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List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근대사 ① : 메이지 유신 + 일본은 어떻게 빠르게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543369117



강제 개항과 웅번의 저항

● 페리의 내항과 개국 (1854)

18세기 후반 산업 혁명을 이룩한 영국은
인도를 점령하고

1842년엔 청나라와의 
아편 전쟁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해 놓은 상황이었다.

미국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서부 개척 붐이 일어나
서쪽으로 계속 진출했고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일본의 개국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터였다.

 미국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무역을 위한 중간 기점이 필요해."

 미국
"그래야 배의 수리와
선원들의 휴식을 보장할 수 있지."

이런 이유로 미국은 일본에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던 터였다.
▲ 1837년 에도 만에서 개항을 요구했던 모리슨 

그렇게 영국, 미국 등의 
아시아 침략 야심이 노골화되던 때에

일본과 유일하게 국교를 맺고 있던
네덜란드 국왕은

1844년 일본에 친서를 보내
개국을 권유하기도 했다.

"님, 아편전쟁 소식 들으셨죠?"

"쇄국을 계속하면 큰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서 개국을 하세요."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거부했다.

막부
"무슨 소리냐?
몽골의 침략도 물리친 우리다."

막부
"배 몇 척 끌고 온 
소수 군대에게 당할 우리가 아님!"

그러나 1853년, 미군함을 끌고 온
페리 제독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일본에 관한 많은 연구를 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페리
"점잖게 통상을 요구해선
일본의 문을 열 수 없음!"

 페리
"대포를 앞세워
무력시위를 할 수밖에!"

그리하여 일본의 에도만 어귀에 진출해서 
다짜고짜 개항을 요구했으니,
▲ 페리의 항로

막부에 이런 내용의
서신을 전달했다.

"쇼군은 보시오!
여기 미국 대통령의 친서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통상, 석탄과 식료품의 공급, 난파선 보호, 이렇게요."

"만약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쑥대밭으로 만들 테니 알아서 하십쇼!"

막부
"뜨아!"

사실 막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쇼군 (이에요시)
"드디어 올 것이 왔나벼..
이를 어쩜 좋단 말인가!"

"거대한 청나라가 한 줌 서양 군대에
박살 난 것을 보더라도," 

"저자들의 무력을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될 겁니다!"

 쇼군
"흠.."

 쇼군
"그럼, 가서 전하라. 중요한 시안이니, 
내년 봄까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리하여 페리의 군함은 
일단 순순히 돌아가게 된다.

 페리
"그래, 내년에 다시 오마!"

그리고 이듬해 1854년 1월,
페리는 일곱 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다시 나타났다.

"헐! 또 왔다. 이번엔 일곱 척!"

 페리
"이번에도 회답을 피하고 
개국을 거부하면 전쟁이라능!"

 쇼군 (이에사다)
"저.. 전쟁!"

결국 막부는
미국의 요청을 들어

그해 3월,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의 내용은 
그야말로 '불평등'했다.

 페리
"여러 항구를 
우리에게 개항할 것."

 페리
"표류 선원이 발생하면, 
구조 및 물자 보급을 할 것"

 페리
"미국인이 범죄를 저질러도, 
재판은 우리 영사관이 하겠음."

 페리
"일본으로 수출되는 물품에 대한 관세율은 
우리가 정하겠음."

▲ 개항 직후의 요코하마 개항장

이후 일본이 미국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그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열강들이 너도나도 밀고 들어왔으니,

막부는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비슷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 인세이의 대옥 (1858) : 막부 vs 웅번

하지만 불평등 조약은 
파란을 몰고 왔고,

일본은 개국파와 양이파(외국 배척)로 나눠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양이파
"배 몇 척에 맥없이 
나라 문을 열다니..!"

 양이파
"막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개국파
"세상이 달라졌는데
쇄국만 고집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개국파
"우리도 개국을 해야만
달라질 수 있음."

 양이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개국을 하자는 건가?"

그러던 중, 1856년
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으로

다시 중국은 
커다란 굴욕을 당하게 되고
▲ 베이징으로 입성하는 영국군

영국
"무역 확대해!"

 중국
"에겅.."

▲ 텐진조약 (1858)

미국은 그걸 빌미로, 1858년
미·일 화친 조약이 있은 지 4년 만에

다시 새로운 조약을 
강요하게 된다. (미일수호 통상조약)

 미국
"항구 몇 개 개방해서는 안 됨!"

 미국
"일본의 주요 항구를 
추가적으로 개방하라능!"

그렇게 또다시 조약에 조인하자,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쇼군도 아닌,
막부의 원로(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적으로
통상에 조인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무조건 다 수용하다니!"

"일본의 자존심은 사라졌는가!"

"게다가 일개 다이로 주제에
멋대로 국사를 처리해?"

불만의 목소리는
사쓰마, 조슈 등,

그동안 힘을 비축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 서남 지방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일명 삿초도비!" 

"혹은 웅번(雄蕃 : 웅대한 번국)이라고 함."

이들은 무능한 막부 때문에
일본이 열강에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했고,


막부에게 빼앗긴 정권을 
덴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존왕론'을 내세웠기 때문에

흔히 '존왕양이파'라고
부른다.
▲ 존왕양이를 주장했던 웅번의 하급무사들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말"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막부 측과는 전면 배치되었기 때문에

 막부 
"이것들이, 세상 물정도 모르고!"

 막부 
"지금 청나라 꼴이 어떤지 몰라?"

막부와 웅번들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아직 웅번은 
막부를 이겨낼 힘을 축적하지 못했으니,

 이이 나오스케 
"감히 막부와 쇼군에게 
도전장을 던졌겠다!"

 이이 나오스케 
"덴노에게 권력을 돌려주자며
막부를 무시하는 자,"

 이이 나오스케 
"개국을 반대하며 양이를 주장하는 자들은
모조리 없애버려!"

1858년 대대적으로 휘몰아친 
피바람으로

사쓰마, 조슈의 존왕양이파
100여 명이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인세이의 대옥)
 

 웅번
"아..!"

하지만 그것은 막부가 발휘했던 
마지막 위세였고,

얼마 후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
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

이이 나오스케는
웅번 출신의 무사들에게

난도질을 당하며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사쿠라다몬 사건)
 


 
● 사쓰에이 전쟁 (1862) : 호되게 당한 사쓰마

막부에선 쇼군 다음의
최고 권력자인 다이로가

대낮에 암살된 사건으로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쇼군 (이에사다)
"아놔.."

허약해진 막부,
권위 없는 쇼군의 정권은

상업 자본을 등에 업고
새롭게 등장한 웅번에 의해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된 것이다.

 
"웅번의 중심은
사쓰마와 조슈."

이들 번들은 강제 개국 전후로
자체 개혁을 통해 

하급 무사 출신의 
젊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고

막대한 상업 자본의 바탕 위에
군사를 증강시켜

막부도 함부로 손댈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다만 사쓰마와 조슈는
서로 성격이 달랐으니,

사쓰마가 온건파라면
조슈는 강경파였다.

 사쓰마
"모든 것은 
순리대로 차근차근.."

 조슈
"무슨 소리?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때문에 사쓰마와 조슈는
'존왕양이'라는 공통 목표가 있었음에도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는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사쓰마
"쳇!"

 조슈
"쳇!"

그러던 중 사쓰마가 조슈보다 한발 앞서 
덴노에 접근했다.

 사쓰마
"덴노 헤이카 (천황 폐하) 
앞으로 제가 모시겠슴돠."

 사쓰마
"막부가 빼앗은 권력도
저희가 돌려놓겠슴돠."

 덴노 (고메이)
"뭐? 그러자꾸나."

다만 온건파인 사쓰마는
막부와의 정면 대결보다는

타협을 통해 
난국을 헤쳐나가고 싶었기 때문에

막부와는 
협상을 꾀했고,

막부 역시 사쓰마의 군대가 부담스러워
이를 받아들였다.

 사쓰마
"우리끼리 싸우면 국력만 분열되고, 
결국 청나라 꼴 납니다."

 쇼군
"그래 좋아.
타협을 해보자고."

하지만 그런 일로 조슈와 사쓰마는
결별하는 계기가 된다.

 조슈
"사쓰마, 기회주의자!
변절하고 막부와 타협을 했겠다."

그러던 1862년,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던
어느 여름 날,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의 행렬이
요코하마 근처의 한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고

가마를 호위하던 무사가
"길을 비켜라!"하고 외쳤는데,

마침 말을 타고 지나가던
네 명의 영국인이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행렬을 막아선 것이다. ☞ 

다이묘 행렬이 지나갈 때면
길가에 엎드려야 하는 일본의 풍습을

영국인들이 알 턱이
없었지만,

호위 무사는 그 자리에서
영국인 1명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나마무기 사건)

"이런! 무례한 서양 오랑캐!"

"헉!"

소식을 들은 영국 정부는
크게 분노했고,

영국
"당장 그 호위무사를 처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라!"

이에 막부는
영국의 요구를 들어주려 했지만,

막부 
"앗, 이거 미안해서.."

사쓰마 번에서는
영국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사쓰마
"쳇! 웃기고 있네."

결국 영국은 7척의 함대를 이끌고
사쓰마 번의 응징에 나섰으니 (1863, 사쓰에이 전쟁)

치열한 전투 끝에
영국의 신무기에 

사쓰마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사쓰마
"대포에 맞설 길이 없구나!"

사건의 여파로, 조정에서의 주도권도 
조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사쓰마
"아놔.."

하지만 그러면서
사쓰마는 크게 깨달았다.

 사쓰마
"무조건 외국 세력을 배척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사쓰마
"오히려 나라의 문을 활짝 열고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사쓰마는 

'양이'에서 '개국'으로 
180도 선회하게 되는데,

개국을 반대하다가
갑자기 개국을 주장하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터,
뭔가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만 했다.

 사쓰마
"그래! 어차피 막부 토벌이 목표였지.
개국이든 양이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야."

 사쓰마
"국가 개혁의 걸림돌인 
막부를 토벌하는 것만이 궁극의 목표!"


● 시모노세키 전쟁 (1863) : 호되게 당한 조슈

사쓰마 대신 조정을 장악하고
막부와 대립하던 조슈는

덴노를 움직여
쇠약해진 쇼군을 마구 흔들었다.

 조슈
"폐하, 막부는 개국을 주장하며
나라를 서양 오랑캐에게 넘겨주고 있사옵니다!"

 조슈
"폐하께서는 즉시 쇼군에게 명하시어
개국 주장을 거두고,"

 조슈
"지금까지 외국과 맺은 조약을
폐기토록 하소서!"

 덴노
"뭐, 알겠삼."

그리고 조슈는 의기양양하게 
막부를 찾아가 이렇게 명령했다.

 조슈
"덴노께서 
조약 폐기 칙명을 내렸슴돠."

 쇼군
"아놔.."

 조슈
"그러니 쇼군은 교토로 올라가 
어서 덴노의 칙명을 받으세요!"

 쇼군
"뭐야? 나더러 교토에 가라고?"

 조슈
"거역하시겠다는 건가요?

 쇼군
"아, 아닐세. 교토로 가겠네."

조슈 진영에서는 
크게 웃었다.

조슈 
"하하하"

조슈 
"쇼군이 꼬리를 내리고 
교토로 기어 올라온단 말이지?"

기고만장해진 조슈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조슈
"이참에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

 조슈
"우리 영해를 항해하는 서양 배에 포탄을 퍼부어 
양이의 의지를 온천하에 알리자고!"

그리고 정말로
시모노세키 해협을 항해하는

미국 상선에 
대포를 쏘고 말았다. (1863)

"오랑캐는 썩 물러가라!"

하지만 조슈의 도발은
막부는 물론,

그동안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사쓰마와 서양 세력까지 자극해버리고 말았다.

 막부
"아놔, 조슈 놈들, 보자 보자 하니깐
지들 맘대로 나라를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네."

 막부
"이거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사쓰마
"헐! 이넘들이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왔네."

 미국
"평화 조약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대포를 쏴?"

 미국
"오냐!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이때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며
사쓰마와 막부가 손을 잡아

조슈의 군대가 점령한
교토의 조정을 습격했으니, (금문의 변)

조정은 다시 
사쓰마의 차지가 되고,

사쓰마는 덴노를 꼬드겨서
조슈를 역적으로 선포하게 만든다.

 덴노
"조정을 혼란시키는 
조슈는 역적이다!"

조슈
"뜨아! 우리가 여.. 역적?"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조슈를 응징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출동했으니,

"멋도 모르고 날뛰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서양의 연합군은 
17척의 군함과 2천여 명의 병력으로 

조슈의 시모노세키를 공격,
해안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육지까지 점령해버렸다.

바로 1년 전 사쓰마가 
영국의 신식 무기에 혼쭐이 난 것처럼 

조슈도 
똑같이 당한 것이다.

그러면서 조슈도
사쓰마처럼 깨닫는다.

 조슈
"아! 그게 아니었구나!"

 조슈
"양이를 내세울 게 아니라
발전된 기술을 배워 나라의 힘을 길러야 겠어!"

그러면서 조슈 또한 
사쓰마처럼 '개국'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그리고 사쓰마 또한
새롭게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막부 토벌'이었다.



에도 막부의 말망, 왕정 복고

● 삿초 동맹 (1866)

서양에 두들겨 맞은 조슈를
막부가 정벌에 나서자

조슈는 
순순히 항복을 했다. (1864)

 조슈
"하.. 항복!"


 막부
"앵? 뭐가 이리 싱거워?"

다만 조슈의 존왕파들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피신을 한 뒤였다.

그중에는 훗날 메이지 유신 때
큰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 무사 시절 이토 히로부미

어쨌든 
막부의 토벌로

조슈의 존왕파 세력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지만,

막부군이 
물러나기 무섭게 

어느샌가 존왕파들이
다시 조슈로 몰려들었다.


 쇼군 (요시노부)
"어떻게 된 거야?"

 쇼군 
"존왕파들을 모조리 처단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또 기어 나왔지?"

"저쪽 동네가 원래 
존왕파들의 아지트가 아니겠습니까?"  

 쇼군 
"아놔.."

그리고 또다시 조슈의 존왕파들은
공공연히 타도 막부를 외치고 있었으니,

 기도 다카요시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기도 다카요시
"막부를 멸망시키고 
덴노의 국가를 세웁시다!"

"와!!"

결국 막부는
조슈를 응징하기 위해

또다시 군대를 
꾸려여만 했다.

 막부
"좋아! 이번에는 다시는 싹이 트지 못하게, 
뿌리째 뽑아주마!"

조슈도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했다.

 조슈
"지금 우리의 힘만으로는
막부와의 정면 대결이 어려운데.."

 조슈
"어쩌지.."

이때 나타난 인물이 
도사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였다.

그는 조슈에게
이런 내용을 제안했다.

 료마
"그러지 말고, 
사쓰마와 손을 잡으세요."

 조슈
"읭? 사쓰마랑 우리는 앙숙인데.. 
서로 전쟁도 치렀고.."

 료마
"하지만 조슈를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은 
사쓰마 외에는 없어요."

 조슈
"그래도, 거긴 좀.."

 료마
"둘이 동맹을 맺어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료마
"먼저 사쓰마와 조슈 모두 존왕양이를 외치다가, 
지금은 모두 존왕개국을 외치고 있고.."

 료마
"또 양측은 서양과의 전쟁으로
신무기의 위력을 깨달아 모두 서양식 군대로 전환했고,

 료마
"모두 타도막부라는 공동 목표가 있으니
동맹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조슈
"!"

그리하여 1866년 1월, 
역사적인 사쓰마-조슈 동맹, 

이른바 삿초 동맹이 
'비밀리에'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몰랐던 막부는
자신있게 조슈로 쳐들어갔으니

예상 밖의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뜨아! 조슈 놈들 
갑자기 왜 이리 강해졌어?"

막부군은 
크게 패했고,

일개 번에 지나지 않은, 
조슈에 패배했다는 사실은

막부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막부
"이게 뭔 망신이란 말인가!"


● 에도막부의 멸망, 왕정복고 (1867)

삿초동맹 군은
내친김에 에도로 쳐들어가

막부를 완전히
소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중재의 달인 료마가 다시 한 번 나섰다.

 료마
"잠깐! 전쟁은 안 됩니다."

 료마
"열강이 호시탐탐 일본을 노리는 이때,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료마
"그들이 끼어들 
빌미를 제공하는 겁니다."

 료마
"인도와 중국이 망한 것도
내부 분열이 큰 원인이었어요."

 삿초 동맹
"하긴.."

 삿초 동맹
"그러고 보니.."

이때 료마가 내놓은 
중재안은 이랬다. 

 료마
"어차피 지금의 일본으로는
열강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료마
"그러니 우리도 저들을 본받아 
정치 체제부터 뜯어고쳐야 합니다."

 료마
"그러려면 먼저 막부를 없애고
덴노를 최고 통치자로 받들어야만 하구요,"

 료마
"그런 다음, 번의 다이묘들이 의원이 되어서, 
서구식 의회를 만들어 보는 겁니다."

▲ 1890년에 완성되는 일본의 의회

(藩)의 다이묘들이 의원이 되면
전국의 4할을 차지하고 있던

쇼군과 그의 가신들은
손쉽게 제1당이 될 수 있었다.
 

반면에 덴노체제가 복고되니
웅번의 불만도 잠재울 수 있었다.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막부는 막부대로
웅번은 웅번대로 실리를 찾고

외세 간섭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일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대정봉환'(大政奉還 : 막부가 덴노에게 통치권을 돌려줌)의 아이디어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이 빠르게 근대국가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고,"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지칭되고 있음."

"하지만 료마는 얼마 후
33살의 나이로 암살되고 말았다능."


한편 료마의 제안을
막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요시노부 (쇼군)
"그래, 생각해보니 
나쁠 게 없겠어."

 요시노부
"어쩔 수 없으니, 덴노를 섬기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막부의 세력은 건재하고,"

 요시노부
"조정에 속하게 된 막부라면,
삿초 놈들도 타도 명분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요시노부
"좋았어!"

그리하여 요시노부는 
막부의 권력을 덴노에게 바치게 되니,
▲ 대정봉환 : 막부가 덴노에게 통치권을 돌려주는 장면

 요시노부
"막부를 없애버리겠습니다."

 덴노 (메이지)
"OK, 막부를 폐지하고
쇼군 직위도 없애노라."

이로써 1192년 이래
700년 가까이 일본을 지배해 온

무사 정권의 막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 막부폐지, 왕정복고의 공고를 보고 있는 백성들 (1868)


● 보신전쟁, 도쿄 천도 (1868)

하지만 쇼군 요시노부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요시노부
"그래도 내가 2인자는 
유지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러나 삿초에게 막부란
애초에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이런 식으로 통합을 하게 되면
부패한 막부가 계속 기득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 기회에 막부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읍시다!"

"옳소. 쇼군과 그 추종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쇼군을 아예 파직시키고
쇼군의 영지도 모두 몰수하자구요."

이때 삿초는
어린 덴노(메이지)를 이용했다.

 삿초
"어명이요. 요시노부는 
관직을 모두 놓고, 어서 은퇴하시오!"

 요시노부
"뭐야? 내 손으로 권력을 덴노에게 바쳤는데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요시노부
"삿초 놈들이 멋대로 
뒤에서 조정하고 있다는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요시노부
"그래,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삿초를 토벌하여 정권을 되찾아주지!"

이것이 막부가 벌인 
최후의 발악이었다. (1868)

"무진(戊辰)년에 일어나서 무진전쟁,
일본말로는 보신전쟁이라고 함."

하지만 막부군은
신무기로 무장한 삿초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뜨아!"

전쟁에 패한 요시노부는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로 도주하기 바빴고,

삿초군은 요시노부 토벌을 위해
에도로 진군했다.

이때 삿초군은 관군임을 강조하기 위해
조정의 깃발을 앞세우고 진격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관군)
"우리가 관군!
너희들은 역적!"

하지만 삿초는 
가능하면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극적으로 
타협이 이뤄진다.

 사이고 
"전에 료마씨가 그랬듯이
서로 싸우면 서양 놈들 좋은 일만 됩니다."

 막부
"동감합니다."

 사이고
"그러니 피를 흘리지 말고,
협상으로 해결합시다."

 사이고
"전쟁으로는 당신들이 우리를 이길 수 없어요."
그러니 어서 에도 성문을 여세요."

 막부
"좋습니다. 그러면 항복하는 대신
막부계 인사들의 안전을 보장하세요."

 사이고
"오케!"

그렇게 막부세력은
삿초에게 완전 항복하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새롭게 탄생하게 되어

1868년 7월, 
에도를 새 수도로 정하면서

명칭을 에도에서
'도쿄'로 바꾸더니

"천도를 한 이유는, 막부 세력이 강했던
동일본 지방을 직접 덴노가 통치하여,"

"반란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함이었음."

두 달 후, 덴노 일행이
교토 궁성에서 나와, 도쿄로 향하게 된다.

▲ 도쿄로 떠나는 덴노의 행렬

이때 다이묘들이
덴노 앞에 바짝 엎드려 절하는 광경이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모두가 아연실색이 되고 말았다.

"뜨아! 천하의 다이묘들도
덴노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군!"

사실 이 모든 것은 
삿초의 지도자들이

덴노의 권위를 높이려고 준비한
의도적인 행사였지만 말이다.

삿초
"이젠 더 이상 덴노를
유명무실한 허수아비로 생각하지 않겠지?"

삿초
"하하하. 덴노의 권력이 오를수록
우리의 권력도 오르기 마련."

그렇게 덴노의 도쿄 입성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쇼군 요시노부는
가까운 곳으로 귀양 보내졌으며,

약속대로 막부계 인사들에게는
전혀 불이익이 가해지지 않았다.

이로써 근대 일본이 
시작되게 되었고

파란만장한 정권 투쟁도
모두 막을 내리게 된다.

서양
"어라? 우리가 끼어들 틈도 안 주고
순식간에 일을 끝내버렸네!"



메이지 유신

● 토지와 백성을 정부로 반환 (1869)

젊고 진보적인 삿초 출신 무사 계급이
주축이 된 메이지 정부.

하지만 1853년 강제 개국 이래
15년에 걸친 투쟁은,

결국 지배 계층의
권력 다툼이었을 뿐,

국민의 행복과 풍요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진 하급무사 + 거상 vs 구시대 고위무사"

어쨌든 정권을 장악한
메이지 정부는

초기의 에도 막부가 
그랬던 것처럼,

중앙 정부가 절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개혁부터 시행해 나갔는데

그러려면, 먼저 지방의 권력을 
중앙에서 장악하고

정부 관리를 임명해서
정부의 명령대로 움직이도록 해야 했다.
▲ 폐번치현(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 조서 공포

 덴노 
"앞으로 번(藩)을 폐지하고
(縣) 행정구역을 설치하겠음."

 덴노
"그러니 앞으로 다이묘는 없어지고,
정부에서 공무원을 파견하겠다능."

 
▲ 막번체제의 붕괴

하지만 이런 조치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전국의 토지를 
모두 덴노에게 되돌려주어야 했는데,

이 작업에는 사쓰마번의 무사 출신,
오쿠보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오쿠보 도시미치
"이 나라는 
이제 덴노의 나라요."

 오쿠보
"나라의 모든 토지와 백성은
덴노의 소유라 이 말입니다!"

 오쿠보
"그런데 지금까지도 무엄하게도
쇼군이다, 다이묘다 하여.."

 오쿠보
"덴노의 땅과 백성을 멋대로 나누어 소유하여
개인의 배를 채워왔었다 이 말입니다."

 오쿠보 
"그러니 모든 토지와 백성은
덴노에게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웅번
"옳소!
그래야 덴노가 절대 권력을 쥐게 되고.."

 웅번
"그래야 덴노를 마음껏 조정하는 
우리의 권력도 덩달아.."

그렇게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이
토지정리에 발 벗고 나섰으니,

 웅번
"우리 삿초도비가 개혁의 선봉장!"

이들이 
가장 앞장서서 

자신의 토지와 농민을 
덴노에게 헌납하게 된다. (1869, 판적봉환)

그러니 
어쩌겠는가?

다른 다이묘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고,


다이묘
"에겅.."

전국의 토지와 백성은
모두 덴노의 소유가 되었다.

"어? 왕토사상의 부활인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의 소유가 된 것이지."

▲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권' 
: 이후로 토지를 구입하고 싶은 사람은 정부에 구입을 하면 됐다 (1872)


● 이와쿠라 사절단 (1871~1873)

메이지 유신으로 
새로운 정부를 일으키긴 했으나

서양 같은 선진 국가를 이룩한다는
추상적인 목표만 섰을 뿐,

어떤 식으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할지 

혁명의 주체 세력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일본은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꼽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이라는 책을 통해
▲ 후쿠자와 유키치, 186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양의 역사, 제도, 문화 전반을
대충은 알 수 있었고,

▲ 현재 후쿠자와 유키치는 1만엔권 지폐 모델이다

1867년 파리박람회를 참석해
유럽을 1년 넘게 견문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통해
유럽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수는 있었다.
 
▲ 파리박람회의 증기기관차

 시부사와 에이이치
"내가 벨기에 국왕을 만났거든."

 시부사와 
"벨기에 국왕이 나보러
자기네들 철강을 사달라는 거야."

 시부사와 
"유럽에서는 국왕이 직접 비즈니스를 할 정도로
상업을 중시하는 풍조가 있더라고.."

하지만 이 정도만 가지고는
성이 차질 않았다.

"서양에서 벌어지는 일을 
듣긴 했어도,"

"그게 진짜 어떤 건지
제대로 알 수가 있나.."

"그럼 가서 배우자고!
세계를 둘러보고 최고만 본뜨는 게 어때?"

"맞아! 과거에도 견수사,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앞선 문물을 보냈잖아."

"이번에는 견유사와 견미사를
보내는 거야!"

그리하여 1871년 메이지 정부는
젊고 패기 넘치는 

핵심 요원 100여 명을 
유럽과 미국에 파견하게 되는데,
 
▲ 출항하는 이와쿠라 사절단

이 중 49명은 
메이지 정부의 고관들로서

정부 관료 중 
무려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고,
▲ 이와쿠라 사절단

"여기에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도 포함됐다능."

수립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메이지 정부로서는,

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 해 재정수입의 2%라는 큰 돈을 소요해야 했다.

그만큼 당시 일본은
절박했던 것이다.

"가서, 많이들 배워오라고!"

이후 사절단은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 주요국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시찰하게 되었으니,

"와!"

이때 사절단의 경험들이
이후 메이지 정부가 

'서구화'의 불가피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사절단은
이렇게 표현했다.

 오쿠보
"우리는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일단 놀란다.
그리고 심취한다."

 오쿠보
"하지만 그러면서 다짐한다."

 오쿠보
"미친 듯이 배워서 
우리도 꼭 그런 수준에 도달하겠노라고!"

이때 일본 사절단은 
여러 서구 세계 중에서 

독일에서 본인들의 성장 모델을 
찾아내게 된다.
 

마침 1871년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이 되던 때였고,

피와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첫 부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비스마르크 
"오늘날 세계 각국은 
겉으로는 예의를 지켜가며 상호거래를 중시하지만"

 비스마르크 
"그것은 사실 
겉치레에 불과한 겁니다."

 비스마르크 
"실제로는 약자를 무시하고 
약탈하려는 속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비스마르크 
"그러니 무엇보다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해요!"

일본인들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또 비스마르크의 '정부 주도식 공업 발전'에도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후발주자가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민간에 맡겨서는 안 됨."

 
"그러게, 우리도 독일을 본받아
정부 주도로 '압축성장'을 해야 되겠음."

그렇게 일본인들은
지난 1,300년간의 스승이었던

중국을 거부하고
유럽에서 새로운 스승을 찾아낸 것이었다.

 오쿠보
"육군은 프로이센이 최고라하니
프로이센을 따라 하고."

 오쿠보
"해군은 영국이 최고라하니
영국 것을 따라 하고.."

 오쿠보
"산업 발전은 정부 주도 방식인 
프로이센의 방법을 따라 합시다."


그렇게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구미의 12개 국가를 시찰했고
 

이후 100여 권에 달하는 
시찰 실록을 작성하게 된다.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
고위 정부 관료들의 참여, 

충분한 기간 동안 이뤄진 
시찰단의 대대적인 외국 방문은

세계 역사적으로도 
전례 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시점에 조선은 
서양을 철저히 배척하겠다며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있었으니 (1871)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사민평등

유럽형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을 주장하며,
계급 제도를 철폐했다. (1871)

그것은, 에도막부가 
사회 안정과 정권 안보를 위해 실시한

'사농공상' 계급 제도를 
없앤 것이기도 했다.
▲ 농민을 두 번 째로 놓은 것은 '사회적 세뇌'일 뿐,
실제로 농민의 지위나 생활이 공상(工商)보다 나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뜯어보면
에도 시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읭?"

지배 계급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답게

지배계급의 특권은
그대로 유지하되,
▲ 이때 웅번을 지원했던 '거상'들도 귀족의 일원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피지배층 간의 차이만 없앤
기묘한 평등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귀족과 
일부 무사 계급만 남겨두고

'농공상'의 피지배 계급만 
평민으로 평등화 시킨 것이다.


"관리와 민간인으로 이원화한 것."

"어차피  에도시대에도 농공상은
전혀 신분의 차이가 없었잖아."

"물론 그렇지. 하지만 사민평등으로 
직업선택이 자유롭게 되었음."

"또 계급 간의 결혼도
자유롭게 되었고.."

하지만 무사 신분들은
입장이 애매해졌다.

정부의 관료가 
되지 못한 무사들은

마땅히 설자리가 없었고
봉급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사
"아놔.."

그러니 
어쩌겠는가?

과거엔 무사가 농사짓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이젠 가난하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많은 무사들이
농민이 되어야만 했다. 

"에잇! 누구를 위한 개혁이야!"

여기에 무사 신분을 상징하던 
칼을 차지 못하게 금지했고,

"이때 무사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한동안 나무칼을 차고 다녔을 정도.."

무사의 전유물이었던
비단옷도

이제는 평민이 
입고 다녀도 무방했다.
▲ 당시 양복을 입고 훈도시를 입은 일본인들도 제법 많았다

또 '국민 개병제'를 실시해서
무사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여 (1873)

더 이상 군인의 신분도
무사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 성인은 3년간 의무복무해야 했다

 무사
"아놔.."

무서의 전유물이던 '성씨'도
이때부터 평민들도 갖게 된다.

"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두려면
납세자 명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성씨가 없으니
제대로 구분하기가 어려워."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성씨가 만들어졌는데,

"자네 어디 살아?"

"산 속에요."

"그러면 야마나카(山中)"

"밭 한가운데 사는뎁쇼."

"그러면 다나카(田中)."

"소나무 아래인데요?"

"그러면 마쓰시타(松下)."

"약수터에 살아요."

"그러면 고이즈미(小泉)."

그렇게 하여 전체 인구의 94%인 일본의 평민들이 
'새로운 성씨'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 부국강병과 문명개화

메이지 정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각종 제도와 문물의 서구화를 통한
'부국강병'에 있었다.
▲ 유신 3걸 : 메이지 유신을 이끌던 3인방

 오쿠보
"무엇보다 서구식 교육이 우선!"

그리하여 학제를 제정하여
소학교·중학교·대학교와 사범학교 제도를 설치하고

만 6세 이상 남녀의 
소학교 진학을 의무화하여 

서구의 근대적 지식을
교육받도록 했다. (1872)
▲ 소학교의 수업 모습

그러나 수업료는 
민간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평민들의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수업료가 왜 이리 비싼 거야?
차라리 수업료가 낮은 서당에 보내고 말지!"

또 우편 제도를 제정하여
근대식 우편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1871)

3년 뒤에는
전신을 설치하게 된다.

태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함과 동시에

1일 24시간으로 통일하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리고

근대적 화폐인
'지폐'를 발행하고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 한 것도
모두 이때부터였다. (1872)

"도쿄와 개항장이 있었던 요코하마 사이에 
철도를 부설해서,"

"걸어서 10시간 걸리는 거리를
1시간 만에 갈 수 있게 만들었음."

한편 재정의 안정을 위해
'조세 제도'를 전면 뜯어고치게 되는데, (1873)

에도시대에는 수확량의 40~50%의 곡물을 
세금으로 납부했다면

메이지 정부는 땅값의 3%씩의 금액을 
돈으로 납부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메이지 정부는 
해마다 일정한 조세 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생활의 변화도 컸는데,

정부는 단발령을 내려
일본식 상투인 촌마게를 자르도록 했지만, (1871)

사람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머리 모양을 고수하려 했기 때문에

"싫어! 절대로 자를 수 없어!"

덴노가 직접 나서서 
촌마게를 자르자, 

"헐! 덴노께서 
서양식 머리를 하셨다!"

▲ 메이지 덴노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서양식 단발머리에 맞춰
양복·중절모·구두를 신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됐다.

▲ 1898년의 일본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이때부터 유행하는데,

이 또한 처음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꺼려했기에

"헐! 함부로 육고기를 먹을 수는 없어!"

역시 덴노가 직접 나서서 
소고기를 먹도록 장려하자

 메이지 덴노
"왜소한 일본인들의 신체를 개선하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

비로소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 고기를 먹는 근대 일본인

"이때 만들어진 게, 바로 돈가스."

"튀김옷을 입혀 적은 고기로도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음."

▲ 돈가스, 고로케, 카레라이스는 모두 서양의 음식을 일본화한 것들이다

민간에서는 신문과 잡지도
활발히 출판되게 되는데, (1873)

이런 출판문은
서구의 자유주의, 

천부인권론, 진화론 등을 알리는 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 메이지 시대의 잡지

이처럼 일본은 
1870년대의 '문명개화 작업'을 통해

한발 한발 근대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