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비약적인 성장
● 1차 세계대전의 발발 (1914)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라는 정복자에 의해
프랑스 혁명의 사상(자유)이
널리 전파되고
프랑스가 승승장구했던 원인(민족주의)을 두고
유럽인들이 크게 각성하기 시작하여
'자유'와 '민족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확산되게 되어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적 '국민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유럽에서 오늘날과 같은 국가의 개념은
불과 200년 전에 탄생했던 것임."
그 이전의 유럽에서는
국가 간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농부1
"자네 국적은 어디야?"
농부2
"글쎄? 엊그제는 프랑스였는데
지금은 프로이센이라나, 뭐라나?"
한 왕가가 여러 나라를
동시에 지배하는 경우도 흔했다.
▲ 16세기 합스부크 가문의 영토
하지만 '민족국가'가 등장하자
'국경선'이 분명해지고
과거에 용병들이 중심이 되어
치러졌던 전쟁이
농부1
"저거 뭐지?"
농부2
"또 전쟁인가? 우리는 일이나 하자구"
갑자기 '민중들의 의무'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국가를 위해 싸우란 말이야!"
또 '산업혁명'을 일궈낸 뒤라
'과학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대'로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화력'과 '물량전'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가공할 위력의 살상 무기들이
대량생산 방식으로 쏟아져 나오게 될 테니깐."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대규모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읭?"
자본주의 경제란,
불황과 호황이 주기적으로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19세기에만 해도
불황이 닥치면,
경쟁력이 약한 공장들이 쓰러지고
거대 공장이 시장을 집어삼키는
'독점 자본주의'의 방법으로
시장의 모순을 해결하곤 했었다.
"음, 동물의 세계로군."
하지만 독점이 심화되자
그런 방법도 곧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자본가
"에겅, 물건이 팔리지 않는데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능."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장의 확대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는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식민지는
심각한 불균형을 가지고 있었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국가들은
'대항해시대'의 수혜자들로
축적된 자본 덕분에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전 세계의 식민지를
대부분 독차지할 수 있었지만,
유럽 중부에 위치한
후발국들은
산업혁명을
뒤늦게 시작한 것도 억울한데
해외 식민지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놔, 식민지는 죄다
영국과 프랑스 놈들이 독차지하고.."
"시장이 없으면
허구한 날 불황에 허덕일 텐데, 어쩌지?"
"어쩌긴, 방법이 없으면
빼앗아 오기라도 해야지."
고로 자본주의의 발달로
'소비 시장'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에
시장 확대를 위한 '전쟁의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전쟁'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어서
자본주의가 가진 자기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빠른 특효약'이기도 했다.
"하하하. 골치 아팠던 재고들을
모두 다 처분했다!"
그리하여
20세기 벽두의 유럽은
① 국가 총력전의 가능성,
▲ 남자는 전선에, 여자는 공장으로 (영국의 포탄공장)
② 첨단 무기의 등장과 무기의 대량생산,
▲ 1차 세계대전의 신무기 : 전투기, 탱크, 잠수함, 기관총
③ 거듭되는 경제 불황(공황),
④ 식민지 쟁탈전으로 인해
거대한 전쟁의 발발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위기의 중심에는
후발국의 대표격인 '독일'이 있었다.
빌헬름 2세
"흥! 우리가 프랑스, 영국 놈들보다
못한 게 뭐야?"
빌헬름 2세
"우리의 공업생산력은
이미 영국, 프랑스를 능가하고 있는데.."
빌헬름 2세
"건수 하나만 걸려봐라."
그런데 1914년 7월
좋은 건수가 걸려들었다.
오스트리아(게르만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슬라브계) 청년에게 암살된 것이다.
독일은 이를 빌미로
동유럽으로 영역(시장)을 넓히고 싶었다.
독일
"감히 슬라브 놈들이
게르만을 때리다니!"
그러자 슬라브를 돕겠다고
영국과 프랑스가 달려들었고,
영국
"흥! 독일 놈들이
잘 되는 꼴은 볼 수 없다!"
전쟁은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대결로 비화되어
전대미문의 '세계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싸움터는 대부분 유럽이었지만
'세계전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 전쟁으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열강들의
전쟁이었으니깐.."
"식민지 국가들은,
물자와 병력 공출을 위해 힘써야 했던 전쟁."
"아!"
● 일본의 중국 침략 : 21개조 요구사항 (1915)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일본에게 있어서
절호의 찬스였다.
"서구 열강의 관심이
온통 유럽 전쟁에 집중되는 이때에.."
"아시아 대륙은
그야말로 힘의 진공 상태!"
"지금이 기회다!
중국을 접수하자!"
때문에 일본은, '영일동맹'을 빌미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더니
즉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공격하고
▲ 산둥반도에 상륙하고 있는 일본군
"칭다오 점령!"
독일 식민지이던
태평양의 남양군도(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했다.
"하하하"
이때 연합국은
일본이 유럽에서 싸워 주기를 바랐지만,
일본은
아시아에 국한해 참전했고,
그중에서도,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이었으니,
"ㅎㅎㅎ"
유럽이 전쟁으로
혼이 빠져 있던 1915년,
중국의 위안스카이에게
대뜸 '21개조 요구 사항'을 들이밀었다.
▲ 21개조 요구 조약 문서
내용은
이러했다.
"산둥성의 독일 권익을
일본이 계승한다."
위안스카이
"가져라!"
"뤼순과 다롄, 남만주 철도에 대한
조차 기간을 99년간 연장한다."
위안스카이
"그러던지!"
"만주와 몽골에서도
우리 권익을 보장해줘라."
위안스카이
"읭? 이건 좀.."
"제철소와 광산, 탄광 등을
우리랑 공동 경영하자."
위안스카이
"정말 공동이야?"
일본
"당근이쥐!"
하지만 '공동 경영'이란
중국 사람들이 뼈빠지게 일을 하면
이익은 일본이
모두 챙겨 먹는 식의 '공동'이었다.
위안스카이
"칫!"
"중국 정부의 정치·재정·군사에 관해서
일본인 고문을 초빙한다."
"중국의 경찰 운영도
우리 일본과 공동으로 한다."
위안스카이
"또 공동이야?"
일본
"다~ 허약한 중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야!"
일본
"어서 도장 찍어!"
위안스카이
"앙대! 싫어!"
하지만 일본의
최후통첩에 굴복하여
위안스카이는
결국 21개 조항을 받아들이고 만다.
일본
"맞고 할래? 그냥 할래?"
위안스카이
"알았어. 때리지 마."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독일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는 선에서만
활약해 주기를 기대했건만
전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틈을 타서
그렇게 일본은
거대한 중국 시장을
혼자서 꿀꺽 삼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 시베리아 출병 : 연해주를 먹고자 했던 일본 (1918)
그로부터
2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터져
인류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름 하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CCCP)"
레닌은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어
전쟁에서 발을 뺐다.
레닌
"이것은 제국주의 전쟁임!"
레닌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쟁 판에
사회주의자들이 동참하는 것은 옳지 않다능!"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18년,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국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세력을 타파하기 위해
병력을 파병한다.
▲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한 미군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 열강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성립한
소비에트 정권이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순진한 노동자들을 꼬드기고 있네!"
"가만 놔뒀다가는
공산주의가 바이러스처럼 번지겠어!"
이때 소련을 상징하는 깃발이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자를
'빨갱이(Reds)'라고 부르게 되고
"빨갱이라는 말을
우리나라도 직수입하게 된다능."
그에 맞서 싸우는
여러 반공 세력들을
몽땅 묶어서
'백군'이라 부르게 된다.
▲ 러시아의 백군 (영화 제독의 연인 中)
"흰색은 원래
왕당파(혹은 극우)를 상징하기 때문에,"
"제정 러시아에 거부하는 반공세력까지
백군이라 하는 것에는 좀 문제가 있지만.."
어쨌거나 '러시아 내전'으로 알려진
'적백 내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때 미국의 요청을 받은 일본도
시베리아에 7만의 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시베리아 출병)
▲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일본군
"당시 시베리아로 진출한 외국 군대의 절반가량을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
▲ 블라디보스톡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각국의 군대들
하지만 소비에트 정권과 인민의 저항은
예상보다 강력했고,
"소비에트는 농민들을 강제 징병하는 식으로
무려 500만 명의 병력을 차출했다고 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군까지 패배하자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소득 없이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다.
▲ 블라디보스톡의 일본군
애초에 시베리아 출병부터가
시커먼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 흑룡강 어귀의 어느 마을에 도착한 일본군
"러일전쟁 때 받지 못한 부분을
이번에 정산하자능."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멀찍이 벗어나
▲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 전투기
연해주 전체와
사할린 섬은 물론이고
멀리 바이칼 호수 근처까지
쳐들어 갔던 것이다.
▲ 일본군의 시베리아 진출 : 황토색
하지만 미국이
크게 반발을 했던 탓에
일본은 마지못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아놔, 외만주(外滿洲) 정도는
받아내야 했는데.. 아깝네."
대신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군대를
국내로 철수시키지 않고
만주 지역에 계속 주둔시키게 된다.
● 전쟁 특수 : 벼락부자(나리킨)들의 시대
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유럽의 전쟁으로 전쟁 특수를 만끽했던 나라
랭킹 1위 미국, 2위 일본!"
"하하하. 이래서 남의 나라 전쟁은 좋아!"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아시아 곳곳으로 수출하던
막대한 양의 '면직물'을
생산할 수 없게 되면서
"지금 그런 거
만들 겨를이 어딨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산 면직물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럽산보다 품질은 떨어지지만
어쩔 수 없다해."
또 1차 세계대전으로
돈방석에 오른 미국이
일본산 생사(비단의 원료)를 대량으로 구매한 것도
일본 경제에 큰 도움이 됐다.
미국
"요즘 돈이 넘치네.."
미국
"이젠 우리도
비단 옷 좀 실컷 입어보자능."
또 유럽으로
대량의 군수품을 팔게 되면서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무기 수출국이 되었다.
일본
"하하하.
이 전쟁 오래 끌었으면 좋겠어."
또 전쟁으로 인해
유럽 전역에 선박이 부족해지자
일본은 해운업도 도맡아 하게되어
조선업과 해운업이 커다란 호황을 맞게 되고
'후네나리킨(船成金 : 배 벼락부자)'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게는가 하면,
각종 분야에서
'나리킨(成金 : 벼락부자)'들이 속출하면서
당시 일본은
그야말로 '나리킨의 전성시대'가 된다.
▲ 자신의 신발을 찾으려 100엔짜리 지폐에 불을 지핀 나리킨
: 당시 대졸 남성의 평균 월급이 50엔이던 시절이었다.
'제철업' 역시
급속한 발전을 맞게 되는데,
배와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철'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존의 야하타 제철소는 물론이고
새로운 제철소들이 잇달아 세워지게 된다.
▲ 당시의 제철소
화학 공업도 발달하여
의약품·염료·비료 등도 직접 생산하게 되는데
이러한 제품들은
원래 독일에서 수입되었으나
전쟁으로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자체 생산을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 당시의 플라스틱 공장
일본
"하하하"
그리하여 일본의 공업 발전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게 되어
1918년에는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초과하는가 하면,
중화학공업의 비율이
전체 공업 중 30%를 차지하게 된다.
▲ 조선소
"한국의 경우,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초과하는 시기가 70년대 중반,"
"중화학공업 비중이 전체 공업의 30%가
되는 시점이 60년대 중반이었음."
그리하여 전쟁 전(1914년)
11억 엔의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전쟁 후(1920년)
28억 엔의 채권국이 되고
▲ 연도별 수출입
"28억 엔이면,
당시 조선의 GDP와 비슷한 수준."
세계 3위의 해운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참고로 당시 해운국이란
제국주의 국가의 지표와도 같았음."
또 경기 호황으로
농산물의 수요가 늘어
농산물의 가격이 오르고
농촌 경제도 크게 성장하게 되는데
"특히 미국으로의 생사의 수출이 늘어나
양잠업이 특수를 누리게 된다능."
덕분에 농촌의 주택들이
재래식에서 현대식으로 차츰 개량되는가 하면,
마을의 길도 새로 닦이고
전기도 들어오는 등,
농촌에서도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한다.
▲ 다이쇼시대 (1912~1926)의 농촌
"어? 한국의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생각나는 건.."
1차 세계대전 이후 : 식민지 독립운동과 전후 불황
● 베르사유 강화조약 (1919)
일본이 돈벼락을 맞은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독일의 항복식
1800만 명이 사망하고
2300만 명이 부상을 당해
총 4100만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당시 세계인구의 2.4%였다.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 인구는
세계인구의 0.69%임."
하지만 일본은
4년 만에 끝낸 전쟁이 못내 아쉬웠다.
일본
"아깝다. 벌써 끝나다니.."
그렇더라도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5대 승전국으로
대접받아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 초청되는데,
▲ 1919년 6월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다고 해서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흔히 부른다능."
강화 회의에는,
승전국 측의 주장을 일방적 반영하여
패전국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에겅.."
독일의 식민지는 연합국들에게
각각 전리품으로 분배되게 된다.
"탄자니아, 나미비아는
영국이 먹고,"
"토고, 카메룬은
프랑스가 먹고,"
"산둥성의 이권과 마리아나 제도(남양군도)는
일본이 먹도록!"
이탈리아
"난 뭐 없어?"
"없어!"
그런데 이때 중국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했으니,
연합국들의 이러한 조치에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
"우리 중국도 1917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연합국의 일원이다해."
중국
"왜 산둥성의 이권을
일본에게 주는거냐해."
그러나 서구 열강들은
일방적으로 일본의 편에 섰다.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
"중국?
너희가 연합국이라고?"
밸푸어
"중국은 단 한 푼의 돈도,
단 한 명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다고!"
밸푸어
"뻔뻔하기 그지없네."
중국
"뭐? 어.. 억울해!"
그러데 중국은
정말로 억울했다.
사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중국은
서구 열강과 대등한 입장에 설 것을 모색하다가
영국에 이런 제의를 했었다.
중국
"우리가 30만 명의 노무단을 지원하겠다해.
그중 10만 명은 전투지역에 투입해도 좋다해."
▲ 전선의 노무단
이때 콧대 높은 영국은
그런 제안을 당장엔 거부했지만,
영국
"필요 없삼!"
1916년 극심한 병력 손실로 골머리를 앓자,
이내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 영국군
영국
"노무단 지원?
하하하. 고마운 말이오."
중국
"필요 없다며?"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7만 명의 병력과
▲ 프랑스 전선에서의 베트남 용병
7만 명의 노무자를 징발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을 때였다.
때문에 영국도
중국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병력과 전시 노동력에
충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영국
"인도에서 병력 25만 명,
중국에서 노무자 14만 명 차출! 그래, 좋았어."
그렇게 전선에 투입된 중국인들은
참호를 파고 요새를 짓고,
지뢰가 가득한
전선을 정비하는 일도 도맡아
▲ 1차 대전에서 노무자로 활동하던 14만 명의 중국인
2만 명 이상이
병에 걸려, 부상 후유증으로, 지뢰 사고로 죽었다.
▲ 철조망을 제거하는 중국인 노무자들
그런데도 영국은
그처럼 파렴치한 발언을 내뱉었던 것이다.
▲ 1차대전 희생자 묘지에서 간간히 발견되는 중국인의 무덤
"헐!"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는데,
윌슨
"세계의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는 '동유럽'에만 적용되고
아시아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윌슨
"오헝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영토 분할 논리야.
아시아는 해당이 안 된다고!"
윌슨
"승전국인 우리 이권이 잔뜩 걸려 있는 마당에,
무슨 아시아가 독립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또 윌슨 대통령의 요구로
'국제 연맹'이 창설되게 되었으니,
윌슨
"앞으로 이런 끔찍한 전쟁이
또다시 발생하면 안 되니깐.."
윌슨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제 연맹이 창설됐으면 좋겠삼."
이때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이 쏙 빠져버렸다.
"뭐야?
왜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건데?"
게다가 국제 연맹은
'경제제제'와 같은 페널티가 약해
전쟁 억제 효과가
거의 없다시피했고
▲ 사나운 개의 재갈이 되어주길 바랐던, 국제연맹
각국은
자국의 이익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애초에 큰 효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 한반도의 3.1 운동 (1919)
하지만 윌슨의 속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순진한 아시아 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고취되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하고 말았으니,
"김칫국 마시지 말라고!"
그 첫 스타트는
바로 한반도였다.
당시까지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소중화사상'이 강해
일본인들을 얕잡아보는 성향이 짙어서
일제의 지배를
조선인들은 쉽게 용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놈 주제에
감히 우리를 지배하겠다고?"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군인 출신을 조선총독의 자리에 앉히고
"당시 조선총독은 조선의 입법·행정·사법권에
군 통수권까지 부여받았다능."
군인들로 하여금
경찰의 업무까지 보게 하는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를 통해
저항의식을 꺾어놓고자 했다.
특히 헌병경찰에게는
재판 없이도 태형을 가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식민 지배의 초기, 그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다.
▲ 당시 헌병경찰들
'조선인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이런 공포 분위기는
사회 전반적으로도 확산되어
학교나 관공서의 교사나 일반관리들에게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했었다.
▲ 일제강점기 교사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이 들렸으니,
"흐미, 독립이 가까워지나벼."
그동안 분을 삭여왔던 조선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터져 나온 것이
바로 1919년의 3.1운동이었다.
"대한 독립 만세!"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시위 참가자만, 당시 조선 인구의 10%인
약 200만 명에 달했다.
▲ 시위에 참여한 기생들
"대한 독립 만세!"
하지만 일본 군경들은
무력으로 진압했기 때문에
총 5만 3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사망자 8천 명, 부상자 4만 5천 명,
체포자 5만 명."
이후로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실패를 통감하게 되었고
"이런 식의 식민지 경영은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들고,"
"반발심만 커진다능."
강압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유화책'으로 경영하고자 했으니,
조선인에 대한
기본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부분적으로 보장되게 된다.
"물론 언론, 출판물은
검열을 거쳐야만 유통이 가능했지만.."
또 일본의 물질 문명이
빠르게 침투하게 되어
조선인들에게 일본 문화가
진보의 화신처럼 보이도록 노력하게 된다.
"일명 문화정치."
그리고 이러한 문화정치는
실제로 효과가 있어,
조선의 '협력자'들을 대거 양산해 내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조선 전체 인구 중
일본인은 2~3%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도시와 항구에 거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 구석구석까지
총독부의 지배가 효율적으로 작동했던 것은,"
"자발적인 협력자(일명 앞잡이)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임."
● 중국의 5.4 운동 (1919)
1911년 신해혁명으로
봉건왕조인 청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중국은
비로소 근대 국가로 출범하는가 했는데,
군벌 출신의 위안스카이가
혁명을 주도한 쑨원을 밀어내고
총통의 자리에 앉더니만,
'반동정치'를 펴, 혁명은 크게 퇴색되었고
권력을 잡은 위안스카이는
내친김에 황제의 꿈을 꾸다가
위안스카이
"총통은 무슨
황제가 되어야지.."
1916년 정말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헐!"
하지만 일장춘몽이라고 했던가,
여론의 반발로 황제를 포기해야만 했고
위안스카이
"군주제는 없던 걸로.."
권좌에서 내려온 위안스카이는
석 달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중국은
군벌들이 크게 난립해
서로 이권을 다투는
커다란 혼란을 겪어야만 했고
"완전히 개판!"
그런 상황에서
국력을 제대로 결집시킬 수 없어
1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음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홀대를 받다가
서구 열강들이 일본의 편을 드는 꼴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중국
"나도 연합국의 일원인데.."
열강
"넌 밥이지."
하지만 베르사유 강화조약의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곧 중국인들은
크게 격분하게 되었고,
"말도 안 돼!"
"산둥성이 일본의 것이라니!"
1919년 5월 4일,
베이징대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게 된다.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반대한다!"
"제국주의 반대! 군벌독재 반대!"
이때 군벌 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섰지만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불거져
텐진, 상하이, 난징, 우한 등
중국 전역으로 시위는 퍼져 나갔고 (5.4운동)
곧 노동자들의 파업과
상점의 철시로 이어지고
일본 상품의 배격 운동으로
확산되게 된다.
▲ 일본 상품을 불태우는 성난 군중들
"일본 상품을 배척하자!"
고로 1차 세계대전은
중국인들에게
제국주의의 본질을 자각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신해혁명으로 촉진된 중국의 근대화는
위안스카이의 반동으로 수렁에 빠졌지만.."
"5.4운동으로 혁명운동은
다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던 것임."
그리고 그 결과,
중국 정부는
친일파 관리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산둥성을 일본에 조차하겠다는
베르사유 조약을 전면 거부하게 되고,
일본
"아놔!"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게 된다.
"이후 3년 뒤(1922년) 일본은
미국 등의 압력으로 산둥성의 이권을 포기해야만 했음."
● 전후 불황
1차 세계대전을 통한
일본의 호경기는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군수품의 수출이 뚝 끊기고
유럽 국가들이
곧 경쟁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전쟁 때에야 아쉬워서 썼다지만,
역시 품질면에서 일제는 유럽산한테는 안 되지."
때문에 한때
밀려드는 주문을 맞추느라
무리하게 확장했던
공장과 설비들은
갑자기 가동을
중단해야만 했고
재벌들이 막대한 투자를 하며
전략 사업으로 삼고자 했던
조선과 철강 등의
중화학공업 부문도
유럽 제품과의 경쟁에서 밀려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에겅.."
때문에
전후 일본의 경제는
심각한 적자와 과잉재고로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만 했고,
설상가상으로, 1920년 3월
도쿄 증권시장의 주가가 급락하면서
최악의 '공황' 사태로
빠지고 만다.
중국으로의 면사 수출이
크게 감소하면서
그 위기가
경제 전체로 확산된 것이었다.
"1차 대전 중 호황을 누리면서
노동자의 임금이 크게 올랐기 때문에,"
"일본산 면사 가격이 크게 올라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데다.."
"중국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이 드세졌기 때문임."
게다가 '전후 불황'은
미국에도 심각했기 때문에
미국으로의 생사 수출이
급격히 둔화되어
"지금 비단 옷을 입을 때인가?"
농가의 주요 수입원인
생사 가격이 크게 하락하게 된다.
"아놔.. 갑자기 왜 이래?"
또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자
그에 따라 실업자가 넘쳐나고
도산한 기업들을
재벌들이 헐값에 매입하는 상황이 나타나면서
기업의 '독점화'와 더불어
'빈부격차'가 심화되게 된다.
때문에 한때 호황을 겪으며
달콤한 맛을 즐겼던 노동자들은
갑자기 어려워진 경제에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여기저기서 파업과 노동운동이
잇달아 발생하게 된다.
"노동 환경을 개선하라!"
"인금을 인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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