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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현대사 ③ : 일본은 '만주국'을 어떻게 지배했나? + 조선의 '2등시민 사상'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573796157



만주 사변

● 세계 대공황 (1929)

1910년대 미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엄청난 물자와 군수품을 팔아먹으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 생산이라는
혁신적인 생산방식을 고안하면서

 
"나는 나사만 끼우면 된다능."

"나는 핸들만 달면 된다능."

대량생산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참고

 

"예전에 하루에 
2~3대씩 만들 수 있던 자동차가,"

"1927년엔 24초마다 1대씩 
생산할 수 있게 됐음."

그리하여 
1920년대 미국은

'광란의 20년대'라고 할 만큼 
번영을 맛보게 된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에서는
17초마다 승용차가 1대씩 굴러 나왔고,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p.190)

미국인 5명당 1대꼴로 
자동차를 가지게 되면서 

교외 거주자들이 늘어나 
건설업이 폭발적인 호황을 맞았다.

호황은 다른 산업들로 파급되어
미국인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고

당시 미국의 중산층들은
냉장고, 식기세척기, 진공청소기를 가지게 되었고

헐리우드 영화가 흥행하고 

프로야구가 성행하게 되었고

집집마다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오늘날의 고도소비사회가
미국에서는 90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와!"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자
소비는 한계에 다다랐다.

기업인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줄기차게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그걸 따라잡기에 버거웠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과잉 생산이었다.

창고에 재고품이 쌓이자
공장들은 가동을 중단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해고가 잇달았다.

"예전에는 불황이 오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산업화가 심화된 1920년대의 미국에서는
도시의 실업자들이 갈 곳이 없었음."

실업자들이 늘어나자
시장의 수요자들도 줄어들어

기업들은 하나둘씩 
도산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기업에 자금을 빌려준 은행까지
덩달아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것이 바로 1929년의 대공황이다.

미국의 대공황은
곧바로 전 세계로 파급됐다.

당시 미국은 
세계 GDP의 42%를 생산했기 때문에 
(마이클 하워드, 20세기의 역사 p.104)

미국의 위기는
곧 세계의 위기였다.
▲ 은행 앞의 사람들

유럽에서도 기업이 무너지고, 
은행이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게 되었다.
▲ 대공황 당시의 영국

 
▲ 대공황 당시의 프랑스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수출은 37%나 감소하고
공업 생산은 반토막 났고

수많은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고,
3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일본사학회, 아틀라스일본사 p.173)

가뜩이나 당시 일본은
장기 불황의 늪에서 

10년 가까이 
허우적거리던 상황이었으니

세계 대공황은 
설상가상의 재앙과도 같았다.


"아놔.."


● 장쭤린 폭사 사건 (1928)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봉건왕조인 청을 무너뜨리고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려던 중국은

이후 10년이 넘도록
국력을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으니,

그런 틈을 타서 열강들은 
더욱더 쉽게 중국을 침탈할 수 있었다.

"하하하"

하지만 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각성하게 된 중국인들은

쑨원의 국민당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고,

 
"반외세!"

 
"반군벌!"

이때 쑨원은
소련으로부터 무기 원조를 받기 위해
 

공산당과
협력하였기에 (1924, 1차 국공합작)

마오쩌둥과 같은 인물과도
힘을 합칠 수 있었다.

 
"중국을 위하여 서로 손을 잡고,"

 
"군벌을 토벌하고, 외세를 물리치자!"

하지만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장제스가 국민당의 권력을 잡자
사정은 돌변했다.
▲ 장제스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는
공산당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1927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갈라서게 되고

 장제스
"때려잡자! 공산당!"

 마오쩌둥
"쳇, 언제는 같은 편이라며?"

국민당 정부는 
군벌 토벌은 물론이고,

공산당 토벌에도 열을 올리게 되었으니
이로써 '국공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이러한 시기 일본은
국민당의 세력 확장에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만주의 이권을 독점하고 있었다지만

'반외세'를 외치던 
국민당 정부가 만주를 차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전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국민당 정부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대놓고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하면,

"만주와 몽골은 
원래 중국의 본토가 아니지 않는가!"

국민당 정부군의 
만주 진출을 막기 위해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봉천(심양) 군벌의 장쭤린을 지원하게 된다.
▲ 장쭤린 (장작림)

 일본
"우리가 뒤에서 도와주겠음." 

 일본
"그러니 국민당 놈들만 잘 막아주라능."

하지만 장쭤린은 정부군(국민당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다가

패망의 위기에 몰리게 되어
일본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민당 정부군이
만주를 점령하겠어."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만주 진출은
더욱 어려워지는 것 아님?"

"이 기회에 장쭤린을 제거하고
우리가 직접 만주를 지배하는 게 어때?"

 
"에잇, 그랬다간 영국과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가만히 있지 않으면?"

"더 이상 일본은 외세의 간섭을 받을 만큼
약소국이 아니라고!"

그리하여1928년,
장쭤린이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심양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장쭤린이 돌아오면
골치만 아파!"

장쭤린을 태운 열차를
봉천(심양) 근교에서 폭발시켜 버려

장쭤린을
즉사시키고 말았다.
 
▲ 불타는 장쭤린의 특급열차

열차 폭발 사건은 
즉시 전 세계로 알려졌고
 

 
"친일 장쭤린 폭사.
누구의 소행인가?"

"만주침략을 위한 일본의 소행인가,
국민당 정부의 소행인가?"

곧 일본 군부의 음모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정부군에 밀리던 장쭤린을 제거하고
일본군이 직접 나서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사실을 극비에 부쳐

일본 국민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했다.

"국익에 해가 되는 소식은
철저히 알리지 않는다!"

이후 만주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됐고

일본은 만주를 집어삼킬
결정적인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게 된다.

 
"이제 적당한 구실만 생기면 덮친다!"


● 만보산 사건 (1931)

만주 지역은 200만㎢의 면적으로
서유럽 전체와 비슷하고,

만주국이 위치했던
'내만주'만을 따져도 

110만㎢의 면적으로
한반도보다 5배 이상 컸지만,

19세기 후반까지
요녕성 일대를 제외하고는

그 넓은 땅(만주 전체의 93%나 되는 땅)에서
인구 100만 명을 넘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 19세기 이전까지 만주는 서쪽은 황량한 스텝, 동쪽은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였다.

"농업기술의 발달이 미약했던 과거에는
농사짓기에 워낙 척박했던 땅이었음."

그러던 것이 청나라 말기 
봉금정책이 해제되면서

화북(특히 산둥성) 출신의 이주민들이 
급속도로 유입되기 시작하여

불과 반세기 만에 만주의 인구는 
3500만 명을 넘게 된다.


▲ 시대별 인구 비교 (1850년 300만 명 정도의 인구도 대부분 요녕성의 인구였다) ☞ 참고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도 
서부개척운동이 일어났음."

"그런 면에서 '만주 웨스턴 영화'는
'서부영화'와 꽤 비슷한 구석이 있음."

 

그렇더라도 1930년대 만주의 인구는
한반도의 1.5배가량밖에 안 돼

인구밀도로 보면 
1/3 수준밖에 안 됐고,

평야가 발달한 탓에, 
경지 면적 당 인구밀도로 따지면 

한반도의
1/10 수준밖에 안 됐다.
▲ 드넓은 만주 평야

그러니 만주로 이민을 가면
조선에서 농사를 지었을 때보다

1인당 평균 6~7배 이상 넓은 땅에서
경작을 할 수 있었다.
 
▲ 만주의 농업 이주자

물론 만주의 겨울은 매우 춥고
토양도 척박한 곳이 많지만 ☞ 참고 (지도에서 녹색부분)

화학비료가 생산되던 당시에는
그런 곤란한 점을 대폭 해소할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만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일제는 이런 만주 지역으로
많은 조선인들과

일본의 저소득층들이 
이주해서 살았으면 했다.

여기에는 이러한
경제적 이유가 있었지만,

 일본
"내지(일본)와 반도는 
인구밀도가 너무 높아!"

 일본
"농촌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만주로 이주하는 게 좋겠다능."

만주로 이주민들이 들어가야만
일본은 자국민(조선인을 포함)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간섭·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 만주 이민 포스터

그리하여 일제는 
만주에 농업개척회사를 만들어,

대대적인 이주 사업을 
추진하게 되는데,

"1930년대 초에만 만주에
60만 명의 조선인들이 들어가 있었다능."

 
▲ 타작을 하고 있는 만주의 조선 농민들

1931년, 창춘시에서 30km 떨어진
만보산 일대의 200 헥타르의 땅에도

조선인 180명이 
이주하게 된다.
  
▲ 만보산의 조선인 농민들

당시 조선 농민들은 
쌀농사를 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20여 리나 떨어진 강에서 
물을 끌어들이게 되는데,
 
▲ 만보산 사건의 발단이 된 수로

그런 과정에서
중국 농민들의 땅을 함부로 침범하여

중국 농민과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고
 
▲ 분쟁으로 인한 만보산 수로 공사의 중단

"왜 남의 땅을 망가뜨려 놓냐해!"

화가 난 중국 농민들은
파헤친 수로를 흙으로 매워버렸다.

 
"이런, 고약한 되놈들 좀 보게.."

때문에 조선 농민들은
일본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고
 
▲ 일본 경찰들

중국 농민들도
자국 경찰을 불렀던 지라

양측 경찰이 
서로 대치를 하다가
 
▲ 양측의 신경전이 심화되자, 경찰서로 피신해온 조선인 농민들

일본 경찰의 발포로 
중국인들을 물리치게 된다.

"탕탕탕"

다만 이때 일본 경찰은 
허공에 발포를 했기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이러한 수준의 충돌은 
만주 어디서나 종종 일어나던 해프닝이었다.
 
▲ 만보산의 조선인 농민들

하지만 본 사건을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작했다.

군부(관동군)에서 
만주의 일본 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많은 조선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알리도록 했고
(역사비평사,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p.130)
▲ 당시 오보 기사

조선일보가 이러한 허위 보도를
무려 16차례나 뿌렸다.
(최준, 한국신문사 p.304)

조선일보
"중국인들이 조선 농민을 습격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뭐?"

때문에 조선 각지에서 
반중 감정이 고조되었고

화가 난 조선인들은 
되놈들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중국인들을 죽창 등으로
찔러 죽이고
 
▲ 당시 중국 언론에 보도된 그림 : 화교를 학살하고 있는 조선인 (鮮人)

중국인들의 상점마다
불을 지르고 파괴하였으니,
 
 
▲ 사건 전후의 평양의 화교 상가 거리 비교

중국인 127명이 사망하고
393명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국제연맹의 리튼 보고서 발표)
 
▲ 파괴된 평양의 화교 거리

"당시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호떡(청나라 떡)집에 빗대어.."

"호떡집에 불났냐라는 말이
이때부터 나왔다는 말이 있음."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8권 p.36)


● 만주사변 (1931)

1929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이후 3년을 휩쓸게 되는데,

이때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난관을 돌파하고 있었고 ☞ 참고

 루즈벨트
"일자리를 400만 개 창출하여
유효 소비자를 1200만 명 더 늘리겠다능."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닦달하고 쥐어짜는

소위 '블록경제'를 통해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앞으로 우리 물건만 사다 쓰라능."

하지만 국내시장이 좁고
해외식민지도 빈약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였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경우는 

좀처럼 해결책을 찾기 힘들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당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나치당을 재건하여

국민들을 선동하며
제1당에 올라 정권을 잡기 시작했고

군국주의 논리로
국가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읍시다!"

 히틀러
"독일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킵시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들은 장기불황으로 군사비가 줄어든 것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젠장, 보급품이 이게 뭐야?
이대로는 안 된다고!"

"무능한 내각을 교체하고
군부 중심으로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맞아! 최근 이탈리아도
무솔리니의 쿠데타 이후 국력이 신장하고 있고,"

"독일도 히틀러의 나치 세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음."

"경제 회복의 열쇠는 
오직 전쟁뿐이야."

"맞아! 만주로 쳐들어 가는 것만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길임."

하지만 총리는 
만주 침략에 한사코 반대를 했기 때문에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만주 침략이라니?"

 하마구치
"국제연맹 법을 
무시하는 조치가 아니요?"

화가 난 우익 청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고, (1930년)

"탕탕탕"

 
▲ 총상을 입고 부축되어 나가고 있는 하마구치 총리

이후 일본에서는
군부의 입김이 크게 강화되게 된다.

"군부의 뜻을 막는 자는
어떤 누구를 막론하고 가만두지 않겠어!"

만보산 사건은
바로 이러한 군부가 기획한 것으로,

사건이 발발하자 일본은 
자국민(만주 거주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 지역으로 
대거 출병하기 시작했다.
 
▲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 18일 밤, 만주의 일본군은

봉천(센양) 교외의 유조호 부근에서
철로의 일부를 폭파하더니,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돌리며
공격을 개시했다.

"탕탕탕"

이것이 바로 
만주사변(9.18 사변)의 시작이다.

'사변'이라는 용어는 
전쟁보다 수위가 낮은

소규모 무력 충돌을 
일컫는 말로서

일본은 외세의 비판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만주사변, 지나사변(중일전쟁)이라
애써 낮춰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주 사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앞으로 15년에 걸친, 
중국 침략전쟁의 장대한 서막이었으니
 

 
전쟁의 시작과 함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군을 밀어붙여

4개월 만에 만주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사변이라며?
만주 땅을 다 쳐묵는 게 사변이야?"



만주국의 성립

● 괴뢰국 만주국의 성립 (1932)

만주사변이 터지자
중국 정부는 

즉각 국제 연맹에 제소해 
일본의 철군을 요구했다.

 중국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다해!
즉시 몰아내 달라해!"

하지만 국제 연맹의 중심국이었던
서구 열강의 태도는 중국의 기대와 달랐다.

 미국
"뭐 국지적 분쟁이던데,
이 정도 가지고 그래?"

 영국
"일본이 공산주의를 아시아에서 막아주려면
그 정도 역할은 해줘야지."

 미국
"맞아, 맞아."

일본도 열강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애초에 대만과 조선처럼 
총독부를 설치하려 했던 것에서

'독립국'을 세우는 것으로 
방침을 전환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했다. (1932)  
 

그러나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만주국 역시 
이름뿐인 국가였으니,

곧바로 일본은 만주국과
이러한 조약을 맺는다. (1932, 일만조약)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소유한
모든 권한을 승인함."

"일본군은 만주에
무기한 주둔한다."

하지만 일본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 해인 1933년에
화북 지방으로까지 전선을 확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서구 열강은
거기까지는 용납하지 않았고,

태도를 바꿔
만주국의 승인조차 무효화했으니,
▲ 국제연맹에 참석한 일본 대표

화가 난 일본은 
국제연맹 결의를 따를 수 없다며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버리고 만다.

"받아들일 수 없으무니다!"

 
▲ 국제연맹 탈퇴를 보도한 신문 ㅣ (국제)연맹이여! 잘 있거라

하지만 
장제스 정부는

아직은 일본과
맞붙을 때가 아니라고 봤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의 주요 도시마다

항일 집회가 열리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결의되는 등

반일 감정이
크게 고조되고 있었지만,

"일본은 물러가라!"

국민당의 장제스는
오히려 일본을 자극할까 봐 두려워

시민들의 소요를 
적극적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불법 집회야!"

장제스의 머릿속에는
오직 공산당 토벌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제스
"내 권력을 위협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이라고!"

하지만 장제스의 이러한 태도는
민심을 이반 시킨 결정타가 되고 만다.

"우리 정부(국민당)
대체 누구 편이야?"

"그러게. 항일운동을 탄압이나 하고.."

"차라리 항일을 주장하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게 낫겠어."


● 실험무대가 된 만주국의 통치

일본은 만주국에서
다양한 실험들을 진행시켰다.

먼저 '간접 지배'라는
새로운 형식의 식민 지배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의 대두로,"

"기존의 식민지형 지배는 
저항도 심하고 비용도 많다는 지적이 있었음."

때문에 일본은 
스스로 치외법권을 폐지하면서까지

독립국의 형식을 강화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만주국의 고위직(장관)
모두 중국인을 기용했지만,

그 밑의 차관급은 
일본인들로 채웠고

각 부서는 일본 군부가 
고문을 맡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니 형식적으로 독립국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괴뢰 국가였다.

그러면서 다민족 공존의 '오족협화'를 내세워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했다.

여기서 오족협화란, 
만주 땅은 원래 다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니

만주인(노랑), 일본인(빨강), 중국인(파랑),
몽골인(하얀), 조선인(검정) 

5개 민족이 화합해서 
살아가자는 얘기였고,
 

만주국의 국기도
거기에 창안해서 만들어졌다.

사실 일본의 주장에도
나름 논리는 있었다.

"원래 만주 땅의 주인은 만주족인데
지금 만주 땅에는 90%가 중국 이주민이잖아."

"그러니 중국인들이 
자기네 땅이라는 것도 우습지."

 
"맞아 맞아."

이후로 만주로의 이주 정책이
적극 장려되어

 
"1930년대 조선에서만.."

"전체 인구 2400만 명 중 
100만 명이나 만주로 빠져나가게 된다능."

1940년 만주의 인구는 
4300만 명으로 폭증하게 되었고

민족 구성비는
더욱 다양화되어

한족 3700만 명, 만주족 279만 명, 
회족 200만 명, 조선인 155만 명, 

몽골족 100만 명, 일본인 82만 명, 
러시아인 7만 명 정도가 거주하게 된다.
(한겨레, 2005년 3월 9일자 6면)

한편 일본은 만주국에
'소련식 계획경제'를 전격 도입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전시체제에 대비한 실험을 했다.

"일본은 서구에 비해
물자가 부족한 나라임."

"장차 중국과 전면전을 하자면
국력을 몰빵해서 군수품을 만들어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생필품이 쪼들려서 
혼란이 발생할 수 있음." 

"만주국을 통해 
그런 전시경제를 미리 시험해 보는거야."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였던 일본이
소련식 계획경제를 실험하다니, 뭔가 좀 이상하다.

여기에는 
이런 측면도 있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가
'대공황'으로 신음하고 있던 시절,

소련의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28~1932)을 실시하여

불과 5년 만에 
낙후된 농업국가를 

발달된 공업국가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1929년에서 1932년 사이

미국은 매년 평균 -21%씩 추락해서
3년 만에 GDP가 반토막 나게 됐는데,

소련은 반대로 
매년 평균 15%씩 성장해서

5년 만에 GDP가 
두 배로 올라갔다.

 
"이때 소련의 고도성장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가져다준 결정적 요인이었음."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소련의 성공에 주목하고 있었고,

1930년대에만 미국인 10만여 명이 
풍요을 찾아 소련으로 이민을 갔을 정도였다.
 
▲ 소련으로 이민을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고 있는 미국인들

미국의 루즈벨트조차
소련식 계획 경제를 부분 도입한

'뉴딜 정책'으로
빠르게 공황에서 탈출하고 있었다.

그러니 일본도 
귀가 솔깃했던 것이고

'계획 경제'가 
과연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만주국을 통해 
실험을 해보려 했던 것이다.


● 조선인들을 동원하는 논리 : 이등시민 사상

1935년 일본은 본토의 인구만 
7천 만명인 인구 대국이었고,

(準)본토라 할 수 있는
조선과 대만의 인구를 포함하면

1억 명을 
훌쩍 넘기고 있어서,

당시 열강 중에서 
일본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소련과 미국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상 병력과 노동력 부재에 시달려야만 했다.

"읭?"

다른 서구 열강과 비교해서
기술력이 낙후되었기 때문에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 낮은
'노동집약적인 공업'과

노동력 중심의 '집약적 농업'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서구 열강은
'기계'를 중심으로 생산했다면,
 
▲ 자본집약적인 서구의 생산 방식

일본은 '인력'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체제여서
 
▲ 노동집약적인 일본의 생산 방식

많은 병력을 차출하기가 힘든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2차대전 당시 인구와 병력수 비교 :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포함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123)

어느 정도였냐 하면
일본이 화북지역을 침략하고 점령지를 다스렸을 당시

1㎢당 일본군의 수가
겨우 0.37명에 불과했다.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79)
 
▲ 일본은 적은 군사수 때문에 철도와 도시를 중심으로 점령했다

쉽게 말해 서울의 면적을
고작 1개 중대의 병력으로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일본은 
부족한 군인과 경찰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과 대만인들까지
채용하게 된다.
▲ 남양군도로 가기 전,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조선학도병

1930년대면 식민지인이 된 지도
조선인은 1세대, 대만인은 2세대가 지난 뒤였다.

그중에서도 일본인은
조선인을 특히 우대했다.

대만인은 같은 중국인이서
중국을 통치하는데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이 내세웠던 이론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이다.

"내선일체는 내지(일본)와 선(조선)은 
하나라는 뜻이고.."

"일선동조론란,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민족이라는 뜻임."

이러한 사상은 
만주사변 이후에 부쩍 강조된다.

 조선총독부
"너희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만주로 이주하란 말이야."

 조선총독부
"만주로 가면 너희는들은 
중국인들보다 대접받고 살 수 있다고."

 조선총독부
"너희는 제국의 이등시민,
중국인들은 삼등시민!"

 조선인 
"네?"

그리하여 조선인 사이에서는 
'만주 붐'이 거세게 일어나게 되었고

농업이주민 외에도
자본가들의 이주도 적지 않았다.

또 신분 상승을 꿈꾸며, 
만주국의 군대(관동군)에 입교하거나
 
▲ 관동군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등이
대표적인 인물."

만주국의 관리로
근무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최규하, 강영훈 등이
대표적인 인물."

또 조선인들로만 편성되어 
만주의 치안을 다스리는 

'간도특설대'가 
설립되기도 했으니, (1939)
▲ 간도특설대

이들은 만주 일대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하던 

중국 공산당(팔로군) 진압에 
투입되곤 했다.

"여기 중국 공산당에는 
김일성, 김책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능."

이렇듯 만주는 
일본-조선-만주국 간의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를 둘러싼 

중층적인 관계가 나타났던
공간인 동시에,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135)

훗날 남북한의 권력을 잉태시킨 
공간이기도 했다.



쇼와 유신 : 군국주의로의 길

● 5.15 사건과 2.26 사건 : 일본 정당정치의 종말

10년에 걸친 장기 불황과
설상가상의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자들이 급증한 가운데
일본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군부의 만주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인들은 
크게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와! 좋은 세상이 오려나보다."

"그러게, 이제 좀 
경제가 기지개를 펴려나?"

만주는 엄청난 
농산물과 원료 공급지인 동시에

조선보다 1.5배 이상 더 큰 
소비 시장이기도 했다.

일본의 언론들은 이런 부분을
집중 보도했기 때문에

전쟁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빠르게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말고는 일본 사회에서
그 누구도 전쟁을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서슬 퍼런 
군부가 지배하던 당시

군부에 대한 반대는
반국가적 행동으로 매도될 수 있었다.

그러던 
1932년 5월 15일, 

한 무리의 청년 장교들이
총리의 집무실에 침입하더니,

 장교
"군부의 계획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면서 
총리를 암살했다.

"탕탕탕"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으으윽!"

불과 2년 전에도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급진파 극우 청년에게 피살되었는데,
역사는 또다시 반복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청년 장교들은 
더욱 대담해졌다.

총리를 암살한 것도 모자라
장관들의 저택과 

경찰청, 은행에도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쾅!"

사건의 결과,
군인이 새 총리에 임명되었으니

이로써 일본의 정당정치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고,

본격적인 '군부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그리고 4년 후인 1936년,
이번에는 군부 세력끼리의 다툼이 있었다.

급진파(황도파 : 皇道派)
온건파(통제파 : 統制派)의 대결

이들은 군비 확장을 놓고
서로 다투다가

 온건파
"지금 민생이 힘든 상황인데 
군비를 확장하자니, 이건 말도 안 됨!"

 급진파
"모르는 소리! 군비를 확장해야만
일본의 경제도 살아난다고!"

결국 급진파 장교들이
하사관과 사병 1400명을 동원하여
 

도쿄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2.26 사건)

급진파의 쿠데타는
2만 4천여 명의 정부군의 투입과

천황의 원대복귀 명령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 원대복귀를 하고 있는 청년 장교들과 1400명의 사병들

이후 이들의 주장은 
군부에 의해 모두 받아들여져

오히려 '군부 독재'를 강화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참고로 박정희는
2.26 사건에 크게 감명을 받아,"

"5.16 쿠데타를
계획했었다능." ☞ 참고


● 쇼와 유신 : 파시즘의 완성

군부독재가 실현된 당시 
일본에서는

경제 역시 군부에게 
매우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됐다.


▲ '만주사변 이후~태평양전쟁 이전'까지 일본은 연 6%의 고도성장을 구가한다. ☞ 참고
이런 효과 때문에 열강들은 서로 식민지를 차지하려고 혈안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만주사변을 통해
대공황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음."

만주사변 이후로
장차 중일전쟁을 대비한 일본은

'군수 공업'을 전략적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에

자동차, 비행기 등의 기계 공업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육성되었고

그에 따라 기계 공업과 
금속 공업의 생산액이

근대화 이래 
일본의 경제를 선도했던,

섬유 공업의 생산액을 
앞지르기까지 한다.

"당시 일본의 군수 공업은 
재벌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같은 재벌들은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었음."


반면에 지식인들은
커다란 좌절을 맛봐야 했다.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대학은 더 이상 출세의 보증 수표가 되지 못했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던 
교수와 학생들은

'빨갱이'로 내몰려
대학에서 추방당해야 했으며,

사상과 학문의 자유는
혹독한 탄압 속에서 신음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종교'와 '덴노'를
군부 독재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신도'를 일본의
유일한 종교로 정했고,

덴노를 신격화해
국민에게 절대적 충성을 강요했다.

 
"덴노의 권력 강화와
군부 독재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군인들은 자신들의 명령을
덴노의 명령이라 주장했기 때문에,"

"덴노의 권력이 올라갈수록
군인의 권력도 올라가는 그런 구조였음."

고로 덴노를 내세우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군인들은 
헌법을 뜯어고쳐,

덴노에게 군통수권, 
전쟁 선포, 조약 체결권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니
▲ 쇼와덴노(가운데)와 군인들

이는 곧 
군부의 권한과도 같았고

바야흐로 군부는 
덴노 뒤에 숨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본을 끌고 가면 됐다.

 
"하하하"

유럽에서 파시즘은
국가주의를 주장하던

대중 정당이 제1당으로 집권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특징이 있지만,

일본에서의 파시즘은
철저히 군부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이었다.

유럽은 정당정치를 통해
파시스트가 집권했다면,

일본에서는 
정당정치를 붕괴시킨 다음에

파시스트가 집권했다는 
차이점도 있다.

또 유럽에서는
파시즘 체제 수립 이후

대외 전쟁을 벌여
대중들의 환심을 샀지만,

 무솔리니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 1936년 이탈리아와 이탈리아의 식민지

 독일
"오스트리아와 수데텐을 합병했다!"

▲ 1938년 나치 독일의 영역

일본의 경우는
먼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난 다음에
▲ 1932년 일본과 일본의 위성국(만주국)

민심을 얻은 군부가
체제 변동을 이끌었다는 차이점도 있다.

"물론 일본의 경우 국가주의 사상은
근대화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지만.." 

▲ 쇼와 유신의 과정 : 메이지 덴노의 유신(=혁신)으로 근대화가 도래했다면, 
쇼와 덴노의 유신으로  일본은 군국주의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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