐진 평야지대로,
전통적으로 농경지가 발달하여
많은 인구가 밀집해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예외인 동네가 있다.
바로 남동쪽의 복건성이다.
이 지역은 기후는 좋지만
산악지대가 많아서 중국에서는 옛부터 이런 말이 있다.
"복건성에는 산이 많아
바다를 땅으로 삼아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고로 이 지역은 천 년이 넘게
중국의 어업과 조선업,
해양 무역의
중심지를 자처하게 된 곳이 된다.
그런데 16세기 '목재 파동' 등으로
해상활동이 점차 어려워지자,
이곳의 주민들은
대거 동남아로 활동지를 옮기게 된다.
이때 복건성의 해외 이주민들은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부자들은
주로 상업을 했다.
그들은 배를 소유했고,
자본이 있었기 때문에
비단과 도자기를 가지고 가서
동남아의 무역거점에서
인도산 면화,
인디고(염료)와 맞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상인들은 점차 거대한 집단을 이뤄
동남아 상권 일대를 휘어잡을만큼 성장하게 된다.
상인
"머나먼 타향에서는
동향 사람들만큼 믿을만한 사람들도 없지."
한편 가난한 사람들은
상업을 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이들이 선택한 길은,
몸으로 때우는 일이었다.
즉 동남아 현지로 가서
농사를 짓고 품삯을 받는 일이었다.
농민
"울리싸람 고향에서도 사탕수수 농사졌다해.
농사만큼은 자신있다해."
이렇게 해서 복건성의 가난한 농부들은
필리핀이나 대만, 자바섬에 가서도
그들의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었다.
이들의 명성은
장차 유럽인들에게도 알려졌으니..
유럽 상인1
"들었어?
중국 농부들이 그렇게 사탕수수 농사를 잘 짓는데."
유럽 상인2
"허구한날 농땡이나 치는
인도인들보다 훨씬 괜찮은 일꾼들이지.."
이런 이유로 스리랑카, 쿠바, 하와이 등지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는
일꾼으로 부리려고
복건성 농부들을 일부러 찾아다닐 정도였다.
● 중국은 왜 해외식민지를 개척하지 못했는가?
그런데 왜 중국인들은
상인과 농민들이 따로따로 놀았던 것일가?
중국 상인 집단이
동남아의 상권을 휘어잡을 정도록 강력했고,
복건성의 인구는 넘쳐났는데 비해
동남아는 미개간지 투성이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동남아로 이주하려던
농민들의 수는 엄청났었다.
그렇다면 이 두 이주민 집단이
서로 손을 잡았더라면
동남아 일대는 아주 쉽게
식민지로 경영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그게
역사의 정석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전혀 그런 제스처를 하지 않았다.
왜 그랬던 것일까?
바로 중국 정부에서
이들에 대한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17세기 초 청나라 왕조가 세워진 이후로
더욱 그러했다.
물론 중국 정부도
상업 덕분에
중국 남부 지역이 계속해서 부를 누리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강남은 농업과 상업 때문에 윤택한 곳이고
걔네들 때문에 화북이 먹고 살 수 있지."
하지만 청 왕조는
사람들이 중국을 벗어나
오랫동안 떠나있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황제
"해외에서 한족들이 커다란 집단을 이루게 되면.."
황제
"이넘들이 언제 뭉쳐서
반란과 독립을 꾀하려 할지 모른다능."
청나라 집권자들은 이런 의심이 강했다.
때문에 금령을 내린다.
황제
"백성들은
1년 이상 해외에 거주해서는 안됨."
그러자
상인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상인1
"아놔,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님?
1년마다 왔다갔다 하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인2
"뭐, 원래 장사하느라 왔다갔다 하는 몸인데
굳이 못지킬 건 없지 않은가?"
아니면
이런 수도 있었다.
상인3
"뭔 걱정을 해.
중국 역사에서 뇌물이 안 통하던 시절이 있었어?"
상인3
"담당관리한테 뇌물만 잘 후려주면
2~3년마다 왔다갔다 해도 괜찮아."
상인들은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사정이 달랐다.
일단 그들은 뇌물을 찔러줄 형편도 안됐거니와
농사를 지으려면, 현지에서 상인들보다
훨씬 더 오래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예 중국인을 포기하고
현지에 동화해서 사는 농민들도 많아지게 된다.
농민
"가서 뭐해? 그냥 여기서 살지."
상황이 이러했으니, 상인과 농민들은
더욱 따로 놀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자국민의 해외진출 자체를
안좋게 보던 중국 정부였기에
나라 밖의 자국민을 위해
법과 치안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전혀 없었다.
황제
"니들 해외에서 맞아죽든, 재산을 뺏기든
우리 정부는 절대 보호 안해준다."
결국 중국은
충분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해외 식민지 개척이라는 사업을
등한시했던 것이다.
● 중국은 '경제적 동기'가 없었다
반면에 유럽 국가들은
중국과는 전혀 달랐다.
일단 국가가
민간 기업의 해외 진출을 적극 장려했다.
유럽 국왕
"너희들 배가 필요해?
정부가 돈을 대주지."
그리고 민간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무력을 사용해
해외영토를 점령하면
정부는 정착민이 이주할 수 있도록
적극 허락해줬다.
그렇게 해서 생긴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개척한 신대륙이었고
곧 영국과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세우며 동참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충분한 '경제적 동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식민지 개척에는
돈이 엄청 들어간다.
"배 만들어야지, 무기 만들어야지,
정착지 건설해야지.. 돈이 좀 깨져?"
때문에 식민지 개척이 성사되려면
그런 비용을 모두 커버할만한 이득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유럽은
그게 가능했다.
유럽상인1
"여기서 담배, 설탕을 재배해서,
나중에 유럽에 팔아봐. 부르는 게 값인데.."
유럽상인2
"물론 관세가 만만치 않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남는 장사지."
유럽상인3
"그것보다
지금 유럽에서 할 수 있는게 뭐임?"
유럽상인3
"땅은 좁지, 기회는 없지.
그러니 인생역전을 위해서라도 식민지로 가는 거야!"
이랬던 유럽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달랐다.
기후가 다양했기 때문에
영토 안에는 사탕수수, 담배가 모두 재배되고 있었다.
때문에 굳이 어렵게
해외식민지를 개척해서
물건을 가지고 오더라도
별다른 이윤이 없었다.
상인
"아놔, 부대비용 생각하면 완전 손해네.
뭐하러 바보같이 식민지를 만들어?"
전근대적인 중국의 경제 마인드
● 중국이 생각하던 무역 : 조공무역
전통시대 중국은
자신들만이 오직 하나의 진정한 문명국이었으며,
중국을 벗어나면 모두가
중국보다 열등한 세계로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통치자인
중국 황제가 전인류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세상은 황제가 직접 통치하거나
황제가 임명하는 제후가 다스리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올바른 질서였다.
그리고 제후는 황제를 위해서 '조공'이라는 공물을
정기적으로 바치는게 도리였고,
이때 황제도 제후에게 대가로
하사품을 선사하는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즉 '조공'과 '하사품'이라는 것이
중국인들이 생각하던 국제공인 무역이었다.
그런데 이런 조공무역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무엇보다 조공품들은
이국적이어야만 했다.
중국 관료
"니들 왜 비단을 가지고 오냐해?"
일본 사신
"조공하려고 가지고왔슴무니다."
중국 관료
"필요없다. 가져가라해.
중국에서 넘쳐나는게 비단이다해."
중국 관료
"이건 뭐냐해?"
조선 사신
"인삼인데요."
중국 관료
"오! 우리나라에서는 인삼 다 뜯어먹고 없어졌다해.
잘 가지고왔다해."
이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인들에게
사용가치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국에는 없는, 특이한 것이 보다 주요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소유함으로써
황제는 스스로의 권위를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의 황제들은
동물원을 만들고,
그곳에 외국의 신기한 동물을 들여놓음으로써
자신이 '만인의 군주'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려고 했다.
"와! 이게 말로만 듣던 코끼리인가!"
"역시 황제는 다르다능.."
반면 중국 황제도 그에대한 답례로
조공국들이 필요로 했던 물품을 기꺼이 헌사했다.
가령 유교경전,
악기, 비단, 자기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하사품은
조공국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신하들에게
다시 하사품으로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유용했다.
조선 관료1
"우와, 우리 임금님 대단하시다능."
조선 관료2
"그러게, 중국 황제와 이리 각별하실 줄이야."
이렇게 제후국의 왕들은 하사품을 내림으로써
충직한 신하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자신이 중국 조정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다른 귀족들에게 환기시켜
더욱 통치권을 확고히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 조공무역의 한계
조공 무역이 꼭 정치적인 목적으로만
이뤄졌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조공 무역은
대부분 경제적인 교류도 함께 수반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청나라는 광둥 지방에 쌀을 조공으로 보낸 시암(태국)왕국에
조공무역을 확대해줬는데,
이 조치로 시암왕국은
진귀한 비단, 도자기 등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낸 쌀의 가치를
보상하고도 크게 남았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시암의 조공품으로 인해
남부지역의 식량 가격을 크게 낮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윈윈 게임'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공 사절단에는 늘 언제나
상인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마부, 짐꾼으로 둔갑했지만
그들의 짐 속에서는 중국인들과 장사를 할 무역품들로 가득했다.
드라마 '상도'를 본 사람들은
익히 기억할 것이다.
우리만 그랬던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상당수가 그랬던 것이다.
이들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개인적으로 가져온 교역 물품을 팔 수 있었다.
또 황제의 하사품도
곧바로 시장에 유통되곤 했었다.
사신단
"이건 임금께 갖다바치고,
이건 시장에 내다팔자."
황제의 하사품을 저잣거리에 함부로 팔았다니
왠지 놀랄 일이지만, 당시의 만연된 관습이었다.
사실 중국 상인들에게
황제의 하사품만큼 인기 품목도 없었고
사신들도 그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훨씬 경제적인 행동이었다.
오히려 중국 상인들은
이렇게도 불평했다.
중국 상인
"아놔, 요즘 황제님 왜 이렇게 짜셔.
고작 하사품이 이게 뭔가?"
아무튼 이렇게 조공 무역은
경제적인 이익도 함께 수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런 방식은 결코 정상적인 국제 무역이라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보따리 장수에 불과한
규모였기 때문에
경제 전체에 기여하는 정도는
극히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서양인들은 이런 아시아의 조공무역을 보며
이렇게 비웃었다.
"경제 논리보다
정치에 구속된 희한한 거래가 아닌가!"
때문에 유럽인들이
중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
가장 소리 높이 요구했던 것은
바로 '조공제도'의 철폐였다.
"인간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인데.."
"어서 중국도
자유방임주의의 이치를 깨달으셈."
하지만 중국은 묵묵부답이었고,
여진히 무역을 하러 온 외국 대신들에게
중국 황제는 무릎을 꿇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곧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폭력을 써서라도
중국을 개방시킬 수 밖에 없겠어."
미국 애덤스 대통령
"사실 아편전쟁의 진짜 원인은
중국의 콧대높은 조공무역 때문일 수도 있음."
● 세계 최초로 지폐를 사용하던 중국
돈이라는 것은 너무 많이 찍어도 문제지만
너무 적게 찍어도 문제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
경제가 가장 역동적이라 할 수 있었던,
당대와 송대에 나타났다.
화폐를 너무 적게 찍었던 게 문제였다.
황제
"아놔, 요즘 왜 이렇게
돈 찍어달라고 성화인거임?"
신하1
"이미 작년에 비해 올해는 20배나 돈을 찍어내고 있는데도
부족하다고 하니 큰일입니다."
신하2
"요즘엔 구리가 부족해서 철, 납 심지어 도자기로
돈을 만들어 쓰는 동네도 있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위조화폐(사주전)을
만들어주면 오히려 땡큐였다.
여기에는 고액권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 송나라 화폐, 천희통보
사실 인류 역사에 있어
통화가치를 단계별로 나눠 사용하던 문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예를 들면 10원짜리, 100원짜리)
결국 송나라 때는
화폐가 부족하여,
고액의 거래에는
비단과 차 등의 물품화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물품화폐는
문제가 많았다.
상인1
"너무 무겁다 해.
그리고 중간에 도둑 만나면 다 뺏긴다 해."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게
바로 '어음'이라는 문서였으니,
상인2
"오, 이거 편리하구만.
생각해낸 사람 완전 천재!"
원거리 무역에서는
곧 어음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당시 어음의 사용 방법은
이러했다.
예를 들어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소금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때 소금을 전달하고 상인은
대금으로 비단이나 구리를 받는게 아니라,
어음 쪼가리를
하나 받는다.
▲ 송나라 상인
그리고 고향에 도착했을 때
비단이나 구리로 교환할 수 있는
종이 쪼가리(어음)를
제시하면 됐다.
그런데 이런 어음은
필연적으로 문제점이 발생했다.
상인1
"아놔, 이거 진짜인줄 알고 교환해줬더니
알고보니 사기였어."
상인2
"아니, 비단 100필이라고 했는데
왜 70필 밖에 안줘?"
환전업자
"30필은 수수료 모름?"
상인2
"이런 날강도 같은 넘들.
가만히 앉아서 30필이나 뜯어먹어?"
사기꾼과 높은 수수료의 문제로
문제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중국 정부는 사태를 파악하고
강력하게 나섰다.
황제
"이제부터 어음은
공정하게 국가가 발행해주겠어."
황제
"이걸 사용하면 사기꾼에게 뜯길 염려도 없고,
높은 수수료에 뜯길 염려도 없을 거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송나라의 지폐였다. (1024년)
▲ 송나라 지폐
중국 정부는 이 지폐를
어떤 물품과도 교환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상인들에게도 다른 어음을 발행하는 대신에
정부의 지폐를 사용하도록 했다.
● 중국은 왜 지폐를 버렸나?
1000년 전 인류 최초로 지폐를 만들게 된 중국이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저액권 지폐를 발행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화폐 경제체제로 들어설 뻔 했었다.
그렇게 되면, 상업 발달→금융업 발달→자본주의 발달이라는
폭발적인 연계효과를 구가할 수도 있었고,
어쩌면 중국이 서양을 앞질러
세계를 지배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왜?
중국인들이게 지폐는
그저 어음 대용이었다.
"지폐? 이건 흔히 사용되는 게 아님."
"국가에 세금을 내거나
멀리 떨어진 곳과 거래를 할 때만 사용하는거지."
때문에 근거리 간 매매를 할때 중국인들은
주화를 사용하거나, 상품화폐(비단, 차)를 사용했다.
여기에 지폐라는 화폐는
태생적으로 불안한 화폐였다.
"솔직히 종이 쪼가리 아닌가?
그런데 이거 보증해주던 나라가 무너지면 뭐임?"
"한마디로 새되는거지."
(반면에 주화는 어느 정도 소재가치가 있었고, 단위가치가 낮아서
나라가 바뀌더라도 큰 손실은 아니었다.)
그랬는데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원나라의 국운이 다 해가는 무렵,
더 이상 지폐는
원거리 교역을 위한
지불 수단이 되어주질 못했다.
"지금 전쟁 중이라 이걸 받아봤자,
다른 곳에서는 못 씀."
당시 중국의 남쪽은
한족의 농민군이 차지하고 있어서
이런 곳에 원나라가 찍어준 지폐를 가지고 가봤자
불쏘시개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결국 원나라의 붕괴 이후 지폐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 자취를 감추게 된다.
● 지폐를 버린 중국, 서양의 호구로 전락하다
명나라가 들어서자
중국은 원거리 교역과 세금 지불 수단으로
지폐 대신에
은(silver)을 사용하게 된다.
이런 은은 처음에는
일본과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서 유입이 되었다.
▲일본의 은광산
하지만 중국의 인구가 얼마인가?
간에 기별도 안 찼다.
이런 시기에 절묘하게
서양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고
또 페루와 멕시코에서
엄청난 은광을 개발하게 된다.
중국 상인
"아니, 코쟁이들 또 왔네.
글쎄, 너희들 물건 전혀 필요 없데도 그러네.."
유럽 상인
"과연 그럴까? 이거 한 번 봐주실까."
중국 상인
"오! 마이 프레셔스.
이 많은 은을 어떻게 다.."
이후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은이 신대륙에서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대가로 중국인들은
영국과 네덜란드인들에게 비단과 도자기를 팔았다.
근 300년 간 이어져 온
이 거래에서
중국은 전세계 은 생산량의 거의 절반 가량을
중국의 화폐 제조를 위해 수입하게 된다.
그 사이 중국의 발달된 물물들이
서양 곳곳으로 유출됐던 것은 물론이다.
다만 당시 유럽인들이 했던 노력은,
잔머리를 잘 썼던 것 외에는 없었다.
그저 배를 타고,
신대륙 발견하고
흑인 노예들을 데리고 와서
광산에서 은을 캐게하고는
▲ 페루의 은광산
그걸 중국인들에게
판 것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중국은 수천만 명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비단, 도자기 등을
고작 은덩어리를 얻기위해
서양 세계로 마구 유출했던 것이다.
▲ 청대 은화
만약 중국의 지폐 실험이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인들은 굳이 은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서양인들은 비단이나 도자기 등의
진귀한 물건을 향유할 수 없었을텐데 말이다.
참고 문헌 :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케네스 포메란츠), 총균쇠(제레드 다이아몬드), 캠브리지 중국사(페어뱅크), 종횡무진 동양사(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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