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의 모던 일본
● 국민은 가난하지만, 국력은 강했던 일본
1차 대전 이후 일본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통해
명실상부한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국민들이
잘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본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구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았고,
열강 중에서는 4번째로 많았다.
반면에 경제규모는
세계 9위에 불과했다.
오늘날로 치면
브라질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 일본의 자료는 maddison 자료, 브라질 자료는 IMF 최신자
"세계 인구 6위, 경제규모 9위,
소득수준은 세계 평균보다 살짝 낮은 정도."
1차 세계대전 중
고도성장을 구가했었지만,
1인당 소득에 있어서
서구의 열강들에 비해
1/3 수준에 불과했고
세계 평균보다도 낮았던 것이다.
▲ 1913년도 각국의 1인당 소득 (달러가치는 1990년도 기준) ☞ 참고
"오늘날 일본인들은 세계평균보다
3배 정도 더 부유하지만.."
그러니 일본의 국력은
많은 '인구'와 '군사력'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부족한 살림에도
국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은
권위에 복종하고
내핍적이며
국가주의적 '동원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일본 특유의 국민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가는 최고의 가치다!"
"약육강식, 국력 만능인 시대에
대일본주의 만세!"
그에 반해
당시 중국은
일본보다 경제규모에서
3배 이상 앞서 있었으면서도
분열된 국론으로
국력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서구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가난한 수준이었지
아시아는 물론,
유색인종 국가들(신대륙은 제외) 중에서는
가장 소득 수준이 높았던 국가가
일본이었다.
"1920~30년대 일본인들은
다른 아시아 국민들보다 2배 가까이 더 부유했음."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여느 아시아인들과
소득 수준이 비슷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연 1~2%씩 성장했을 때
"인구증가율도 연1~2%라서
1인당 소득 증가는 거의 없었던 아시아 국가들임."
▲ 당시 인도인
일본은 연 3%씩 성장했기 때문에
50년 뒤에, 두 배 가까이 부유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굉장히 더딘 속도가 아닐까 싶겠지만,
20세기 전반, 연 3%의 성장이라면
매우 높은 성장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쟁 특수'가 발생하는
1915년에서 1919년 간
일본은 연평균 7.9%를 성장하게 되었으니,
가히 폭발적인 성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당시의 자본주의 체제는
철저히 '자유방임주의'를
기본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기변동을 조절·통제하는 법이 없어서
경기과열을
억제할 줄도 몰랐고,
불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쟁 특수가 끝나면
필연적으로 닥칠 '전후 불황'에도
일본 정부는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도시화
일본의 근대화는
세 차례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 문명을 전면 수용하고자 했던 1870년대.
▲ 서구 12개국을 시찰했던 이와쿠라 사절단
'청일전쟁'을 통해
받아낸 막대한 배상금으로
2차 산업혁명의
근간을 만들었던 1900년대 초반.
"이때 제철소를 만들었기에
일본은 군사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음."
'1차대전 특수'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1910년대 후반.
"당시의 고도성장으로
일본은 비로소 강대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음."
이러한 세 차례 과정을 마치고
1920년대의 일본은
공업생산이 농업생산을 능가하는
'공업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어
급속한 '도시화' 현상을
경험하게 되고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본격적인 근대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1918년 도쿄 235만, 오사카 164만, 교토 67만,
고베 59만, 요코하마 45만, 나고야 44만의 인구를 기록했다.
"당시 경성(서울)은 48만 명이었음."
그리고 1920년대가 되면
오사카의 인구는 200만 명을 넘어서고,
도쿄는 인근 지역을 합쳐
인구 500만의 거대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 도쿄 긴자의 모습
"런던, 뉴욕에 이어
세계 3위의 거대 도시!"
도시가 성장하자
전기, 가스, 상하수도 시설이 확충됐고,
전차 노선이 늘어나면서
교통의 요지에는 백화점과 상점이 즐비해졌고
▲ 당시 도쿄의 백화점
1927년에는 도쿄에
아시아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된다.
도심과 교외를 잇는 전차선이
잇따라 만들어지면서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혼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교외로 이사를
가기 시작하면서
교외에서 도심으로
전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 대중매체의 발달
도시 인구의 팽창은
도시 대중의 증가를 가져와
신문 구독자가
크게 늘어남과 동시에,
주간지와 월간지도
빠른 속도로 판매될 수 있었는데
이전까지 신문과 잡지들은
주 독자층을 지식인으로 삼았다면,
1920년대 이후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지'가 대세를 타게 된다.
▲ 잡지의 홍수 (사진은 1920년대 후반의 서점)
그리하여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은
매일 100만 부 이상을 찍어냈고,
대중 잡지 '킹(king)'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발행부수가 100만 부를 넘기도 했다.
대중소비가 많아지자
책은 더 이상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리다매'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권당 1엔'이라는 저가로 발행하는
엔폰(圓本)이 판매되기 시작했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잡지와
'명작동화'가 간행되기도 했다.
또 1925년부터 도쿄와 오사카에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고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게 되는데,
▲ 라디오를 듣고 있는 아이들 (1928년) : 20년 후반, 라디오 보급률은 10% 남짓했다
당시 라디오는
정보 전달은 물론,
"규슈 지방으로 거대한 태풍이 상륙 중이니
바닷가 주민들은 피해가 없도록.."
'표준어'를 보급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지역마다 사투리가 심했다능."
영화도 큰 인기를 모으면서
전국적으로 상영이 되었고,
레코드가
대량으로 팔리고,
대중가요도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그렇게 대중매체가
발달하게 되면서
일본인들은
빠른 정보 공유는 물론,
"이것이 바로 구라파 최신 유행!"
다양한 외국의 사상과 문학을
접할 수 있었게 되었고
"유럽의 자유주의, 세계시민주의, 인도주의,
사회주의 같은 사상들이 알려지게 됨."
'상품광고'에 쉽게 노출되면서
대중소비사회로 발전하게 되는가 하면,
군국주의가 만연되는
1930년대 이후로는
'획일화된 가치관'를 주입시키는 데에도
첨병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래서 언론통제가 무서운 법"
한편 대중매체의 발달로
'평등 의식'이 고취되면서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부쩍 늘어나게 되는데
이전까지 여성들은
공장의 노동자, 간호사, 교사로 일했지만
1920년대 이후로는
전화 교환원, 버스 차장,
타이피스트, 속기사, 기자,
아나운서, 의사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하게 된다.
'직업부인'이라 불린 이들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결혼 뒤에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경제적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사회적 분위기를 크게 변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선거권'이 일체 주어지지 않았고
상속 재산은
'장자'가 단독으로 물려받았으며,
이혼할 경우에
늘 남자가 유리한 입장에 서는 등
가부장적인 사회 모습은
좀처럼 깨뜨릴 수가 없었다.
● 달라진 의식주
남성 중심 사회였던 일본에서
서양의 양복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남성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보수적인 남자들은
양장을 입은 여성들의 옷차림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곤 했으니,
"세상이 말세야.
여자가 무슨 양놈들의 옷을 입고 다녀!"
기모노, 몸뻬 바지가
하루아침에 스커트 블라우스로 변하지는 못 했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였음." ☞ 참고
그러던 것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경이 되자
점차 여성 양장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늘면서
실용성이 강조되어
점차 양장이
보편적인 차림으로 정착되게 된다.
"도시의 유행을 선도하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도.."
양장의 유행은 교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때부터 남학생들은 '가쿠란'
여학생들은 '세일러복'을 입기 시작하고,
1930년경에 이르면
도시를 중심으로
아동복까지
거의 양복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도시를 중심으로
식생활이 눈에 띄게 변하게 된다.
식민지인 조선에서
쌀이 대량으로 들어오자
쌀값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보리밥 대신 쌀밥이 주식이 됐고,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혼식을 많이 했었음."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일도 잦아졌다.
또 외식의 유행으로
오믈렛, 비프스테이크와 같은
양식 메뉴를
즐기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소고기의 비싼 가격 때문에
고기가 적게 들어가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으니
으깬 감자와 고기를 섞어서
둥글게 뭉친 뒤에 튀겨 낸 '고로케',
얇게 저민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튀긴 '돈가스',
카레 가루를 풀어서, 고기와 채소 등을 첨가한
'카레라이스'가 대표적이다.
▲ 돈가스, 고로케, 카레라이스는 모두 서양의 음식을 일본화한 것들이다
그렇게 서구식 식생활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우유와 고기 섭취량이
크게 증가하자,
일본인들의 평균 신장은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 1920년대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
주거 생활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좌식 문화였지만,
관청이나
회사, 학교에서
서양식 탁자와 의자를 사용하면서
점차 '입식 문화'가 정착된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좌식 생활을 선호했다.
"일본은 온돌이 아니라서
겨울철에 좌식 생활이 불편하지 않을까?"
"대신 코타츠라는
좌식 화로가 있으니깐."
한편, 지진이 잦은 일본인들은
건축 방식에도 관심을 가져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 벽돌 대신에
화재와 지진에 강한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민주화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득세
● 호헌운동 : 왜 헌법이 있는데도 지켜지지 않는가?
명실공히 세계 강국으로 성장한
1910년대의 일본은
경제 성장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정권과 밀착한
독점 자본의 성장,
정경 유착에 따른 부패가
크게 늘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노동 환경을 개선하라!"
"인금을 인상하라!"
그러던 시절,
'번벌' 세력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도
거세게 일어난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헌법'이
제정되었는데도
정치는 여전히
사쓰마, 조슈 출신으로 형성된
'번벌 세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고
정당들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 국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오자키 유키오
"사쓰마, 조슈가 아니면
정권 근처에도 못 가는 현실."
"군부까지 번벌이
모조리 장악하다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번벌의 소유물인가?"
그러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정부의 탄압으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하지만 1912년
메이지 덴노가 죽고
다이쇼 덴노가 집권하면서
다이쇼 시대(1912~1926)가 시작되자
▲ 다이쇼 덴노
서서히 변화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12년 말부터
야당 정치인,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헌법의 내용을 지키자는
'호헌(護憲 : 헌법을 보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자키 유키오 (정우회)
"일본은 헌법이 있는 입헌 국가다!"
오자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오자키
"몇몇 번벌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멋대로 요리하고 있지 않는가?"
오자키
"그들은 자신의 뜻을 덴노의 의지라고
내세워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옳소! 헌법을 수호하자!"
오자키
"권력을 독점하는 번벌을 타도하자!"
오자키
"번벌을 몰아내고
헌법을 지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 쌀 파동과 정당정치의 시작 (1918)
1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을 하게 되는데
전쟁 소식이 휘몰아치자
사람들 사이에선,
쌀값이 폭등할 것이라며
쌀을 매점매석하는 행위가 횡행하여
정말로 쌀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었다.
"물가는 앞으로 오를 것이라고
'예상'만 해도,"
"사재기를 통해
품귀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말로 물가가 올라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된다능." (가수요)
이러한 쌀값 폭등에
직격탄을 맞았던 것은,
일본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이었다.
"당시 일본 해안가에는
남자들은 돈을 벌러 외지로 나가고,"
"여성들이 홀로
가계를 꾸리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러자 1918년 도야마 현의
어촌 주부들은
▲ 도야마 현
쌀값 폭등에 격분하고
일대 소동을 벌이게 된다.
"한 가마니 15엔 하던 쌀이
갑자기 30엔이라니!"
"한 달 월급으로
제대로 쌀도 못 살 형편이다!"
그렇게 시작된 쌀 소동은
들불처럼 번져
▲ 쌀창고를 털고 있는 성난 시민들
전국적으로만
70만명이 참여하게 된다.
"쌀값을 안정시켜라!"
정부
"뜨아!"
그러자 정부는
덴노가 하사하는
'은사미(恩賜米)'를
집집마다 나누어 주고,
재벌과 지주들에게 기부금을 거두는 등의
해결책을 마련하며
서둘러 민심을
수습해야만 했다.
또 사건의 책임을 지고
번벌 내각이 총사퇴를 하고
사태 수습을 위한 대안으로
'정우회'가 내각을 꾸리게 된다.
▲ 당수, 하라 다카시의 이름을 따 '하라 내각'이라 부른다
"이로써 일본은
다수당이 내각을 차지하는 방식의,"
"본격적인 정당정치를
시작하게 된다능."
"와! 쌀 소동이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지다니."
하지만 '하라 내각'은
뚜렷한 한계점을 지녔다.
여론을 등에 업고
내각에 차지하더니,
정우회의 당세 확장에만 주력하며
민심을 이반했고,
"이런!"
재벌과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21년 11월 도쿄 역에서
하라 다카시는 암살되고 말았다.
▲ 당시 범행현장 : 범인은 기둥 뒤에 숨어있다가 하라를 칼로 찔렀다.
"악!"
●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확대
1917년 10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면서
'소비에트'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자
곧 전 세계적으로
일대의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와! 노동자와 농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니!"
칼 맑스의 이론에 기반을 둔 당시 공산주의는
'국제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 맑스
"공산주의 국가는 세계혁명이 아니고는
성공할 수 없다!"
맑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30개국의 공산당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을 창건하게 된다.
레닌
"제국주의자와 자본가의 지배를 받고 신음하는
전 세계 노동자와 피지배 국가들을 위해,"
레닌
"우리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슴돠."
레닌
"그러니 어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을 일으킵시다!"
레닌의 이러한 제안이
전 세계 노동자와 식민지 국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반제! 반봉건!"
때문에
코민테른의 영향 아래
1920년 인도네시아 공산당, 이란 공산당
1921년 중국공산당
1922년 일본 공산당
1925년 조선 공산당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 등이
줄줄이 창설되게 된다.
일본에서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반향은
실로 컸다.
청일전쟁 이래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결과,
기업과 노동자의 비중이
크게 증대하여
1차 세계대전
이후가 되면
노동자들이 어느덧
정치 및 문화 전반을 주도하는 계층이 되는데,
1920년대 내내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임금 하락과 실업 증가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들리는
러시아혁명의 소식은
노동자들의 피를
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와! 노동자가 주인인 나라라니,
굉장하군!"
대학생과 지식인들도 크게 고무되어
사회주의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그래서 1922년에는
일본공산당 결성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노동자 천국,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각지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강행한 끝에
1923년 '공장법' 시행으로
근로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여성과 아동까지도
공장에서 12시간 교대로 노동했는데,"
"공장법의 시행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 시간이
최고 10시간으로 단축됐음."
"다만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못 했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유행처럼 번졌고,
사회주의 서적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됐고
사회주의에 대한
한마디라도 할 줄 모르면
대화에 끼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됐다.
● 선거법의 확대와 치안유지법 (1925)
정당정치의 시작과
사회주의의 대두로,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조되면서
1920년대 초 민주화 시위는
곧 '선거법 확대 요구'로 이어진다.
▲ 보통선거 요구 시위
"우리도 선거를 할 수 있게 해달라!"
"부자들만 선거를 하는 게 아니라,
성인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선거권을 달라!"
"보통 선거를 실시하라!"
그리고 거센 민중의 요구에
견디다 못한 정부는
정부
"도저히 못 버티겠다.."
1925년 결국
'보통 선거법'을 제정하기 이른다.
정부
"25세 이상의 남자에게
재산에 상관없이 선거권을 주겠다능!"
그러자 유권자 수는
4배로 증가했다.
▲ 달라진 선거제도 : 개정전(좌), 개정후(후)
"다만 여성의 참정권은
2차대전 이후인 1945년에나 가능해진다능."
▲ 일본의 선거제도 변천
그러나 정부는
동시에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으니,
정부
"좋아. 너희에게 창을 쥐여줬으니
우리도 방패를 가져야지."
애초에 법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막는다는 구실로 제정되었지만,
"정부를 부정하고,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조직을 만들거나 이에 가담한 자는
10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
결국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악법'으로 전용되어
"사회 질서 파괴다!"
국민의 입과 자유로운 정치를 막는
'독재 정치'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이후'치안유지법'으로
일본의 사회주의는 크게 탄압을 받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곧 세력을 잃고 만다.
"덴노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와
재벌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로 운영되던 일본으로서는.."
"사회주의만큼 체제를 부정하고
무너트릴 수 있는 위협요소도 없었기 때문임."
그렇게 1912년 초부터 벌어진
'호헌 운동'에서
1925년 '보통 선거법'이
제정되기까지
일본에서 민주화 물결이 일어난 '13년'을 가리켜
흔히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군국주의로의 길
● 워싱턴 체제와 협조외교 (1922)
일본이 근대화의
첫 삽질을 시작한 1870년대에
이미 미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꺾고,
열강 중에서
가장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모든 경제력을 합쳐도
미국의 3/4 수준밖에 안되는,
세계 경제의 1/4을 보유한
어마어마한 공룡으로 성장해 있었다.
▲ 1차대전 중 폭발적으로 늘어난 미국의 수출액
그런 미국은
더 이상 유럽 국가들로부터 간섭받기 싫었다.
미국
"흥! 우리는 고립주의라고!"
때문에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도
콧대 높은 미국 의원들에 의해
가입이 부결되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은, 해외 식민지 건설에도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 열강들이 차지한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하루빨리
독립을 했으면 싶었다.
미국
"이미 아시아, 아프리카 땅들은
죄다 유럽 제국들이 차지해버렸음."
미국
"그러니 아시아, 아프리카가 독립을 해야
우리 미국이 먹을 게 생길게 아님?"
미국
"멕시코를 생각해보라고.."
미국
"일찍이 독립을 했기에
우리와 전쟁에서 맞붙어,"
미국
"멕시코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우리가 차지할 수 있지 않았겠음?"
▲ 전쟁으로 멕시코가 상실한 영토 : 녹색
미국
"그러니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들은
모조리 없어져야 함."
사실 그런 논리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것이고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식민지를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으며
유럽 전선에
뛰어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보니,
굉장히 신경에 거슬리는
'녀석'이 하나 보인다.
바로 일본!
그것도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
거대 소비시장인 중국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국
"아니, 일본 주제에
그 큰 중국을 혼자서 날름 처먹겠다고?"
미국
"웃기는 소리!"
때문에 1921년 11월,
미국은 열강들을 워싱턴으로 불러,
해군 군축,
태평양 및 중국 문제의 논의를 위한
국제 회담을
개최하게 되었고,
미국, 영국, 일본의
해군 주력함 비율을
5:5:3으로 규정하는
'해군 군축(군비축소)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또 '영일동맹'을
폐기하는 대신
미영일불이 '공동 협력'을 약속하는
'4개국 조약'과
미국
"앞으로 양국의 밀실외교는 삼가고
우리(미국)와도 꼬박꼬박 얘기하면서 일을 처리하라능!"
중국의 영토의 존중, 문호 개방을 골자로 하는
'9개국 조약'이 체결된다.
미국
"이젠 아무도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 수 없어!"
미국
"대신 그 대가로
중국은 시장을 철저히 개방하라능."
미국
"그러니 일본,
어서 산둥반도를 돌려줘."
미국
"또 시베리아에서
아직도 철병을 안 했다며?"
미국
"무슨 수작이야!
어서 나오란 말야!"
일본
"..."
이때 일본은
미국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차라리 이참에
미국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자."
일본
"앞으로는 미국의 시대임."
일본
"영국에 집착하기보다는
미국과의 협조 관계를 다지는 게 낫다고."
때문에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여
해군과 육군의 감축,
시베리아 철병(1922년),
산동반도 반환(1922년) 등을
실행하게 된다.
"이때 워싱턴 회의에 대한 일본의 방침을
협조 외교라고 부른다능."
● 간토대지진 (1923)
1923년 9월, 도쿄를 중심으로
진도 7.0에 해당하는 강진이 발생했다.
▲ 간토대지진의 진원지 : 하필 도쿄 한복판이었다!
"간토(관동) 대지진."
대지진은
대형 화재로 이어졌고
관청과 가옥 밀집 지대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3일 간이나 계속됐다.
화재로 인해 도쿄의 밤 기온이
46도까지 오르는가 하면
사망, 행방불명자가 14만 명에 이르고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난데없는 유언비어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있다!"
그런데
왠지 낯익은 장면이다.
고대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가 그랬었고,
네로
"로마를 불태운 건
기독교 신자들이다!"
흑사병이 만연하던
중세 유럽 때도 그랬었다.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그러니 관동 대지진 때에는
'로마시대'와 '유럽 중세 시대'가 합쳐진 괴담이었다.
"헐!"
집과 가족을 잃고
이성을 잃은 일본인들은
분노를 발산할 대상을 찾다가
만만한 상대를 발견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일본 정부가
이런 유언비어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만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진으로 인한 민심의 불만을
위협요소로 간주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경찰서로
이러한 공문을 보냈다.
정부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정부
"조선인들이 방화와 테러, 강도 짓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이런 정부의 공문은
곧 일부 신문에 보도되어
물증도 증인도 없이
소문만 대거 부풀려져서
조선인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으로 발달했던 것이다.
"조센진을 죽여라!"
"죽여라!"
마을 곳곳에 조직된
자경단은,
"자경단이 뭥미?"
"도난을 막고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조직한 민간 단체."
일본에 머무르던
조선인들을
죽창으로 배를 찌르고
몽둥이로 머리를 박살내는 식으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한복을 입은 사람은
현장에서 바로 살해당했고,
조선인들이 하기 어려운
일본어 발음을 시켜서
발음이 이상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바로 살해하기도 했다.
"이거 잃어봐.
十五円五十錢(십오엔오십전)"
"쥬..고엔고지센.."
그러다 보니 중국인, 류큐인 들도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런 무차별 학살로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조선인들이
자그마치 6,661명(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장),
혹은 2,711명(일본 사학자 주장)이나 발생하게 된다.
▲ 자경단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조선인들
"헐!"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학살을 묵인했고,
오히려 조선인 폭동의 배후에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며
사회주의자, 반정부 인사 등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체포하는
'인간 청소'를 자행하기도 했다.
● 금융공황 (1927)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전후 공황'의 여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만다.
관동대지진의
피해액은
전년도 GDP의 1/3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였으며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의 위기를 맞고 만다.
이때 일본 정부는
기업 도산을 막기 위해
'진재(鎭災: 재난을 진압하다)어음'을
대량 발행해주는데,
정부
"재난을 당한 기업들에게
어음 결제를 연기시켜 줄 수 있도록 하겠음."
그러나 위기 수습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는
불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고
기업들의 이윤 하락과
도산 위기는 줄곧 계속되었고,
"아놔, 이놈의 불황
왜 이렇게 길어지는 거야?"
1927년에 이르러
'금융공황'으로 비화되고 만다.
▲ 1차 세계대전 종료후부터 만주사변(1931년) 전까지, 일본은 연평균 1.56% 성장의 장기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건의 원인은
1923년 간토대지진 이후
정부가 기업들에게 남발해주던
'진재어음'에 있었다.
"언제까지 우리 정부가
부실기업의 빚까지 떠맡아야만 해?"
"맞아. 장기불황으로
나라 살림도 좋지 못한 판국인데.."
"이제라도 진재어음의 지불보증을
중단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정치인들의 밀담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식 들었는가?
앞으로 정부가 진재어음을 떠맡지 않겠데."
"그럼 부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겠구먼."
"기업이 도산하면
거기에 투자한 은행도 덩달아 도산하겠고.."
"으악! 내 돈!"
때문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서둘러 은행으로 달려갔고,
▲ 돈을 인출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 1927년 3월 도쿄 나카노 은행 앞
대도시에서 시작된 '인출러시'는
곧 전국적으로 번져,
수 십 개의 중소 은행들이
잇따라 도산하게 된다.
"뜨아!"
결국 정부는 해당 은행들에
3개월 간의 '지불유예령'을 내림으로써
겨우 공황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정부
"은행 무너지지 않으니깐,
제발 안심들 하라고!"
하지만 일련의 소동을 통해
국민들의 불만은 드높아졌다.
원래 사회가 불안정하고
경제 침체가 장기화되면
사회 구성원들은
그만큼 자신감을 상실하여
국가나 조직에 기대어
'대리만족'을 하려는 습성이 있어서
쉽게 '극우주의', '국수주의'로
빠지기 마련이다.
"일본의 경제가 이렇게 부실한 건
식민지가 부실하기 때문임."
"맞아. 중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아니면 만주라도 확실히 차지하던지."
"하지만 정부는
서구 열강들의 눈치나 보고,"
"군축(군비축소) 협정에
협조 외교나 하고 있으니.."
"에휴, 무능해서 이거 원."
"이럴 때 차라리
군부가 나서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일본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었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국가주의' 사상이 크게 득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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