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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야만족과 문명인의 교류 : 중국과 유럽은 이렇게 성장했다.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3514895
● 야만과 문명의 경계

세계 어디에서든 
타민족을 지칭해서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신대륙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비교독교인들인 인디오들을 

'야만'으로 간주해서 
자기들의 잔인한 정복활동을 합리화시켰고
 

중국은 3천년 전부터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인 중화라고 자칭하면서

주변 민족들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그런가하면 대조적으로 
원나라시대 몽골인들은

남송인들을 평생 좁은 밭에서 
곡물이나 재배하면서

쌔빠지게 살아가는 족속들이라하여, 
'만자'라고 부르면서 똑같이 멸시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영웅 헬렌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헬레네스'라 부르고 

타민족을 '새의 울음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놈들'

이라는 뜻에서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불렀으니,

이 말은 이윽고 
야만인, 미개인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혹은 로마시대 로마인들이 
켈트족의 언어를 듣고

양울음 소리와 같다고 해서 
'바바리안'이라고 하여

영어 barbarian의 
어원을 찾기도 한다.
 
▲ 켈트족

어쨌든 그리스-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야만인 '바바리안'은

이후 북아프리카인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어

오늘날 모로코와 알제리에 사는 원주민을 
베르베르인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 베르베르인 가족

한편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북쪽에 사는 야만인들을 두고

모조리 '게르만'으로 
통칭하기도 했는데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북쪽에 사는 야만인들을 두고

모조리 '흉노'로 통칭했던 것을 보면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 2천년 전 동서양의 세계관

그런데 재밌는 것은 
야민인에 대한 구분이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켈트족은 야만족이었고

켈트족들의 입장에서는 
게르만족은 야만족이었다.

다시 게르만족 입장에서는 
슬라브족은 야만족이었고

또 다시 슬라브족 입장에서는 
저 멀리 훈족이 야만족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구분법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 중국인에게 사로잡힌 왜구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은 야만인들이었고

조선인들에게 
일본인들은 야만인들이었고

다시 일본인들에게 
류큐인이나 아이누족은 야만족들이었다.



중국문명의 성장

● 소빙기 : 유목민족이 중국을 침입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

중국 문명이 탄생한 이래
중국 농경민족과 

북방의 유목민족은 
끊임없이 대립하게 된다.

북방의 유목민족은 
아시아 대륙의 북위 40~50도 사이에 펼쳐진

건조한 스텝 지역을 따라 천막 생활을 하며 
목초지를 따라 이동생활을 하던 부류였다.

이들의 재산이라고는 
수백, 수천 마리의 양떼와

양떼를 관리하기 위해 타고다니던 
말 10필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기후가 추워지면 풀이 자라지 않고
양떼가 전멸하게 되는 사태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대체로 
소빙기 시대에 나타난다.
 

BC2세기, 4세기, 13세기에 북반구에는 
이런 소빙기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이때마다 북방 유목민족들은 약탈자로 변해서
중원대륙 내부로 쳐들어오게 된다.
 

BC 2세기경 흉노족은 중국을 쳐들어오면서
수많은 노획품을 챙기고, 

매년 상당수의 공물을 받을 것을 다짐 받고 
중원대륙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유목민족들은 
점점 진화해 나갔다.

과거에는 경제적 목적만 이룩하면 곧 돌아갔지만,
생각해보니 좀 바보같은 짓 아니던가!

 
"아놔 그때 그냥 눌러 앉을걸"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AD 4세기경 동아시아 일대에 
또 갑작스런 한파가 몰아닥쳤다. 

소빙하기의 
시작인 것이었다.

당시 한파의 영향으로 중국은 
가뭄과 냉해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양자강이 얼어붙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 북반구의 평균기온은 대략 이런데, 동아시아와는 절정의 시기에 있어 시차가 있었다.

이런 시기에 중국은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동시에 유목민족들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이판사판 중원대륙으로 쳐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5호 16국 시대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5호라는 것은 5개의 오랑캐 부족을 뜻하는데,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을 지칭한다.

사실 흉노족과 갈족은 모두 
투르크 계통의 유목민이고

선비족은 몽골계 유목민,
저족과 강족은 티벳계 유목민을 뜻한다.

참고로 이때 투르크족들은 
몽골리언, 즉 황인종이었다.

투르크족들 외모가 
서구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8세기 중엽 이후 
페르시아 계통의 소그드인과 혼혈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어쨌든 이들 유목민족은 
중원대륙으로 내려와

양자강 이북의 화북지방을 장악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정복왕조'를 세우게 된다.


● 호한(胡漢)문화의 시작 : 중국 문화가 풍성하게 된 이유

유목민족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중국 문화로 대변되는 
기존의 한(漢)문화는 일대 변혁을 겪게 된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일단 화북지방의 유민들이 
대거 이웃나라로 피난을 떠났다.
 

이 중 상당수가 
고구려로 유입이 됐고,

이는 곧 5세기 이후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준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중국 유민 2만 5천명을 
돌려주기도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유입된 중국 유민의 수는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한반도 남부에도 
중국 유민들이 배를 타고 이주했으니
 

이때부터 한반도 남부는 
철기와 우경을 이용한 농사가 시작되고

종이, 서적, 불교 등이 
외부로부터 유입되게 된다.

한편 일본에서도 
4~5세기경 한반도에서 이동해 온 

대륙의 기마 민족에 의해 
'야마토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기마민족 도래설'이라고 명칭하고 있다.
   
헌데 이들 도래인들의 
상당수는 

5세기 초 고구려의 남하정책 당시 
터전을 잃었던 백제 유민들이었다.
 
▲ 토착민(조몬인)과 도래인(야요이인)

그리고 이들 도래인들에 의해
서일본은 급속도로 농경화가 시작된다.
 

정리하자면 
당시 파급 과정은 이렇다.

소빙하기 → 유목민족 남하 → 중국 유민 이주 → 고구려 강성·한반도 남부 발전
→ 남하정책 → 백제 유민 이주 → 야마토 문명 개화

즉 유목민족의 남하로 
중국은 물론,

이웃한 동아시아 국가들까지도 
줄줄이 변동을 겪게 된 것이었다.

한편 당시의 유목문화가 
중국인들의 의식주에 침투하여 

커다란 변화를 낳게 되었는데,
'의복'의 경우 기마 복장이 들어와 

통소매에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긴 상의, 바지, 허리띠 등이 유행하게 되고
 
▲ 6세기 화북지방의 청년 모습. 유목민 스타일이 잔뜩 묻어있는 패션

음식의 경우 수력으로 움직이는 
방앗간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밀가루의 이용이 늘어나 
만두와 국수가 보급되게 된다.
 
▲ 물레방아는 유목민족에 의해 전파됐다.

 
▲ 만두와 국수도 유목민족에 의해 전파됐다. (국수는 중앙아시아에서 퍼져나간 음식)

또 치즈나 요구르트도 유행했는데
나중에는 콩을 이용하여 치즈를 흉내 낸 두부를 만들기도 했다.

주거의 경우에는 
의자(胡床)가 들어와

그때까지 깔개를 하고 앉던
중국인들의 생활양식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 6세기 화북지방의 귀족 모습과 '호상'이라는 접이식 의자

오늘날 중국인들은 
입식문화를 하고 있지만

원래는 그들도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처럼 
좌식문화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등자'가 들어온 것도 
이때 유목민들에 의해서였다.
 
▲ 6세기경 등자

등자는 말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를 말하는데,

등자를 이용해서 말을 타면 말 위에서 균형을 잡기 편하고
말 위에서 두 손이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고로 전통시대에 
등자를 쓴다는 것은 

기병의 전투력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의미하고
이는 곧 군사력을 획기적인 성장을 의미했다.
 
▲ 등자의 보급으로 득세하기 시작한 기마궁수

불교가 대규모로 유입된 것도 
이 시기였다.

당시 유목 민족들은 불교를 진흥시켜 
사상을 통합하고 사회를 응집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 당시 만들어진 운강석굴

그리고 이처럼 대규모로 
유목 문화가 유입되면서 

중국 문명은 한층 다양해졌고
(漢)문화는 호한(胡漢)문화로 거듭나게 된다.


● 글로벌 제국 몽골 : 글로벌적인 문화전파

하지만 호한문화로 
한층 풍요로워진 중국인들은

유목민족들이 기여한 문화적 업적들을 
까맣게 잊게되고,

여전히 북방 유목민족들을 
야만인으로 멸시하게 된다.

그러던 중 또 다시 
북반구에는 소빙하기가 대두된다. 13세기 무렵이었다.
 

초원에서 풀들이 자라지 않고
양떼들이 집단 폐사되자, 

이번에는 몽골족이 
대대적으로 중국을 유린했다.
 

유목민들의 특징이라면
문화적으로 낙후된 면모가 많았지만

개방적이고 포용력이 강해
무엇이든 빠르고 쉽게 수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글로벌 제국으로 변모한 몽골은 
특유의 포용력으로

다른 문명끼리의 과학과 기술, 문물이 
서로 전달될 수 있도록 촉매역할을 하여

이슬람의 수학, 천문, 역법, 의학 서적등이 
중국으로 전래되었는가 하면
 
▲ 몽골제국의 일한국 (오늘날의 이란 지방)

중국의 화약, 나침반 등이
이슬람세계로 유입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몽골제국은 
문화 교류의 창구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몽골제국 특유의 문화도 

세계 곳곳에 침투시켰으니, 
대표적인 것은 이런 것들이 있었다.


① 소시지, 순대

양의 창자에 다진 고기와 피, 곡식과 야채를 섞어서 말린
몽골군 특유의 전투식량이 
 
▲ 몽골 전통 소시지

이후 서양에서는 소시지로, 
한국에서는 순대로 거듭나게 된다.
 

다만 서양에서는 4세기 로마 황제가 
살라미 소시지를 먹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고

중국에서는 6세기 경 요리서에 
이와 유사한 음식이 등장하고는 있으니,

소시지의 몽골 기원설은
정확한 얘기는 아니지만,

몽골제국 이후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소시지가 보편적으로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


 햄버거

몽골인들은 말고기를 다져서 
채소와 소금을 첨가하고

말 안장 아래에 
깔고 다녔는데..

이렇게 하면 압력과 충격으로 
고기가 저절로 연해졌고

몽골인들은 이 연해진 고기를 
끼니 때마다 생고기 채로 먹었다.
 

이후 다진 고기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러시아를 통해
유럽으로도 전파되었는데, 

당시 북해 상권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함부르크항으로 유입되면서

이 다진 고기는 
'타타르 스테이크'라고 불리게 된다.
(타타르는 몽골 부족 중 하나다.)
 

그리고 19세초 
미국으로 건너간 독일 출신 이민자들이

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이때 이름이 '함부르크의 스테이크' 였고, 
이것이 오늘날 '햄버거'의 기원이 된다.
 

 역참제

마패는 원래는 
몽골 유목민이 쓰던 것이다.

몽골인들이 역참제를 운영하면서 
사용하던게 마패였으니깐 말이다.
  
▲ 조선시대 마패와 몽골 역참 통행증

여기서 역참제란 
일정한 거리마다 숙박시설과 말을 준비해서

여행객들이 말을 바꿔타도록 
통행의 편의를 제공한, 몽골 유목민 고유의 제도를 말한다.
 

그런데 이게 
몽골제국을 통해

중국, 한국은 물론 
중동, 러시아에 까지 전파가 되게 된다.


 소주

원래 증류주인 소주는 
이슬람에서 만들어져 전승되어 온 것인데

몽골에 의해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널리 제조법이 전승되게 된다.
  


이밖에 우리가 흔히 먹는 설렁탕, 
조선시대 한복의 바지, 족두리, 

연지, 곤지, 제주도 조랑말, 매사냥 등은 
모두 몽골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유럽문명의 성장

● 이교도 덕분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기독교인들

십자군 전쟁 덕분에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멸시하던 야만인 이교도들로부터 

진귀한 문물을 
취득할 수 있었으니,
 

11세기 ~ 13세기 동안의 전쟁을 통해
화약, 나침반, 종이, 설탕, 목욕탕 등을 알게되고
 

16세기 경에는 오스만과의 전쟁을 통해
커피를 알게된다.
 

여기서 종이의 보급은 
활자의 발명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대중적으로 지식을 전파시키게 되어
종교혁명과 함께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켜, 

유럽에서 악몽같았던 중세 암흑기를 떨쳐내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된다.

 

그런가 하면 화약과 나침반의 보급은 
곧 유럽이 신대륙을 평정하고 

대항해시대를 통해 부를 쌓게하는데 
기폭제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설탕은 아프리카의 노예를 
신대륙으로 이주시키는데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목욕탕은 
좀 웃기다.

원래 이슬람에 목욕문화를 전파시킨 것은 
로마제국이었다.

그런데 중세 들어 유럽에서는 없어진 목욕 문화가
이슬람을 통해 역수입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문물 전수를 추가하자면 
바로 항해술이다.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시작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이슬람의 영토였지만

전쟁을 통해 
기독교 세계에 새로 편입된 국가였다.

때문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를 
절묘하게 받아들여

당시 유럽 어떤 곳보다 
국제성을 띠고 있었는데,

이때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으로 돈을 벌고자

아프리카 서해안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고자 했는데

탐험은 1년 내내 북풍이 강한 
모로코 남부를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다시 말해, 한번 항해했다가 
영영 포르투갈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역풍이 불어도 전진할 수 있는 
이슬람의 삼각범선에 주목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배가 
바로 이슬람의 범선을 개량한 카라벨선이었다.
 
▲ 이슬람 삼각범선과 포르투갈의 카라벨선
 
이 배는 역풍이 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범주 능력이 있었고
육지로 인양해 수리하기도 간편했다.

고로 이런 카라벨 범선이 없었다면 
대항해 시대의 출범은 없었을 것이다.


● 콜롬버스가 야만인들에게 얻어낸 보물

포르투갈의 카라벨선 개발로
유럽은 곧 뜻하지 않는 엄청난 발명을 하게된다.

바로 콜롬버스에 의한 
신대륙 발견이었다.

그런데 콜롬버스 본인은 
자신이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고 하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콜롬버스는 왜 자신이 발견한 땅을 
한사코 아시아라고 생각했을꼬?

여기에는 콜롬버스 나름대로의 
과학적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콜롬버스가 애독하던 책에서 
아랍 학자가 지구의 둘레를 2만 밀리어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1밀리어는 약 1.5km를 뜻했다.

하지만 아랍에서 1밀리어는 
2Km 정도의 거리를 가르켰다.
(지구둘레가 실제로 4만 km인데, 거의 정확한 셈)

때문에 콜롬버스는 
지구의 지름이 3만 Km 정도이니,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아시아가 나오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유럽에서 서쪽으로 60일 정도만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지구의 크기를 
잘못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서인도 제도의 인디오를 보니
그동안 소문으로 들었던 아시아 사람하고 모습이 닮았던 것이다.
 
▲ 브라질의 인디오

상황이 이러했으니 
콜롬버스가 평생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서인도 제도의 인디오들은 곧 천연두로 모두 멸종하고 만다)

여기서 콜롬버스가 생각했던 
당시 아시아 지역들을 찾아보면 조금 재미있는데

콜롬버스는 자신이 도착한 
히스파니올라 섬을

서인도 제도의 가장 동쪽에 있다해서, 
지팡구(일본)로 생각하고

바다 넘어 북쪽에 있는 쿠바는 
중국(거란)으로 생각하게 된다.

당시 유럽인들은 중국 북쪽을 
'키타이'(거란)라고 불렀고
(캐세이항공으로 유명한 Cathay도 실은 거란의 명칭에서 유래한다.)

이곳에는 사나운 부족이 
살고 있다고 믿었는데

현지 인디오들이 말하기도 쿠바에는 
사나운 부족이 살고 있다고 했으니, 과연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카리브해를 
'키타이의 바다(거란족의 바다)'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시아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서인도제도에서 

콜롬버스는 향신료인 후추와 금을 찾기 위해
인디오들을 닦달하면서 난리도 아니었는데,

결국 나오라는 후추는 안나오고, 
요상한 채소와 열매만 나와서 실망을 하고 만다.

"아놔..."

그래도 그런 것이라도 싸들고 유럽으로 돌아왔으니,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호박, 감자, 아보카도, 땅콩, 옥수수, 
고추, 토마토, 콩, 해바라기, 카카오(초콜릿), 담배
 

이중에서 오늘날 
후추보다 못한 게 과연 몇개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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