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과 1890년대
● 청나라와 일본의 대립
19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서세동점'의 시대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 세력이 점점 동쪽으로 밀려온다는 말."
이 과정에서 중국이 휘청거렸고
조선은 문을 걸어 잠갔다.
반면에 일본은 각성하며
스스로를 변화시켜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을 통해
2천 년간 지속되어 온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단번에 깨뜨려 버렸다.
청나라
"뭐야? 일본이 조선을..!"
그러자 격분한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했고,
청나라
"누구 맘대로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거임?"
이후 적극적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해
조선 침략을
근대화의 발판으로 삼으려던,
일본의 의지와
전면 충돌하고 말았다.
일본
"아놔.."
하지만 갓 근대화의 걸음마를 뗀
일본으로서는
아직까지 청나라에
맞설 실력이 아니었다.
때문에 조선의
개화 지식인들을 꼬드겨서
민씨 정권을 축출하게 하여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려고도 했으나 (갑신정변, 1884)
청나라의 재빠른 수습으로
실패하고 말았고,
이후 일본은
청나라와 '협정'을 맺으며 (텐진조약, 1884)
"앞으로 청일 양측의 군사는
모두 조선에서 물러난다."
"장래 조선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청일 양국은 군사를 파병할 수 있으나,"
"조선에 파병을 할 때는
상대 국에게 먼저 문서로 알려야만 한다."
조선에서 한 발 물러서서
청나라의 우위를 인정해줘야만 했다.
● 기회를 노리며 군비를 증강하던 일본
하지만 조선에서
한 발 후퇴하던 일본은,
결정적인 기회를 노리며
차곡차곡 군비를 증강하고 있었다.
먼저 정부는
'징병령'을 더욱 강화했고
▲ 신체검사
"모든 일본의 남성들은,
만 20세가 되면 3년간 군인으로 복무하도록!"
청나라의 군함에 맞서기 위해
해군력을 크게 증강시키고 있었다.
"청나라에 비해 1:2.5 정도로 열세였던
일본의 해군력은.."
(당시 청나라의 해군력은 세계 8위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1:1로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됨."
또 1890년 새 헌법을 반포하고
근대국가로 출범하면서
국민들 사이에는
'일본이 아시아 최고'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아시아에서 우리만
유일하게 입헌 국가임!"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할 세력으로
일본을 새로운 파트너로
낙점하였기 때문에 (영일항해통상조약, 1894)
일본인들의 자신감은
더욱더 고조될 수 있었다.
"하하하. 우리 뒤에는
세계 최강 영국이 있다!"
▲ 19세기 말 한반도의 정세
그러던 1894년,
조선에서 뜻하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동학농민운동'이
한반도를 강타한 것이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을 때려잡자!"
이때 조선의 민씨 정권은
민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도와주셈."
이에 청나라는, 10년 전에 체결된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보하게 되었고,
청나라
"우리 병사 1500명을
조선에 파견하겠다해."
일본
"알았스므니다."
일본도 조선에 사는
일본인과 상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4천 명이 넘는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 인천은 당시 일본군의 병력과 물자의 보급지 역할을 했다
"읭? 너희는 여기 왜 왔음?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후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대뜸 점령하더니
조선의 내각을
교체하고,
"민씨 정권 퇴출!
앞으로 김홍집이가 내각을 맡아달라능!"
"대신 우리가
고문을 해줄게."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갑오개혁?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청나라
"읭? 너희들 왜 그러는 거야?
어서 물러가!"
일본
"흥! 싫거든!"
● 청일전쟁 (1894~1895) : 아시아의 거인을 물리친 일본
1894년 8월,
충청도 아산군(현재 경기도 안산시) 풍도 앞바다.
청나라는 군함 5척에 병사들을 태우고
아산만을 향해 떠나고 있었는데,
일본 군함이 접근해오더니
다짜고짜 폭격을 시작했다.
"뜨아!"
그렇게 선전 포고도 없이
일본의 선빵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원래 힘이
비슷한 경우
선제공격과 기습공격을 당하면
웬만해선 당해낼 재간이 없어진다.
"그래서 싸움에서는
선빵이 중요하다능!"
게다가 청나라는
장비가 화려해도
그걸 제대로 활용할
전술적인 능력이 부재했다.
▲ 일본 군함에 맥없이 얻어터지고 있는 청나라 군함 : 어차피 청일 모두 비슷한 서양의 군함을 가지고 싸웠다
그러니 일본 해군에게
힘 한번 못 쓰고 패배했고
사력을 다했던
'평양 전투'에서도,
청나라의 해군을 총동원됐던
'황해 해전'에서도 잇달아 패배하며
황해의 제해권을
모두 일본에게 내어주고 말아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밀려나야만 했다.
청나라
"에겅.."
이로써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이
청의 '양무 운동'보다
더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 전황을 보고하는 '아사히 신문' : 풍도 해전과 평양 전투의 승리 기사
일본
"곧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이다!
좀 더 밀어붙이자!"
하지만 요동 반도에서의
청나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에,
일본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진격은
거기서 멈추고 말았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은
베이징까지 진출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해
현상을 유지하기로 했다.
▲ 청색(청군 공격로), 녹색(청군 퇴각로), 적색(일본군 이동로)
그리고 유리한 순간에
전쟁을 끝낼 기회를 찾던 일본과
조기 종결을 희망하던
청의 입장이 일치하면서
8개월에 걸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 시모노세키조약 (1895) : 막대한 배상금을 챙긴 일본
1895년 4월,
청일 양국은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다.
전쟁은 그야말로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청나라가 63만명,
일본이 24만명을 파병하여,"
"사망자 교환비가 1:30이었던 전쟁"
분열됐던
일본의 여야 정치권이
전쟁 앞에서 일치단결하며
일사불란한 국론 통일을 보여줬던 효과도 컸다.
▲ 메이지시대 의회(제국의회)
"반면에 청나라는
잠재적인 국력은 강했지만.."
"내부적인 대립으로
국력을 일본처럼 결집시키지 못했음."
조약을 통해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고,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내어주고
전쟁 배상금으로
무려 2억 3천만 냥을 지불하게 된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국가의 2년치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전쟁 배상금으로
그 두 배(4년치 국가예산)를 받아냈던 것임."
조선을 '독립국'이라
명시한 데에는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의도 때문이었고,
청에서 받은
막대한 배상금은
이후 일본이 2차 산업혁명(중화학공업)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자금이 된다.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이 강화됨에 따라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에서
'치외법권'이라는 조항이 폐지되게 된다.
"다만 '관세의 자주권'은
1911년에 가서야 폐지되기 때문에,"
"1854년 강제 개항 이후,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완전히 없애는 데에만.."
"일본은 57년의 세월이
걸리게 됨."
그렇더라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서
사실상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그 첫 실험무대인 대만을
야심차게 경영하게 되었으니..
이때 일본은
가장 먼저 '총독부'를 설치하고
▲ 대만총독부
이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는 방법으로
식민 지배의
토대를 구축해 나가게 된다.
"어? 왠지 익숙한 흐름인데?"
"15년 뒤 조선의 식민지 과정도
대만에서의 경험이 고스란히 적용됐으니깐.."
● 삼국간섭 : 적대국이 된 러시아
시모노세키 조약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반자이!"
그러나 조약 내용 모두가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쳇! 일본 놈들
너무 키워주는 거 아냐?"
"그러게.."
특히 만주로의 남하 정책을 꾀하던
러시아의 불만이 컸다.
러시아
"요동반도 할양이라니,
이건 너무 했음. 안 그래?"
프랑스
"음, 그러고 보니.."
독일
"맞아, 너무 했어."
때문에 러시아·프랑스·독일이 합세하여
일본에 닦달을 하자,
"얼른 청나라한테
요동반도를 반환해!"
일본은 반환금을 받는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요동 반도를 포기하고 말았으니,
일본
"아놔.."
이를 두고
'삼국간섭'이라 한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조선의 민씨 정권이 러시아를 달리 보기 시작해
민비
"오! 청나라가 망한 판국에
누굴 의지하나 했는데,"
민비
"앞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야 겠다."
스스로 친러 내각을
만들어보고자 했으나
화가 난 일본이 낭인들을 앞세워
무대뽀로 궁궐로 쳐들어가
조선의 왕후를 살해하고
'친일 정권'을 세워버렸다. (을미사변, 1895)
"헐!"
하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듬해 궁궐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으니, (아관파천, 1896)
곧 다시 조선에서는
'친러 내각'이 세워지고
아울러 러시아는 청 정부로부터
요동반도의 여순, 대련을 조차하게 된다. (1898)
일본
"뭐야? 요동반도를 조차해?"
일본
"재주는 우리가 실컷 부렸는데
돈은 러시아 놈들이 다 처먹고 있네."
때문에 삼국간섭 이후
일본 내에서의 '반러감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
"에잇, 찢어 죽일 로스케 놈들!"
결국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지만
한반도와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라는 더 강한 상대를 넘어서야만 했다.
▲ 플라이급 일본의 다음 상대는 해비급 러시아였다
이후 일본 정부는,
러시아를 가상의 적국으로 삼고
국민들을 상대로
국가주의 교육에 매진하게 되고
"국가는 최고의 가치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언론도 연일
격렬한 논조로 '반러감정'을 부추겼다.
"러시아가 우리의 이권을 빼앗아갔다!"
"러시아를 물리쳐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
때문에 군비 확장은
국가 경영의 중요한 축이 되어
이후로 일본은
국가 재정의 40%가 넘는 돈을 국방비로 쏟으며
무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 일본의 군비 지출액 : 청일전쟁 이후 매년 막대한 군비를 지출했다
러일전쟁과 1900년대
● 2차 산업혁명(중화학공업)의 시작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됐던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을 이용한 산업이
중심이 되었다.
방직업, 방적업 등 경공업이
이 시기를 이끌었고,
산업을 이끌던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제국주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 19세기 후반 영국의 영토
하지만 10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이 되면
새로운 '혁신 산업'이
등장하게 되는데
화학·전기·석유·철강 등의
중화학 공업이 그것이다.
이런 변화를 두고
'2차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국가는
미국과 독일이었고
▲ 2차 산업혁명 당시의 독일의 발명품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 국가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성장세가 꺾이고 만다.
때문에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경제규모에 있어서
1870년대에 미국에 뒤지게 되고
1900년대에는 독일에게도 뒤처지게 된다.
▲ 미국의 2차산업혁명을 주도한 발명왕 에디슨
단적으로 1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발명품,
증기기관은 영국이 최초로 만들었지만
2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발명품
자동차는 독일에서,
비행기는 미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미국과 독일은
축적한 기술과 부를 바탕으로
반세기 뒤에 일대의 격전을 펼치게 되니
그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이었다.
"어쨌든 20세기의 제국주의는
2차 산업혁명이 관건임."
1854년 개항을 한 일본에서도
1870년대 중반,
유럽에서 들어온 면방적 기계를 가지고
'1차 산업혁명'의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고
"면방적이란 무명실을 짜는 것."
1880년대 후반부터
부가가치가 높은 견방적을 하기 시작하더니
"견방적이란 비단실을 짜는 것."
1890년대에는 면사(무명실)와 생사(비단실)를
해외로 수출하게 된다.
"이때 면사는
주로 조선과 청으로 수출했고,"
"값 비싼 생사는
주로 유럽으로 수출을 했음."
그리하여 1900년대에 일본은
생사 생산과 수출에서 모두 세계 최고가 되었고
"그동안 1등은 청나라였음."
이때부터 천을 짜는
'직물업'의 발달도 이어져
일본의 '섬유공업'은
일본의 산업혁명을 이끄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일본은 산업혁명 시기, 광공업은 연 평균 6%씩, 경제 전체는 연 3%씩 성장했다.
(전통시대에는 1년에 1%만 성장해도 급격한 성장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1895년 삼국 간섭을 계기로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관심을 둔 사업이
바로 '제철업'이었다.
"대포, 군함, 기관차 등을
우리 스스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철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만 함!"
그리하여 1901년
'야하타 제철소'를 준공하게 되는데,
▲ 후쿠오카에 건설된 야하타 제철소 : 1901년부터 조업을 했다
이때 일본은
독일로부터 설비 구입은 물론,
공장 설계에서,
기술 관리까지 도움을 받게 되었고
"제철소 설립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갔지만,"
"때마침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았기에 가능했음."
이후 일본의 강철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기계·철도·기관차·선박의
국산화가 가능해지기 시작하고,
무기를 만드는 군수업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 1907년도 일본의 철도
그리하여 1910년대에 일본은
'2차 산업혁명'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서양에 비해 1차 산업혁명은 100년,
2차 산업 혁명은 30~40년 정도 느렸던 것."
"참고로 우리나라의 경우 1·2차 산업혁명 모두
일본보다 50년씩 늦었음."
"산업 구조로 보면
일본의 1887년과 조선의 1930년대가 비슷했거든."
(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p.17)
●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중국의 의화단 사건
19세기 초 유럽은
나폴레옹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나
유럽 대륙을
싹쓸이하게 되는데
그만 러시아를 치려다
호되게 당하고 만다.
"넓은 땅덩이 때문에
보급이 어려웠고,"
"러시아의 추위도 매서웠고.."
때문에 느닷없이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취급받게 되어
"헐, 러시아 넘들 생각 이상이었어!"
"그러게, 완전 의외!"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치러진
사후 수습 회의에서 (빈 회의, 1814)
러시아는
유럽의 맹주로 추대되어
유럽 세력의
새로운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하하"
하지만 이런 영광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에 불과했다.
당시 러시아는
가난한 농업국가였고
다른 선진 유럽들과 달리
산업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 러시아의 농노
그저 잠시나마
강대국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을 뿐,
'종이 호랑이'의 실체는
1856년에 발발한 '크림전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까지 러시아는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쳤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오랜 숙원인 지중해로 나아가고자
흑해를 완전히 장악하려고 했다.
"동토의 나라 러시아의 꿈이
부동(얼지 않는)의 항구를 가지는 것!"
니콜라이 1세
"지중해는 원래 로마제국의 바다였어.
이슬람 넘들한테서 뺏어와야 겠다능."
"맞습니다. 지금 오스만은
더 이상 유럽의 왕자가 아닙니다. 유럽의 환자입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런 러시아의 도발을 가만히 지켜 볼 수가 없었고,
"누구 맘대로
유럽의 질서를 깨뜨리려고 해?"
오스만을 도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자 했으니
그렇게 해서 '러시아 대 영불 연합군'의 전쟁이
흑해와 크림반도에서 시작되게 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러시아는 전혀 상대가 안 됐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철갑으로 된 군함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사용한 것은
대부분 목선이었고,
소총의 사거리도
영불 연합군은 러시아의 3배였다.
"자본주의 vs 농업국가 간의 전쟁이었는데,
결과야 뻔했지."
그리고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무려 50만 명의 인명을 희생하며 항복하고 말았다.
▲ 러시아군
"헐! 50만 명!"
하지만 이때부터 러시아는
군비증강에 힘을 쓰게 되고,
다른 부동항을 찾는
'남하정책'에 몰두하게 되는데
영국은 그때마다
러시아의 야심에 얄밉게 제동을 걸었으니,
때문에 페르시아로 진출하려던
러시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
러시아
"페르시아를 차지해서
인도양으로 진출하자!"
영국
"누구 맘대로?"
▲ 페르시아 고양이를 살짝 깔고 앉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러시아 불곰
또 동아시아에서
삼국간섭을 통해서
러시아가 요동 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 받게 되자,
러시아
"하하하. 드디어 부동항을 찾았다."
러시아
"연해주 앞바다는
겨울마다 얼어서 별로였는데.."
다시금 영국은
경계의 눈빛으로 러시아를 주시하게 된다.
영국
"아니, 이 넘들이.."
그러던 중, 1900년경
청나라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청일전쟁 이후, 서양의 열강들은
청나라의 허약함에 크게 놀라며,
"중국이 저렇게 허접했어?"
"잠 자는 사자라더니,
완전 덩치만 큰 비만 고양이었네."
값싼 노동력과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저마다 청나라로 진출하여
자본을 투자하고 공장을 짓고
점차 청나라를
'경제적인 속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 1900년경 중국 소비시장 판도
이 때문에 청에서는
외국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어서,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조직원들에 의해
외국인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를 당하고,
열강의 공사관이 습격을 당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외세를 몰아내자!"
"기독교 신자들을 박멸하자!"
그리하여 열강 8개국의 군대가 연합하여
무력진압에 나섰으니,
"영불독러미일이오
우리는 8개국 연합군!"
합동 군사작전을 통해
수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의화단과 전혀 무관한 민간인들이었음."
이것이 바로
1900년도에 발생한 '의화단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는 참으로 얍삽했다.
연합군을 파견하겠다면서
뒤늦게 군대를 만주에 도착시키더니,
"왜 이리 늦었어?
지금 다 진압했는데.."
"어, 그래?"
"그러니 어서 돌아가!"
"..."
그대로 눌러앉아
군대를 주둔시켜 버린 것이다.
"조차한 만주의 부동항을
이참에 확실히 먹어버려야지."
● 영일동맹(1902)과 러일협상(1903)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은
다른 열강들의 비판을 받았다.
"어디서 그따위 수작을!
어서 썩 돌아가라!"
이때 가장
목소리를 높여 비난했던 이들은
당연히
영국과 일본이었다.
영국
"어?"
일본
"어?"
때문에 영국은 일본에
이런 제의를 했고,
영국
"혹시 우리와 동맹을 맺지 않겠음?"
일본
"동맹요?"
영국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본은
치열한 격론 끝에
영국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러시아는 강국입니다.
영국과 동맹을 맺어 애써 적을 만들 필요까지는.."
"그냥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인정하고
우리는 조선을 점령하겠다고 러시아와 협상을 합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러시아는 만주는 물론이고
조선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다구요."
"지금 조선의 정세만
봐도 알잖아요."
그리하여 일본은
1902년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맺게 된다.
영국
"대신 유사시 귀국을 위해
군사적 원조를 아끼지 않겠음요."
일본
"알겠스무니다. 대신 앞으로
조선은 우리가 관리하도록 하겠스무니다."
▲ 영일 동맹의 내용
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대량 매입하여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60%를 조달 받을 수 있도록 했다.
▲ 영국과 미국·프랑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위해 일본을 밀어주고 있었다.
일본
"하하하"
그리하여 청일 전쟁 때에 비해
일본의 육군은 2배, 해군은 4배 정도 더 강해지게 된다.
한편 영일동맹 소식에,
일본 국민들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당시 영국이라면
세계 최강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때문에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동양의 약소국가가
서양의 강대국과 동맹을 체결하다니.."
도쿄에서는 집집마다
영국 국기를 내걸기도 했다.
"드디어 탈아(脫亞 : 탈 아시아)의 염원을
달성했구나!"
반면에 영일동맹의 소식에
러시아는 크게 불안감을 느끼며
병력의 단계적 철군을
약속했지만,
일부만
철수하는 데 그쳤고,
결국 이듬해인 1903년,
러시아와 일본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이때 일본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런 제안을 했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산책 4권 p.39)
일본
"조선을 39도 선을 기점으로
양분해 갖는 게 어떻겠스무니까?"
러시아
"싫스키! 안 되스키!
38도로 나눠갖자스키!"
▲ 만약 이때 러시아가 일본의 제의를 수락했으면?
연해주를 생각해보면, 39도 이북은 지금까지도 러시아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협상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일본
"아놔.."
일본
"러시아 놈들, 만주도 몽땅 다 가져가겠다,
조선도 반 이상 가져가겠다? 이런 도둑 놈들.."
하지만 이럴 때
조선의 고종은
'중립화 노선'을 표방하며
혼자서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으니
러시아와 일본에 특사를 파견해
'중립화'에 동의해 달라고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산책 4권 p.39)
조선
"대한제국은 앞으로
벨기에나 스위스처럼.."
조선
"어느 열강의 편에도 서지 않을 테니
중립화에 동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본
"알도 안되는 소리요!
조선은 그럴만한 국력이 없으무니다!"
● 러일 전쟁 (1904~05)
그렇게 러일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에서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일본
"우리에게 조선은
열강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발판임!"
일본
"영일 동맹도 맺었겠다, 그동안 군비도 확충했겠다,
까짓것 지릅시다!"
그리고 1904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의하게 되어
요동반도의 여순 공격을 시작으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도 일본의 전술은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 선빵이었고,
▲ 여순항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키는 일본 군함 (1904년 2월)
▲ 인천 앞바다 제물포 해전 (1904년 2월)
러시아
"이런! 전쟁의 예의도 모르는 것들!"
1904년 5월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이듬해 1월
여순항을 함락시킨 후,
만주의 중심 도시인 봉천(심양)을 공격하여
3월에 장악하는 등, 파죽지세로 몰아붙인다.
다만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러시아의 극동군보다
일본의 병력은 2~3배 이상 많았고,
당시는 시베리아 철도가
미완성된 상태여서
▲ 시베리아 횡단 철도 공사 : 건설인부들은 죄수들이 많았다 (1889년)
유럽에서 만주까지
병력을 보내는 데에만
기차를 타고서도
꼬박 40여 일이나 걸렸기 때문에
초반 기습 공격으로
일본이 유리한 국면을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후퇴하는 러시아군
하지만 러시아는
애초에 일본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는
병력이 100만이 넘었고
34만여 명의 예비병력과
추가적으로 450만 명을 더 동원할 수 있었다.
▲ 봉천(심양)에 도착한 러시아군
해군력은 영국,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였고
조선소를 4개 씩이나 가지고 있었다.
(강성학,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p.290~291)
반면 일본은 정규 병력 18만 명,
예비 병력 67만명에
조선소는
아직 완공도 되지 않았다.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일전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발틱 함대'가 동아시아에 도착하는
1905년 5월의 일전이라 할 수 있었는데,
▲ 발틱함대
이게 웬일인가!
러시아가 자랑하던 38척의 함대가
쓰시마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과 싸우다가
35척이 격침당하고
▲ 발틱함대
▲ 일본 군함
어찌 된 영문인가?
발틱 함대의 사연을 한번 알아보자.
1904년 10월, 러시아는
38척의 함대를 발틱 해에서 출항시켰다.
러시아
"지금 우리가 고전하고 있는 것은
바다를 내어줘서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태평양 함대와 합세해서, 제해권을 되찾아오자능!"
그러나 러시아의 발틱 함대는
일본 근해까지 도달할 때까지
무려 3만 7천 km를
항해해야 했는데,
(김용만, 세상을 바꾼 길 p.69~70)
여기에는 영국의 방해공작이
한몫을 차지하게 된다.
러시아
"젠장,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데!"
러시아
"영국 놈들이
허락해주지 않겠다니.."
그리하여 발틱 함대는
1만 km 이상을 더 항해해야 했고,
아프리카 해안이며
인도양의 해안들 대부분이 영국의 식민지라서
러시아 해군은
중간에 기항해서
연료(석탄)을 보급 받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항구도
제대로 찾지 못하게 된다.
▲ 발틱함대의 이동로(파란색), 수에즈 운하를 타고 왔을 때 (하늘색)
"아! 목 말러!
석탄도 부족하고.."
"젠장!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 좀 먹고싶다!"
그렇게 9개월에 걸친
무리한 항해로
녹초가 된 러시아 함대는
겨우 쓰시마 섬 인근에 도착하게 됐지만,
최상의 상태로 대기하던
일본 함대와 맞붙어
▲ 발틱함대의 이동 소식을 듣고, 경남 진해에서 대비중이던 일본의 군함
제대로 힘 한 번 못 쓰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 쓰시마 해전은 군함 110여 척이 맞붙은 엄청난 규모의 해전이었다
"이것이 러일전쟁의 분수령이었음."
"그런데 만약 이때
러시아가 이겼으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화국 중
하나로 있다가, 90년대에 독립했을 지도.."
이후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철도 부설에 매진하게 되지만,
그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러시아
"좀 더 서둘러
횡단 철도를 깔았더라면.."
● 포츠머스 조약
러일 전쟁은
2년간 계속됐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점차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탄약도 바닥나고
전쟁에 들어가는 돈도 점점 바닥을 보였다.
"애초에 물량전으로 하면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기 어려웠으니깐.."
하지만 다행인 건,
당시 러시아도 막장 상태였다는 점이다.
▲ 러시아군의 참호
제정 러시아의 말기인지라
무기들은 노후했고
러시아
"아니, 총알도 없이
총 자루만 쥐여주다니.."
워낙 거리가 멀어서
보급도 용이하지 못해서
심지어 전쟁 막판까지
방한복과 털모자를 지급받지 못한 병사들도 있었다.
러시아
"아놔.."
그럴 즈음,
일본에게 희소식이 들려왔다.
1905년 1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차 러시아 혁명)
전쟁이 거듭되자
살기 힘들어진 러시아의 농민과 노동자가
'평화와 빵'을 요구하며
차르의 퇴진과 개혁을 요구한 것이다.
"이때 일어난 혁명은
12년 뒤에 일어나는 2차 혁명의 신호탄이었음."
결국 장기화된 전쟁으로
양국 모두는 부담감을 느껴야 했고,
일본과 러시아는
이쯤에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 러일 전쟁 승리를 알리는 호외
이때 중재는
미국이 담당했는데,
적절한 시기에 미국이 나서 줄 것을
비밀리에 일본이 미국에 부탁한 결과였고,
사실 미국도
어느 쪽이든 간에
아시아에서의 세력 확대를
바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줬다.
루스벨트
"오케이!"
그리고 러시아도
강화 교섭에 응해,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열렸다.
▲ 포츠머스 회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걸 중재를 했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능."
그런데 회담장에서는
대화가 쉽지 전개되지 않았다.
일본은 승전국을
자처했지만,
러시아는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우리가 승전국이무니다."
러시아
"초반에는 우리의 피해가 많았지만
갈수록 일본의 사상자가 많았다스키."
러시아
"누가 승전국이라는 건지?
그러면 계속 싸워보자스키!"
때문에 회담은
한때 결렬될 뻔했지만,
러시아가 일본에
조선의 우월한 지위를 승인해주고
뤼순과 다롄의 이양,
만주철도 부설권의 양도,
사할린 남부(가라후토)의 양도
등을 결정하며
협상이 겨우겨우
타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일본인들은
강한 불만의 소리를 냈다.
"아니, 우리가 전쟁의 승전국인데,"
"왜 전쟁 보상금은
한 푼도 없는 것인가!"
"이러자고 그동안 무수한 젊은이들이
피를 뿌렸단 말인가!"
신문들은 매일같이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내며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화가 난 시민들은
정부 고관의 관저에 방화를 저지르기도 했다. (히비야 방화사건)
▲ 불에 탄 관저
일본 제국주의
● 일본은 황인종의 자존심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이 많았던,
청나라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승리에 고무됐다.
"헐! 일본이 이기다니.."
그러면서 러일 전쟁에서 보여 준
일본 국민의 단결과
전폭적인 지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저렇게 국론을 모아서
국력을 결집해야 할 텐데.."
쑨원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일본을 모델로 하여
청나라의 제도와 법률을
바꿔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쑨원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걸 봅시다!"
쑨원
"그게 바로
입헌 군주제의 힘입니다!"
고무된 것은
중국인들만이 아니었다.
베트남의 혁명가 판보이쩌우는
일본에 도움을 요청해
베트남에서 프랑스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
▲ 판보이쩌우
일본을 배우자는
'동유(東遊)운동'이 베트남에서 일어나면서
1905년에서 1908년 사이에
많은 베트남 청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이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200여 명의 베트남 유학생들은,
이렇게까지
찬양을 표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은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입니다."
"황인종의 맏형 격인 일본이 앞장서서
우리 황인종을 이끌어 줘야만.."
"다른 동생(아시아 국가)들도
백인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소위 '아시아 주의'가 만연하고 있었다.
1903년 8월 황성신문의 기사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권 p.11)
"러시아가 만주를 지배하면
조선이 위험하고, 청국도 분열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세력을 확장시켜
일본을 병탄할 것이므로,"
"동양의 황인종이
멸종되고 말 것이다."
"같은 황인종에 속하는
우리 동양의 삼국은,"
"마치 수레와 수레 축,
입술과 치아처럼,"
"서로 힘을 한데 모으고 단결하여
우리의 영토와 인종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1904년 3월의 기사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권 p.52)
"조선은 일본과 뜻을 합치고
힘을 모아야 한다."
"자주권을 잃지 않으려면
우리는 일본과 한 배를 타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인
조선을 이롭게 하고, 일본에게도 득이 된다."
그러나
중국, 베트남, 조선의 지식인들은
겉으로 드러난
서구화된 일본만을 보았을 뿐,
일본 제국주의의 속내를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 노상 떠들고 있던 게
국가주의 사상과 대외 침략인데.."
"그만큼 동아시아 국가들은
정보에 어두웠던 것."
때문에 이런 기대감은
러일 전쟁 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만주까지 침략하면서
급속히
사라지게 된다.
● 제국주의 속성과 풍전등화의 조선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물자를 강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 내놔! 은 내놔!"
"후추 내놔! 상아 내놔!"
"노예 내놔!"
자원 수탈과
노예 확보.
하지만 18세기 중엽 이후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제국주의는
그 판도가 질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동력 기관의 발명
생산력의 발달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의 등장
자본주의의 발달
이제 유럽인들의 고민은
물자를 빼앗아오는 게 아니라
생산된 물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그래서 19세기의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원료 공급지', '저임금의 노동 공급지',
'소비 시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 19세기 이후 제국주의의 메카니즘이다 : 일제의 식민 경영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자본주의의 발달은
식민지의 인식 자체를 바꿔놓게 되었고,
▲ 자본주의 시대의 최대 비극은, 수요부족 상태인 '공황'이다
자본주의가 성장할수록
식민지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져서
식민지 쟁탈전 역시
더욱 더 뜨겁게 달아오르게 된다.
일본 역시, 식민지를
'소비 시장'과 '자원의 공급처'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일방적인 수탈로 인식하지만,"
"수탈은 18세기의 고전적인 방식이었고
일본의 식민 경영 역시, 시장을 통한 교환의 방식이었던 것임."
어쨌든 러일전쟁 이후
일본 역시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열강의 일원으로 올라서게 되었고,
"1900년대 초 일본의 국력은 이미
세계 5~6위 수준에 있었음." ☞ 참고
그러자 일본을 보는
서구 열강들의 눈이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쟤들이 언제
저렇게 컸지?"
때문에 열강들은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경쟁하기보다
거래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데,
"음, 아무래도 코리아는
일본에 양보를 해야 될 듯."
그래서 1905년 미국은
일본과 비밀 협정을 체결하게 되고, (가쓰라-태프트 협정)
미국
"님 싸움 좀 하시던데.."
일본
"헤헤.."
미국
"우리가 필리핀을 먹을까 하는데
어떻소? 대신 님이 코리아를 가지시는게.."
일본
"아리가또!"
또 영국과는
재차 동맹을 맺게 된다. (2차 영일 동맹)
영국
"인도는 나 혼자 독차지하겠으니
좀 봐주셈."
영국
"대신 님은 코리아를 드시고.."
일본
"아리가또!"
그만큼
일본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일본
"하하하"
때문에 일본은
더 이상 눈치를 볼 게 없어져
당장 강압적인 조약을 통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을사조약, 1905)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조선의 외교권은
우리가 맡아서 하겠소!"
을사오적
"네, 그러셈!"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권 p.117)
T. 루즈벨트
"우리는 코리아를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루즈벨트
"난 일본이 코리아를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루즈벨트
"중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황인종이라 말한다면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
루즈벨트
"터키인들이 인종적으로
우리(백인종)와 가깝다지만.."
루즈벨트
"그들은 국제 사회에서 구제불능의 회원인 반면
일본인들은 바람직한 신입회원이다."
● 독점 자본주의·빈부격차의 심화 : 사회주의의 태동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의
시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으니,
공업의 발달이 부진했던
조선과 청은
일본 공업 제품의
거대한 소비 시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세계 인구가 16억 명이었는데,
일본이 공략한 시장의 규모가 세계 인구의 10%가 넘었음."
하지만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경기는 좋지 못했다. ☞ 참고
막대한 돈을 쓴 전쟁에서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던 탓이다.
때문에 전쟁 이후
도산하는 기업들이 많았고,
▲ 도시에는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그런 기업들을
미쓰이, 미쓰비시와 같은
거대 기업들이
헐값에 쓸어 담으면서
재벌들의 '독점화'와 '문어발식 경영'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부익부 빈익빈!"
한편 산업화 초기만 해도
섬유공업이 중심이어서
공장의 노동자들은
미숙련 여성 근로자들이 많았지만
중화학공업이 시작되고
기업의 규모와 기술력이 발전하면서
점차 남성 숙련노동자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임금과 처우는
여전히 열악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노동운동이 속출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에 영감을 얻은
사회주의 운동도 등장하게 된다.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라!"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라!"
하지만 이러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하던
메이지 정권의 국정 철학과는
전면 대치되는 것이었기에
정부는 철저히
탄압할 수밖에 없었고,
1910년 5월, 사회주의자들이
덴노 암살을 꾀했다는 이유로 체포하여
그중 12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한동안 사회주의는 커다란 침체를 맞게 된다.
● 근대 교육과 사상의 발전 : 국가주의, 탈아론
일본은 1872년부터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
"학제는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사범학교 3년, 대학교 4년으로 정하고,"
"소학교 6년은
의무교육 기간!"
그에 따라
소학교의 취학률이
▲ 소학교 취학률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164)
1905년 95%에 이르게 되고,
이때 남녀의 취학률도 거의 비슷해진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
소학교(국민학교) 취학률은
1954년 80%,
1958년 94%로
95% 수준까지 오르는데,
일본보다 약 55년 더 늦었다.
"여러 데이터를 통해 보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일본보다 약 반세기 정도 늦은 듯.."
"그래도 1인당 소득에 있어
지금은 거의 엇비슷해지고 있으니.."
어쨌든 근대화 작업을 통해
일본의 교육정책은 크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일본인들의 사고 수준도
빠르게 '서구화'될 수 있었다.
다만 시대에 따라
'대중 사상'의 성격이 조금씩 변하게 되는데,
메이지 초기(1870~80년대)만 해도
서구 문명은 무조건 우월하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서구화를 지향하려는
구화주의(毆化主義)가 대세였지만,
"서양 것이 무조건 최고야!"
189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하자,
구화주의 풍조는
서서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면서 슬슬
'국수주의'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서양도 우수하지만
탈아시아인 일본의 것도 똑같이 우수해!"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국가주의' 사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국가는 최고의 가치다!"
"약육강식, 국력 만능인 시대에
대일본주의 만세!"
"고로 일본의 파시즘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시작됐던 것!"
그런 시기에, 일본인들의 사상 계몽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있었으니,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의 저자,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인물이었다.
"당시 300만 부의 책을 팔아치우면서
일본 성인 4명 중 한 명꼴로 그의 책을 읽었다지."
"현재는 일본의
1만엔 권 지폐의 모델."
▲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급의 인물이다
그는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서구의 발전된 모습을 접하고
눈으로 확인한 서양의 발달상을
작접 책으로 엮어 일본인들에게 소개해 줬는데,
▲ 후쿠자와 유키치, 186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그가 쓴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탓에
메이지 시대 일본에는
'평등의식'이 크게 고취되고
'학구열' 풍조가
크게 휘몰아쳤다.
어떤 내용이었길래 그런가?
바로 이런 내용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후쿠자와
"서양이 발전한 이유는, 평등의식이 만연하고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서양에서는 능력이 있는 자가 부자가 될 수 있고
그 능력은 배움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다."
후쿠자와
"그러니 학문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국민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는 이웃나라의 개혁에도
관심이 많아,
김옥균을 통해
갑신정변을 지원했고
▲ 훗날 김옥균의 망명 생활도 도왔다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는 데
사재를 투자하기도 했다.
"읭?"
하지만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청불 전쟁에서 청이 패하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확 바꿔버렸다. (탈아론, 1884)
후쿠자와
"조선과 청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후쿠자와
"우리는 그들이 개화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후쿠자와
"이제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서
다른 서양의 열강들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후쿠자와
"이웃나라라고 해서
그들을 특별하게 대우할 필요가 없다."
후쿠자와
"오히려 나쁜 친구(조선, 중국)와 친하게 지내면
주위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후쿠자와
"그러니 일본은
나쁜 친구들과 하루빨리 절교를 해야한다."
"헐!"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대 가장 영향력이 높은 지식인,
후쿠자와의 지론이 그러했으니,
그의 이런 주장은
국민들 사이에 여과없이 수용되면서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자국의 아시아 침략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안겨 주게 된다.
"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했고
우리가 가장 우수해!"
"맞아! 우리는 탈아시아야!
후쿠자와 선생이 그리 말씀하셨다니깐!"
●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1910)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자,
이토 히로부미
"자,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다."
일본은 즉시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 이토 히로부미와 기모노를 입은 영친왕 (대한제국의 황태자)
하지만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1907년 유럽으로
특사를 파견하게 되는데,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
"세계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도록 하게!"
이준
"넵"
이 일로 인해
일본 여론은 크게 악화되어
한국을 병합하자는 소리가
고조되게 된다.
"조선이 딴짓하기 전에
얼른 일본 영토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정작 병합에는 소극적이었다.
이토
"아냐, 아직 한일 병합은 일러!"
조선을 정식으로
식민지화해 병합하면
미국, 영국 등의 간섭과
국제적인 마찰이 예상되는 만큼
이토는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 이토 히로부미는 1984년까지 1천엔짜리 지폐 모델이었다
이토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두고
실질적으로 지배하면 됐지,"
이토
"굳이 식민지화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더 나아질 게 뭐임?"
이토
"언젠가는 병합해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냐.."
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는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고,
안중근
"국모를 시해하고
황제를 폐위하고,"
안중근
"동양평화를 어지럽히는
천인공노할 이토는 내 총을 받아랏!"
병합에 소극적이던
이토가 사라지니
오히려 일본은 거칠 것 없이
병합을 추진해
"더 이상 망설일 것 없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한일 병합 당시
일본의 언론들은 의외로 덤덤했다.
한 언론의 논설이다.
"조선인들은 독립심이 결여되어
수천 년간 중국에 복속되어 살았다."
"조선은 그렇게
줏대 없는 역사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병합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일본 제국은
1300만 명의 국민이 한꺼번에 늘어나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조선으로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30일
아사히 신문의 광고다.
"조선에 가라!
조선은 이미 외국이 아니다."
"개간을 기다리는 옥토와
미지의 천연자원, 도처에 묻혀있는 국부는.."
"뜻있는 일본인 제군들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500만 명으로 예상하던 이주민은
30년이 지나도록 80만 명에 불과했고
거꾸로 조선인들은
국외로 220만 명이 이출을 했다.
▲ 원산의 일본인 마을 : 기찻길 넘어 조선인 마을이 보인다
식민지 조선이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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