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앞서 : 소빙하기의 시련
17세기 일본은 '겐로쿠 호황'이라는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 무렵 지구촌은,
15세기부터 시작된
'소빙하기'가
절정의 극치에 달해
겨울철 기온이
오늘날보다 평균 2도 가까이 더 추웠고
▲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브뢰헬의 그림
겨울의 기간도
오늘날보다 1달은 더 길었다.
"3월은 겨울이었고,
4월이 돼야 꽃이 피고 풀이 돋았다능."
오늘날 런던은 편서풍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 겨울철 런던의 기온(평균 영상 5도)은 부산보다 따뜻하다
당시에는
템즈강이 툭하면 얼어서
얼음판 위에서
시장이 열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 17세기의 템즈강
아시아의 겨울도
혹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양쯔강은
걸핏하면 얼어붙었고,
상하이에서 눈이 1미터 이상 내려
한 달 동안 녹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심지어 아열대 지방인 광둥성까지
눈이 내리기도 했었다.
"헐!"
조선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음력 9월, 10월부터
강이 얼어붙는가 하면
난류가 흘러 좀처럼 얼지 않는 동해안까지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
온화한 날씨의 일본도
걸핏하면 냉해와 가뭄에 시달려야만 했다.
"소빙기에는
왜 가뭄이 잦아지는 거임?"
"극지방의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어서
바닷물의 양이 줄고,"
"증발량도 줄어서
비구름이 덜 발달하기 때문임."
때문에 이 무렵
지구촌 곳곳에서는 대기근이 닥쳐
유럽에서는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져
'종교전쟁'이
나타나고
'마녀사냥'이
유행하기도 했다.
'기후 문화사'의 저자
볼프강 베링거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베링거
"마녀사냥은
소빙하기가 낳은 범죄였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기근에 참다 못해
민심이 폭발하여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7세기에만 두 차례 기근으로
각각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100만 명 씩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을병대기근(1695~1699년)의 피해
"다만 당시의 피해 보고는
기근으로 유랑을 떠난 사람들까지 포함했기 때문에,"
"그걸 감안하면
100만 명까지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거임."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8세~19세기 경
50년마다 되풀이되는 대기근으로 인해
일본 사회는
심대한 타격을 입어야 했고
17세기에 화려하게 비상했던
일본의 경제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150년 동안 정체를 맞고 만다.
▲ 겐로쿠 시대 이후, 150년간 일본의 인구는 정체되고 만다
게다가 사회 변화를 거스르는
'무모한 개혁'의 남발로
일본 스스로도
다람쥐 쳇바퀴질을 하고 말았다.
18세기 전기 : 지배층과 농민의 갈등
● 요시무네의 교호개혁 (1716~1745)
겐로쿠 호황기,
평화가 지속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상품경제의 진전과 문화의 발달로
사람들의 소비생활이 증대되어,
무사들의 낭비로 이어졌고,
막부의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무사
"에효~ 사야 될 건 많은데,
봉급쟁이라 들어오는 돈은 정해졌고.."
쇼군
"에효~ 사야 될 건 많은데,
광산업이 예전 같지 않아 들어오는 돈은 자꾸만 줄어들고.."
"쌓여가는 건 빚!"
이럴 때, 1716년
요시무네가 8대 쇼군으로 취임했다.
"요시무네는 에도 막부 쇼군 중에서
가장 칭송받는 인물로.."
"일본 사극의
단골 주인공이라능."
그는 나라의 살림이 궁핍해진 이유를
세금이 제대로 거둬들여지지 않은 데 있다고 봤다.
요시무네
"재정이 좋지 않으면
쇼군의 위엄도 사라지기 마련.."
요시무네
"먼저, 나라 곡간부터
단단히 채워야겠음."
그리하여 다이묘들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요시무네
"너희들도 알다시피
요즘 막부 재정이 너무 안 좋다."
요시무네
"그러니 각 번주들은
매년 쌀 X섬씩만 정기적으로 상납해줬으면 함."
다이묘 A
"헐.. 그건!
전례가 없던 일 아닙니까?"
다이묘 B
"쇼군! 우리도
살림살이가 빠듯합니다."
요시무네
"대신 참근으로 에도에 체류하는 시간을
1년에서 반년으로 줄여주겠음. 그래도 싫어?"
"어?"
요시무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요시무네
"토지조사를 철저히 해서
탈세하는 농민이 없도록 하고,"
요시무네
"풍년이 들던, 흉년이 들던
사정을 봐주지 말고.."
요시무네
"세금은 항상 '일정량'을
거두도록 하라능."
요시무네
"이것들이 툭하면 흉년 핑계로
세금을 적게내서 안 되겠어."
"하지만 쇼군!
그게 여의치 않습니다."
요시무네
"왜 그런데?"
"요즘 땅을 담보로 돈을 꿔 쓰다
갚지 못해 소작농이 된 농민들이 많아서.."
"정상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게 하면
농민들은 굶어죽고 말 겁니다."
요시무네
"뭐야? 내 그렇게도
함부로 땅을 팔지 말라니깐!"
요시무네
"안 되겠어! 저당 잡힌 땅은
모두 원래 농민에게 돌려주라고 해!"
요시무네
"또 황무지를 개발해서
어떻게든 재정 수입을 늘리도록 하라고!"
심지어
이런 것도 시켰다. ☞ 참고
요시무네
"듣자 하니, 요즘 조선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장난 아니라며?"
"네. 인삼 수입 때문에
장난 아니게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요시무네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선의 인삼을 밀반입해오도록!"
요시무네
"우리가 직접 재배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
이런 악착같은 방법으로
요시무네 집권기 막부의 수입은
에도막부 중에서도
최고로 기록될 정도로 풍족해진다.
요시무네
"좋았어!"
그리고 그런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요시무네는
쇼군의 권력 강화에 주력하게 된다.
요시무네
"요즘 관리들을 보면, 너무 철밥통이야.
당최 열심하는 법이 없어."
요시무네
"앞으로 하급 무사라도 상관없으니,
능력만 있으면 고루 등용하겠다능."
관리
"뜨아!"
그러면서도 민심을 잃지 않도록
여러 유화책을 곁들였다.
요시무네
"앞으로 투서함을 설치할 테니
불만사항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투서하도록." (1721년)
요시무네
"또 재판의 기준을 만들어줄 테니
법을 집행할 때, 엿장수 맘대로 처리하지 않도록 하고.." (1742년)
요시무네
"농민들이 세금 때문에 힘들어 한다고 하니
고구마, 감자 재배를 널리 보급하도록."
요시무네
"또 농민들이 몸이 아프지 않게
전국 곳곳에 무료진료소를 설치하고,"
요시무네
"남만인(네덜란드인)들의 의술이 높다고 하니
그들의 의서도 널리 보급해 익히도록 해."
"이러한 요시무네의 개혁을
'교호개혁'이라고 함."
● 교호개혁 한계점 : 중국식 유학에서 해법을 찾다
그렇게 막부의 통치력이
어느 정도 정비되자,
요시무네는 무사들을 다잡고자
이런 명령을 내린다.
요시무네
"요즘 무사들은
칼은 폼으로 차고 다니는가?"
요시무네
"왜 평소 무술 연마는 하지 않고
자꾸 돈 타령이야?"
요시무네
"앞으로 업무 끝났다고
놀러 다닐 생각말고.."
요시무네
"틈틈이 무술 연습을 할 수 있도록, OK?"
무사
"뜨아!"
또 전국적으로
한코(藩校 : 번교)를 널리 설치하게 하여
무사들의 유교 교육을
강화하도록 했다.
▲ 무사들의 학교, 한코
요시무네
"주군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게
무사의 도리임."
요시무네
"공자께서 그러셨음.
검약과 겸양의 정신을 갖춰야 한다고.."
요시무네
"그러니 앞으로 무사들은
화려한 옷을 입지 않도록, OK?"
무사
"헐!"
그러면서도 무사들의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무사들의 채무를
획기적으로 탕감해준다.
요시무네
"앞으로 무사들에게 꿔준 돈은
소송을 하지 말고.."
요시무네
"그냥 당사자끼리
합의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라능!"
조닌
"뜨아! 그.. 그건,
꿔준 돈을 그냥 받지 말라는 말같은데!"
무사
"와! 쇼군 만세!"
여기서 교호개혁의 한계점이
극명히 나타난다.
무사의 궁핍화와
재정의 고갈을 수습하기 위해
요시무네가 찾았던 해법은
'중농억상'과 '검약'이라는 중국식 '유학'에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철학에 매달려
역주행을 시도했던 개혁.."
특히 17세기 일본의 성장을 주도하던
상업에 대한 제제는 막대했다.
참근의 기간을 줄여
에도의 상업을 침체하게 만들더니
무사들의 검약령으로
상품 경제를 쇠퇴시키고,
무사들의 부채 탕감을 명분으로
상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명군으로 칭송하는 요시무네지만,"
"알고보면,
시대를 거스르는 무모한 개혁가."
● 대기근과 쌀값 파동
개혁 이후 막부의 살림은
어느 정도 안정됐지만
문제는
잦은 흉년이었다.
농민
"에고, 흉년이라고
세금을 적게 내는 것도 아니고.."
흉년이 들면
자연스레 쌀값이 뛰어올랐고
쌀값이 올라가면
무사들은 기분이 좋지만,
"무사들은 쌀로 봉급을 받아,
화폐로 교환했었으니깐.."
"쌀값이 오르면
그만큼 수입이 올라가기 마련."
쌀을 사 먹어야 하는
도시의 조닌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러면 으레
잇키(백성봉기)가 발생했고,
"못 살겠다.
쌀값을 내려라!"
쇼군은 쌀값 안정을 위해
금주령을 내리던지
요시무네
"앞으로 쌀로
술을 빚는 것 금지!"
비축된 곡물을
대거 풀어주곤 했다.
그런데 풍년이 들어도
말썽이었다.
이번에는
쌀값 하락이 원인이었다.
무사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팽배했기 때문에
무사
"못 살겠습니다.
쌀값을 올려주십쇼."
이때 쇼군은
쌀도매 상인들에게
쌀을 내다 팔지 말고,
비축하도록 명령해야만 했다.
▲ 1820년경 쌀 유통업자
요시무네
"휴~ 드디어 쌀값이 안정됐네."
"이런 이유로 요시무네에게는
'쌀 쇼군'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능."
하지만 1732년
대기근(교호 대기근)이 닥치자
쌀값은
다시 천정부지로 올랐고,
에도에서만
3천 명의 조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쌀가게를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요시무네
"아놔, 쌀값을 안정시키는 게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농민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쌀은
막부나 번의
주된 수입이었기 때문에,
막번은 백성들과
상충하는 이해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번은
18세기 이후
쌀이 아닌, 상품작물에 대해서도
슬슬 세금을 내도록 했다.
"요즘 담배 농사가
그렇게 짭짤하다며?"
"좋겠어?
돈도 많이 벌고.."
농민
"..."
"농민이 쌀농사에 힘써야지
그런데 신경 쓰면 되겠어?"
그런 식으로 막번은
농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했으니,
농민의 생활은
더욱 핍박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면
전국시대부터 농민들은
부락민들과 힘을 합해
집단적 시위(잇키)를 전개하곤 했었다.
다만 에도시대에는
비폭력적인 시위가 대부분이었다.
"전국시대와 달리 에도시대에는
농민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불법이었으니깐."
"세금을 낮춰라!"
"담뱃세, 면포세..
원래 이런 거 없었다!"
그러다 농민들은 화가 나면
무사들은 감히 건드릴 수가 없어서
거상의 집을 습격하여
세간살이를 때려 부수거나,
쌀창고를
털어가곤 했다.
▲ 쌀창고를 터는 백성들
에도시기에만
이러한 '잇키'가
막번의 '수탈'과 '대기근'과 맞물려
총 7천 회 이상이나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잇키는
농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쌀값이 앙등할 때에는
조닌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특히 18세기 후반부터는
도시에서의 잇키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쌀값을 내려라!"
"세금을 내려라!"
|
18세기 후기 : 개혁과 대기근
● 다누마의 개혁 : 중상주의 (1772~1786)
18세기 후반
쇼군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고,
쇼군
"..."
그를 대신하여
로주(老中)인 '다누마'가 실권을 행사했다.
"로주는 우리나라 식으로 따지면
재상(宰相)과도 같은 인물임."
다누마
"에헴!"
다누마는, 농업을 중시하던
요시무네와는 달리
상업적 발전과 무역의 확대를 꾀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다누마
"예전 쇼군은 뭘 좀 몰랐어."
다누마
"농사꾼한테 뜯어먹어봤자
얼마나 나온다고.."
다누마
"자고로 돈은
장사꾼한테 뜯어먹어야 지대로지."
때문에 다누마는
전국의 상인들에게
동업조합(가부나카마)에
가입하게 하여
영업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대신
막대한 '영업세'를 거둬들이게 된다.
상인
"저희에게 독점 판매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누마
"하하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뭐."
또 화폐 발행을 통해서
재정을 확충하고자 했으니,
다누마
"지금 일본에는
금, 은은 다 캐서 없잖아."
다누마
"그게 있어야만 화폐를 발행해서
막대한 주조차익을 챙길 수 있는데 말야.."
다누마
"어쩔 수 없어. 이제는 우리가
외국에서 금, 은을 수입해올 때야!"
수출 상품을 만들기 위해
구리 채광에 주력하는가 하면,
▲ 갱도의 배수시설 : 갱도가 깊어지면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오기 때문에 배수를 해야만 한다.
건조한 해산물을
새로운 수출품으로 개발하게 된다.
다누마
"이것이 바로 건조한 해삼.
중국에서 인기가 아주 좋다지."
▲ 건해삼
그리고 그런 노력 덕분에
금, 은을 수입해와
막대한 화폐 주조차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다누마
"하하하. 이게 제대로 된 방법이지."
그런 식으로
개혁이 추진되자,
상인의 독과점이 보장되고
화폐의 공급이 늘어나게 되어
한동안 성장이 주춤했던 거상들이
다시 크게 득세하게 된다.
▲ 미쓰이 포목점
상인
"다시 좋은 세상~"
그러나 다누마의 정책은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다.
동업조합을 통한
독과점을 인정해준 결과,
영세한 조닌들은
물건을 제대로 팔수도 없어,
빈털터리가 된 채
도시를 전전하거나,
농촌으로 귀농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에 만연된 뇌물 문화도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특히 다누마 집 앞에는
승진과 이득을 노리는 무사, 조닌 들로
매일같이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어느 날 다누마 앞으로
'인형'이라는 글자가 적힌
커다란 상자가
도착하여,
다누마
"읭? 이게 뭐지?"
상자를 열어봤더니,
그만 깜짝 놀라고 마는데,
다누마
"뜨아!"
상자 안에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헐!"
이처럼 당시는
사람을 뇌물로 바칠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대였다.
● 텐메이 대기근 (1783~1788)
다누마의 개혁은
방법이 잘못됐기는 했어도
상업 발전의 길을
다시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다시 '중농주의'로 회귀하고 만다.
"읭?"
일본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었던
'텐메이 대기근'의 여파 때문이었다.
18세기 지구촌은
여전히 소빙기 상태에 있었다.
겨울은 춥고 길었고
강수량이 줄어들어, 가뭄이 잦았다.
이럴때 1783년 6월,
아이슬란드에서 거대한 화산이 폭발했다.
"쾅!"
그리고 나더니 두 달 후,
일본의 아사마 화산이 폭발한다.
"쾅!"
두 차례 거대한 화산이 폭발하자
화산재가 지구촌을 덮었고
예년보다 더욱 일찍
한파가 찾아오게 된다.
"9월인데 벌써 서리가!"
그런데 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여기에 '엘니뇨 현상'까지 추가되어
동아시아 지역의 한파와 가뭄은
6년을 더 끌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도 기근으로
많은 사망자가 나왔던 때임."
그런데 화산까지 터졌던
일본의 상황은 어떠했겠는가?
열도 전체가 피해를 봤지만
특히 위도가 높은 도호쿠 지역이 심각했으니,
쌀값이 미친 듯이
폭등해버린 것이다.
때문에 굶주린 사람들은
폭도가 되어
쌀가게를 털고,
거상의 집을 털더니
개, 말, 소와 같은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기 시작했다.
막번은 서둘러
비축미를 풀면서
백성들의 구휼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지만,
무려 6년이나 지속된 기근이었으니
나중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산천을 헤매기 시작했고
나무껍질,
풀뿌리도 마다하지 않았고,
짚을 갈아 가루로 먹는가 하면
독초를 뽑아서 삶아먹을 정도였다.
종이도 가리지 않아,
절간의 경전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 되고 만다.
급기야 어느 영주는
기근을 버티는 묘책으로
진흙이나 배설물을 익혀 먹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인육을 먹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을
인육을 개고기로 속여 팔기도 했다.
▲ 텐메이 대기근 당시의 끔찍한 상황
여기저기서 굶어죽은 시체들이
나뒹굴었고
굶주림에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으로 죽는 이들도 속출했다.
당시 얼마나 사망했는지는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지만,
일본의 인구가 총 92만 명이
줄어들었다고 하니, ☞ 참고
17세기 한반도를 덮쳤던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 못지않은 피해였다.
"다만 인구 대비로 보면
일본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일본이 조선보다 재정 상태가 좋아,
구휼미가 더 많았던 탓도 있지만
홋카이도, 도호쿠 지역에서는
감자를,
규슈 지방에는 고구마를 재배했던 탓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조선은, 고구마는 19세기부터
감자는 19세기 중엽부터 일반적으로 재배하게 된다능."
● 간세이 개혁 : 중농주의로 회귀 (1788~1793)
대규모 기근에 대해
막번이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자
농민과 조닌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고,
도시와 농촌에서는
여기저기서 잇키가 일어나고 있었다.
농민
"백성들이 굶어죽는 판에
무슨 세금이냐!"
조닌
"쌀값을 내려라!
우리들은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도시마다 쌀가게를 터는 백성들로
사회 불안이 한층 고조되었다.
무사들 또한, 생활 기반인
봉급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가혹한 시련을
맞이해야만 했으니
어떤 이들은 부업을 하면서
목숨을 연명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무사의 신분을 팔아넘기기도 했다.
무사
"에겅.."
따라서 무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이들 중에는
대기근으로 인한 경제파탄이
마치 막부의 책임인양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다누마, 우리 무사들을 이따위로 대접해도
무사할 줄 알았는가!"
그리하여 결국, 화가 난 무사들에 의해
다누마 아들의 목이 날아갔고,
다누마는 실각되어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만다.
그리고 1788년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고,
다시 막부는 '중농주의'로 회귀하여
전혀 다른 개혁들을 추진하게 된다.
마쓰다이라 (새 로주)
"다누마가 그동안 거상들과 짜고
독과점을 묵인했기 때문에, 물가가 폭등했던 거임."
마쓰다이라
"앞으로 동업조합들은 해산하고,"
마쓰다이라
"물가 폭등의 주범인
화폐도 더 이상 주조하지말라!"
마쓰다이라
"또 무사들은 그동안 빚진 돈을
한푼도 갚지 않아도 됨!"
농민을 위한
법령들도 내렸다.
마쓰다이라
"농민들의 생활이 힘들다고 하니,
부역을 대폭 줄이고.."
마쓰다이라
"기근으로 황폐해진 산에 나무를 심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치수 사업에 주력하라."
마쓰다이라
"또 농민들은 농사에만 주력해야 하니,
장사를 한다는 식의 부업은 금지!"
마쓰다이라
"앞으로 기근 대비를 위해
전국적으로 충분한 곡식들을 비축하도록." (1791년)
더불어 유교 교육 강화에도
주력하게 된다.
마쓰다이라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려면
유교적 도덕이 부활해야만 됨."
마쓰다이라
"전국적으로 번교(한코)를 증설할 것."
마쓰다이라
"미풍양속을 해치는 유곽들은 없애고
풍속을 저해하는 그림들도 금지!"
그랬었다. 새 정부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상업의 탓인 양
그 책임을 전가했고,
중국식 유학으로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동아시아 성장의 한계임."
19세기 전기 : 내우외환, 웅번의 등장
● 가세이 문화 : 제자리를 찾은 상업 (1800~1830)
겐로쿠 호황 이후
재정의 부족함, 무사의 빈곤함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은 계속된 개혁으로
실험을 반복했다.
"중농주의, 중상주의, 다시 중농주의.."
하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기근 때문에
막부는 '사회안정'과 '농촌안정'을
꾀할 수밖에 없었고
상업은
매번 희생양이 되어
거상의 성장을 막아
거대 자본이 형성될 수 없게 되어
"자본주의가 태동하려면
거대 자본이 있어야만 하는데.."
결국 일본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100년 동안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일본의 경제는
다시 부상하고,
상업은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읭?"
상업의 싹을 잘라도
계속 돋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에도막부의
숙명이기도 했다.
무사들은
조카마치와 에도와 같은
도시에 거주했기 때문에
상업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들었고,
참근교대도
여전히 행해져
역참도시가 계속
명맥을 유지했던 까닭이다.
농민들은 텃밭에서 기른 상품작물을
팔아먹고자 했었고,
농한기가 되면
신사참배 여행을 즐겼으니
자연재해가 없는 이상
상업은 꾸준히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초 30년 동안
자연재해가 급격히 줄어들어
농민들의 저항도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다시 겐로쿠 시대처럼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한다.
▲ 19세기 초, 미미하지만 살짝 인구가 증가했다
또 대기근 시대에
사회기강을 다잡았던 유학은
실용적이지 못한 점에
한계점을 느끼고
점차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으로
사고 전환이 나타나게 된다.
"유학이나 국학은 고리타분해."
"맞아! 양학을 한 번 보라고!"
그렇게 19세기 초에
나타나게 되는
새로운 문화과 학문의 사조를,
'가세이(化政)문화'라고 말한다.
"가세이(化政)는 분카(文化 : 1804~18)시대와
분세이(文政 : 1818~30)시대에서 따온 말임."
"조선에서 세도정치가 활개치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함."
● 이양선(이국선)의 출몰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시행하기 전에는
동남아에서 니혼마치(일본마을)가 생길 정도로
해외 무역이 활발했다.
▲ 동남아시아의 니혼마치
그러나 기독교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사회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로
막부는 기독교를 금지하고,
일본인의 해외 무역도 크게 제한해 버렸다.
쇼군
"앞으로 '빨간 도장'이 찍힌 허가증이 없으면
함부로 해외로 나가지 못함."
▲ 17세기 일본의 상선 '슈인센'
그리고 17세기 중엽
막부는 해외 무역의 독점을 위해
일본적 화이관,
즉 일본 중심의 국제 질서에 입각하여
특정 번이 특정 국가를
담당하도록 했다.
쇼군
"조선은 쓰시마 번이 맡고,"
쇼군
"에조치(훗카이도)는
마쓰마에 번이 맡고.."
쇼군
"류큐(오키나와)는
사쓰마 번이,"
쇼군
"중국과 남만(네덜란드)은
나의 직할령인 나가사키가 맡겠다능."
하지만 이러한 쇄국 정책은
18세기 말부터 거센 도전을 받기 시작한다.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일본 근해에까지 도달한 러시아가
일본과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여기저기서 기웃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나가사키에 상륙한 러시아 선박 (1804년)
이어서 산업 혁명에 성공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찾아
아시아로 몰려들었다.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이양선(일본식으로 이국선)의 소문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자네도 들었는가?
시커먼 배(흑선)들이 지나다니고 있다던데.."
"요상한 연기를 뿜으면서
엄청난 속도로 지나다닌다는 배 말이군."
그리하여 마침내
막부가 팔을 걷어붙이게 된다.
쇼군
"듣자 하니
요즘 이국선의 출몰이 잦다는데.."
"맞사옵니다.
통상을 하자면서 어찌나 협박을 하는지.."
"땔감, 식수, 식량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리지 않나, 매우 흉악한 놈들입니다."
쇼군
"이런, 이런!
앞으로 우리 연안에 얼쩡거리는 외국선들은,"
쇼군
"중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격퇴하도록 하라!" (이국선 격퇴령, 1825년)
그리하여 1837년,
미국의 상선 모리슨 호가
일본의 심장부인
에도 만의 입구에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 모리슨 호
에도 만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번들이
힘을 합쳐 포격을 가해
깜짝 놀란 모리슨호이
퇴각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 참고
모리슨호 선장
"아놔.."
소식을 들은
막부는 크게 흡족해했다.
쇼군
"하하하.
우리가 양이 놈들을 격퇴했어!"
양이론자
"맞습니다.
이번에 단단히 본때를 보여줬습니다."
개국론자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개국론자
"양이의 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개국론자
"난학을 통해서
그들의 발달된 기술력을 보지 않았습니까?"
쇼군
"무엄하다!"
그렇게 막부는
개국론자들을 처벌하고 말았다.
쇼군
"쳇! 양이 놈들이
그래봤자지.."
하지만 1842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막부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쇼군은 말을 바꾸게 된다.
쇼군
"뜨아! 우째 이런 일이!"
쇼군
"이국선 격퇴령은 전면 철회!"
쇼군
"앞으로 이국선이 요구하면
식수와 연료를 공급할 수 있도록!" (신수급여령, 1842년)
한편 이국선의 접근이
빈번해짐에 따라
18세기 말부터
일본에서는
주변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져
관리들을 시켜
북방을 탐사하도록 하는가 하면,
홋카이도를 내륙 깊숙한 곳까지
개척하도록 했다.
"이때 일본은 사할린 섬, 쿠릴열도를
항해하며 탐사하게 됨."
▲ 모가미 도쿠나이의 훗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 탐사 (1786~1792)
또 서양의 측량법을
도입해서
전국의 연안을 실측한
세밀 지도를 작성하도록 했다.
▲ 1818년에 완성한 대일본연해여지전도
● 덴포 개혁 (1841~1843)
1833년, 소빙기의 끝 무렵
이번에는 집중호우와 냉해로 인해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에
대흉작이 발생하여
"수확량이
평년의 절반도 되지 않네.."
수많은 아사자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고,
▲ 50년 주기로 반복되던 에도시대의 대기근
또다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 인육을 구워먹는 도호쿠 지방 센다이의 농민들
심각한 식량 부족은
대도시 지역으로 확산되어
오사카에서는 매일 150~200명이
굶어죽기도 했다. ☞ 참고
그리고 식량난에 의한 불만은
잇키로 번져
농민은 농기구를 무기 삼아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쌀을 달라!"
심지어 1837년 오사카에서는
무사 출신까지 반란에 가세했으니,
▲ 나무 대포 3개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킨, 무사 출신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군대
오시오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는데
막부는 부패하고 무능함."
이는 무사가 가담한
최초의 반란으로,
금세 진압되기는 했지만
막부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킨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쇼군
"아놔, 이젠 무사까지 반란을 주동하다니,
우째 이런 일이.."
쇼군
"가뜩이나 이국선 문제로
골치가 다 아픈데.."
그리고 이를 모방한 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자
막부는 서둘러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이럴 때,
막부가 찾는 해결책이란 뻔했다.
또 중국식 유학을 좇아
검약을 강조하고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중시하겠다는 게 아니겠는가!
역시나 그랬다.
당시 개혁의 내용이다.
쇼군
"독과점을 일삼는
동업조합 금지!" (1841년)
쇼군
"근검절약 실시!" (검약령, 1843년)
쇼군
"화려한 풍속이
물가급등의 원인이니,"
쇼군
"야한 소설 쓰는 작가,
가부키 배우들은 싹 다 잡아들이라능!"
이때 막부는
에도에 있는 조닌들 중 상당수에게
농촌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게 된다.
쇼군
"에도에는 필요 이상으로
조닌들의 수가 많아!"
쇼군
"어서 농촌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으라." (귀농령, 1843)
쇼군
"농촌에 땅이 없어?
그럼 황무지를 개간하라."
그랬다.
다람쥐 쳇바퀴질이었고
무리한 개혁이었던지라
농민과 조닌의 반발만 컸고,
엄격한 풍속 통제와
물가 통제가
오히려 경제활동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여
개혁의 실패로
막부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고 만다.
● 번정개혁과 웅번의 대두
막번체제하에서 대부분의 번들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졌다.
"참근교대 비용"
"막부의 잦은 대규모 토목공사 참여"
"빈발하는 재해와 기근"
그런데 막번체제의 번들은
독립국가와도 같았기 때문에
이런 위기들은
스스로 타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본 영토의 3/4이 쇼군이 아닌,
다이묘가 자체적으로 다스리고 있었음."
대부분의 경우,
상인들로부터 대부를 받거나
가신들의
봉급을 삭감하고,
무사들에게 '검약령'을 발령하는 식으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고,
무리한 조치들로
번의 경제가 오히려 황폐화되어
더욱 심각한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소비가 침체하면
경제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는 법."
"막부와 마찬가지로, 다이묘들도
중국식 유교에서 그 해법을 찾고자 했던 게 문제였음."
하지만 개혁에
성공한 번들도 있었다!
특히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지방의 번들이 그러했다.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이 4개 번은 일본 근대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
이들은 기존의
무능한 고위관료들을 대거 내치고
젊고 유능하고 개혁 성향인
하급 무사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고리타분한 주자학만이 아닌
난학에도 능통한 젊은 관료들이었음."
번(藩) 주도로 특산품을 개발하게 하여
재정을 확충하였고
▲ 에도시대의 여러 화폐
그 수입으로 대포를 제조하는 등
서양식 군비를 갖추고,
상공업을 장려하고
금융업과 유통업을 활성화하는 등
'중상주의'를 고수하며
경제를 번영시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 서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개혁을,
'번정개혁'이라고 함."
조슈 번에서는
번이 직접 나서서 종이, 밀랍을 생산하고
세토내해의 통과 선박을 대상으로
창고업과 금융업을 활성화해
세토내해의 길목이라 할 수 있는
'시모노세키항'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 당시 시모노세키
사쓰마 번에서는
번이 주도하여 설탕을 생산하고
서양식 방적공장과 유리공장을
설립하는가 하면,
류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는 식으로
번의 수익을 늘려
그 자금으로 서양식 무기를 구입하여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 사쓰마번의 대포
그런가 하면, 히젠 번에서는
번 주도로 도자기, 석탄 생산을 강화하고
그 수익금으로
일본 최초로 철제 대포를 주조하게 된다.
▲ 히젠번의 대포 제조소
"이때까지 일본은
대포도 나무로 만들어 사용했었음."
한편 도사 번에서는
이들 번보다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 도사 지방에서 토종 '시코쿠견'과 서양의 '불독'을 교잡한 '도사견'이 탄생한다
번 주도로 목재, 종이를 생산하여
나름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이들 4인방을
웅번(雄蕃 : 웅대한 번국)이라고 함."
반면에 그 무렵,
막부가 추진한 '덴포 개혁'은
또다시 심각한 부작용만 초래하며
실패를 보고 말았으니,
웅번 4인방이 보기에
너무도 한심했다.
"에잇, 한심한 막부."
"우리가 나서야할 때가 아닌가!"
"무슨 건수가 있어야지.."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어떤 사건이 터져야만 하는데.."
그랬는데, 1853년 7월 8일
에도 만 어귀에 검은 배 네 척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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