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시대 중기
● '슈고 다이묘'의 등장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시기에
일본은 남북조를 통일했다.
"통일이라기 보다는
산골짜기에서 농성을 해오던 남조를 흡수해버린 것."
이때부터 흔히
무로마치 시대의 '중기'로 간주한다.
이 무렵 쇼군은
자신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서
교토 인근에 화려한 저택과 함께
금각사(킨카쿠지)라는 누각을 세우도록 했다.
"금각사 건물에 금박을 입히는 데만
현재 가치로 '수천 억엔'에 가까운 금액이 들었다능."
쇼군
"내가 실질적인 이 나라의 주군인데,
왕궁이 이 정도는 돼야지!"
하지만 세상은
쇼군의 뜻대로 굴러가지는 않았다.
남북조로 갈라져
오랜 전쟁을 하는 동안
그동안 미쳐 신경 쓰지 못한
'지방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해버린 것이다.
쇼군
"이런, 젠장!"
쇼군
"지방을 완전 장악하지 못 하면
권력도 영속할 수 없어!"
때문에 쇼군은 충성스러운 심복들을
지방에 파견해, 철저히 감시하도록 했다.
"주로 쇼군의 일가인
아시카가 일족들을 보냈다능."
이런 역할을 맡은 지방관을
가마쿠라 시대에는 '슈고'라 불렀지만,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는
'슈고 다이묘'라 부르게 된다.
가마쿠라 때의 슈고와 달리,
그 권한이 막강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인가?
가마쿠라 때의 슈고는 지기 관할 구역의
지토(군수)·고케닌(고급무사)과 주종관계를 맺지 않았고
경찰·행정 업무를 주로 하던
'지방관'에 가까웠다.
하지만 쇼군은
지방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슈고 다이묘'가 지토와 고케닌을
자신의 부하로 편입시키는 것을 눈감아 준다.
"사실상 군사권을 준 셈!"
또 여러 개 구니(國)의
슈고직을 겸임하는 것도 눈 감아 줬다.
"그래서 11개국의 슈고직을 겸직하여
일본 영토의 1/6을 다스리던 슈고도 있었다능."
여기에 수취한 세금의 절반을
슈고가 가져도 된다는 반제령(半濟令)을 발표하게 된다.
쇼군
"지방 무사들 월급도 챙겨주고 하려면
돈 좀 필요할 거 아냐?
쇼군
"그러니 반땅 인정해줄게."
슈고 다이묘
"어익후, 감솨함돠!"
얼핏 보면 막부가
슈고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예전부터 슈고들은
세금의 절반 씩을 삥땅치고 있었고
슈고의 도움 없이는
지방 통제가 불가능했으니
막부는 그 권한과 특혜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때문에 슈고 다이묘는
누구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지방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막부도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성장하게 된다.
▲ 슈고 다이묘의 저택
하지만 그런 이유로 막부는
슈고 다이묘들을 교토에 거주하도록 하고
그들의 영지에는
'슈고다이'라는 대리인을 보내도록 했다.
▲ '다이'는 대신(代)한다는 뜻이다
● 왜구의 출현 + 조선과의 왜관무역
왜구란 대마도, 이키섬, 나가사키를
근거지로 삼은 해적 집단을 말한다.
▲ 왜구의 본거지는 오늘날 나가사키현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대마도가
주 거점이었다.
왜 하필 대마도인가?
바로 척박한 환경 때문이었다.
▲ 대마도의 전경
대마도는 섬의 대부분이 산으로 되어 있어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겨우 3%에 불과하다.
때문에 가까운 육지로부터
식량을 조달해야만 했는데,
대마도에서 일본 본토보다
가까운 곳은 한반도였다.
그러므로 한반도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고
결국 대마도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평소 무역을 하는 상인이었다가도
여차하면 해적으로 돌변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
몽골의 위세가 꺾이자
대마도 주민들을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된다.
대마도 왜구
"지금 고려와 중국은
주인을 잃은 무주공산이라고!"
게다가 일본 내부적으로도
남북조의 혼란한 시기라
변방에까지 행정력과 치안력이
미치지 못할 때였다.
때문에 14세기 후반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는
왜구들이 집단적으로 출몰하여
집단 약탈을 자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출현한 왜구들을
'전기 왜구'라고 한다능."
다만 전기 왜구는
남북조시대가 정리된 후 거의 소멸된다.
▲ 명군에 붙잡힌 왜구들
일본의 행정·치안력이
회복된 결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조선 정부에서
왜구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선 영토에 '무역소'를
설치해줬기 때문이다.
왜구
"제발 식량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라므니다!"
그리하여 조선은 1426년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을 개항해서
각 왜관마다 대마도인 60명씩이
들어와서 살 수 있도록 하였고,
남해안 일대에서
고기잡이도 인정하되,
그 대가로
'조어세'를 내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대마도인들은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된다.
당시 조선은
목화가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면포(면직물)가 활발히
생산되던 시점이라
그때까지 목화 재배를 모르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면포'는
각광받는 수입품이었다.
"이것이 조선의 면포!"
따라서 당시 왜관에서는
조선은 쌀과 면포를 팔고
그 대가로 은(銀)을 받는 식의
무역이 이뤄지고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은'이 있어야
명나라의 비단을 살 수 있었으니깐."
● 중국과의 감합무역
1368년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건국된다.
쇼군은 1401년 명에 사절을 보내
통교하고자 했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는
일본에 대한 감정이 몹시 좋지 못했다.
영락제
"너희 나라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길래
왜구 활동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거임?"
일본 사신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철저히 단속하겠습니다."
영락제
"좋다. 그렇다면 너희에게도
조공무역을 하락하겠노라."
그리하여 명 황제는
일본을 제후국으로 인정하며
쇼군을 일본 국왕이라
칭하게 되었으니,
쇼군은 크게 기뻐하며
'명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고
명나라 황제에게
'폐하의 신하'라는 답서를 보내기도 했다.
쇼군
"내가 이래 봬도
중국 천자가 인정하는 일본의 왕이라능."
일본은 그동안 송, 원과
활발한 민간 교역을 했었지만
중국과 정식 국교를 맺게 된 것은
견당사를 폐지한 이래 500여 년 만의 일이었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것은
5세기 고훈시대 이후, 근 1000년 만의 일이었다.
▲ 이때 일본은 명나라와 왜구 소탕의 공동작전을 펴기도 했다
한편 당시 명나라는
조공무역을 하러오는 주변국들에게
'감합'이라는 입항허가증을 발부해줘서
조공무역을 제한하고 있었는데,
▲ 입항허가증 : 日 혹은 本자가 적혀진 증서의 반쪽을 발부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의 '명일(明日)무역'을
흔히 '감합무역'이라도 한다.
"어디 진짜 조공사신단인지
반 찢어진 증표를 맞춰보자능."
이런 감합무역은
막부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다 줬다.
쇼군
"너희들 들었지?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면 감합이 있어야 함."
쇼군
"그러니 감합이 있는 내가
앞으로 전적으로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겠다능."
이런 논리로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은,
중국의 동전을 화폐로 사용했기 때문에
▲ 명나라 동전
명과의 무역을
독점한다는 얘기는
'국내통화발행권'을 독점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니 막부로서는
얼마나 큰 이득이겠는가!
쇼군
"시중에 중국 돈의 반출을 줄여!
화폐가치가 높아지면 그때 왕창 뿌리도록."
이러한 감합무역은
1404년부터 1410년 동안에만
6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견명선'이라는 교역선으로
명과 일본을 왕래했다.
▲ 견명선
쇼군
"하하하. 이렇게 좋을 수가!"
하지만 여전히 중국 해안가로 출몰하는
왜구가 문제였으니,
명 황제는 화가 나서
일본의 조공무역 규모를 대폭 줄여버렸다.
영락제
"왜 아직도
왜구가 출몰하는 건가!"
일본 사신
"에겅.."
그리하여 이후로 일본은
10년에 한 차례씩
선단의 규모는 3척,
인원수는 300명으로 크게 제한을 받게 된다.
▲ 견명선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는 1년에 3차례,
오키나와와는 2년에 한 차례,
베트남과 태국과는 3년에 한 차례
조공 무역을 하기로 했으니
'10년에 한 차례'라는 조치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 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 견명선의 항로
하지만 그런 조공무역이라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만 했으니,
일본은 1547년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견명선을 보내게 된다.
이때 일본의 수입품 가운데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준 물품은
비단의 원료라 할 수 있는
'생사'로,
보통 4~5배에서, 많게는 20배까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비단을 수입하는 건 너무 비싸니
생사를 수입해서 국내서 직접 비단을 짜는 거임."
하지만 이러한 감합무역마저
1551년 전면 금지된다.
일본의 민간 무역선이 몰래 밀무역을 하다가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 당시 '마카오'에는 포르투갈과 일본 상인들의 거류지가 있었다
가정제
"이넘들 완전 구제불능이네.
앞으로는 다시는 오지 마!"
일본으로서는
무척이나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임진왜란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전국시대 : 전국 다이묘
● 막부의 쇠퇴와 오닌의 난 (1467~1477)
무로마치 막부는
6대 쇼균 때부터 동요하기 시작한다.
6대 쇼군, 요시노리는
출가해 중이 되었다가
'제비뽑기'로 쇼군에 뽑혀 환속한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요시노리
"세상에 별일도 다 있네."
▲ 제비뽑기 쇼군, 요시노리
하지만 요시노리는 주위 기대와는 달리
'폭군'으로 변모했다.
요시노리
"요즘 쇼군의 권위가 말이 아님!"
요시노리
"설치는 다이묘들을 모조리 때려잡아
쇼군의 권위를 높여야 겠어."
슈고 다이묘
"헐!"
그는 병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어서
그의 노여움을 받아
처벌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때문에 다이묘들의
불만이 많았고,
결국 요시노리는
살해되어..
"헐! 쇼군이
대낮에 길에서 개죽음 당하는 세상.."
이때부터 쇼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고 만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8대 쇼군인 요시마사 때 나타난다.
▲ 사치스런 생활에만 관심 많았던 쇼군, 요시마사
8대 쇼균인 요시마사는
평소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데다
아들도 없었으니
후계자로 자신의 동생을 정했다.
요시마사
"네가 나 다음에 쇼군을 해라."
요시미
"어익후, 형님 감솨."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요시마사는 뒤늦게 아들을 봤다.
도미코
"여보, 자기 핏줄에게
쇼군을 물려주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요시마사
"하긴.."
아내의 집요함에 요시마사는
결국 아들을 후계자로 정한다.
요시마사
"동생아, 너가 양보 좀 해라."
요시미
"아놔.."
그러자 지켜보던
슈고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끼어들었다.
"당연히 아들이
계승을 해야지!"
"사람이 약속을
지킬 줄 알아야지!"
그렇잖아도 권력 다툼으로
으르렁대던 유력 다이묘들에게
쇼군가의 분쟁은, 자신들의 야심을
표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하여 1467년,
전란이 시작되었다.
"쇼군 지지!"
"동생 지지!"
지방의 병력들이
교토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 오닌의 난
동생을 지지하는 자들은 16만 명을 동원해
교토 시내에서 진을 쳤고
"동군 화이팅!"
쇼군을 지지하는 자들은
11만 명의 군대로 평야에 진을 쳤다.
"서군 화이팅!"
▲ 오닌의 난 세력분포
그렇게 전국의 내로라하는 장수들과
수많은 병사들이 싸움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교토는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고,
두 군대의 전력이 비슷해
쉽게 승패가 나지 않다 보니
전쟁은 11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싸움을 '오닌의 난'이라 한다. (1467~1477)
● 전국시대의 개막
오닌의 난으로 인해
교토는 처참하게 파괴됐고
쇼군의 권위는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추락해 있어서,
쇼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은
교토 일대에 불과했다.
쇼군
"에겅.."
더 비참한 건
덴노였다.
극도로 궁핍해진 덴노는
옷을 꿰매 입어야 했고,
20년 동안 즉위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는가 하면,
돈이 없어 즉위식을
10년이나 거행하지 못하기도 했다.
덴노
"에고고.."
사실상
무로마치 시대는 끝이 났고
이제 일본은 '신분'보다는 '실력'이 우선하는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신흥 무사라 할 수 있는
'아시가루'의 출현이었다.
아시가루(足輕 : 족경)는
이름 그대로, 발이 가벼운 '경무장 용병'을 뜻했다.
▲ 아시가루
이들은 '민첩함'을 최대한 이용해
가는 곳마다 분탕질을 해서
쇼균의 거처, 유력 사원,
귀족과 무사의 저택을 잿더미로 바꾸었다.
"하하하"
또 약탈을 일삼고
이익을 쫓아 쉽게 배신하는 이들의 행동은
예전의 무사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속이었다.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던 시대."
한편 쇼군의 권위가 추락하자
그동안 교토에 머물며
막부 정치에 참가하던
많은 슈고 다이묘들은
하나둘씩 자신들의 영지로
내려가기 시작했으니,
이후로는 더 이상 쇼군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동안 쇼군의 보호를 받아왔던
귀족과 사원의 장원들이
여기저기서 빼앗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다.
"힘 센 자가 차지하는 세상이라고!"
심지어 슈고 다이묘가
내 땅이라 생각하고 내려온 곳에서
그동안 영지를
대신 다스려온 '슈고다이'가
땅을 내놓지 않고 배신을 때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하극상'이야말로
전국시대의 특징임."
● 전국 다이묘의 등장
오닌의 난을 계기로
쇼군과 막부의 권위가 현저히 실추되자
일본 열도 곳곳에서는
'골목대장'들이 나타나
'독립국가'를 세우며
자칭 왕노릇을 하기 시작했으니,
이때 난립하는 골목대장들을
'전국 다이묘'라고 한다.
이들은 과거 슈고 다이묘에서
전국 다이묘로 변신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 '슈고다이' 등이
'하극상'을 통해 권력을 탈취했거나
'촌구석 영주'에 불과한 무사가
'전국 다이묘'로 성장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전국 다이묘'가 되는
대표적인 케이스는 이러했다.
전쟁 중 농민들은 보호를 받기 위해
'유력 영주'에게 투신하게 된다.
농민1
"우리를 보호해 주세요."
농민2
"그러면 충성을 바칠게요."
영주
"에헴!"
그러면서 유력 영주가
덩치를 불리게 되면,
자연스레 다른 영주나 농민들이
더욱 몰려오게 됐다.
"저도 보호해 주세요."
그러면서 유력 영주는
어느새 독립국가의 군주가 되어 있었고,
이런 이들을 '전국 다이묘'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국 다이묘가 됐다고 해서
기쁨을 만끽할 수는 없었다.
영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군사력'을 유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금 수취체계'를 정비해야 했고
독자적인 '성문법'을 제정하여
치안과 질서를 유지해야만 했으며
평소 무사들의 전투 훈련에도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뺏고 빼앗기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경쟁이 발전을 낳았던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제가 튼튼하지 못하면
국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이웃한 세력으로부터
영지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또 가신과 농민, 무사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부 반란으로
퇴출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전국 다이묘들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혈안이었고
이를 위해
토지조사를 하거나
새로운 황무지를 개간하고
대규모 치수공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농업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도망 농민 발생 시
촌락 단위로 '연좌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 놈이라도 도망치면
마을 전체에 벌금을 내리겠음!"
또 다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조달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공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한편
금, 은, 구리 광산도
주도적으로 개발했다.
▲ 사금 채취 : 화산열도인 일본은 금, 은, 구리 등의 광석이 풍부했다
"이때 조선으로부터 '은 제련법'을 전수받아
본격적으로 은을 체굴하게 된다능."
한편 다이묘들은
가신들이 배반을 할까 봐 두려워
영지의 중심지에
큰 성을 쌓고
▲ 전국시대의 성 : 성과 망루가 따로따로 된 모습이다
그 주위에 가신들을 모여 살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결과 성 내 도시라 할 수 있는
'조카마치(城下町 : 성 아래의 동네)'가 형성되게 된다.
▲ 조카마치 : 붉은 원
"어? 쇼군이 교토에
슈고 다이묘들을 모여 살게 한 것과 비슷한데?"
▲ 전국시대 조카마치 : 가신들과 상인들이 거주했다
그렇게 조성된 신도시 '조카마치'에는
새로운 도시문화가 등장하는데,
다도, 가면극, 분재가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된다.
전국시대 : 백성들
● 농업의 성장 : 이앙법, 용골차, 밑거름, 목화
무로마치 시대가
시작된 이래
전란이 계속되었지만
농업은 꾸준히 발달했으니,
이 시기 농업의 특색은
토지 생산의 '집약화'에 있었다.
▲ 수확하는 모습 : 무로마치 시대 전기
"무엇보다도
단위생산력이 폭증하게 됨."
어떻게 말인가?
먼저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 당시의 이앙법 : 한쪽에서는 광대들이 흥을 돋구고 있다
가마쿠라 시기에
이앙법이 소개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고
대부분 '직파법'으로
풍부한 강수량에 의존해서
'이모작'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로마치 시기가 되면
'이앙법'이 보급되어
벼의 생육 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어,
쌀→메밀→보리의
'삼모작'까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본의 삼모작은 조선 사신 송희경(1376~1446)이
직접 교토 인근에서 목격한 장면이라능."
참고로 쌀과 밀의 생육기간은 150일,
옥수수와 보리는 120일,
감자는 100일 정도인데 비해
메밀은 70일 정도다.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이앙법'을 통해 겨우 '이모작'이 가능해지는데,
일본은 이앙법을 통해
'삼모작'까지 가능할 정도로
기후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비가 많이 내리는
일본이라고 해서
물 걱정 없이
'이앙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논에다 물을 채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
때문에 가마쿠라 시대부터
수차를 개량해 왔는데,
무로마치 때에는 '용골차'를 사용하여
보다 용이하게 논에 물을 댈 수 있었다.
▲ 용골차
"모양이 용의 뼈다구 같다고 해서
용골차라능."
▲ 시대별 수차의 발전 과정
시비법도 개량되어
이때부터 '밑거름'을 주게 된다.
"가마쿠라 시대의 시비법은,
재배 도중에 거름을 주는 '뒷거름'만 행해졌는데.."
"무로마치 때부터 파종 전에
미리 거름을 주는 '밑거름'까지 병행하게 된다능."
"우리나라도 고려 때는 뒷거름만 주다가
고려 말부터 '밑거름'을 주기 시작했음."
그리고 이러한
농업기술 향상으로,
무로마치 후기인, 전국시대 일본의 인구는
1200만 명을 상회하게 되고
▲ 떡을 만드는 아낙네들
이 무렵부터
일본인들의 식생활은
1일 2식에서,
1일 3식으로 바뀌게 된다.
▲ 무로마치 시대의 부엌 : 육식을 금했지만, 생선과 가금류는 섭취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침, 저녁을 먹다가
점심이 추가되었지만,
일본은 아침, 저녁을 먹다가
'야식'이 추가되어 3끼가 됐다는 게 독특한 특징이다.
▲ 무로마치 시대 귀족의 식사 모습
▲ 무로마치 시대 무사의 식사 모습
한편 무로마치 말기에는
조선에서 몰래 밀수입한 목화씨가 전래되어
이때부터 서서히
목면을 생산하게 된다.
"아니, 일본에서도
문익점 같은 이가 있었다니..!"
때문에 이후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으로 면포를 수출할 수 없게 되지만,
때마침 인삼 재배에 성공하게 되어
대신 인삼을 수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인삼마저
나중에는 기술이 유출되어
19세기 이후로 조선은
일본에 아무것도 수출할 수 없게 된다. ☞ 참고
● 상업의 발달 : 특산물, 사주전, 극장, 도이야(여관)
무로마치 때는
지역마다 1~2가지의 '특산물'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특화'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 무로마치 시기의 종이 만드는 장인
"A 고장의 견직물, B 고장의 종이,
C 고장의 도검.. 이런 식으로."
▲ 무로마치 시기의 직물 만드는 장인
이 중에서 도검은
중국으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었고
▲ 칼
무로마치 말기부터는
총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지역 특산물에
'총'도 포함되게 된다.
정기시장도 월 3회 열리던 것이
월 6회씩 열리게 되고
▲ 땔감 장수
교토 등의 대도시에는
상설 소매점이 일반화되기 시작하고
▲ 교토의 상설매장
쌀 시장, 생선 시장, 소금 시장 등
전문시장도 생겨나게 된다.
▲ 교토의 쌀 시장
시장이 발달하지 못하는 지역으로는
'행상'이 그 역할을 보완했는데,
이때 행상은
특히 여성들이 많았다.
▲ 무로마치 시대의 행상
그런가 하면 '가면극'을 전문적으로 하는
'극장'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 희극 공연장 :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 무로마치 시대의 희극 장인
한편 상인들은
상업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동업조합'을 결성하고
영주들에게 자릿세를 지불하는 식으로
독점적 판매를 인정받아
신규 상인의 진입을 막았는데,
▲ 무로마치 시대의 동업조합 자(座)
점차 이들의 독점행위가
말썽을 일으키자
다이묘들은 동업조합의 특권을 막기 위해
골치 깨나 썩혀야 했다.
다이묘
"아! 이놈들이 툭하면
가격을 담합하면서 폭리를 취하네!"
하지만
상공업이 발전하고 있었고,
농민들에게 모든 세금과 부역까지
'화폐'로 납부하도록 할 정도로 '화폐경제'가 발전해 있었지만,
▲ 전국시대 조카마치의 거리
여전히 화폐는 중국의 화폐만을
통화수단으로 삼고 있었으니,
▲ 무로마치 시대의 대표적 화폐, 명나라의 영락전(영락통보)
중국과의 교역이
제약을 받았던 당시,
화폐는 수요를 충분히 채울 수 없어서
고질적인 통화 부족에 시달려야만 했다.
때문에 전국시대에는
위조화폐라 할 수 있는
'사주전'이 제작되어
유통되기 시작하는데,
▲ 당시의 조악한 사주전
"걱정 마! 과거의 화폐는
위조화폐라도 통용은 되었으니깐."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사주전은
너무나 조악해서,
대개 사주전은 거부되었고
양질의 동전만이 선호되었기 때문에
"에잇! 갖다 버려!"
나중에는 중국 동전과 사주전의
교환 비율이 따로 정해지기도 했다.
▲ 명나라 동전과 사주전의 비교
한편 상업의 발달은
교통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는데,
▲ 당시 통행세를 징수했던 '관소'
당시 상품 수송은
대부분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던 바,
수운 교통의 요지에는
숙박업과 운송업을 동시에 하는
▲ 비와호의 선박들
도이야(問屋 : 간옥)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 무로마치 시대의 도이야
● 잇키 : 농민들의 집단 행동
중세 초기만 해도 장원의 농민들은
거주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가마쿠라 후기부터
농민들은 한데 뭉쳐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촌락(무라)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게 되었다.
▲ 영주의 거주지(좌측)와 촌락(중앙) : 영주의 거처는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릉지에 만들어졌다
"농사일 하려면, 서로 일손 도울 것도 많으니깐
가까운 데 모여살면 더 좋지."
그리고 남북조시대를 맞아
전란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촌락의 백성들은
스스로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서로가 더욱 밀착해서
살아가게 된다.
"이거 어디 불안해서 살겠나?"
영주들도 마을을 통괄하여 지배하는 데
편리한 점이 있었으므로
공동자치조직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영주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개인별로 세금 납부하던걸.."
영주
"촌락 단위로 일괄해서
세금을 납부하라능!"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세금을 공동으로 내기 시작한 농민들은
부쩍 '연대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혼자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집단'을 통해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
"세금이 너무 높다. 세금을 낮춰라!"
"행패를 저지른 관리를 파면하라!"
이런 식으로
집단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집단행동을
잇키( 一揆)라고 한다능."
농민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땅을 내팽개쳐 두고
다른 지역이나 산으로
도망치기도 했으니
영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노조의 파업이라고나 할까?"
한편 도시에서도
농촌과 비슷한 '공동체 촌락'이 만들어지는데
행정 구역상 우리의 동(洞)에 해당하는
마찌(町)의 주민이 그 대상이었다.
"다들 혼마찌(本町) 들어봤을 거라능."
이들 역시 부당한 압력에 맞서
집단행동으로 궐기했던 것이다.
"고리대금 빚을 탕감해달라!"
그러면서 촌락의 백성들은
자연스레 '공동체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때 집단의 규율을 어긴 사람은
사람들이 말조차 걸지 않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왜 지난번
집단 시위 때 참석하지 않았지?"
"쳇! 그러게.."
구성원들은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를 다 해야만 했다.
고로 오늘날 일본인 특유의 '집단의식'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농민 봉기
농민의 집단행동은
1428년 '농민 봉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16세기 말까지
무려 50여 차례의 농민봉기(도잇키 : 土一揆)가 일어난다.
다이묘
"아놔, 또 잇키인가?"
농민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한 이유는
그만큼 농촌이 궁핍했기 때문이다.
"읭? 언제는 농업생산성이
증가했다면서?"
하지만 농업이 발달하더라도
기근은 피할 수 없다.
애초에 농업 경제는
'기후변화'에 따라
풍흉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크고
또 농업이 발달하면
그만큼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에
오히려 농업이 발달한 사회에서
기근의 피해는 더욱 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로마치 시대에
두 차례 대기근이 엄습하는데
15세기 초 가뭄,
15세기 중엽 냉해가 그 원인이었다.
여기에 교토 인근의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화폐경제가 발달한 것도
농민 몰락의 커다란 원인이었다.
▲ 농민 봉기의 발생 지역 : 교토 근처에서만 30회 이상 발생했다
"굶주린 농민들은 고리대금업자에게
재산을 저당잡히며 식량을 구했던 탓에.."
"나중엔 집도 절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능."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유랑민이 되는가 하면,
무기를 들고 봉기를 하는
'농민군'이 되었다.
▲ 농민군
▲ 성난 농민들
그러다가 1488년
카가 구니(國)에서는
다이묘를 몰아내고
농민들이 정권을 잡기도 했으니,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제압될 때까지
약 1세기에 걸쳐, 일본에서는
'백성'이 지배하는 나라가 존재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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