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진출과 근세의 시작
● 유럽과 일본의 만남 : 바닷길과 은(銀)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이어 준 길은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 3개가 있다.
▲ 통합적인 바닷길은 16세기 서유럽인들에 의해 개척된다.
이 중에 최초로 등장한 길은
초원길이었고,
그다음에 비단길,
마지막에는 바닷길이 등장하게 된다.
유라시아 대륙의 문명은
이러한 길들을 통해서
▲ 마르코폴로의 여행
인간·물자·정보가 이동을 했고,
길을 장악한 세력은 권력을 창출하여
곧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먼저, 석기시대부터 활용된
'초원길'을 차지했던 세력은 유목민족이었다.
▲ 초원길
이때 농경민족들은
초원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지라,
유목민족보다 인간·물자·정보의 흐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청동기·철기,
각종 문물과 기술 등은
'초원길'을 장악한 유목민족에 의해
농경민족으로 전파가 된 경우가 많았다.
▲ 스키타이인들의 세공술
그러다 농경민족이 유목민족을
앞서기 시작했던 것은
2천 년 전 '비단길'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 비단길
당시 지구촌의 기후가
온난했기 때문에
초원지대까지 농경지가 확장되어
농경 민족의 국력이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지역을 장악한 로마제국과
서역을 장악한 한나라가
이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양대 축으로 군림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길'에서 멀리 떨어진 민족들은
여전히 문명의 혜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어서
15세기까지 서유럽과 일본 열도는
세계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서유럽은
십자군전쟁(1096~1272)을 통해서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던
중국과 중동의 문물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서유럽인들의
각성을 촉진시켜
15세기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유럽과 중동 지역은
여전히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며
유럽과 아시아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 당시 유럽의 진출을 막은 장본인, 오스만 투르크
유럽은 바다를 통해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으니
15세기 후반 이후
지구촌 곳곳에서 '바닷길'을 만들게 된다.
"1492년 콜럼버스가 개척한
유럽 ~ 아메리카 바닷길"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개척한
유럽 ~ 인도 바닷길"
"1522년 마젤란이 개척한
유럽 ~ 태평양 바닷길"
그러자 뜬금없이
혜택을 받는 곳이 하나 생겨났다.
바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었던
일본 열도였다.
서유럽과 일본은
기존의 초원길과 비단길을 통해서는
상호 교류가
거의 어려웠지만,
바닷길은 이런 두 세계를
하나로 만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 시작은 1543년,
포르투갈 선박이 태풍을 만나
규슈 남단의 다네가 섬에
표착한 것을 계기로 하는데,
포르투갈 상인
"아놔, 마카오를 가려다
태풍을 만나 이런 곳까지 와버렸네."
이때 포르투갈인은
철로 만든 조총을 가지고 있어서
호기심 많은 다네가 섬의 영주는
포르투갈인이 가지고 온 조총을 발사해 보도록 했다.
"탕!"
그러자 총자루 끝의 구멍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더니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목표물인 오리를 명중시켰다.
"우와!"
그 위력에 감탄한 영주는
은을 지불하고 조총 두 자루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영주
"나한테 팔아!"
여기에서 일본의 행운을
아니 물을 수가 없다.
신기조산대인
일본의 지형은
▲ 환태평양 조산대 : 페루와 멕시코의 은, 칠레의 구리가 유명하다
금, 은, 구리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고,
▲ 에도시대의 주요 광산
마침 조선으로부터
은 제련법까지 전수받아
은을 자체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있었을 때였다.
만약 이때 일본이 유럽인들을 홀릴 수 있는
막대한 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포르투갈인은 그처럼 일본을
관심에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당시 일본의 금화와 은화
포르투갈 상인
"오! 얘네들 '은' 많네."
● 3인의 영웅
골목대장들이 난무하던
전국시대 후기,
지역을 넘어
일본 전체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지닌
세 명의 영웅이 등장한다.
오다 노부나가(1534년생),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년생),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년생)가 바로 그들이다.
▲ 좌측부터 :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일본에서 이 세 사람은
지금도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우리나라의 경우 최고의 영웅은
대개 '이순신 장군'이 나오지만,
일본인들의 최고 영웅은
이 세 사람 중에서 꼽힌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에 의해서 일본은
중세를 벗어나 근세로 발전할 수 있었다능."
이 셋의 차이를 보여 주는
단적인 이야기가 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새가 있다.
새를 어떻에 울려볼 것인가?
노부나가
"울어!"
노부나가
"어, 안 울어?"
화가 난 노부나가는
그 자리에서 새를 칼로 베어버린다.
히데요시
"새야 울어봐."
히데요시
"까꿍 까꿍, 옳지 옳지.."
이렇게 히데요시는
새 앞에서 온갖 재롱을 다 떤다.
이에야스
"새가 울지 않는다고?"
이에야스
"언젠가는 울겠지 뭐."
그러면서 이에야스는
드러누워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이처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다.
노부나가는 다혈질에 성미가 급한 반면
결단력이 있었고
히데요시는 대단히 꾀가 많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이에야스는 야망을 위해
자기를 통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세 사람을 장수에 비유하자면,
노부나가는 용맹스러운 '용장',
히데요시는 지혜로는 '지장',
이에야스는 너그러운 '덕장'이라 할 수 있었다.
죽은 나이도
성질이 급한 순서 대로였다.
노부나가 : 48세
히데요시 : 61세
이에야스 : 73세
▲ 키 순서는 이렇다 : 노부나가 165, 히데요시 140, 이에야스 157 (당시 일본 남성 평균키 155)
통일 과정에서
이 세 사람의 업적을 묘사한 유명한 글이 있다.
노부나가가 쌀을 씻고
히데요시가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면
이를 힘 안 들이고 먹은 이는
이에야스였다.
● 오다 노부나가, 총(銃)으로 열도를 호령하다
남만인(南蠻人 : 남쪽의 오랑캐 =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다네가 섬의 영주가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쥐었다는 소문은
곧 외지에서도 알려져
오사카 상인까지 다네가 섬에 와서
총 만드는 기술을 배워 갔다.
상인
"오! 저걸 배워서 내다 팔면
큰 돈을 벌겠구나!"
"화살보다 멀리 나가지도 않고
장전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던데.."
"왜 굳이 그걸 만들어
팔려고 하는 거임?"
"듣자 하니 화살 4~5발을 쏠 때
철포는 겨우 1발 쏠 수 있다며?"
상인
"모르는 소리!
화살 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상인
"활을 제대로 쏘려면
수년간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고.."
상인
"농민들은 농사짓기도 빠듯한데
평소 어떻게 활 쏘기를 연마할 수 있겠음?"
상인
"그런데 철포는 별다른 훈련 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음."
▲ 총 만드는 장인
그런 조총(철포)의 장점을
누구보다 먼저 꿰뚫어보아
대량으로
구입한 다음,
조총을 주력 무기로 하여
군대를 양성했던 것이
바로 전국 시대 3인의 영웅 중 하나인
오다 노부나가였다.
다만 당시의 조총은
상당히 원시적이어서
장전을 해서 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비가 오면 화약이 젖어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조총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민하던 노부나가는
마침내 그 해결책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조총 부대를 3열로 배치한 다음
차례대로 사격을 가함으로써
연발 사격의 효과를
노부나가
"1조 사격!"
노부나가
"2조는 심지에 불붙이고,
3조는 약실에 화약 집어넣어!"
"탕탕탕!"
노부나가
"좋았어!"
노부나가
"이러면 버벅거리지 않아도 되겠어!"
이후 조총 부대를
실전에 사용한 노부나가의 군대는
병사의 수가 10배나 되는 적을 무찌르는 등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노부나가
"좋아!"
더욱이 일본 경제의 중심지인
교토·오사카 일대를 거점으로 확장했던 탓에
더욱 빠르게 열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어서,
"조선의 경제 중심지가
경상·전라·충청의 삼남지방이었다면,"
"일본은 에도시대 이전까지 줄곧
교토·오사카의 기나이(수도권) 지방이었다능."
▲ 기나이 지방(수도권 지역) : 당시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1573년 교토에 입성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더니,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일본 최강의 기병대와 맞싸워
상대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 나가시노 당시의 조총수
당시 나가시노 전투는, 17년 뒤 조선에서 있었던
'탄금대 전투'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먼저 기병이 돌진한다.
그러면 목책 뒤에서
노부나가의 군대가 총을 쏜다.
그러자 너무도 싱겁게
게임은 끝났다.
"우아! 조총 저거 끝내주네."
이후 기병으로 결정타를 날리던
일본군의 전법은
조총의 등장으로
보병 중심의 전법으로 빠르게 바뀌게 되었고,
성을 쌓는 방법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으니,
총과 대포라는 화약무기에 견디려면
성의 외벽은 견고해야만 했고
성 안 역시 총과 대포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때문에 성을 천수대 위에
쌓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왜성의 모습은
조총이 등장하는
전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의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 노부나가의 영토 확장 : 1575년까지 수도권(기나이) 일대를 모두 점령하게 된다
그러한 만족감의 일환으로
1579년,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아즈치 성'을 완성하게 된다.
● 낡은 중세의 질서를 타파하다
전국시대라 하면
대개 '전쟁'과 '살육' 등을
연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전쟁을 하려면 무엇보다
농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야 했다.
그런데 전국 시대 초기만 해도
농민들은
세금 감면 요구를
영주가 들어주지 않으면
"세금이 너무 높다. 세금을 낮춰라!"
토지를 버리고
다른 영지로 도망쳐버리곤 했다.
"여기 아니어도
살 곳은 많다고!"
때문에 다이묘들은
먼저 내실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묘
"뭐? 전쟁?
전쟁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
다이묘
"농민들한테 지지를 얻으려면
세금 줄여줘야지, 저수지 만들어줘야지, 황무지 개간해줘야지.."
다이묘
"신경 쓸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님."
그런데 농민보다
더 골치 아픈 상대는 스님들이었다.
다이묘
"이 넘의 땡중들은
평소 세금 한 푼 내는 걸 못 봤어."
다이묘
"그러면서 툭하면, 순진한 백성들 꼬드겨서
잇키(항쟁)나 일으키려 하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스님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왜냐? 승병들의 싸움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이묘
"나원참, 스님이야, 조폭이야?"
때문에 일본 열도를 제패하고도
노부나가는 한동안
스님들 때문에
골치 깨나 썩어야 했고
▲ 조총을 사용했던 승병들
노부나가
"아놔.."
겨우겨우 회유와 협박으로
불교계의 힘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한반도의 역사가 그랬지만
일본의 역사도
불교 세력은
낡은 중세시대를 상징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중세시대를 상징했듯이."
오다 노부나가는
불교를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 무렵 일본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천주교(예수회)를 의도적으로 키워줬다.
▲ 서양인이 그린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
사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의 무역은
선교 활동과 연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에 나서
일본 전역에만 천주교 신자들이
25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 16세기 후반 일본의 교회
그런데 노부나가는
선교사들의 교토 거주를 허락하고,
교토에 성당(남만사 : 南蠻寺)개축을
허가하는 등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 남만사
노부나가
"지겨운 불교 세력을 타파할 수 있다면야
남만인의 종교인들 뭐가 대수야."
▲ 남만사
아울러 노부나가는
중세의 신분질서를 전면 다듬었다.
노부나가
"앞으로 직업 군인을
양성할 테니.."
노부나가
"병사들은 전투가 끝났다고
농사일하러 내려가지 말라능."
이것이 일본 근세 시대의 특징인
'병농 분리정책'의 시작이었다.
또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자유로운 영업을 보장해 주고자 했으니,
노부나가
"앞으로 길가에 검문소(관소)를 철폐하겠으니
통행세를 걷지 말라능!"
▲ 당시 통행세를 징수했던 '관소'
물자의 운반이나 상인들의 이동이
예전보다 훨씬 편리하게 되어
상업 활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전국 통일과 조선 침략
●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통일을 눈앞에 둔 1582년,
노부나가는
교토에 있는 혼노지(本能寺 : 본능사)란 절에
주둔해 있었는데,
▲ 교토의 혼노지
노부나가
"이제 일본 천하는
곧 내 것이 된다!"
이때 난데없이 부하 장수가 배반해
노부나가를 공격했으니,
배신자
"노부나가만 없애면
천하는 내 것이 된다!"
깊은 밤 기습을 당한 노부나가는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수적인 열세를 당해낼 수 없었던지라
할복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노부나가
"으.. 원통하다.
통일이 바로 눈앞인데!"
그래서 지금도 일본엔
이런 말이 있다.
"적은 바로
혼노지에 있다!"
적은 밖이 아닌
내부에 있다는 의미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 히데요시의 초상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아끼는
충성스러운 심복이었다.
그는 바늘 장사까지 해본
최하급 무사 출신이었지만,
노부나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추운 겨울, 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데우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노부나가
"누구냐? 내 신을
이렇게 따뜻하게 해 놓은 자가?"
히데요시
"접니다, 주군."
그런데 노부나가가 죽자
잽싸게 칼을 들고 출동하여
주군을 배신한 세력을 죽이고
스스로 노부나가가 누렸던 권력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
"에헴!"
이후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을 건축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가 하면
당시 최대의 경쟁자였던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어
이에야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히데요시
"나랑 싸우겠음?
아니면 강화를 맺겠음?"
이에야스
"히데요시 님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히데요시
"그러면 자네를 앞으로
에도(도쿄)의 다이묘로 임명하겠음."
이에야스
"읭? 거긴 좀..
가마쿠라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히데요시
"에도로 가셈!
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셈."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군사적 요충지인 가마쿠라로 가면
장차 어떤 짓을 할까 두려워
황량한 갈대밭이었던
변방의 에도로
쫓아냈던 것이다.
그렇게 경쟁자 이에야스를
내친 히데요시는
1590년 일본 전역을 차지하여
100년에 걸친
전란을 끝내고
새롭게 일본 열도를 통일하게 된다.
● 히데요시의 정책 : 토지조사, 신분통제, 도검몰수, 천주교 탄압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 직후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토지조사'였다.
히데요시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량을 조사해서 보고하라능."
▲ 당시 토지조사 실시 지역
그리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다이묘들의 능력치를
쌀을 기준(고쿠다카 : 石高)으로 해서 나눴으니,
▲ 토지조사
다이묘 A
15만 석
다이묘 B
20만 석
다이묘 C
30만 석
"참고로 1석은 대략 성인 1명이
1년간 먹을 쌀의 양과 비슷했다능."
그리고 이를 통해서
쇼군은 다이묘들에게 '군역'을 요구했던 것이다.
히데요시
"네 땅에서는 쌀 20만 석이 생산되니
앞으로 군사를 2천 명 징발하도록."
아울러 당시의
토지 조사는
하나의 토지에 얽혀 있던
여러 단계의 '중간착취'를 개선하여
경작자와 납세자를 일치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히 획기적이었다.
히데요시
"이제부터 농민에게
토지 소유권을 주겠음."
히데요시
"그러니 앞으로 세금은
농민이 직접 다이묘에게 갖다 바치라능."
때문에 '농민→작은 영주→큰 영주→다이묘'로
복잡하게 관계가 얽혀 있었던 조세제도가
'농민→다이묘'로
간소화된다.
▲ 당시 농민이 부담한 쌀 : 가마니의 모양이 우리와는 다르다
여기에 무사, 농민, 수공업자, 상인으로
신분을 철저하게 구분하여
직업 간의 이동을
금지시켰으니, (신분통제령)
무사는 상인이 될 수 없고,
농민은 장사꾼이 될 수 없도록
신분을
고정시킨 것이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농민이 장사에 손을 못 대게 하려고
상인을 심하게 폄하하면서
가장 천한 계급으로 분류했다.
히데요시
"장사치가 늘어나면
농민이 농사에 전념할 수 없게 됨."
히데요시
"귀중한 식량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사고파는 상인들은 '사회의 기생충'들임!"
이는 상업을 중시하던
노부나가와는 전혀 다른 발상이었다.
히데요시
"설마 사농공상 순서인데도
상인이 되겠다고 하는 자는 없겠지?"
▲ 덕분에 농민의 비율을 85% 정도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신분을 묶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지난날처럼, 농민들이 전국시대를 틈타
전쟁에 뛰어들어 무사가 되고,
다이묘로 성장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 농민을 두 번 째로 놓은 것은 '사회적 세뇌'일 뿐,
실제로 농민의 지위나 생활이 공상(工商)보다 나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히데요시
"농민이 제 분수를 모르고
신분 상승을 꿈꾸면.."
히데요시
"사회가 혼란해지고
농사일이 제대로 안 된다능!"
'쳇!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여기에 히데요시는
농민들에게 무기를 몰수하여
무사들만이 칼과 그 밖의 무기를
소유할 수 있도록 법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도검 몰수령)
히데요시
"지겨운 잇키(농민 저항)를 봉쇄하려면
농민들한테 칼부터 빼앗아야 겠다능."
또 무사에게는
육체노동을 금기시켰으니,
이후 무사 계급들은
지배 계급으로 굳어져 가게 된다.
▲ 에도시대의 무사는 조선시대의 양반과 하는 일들이 거의 같았다 (칼은 장식품)
한마디로 히데요시의
'사농공상' 신분질서 정책은
전국시대와 같은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천주교가 문제였다.
히데요시
"뭐? 인간이 평등하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히데요시
"당장 천주교 선교사들을 잡아서
처형시키라!"
그리하여 나가사키에서
스페인 선교사와 신자 26명이 처형되었다.
다만 히데요시는
천주교 포교를 거부했을 뿐,
유럽과의 교역은
계속 인정했다.
히데요시
"남만인과의 교역은 좋지만
천주교는 싫어!"
● 히데요시, 조선을 침략하다
전국 통일로
기세가 등등해진 히데요시는
곧 군대를 동원해
조선과 명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면서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과
토지를 넓히려는 다이묘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또 전쟁을 틈타 총과 화약을 팔아
떼돈을 벌려는 상인들의 부추김도 한몫했다.
여기에 16세기 중반 이후
봉쇄된 중국과의 교역(조공무역)을
다시 트기 위한
바람도 있었다.
▲ 견명선
이와 같은 사실은 1593년 도요토미가
명나라에 요구했던 사항에도 읽을 수 있다.
히데요시
"일본군을 물리겠으니,
감합무역을 다시 복구하고.."
히데요시
"조선의 8도 중 4도를
우리에게 넘겨주삼."
그런 욕심에서
1592년 4월 13일 새벽,
도요토미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16만 대군을 조선에 상륙시켰고
부산을 점령한 뒤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게 된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냥 걸어가도
하루에 5시간씩 걸어야 20일 만에 도착하게 됨."
"한국전쟁 당시 파죽지세로 밀고 왔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이 40일이었음."
"그런데 20일이라는 건.."
하지만 일본군의 진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니,
함경도까지 진출하면서
조선의 대부분을 점령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임금 선조는
영토를 명나라에 바치고, 망명을 갈 생각까지 했었다.
선조
"에겅.."
하긴 어쩔 수 없었다.
조선은 200년 넘게 전쟁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일본은 1세기에 걸친 전쟁으로
실전 경험이 많았고
조총이라는 신형 무기까지
동원하고 있었으니,
조선군이 초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뜨아!"
이때 계속되는 승전보에
들뜬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넘어
인도까지 점령하겠다고 큰소리치게 된다.
히데요시
"하하하. 세계를 제패해주지!"
하지만 명나라의 참전이
전환점이 되었다.
▲ '불랑기포'라는 신식화포로 평양성을 공격하고 있는 명나라군
평양성을 탈환당한 이후
일본군은 좀처럼 진격하지 못했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연전연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들고일어나면서
일본군은
지루한 전쟁의 늪에 빠졌다.
히데요시
"아놔.."
이후로 전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해서
굶주림에 인육을 먹는 일까지
횡행하고 있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일본군을 격려하기 위해
이런 포고를 내렸다.
히데요시
"한 사람당
조선인 세 명의 코를 베어 와라."
히데요시
"많으면 많을수록 너희에게
돌아가는 포상은 커질 것이다."
처음에는 그 증거로
머리를 가져오게 했지만,
머리는 무겁고 부피가 크다는 이유로
귀로 바뀌었다.
▲ 교토의 조선인 귀무덤
하지만 양쪽 귀를 모두 잘라 와서
전과를 두 배로 늘리는 경우가 발생하자,
이를 방지할 목적으로 귀 대신
코를 베어 오게 했고
일본군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애꿎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코를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베어진 코는
일본 본토로 보내어져서
홍보 목적으로, 코를 담은 독을 수레에 싣고
교토를 순회하기도 했다.
한편 히데요시의 명령과는 별개로
임란에 참전한 다이묘들은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해
여기저기서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가기 시작했다.
"전쟁 비용도 건지지 못할 판국이니
조선인 포로라도 잡아가야지 뭐.."
그렇게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인들의 하인(머슴)이 되어
농사를 짓거나
허드렛일을 하게 됐다.
또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관청에서 일했는데,
포로로 끌려온 기술자 가운데
유독 '도공'이 많았다.
"일본에는 당시까지
희고 단단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음."
"그런데 차(茶)문화가 발달하자
자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음."
그리고 조선인 도공이
자기를 생산하게 되자
곧 일본의 주요 수출품이 되어
유럽에서까지 명성을 얻게 된다.
▲ 17세기 유럽으로 팔려나간 일본의 도자기
임진왜란의 또 다른 이름이
'도자기 전쟁'인 것은
바로 당시에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문화
약 1세기에 걸친
전국시대의 전란을 통해
다이묘들은 경제발전을 위해
저마다 상업을 꾀했기 때문에
전란 시기의 일본 열도는
오히려 경제와 문화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고,
▲ 직물을 만드는 장인
군수품을 팔아먹던
상인들은
전쟁에 편승해서
거대 상인(호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갑옷 가게
"자, 갑옷이 왔어요,
도검이 왔어요."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 철포가 왔어요.
골라골라!"
여기에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노력으로
이제까지 일본 문화를 담당하던
사원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불교적인 문화 색채가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고,
그 자리를 새롭게 교류를 시작한
'유럽의 문화'가 빠르게 침투하게 되어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성격의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당시의 문화를, 흔히 아즈치·모모야마 문화라고 함.
아즈치는 노부나가의 성(城), 모모야마는 히데요시의 성(城)에서 따온 말."
"때문에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집권했던 30년 기간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도 한다능."
이런 아즈치·모모야마 문화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곽 건축이다.
이전까지의 성곽은
주로 산지에 지어졌지만,
이 시대에는
교통이 편리한 평지에 위치하여,
아래에 높은 천수대를 쌓고
해자로 둘러친 양식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음, 외양도 멋지고
성도 훨씬 튼튼해졌고.."
이는 전국시대의 성처럼
'전투적 기능'을 계속 보유하면서도
'행정의 중심지'라는 성격까지
지니게 됐음을 의미했다.
▲ 아즈치 성과 오사카 성
한편 이 시기에
유럽 문화와도 접촉도 활발해져
시계, 안경, 화승총, 포도주,
오르골, 오르간, 비올라 등의 문물이 들어왔고
▲ 시계, 안경, 오르골
▲ 서양인들과 놀이 중인 일본인 : 실내에 오르간이 보인다
서민들 사이에는
흡연의 풍습도 퍼지게 된다.
▲ 담배를 피는 상인
또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의 학문과
항해술과 서양화의 기법 등이 전해지고,
서양식 활자 인쇄술이 들어와
이솝 이야기 등의 서적이 간행되기도 했다.
▲ 해부학 책
한편 임진왜란을 계기로 약탈해온
동(銅)활자를 이용하여 서적을 간행하고
붙잡아간 도공들의 손으로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비록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변화는 엄청났다능."
에도막부의 성립
● 히데요시의 죽음과 이에야스의 등극
전쟁이 끝나 갈 무렵
히데요시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56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히데요리의 장래였다.
히데요시
"내가 죽으면
히데요리는 어찌 될꼬?"
히데요시는
아들이 태어나자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양자로 삼았던
조카를 할복시키고,
그의 가족까지 몰살했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1598년 여름,
5명의 다이로(大老 : 높은 신하)를 불러 울면서 부탁했다.
"자네들이 어린 히데요리를 지켜주게."
그리고 나서
히데요시는 눈을 감았고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 있던 일본군에게는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7년간을 끌어오던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군인과 다이묘들에게
나눠 줄 전리품이 거의 없는 상태로
전쟁이 끝나자,
무사의 불만이 커지고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약했졌다.
"아놔, 괜히 전쟁을 일으켜 가지고.."
이런 상황을 틈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당시 이에야스는
간토(관동) 지역의 영역을 크게 확장해서
250만 석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당시 내로라하는 다이묘들도
보통 30만 석이었다.
당초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변방에 내쫓기 위해서
갈대로 가득찬
에도 평원의 갯벌을 내줬지만,
이에야스는 야심을 품고
에도 평원을 옥토로 일구고
에도 만 어귀의
얕은 바다를 메우고,
강의 흐름을 바꿔
에도에 상수도를 만들고
▲ 에도의 건설
직선 도로의
계획도시를 만들어
백성들을 하나둘 모여들게 만들며
묵묵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이에야스
"알고보니깐 에도 평원이 엄청 넓어."
이에야스
"이런 옥토가 없다능."
▲ 드넓은 에도 평야 (간토평야) :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일본에서도 매우 특이한 지형
게다가 그는
조선 침략에도 가담하지 않아
자신의 세력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
▲ 이에야스의 세력 : 흰색
그러니 히데요시의 죽음은
이에야스에게는 대권을 움켜쥘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 에도 막부의 성립
히데요시가 죽자,
무사들은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무신파'와
일본에 남아 전쟁 물자 보급 등을 담당했던
'문신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무신파'는
히데요시에 대한 불만이 컸고
무력으로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반면
무신파
"이제 히데요시의 시대는 갔어!"
'문신파'는
히데요시 체제가 유지되길 바라며
학문과 법령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신파
"우리 나라도 이젠
문치주의를 할 때야!"
이때 이에야스는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녀딸을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도요토미 가문과
돈독한 친분을 쌓아가는 척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무신파가 무력으로 문신파를 몰아내려 하자
다급해진 문신파는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문신파
"도쿠가와 님은 도요토미 가문과 사돈이시고
히데요리 님의 보호자가 아니십니까?"
이에야스
"그렇지."
문신파
"그렇다면 불순한 무리들을
응징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때 이에야스는
검은 본색을 드러낸다.
이에야스
"불순한 자는 바로 자네 아닌가?"
이에야스
"어린 히데요를 등에 업고
권력을 탐하려 하다니!"
문신파
"읭? 제가요? 언제요?"
문신파는 그렇게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쫓겨나다시피했다.
문신파
"이에야스 이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어."
문신파
"이왕 이렇게 된 거,
전쟁밖에는 다른 수가 없겠어."
그렇게 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때 이에야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신파의 선두로 나서,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하게 된다.
이에야스
"나 지금 히데요시한테
배신하는 거 아님."
이에야스
"나라를 가르고 혼란에 빠뜨린
역적들을 토벌하려는 것이지!"
그리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 현) 평원에서
운명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에야스가 이끄는 9만의 군대는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군,
12만 문신파의 군대는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군이었다.
그리고 전투는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으니,
이 승리로 일본 천하는
이에야스의 차지가 되었고
히데요시 세력을
쓸어낸 전쟁이었으나,
이에야스는
어린 히데요리의 보호자로 남아
명분도 얻고
실리도 얻게 된다.
이에야스
"하하하"
그리고 1603년 이에야스는
에도에 막부를 세우고, 직접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이로써 일본 역사상
세 번째 막부가 출범되게 된다.
"에도(도쿄)는 이후로 실질적인 일본의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지."
● 막부의 권력 강화 : 다이묘 차별, 무가제법도, 참근교대제
쇼군이 된 이에야스는
무엇보다 강력한 막부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이에야스
"이전의 막부들이 실패했던 이유는
지방 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야!"
때문에 이에야스는
전국의 다이묘들을 3개 등급으로 나누어,
이에야스
"1등급은 나의 친족들!"
이에야스
"2등급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나를 따르던 무리들."
이에야스
"3등급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나를 따르던 무리들."
1등급(신반 다이묘)에게는
에도 인근의 노른자위 지역을,
2등급(후다이 다이묘)에게는
그보다 외곽의 지역을,
3등급(도자마 다이묘)은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의 벽지를 나누어줌으로써
에도를 보호하는 한편,
위험요소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야스
"충성도에 따라
적절히 차별 대우를 하는 거야!"
또 전국의 행정 단위를
종래의 국(國)에서
번(藩)으로 바꿔
다이묘를 번주(藩主)라 부르게 된다.
한편 끝까지 자신을 따르지 않는 다이묘들에게는
자결을 명령했는데,
이에야스
"할복하라!"
그리하여 섬기던 주군을 잃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실직 무사'가 발생했으니,
이들을 '낭인(浪人 : 유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이에야스였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가 항상 마음의 걸림돌이었으니,
▲ 도요토미 히데요리
당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를 유지하면서
오사카 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에야스
"히데요리가 벌써 성인이 되었어."
이에야스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을
마음 속에 품은 세력들도 만만치 않고.."
때문에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제거하고자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거병을 하게 되는데, (1614, 오사카 전투)
이에야스
"히데요리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
이때 이중으로 해자가 되어있는
오사카 성을 함락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6개월 넘게 팽팽히 맞서다가
1615년 겨우 성을 함락하게 되었으니,
결국 히데요리는
할복을 하고,
오사카 성은
전부 불에 타 사라지고 만다.
당시 유럽 상인의 증언에 따르면
오사카 성내의 10만여 명의 주민들이
죄다 목이 베어져
▲ 당시 학살을 당했던 민간인들
이에야스
"드디어 작은 불씨까지
모두 다 꺼트렸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자
이에야스는 곧 이런 명령을 내린다.
이에야스
"이제부터 번마다 다이묘가 거주하는
본성(本城)을 제외한,"
이에야스
"지성(支城)은
모두 없애버려라." (1616, 일국일성령)
이런 명령은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다이묘들의 군사적 거점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오히려 성이 하나만 존재하게 되자
다이묘에게 저항하는
다른 무사 세력이 약화되어
다이묘(번주)의 권력 강화에만
큰 도움을 준 것이 아닌가!
이에야스
"읭?"
어쨌거나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다방면으로 노력을 했으니,
곧 이런 명령들을 내려
다이묘들을 통제했다. (1615, 무가제법도)
이에야스
"앞으로 성곽을 수리하려면
먼저 막부에 알려서 허락을 받아야 함."
이에야스
"또 다이묘들끼리
정략결혼을 하는 것 금지!"
이에야스
"조직을 결성하는 것도
막부의 허락 없이는 안 됨!"
이러한 막부의 권력 강화책은
이에야스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특히 다이묘의 처자식들을
에도에 거주시켜 인질로 삼고,
다이묘에게는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게 하는
'참근교대제'(산킨고타이)가
제도화된다. (1619년)
이에미쓰 (3대 쇼군)
"앞으로 다이묘들은 1년 마다
현지와 에도를 왔다 갔다 하라능."
이때 참근교대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통신사의 행렬과 비슷했는데
행렬은 다이묘의
체면과도 연관되어
대단히 화려하고
격식 있게 치러졌기 때문에
그만큼 다이묘들에게는
막대한 돈이 소모되어
어떤 다이묘들은 '참근교대제'로만
수입의 3/4 이상을 쏟아부어야 했으니,
▲ 다이묘가 떠나면 1천 명 가까운 부하들도 같이 떠나게 된다
이는 다이묘의
힘을 약화시키고
쇼군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준다.
▲ 참근교대제
다만 참근교대제 덕분에
행렬이 지나는 길의 상권이 번영하게 되고
도로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는가 하면,
에도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효과가 발생했다.
"17세기 이후 에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능."
● 새로운 질서의 대외관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는 달리
주변국들과 평화 외교를 표방했다.
"전하, 일본이
통상을 청해왔사옵니다."
선조
"무엇이! 이놈들 무슨 낯짝으로
통상을 청할 수 있단 말인고?"
"하오나, 전하."
"지금 일본의 통치자는 왜란 때 단 한 명의 군사도
조선에 보내지 않은 인물이옵니다."
선조
"어? 그래?"
선조
"그렇다면 먼저 일본에 잡혀간
우리 백성부터 데려오도록 하라."
그리하여 1607년,
조선의 쇄환사(刷還使)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쇄환사는 끌려간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사신이라는 뜻."
이어 양국은 1609년 기유조약을 맺어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으니,
이 조약으로
부산에 왜관이 설립되고,
대마도는 양국으로부터
외교와 무역의 특권을 인정받게 된다.
▲ 왜관의 대마도민들
이후 조선은 1811년까지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를 8차례 파견하고,
(쇄환사를 포함하면 총 12회)
▲ 쇼군을 알현하고 있는 조선통신사
일본으로부터 신대륙의 작물인
담배, 고추, 고구마, 호박, 토마토를 전수받게 된다.
반면 조선은 일본에
'유학'을 전수하게 된다.
쇼군
"중앙집권을 실현하는데
우리나라는 비용이 너무 많이 나가고 있음."
쇼군
"우리도 조선의
문치주의를 본받고 싶다능."
이 무렵
명나라와도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조선에 중재를 요청하고
복건성을 통해 교섭을 하려고도 했으나,
조선이 이에 난색을 표명하고,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조선
"글쎄? 우리가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님."
명나라
"흥! 통상이라니, 당치도 않아!
그동안 왜구의 피해만 얼마인데!"
한편 이때부터 일본은
류큐(오키나와)와 홋카이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게 되는데,
▲ 류큐왕국
1609년 일본은 류큐가
자국의 표류민을 송환할 때
사절단을 보내
사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대뜸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감히 한 주먹거리 밖에
안되는 주제에 까불어?"
그러나 1655년 청나라가
류큐에 간섭하면서
이후 류큐는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청의 책봉을 받는 '이원 외교'를 전개하게 되었으니,
▲ 당시 류큐 왕국
청나라
"너희들 뭔데,
우리 조공국을 터치하는 거야?"
일본
"아놔.."
류큐
"에겅.."
류큐는 매년 사쓰마 번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쇼군이 취임할 때나 류큐 왕이 취임할 때마다
막부에 사신단을 파견해야 했다.
이 무렵 홋카이도 남부 지역에서는
일본인과 아이누 인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16세기 말부터 일본정부는
이곳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켜 (마쓰마에 번)
지역의 유력 호족을 번주로 임명하여
무역독점권을 부여하게 되고,
17세기 중엽,
아이누인이 집단 봉기를 하자
▲ 아이누족
병력을 출동시켜
난을 진압하게 되었으니,
이후로 홋카이도의 아이누 인들은
일본에 완전히 종속되게 된다.
● 쇄국정책 : 왜 일본은 쇄국정책의 길로 나아갔나?
네덜란드 상인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일본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이
눈엣 가시였다.
▲ 포르투갈 상인들
더욱이 당시 유럽에서는
구교(천주교)와 신교(개신교) 사이에
종교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때라서
신교도 출신의 네덜란드 상인들의
시기심과 질투는 더욱 컸다.
▲ 포르투갈 선교사들
그러던 중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이런 조언을 해준다.
네덜란드 상인
"포르투갈, 스페인을 경계하셈!"
일본인
"왜 그러는데?"
네덜란드 상인
"걔네들은 가는 곳마다 무력으로 식민지를 만들고
재화를 약탈해 가는 악당들이에요."
네덜란드 상인
"지금 아메리카라는 새로 발견된 땅에서는
어찌나 살육과 노략질이 심한지.. 말도 아닙니다."
일본인
"헐! 정말?"
게다가 막부는 천주교를 퍼트리고 있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골칫거리였다.
이에야스
"뭐? 예수가 쇼군인 나보다 더 높다고?
이것들이!"
이에야스
"또 뭐? 인간은 다 똑같다고?
이것들이 사회질서를 망가트리려고 해?"
또 불교계의
반발도 거셌다.
불교계
"쳇! 기독교인들은 관용이 없어."
불교계
"부처님을 믿는 걸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나!"
결국 에도 막부는
1612년 기독교 금지령을 내리고
1624년에는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해 버리더니,
1639년에는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도
금지해 버렸다.
그러면서 오직 네덜란드 선박의
내항만을 인정했다.
네덜란드 상인
"우리는 기독교 포교 같은 거
관심도 없삼."
대신 네덜란드인들은
나가사키의 작은 섬(데지마)에 거류지를 만들어
▲ 막부는 유럽 국가들 중, 오직 네덜란드에게만 통상을 허용했다
그곳을 통해서만
교역을 하도록 했다.
▲ 데지마의 네덜란드 거류지
이때 중국의 민간 상선도
나가사키를 통해서만 교역을 하도록 했다.
▲ 나가사키의 중국인 거류지
사실 쇼군은 의도적으로
'쇄국정책'에 나선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일본은
쇄국정책을 했단 말인가?
쇼군
"물론 남만과의 교역이 필요해.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쇼군
"하지만 함부로 무역을 허락하게 하면
지방의 다이묘들이 재력을 키워 나에게 맞설 수가 있어."
쇼군
"그러니 외국과의 무역은 오직 막부가 독점할 수 있도록
지정된 장소에서만 하도록 해야 함."
바로
이런 취지였다.
하지만 동남아 여러 나라와는
본인들이 직접 나서서 무역을 계속했는데,
가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쇼군
"물소뿔, 소목(염색 재료), 후추 등은.."
쇼군
"우리가 직접 현지로 가지 않으면
제대로 얻을 수가 없는 것들임."
그리하여 동남아 곳곳에는
'니혼마치(日本町)'라는 일본인 거류지가 생겨나게 된다.
▲ 일본 상선의 항로와 니혼마치
다만 아무나 무역선을 띄웠다간
대번에 목이 달아나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무역 허가증을 발부해주면서
붉은 도장을 찍어줬는데,
그래서 이때 일본의 무역선을
'붉은 도장'과 관련해서 슈인센(朱印船 : 주인선)이라 불렀다.
▲ 당시 일본의 주인선 : 서양 범선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일본은 '막부의 권력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쇄국정책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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