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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근대사 ② : 조선 정벌 논쟁 + 근대국가로 성장한 일본 '일본의 산업혁명'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551226792




정한론 : 조선을 정복하자

● 근대 일본은 언제부터 조선 침략을 생각했을까?

일본이 해외 식민지를 
갖고자 했던 것은

놀랍게도 미국에 강제 개항을 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그것은 강자를 인정하고 
모방하려고 하는, 

일본인 특유의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 정신에 나왔을는지도 모른다.
 
▲ 6세기 후반 쇼토쿠 태자가 주창했던 '이이토코토리'

강제 개항과 관련해
존왕파와 막부파로 나눠 한창 싸우던 때

당대의 지식인으로 
이토 히로부미, 기도 다카요시 등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이렇게 말했다. (1855)

 요시다 쇼인
"지금 일본 사람들끼리 
존왕파, 막부파로 나눠 싸우면 안 된다."

 요시다 
"그보다 우리도
빨리 국력을 길러야만 한다."

 요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조선과 만주를 침략하여,"

 요시다
"서양인들에게 잃은 
이익을 만회해야만 한다."

그리고 존왕파가 막부를 물리치고, 
왕정을 복고하던 시기에  

요시다의 제자
기도 다카요시는 이렇게 말했다. (1867)

 기도 다카요시
"비록 우리(존왕파)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막부파의 불만이 걱정이다."

 기도
"그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조선을 침략해야만 한다."

사쓰마의 핵심 인물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도 이렇게 말했다.

 이고 다카모리
"온 세계 열강이 식민지를 건설하려 
혈안이 되어 있는 이때,"

 이고
"우리도 서둘러 그 대열에 끼지 않으면
메뚜기 떼 휩쓸고 간 빈 밭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이고
"그러니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조선이라도 일단 확보해 두어야 한다."

참고로 기도와 사이고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중추적 인물들이었다.

"즉 당시 일본의 권력 중심의 인물들부터
조선의 침략을 부국강병의 필수 코스로 봤었다는 사실!"


● '정한론'의 대두

1868년 막부를 멸망시키고 
일본의 정권을 거머쥔 메이지 정부는

야심찬
근대화 작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무사들은 
얻은 게 거의 없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폐지하여
무사의 특권이 사라지게 되었고,

'폐도령'으로 
칼을 차고 다닐 수도 없게 됐고,
▲ 칼을 차다 걸린 무사

'징병제'를 실행하여
무사를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할 필요도 없어져

무사들은 졸지에
경제적 기반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 무사들 중에 장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무사 특유의 '건방진 태도' 때문에 대부분 실패했다

이는 300년 전인,
16세기 후반 일본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와 
너무도 흡사했다.
▲ 일본의 통일로 '사무직 관리'가 되어버린 무사들

그때도 일본은 
혼란한 정국을 통일한 후

야심찬 개혁을 
실시하게 되지만,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감지되던 시점이었다.

 무사
"전쟁도 끝났는데
이제 우리들은 뭐 하지?"

그래서 히데요시는
무사들에게

땅과 전리품을 챙겨주기 위해
조선 침략을 계획했던 것이다.
▲ 임진왜란

그리고 300년 뒤에도 
일본이 찾았던 해법은 같았다.

무사 계급의 
불만과 맞물려

무사들의 관심을
밖으로 끌어낼 필요가 절실했고,

이는 조선 침략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1868년 10월

일본은 메이지 정부 수립 소식을 
조선 정부에 전하고자 사신을 파견하게 된다.

이때 기도 다카요시는 
조선의 반응을 테스트해보고자 했다.

덴노의 국서를 보내면서
의도적으로 조선의 국왕을 한 단계 낮춰

황제가 제후에게 명령한다는 
'봉칙'이라는 형식으로 국서를 보낸 것이다.
 

 기도 
"지금까지 조선 국왕은 
쇼군과 대등하게 교류하지 않았는가."

 기도 
"그러니 조선 국왕은 
덴노보다 아래 있는 게 당연함"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이 보낸 국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이런, 오만방자한 놈들 같으니라고!"

 흥선대원군
"일본이 대체 언제부터 
우리의 상전이었단 말인가!"

소식을 들은 기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도 
"역시 조선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 조선 침략에 앞선 워밍업 : 류큐 정복과 대만 침공

메이지 정부는
조선 침략에 앞서

쉬운 먹잇감인
대만과 류큐(오키나와)를 노렸다.

 오쿠보 
"조선을 치게 되면
조선과 국경을 맞댄 러시아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오쿠보 
"그보다 먼저
류큐와 대만을 점령해서,"

 오쿠보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게 좋겠음."

하지만 문제는
청나라였다.

류큐 왕국은 17세기 초부터 
일본의 속국이기는 했지만,
▲ 류큐 왕국

그와 동시에
청나라의 조공국이었고

"쉽게 말해 류큐는
상전을 둘씩이나 가지고 있던 것."

대만 역시 
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에 대해 침략은
청나라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조선·대만·류큐
모두 청나라의 속국임."

"청나라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임."

그리고 
기회를 엿보던 중,

1872년 류큐의 어민이
대만에 상륙했다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다짜고짜

류큐 왕국을 접수해버려
류큐 번(이후 오키나와 현)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이 사건을 
대만 침략의 명분으로 삼아

1874년 대만 침략에 나섰다.
근대 일본의 첫 해외 파병이었다.

 일본
"대만에서 우리 어민이 살해됐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때 청나라가
의외로 저자세로 나오며

어민의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일본의 대만 침략은
후일로 미뤄지게 된다.

 청나라
"정말 미안하게 됐다해."

 일본
"..."


● 정한론 논쟁 (1873)

사쓰마 출신의 사이고와 오쿠보는 
어릴 적부터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가
전통적인 무사 기질의 무인이었다면

오쿠보 도시미치는 
개화되고 합리적인 관료형으로

두 사람은 
혁명의 동지였으나,

결국은 피로 결말을 지어야 될 
숙명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특히 정한론을 두고 두 사람은
정면으로 대립했다.

전통 무사들의 대변자이기도 한 
사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이고 (급진파)
"무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언제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름."

 사이고
"그러니 무사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조선을 쳐야함!"

하지만 
온건파들의 생각은 달랐다.
▲ 정한론 논쟁

그들 대부분은
이와쿠라의 사절단 출신들로

서구 여러 국가를 
직접 목격하고 온 사람들이어서,

혹시나 예전 무사 계급들이 
조선 침략 전쟁으로 사기를 얻어 
 
다시 세력을 회복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오쿠보 (온건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

 오쿠보 
"우리가 유럽에 가서 배운 게 많거든.
우리도 곧 근대적 군대를 갖게 될 것임."

하지만 속 마음은
이러했다.

 오쿠보 
"조선을 침략하더라도 
무사가 아닌, 근대화된 군대로 하겠음."

 오쿠보 
"만약 무사들이 예전 지위를 회복한다면 
근대화에 악영향을 줄 뿐이라고."
 
 
▲ 조선정복을 두고 급진파와 온건파간의 대립

이럴 때 캐스트 보트는 
덴노가 쥐고 있었다.

"과연?"

그런데 덴노는 
온건파의 손을 들어줬으니,

졸지에 급진파의 사이고는
정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사이고
"아놔.."

 사이고
"두고 보자, 오쿠보!"

 오쿠보 
"쳇! 두고 보자는 놈
하나도 안 무섭더라."



반정부 운동과 탄압 : 사무라이들의 최후 발악

● 강화도 조약 (1876)

이제 새 정부는 오쿠보를 주축으로 한
온건파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들은 서둘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생각보다는

먼저 개항을 통해
경제적인 실리부터 찾고자 했다.

 오쿠보 
"구시대 무사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

 오쿠보 
"지금 조선을 무리하게 점령하면
열강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오쿠보 
"당장 조선과 국경을 맞댄
러시아부터 달려들 텐데."

 오쿠보 
"그러니 먼저 통상 교역부터 시작해서
발판을 다져나가는 게 순리임."

그리하여 
1875년 9월.
 
일본은 '운요호'라는 군함을 
조선의 해안으로 띄워서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강화도를 염탐하게 했다.

 이노우에 함장
"이곳이 조선의 아킬레스건!"

▲ 조선시대에 한강 하구를 장악하면, 
전라·경상·충청·황해도에서 오는 모든 물자를 끊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보트를 내려
 

상륙을 시도하려다 
발각되어

조선군과 
한바탕 포격전을 벌이고 말았고

"쾅쾅쾅!"

덕분에 강화도의 해안 진지(초지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더니

영종도로 장소를 옮겨
교전을 벌이며
 

영종도에서만 
조선인 35명을 살상하고 16명에게 부상을 입히게 된다.

또 대포를 전리품으로
빼앗아 갔다.
하지만 이때 일본군은
겨우 2명이 부상을 당한 정도였다.

그것도 상륙 도중
발목을 삔 부상자가 2명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근대식 화포로 무장했기 때문에
조선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음."

하지만 일본은
적반하장 격으로 나왔다.

 이노우에 (운요호 함장)
"조선 측에서 먼저 발포해서
우리도 응사했던 것이다."

 이노우에
"우리는 땔감과 물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륙하려던 것인데.."

 이노우에
"이웃 나라 배에 무작정 대포를 쏘아대다니,
조선 병사들은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더니 6개월 뒤, 
일본은 함대 6척을 거느리고 

다시 강화도 해상에 나타나
대포로 위협을 했고,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져라!"

힘없는 조선은 일본의 요구대로 
통상 조약에 임해야 했다.
 
▲ 회담장

"에겅.."

조약의 내용은 
이러했다. 
 

"조선 땅에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

"조선 정부는 일본 물품에 
절대로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

"조선 땅에서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지난 20년 전 일본이
서양 열강으로부터 강요받았던 

'불평등 조약'의 내용을
고스란히 돌려준 것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제대로 분풀이 했네."
 
그리고 '강화도조약'은
곧 자원의 수탈로 이어지게 되었다.
 
후진국일수록 화폐의 가치가 
낮게 취급되기 마련인지라
 
조선의 화폐(상평통보) 가치는 
일본보다 훨씬 낮게 평가되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헐값으로
조선에서 원자재들을 구입할 수 있어서

대량으로 
쌀이 반출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쌀 한 가마니에 6냥,
일본에서는 4엔 정도였는데,"

"1엔을 3냥 3전 3푼으로 
교환하기로 했기 때문에.."

"일본 상인은 조선에서 4엔을 가지고
쌀 2가마니를 사갈 수 있었음."

때문에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는 쌀 부족과 쌀값 폭등으로

임오군란(1882)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아!"

한편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의 이면에는

영국과 미국의 
지지가 있었다.

"조선을 개항시키려면
군대도 파견해야하고, 이거 좀 귀찮은데.."

"누군가 먼저 나서서
조선을 개항시켜주면 좋으련만.."

따라서 일본은 
서구 열강이 바라왔던

조선의 개국을 실현한 
대리인의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 세이난 전쟁 (1877)

사이고가 물러난 이후
메이지 정부는

온건파 관료집단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이른바 오쿠보의 독재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오쿠보 
"우리는 구미 열강의 문물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던 사람들임."

 오쿠보 
"두고 보라고! 미친 듯이 따라 해서
일본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테니!"

반면에 권력에서 밀려난 무사들은
오쿠보를 타도하겠다며 칼을 갈게 된다.

"사민평등을 철폐하라!
무사들만 피해를 볼 수는 없다!"

"폐도령에 반대한다! 
칼은 무사의 상징이다!"

"징병제에 반대한다!
전쟁은 무사의 특권이다!"

이때 
모든 무사들의 눈은

정권을 빼앗기고
사쓰마에 낙향해 내려가 있던,

그들의 지도자 격인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쏠렸으니,

"사이고 님, 그냥 앉아만 계실 겁니까?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결국 사이고는
타도 오쿠보의 기치를 내걸고 거병을 하게 되고,

 사이고
"개혁 공신이자 동지인 우리를
찬밥 신세로 만든 것이 바로 오쿠보다!"

 사이고
"좋다! 무력으로 타도할 수밖에!"

그러자 사쓰마를 근거지로한 무사들의 폭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게 된다.

 
"오쿠보 정권을 타도하자!"

 
"독재 정부 타도!"

때문에 오쿠보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쿠보 
"사쓰마가 비록 내 고향이기는 하나
이런 식의 반란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오쿠보 
"그래! 언젠가 한 번은 맞붙을 일.."

 오쿠보 
"이번 기회에 
구시대 무사들을 뿌리째 뽑아주마!"

그리하여 1877년에 규슈섬에서 
'전쟁이 발발했으니, 
▲ 세이난 전쟁

이것이 무사들의 최후의 저항이라는
'세이난 전쟁'이었다.
 
 
 
 
▲ 세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하지만 전통 무사의 무력은
기관총과 신식 대포로 무장한

정부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드르르르르르.."

지도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패전 후 할복자살로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아! 이렇게 큰 별이 지는구나!"

그러나 
이듬해인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도 
무장 괴한들에게 암살되었으니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유신 3걸 중, 두 명의 정객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일본은 새로운 시대로 역사의 장을 달리하게 된다.
▲ 유신 3걸 : 메이지 유신을 이끌던 3인방


● 자유 민권 운동 (1875~1885)

세이난 전쟁으로
反정부 여론이 무력에 의해 짓밟히자

이후 정부의 독재에 대한 저항은
무력 대신, 

'언론'과 '정치 활동'을 통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바뀌게 된다.


"이른바 자유민권운동"

'민권파'로 불리는 
반정부 세력들은 

정부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면서
'입헌체제'의 수립을 요구했고,

 민권파
"무늬만 민주주의 말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라!"

이들의 주장은
대중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었기에

지지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의회정치든, 조선 정벌이든,

무엇이든 빠르게 진척되기를 바라는 
조급함을 가지고 있었다.

민권파
"이렇게 굼떠서 
언제 근대화를 이룩하겠단 말인가!"

민권파
"시대의 주류에 맞춰나가려면
하루빨리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민권운동'에  
메이지 정부의 입장은 양면적이었다.

서양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스스로 서양의 입헌체제를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앞으로 점진적으로 
입헌제로 전환하겠고.."

"늦어도 1890년도까지
국회도 만들고 헌법도 제정하겠음."

하지만 자유민권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탄압책을 취하여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한사코 막고자 했다.
▲ 자유민권 운동가의 연설을 저지하는 경찰과 항의하는 청중 

"누가 개혁을 하지 않겠데?"
 
"하지만 민권파 세력이 주장하는 개혁들은
너무도 급하고 과격하다고!"

때문에 언론을 탄압하고 (1875)

"신문지조례 제정!"

집회·결사를 제한하고 (1880)

"집회조례 제정!"

▲ 신문조례를 풍자한 만화

더욱 강력한 법으로
집회·언론 통제를 강화하여, (1882)

자유민권파 운동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여 탄압했기 때문에

"이것들이!"

그 결과 자유민권운동은
1884년을 고비로 급격히 와해되고 만다.


● 갑신정변과 일본이 계획한 또 다른 조선의 쿠데타 (1885)
 
19세기 중엽, 일본의 개항으로
일본의 지식인들이 눈을 떴던 것처럼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항으로
조선의 지식인들도 눈을 뜨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옥균이었고
 
그는 일본이 이룬 근대화 성과에 감탄하며
이를 조선의 개혁 모델로 삼고자 했다.
 
 김옥균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그만 청산하고,"
 
 김옥균 
"조선의 독립 개화를 위해
새롭게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조선의 정권을 쥐고 있던 
민씨 정권은 

중국과의 전통적인 사대외교만을 
중시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민비
"서양이나 일본 모두 
음흉한 제국주의자들임."

 민비
"그나마 청나라는 조선의 영토를 
빼앗으려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민비
"이럴 때 청나라의 도움이라도 받아야지
누가 우릴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겠음?"
 
때문에 19세기 후반
조선의 정국은

개화파(친일)와 민씨정권(친청) 간의
격렬한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1884년 
청불전쟁이 터져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병사들이 절반가량 철수하게 되자
 
▲ 청불전쟁 : 조공국이던 베트남을 돕겠다고 나섰던 청나라

개화파 세력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쿠데타를 감행하여,

민씨정권을
축출하게 된다.

그들의 거사는
순간 성공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급한 수습과

믿었던 일본의 
비협조적인 자세로,

개화파들의 개혁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이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환영했지만,"

"자주적 근대화까지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임."

한편 갑신정변이 실패했을 무렵,
일본에서도 반정부 세력(민권파)이 

자유민권운동의 실패로
커다란 궁지에 몰리게 된다.

민권파
"아놔.."

그러자 이들은 
곧 엉뚱한 생각을 하게된다.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자극을 줘야 함."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조선에서 민씨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해봐!"
 
 
"그러면 조선에서도 
민권운동이 승리했는데.."

 
"일본에서는 왜 그렇지 못하냐면서
여기저기서 각성을 하고 나설게 아닌가!"

 
"오! 기막힌 아이디어일세."

 
그리하여 급진파(민권파) 세력들은
폭탄 200발을 만들 폭약을 준비하고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들통 나고 말았고
끝내 실패해 버리고 만다.

당시 쿠데타를 주동했던 
오이 켄타로가 법정에서 한 말이다.

 오이 켄타로
"지금 일본인들은 너무도 고지식해서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사회의 진보를 바랄 수 없다."
 
 오이 켄타로
"사회 변화라는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대외침략을 일으키는 것이 뭐 그리 잘못인가?" 
 
 오이 켄타로
"이것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진정한 애국심을 일깨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그러면서 
이런 변명도 곁들였다.
 
 오야 마사오
"조선이라는 나라는 
전제정치로 고생하고 있어서.."
 
 오야 마사오
"우리는 사해동포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그들을 돕고자 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시작 : 입헌군주제의 완성과 산업혁명 달성

● 메이지 헌법의 제정 (1889)

메이지 정부는 1881년 
국회 개설의 방침을 밝히면서

입헌제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니,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1882년 '헌법 조사단'을 이끌고
18개월에 걸쳐 유럽 주요 나라를 방문하게 된다.

그 결과 일본은
독일 헌법을 전면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은 왜 자꾸
독일을 따라 하는 거임?"

"영국과 프랑스는 
앞서가는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후발국가인 일본이 따라 하기에는 
너무 벅찼음."

"반면에 독일은 신생국가이면서도
폭발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모델로 삼기에 
아주 좋았다능."

다만 모방에 있어서는
일본 특유의

'이이토코토리' 정신이
빛을 발했다.

 이토 히로부미
"좋은 것만 취사발췌해서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거임."

 이토 히로부미
"그렇게 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메이지헌법'이 
1889년 덴노에 의해 발표되게 된다.
▲ 메이지헌법(대일본제국헌법) 반포식

다만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헌법이기에

개인의 권리 보장보다는
'국가권력의 강화'에만 충실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메이지 헌법(대일본 제국헌법)에서는 
'국민의 권리 의무'를 규정하고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법률의 범위 내'
혹은 '법률이 정한 경우를 제외한'

이라는 조건에 의해 
제한되었다.

"이제부터 국민들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받게 됨."

"와!"

"끝까지 들어! 법률에 의해 제한되지 않을 때에 
한해서 가능하다는 말임."

"에라이.."

반면 데노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서

덴노의 명령으로
'선전포고'와 '조약 체결'이 가능했고

국회도 해산할 수 있고
재판의 결과도 뒤바꿀 수 있었고,

군대도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도록 했다.

"헌법 제 1조,
대일본 제국의 주권은 덴노에게 있으며.."

"덴노는 일본의 통치권, 군 통수권 등 
절대 권한을 갖는다!"

심지어 헌법에는
덴노와 황후에게 

해를 가하거나
이들을 모독했을 경우

대역죄와 불경죄를 적용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헐!"

또 '충효'라는 유교 도덕을 강조한
'교육칙어'를 공포하여,
▲ 교육 칙어

전 국민에게
암송하도록 하여

덴노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강조했고,

신도(신토)를 국가종교로 삼아
덴노의 권위를 신격화하기까지 했으니,

덕분에 불교는
난데없이 배척되고 탄압을 받게 된다.

"일본인들이라면 신도를 믿어야지
불교 따위에 심취해서는 안 됨!"
 
그 결과 메이지 헌법에 의해 수립된 
근대 일본의 국가체제는 

덴노 중심의 전제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건, 
덴노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개혁 세력들(사쓰마와 조슈가 주축이 된)의 입지가 
확고해지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 메이지 정부의 내각 관료들은 대부분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었다 

"어차피 정치는
덴노가 우리들에게 모두 위임하신 일!"

"누가 감히 우리가 하는 일에
태클을 걸 수 있겠어?"

"하하하"


● 근대 천황제 수립 : 입헌군주제의 시작 (1890)

정부의 형태는 
언뜻 봐서는 '삼권분립'을 갖춘 듯했지만,

"내각(정부), 의회(국회), 재판소가
모두 독립적으로 있었다능."

각 기관은 기본적으로 모두
덴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장관의 임면권이 덴노에게 있었고,
사법권도 덴노에게 위임받아 행사하는 수준이었음."

한편, 국회의원(중의원)은 
국민의 선거로 뽑았으나

15엔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만 30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고,

국회의원 중 상당수(귀족원)
덴노가 스스로 뽑을 수 있었다.

"마치 유신정권 때
국회의원의 1/3을 박정희가 뽑았던 것처럼.."

그럼에도 메이지 헌법의 제정은
나름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제한적이라고는 하지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의 기본권을

헌법으로 보장한 경우는
아시아 어느 나라에도 하지 못 했던 일이었다.
▲ 경찰이 감시하는 상황에서의 국회의원 후보자 연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 분립의 모양새도 갖추게 되어

의회(제국 의회)는 
법률 제정을 전담하면서

예산을 심의하고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덴노는 권한을 위임하면서 
거의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법권의 독립도
실질적으로 지켜졌다.
▲ 메이지 시대의 법정

또 선거에 있어서도
공정성이 지켜졌기 때문에,

헌법 제정 직후에 있었던
1890년 총선거에서

야당이 여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기까지 했었다.

"여당 79석, 야당 171석, 무소속 45석"

물론 여소야대 정국으로
일본의 의회 정치는

그 출발부터 정부와 의회의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 메이지시대 의회(제국의회)

"하지만 일본의 국익이 걸린 문제엔
언제나 똘똘 뭉쳤던 일본의 여야"

그렇게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서는 최초로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우리가 아시아 최초의 
입헌 군주국가!"

정부의 권력 행사에 대한
법적 테두리를 마련하여

근대 국가로서의 
제도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 산업화의 첫걸음 (1873~1879)

일본 사회의 근대화는
경제 부문에서도 급속히 진행되는데,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을 
당시만 해도 (1868)

농업 중심의 
전통적 경제 구조를 지녔던 일본은,

1870년부터 실시된 '식산흥업 정책'을 통해
근대산업을 일으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 개항장 풍경 (고베항, 1871년) ☞ 참고

"식산흥업이란, 
생산을 늘려 산업을 일으킨다는 뜻."

그래서 철도를 깔고 군수공장을 세우고
광산 개발에 주력하게 된다.
▲ 철도의 개통 (1872년)

"메이지 정부는 출발부터
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번에 산재한 군수 공장부터
관영화하기 시작했음."

▲ 히젠번의 대포 제조소

하지만 중화학공업 위주의 개발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아놔, 공장도 만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무슨 처음부터 중화학공업을 한다고 그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몰라?"

1873년 구미 12개국을 순방했던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오면서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

 오쿠보 
"지금 유럽에서는 
아시아의 실크가 인기야."

 오쿠보 
"그걸 우리가 만들어 팔아야만 큰 돈을 벌 수 있고, 
그래야만 산업화의 발판을 이룰 수 있겠다능."

그리하여 오쿠보가 
가장 먼저 만들었던 것이 방적 공장이었다.

기계를 프랑스에서 사오고
설비기사도 프랑스에서 데려 왔었다.

하지만 막상 차려놓고 보니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왜?"
 
"당시 일본은 요란한 굉음을 울리는 공장의 기계가
사람의 영혼을 빼앗는 요물로 생각했거든."

그래서 정부는 
국민들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정부 고관들의 딸들을 
공장의 여공으로 취직시키기까지 했고,

"헐! 고관의 딸이 공순이라니?"

덕분에 공장의 여공은
서양식 기계를 다룰 줄 아는 '개화 여성'으로 인식되어

이후 인력 수급에
카다란 일조를 하게 되었고
 

일본의 방적물은, 최초로 국제 시장에서 
경쟁을 갖춘 일본의 상품으로 성장한다.

다만 일본의 개혁은
정부 주도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많은 돈'을 필요로 했고
또 '일할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산업화 초기 일본은, 공장도 정부가 만들어야 하고
노동자들도 정부가 직접 끌어들여야 했던 것임."

그런데 이때
일본의 새로운 '조세 정책'이 

재정수입 증대와
공장으로의 인력 수급에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어떻게 말인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곡물 수확량에 비례해서 
거둬들였던 세금 정책을

땅값에 비례해서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꾸게 된다. 

"앞으로 세금은 땅값의 3%임."

그런데 이때 정부는 
해마다 세금을 올렸다.

여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세금이 높아지면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지만,"

"자연스레
농민들이 몰락하지."
 
"그런데 농촌에서 농민이 몰락해야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올꺼 아님?"
 
"아! 그렇구나."

그리고 그런 예상은 
크게 적중하여
 
영세 농민들은 
세금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지주에게 땅을 처분하여
소작농이 되거나, 실업자가 되어
▲ 메이지시대 농민들

곧 '값싼' 임금의 노동자로 활용될
준비를 하게 된다.


● 일본의 산업혁명 (1880년대)

일본의 경제 개혁은
세이난 전쟁 이후

구시대 무사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관료 주도의 정권이 본격화되자,
비로소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비단의 원료라 할 수 있는 '생사'였는데,
▲ 군마현의 제사공장

누에고치에 뽑은 섬유 가닥을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손으로만 하는 
단순 노동인지라

애써 임금을 많이 줘야 하는 
남성 노동자를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사 공장의 노동자들은
10대~20대 여성들이 주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모내기가 시작되는 5월에

고향에 갔다가 
모내기가 끝나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생사가 1910년대까지 
일본 전체 수출액의 1/3에 차지하고 있었음."

"고로 일본의 산업혁명은
여성이 일궈낸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임."

하지만 공장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해야 했고
휴일은 한 달에 이틀뿐이었다.
 
▲ 메이지시대 여공들의 생활

실내 작업도 
무척이나 위험하고 힘들었는데,

누에고치를 찔 때 생기는 
증기 때문에

여공 중 상당수가 폐결핵으로 숨졌고
증기에 중독된 이들도 허다했다.

여성들이 주로 
생사 공장의 여공으로 일한 반면,

남성들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는 광부가 됐다.
▲ 광부들은 안전모도 작업복도 없이 일했다.

광부들 또한 
여공과 마찬가지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한 
날품팔이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탄광의 작업 환경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수백 m까지 파고 들어간 갱도에는
뜨거운 열과 석탄가루로 가득해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사망·부상 사고가 잇달았다.

하지만 광부들은 
자신이 받은 임금을 고향에 보내야

가족들이 소작료를 말리지 않고 
납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도 
견뎌내야만 했었다.

"이런 걸 보면 대부분 나라의 근대화는 
노동자의 피와 눈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듯."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1880년대 후반부터
메이지 정부는,

정부가 육성한 공장들을
하나씩 민간에 팔아넘길 수가 있었다.
▲ 민간에게 불하된 방적 공장



이는 독일의 성장 방식을
따라 한 것이기도 했다.

"시작은 정부가 하지만, 
성장은 민간기업이 하도록 맡기는 게 바람직함."
 
그리고 이때
싼값에 공장을 인수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웅번의 도래 시기부터
사쓰마, 조슈 등을 후원해줬던

미쓰이, 미쓰비시와 같은
거상들의 몫이었다.
 

"하하하"

대신 정부는 특혜를 베푼 만큼
이들 기업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후원받을 수 있게 된다.

"결국 민간기업을 성장시키는 데에는
'정경유착'이라는 속셈도 깔렸던 것!"
 
이때 공장을 인수한 
미쓰이, 미쓰비시 등은 

1930년대부터 정부의 요구에 맞춰 
군수품을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회사로 전환하더니

전후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굴지의 재벌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개항 이후
30년이 지난, 1880년대에야 

일본은 비로소
산업혁명을 추진할 수 있었고, 

산업의 힘은
곧 '군사력'으로 표출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이웃한 청나라와 조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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