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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운하로 본 세계사 : 인도네시아 인종분쟁 + 서양에는 왜 대도시가 없었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7111245
파나마 운하

● 코르테스가 최초로 생각한 파나마 운하

때는 
1529년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초대 국왕이었던 카를 5세에게 

아즈텍을 정복하고 돌아온 
코르테스가 보고를 한다.

 카를 5세 
"수고가 많았네. 
이게 신대륙 지도란 말이지?"

 코르테스 
"넵"

 카를 5세
"헐, 엄청나게도 크구나."

 코르테스
"맞사옵니다. 
거의 유럽 대륙의 10배는 되옵니다."

 카를 5세
"근데 길고 커다란 대륙인데 
이곳이 유난히 좁구나."

카를 5세가 지목한 곳은
남북 아메리카를 연결하고 있는 좁은 파나마의 지협이었다.

 코르테스
"맞사옵니다."

 카를 5세
"그런데도 태평양으로 나가려면 
한참을 뺑이 쳐서 돌아 나가야 된단 말이지?"

 코르테스
"그렇습니다. 왠지 억울하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 땅을 뚫어버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카를 5세
"그게 가능함?"

 코르테스
"못할 꺼 없습니다. 
80km만 파면 되거든요."

 카를 5세
"그래? 그럼 함 추진해 봄세."

이랬는데.. 
때마침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침공하고 있어서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전쟁비도 빠듯한 판국에 
파나마 운하에 쓸 돈이 없었던 것이다.

 코르테스
"아놔, 오스만 넘들만 아니었으면.." 

그리고 그때 묻어버렸던 사업은
무려 340년 뒤에야 다시 추진되게 된다.


● 아메리카 땅 어디를 파야할까?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수에즈 운하를 기획+건설했던 프랑스인이다.

 레셉스 
"에헴"

사실 그가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데에는 
프랑스 제국주의 정책의 덕을 많이 봤다.

당시 이집트는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차이나와 이집트를 직접 연결하고 싶었다.

 
"인도차이나 식민지까지 가려면 
아프리카 땅을 삥~ 둘러서.. 어휴, 가는데만 석달이야."

 
"이럴때 
아시아 식민지에 반란이라도 일으켜봐."

 
"맞아! 신속하게 식민지로 
군대를 투입하고 물자를 수탈할 수 있으려면,"

 
"지중해와 인도양을 
뚫어버리는게 필요함."

그렇게 시작한 수에즈 운하 공사는
1869년에 완공하여

시공을 맡았던 레셉스는 
막대한 돈을 벌게 되었다.

그런데 성공한 레셉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레셉스
"좋아! 두번째 프로젝트다.
이번에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해보겠어."

이때 운하를 뚫을 장소를 두고
논쟁이 붙었다.

 레셉스
"아메리카 대륙 어디를 뚫어야 
가장 효과적일 거 같음?"

"내가 볼 때는 니카라과 이쪽이야.
중간에 커다란 호수가 있거든."
 

"뭔소리? 그래도 가장 짧은 구간은
이쪽 파나마 땅이잖아."
 

"파나마는 니카라과보다 남쪽이야."

"태평양을 가기 위해 
배들은 더 멀리 항해해야 한다고."

"무슨 소리! 
공사비 한푼이라도 더 아끼려면 파나마로 해야지."

"나중에 비용도 생각해야지.
니카라과가 최선임."

그랬는데, 
레셉스가 한마디 거둔다.

 레셉스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건 공사 수익이야."

 레셉스
"나중의 일을 우리가 왜 생각함?
공사비 싸게 먹히는게 장땡이지."

이래서 결국 
파나마 땅을 파기로 결정이 난다.


● 말라리아 대참사

그런데 레셉스는 
공사를 너무 만만히 봤다.

 레셉스
"까짓것. 파나마 지협은 불과 80km 짜리인데.."

 레셉스
"갑문식 그딴 걸 왜 생각함? 고도차 있어봤지지.
그냥 파기만 하면 끝남."

그러면서 운하 건설비용은 너무 낮춰 잡았고,
반면에 건설 수익은 매우 높게 예상했다.

 레셉스
"투자자들만 대충 꼬드기면
앞으로 떼돈을 벌게될 사업이라고.."

하지만 그는 열대우림의 풍토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건조한 기후에서 이뤄졌던
수에즈 운하의 공사만 생각했던 것이다.

"파나마 지역은 열대우림임.
혹시 열대 질병은 생각해 보셨음?"

그러자 그는 
이렇게 쏘아 붙였다.

 레셉스
"꼭 무식한 넘들이 생트집이야."

 레셉스
"내가 현지 답사해봤거든. 
바람 솔솔 불고 쾌적하고 좋더만."

 레셉스
"앞서도 내가 수에즈 운하 
성공하시키는거 봤잖아."

 레셉스
"너희들 지금 투자 안 하면 
나중에 땅을 치게 후회한다니깐."

이렇게 홍보를 했던 
레셉스였다.

하지만 프랑스 투자자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연까지 속일 수는 없었으니, 곧 이런 보고가 들어왔다.

"현장 조사팀이 밝히기를
해발고도가 의외로 높다네요."

"해수면과 표고가 같게 
운하를 건설할 방법이 도저히 없답니다."
 ▲ 실제 파나마 운하의 고도차

 레셉스
"아놔, 그런 조그만 땅에 
무슨 그리도 산들이 빽빽한건지."

결국 운하의 양쪽 끝에 
갑문을 만들어야 했다.

또 열대 전염병에 걸려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게 됐다.
 
▲ 당시 노동자들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계속 떼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레셉스
"나도 알고있어. 
그래, 총 얼마나 사망했는데?"

"말라리아로 사망하거나 투병 중인 노동자 수만
총 2만 2천명이라고 합니다."

 레셉스
"뭐야! 2만 2천명..?"

그랬다. 당시 현장에서는 말라리아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쓰러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라리아로 알려졌지만 
사실 황열에 의한 피해가 더 많았다고 함."

"뭐, 말라리아나 황열이나 
모두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질병이지만.."

 
▲ 당시 노동자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참사를 겪게된 이유는 '무식함'에 있었다.

당시 말라리아의 원인으로 꼽은 건
황당하게도 개미떼였기 때문이다.

"이넘에 개미들 때문에 
무서운 질병도 퍼지는거임."

"그러니 공사 현장에 개미가 얼씬도 못하게
구덩이를 파고 물을 가득 채워넣으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들에게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줄 뿐이었다.
 


● 19세기 최대의 금융 스캔들

공사가 지지부진하고, 
현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망을 하고,

공사비마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공사에 대한 반대여론이 불거졌다.

"뭐야? 운하 개통은 소식도 없고
계속 공사비 타령만 하고 있잖아?"

"수에즈 운하보다 식은죽 먹기라더만.."

"왜 수에즈 운하 길이의 절반도 안되는 걸 가지고 
아직도 헤매고 있음?"

이때 레셉스가 선택한 방법은 
로비였다.

그는 언론사들을 찾아가 
입막음 + 사업 홍보를 위한 엄청난 돈을 뿌렸고

정치가들 또한 
대대적으로 매수했다.

 레셉스
"언론이 망치면 될 일도 안된다능."

 레셉스
"이 사업은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결국 도산하고 말았고

곧 19세기 최대의 
금융 스캔들이 터졌다.

"레셉스란 넘 알고보니, 
순 사기꾼이었다며?"

"그러게, 현지 답사도 제대로 안하고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질 않나.."

"수천 명이 죽었다던데. 
죽은 노동자들만 불쌍하지"

"언론과 정치가들을 
로비한 건 또 어떻고.."

결국 레셉스는 징역형을 선도 받고
감방에서 평생 콩밥을 먹는 신세가 되고 만다.
▲ 당시 재판

그에게 뇌물을 받은 정치가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런 얘기도 있었다.

"현재 프랑스 정치가들은 
딱 두 부류만 있다."

"하나는 레셉스한테 돈 받은 정치가,
다른 하나는 받지 않는 정치가."

 

결국 프랑스는 
파나마 운하 사업에서 완전 손을 떼게 되었고

한동안 프랑스에서는 '파나마'라는 단어는 
'협잡'과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 미국, 파나마 운하 굴착권을 사들이다

그렇게 운하 사업은 
그대로 내팽개쳐 지다가

1903년에야 미국 정부가 
레셉스의 운하 굴착권을 4,000만 달러에 매입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의 이런 결정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이 헛돈을 쓰네."

"그러게 말이야. 
파나마는 말라리아로 인한 죽음의 땅이야."

"차라리 니카라과를 뚫지."

하지만 7년 후 
말라리아의 원인이 밝혀지게 된다.

"알고 보니 
말라리아의 원인은 모기였어."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방법은 간단하다고.."

"늪이란 늪마다 모두 석유를 뿌리면 
모기 유충들이 박멸되거든."
 
▲ 당시의 모기 방역

때문에 4년 뒤 미국은
무사히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 파나마 땅은 콜롬비아의 영토였던 것이다.
 
▲ 당시 콜롬비아의 영토

따라서 콜롬비아는 미국에게 
비싼 조건을 요구하게 된다.

  
"운하 파준거 고마워."

  
"그런데 남의 땅에서 장사하는 건데
자릿세는 내고 하는게 상도독 아님?"

이에 미국은 
파나마 주(州)를 꼬드겼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너희들 언제까지 
콜롬비아 넘들 눈치보면서 살래?"

 테오도어 루즈벨트
"운하도 생겼겠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내가 볼 땐 너희들 충분히 자립할 수 있거든.
우리가 도와줄게, 이참에 독립해라."

그리고 유혹에 넘어간 파나마는 
결국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그 후로 미국은 
85년 간이나 운하의 이권을 독차지했고

 파나마인 
"운하 준다면서 왜 안 줌?"

이런 식으로 20세기 내내 
파나마 정부와 미국은 

운하 소유권을 놓고 
마찰을 빚었었다.

사실 미국은
남 주기에 너무도 아까웠다.

"파나마 운하 때문에 
그동안 우리 미국 해군이 최강이 될 수 있었음."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게
다 파나마 운하 때문이지 않겠음?"

"그런데 여길 돌려달라니.."

때문에 미루고 미루던 운하 소유권은
2000년이 되어서야 파나마로 이양되게 된다.
 

하지만 
파나마의 기쁨도 잠시,

최근 뜬금없이 불어닥친
지구온난화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된다.

 
"아놔, 북극 얼음 녹아서 북극항로 개통되면
누가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겠음?"



수에즈 운하와 인도네시아의 분열

● 수에즈 운하의 개통

지중해와 홍해의 
접점에 위치해 있던 이집트는

4천년 전부터 
지중해와 홍해를 뚫어보려고 했다.

가장 먼저 운하에 도전한 것은
BC 19세기 무렵 고대 이집트의 세누스레트 3세였다.

 세누스레트 3세
"여기만 뚫으면 지중해의 선박을 
아라비아 해안까지 댈수 있다 이거지?"

 
"파라오님, 지중해에서 뚫기보다는.."

  
"나일강을 이용하면
공사구간을 좀 더 짧게할 수가 있습니다."

 세누스레트 3세
"오케, 좋은 방법"

그렇게 시작한 공사였지만
운하를 파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세누스레트 3세
"아놔, 차라리 피라미드를 쌓고 말지.
땅 파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들줄은.."

결국 이집트는 1500년간 꾸준히 도전해봤지만
번번히 실패를 하고 손을 놓고 만다.

그러던 것이 BC 5세기 경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겨우 운하는 완공되게 된다.

 다리우스 1세
"하하하. 봤능가?
이집트 넘들이 못한 걸 내가 해냈다니깐."

▲ 지도에서 빨간 라인

다만 이때 만든 운하는 
폭이 좁고 수심도 얕았기 때문에

수로가 막혀 
주기적으로 보수공사가 필요했다.

그렇더라도 운하는 
매우 요긴하게 사용됐다.
 

하지만 7세기경 이슬람 제국이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자
 

이슬람인들은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주던 
운하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하게 된다.

 
"보아하니 이 운하를 타면 
지중해에서 수도 메카까지 직빵이네."
 

 
"이거 이대로 놔두고 있다간 
언제 기독교 넘들의 침공로가 될지 몰라."

이런 이유로 이슬람인들은
8세기 경 다시 운하를 막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후로 
1100년이 넘게 사람들 기억 속에서

지중해와 홍해를 잇던 운하는 
사라져가게 된다.

하지만 19세기가 되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불을 뿜게되자

다시금 운하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곳을 뚫어야 본국에서
아시아 식민지까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음이야."

그리하여 프랑스에 의해 
다시 운하는 건설되게 되었고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지름길이 뚫리게 되었다.

개통 3달만에 
런던-봄베이간 운송비가 30% 떨어졌고, 

10년 뒤에는 
개량된 증기선까지 가세하면서 
 

마르세이유에서 상하이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10일에서 37일로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로의 침략이 
더욱 가속화되었음은 물론이다.


● 수에즈 운하,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다

사실 수에즈 운하의 공사 과정에는 
영국의 줄기찬 방해공작이 있어 왔다.

애초에 운하는 프랑스와 이집트인들이 
공동 주주가 되어 사업자금을 만들고

먼저 99년 동안은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민간법인이 운영을 하다가

이후로는 이집트 정부로 양도한다는 식의 
협정으로 이뤄진 사업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딴지를 걸었다.

  
"너희들 그렇게 되면
프랑스의 식민지를 자처하는 꼴 밖에 안됨."

 
"프랑스한테 속으면 안 돼.
민간법인도 너희 이집트인들이 운영을 해야 한다고."

결국 이런 방해공작은 
성공하여

수에즈 운하의 민간법인은 
이집트인에 의해 운영되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영국은 꾸준히 
수에즈 운하 법인의 주식을 사 모으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샌가 회사의 경영권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여기에 울화통이 터진 것은 
당연 프랑스였다.

"아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더니, 어쩜 이럴 수가.." 

"그러게 운하를 만든 건 우리인데
왜 영국넘들이 운영권을 쥐고 있는거냐고."

그러던 찰나, 이집트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건, 영국이건 다 꺼져.
왜 우리 땅의 운하를 지들맘대로 운영하려 하는겨?"

그러자 영국은 운하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파병하게 되었고
 

이집트는 빠르게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 수에즈 운하의 개통 : 중국인들의 집단 유입

수에즈가 운하가 뚫리게 되면서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만큼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간 동네도 없었다.

당초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예상했다.

 
"운하도 뚫렸겠다."

 
"이제 동인도 제도(인도네시아)가 
유럽과 더 긴밀하게 연결된만큼," 

 
"유럽의 문화가 식민지로
더 빠르게 침투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동안 문화적 차이 때문에
쌈질이나 하던 아시아 사람들도,"

 
"점점 유럽식으로 바꿔 살아가면서
문화적 차이도 사라질테고.."

 
"싸우는 일도 
곧 없어지게 될 거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는
원주민인 말레인 외에 

노동자로 온 
중국인, 인도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문화와 관습이 달랐기 때문에
좀처럼 서로간 어울리려하지 않았고,

서로를 불신하며 
반목하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나더니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게 된다.

이유는 
이랬다.

먼저 운하가 개통되자 
더 많은 유럽의 자본이 아시아로 몰려왔다.

당시 유럽인들은 베트남 남부 메콩강과
미얀마의 이라와디강 삼각주를 적극 개발했다.

 

"너희들 그동안 삼각주는 
물이 범람한다고 그냥 버려둔 땅이었지?"

"잘 보라고. 이렇게 재방을 쌓고 
물을 빼내기만 해봐라."

"이보다 비옥한 농토가 
또 어딨음?"

▲ 이라와디강 삼각주

"와! 역시 
서양 넘들은 기술 좋아."

그렇게 삼각주가 개간되자,
일대의 쌀 수확량은 크게 폭증하게 된다.

그러자 누구보다 상황을 반겼던 이들은
동인도 제도의 네덜란드인들이었다.

"오! 좋은 소식. 
그 쌀을 우리가 수입해다 먹으면,"

 
"이제부터 동인도 제도 땅에서
애써 쌀을 짓지 않아도 되겠는 걸."

"맞아. 그 쌀이면 
동인도 노동자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겠다,"

"이참에 동인도 제도 일대를 
거대한 플랜테이션 단지로 특화해서,"

"수출용 작물만 
재배해 보는 것도 가능함."

이런 생각에서였다.
그런 이유로 네덜란드인들은

더 많은 중국, 인도 노동자들을 
수입하게 된다.
(이들 노동자들을 흔히 '쿨리'라고 한다.)
 

그러자 부유한 중국 상인들도 
따라 들어왔다.

이들은 농사하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직 쿨리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으니
 

그렇게 동인도 제도의 이민 사회가 
만들어지게 되고,

최상위층에는 
유럽인 농장주들이 자리를 잡게 되고,
 

다음 중간 계층에는 중국인들이
빠르게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인도인이나 말레이인들보다 
똑똑하고 성실해서 좋더군."

"맞아, 얘네한테 전당업, 서리, 
세금 징수 따위의 일을 시키면 아주 잘 해내더군."

반면에 가장 말단은 
토착 말레이인과 인도인의 차지였다.
 
▲ 인도 출신 노동자

"얘네들은 
너무 게을러."


● 수에즈 운하의 개통 : 인도네시아의 인종주의 심화

운하의 개통으로 
유럽인들은 보다 빨리 

유럽과 동인도 제도를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기존의 
네덜란드 '정착민'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네덜란드 '체류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기존의 정착민들은 
평생을 인도네시아에서 살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현지 여성과 결혼하고 
현지 언어(말레이어)를 익히며

주저 없이 현지 사회와 
동화하려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후로는 

점차 몇년 잠깐 머물며 직업상의 경력만 쌓고자 
오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이들은 흔히 
'체류자'로 불렸다. 
 

체류자들은 
유럽인 부인들을 데리고 오거나, 

원주민을 경멸한 나머지 
일본인 첩을 데려오기도 했다.

인종주의가 만연했던 당시에
네덜란드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일본인들은 
한 등급 높은 아시아인이야."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p.144)

그러면서 체류자들은 
말레이어를 배우는 것을 거부하고
 
현지인들과 접촉하기 꺼려하며 
철저히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려 했다.

그리고 이런 인종적 배타주의는 
곧 중국인에게로 옮아갔다.

"우리 위로 
유럽인이 있다는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아래로 
열등한 말레이인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잖아."

당시 중국 노동자들에게 
만연된 생각이었고

중국인들은 급기야 
민족주의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중국인 쿨리 
"우리 중국인들끼리 똘똘 뭉쳐야
하찮은 말레이인들에게 무시받지 않지."

그러면서 식민지 정부를 상대로는 
이렇게 청원을 했다.

"우리도 유럽인과 같은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게 해주셈."


● 수에즈 운하의 개통 : 말레이인들의 각성

수에즈 운하 개통이 네덜란드인과 중국인들의
인종주의만 높여줬던 것은 아니었다.

말레인들까지 
민족주의를 외치게 되었으니
 

과거에 수에즈 운하가 
뚫리지 않았을 때는

동인도 제도의 화물들이
남아프리카를 돌아 유럽으로 향했기 때문에

동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은
이슬람사회와는 소통하는게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운하가 뚫리니
운송로가 중동을 관통하게 되었고

그러자 대부분이 무슬림이었던
동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은

그들의 종교 심장부에서 
보다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자 부유한 말레이인들 중에서
배를 타고 메카를 순례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면서 말레이인들은
중동을 통해 무슬림의 단합심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불쌍한 형제여.
너희도 기독교 넘들에게 당했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 무슬림들끼리 뭉쳐야 한다네."

그러자 동인도 제도 사회에서는 
종교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재미있는 것은
각성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백인들보다 2등시민이던 중국인을 
더 혐오했다는 점이다.

 
"알고보면 백인 넘들보다
중국 넘들이 우릴 더 무시한다니깐."

"그러게 말이야.
백인의 노예인건 서로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더 꼴보기 싫어."

결국 이러한 인종적 갈등은
인도네시아가 건국된 이후로도 끊이지 않게 되었고 

1998년 비극적인 '화교 학살 사건'의 
역사적 연원이 되고 말았다.
 



동아시아의 수운 교통

● 왜 근대이전 서양에는 대도시가 발달하지 못했을까?

전통시대에 
도시의 인구가 10만명이라면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큰 규모인지 
쉽게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전통시대의 도시들은 
식량과 땔감 부족 때문에 무한정 커질 수가 없었다.
 

도시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사람들을 먹여 살릴 잉여 농산물이 있어야만 했는데

전통시대에 수확의 20% 이상을 
팔 수 있을만큼 여유로운 농부들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농부1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누가 그렇게 팔 수가 있음?"

 농부2 
"맞아. 식량이 남더라도 
흉년을 대비해서 저장해 둬야지. "

 농부2 
"장사 하루 이틀 해보나."

대부분 
사정이 이랬다.

여기에 행여 남은 수확물을 
도시에 팔았다 쳐도

운송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육상 교통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보통 말이 끄는 수레로 
곡물을 싣고 운반하는 경우라면,

싣고 가던 곡물의 상당 부분을 
말들에게 사료로 줘야만 했다.
 

때문에 도시까지 가 봐야 
오히려 밑지는 때가 더 많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유럽 도시의 경우  
그 한계점이 30km 지점이라고 한다.

즉, 30km의 거리를 넘게되면
비용이 수익을 넘어버리기 때문에

식량을 운송할 유인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근교농업이 발달된 곳은
상황이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대신 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대단위 농장이 조성한다면,"

 
"인구 10만명 정도는
너끈히 부양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농부들의 수확물이 변수다.
 

만약 농부들이 
수확물의 80%를 자기들이 먹고,

나머지 20%를 
도시에 팔았다고 치자.

그런데 농작물은 
작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떤 해에 농사가 잘 안되어서
수확물이 10% 줄어들었다고 하면

농부들에게는 
10%의 손해 밖에 않되지만,

곡물 시장의 경우는 
공급량의 50%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곡물 값은 
2배 상승으로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도시의 곡물 가격은 
심하게 요동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도시가 
제대로 물가를 관리하지 못하면

시민들은 곧 굶주리거나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전통 시대 도시의 인구는 
적정 수준을 넘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20만명이 한계였고

중근대시대에 인구 50만명을 넘는 도시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 


● 동아시아에서는 왜 쉽게 대도시가 생겨날 수 있었는가?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상황은 달랐다.

이곳에서는 인구 20만명 이상의 거대 도시가 
아주 쉽게 생겨났다.

이유는? 
수상 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주로 해운을 이용했다.)
 

밀보다 단위생산력이 높았던 
쌀을 재배했던 것은 또 다른 이유였다.
 

여기에 유럽보다 
발달된 중앙집권제도로 인해

수도(capital)의 경우, 
전국으로부터 징수한 세곡을 통해

손쉽게 인구 수십만 명급의 
대도시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고려의 수도 개경이 인구가 30만명을,
조선의 수도 한양은 인구가 20만명을 넘겼다.
▲ 고려의 벽란도

18세기 전세계에서 가장 컸던 에도(도쿄)의 경우
인구가 무려 100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엄청났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내륙 한가운데 건설되었던,
중국의 수도 북경이었다.

북경은 에도처럼 해안도시도 아니었고
한양처럼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도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수운을 이용한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넌세스였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그걸 해냈다.
 
▲ 북경의 운하

당시 북경의 조정은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망을 이용해

강남지역의 쌀을 
대대적으로 가져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하의 길이는 대략 
2,200km 길이였다.
 

근현대 시기에 만들어진
운하들과 비교를 해보면,

수에즈 운하의 11.5배, 
파나마 운하의 28배의 거리인 셈이다.

그런데 그걸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였던 
7세 초에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로도 운하는 
조금씩 확장되고 보강되어,

15세기 초에 와서야 
오늘날처럼 완성되지만 말이다.
 
▲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

중국은 이런 운하를 통해
18세기 청 왕조의 경우, 

연 100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엄청난 쌀을
수도로 운송할 수 있었다.
 

더욱이 청나라에는 전국적으로 
곡물 창고망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동아시아를 강타한 최악의 흉년에도
곡물 가격이 2배 이상 올라갔던 적이 거의 없었다.
 

반면에 
유럽 도시의 경우는 어떤가?

흉년이 한번만 불어닥쳐도
곡물 가격은 아주 쉽게 3~4배씩 뛰어 올랐다.

고로 전통시대에 
중국 시민이 누리던 안정된 물가 수준은

바로 대운하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왜 우리나라는 수운 교통만을 발전시켜 왔을까?

우리나라에 수운 교통이 발달되게 된 시기는
대략 고려 초기부터다.

즉 3면이 바다로 된 
영토를 확보하면서 부터였다.

수운에 몰빵을 했던 것은 
철저히 경제원칙에 의한 선택이었다.

 
"헬조선 쪽팔림."

   
"왜?"

 
"서양에서 포장도로가 깔리고 마차가 다니는 시기에
우리는 지게 매고, 가마 끌고 다녔잖아."

   
"하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도, 정신승리야."

   
"하지만 우리 나라는 70%가 산지야.
평지라고 해도 언덕 투성이임."

   
"이런 땅에 도로를 내고
수레를 끌고 낑낑거리면서," 

   
"물건을 운반하려면
그 비용이 벌써 얼마야?"

 
"그래서?"

   
"하지만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잖아."

   
"수운을 이용하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물건을 운송할 수가 있어."

   
"이런 천혜의 조건을 놔두고
비싼 육상교통을 발달시킨다는 것은 넌센스야."

그렇기 때문에 전통시대
육상교통의 조악함을

무조건 낙후의 상징으로 
못을 박을 이유는 전혀 없다.
 

일본 역시 
우리와 사정은 같았다.

일본도 산지가 많은 대신
발달된 해운교통망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육상 교통을 
발달시키려는 유인이 없었다.

때문에 일본 역시 
수레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민족이었다.
 
▲ 11세기 헤이안시대의 우차


● 고려, 조선시대의 흑역사 : 안면도 운하 (판목 운하)

전통시대 우리나라의 수운 운송법은
철저하게 육지에 바짝 붙어 항해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풍랑의 피해에서 
보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여차하면 육지로 배를 댈수 있으니깐
이렇게 하는거지."

하지만 그만큼 대가도 따랐다.
암초에 의한 사고였다.

특히 서해안은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에, 

수심이 낮았기 때문에
암초에 의한 사고가 잦았다.
 

당시 전국적으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던 곳이 있었으니,

충청도 태안반도, 강화도, 황해도 장산곶 
부근의 바다가 그러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곳은
태안반도의 앞바다였다.

이곳은 최근에도 유조선이 좌초하여 
큰 난리를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사고 다발지역인지라 조운 선단의 일꾼들은
서로 승선을 꺼려할 정도였다.

 
"아 목숨줄 내놓을 일 있나?
난 못혀. 절대로 못혀."

어느 정도였길래 그럴까?
기록을 보면, 

조선 태조~세조 
60년 동안에만
 

태안 앞바다에서 
파선+침몰로 좌초한 배가 200척이 넘고

사망 1,200여명
미곡 손실 1만5800석이라고 한다.

60년 동안에 일어난 피해가 
이 정도였으니

고려~조선시대 1,000여 년간 일어났던 피해는
과연 얼마나 됐을런지?


상황이 이러했으니
고려시대 때부터 

이쪽에 운하를 파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지도를 보자.
고려시대에는 이렇게 운하를 뚫어보려고 했다.
 

태안군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자르고 있는 운하였다.

총 길이 20km.
먼저 1134년(고려 인종) 첫 삽질을 시작했다.

 인종 
"그럼 파보라고."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잘 안 파집니다."

"거참 힘드네요."

계속 실패만 
거듭하게 되었고

1669년(조선 현종)때 까지 총 10번을 시도하게 되는데
10번 모두 실패를 하게 된다.

 
"아니, 땅 밑에 
돌덩이가 깔려있다니니깐, 그래."

"삽이 자꾸 부러져서 
도저히 팔수가 없다니깐."

연인원 수만 명의 
부역자들이 투입되었으나

지반 밑에 깔린 암반층 때문에 
당최 공사 진척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아니, 기껏 팠더니만
바닷물 때문에 다 허물어졌네."

"그러길래 
간만차 똑바로 계산했어야지."

결국 운하 공사는 10km 구간을 뚫은 채로
도중에 포기되고 만다.

하지만 겨우 20km의 구간을 가지고
고려, 조선 두 왕조를 거치며 

530년동안 겨우 총 10km만 팠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처음 계획했던 
운하 공사는 포기하게 되었고,

다음으로 생각했던 차선책은
안면반도(당시는 그랬다)를 자르는 공사였다.

 효종 
"이건 좀 만만해 보이네."

이번엔 3km 정도만 
자르면 됐다.
 

그리고 다행히도 
1638년 운하가 완공된다. 

다만 운하의 개설로
안면반도가 육지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안면도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큰 섬이 되어버렸다.
 
▲ 안면도

만약에 처음 시도했던 운하가 
성공적으로 파졌더라면 어땠을까?

태안군의 면적이 505㎢ 때문에 
거제도(379㎢)를 제치고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큰 섬이 될 뻔 했다. 



참고 문헌 :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케네스 포메란츠), 캠브리지 중국사 (페어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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