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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근대 유럽 도시들의 심각한 오염 : 얼마나 더러웠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7347591
● 인류 문명과 쓰레기 : 왜 옛날 사람들은 더럽게 살았을까?
 
사람들은 언제부터 
쓰레기 문제로 골치 아파했을까?
 
"글쎄? 예전에도 쓰레기가 있었을까?"

"예전에는 플라스틱도 없었고
모두 친환경 아님?"

"쓰레기 문제는 
아마도 산업혁명 이후에나 생겨났을듯."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쓰레기 때문에 고민을 해야만 했다.

인류의 초기 문명의 유적지를 
파 내려가다보면,

고고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된 자기와 도구, 
타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

똥 덩어리(분석), 
동물의 뼈다귀 등등

모두가 신석기인들이 한군데 모아 버린
쓰레기 잔해들이다.
 
심지어 구석기 수렵 채취인들조차도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한 곳에 쌓아 놓고 생활했다.
 
구석기 주거지인 
동굴의 한 쪽을 파내려 가다보면
 

돌도구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들,
무디어져 버려진 도구들,

동물의 뼈다귀 등
수북히 쌓여 버린 쓰레기 잔해들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인류도
쓰레기들로 괴로워했단 말인가?

"주위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으면 기분 좋음?"

"그런 거 좋아할 사람도 있음?"

"맞어. 그래서 사람들은 청소를 해서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두지."

"그런데?"

"그런 청소를 
구석기인들도 했다는 거야."

"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깨끗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맞아. 가장 큰 원인은
쓰레기를 바깥에 아무렇게나 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집안이 깨끗해도
골목은 쓰레기로 가득했지."

"때문에 나만 깨끗하게 청소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았어."

"오히려 바깥 세상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면서 살게되지."

물론 이럴 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오염을 막거나 통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시대 정부의 대책이란
단편적인 방안에 그칠 뿐,

 
"앞으로 여기에 버리지마"

근본적인 해결은
너무도 요원했다.

왜냐? 그렇게 하려면,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미쳤어? 무슨 백성들을 위해
나라에서 청소부까지 고용을 한단 말임?"

"그러게. 공공장소에서 노상방뇨 하지 말라고 했지,
그렇다고 공중화장실까지 국가가 만들어줘야 함?"

"정부의 재정을
겨우 그딴데 쓰려고 거둬들이는 줄 아나?"
 
백성들 역시 
저마다 핑계가 있었다.

 
"남들 다 버리는데, 
왜 나만 버리지 말라는 거임?"
 
"맞아. 여기에 버리지 않으면,
그럼 어디에 버려?"
 
때문에 인류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오염을 줄이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늘 대응책은 부실했고, 
협조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더러운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 수질 오염 : 똥물과 식수를 분리할 수 없었다

전통시대의 오염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똥물을 
식수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인간의 분뇨에 오염되지 않은 
식수원을 제대로 확보했던 문명은,

19세기 중반까지 
동서양 어디에도 없었다.

예컨대, 강 상류의 마을에서 
버려진 오물은

강 하류 마을에서는 
그대로 식수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강 상류 사람들은 
하천을 깨끗이 사용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강 상류 사람들에게 
빨래를 못하게 하거나

가축을 키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오히려 쓰레기와 분뇨를 
흘러 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강 하류의 사람들은 
감사해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전근대 시절의 인류는
늘상 오염된 물을 마셔가며 살 수 밖에 없었고

19세기 중엽까지 수인성 질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낮은 평균수명(30세 내외)을 살아야만 했다.


근대 유럽의 수질 오염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4세기 프랑스 파리의 센느강

도시의 거리는 쓰레기와 죽은 짐승들, 
정육점에서 버린 찌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파리에서는 한 해에 
30만 마리의 짐승이 도축되었고,

고기 부스러기와 썩은 짐승들은
그대로 하천에 버려져 썩어 갔다.
▲ 오염된 센느강의 그림

심각한 악취 때문에
도시 전체가 호흡하기도 힘들게 되자

드디어 정부에서는 1366년 9월
파리의 도축업자들은 대대적으로 시외로 쫓아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오염된 강물은 여전했다.

쫓겨난 도축업자들이
교외의 시냇물에 쓰레기를 버렸기 때문에

효과를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파리의 센느강

센느강의 오염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은
300년 후의 상황을 봐도 알 수 있다.

17세기 중반 루이 14세의 어머니는, 
파리 센느강의 더러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에 이보다 끔찍한 곳은 없다."

 
"썩어가는 고기와 생선 냄새,
그리고 하천에 방뇨하는 사람들 때문에,"

 
"악취가 진동해서
도저히 이곳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의 템즈강

1847년 런던 하수 위원회의 기술자인 
존 필립스의 보고서 내용이다.

 존 필립스
"런던의 템즈 강변에는 
배수 시설이 전혀 없는 집들이 수백 채나 있어서,"

 존 필립스
"거주민들이 쓰레기와 분뇨를
그대로 하천에 방출하는데,"

 존 필립스
"이런 이유로 하천 주변에는 
똥덩이가 흘러다니고, 악취가 진동했다."

 존 필립스
"게다가 런던의 수많은 거리 곳곳에는 
배수구가 없었다."


참고로 당시 영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20세기 중반까지 동유럽

유럽의 후진 지역(동유럽)에서는 
무려 20세기까지도

똥물을 식수로 
사용해야만 했다.

1926년 모스크바 도심에 있는 집 가운데
수도가 있는 가구는 절반 밖에 되지 못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의심스러운 연못이나 
강물을 이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도시 거주자 중 62%가 

수돗물 대신에 
연못이나 강물을 마셨을 정도다. 


● 거리의 오염 : 쓰레기는 그냥 집 밖으로 던졌다.

사람들은 청결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게을렀다.

집안 청소는 
나름 깔끔하게 했으면서

청소 하면서 나온 쓰레기는
그냥 대문 앞에다 버렸기 때문이다.

동서양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특히 창문 하나만 열면
바로 바깥과 연결되던 서양의 가옥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때면 
그저 창문을 열고

휙~ 던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6세기의 유럽 성곽도시

성곽도시에는 
높은 확률로 쓰레기가 쌓이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성벽 
주변이었다.

1512년 파리를 점령한 영국인들은 
성벽에 쓰레기가 하도 높이 쌓여 있어서 

그것들을 치워야할지
아니면 그대로 방치해야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놔, 치우자니 엄청나고
그대로 놔두자니 너무 더러워서.."


17세기 중반의 미국 보스턴

1652년 보스턴 시 의회에서는 
넘쳐나는 쓰레기를 막아보기 위해 조례를 선포했다.

특히 죽은 짐승을 무단 투기하는 것은
그 피해가 엄청났다.

"앞으로 짐승 사채나 썩은 고기, 
죽은 개나 소를.."

"거리에 함부로 내던지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함."

하지만 조례는 
별 효력이 없었다.

대충 버리고 도망치면 
누구의 가축인지 당최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땅에 묻으려면 그것도 일인데.."

"그냥 몰래 버리고 
달아나는게 장땡이지."


17세기 후반의 스페인 마드리드

1697년의 마드리드를 방문한 한 여행객은 
도시의 거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거리는 언제나 더러웠다. 
창문으로 모든 쓰레기를 내던지는 풍습 때문이다."

"그러다 거리에 쓰레기가 넘쳐나면
마을 사람들도 불편했기 때문에.."

"그제서야 짐마차로 물을 길어와
거리의 쓰레기와 분뇨를 씻어냈는데,"

"이때 잘못해서 물벼락을 맞게 되면
고약한 냄새가 온몸에 배기기 때문에,"

"보행자들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17세기 후반의 중동

중동 지방의 도시들도 
더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프랑스 여행객은
1594년의 중동의 거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거리는 온통 진흙으로 뒤덮인 데다,"

"곳곳에 죽은 동물과 
도축된 짐승의 피로 얼룩져 있었고,"

"사람들은 아무데나 용변을 보는 습관이 있어서
거리는 끔찍히도 더러웠다."


"거리에서 
치워진 쓰레기도 문제였다."

 
"쓰레기들은 
대개 성벽 주변으로 버려졌기 때문에.."

 
"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고약한 냄새에 시달려야만 했으니 말이다."


19세기 초 중동

프랑스의 문학가인 자크 카이유는 
19세기 초 모로코의 라바트 거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도시의 거리에는 
끈적끈적한 진흙이 10cm나 깊게 쌓여 있다."

"치운 쓰레기들은 바다에 처넣거나, 
성벽 주변에 그냥 쌓아두어.."

"거대한 분뇨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 화장실 문제 : 밖으로 던지거나 거대한 변기통 안에 채우거나

동양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화장실을 갖춘 집들이 적었다.

동양에 비해 인분을 거름으로 쓰는
시비법이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용변을 봤단 말인가?


그냥 밖에서 누거나
아니면 요강을 사용해서 분뇨를 버렸다.

어디다 버렸을까?
그냥 아무데나 버렸다.


근대 유럽의 요강 비우기 (17~18세기)

밤 11시가 되면 
스페인 마드리드의 집들은 갑자기 분주해진다. 

모두가 길거리에다 
요강을 비웠고

이튿날 아침 10시 거리에는 
똥과 오줌들이 바짝 말라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밤이 되면 

제리(jerry)라고 부르는 
요강을 투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곱게 투척하면 괜찮을 것을 
2층에서 대충 뿌려대는 통에

길가는 사람이 
똥물 세례를 맞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 윌리엄 호가스의 '그때 그 시절'의 삽화, 요강 비우기

관공서의 경우도 화장실이 없었기에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루브르 재판소의 건물 외벽은 
창문에서 내던진 변기의 내용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화장실을 갖춘 집이라고 해도 
사정은 딱했다.

궁전과 성에 비치된 화장실이란
거리나 해자(☞참고)로 배설되도록 

마룻 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부유한 도시의 주택에는 
화장실이 있었으나,

변기통만 있을 뿐 
그와 연결된 하수구 따위는 전혀 없었다.

시쳇말로 푸세식 변기와 
다를 바 없었지만,

문제는 동양의 변소처럼
주기적으로 퍼주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17세기 영국 런던의 가정집 화장실

주택의 변기통은 
대개 지하실에 있었다.
 
사무엘 페피스는 1660년 10월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문제를 발견했다.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발이 똥더미에 빠졌다."

"옆집 화장실이 넘쳐서 
우리집 지하실로 스며들어온 것이다."

"아놔, 골치 아프다."


18세기 프랑스 센느강의 노상방뇨

대부분 서민들은 화장실이 없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용변을 보았다.

그런데 18세기 파리에서 
튀르리 궁전에 새로 심은 주목나무 밑을 

화장실로 쓰는 것을 
당국이 막자, 

사람들은 일제히 
센느 강에다 용변을 보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공중화장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의 맨체스터 시의 어크 강 근처에서 

200명의 사람들이 
한 화장실을 나누어 쓰는 것을 봤다.

 엥겔스
"이곳의 공중 화장실은
죄다 문짝이 없었다." 

 엥겔스
"화장실은 너무 더러워서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엥겔스
"썩은 오줌과 똥 구덩이로 범벅이된 
사방의 도랑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 19세기 후반, 수세식 화장실의 보급 : 수질오염만 악화시키다

19세기 후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웠던
세계 패권국가 영국은 자신감이 대단했다. 

또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이러한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도록 법령을 제정하게 된다.


하지만 곧 
아니한만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시에는 오물을 하천에 버리면 
그것으로 만사 끝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때문에 정화시설도 없이 
똥물을 다이렉트로 하천에 방류하게 한 결과,

런던의 템즈강은 
거대한 썩은 똥물로 변해

1858년 런던의 의회는 '대악취 사건'으로 인해
하원의 개원을 취소하게 되었고,

런던 시민들은 
엄청난 콜레라의 공습을 당해야만 했다.


19세기 중반 템즈강 식수를 마신 사람들

19세기 중반 많은 물 회사들이 
템즈강에서 취수를 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런던 시민들은
장염과 콜레라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에 1853년 램베스 물 회사가 
수원을 템즈강의 상류로 옮기자,

그제서야 런던 지역의 사망률은 
1000명당 130명에서 37명으로 크게 줄어들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맨체스터 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보고문이다.

 엥겔스
"어크 강바닥과 썩은 물은 
인근의 하수구와 화장실의 내용물을 받아들인다."

 엥겔스
"강변에는 곳곳에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었고,"

 엥겔스
"강물은 새카맣고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했으면
구역질 나는 악취를 풍겼다."

 엥겔스
"강물은 검푸르고 끈적거리는 오물 투성이었고
바닥에서 유독한 거품이 올랐다."


20세기 초 프랑스

이러한 똥물 문제는, 20세기 초반 
배수시설과 정수 처리시설이 개발되면서

비로소 완벽에 가깝게 
해소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선진국들의 평균수명은 
혁혁히 늘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부유한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에만 그런 혜택을 볼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1925년까지만 해도
배수시설이 전혀 없는 가정이 절반 가량이나 되었고,

1960년대까지도 
하수의 절반이 

정화되지 않은 채 
센느 강으로 흘러들어갔다.


20세기 후반까지 똥물을 마셨던 러시아

소련과 동유럽 정부들은 
20세기 후반까지도 

환경오염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오로지 중공업의 개발만이 중요했다.

▲ 러시아의 옴스크 최근 모습

때문에 1980년대에도 
모스크바의 거의 모든 하수는 

정화되지 않은 채
모스크바 강으로 흘러들어 갔고

강은 뚜껑을 덮지 않은 
거대한 하수도나 다름 없었다.
 
 
● 가축의 문제 : 수레를 사용하는게 과연 최선일까?

흔히 수레를 두고 
인류의 최고 발명품이라고까지 추켜세운다.

하지만 가축을 이용한 수레는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운송량도 적다.
 

그리고 위생적으로 볼 때,
심각한 오염을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이보다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인 
'수로'를 사용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가축을 이용한 
수레를 사용하려 한다면,

이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생각해 봐야 한다.


가축의 오물 

수세기 동안 유럽 도시의 거리들은 
말들이 흘린 똥과 오줌으로 더럽혀져 있어서

비가 오거나 더운 날이면,
도로는 끈적한 오물의 강으로 변해 버렸고,

반대로 건조한 날씨에는 
마른 똥들이 먼지가 되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에 모이는 
파리떼도 골칫거리였다.

때문에 중근세 유럽의 거리는 
가축의 배설물로 인한 거대한 세균 덩어리와도 같았다.
 

가축의 사체

가축의 배설물보다 
훨씬 심각한 오염물이 있었으니,

바로 
가축의 사체다.
 

19세기 들어 유럽에서는 
마차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버려진 말들의 시체가 거리 곳곳에 방치되었다.

당시 말들은 
대부분 심하게 과로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개 2년을 넘기지 못한 채 
거리에서 죽어 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방치된 사체에서 풍기는 냄새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방치된 사체에는 
구더기가 끓고 

파리가 기생하고
사체를 파먹는 쥐들로 들끓었다.

당연히 심각한 질병들이
사람들을 위협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1900년 한 해에만 뉴욕에서는,
1만 5,000마리의 죽은 말을 거리에서 치워야 했으며,

1912년 시카고에서는
1만 마리의 죽은 말을 치워야 했다.

 
● 대기오염 : 석탄을 일찍이 사용했던 유럽

영국은 석탄 매장량이 
상당한 나라다.

'석탄'이야 말로 
산업혁명 이래 

영국의 산업경제를 이끌어 온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영국의 석탄 광부

그런데 이런 석탄을 영국인들은, 
거의 1000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때 열린 화덕에서 
석탄을 지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영국인들이 
눈병을 앓아야만 했었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로, 영국의 석탄 연기는 
더욱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17세기 후반 런던의 일상

1661년 
존 이블린의 글이다.

 존 이블린
"현재 런던 시내는 
마치 화산 속의 연기와도 같다."

 존 이블린
"시민들의 쿨럭대는 소리와 침 뱉는 소리,
기침과 재채기 소리는 연일 끊일 새가 없다."


 존 이블린
"끔찍한 매연은 런던의 교회를 지저분하게 만들고,
런던의 궁전을 낡아 보이게 하며,"

 존 이블린
"런던 시민들의 옷을 더럽히고 
템즈강의 물을 오염시키며,"

 존 이블린
"이곳의 비와 이슬조차도 시커멓게 만들어서
도시는 온통 검고 끈끈한 얼룩 투성이다."


18세기 영국 도시들의 상황

셰필드 시에는 
이런 경고문이 있다.

"이 도시에서는 매연으로 
반쯤 질식될 수도 있다."

뉴캐슬에 머무르고 있던 
윌리엄 스투클리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곳의 하늘에는
매연구름이 공기 중에 떠돌고 있어서.." 

 
"런던만큼이나 
모든 것이 검게 보인다" 

옥스퍼드의 상황도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그리스 로마 시대의 대리석 미술품들은 
매연 때문에 금방 형체가 망가져 버릴 정도다."


19세기 후반, 런던의 스모그

이러한 매연은 19세기 후반
각 가정마다 개인 화덕을 가지게 되면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해졌다.

 
"대영제국이 
세계에서 제일 부유하지 않음?"

"당연히 가정마다 석탄 화덕쯤은 
하나씩 있어야지."

하지만 이런 근시안적인 생각이
런던 시민들의 황천행을 재촉하게 되었으니,


19세기 후반 이후
런던은 예년보다 안개가 낀 날이 3배로 늘어났고,

안개가 심할 때는 
늘상 폐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치솟았다.

1873년 12월에는 
극심한 안개로 인해 500명이 죽었고,

1880년 2월에는 
단 3주동안에 2,000명이 죽었다.

그리고 그런 양상은 
해마다 더 심각해져서
 

1920~1950년에 런던 중심부에 
해가 비친 날은 

시 외곽에 비해 20%나 적었다. 
석탄 연기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2년 12월에는 
사상초유의 스모그 사건으로

런던 시민 4천여 명이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잃게 된다.



참고 문헌 : 녹색 세계사(클라이브 폰팅), 화장실의 역사(야콥 블루메), 쓰레기 문명의 그림자(카트린 드 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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