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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근세사 ② : 일본 역사상 최고 호황기 '겐로쿠 시대', 그 모습은 어떠했는가?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524744226



막번체제와 도시의 발달

● 막번체제의 기본 골격 : 쇼군, 다이묘, 무사

에도 시대의 정치체제를
'막번 체제'라고 한다.

쇼군의 통치 기구인 '막부'와
다이묘의 영지인 '번'을 합쳐 부른 말이다.

막부는 직할령만 
직접 통치하고

번에 대해서는 다이묘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막부의 직할령은
일본 전체 인구의 1/4인,

800만 명(쌀 700만 석)의 영지를
관할하고 있었고

국제교역 창구였던 
나가사키를 지배함으로써

네덜란드와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생기는 이익을 독점하고
▲ 데지마의 네덜란드 거류지

전국의 주요 광산을 차지하여
화폐 주조권도 독점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사카, 교토 등 
주요 상공업 도시를 직접 다스리며

상인에게 받는 상납금 또한
어마어마했다.

 쇼군
"하하하"

때문에 수십 개 지역의 다이묘들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막부는 이를
거뜬히 제압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전의 무로마치·가마쿠라 막부와는
확실히 차별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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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막부의 강력한 힘은
바로 이런 엄청난 재력에서 나왔던 것임."

반면에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는
쇼군을 주군으로 섬기면서도

자신을 따르는 가신을
따로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런 다이묘들이
전국적으로 약 250명 정도가 있었고

평균 6만 명(5만 석) 규모의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으니,

조선의 고을 사또와
관할 규모 면에서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다.
▲ 다이묘가 거주하던 성

하지만 다이묘들은 
자체적으로 법률을 만들고, 

조세를 걷고, 재판을 하는 등
거의 '작은 쇼균'과 마찬가지였다.

 다이묘
"에헴!"

고로 막번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무사(사무라이)는 
쇼군과 다이묘를 호위하고

성을 비롯한 각종 군사 요새를 
지키는 일을 맡았는데,

문관의 성격도 띠어서
막번의 행정을 맡아보기도 했다.

그 대가로 고급무사는 땅을 하사받아
농민에게 세금을 거둬들였고

중하급 무사는 
쌀이나 돈을 봉급으로 받았다.

 

대신 전쟁이 터지면 
무사들은 개인의 사비로

말, 활, 창, 투구, 갑옷 
등을 준비하고

수하의 부하들을 데리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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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유사시 군역의 의무를 지었던 것임."

이것이 막번 체제의 
기본 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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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알면 쉽게 이해되지만,
모르면 굉장히 어지러워 보이는.."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완벽할 수 없었다.

쇼군은 다이묘들을 
항상 경계해야 했다.

 쇼군
"다이묘들은 나의 부하인 동시에
내부의 적!"

그래서 쇼군은 자신의 딸을, 
딸이 없으면 양녀를 구해서라도

다이묘에게 시집보내
혈연관계로 묶어두고자 했고

다이묘끼리의 혼인은
쇼군의 허락을 없이는 불가하도록 했다.

또 성이 허물어져도
함부로 보수하지 못하도록 했고

 쇼군
"뭐 하려고 성을 고치려고 하는데?
수상해!"


'참근교대'를 제도화해서
다이묘의 식솔들을 에도에 거처하게 해

사실상의 인질로 삼아
매년 영지와 에도를 왔다 갔다 하도록 했다. ☞ 참고

때문에 다이묘들은 자신의 가족과 
많은 부하를 수용하기 위해서

에도에 큰 집을 
지어야 함을 물론,

에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했다.

 다이묘 A 
"에겅. 한번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등골이 다 빠지네."

 다이묘 A 
"1년 수입의 대부분을 에도에서 쓰는데도 
살림이 항상 빠듯하다니까!"

 다이묘 B
"말도 말게! 
내가 사는 사쓰마에는 에도까지.." 

 다이묘 B
"육로와 해로를 합해 4천 리(1600km)나 되니
해마다 오가는 일만도 장난이 아닐세."

▲ 사쓰마번

이렇듯 참근으로 인한
다이묘들의 불만이 엄청났지만

막부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 농촌의 기본적인 생활구조

에도시대의 촌락(村 : 무라)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16세기 말, 히데요시가 추진한 
'병농분리'와 '토지조사'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치 공산주의 국가의
'집단농장'처럼 말이다.

 히데요시
"농민들이 칼을 들고 설치니깐
전국시대와 같은 혼란한 세상이 도래한 거임."

 히데요시
"그러니 농민이 함부로 
무사가 될 수 없도록 직업을 고정시키고,"

 히데요시
"무사들도 농민을 데리고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히데요시
"아예 무사의 거주지를 
농촌이 아닌, 성 안으로 제한하겠음."

그리하여 무사들은
집터를 성 근처로 옮겨야 했고

무사가 농촌을 떠나자
살던 집터가 공터로 남게 되어

이를 통해 '구획정리'를 새롭게 하여
촌락들을 재배치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주거지,
나머지는 경작지.."

그렇게 만들어진
에도시대의 촌락은

보통 40~60 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구성하였고

세금도 촌락 단위로
징수하고,
 

모내기·추수·지붕잇기
치안·소방·도로공사 등도

모두 촌락마다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 촌락(무라)의 평범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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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에도판 새마을운동!"

이때 촌락의 세금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매겨졌는데

쌀 수확량의 40~50%를
납부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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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의 직할령이거나,
다이묘의 영지이거나, 무사의 영지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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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세금은
무조건 쌀 수확량의 절반 정도였음."

여기에 농민들은
특산물도 바쳐야 했고

고을의 공사가 있을 때에는
부역도 제공해야만 했다.

한편 막부는 촌락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안전책을 발령했다.

 쇼군
"땅을 매매하는 것 금지!" (1643년)

 쇼군
"땅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금지!" (1673년)

 쇼군
"세금만 제때 납부하면
농민들에게 최대한 자치를 부여하겠다능!" (1649년)

또 천주교를 단속하고
도망 농민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시대의 '오가작통법'과 비슷한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고닌구미 제도)
▲ 일본판 오가작통제, 고닌구미 제도(5인조 제도)

"5가구끼리 묶어서
밤낮으로 서로를 감시하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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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오가작통법이
조선에만 있었던 게 아니네?"


● 도시의 발달 : 3도, 조카마치, 역참도시

에도 시대에는 도시가 눈에 띄게 발전한다. 
특히 에도(도쿄)가 그랬다.

결정적 이유는?
참근교대라는 희대의 '뻘짓' 때문이었다.

전국의 다이묘와 그 가솔들이
격년제로 에도에 거주했으니,

에도라는 도시가
얼마나 미어 터졌겠는가!
 

여기에 다이묘의 가족과
그 부하들을 먹여살리려면

수많은 상인·수공업자·일용노동자가 
덩달아 거주를 해야 했으니,

1712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에도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라는

베이징·파리·런던 등이
50~60만 명이던 때였다.

도성 안의 인구가 너무 많다고
임금(영조)이 한탄을 마지않던,

한양의 인구가
당시 20만 명 정도였다.
 
▲ 17세기 런던

한편 도쿄 못지않게
번화한 도시로,

일본의 배꼽이라 할 수 있는
간사이 지방에 위치하며

'유통의 중심지'를 자처하고 있던
오사카가 있었다.
▲ 오사카 쌀시장

이곳으로 전국의 쌀이
집산되고 있었으니,

거대한 쌀 보관 창고만
100여개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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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사카 시장의 쌀 가격이
전국 쌀 시세의 기준이었음."

쌀뿐만 아니었다.
전국의 주요 상품들은 대부분

일단 오사카로 보내져
다시 전국으로 흩어졌고
▲ 오사카의 인공 수로 : 면포를 에도로 옮기는 시합을 벌이고 있다

유통의 편리를 위해
곳곳에 운하가 만들어졌으니,

오사카는 '물의 도시', 
'상인의 거리'로 불리게 된다.
▲ 오사카의 운하

그런가 하면 
덴노가 거주하고 있는 '교토'는

고급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집단 거주하며

직물업·염색업·공예업 등이
발달하고 있었는데,

막부·다이묘·부유한 상인들은 
이곳에서 고급 직물을 구입해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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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 소비도시라면 
오사카는 물류도시, 교토는 수공업의 도시였음."

이런 에도(100만), 오사카(35만), 교토(40만)
흔히 '3도(三都)'라 불렀다.


지방에서도 성 아랫마을,
즉 조카마치(城下町)가 번영을 누리게 되는데
▲ 조카마치는 많게는 2만, 적게는 수천 명 크기의 도시였다.

막부는 무사들을 
농민들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거주지를 다이묘가 사는
성 아랫마을에 위치하도록 했기 때문에

무사들에게 물건을 대주는 상공업자도 
더불어 성 안에 살도록 해줬다.
 
▲ 다만 조닌들은 조닌지(町人地)라는 곳에 모여 살아야 했다

이런 상공업자를 
조닌(町人)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町)
즉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 조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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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왜 일본말은 町 이걸 가지고
'조~', '~마치' 두 가지로 발음하는 거야?"

이런 조카마치는
고을의 정치·군사의 중심지는 물론,

사원과 신사가 위치하고 있어
종교의 거점이기도 했고

시장이 형성되어
지방의 경제·유통의 중심지 역할도 겸했다.

한편 참근을 위해
전국의 수많은 다이묘들이

영지와 에도를 
왔다리 갔다리하는 통에

교통로 주변에는 
수많이 '역참도시'가 건설되게 되는데,

역참도시는 보통 10km마다
1개씩 설치되었고

이곳에는 고급 여관에서
싸구려 여관, 찻집 등이 들어섰다.
▲ 역참도시의 여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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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여관(하타고)에서는
침실과 욕실, 식사가 제공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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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여관(기친야도)에서는
식사 대신에 밥을 지을 취사도구와 땔감만 제공됐음."



산업의 발달 : 겐로쿠 호황은 어디에서 왔는가?

● 대개발 시대

17세기 후반 겐로쿠 시대(1688∼1704)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로 불리는 시기로

상공업자가 무사를 제치고
사회적 중심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또 불과 1세기 만에 
인구가 2.5배나 증가하여 

일본의 국력 신장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던 시기다.


▲ 17세기 경 전성기를 찍고, 이후 150년간 일본은 암흑기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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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비상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일본도 있기 힘들었다능."

그렇다면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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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을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1세기에 걸친 '전국시대'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이
농부로 다시 돌아갔던 게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때 돌아온 고향에서는
땅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욕적으로
땅을 개간했고

막부에서도 '병농분리'와 '토지조사'를 통해
촌락을 재배치하면서
 
▲ 토지조사

용수로를 파서 
새롭게 논을 만드는 등

대대적으로
개간에 착수하게 된다.
▲ 당시 토지조사 실시 지역

그리하여 17세기 초 
164만 정보였던 경지 면적이

18세기 초 297만 정보로
약 2배 가까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 일본의 경지 면적 ☞ 참고

때문에 인구도 
비례적으로 증가해서

17세기 후반 일본은
세계 3~4위 수준의 인구 대국으로 거듭나게 되고

오사카~교토 일대의 인구밀도는
무려 400명/㎢ 이상일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 되었다.

한편 경지 면적의 확충과 함께
이 시기 농업기술도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혁신적인 농기구들이
널리 전파되었고

ⓛ 빗추괭이 : 땅을 보다 깊이 갈 수 있음
 
▲ 그냥 괭이로 팔때보다 깊게 팔 수 있다

② 나락훑기 : 탈곡 도구


③ 풍구 
▲ 손으로 돌려 바람이 불게 해서 낟알과 쭉정이를 선별하는 도구

④ 답차 
▲ 간편한 양수도구로, 논에 물을 대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분뇨보다 효과가 좋다는
'깻묵'과 '어비(魚肥)'가 비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서양 상인에 의해 전래된
신대륙 작물인,

고구마·감자·옥수수·강낭콩·땅콩 등의
'구황작물'도 식량 수급에 커다란 도움을 줬다.

또 '농업전서'와 같은
농서의 보급도 큰 역할을 했다.
(모로 미야, 에도 일본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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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의 학교(서당)에서는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주요 과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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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교본이나 
상업교본이었으니.."

한편 도시가 형성되면서
상업과 유통업이 발전하게 되어,

자연스레 상품작물의 수요가 
늘어나게 됐는데,

상품작물의 소득은
원칙적으로 '면세'라서
(나중에 일부 품목의 경우 과세가 적용됐지만)

농민들은 너도나도 
상품작물을 재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농가소득 향상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주로 재배했던
상품작물은,

뽕나무(비단), 마(삼베), 목화(무명)
염료 재료인 잇꽃(홍화) 


등유 원료인 유채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

담배, 차, 밀감
채소(주로 무) 등이 있었는데,


가장 짭짤했던 것은,
'담배'와 목화를 재배해서 만든 '면포'였다.

그래서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부업으로 
면포를 짜는 경우가 늘어나고,

술을 빚어 
내다 파는 이들도 생겨났다.
▲ 에도시대 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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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부터 일본에서는
청주가 보급되기 시작한다능."


● 유통과 금융업의 발달

말이 끄는 수레로 
곡물을 싣고 운반하게 되면

중간중간 말들에게 
사료를 줘야만 했기에

사료값을 따지면, 손익분기점이
대략 30km 지점에서 나온다고 한다.

즉, 30km의 거리를 넘게 되면
비용이 수익을 초과하기 때문에

식량을 운송할 유인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상업이 발달한 유럽에서
좀처럼 거대 도시가 

출현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 참고

그런 면에서 
삼면이 바다인 조선이나

섬나라인 일본은 
쉽게 거대 소비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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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개경의 인구가
30만 명이었다지."

수운을 통해, 대량의 곡물을 
값싸게 운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로는 전통적으로
섬으로 둘러싸인 '세토내해'의 

비교적 잔잔한 물결을 통해
활발히 이뤄질 수 있었다.
▲ 세토 내해 : 섬으로 둘러싸인 일본의 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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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교토 인근이 일찍부터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음."


그런데 에도시대에는
수도가 태평양을 향해 있었던 바,

새로이 태평양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 에도의 수로

한편 육상 교통로는
'참근교대'로 인해

에도시대 초기부터
대대적으로 정비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길이 
다듬어지고

도로의 1리(400m)마다
이정표가 세워지고

하천에도 쉽게 물을 건널 수 있게
나루터와 배가 설치되게 된다.

또 10km마다 역참도시가 생겨나
숙박시설도 갖춰지게 된다.
 
▲ 역참도시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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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근이 무사들에게는
곤욕스러운 일이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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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상업이 흥하고, 교통이 편리해지고, 
도시가 발전하는 부수효과가 있었음."


한편 중국의 화폐를 사용하던
관행이 사라지면서

에도시대에는 4종류의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화산열도인 일본의 특성상
금, 은, 동과 같은 광석이 많이 산출됐기 때문이다.
▲ 에도시대의 주요 광산

그런데 막부가 
전국의 광산을 대부분 독점하며

화폐 주조권을 장악하고
금화, 은화, 전화(동전)을 유통했으니,

막부의 권력이란,
실로 엄청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에도시대의 금화, 은화, 전화

다만 금과 은은
워낙 오래전부터 채굴된 광석이다 보니

17세기 후반부터 생산량이 급감하여, 
이후 구리의 채굴에만 매진하게 되었고

그것이 막부의 권력 약화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일본에서는 주로 '금'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서일본에서는 주로 '은'으로 거래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환전상'들이 나타나 

돈을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쇼군이나 거상(巨商)들이 
재산을 환전상에 맡기기 시작하면서

환전상들은 예금과 대부를 맡는
'은행 업무'도 병행하게 된다.

한편, 세 종류의 화폐만으로
유통이 충분치 않게 되자

지방의 번에서는
번찰(藩札)이라는 지폐를 발행해서

번 경제를 부양하고
재정의 궁핍함을 해결하기도 했다.
▲ 번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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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에도시대의 지폐는 
번을 벗어나면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음."


● 여행의 발달

참근교대는 
교통망의 빠른 확충과 

숙박업의 발전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자 서민들도 
슬슬 장거리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교통도 좋아졌고 숙박시설도 많은데,
우리도 여행 좀 떠나보면 어떨까?"

 
"에잇, 함부로 무라(村)를 떠나면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는 걸 몰라?"


"이세신궁에 참배하러 간다면 되지.
설마 그것도 못하게 할까?"

"어?"

그리하여 농민들은
영지의 무사들이나

절의 주지스님을 찾아가서
'여행 허가증'을 받아

신사참배를 빌미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가 
17세기 중엽이었다.
▲ 여행허가증

사실 전통시대의 농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대부분 벗어나보질 못했다.

▲ 여행 물품

때문에 당시의 여행이란 
평생에 단 한번 있을 수 있는 특별한 일이었는데,

한번 참배단의 여행이 
시작되자

전국적으로 여행이 
들불처럼 유행으로 번지게 된다.
▲ 참배단

"우리 마을도 이참에 참배단을 만들어 
여행 좀 떠나봅시다."

"허기사, 요즘 담배랑 면포를 내다 팔아
알게 모르게 돈이 짭짤하게 모아졌는데.."

"이걸 딱히 
어디다 쓸 데도 없고."

그렇게 해서, 참배단이 꾸려지고
여행을 떠나게 되면,

지나가는 마을마다
농가의 아낙과 상점의 하인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행렬단 사람들과 어울리며

돈도 주고 음식도 나눠주고
짚신도 공짜로 나눠주곤 했다.

자기 고장 사람들이 아니면
평생 타 지역 사람들과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던
당시의 농민들에게

외지인과 만난다는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여행 열풍은
열병으로 번져 

1830년에만 전국적으로 
486만 명이 참배 여행길에 올랐다니
▲ 전국에서 모인 참배단

한 해 동안에만 
일본인 6명 중 1명이

최장 500~600km에 달하는 
여행을 즐긴 셈이었다.
(모로 미야, 에도 일본 p.149)

그러니 이들과 관련된 숙박업이
얼마나 호황을 누렸겠는가!

다만 여행을 가려면 왕복비용까지
돈이 상당히 들어갔는데

에도에서 가장 수입이 좋다는 목수도 
2~3달치 월급은 모아야 했고

상점의 종업원은, 1년을 꼬박 모아야
갈 수 있는 경비였다.
▲ 여행 중 지출 : 숙박비, 각종 식비, 기념품

그래서 농민들은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따로 '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여기서 에도시대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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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아무런 걱정 없이
전국적으로 행해지려면

그만큼 나라가 평온하고, 
교통이 편리하고,

숙박업이 발달하고,
화폐가 유통되어야 하며,

대중들도 
여유생활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5가지 조건이
에도시대에는 완벽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반면에 
세계사를 들춰봤을 때,

17~18세기경, 
일본처럼 여행이 발전했던 나라는 없었다.

유럽에서는 전쟁의 불길이
끊이지 않았고,

중국이나 독일에서는
고을 하나 넘어갈 때마다 산적들이 출몰했다.
▲ 청나라의 산적 : 화포까지 대동했다

조선에서도 과거 때마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이 있었지만

산적들 때문에
항상 몸을 사려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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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들로 가장 악명 높았던 곳이
바로 남태령이었다능."



겐로쿠 시대 : 일본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

● 무사의 궁핍화

무사들은 '쇼군'과 '다이묘'에서 
말단 '아시가루'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직책에 맞는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아울러 막번의 행정 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
평화의 시대가 전개되고 

대규모 군사 동원이 
자취를 감추게 됨에 따라,

군사적 임무는 사라지고
점점 일반 행정 사무가 중요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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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엽 이후부터 
무사들은 사실상의 문관이었음."

하지만 평화의 시기
무사들은

전쟁의 시기처럼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공무원에 
불과하다 보니

신분상으로는 
최고 지배계급에 있었다지만,

경제적 부를 확보하는 데는
제도적인 한계가 있었다.

 무사
"아놔, 체면 유지비로
쓸 돈은 많은데.."

 무사
"조닌처럼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사
"농민처럼 상품작물을 키워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농업의 증산으로
쌀값이 폭락해

쌀을 봉급으로 받던
무사들의 실질임금은 더욱 더 줄어들고 있었다.

 무사
"이젠 조닌들도
우릴 은근히 무시하는 세상이야."

하지만 돈이 궁하더라도 무사들은 
지배계급으로서 품위를 지켜야만 했다.

 무사
"아무리 궁해도
비단옷은 입어주고.."

 무사
"극장에 가더라도 
1등석에 앉아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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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유곽에 가서
게이샤 만나는 돈만 줄이면 되겠구먼."
(당시까지는 게이샤가 오이란(매춘부)과 분리되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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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도 그만 좀 사보고.."

 무사
"조닌들도 즐기는 걸
왜 우리만 못 하게 해?"

 무사
"생홀아비로 홀로 생활해야하는
에도에서의 1년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유일한 길은 
조닌에게 돈을 꿔 쓰는 것이다.

조닌에게 
돈을 꿔 쓰는 관행은

이 무렵 하급 무사들은 물론,
심지어 쇼군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쇼군
"에겅.. 요즘 광산이 고갈되어서
예전처럼 금, 은이 안 나온다능."

때문에 빚을 진 무사들과
채권자가 된 조닌의 관계가 성립하여,

갈수록 무사들은
조닌들의 눈치를 아니 볼 수 없었다.
 

 다이묘
"돈 좀 꿔주게.."

 조닌
"거, 지난번 꾼 돈도
아직 안 갚지 않았습니까?"

 다이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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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거상이 노하면
다이묘들이 벌벌 떤다더만!"


● 조닌의 시대 : 거대 기업의 등장

전통시대의 국가들은 
전체 인구의 90%인 농민들에게서 

수확물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거둬

전체 인구의 10%인 지배층의 
배를 채우는 구조였다.
 

한반도, 중국, 유럽
모두 이런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에도 시대 이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런데 에도시대에 와서
이런 틀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전체 인구의 85%인 농민들에게서
30~40% 정도를 징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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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작물에 대해서
제대로 과세를 하지 못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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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의 
실질 세율은 약 35% 정도였다고 함."

전체 인구의 8%인 무사들이
제대로 배를 채우지도 못하고

전체 인구의 7%인 조닌들에게 
(富)를 넘겨준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참근교대제'에 있었다.

참근으로 인한 교통·숙박비,
에도에서의 생활비 등으로

무사들은 과연 
어떤 효용을 얻었겠는가?

또 무사들의 막대한 지출은
결국 어떤 이들에게 지불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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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쇼군이 다이묘 견제하려다가
조닌의 힘만 키워준 꼴이었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참근교대제'는 

일본의 발전을
급속화한 '결정타'이기도 했다.

▲ 상인들의 다양한 상품들

덕분에 전국적으로 도로가 닦이고
화폐가 통일되면서,

이전까지 
자급자족 위주였던 경제가

에도를 중심으로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일본 전체가 
하나의 상권으로 묶여졌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런 네트워크를 통해
조닌들이 이익을 독차지했으니,

17세기 후반(겐로쿠 시대)이 되면 
조닌 계층은

누구도 무시할 수없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그러했다.
 

그리고 조닌이 
사회 중심 계층이 되자,

이들은 기존의 관습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상업화됐다.

대표적으로, 1673년에 문을 열었던 
'미쓰이(三井) 포목점'이 그러했다.
▲ 미쓰이 포목점

이 포목점은 훗날 
일본 굴지의 재벌 '미쓰이'의 출발점이었다.

거상(巨商) 미쓰이 타카토시는
포목점을 열고
▲ 미쓰이 타카토시

시대를 뛰어넘는
기발한 상술로 고객들을 홀렸던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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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상점들은, 
손님이 찾으면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식이었다.

 
"에잇, 별론데.."

"그럼, 잠깐 기다려보셈.
딴 것 가져다 보여드릴게."

그런데 미쓰이 포목점은 달랐다.
모든 상품을 진열한 것이다.
▲ 천장에 신상품을 걸어놓은 미쓰이 포목점

"자, 마음대로 골라골라!"

"와! 이렇게 많은 상품이..."

"이거 얼마에요?"

"다섯 냥입니다." 

"현금으로만 됩니다.
에누리는 안 됩니다. 정찰제."

"대신 우리보다 싸게 파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불해 드립니다."

"와! 그런데 아무리 싸도
한 필 이하로는 안 팔죠?"

"한 필이 아니라 
한 조각이라도 얼마든지 팝니다."

"우아! 정말요?"

"게다가 저희 집에는
수십 명의 재단사가 대기 중이라.."

"주문만 하시면 바로
이 자리에서 옷을 만들어드립니다."

"와! 대박!"

믿기지 않겠지만,
340년 전 미쓰이 포목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본인 특유의 상술과 상업 정신은
이때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 나고야의 다이마루 백화점


● 인스턴트 음식의 발달

에도에 들어온 수많은 무사들은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무사들의 육체노동을
나라에서 금했기 때문에,

간단한 사무를 마치면
하루 종일 빈둥빈둥거리다가

때가 되면 
먹고 싸는 게 주요 일과였다.

이런 사무라이가 100만 에도의 인구 중에
절반인 50만이었다.
▲ 에도의 거리 : 장애인의 휠체어(?)도 보인다

이들은 처자식을 영지에 놔두고
다이묘를 따라온 생홀아비들인지라,

무엇보다 식사 문제가 
해결해야 될 과제였다.

때문에 매 끼니
'외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에도를 자연스레,
'상업도시'로 만들어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에도의 상가

에도 사람들 중에, 직접 음식을 해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모로 미야, 에도 일본 p.24)

에도 초기의 상인들은
긴 멜대에 음식이 든 광주리를 달아

즉석에서 만들어온 음식들을 
팔았지만,
 

 무사
"음식이 식어서
별로 맛이 없네.."

17세기 중엽부터, 점포를 갖춘
전문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 일본 최초의 대중 음식점

중국에 비해서는  
천 년이나 뒤졌지만

프랑스 파리에 비해서는 100년,
영국 런던에 비해서는 150년 앞선 시기였다.
(모로 미야, 에도 일본 p.15)

그러다가 
18세기 중엽 이후,

화로가 보급되면서 
포장마차(야타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인기 메뉴는
오늘날 일본 음식을 대표하는 것들로

덴푸라(튀김), 장어꼬치, 스시(초밥)
우동, 소바, 오징어구이, 단팥죽 등이 있었는데,
 

막부에서는 
화재 예방을 이유로

점포에서 덴푸라를 
팔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포장마차들은 
때아닌 성시를 이루기도 했고,
▲ 덴푸라를 사먹는 무사 : 노점상 음식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해서, 
얼굴을 흰 천으로 가리고 먹고 있는 모습이다.

귀족들이나 먹던 '후나즈시'라는 
발효 생선을 흉내내어,

식초를 뿌려 시큼한 맛을 가미한
'스시'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페스트푸드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다.

도시락인 '벤토'도
이 시기에 등장하는데,

주먹밥과 장아찌만으로 만들어진
간단한 벤토에서
▲ 주먹밥을 먹고 있는 서민들

여러 층으로 된 찬합에 
술병을 넣은

호화스런 벤또까지
상인들에 의해 팔리고 있었으니,
▲ 고급 벤토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거나

나들이를 즐기면서 먹기에 
벤토만한 게 없었다.
▲ 나들이를 즐기며 벤토를 먹고 있는 무사


● 조닌의 소비 문화 : 가부키, 우키요에, 유곽

가부키란 
배우가 관객들 앞에서

(歌:노래), 무(舞:춤), 기(技:재주)를 
선보이는 공연 예술을 말한다.
 

가부키의 전신은
무로마치 시기의 가면극에서 출발하는데,
▲ 무로마치 시기의 극장 :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에도시대가 되면
조닌들의 문화 소비의 욕구와 맞물려

가부키 산업은
큰 호황을 누리게 되어,

당시 에도에만 
유명한 극장들이 여럿 있었고
▲ 가부키 극장

극장 앞은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그런데 이때 좌석을 메운 사람들은 
대부분이 조닌이었다.

과거에는 문화를 이해하고
소비하는 계층이 귀족들이었지만,

이제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극장 좌석은 1등석과 2등석으로
나누어졌는데,

1등석은 2등석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사들은 돈이 궁해도
체면을 위해 한사코 1등석에 앉아야만 했다.

 무사
"내 체면이 있지!"

가부키는 다양한 볼거리로 
공연 내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이때 배우의 
머리 모양, 의상들은

조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 나가기도 했다.

 조닌
"이게 요즘 최신 유행하는 
패션과 헤어 스타일."

그리고 그런 유행을
무사들까지도 따라 하고자 했으니

한 번은 쇼군이
단단히 화가 난 적도 있었다.

 쇼군
"요즘 무사들
너무 화려한 겉치장에만 신경 쓰는 게 아닌가!"

한편 조닌들이 즐기던 문화예술로
가부키 말고도 '우키요에'가 있었다.

'우키요에'는 목판에 새겨 
찍어 낸 풍속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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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일본판 민화(民畵)"

처음에는 붓으로 그렸지만,
목판화 기법이 고안되면서 

대량의 그림을 
값싸게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판화로 찍어낸 최초의 그림, 일본 회화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색깔도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바꿀 수 있었고,

그림의 주제도 누구나 좋아하는
가부키 배우, 미인, 자연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춘화'도 우키요에의 
중요한 소재로 빼놓을 수 없었다.

여기에 출판업의 발달로
야설(야한 소설) 또한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물론 매춘업의 소비도
왕성해서

'유곽'이 세워진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는데,
▲ 무사를 궁핍으로 몰아넣은 매춘업소, 유곽

당시 유곽에서는 
남창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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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이런 변화는 모두가 
부유해진 상인들이

신분에 대한 억압을
소비로 분출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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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일본이 윤락 산업이 발달하고
만화 강국이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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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이런 조닌 문화의 발달에
연원하고 있다능."


● 대중들의 높아진 교육열

흔히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
일본은 무사의 나라여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이
조선이 더 많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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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일본은
무사의 나라가 아니었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상인'의 나라였다.

그러니 장사를 하기 위해 
그들은 문자가 필요했던 것이고,
▲ 에도시대 상인의 장부

에도시대 일본의 문해율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19세기 일본의 문해율은
남자 54%, 여자 20%로
(모로 미야, 에도 일본 p.98)

같은 시기 영국과 프랑스와 비교해도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
 

조선은 어떠했는가?
전체 인구의 10% 남짓한 양반과 중인,

그리고 일부 상민이 
글을 읽을 줄 알았다지만,

인구의 절반인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글을 몰랐다.

그러니 조선시대의 문해율은 
기껏해야 10% 남짓한 수준이었고,

이는 일제강점기 초, 조선인들의 문해율이 
10% 수준이었던 것만 봐도 간접 증명이 된다.

 


그런데 에도시대 일본인들은
남녀 합산 40%에 가까운 문해율을 보였던 것이다.
(모로 미야, 에도 일본 p.98)

어찌 된 영문일까?
막부가 서민 교육에 발 벗고 나선 결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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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럴 리 없다.

바로 조닌이 
사회의 중심이 되면서

자연스레 일반 서민들까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 서민들의 학교 '데라코야'

유럽에서도 
문해율이 높아진 계기는
 

부르주아 계층들이 
자식들에게 상업활동에 필요한 

쓰기·읽기·산수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 참고
 

조선의 경우도 
교육의 관심은 매우 높았지만,

글은 특권층이
백성을 지배하려던 수단이었기에

누구나 함부로 교육받을 수는 없었다.
여성의 경우는 특히 그러했다. 

다만 교육 환경은
조선의 '서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에도시대 말기, 에도에서만 
1천 개가 넘는 서당이 있었고

전국적으로 
2만 개가 넘게 있었다.
▲ 일본의 서당, 데라코야 : 1872년 소학교 제도가 생기면서 점차 사라졌다

촌락마다 1~2개씩의 
서당이 있었던 것이다.

서당의 훈장들을 보면
절반이 농민이나 상인 출신이었고

도시의 경우
1/3이 여성이었다.

특징이라면
남녀가 같이 배웠는데,

학생 수가 적은 곳은 10~20명이었지만
200명이나 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배우는 과목은
조선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본적으로 
히라가나, 가타가나, 한문을 배웠고

편지 쓰는 법, 농사짓는 법, 목공술, 
상업 교본, 주판 등

실용적인 학문이 
주류를 이뤘기 때문이다.

무사들의 경우 
'한코(藩校)'라는 전용 학교에서 배웠는데

이곳은 규율도 엄격하고, 
'주자학'과 같은 수준 높은 학문을 주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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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들에게는 
충효사상이 중요했으니깐.."

돈 많은 조닌 출신의 자제도 
한코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는,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고등 서당'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 고등서당에서는 난학(蘭學)을 가르쳤다.

에도 말기가 되면, 주자학만 가르치는 
한코에 염증을 느낀 무사 자제들이

대거 '고등서당'으로 전학해 
서구문화를 배우는 사례가 늘어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단기간 내에 

서구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전부터 
'고등 서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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