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시대 중기
● 대가 끊긴 쇼군의 혈통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쇼군 요리토모에게는
▲ 미나모토 요리토모
큰아들 A과
작은아들 B가 있었다.
▲ 미나모토 가문
그런데 요리토모는
1199년 엉뚱하게도
말에서 떨어져
급사하고 말았다.
"헐! 이렇게
어이없이 떠나시다니.."
그리하여 2대 쇼군 자리를
A가 물려받았지만
▲ 2대 쇼군 요리이에
아들이 못 미더웠던
어머니 마사코는
아들인 A를 폐위시키고
독살해버리기까지 했다.
"헐!"
그리고 그 자리에
작은아들 B가 앉았다.
▲ 3대 쇼군 사네토모
그리고 어언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쇼군 B가 갑자기
한 괴한에 살해되고 만다.
범인은?
A의 아들이었던 C.
결국 C에게 사형이 내려졌는데,
이게 웬걸!
그러다 보니, 쇼군인 미나모토 가문에
대가 완전 끊어져버린 것이다.
"헐! 이제 누가 쇼군을 하지?"
그렇게 갑자기
막부는 우왕좌왕했다.
이를 놓칠세라
1221년
덴노 측에서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덴노
"옳거니!
무사들이 동요를 하기 시작했어!"
덴노
"지금이 다시
황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
덴노
"역적 가마쿠라 막부를 토벌하라!"
덴노
"승리하면 덴노 편에 가담한 무사들은
많은 상금을 받게 될 것이다!"
무사
"헐! 어쩌지?"
무사들은 술렁거렸고
이때 많은 이들이 덴노 편에 섰다.
덴노
"하하하"
● 조큐의 난 (1221) : 싯켄정치의 시작
덴노는 시작도 하기 전에
판세가 결정 난 듯,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반면에 막부의 무사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무사
"아놔, 덴노에게 항복해야 하나?"
하지만 이때 요리토모의 미망인인
마사코가 나섰다.
마사코
"어림 없는 소리!"
무사
"헐! 마사코 님이시다."
무사
"속세를 떠나시고 그동안 비구니가 되셨는데,
우리 소식을 듣고 오신 모양이야."
마사코는 남편이
어렵게 일궈 놓은 막부가
이대로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마사코는 급히
무사들을 불러 모았다.
마사코
"여러분! 우리 무사들의 삶이
과거에 어떠했는지 모두들 잘 기억하실 겁니다."
마사코
"귀족의 집이나 지키며
하인 취급받던 시절,"
마사코
"우리 무사들을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올려 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마사코
"돌아가신 쇼군에게
그토록 깊은 은혜를 입고.."
마사코
"어찌 조정 편에
가담할 수 잇단 말입니까?"
마사코
"조정 편에 가담할 사람은 이곳을 당장
떠나십시오."
무사
"..."
마사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곳에 남아
막부를 위해 끝까지 싸워 주세요."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였다.
무사들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무사
"엉엉엉.
마사코 님 잘못했쩌영."
지금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 단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때 마사코의 연설은 일본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 중 하나였다능."
무사
"싸우자!"
각성한 무사들은
거짓말처럼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
때문에 덴노 편에 섰던 무사들은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고,
덴노군
"헐! 쟤네들
단체로 약을 빨았나!"
기세에 밀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조큐의 난 : 1221)
이후 덴노 편에 섰던
귀족과 무사들의 영지는
모두 막부 무사들의
차지가 되었으니
가마쿠라 막부의
영향력은
이때를 기점으로
동부 중심에서 일본 전역을 확장되게 된다.
이로써 막부는 명실공히
일본 전역을 통치하는 세력이 된 것이고
조정은 껍데기로,
덴노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만다.
덴노
"에겅.."
대신 요리토모의 처가인 '호조'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쇼군의 혈통이
모두 사라진 바,
쇼군을 보좌한다는 의미에서
'싯켄(執權 : 집권)'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이때부터 가마쿠라 시대는
'싯켄'이 다스리는 '싯켄 정치'가 시작된다능."
● 농업생산성의 증대 : 이모작이 보급되다
싯켄 정치가
안정을 찾아가게 되자
이 시기 경제도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무엇보다 농업 생산성이
두르러졌다.
쟁기, 괭이, 낫 등
양질의 농기구가 널리 보급되고
소, 말도
경작에 이용되었다.
인분을 비료로 사용하는
'시비법'도 이때부터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똥을 모으기 위해
농가에서는 화장실이 만들어진다능."
하지만 이보다 획기적인 부분은
'논농사'가 일반화됐다는 점이다.
논농사가
보편화되면서
가을에 보리, 봄에 벼를 심는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는데,
일본에서 이모작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따라서 가마쿠라 시기
일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때부터 한반도 인구의
2배 수준으로 늘어나게 된다.
▲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의 인구 비교 (단위 : 만 명) ☞ 참고
그렇다면 의문이다.
왜 한반도는 일본보다 인구가 적었단 말인가?
사실 13세기 고려 시대나 가마쿠라 시대나
농업의 기술력은 엇비슷했다.
"모두 '깊이갈이'를 했었고
'시비법'이 있었음."
"일본이 이 시기부터
'수차'를 이용했다지만.."
"그게 커다란
원인일 수는 없었다능."
그렇다면,
일본의 땅덩이가 더 넓어서 그런가?
아니다!
그건 잘못된 통념이다.
경작지 면적만 놓고 보자면
전통시대 일본과 한반도는 엇비슷했다.
"일본은 산지의 비율이
한반도보다 더 높거든."
19세기 말 일본의
경지 면적은 330만 정보, ☞ 참고
일제가 토지조사를 완수한
1918년 조선의 경지 면적은 470만 정보였다.
▲ 일본의 경지 면적 ☞ 참고
▲ 한반도의 경지면적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지금도 남북한을 합한
경지 면적이
홋카이도를 포함한 일본 전역보다
근소하게 더 크다. ☞ 참고
"헐! 의외네.."
즉, 일본이 우리보다 땅이 넓어
인구가 많았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바로 '논농사'에 있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논농사가 일반화되어
이모작, 삼모작까지 가능했던 것임."
반면에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까지
밭농사가 논농사보다 주류였다.
▲ 조선시대 논밭의 비율 ☞ 참고
그 이유는? 수리시설이나
수차 등의 기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 송나라의 수차를 본떠 만든 가마쿠라 시대 수차
그보다 '봄철 강수량'이
일본보다 현저히 낮기 때문에
논농사에
부담이 컸던 탓이다.
"3~5월 강수량이
한반도는 일본 열도의 절반 수준임."
● 상업의 발달과 화폐 경제
전통시대 농경 국가에서
상업이 발달할 수 있으려면
농업 생산이
인구 증가보다 높아야 한다.
▲ 전통시대 폐쇄적 농경국가에서 상업이 도래할 수 있는 요인
그래서 누군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된다면
"쌀이 남아돈다능.
누가 농사 대신 다른 것 좀 해봐!"
자연스레
수공업자가 등장하고
수공업품을 팔기 위해
상업이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업의 도래는
한반도에서는 17세기 이후
'이앙법'이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신대륙의 '구황작물'이 전래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그런데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가능했다.
"헐! 우리보다 500년 앞섰어?"
▲ 가마쿠라 시대 시장의 모습
이때부터 농사지을 땅이 적거나
땅이 아예 없는 이들이
삼베, 종이, 염료, 등유, 멍석 등을 만들어
식량과 바꿔먹게 되었고,
그러면서 교환이 활성화되자
점차 시장이 생겨나게 되고
영주나 지토(막부시대의 군수)들은
수공업자와 상인들에게
세금을
곡물이 아닌,
▲ 영주에게 곡물을 납부하는 농민들
물건으로
대신 받기 시작한 것이다.
▲ 세금을 징수하는 영주
또 시장이 발달하게 되자
각지를 떠돌며 생활하는,
'전문 유통업자(토이마루)'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육상·수송 교통의 요충지에는
월 3회 정도의 정기시장이 열리는가 하면
교토, 나라, 가마쿠라 같은 대도시에는
상설 도매점이 등장하고
중세 유럽의 '길드'와 같은
'동업조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막부의 관리들에게
영업세를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막부로부터 상권을
보호받았다능."
그런데 상업의 발달에는
필연적으로 '화폐경제'가 따라오게 돼있다.
일본은 8세기 나라시대부터
당나라 화폐를 본떠, 화폐를 주조한 바 있었다.
▲ 나라시대의 화폐
하지만 화폐의 수요에 비해
턱없이 적었던 구리 공급이 문제였으니
▲ 헤이안 시대까지만 해도 삼베가 화폐대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고육지책으로 신화폐가 나올 때마다
구화폐의 10배의 가치라고 말해봤지만,
이게 웬걸!
화폐의 질은 갈수록 조악해져서
나중엔 구리를 대신하여
납을 70%까지 섞기도 한 것이다.
▲ 일본판 그레샴의 법칙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에잇, 우리나라 화폐 너무 저질!"
"그러게 쉽게 부스러지고
글자도 안 보인다니깐."
때문에 11세기 이후로 일본 정부는
더 이상 화폐를 만들지 않게 되고,
대신 등장하는 게
송나라의 화폐, '송전(宋銭)'이었으니
"송나라 돈은 믿을만함!"
이 송나라 동전이
엄청난 양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양국 간의 교역으로
수입된 동전의 총량이
무려 2억 관(송전 800억개)에
달했으니 말이다.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69)
물론 돈이란 교역을 하면서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니,
교역량 자체를
보유량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1242년의 기록으로 보면, 한 번의 교역으로만
"당시 일본의 인구가 800만 명이었으니
단 한 번의 거래로만.."
"1인당 5개씩 보유할 수 있는 동전을
무역을 통해 사용했던 셈."
당시 토지 매매 문서 등으로 볼 때
동전으로 값을 지불했던 경우가
13세기 중엽에
70%를 육박하고 있었고
▲ 가마쿠라 시대 대금 결제 중 화폐의 사용 비율
세금의 납세도
생산물로 납부하던 것을
시장에서 화폐로 바꾸어
영주에게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또 가마쿠라 시대 유적지에서
10만 매 단위로 동전들이 발굴되고 있으니
당시 송나라 동전의 유통량이
얼마나 막대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69)
● 교역과 금융업의 발달
가마쿠라 시대 화폐 경제는
농촌 곳곳으로 확대되어
돈을 꿔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금융업자(가시아게)'가
나타나게 되고
▲ 금융업자 가시아게
대금 결제의 편리를 위해
'어음'이 사용되는 가 하면,
상품의 중개·위탁판매·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유통업자(토이마루)들도
교통의 요지마다 자리 잡게 된다.
이때 유통은
주로 해상 수송을 통해 이뤄졌는데
특히 해상 교통로가 발달한
세토내해의 연안이 그 중심지라 할 수 있었다.
▲ 세토 내해 : 섬으로 둘러싸인 일본의 내해
그에 비해 육상 수송은
산이 많은 지형 탓에, 수레 발달이 미약하여
말 한 필에 두 개의 짐을 싣는
수준으로 행해지다 보니,
운송력이 매우 낮아
짧은 거리에만 이용됐다.
▲ 유통업자 토이마루
한편 가마쿠라 시대는
무역이 활발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는데
그 시초는
송나라 상인에 의해서였다.
당시 송나라 상인은
아시아 각지로 활발한 무역을 하며
고려의 벽란도와 같은
거류지를 여러 곳에 만들게 되는데,
이때 일본에서도
규슈 지방에 '거류지'를 조성했던 것이다.
▲ 고려의 벽란도
당시 중국인들은
화산 지역인 일본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금·수은·유황,
그리고 칼과 철기 공예품을 수입해 가면서,
▲ 철기 공예품
▲ 칼
도자기·비단·서적
그리고 동전(송전)을 건네줬다.
송나라 상인
"일본인들은
역시 칼을 잘 만든다해."
반면에 고려와의 무역은
11세기 후반에 잠깐 있었는데,
이때도 일본은 수은·유황·칼을
수출했고
대신 고려로부터
산삼·삼베·고려청자 등을 받았다.
한편 12세기 남송시대가 되면
일본인들이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적극적으로
무역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대거 배워오게 된다.
▲ 당시 송나라
"이앙법·수차 기술은 물론이고,"
"우동·소바·양갱·만두 만드는 법까지
배우게 된다능."
다만 이런 중국과의 무역은
남송이 멸망하자 잠시 주춤하게 되는데,
그렇더라도, 곧바로
원나라와 무역을 재개하게 된다.
"읭? 몽골과
전쟁까지 했는 데도?"
"대륙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는
일본인 특유의 욕구와.."
"몽골인들의 개방적인 통상 정책이
맞물린 결과였지."
그런 '일원무역'의 대표적인 흔적은,
1323년 일본으로 가던 원나라 무역선이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원나라의 도자기와 동전들이
대거 발굴되었음."
가마쿠라 시대 후기
● 몽골의 1차 침공 (1274)
호조 가문의 싯켄 정치가
안정기를 맞이할 무렵,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거대한 몽골제국이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제국은
고려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중국 남부까지
손에 넣으려고 했었는데,
1265년 남송 정복에 골몰하던 쿠빌라이에게
귀에 솔깃한 얘기가 들렸다.
"남송은 일본과
교역이 잦은 나라입니다."
"이럴 때 일본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남송은 그야말로 외톨이가 됩니다."
쿠빌라이
"음, 그래?"
그리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몽골 사신
"님들 어서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셈."
몽골 사신
"안 그러면
혼내 줄 거래요."
싯켄
"꺼져!"
유사이래 한 번도
외침을 당한 적이 없었던 일본이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였을까?
아니다.
실은 표정관리였다.
싯켄
"아놔, 어쩌지.."
사신을 돌려보내고 난 다음에
막부는 초 긴장모드였다.
각지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신사와 사찰에서는 불철주야로
부처께 자비를 빌고 있었으니 말이다.
"부처님, 살려주세염."
결국 1268년 쿠빌라이는
고려한테 이런 명령을 내린다.
쿠빌라이
"곧 일본 원정을 갈 테니.."
쿠빌라이
"너희가 필요한 배랑 군량미를
모두 다 만들어놓도록!"
고려
"뜨아!"
이때 요구했던 배만 무려 900척!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시 고려는
1261년 몽골에 자진 투항한 이래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해 있던 때였다.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백성들은
가혹한 징용을 당해야만 했고,
하루 종일 물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다리가 썩어 구더기가 들끓는 인부들도 있었다.
어쨌든 고생고생하며
전쟁 준비를 완료하게 되었고,
▲ 당시 배 건조 과정
1274년 10월, 여몽연합군은
일본으로 출병을 하게 되었으니,
총 3만여 명의 병력 중
몽골군과 고려군이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먼저
대마도와 이키도를 박살내고
규슈 근방에 상륙해서
일본군 1만 7천 명을 쓸어버렸다.
당시 일본 무사들은
처음 접하는 집단 전술과
"징소리에 맞춰
보병을 움직이는 집단 전술.."
난생처음 보는
화약무기에다
사거리가 200m에 달하는
몽골군의 단궁을 경험했기 때문에
기겁을 하며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 선두에서 활을 쏘는 게 고려군, 뒤에서 활을 쏘고 달아나는게 몽골군이다
일본
"뜨아!"
하지만 연합군은
무리해서 추격하지는 않았다.
몽골군 대장
"됐어!
너무 무리하지는 말자능."
몽골군 대장
"그러다 적이 전열을 가다듬어
야습을 해오면 피곤해진다능."
대신 인근 민가를 덮쳐
살육을 자행하며
몽골군 특유의
잔인함을 각인시켰고
군사들은 모두 배 안으로
다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몽골군 대장
"자식들, 이제 우리의 무서움을
깨달았겠지?"
하지만
그것이 불운이었다.
그날 새벽, 난데없이
거대한 태풍이 몰아닥쳐
하룻밤 사이에 연합군의 선박 900척 중
200척이 침몰하게 된 것이다.
"태풍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지만.."
"짧은 기간에 900척을 만들려다 보니
날림 제작이 많았고,"
"심지어 강가용 배를
징발하기도 했기 때문임."
때문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여몽 연합군은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어서
그대로 철수하고 만다.
▲ 당시 난파선의 잔해
● 몽골의 2차 침공 (1281)
1차 침공을 그렇게
운 좋게 막아낸 일본.
하지만 화가 난 쿠빌라이는
1275년,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1차 침공 이후
기고만장해진 일본에 통할 리가 만무했다.
싯켄
"저 놈의 목을 당장 베라!"
몽골 사신
"읭?"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고려를 침공하려는 계획까지 짰을 정도였다.
싯켄
"확, 내친김에 우리가 선빵을 쳐?"
때문에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 원정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됐다.
쿠빌라이
"아놔, 이 넘들이.."
쿠빌라이
"마침 남송도 완전히 정복했겠다.
이참에 단단히 맛을 보여주자능!"
어차피 배를 대고 군량미를 대는 건
고려의 몫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남송의 병사들도 대거 동원됐으니,
그 수가
무려 10만 명이나 됐다.
다만 남송의 군사들은
'총알받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곡괭이, 삽 등의 농기구까지 동원한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쿠빌라이
"남송 애들이 세력이 커지면 안 돼."
쿠빌라이
"가서 승리하면 좋겠지만,
죽어줘도 뭐 괜찮다고."
1281년 5월 하순, 여몽연합군은
1차 때와 똑같은 루트로 출병을 했고
"이번에는 몽골군 1만 명, 고려군 1만 명,
고려인 뱃사공과 일꾼이 1만 7천 명."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손쉽게 적을 섬멸하며
규슈 인근에
상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1차 침공 이후
단단히 방벽을 쌓은 뒤였다.
높이 2m의 방벽을 해안가 20km 구간에
바리케이드를 쳐 놓은 것.
▲ 현재 유적지
"아놔!"
때문에 상륙 과정은
버벅거릴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약속 장소로 도착하기로 한
남송의 군대(강남군)가
보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것도 엉뚱한 곳에..
때문에 상륙작전은
더욱 지체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7월 30일,
또다시 초강력 태풍이 들이닥쳤으니,
14만 명의 연합군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상당수가 바닷속으로
수장되고 말았고,
살아남은 연합군 병사들 중
수만 명이 해안가로 상륙했지만
곧 일본군들에게
사로잡혀서,
고려군과 몽골군은
모두 몰살하고
남송인들만
노예로 썼다.
그리하여 살아서 귀환한 병사는
전체의 20%인 3만 명에 불과했다.
쿠빌라이
"뭐야?
또 태풍이야?"
화가 난 쿠빌라이는
다시 원정을 준비했다.
어차피 전쟁 비용과 물자는
대부분 고려가 대는 것이고,
병사는 남송인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쿠빌라이에게는
일본보다 더 중요한,
베트남 원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점점 관심 밖이 되어버렸고,
▲ 몽골군의 베트남 원정
1294년 쿠빌라이가
80세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일본 원정은
완전히 중단되게 된다.
일본
"반자이! 우리가 이겼다!"
일본
"하하하. 몽골 놈들 별것 아니네."
● 빈털터리가 된 고케닌
태풍 덕에 두 번이나
연합군을 물리친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하늘이 지켜주는
'신의 나라' 라고 착각하게 되고
연합군을 물리친 태풍을
신풍(神風 = 가미카제)이라 부르며 숭상하게 된다.
일본
"일본은 가미카제가
지켜주는 나라임!"
다만 그런 착각은 2차 대전 당시
'가미카제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어쨌든 두 차례 몽골군의 침입으로
막부의 권력은 크게 강화되게 된다.
싯켄
"왜 너희들은 빈둥거리는 거임?"
무사
"전, 고케닌(충성을 맹세한 무사)이 아닌데요.
저도 전쟁에 나가라는 말인가요?"
싯켄
"너 땅 있어?"
무사
"있는데요."
싯켄
"무사가 땅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쇼군의 공덕인거 몰라?"
무사
"..."
그리하여 이전까지
힘이 미치지 못 했던 지역의
무사들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전쟁을 핑계로
그동안 막부의 영향력에서 비껴 나 있던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게 된다.
싯켄
"왜 님들은 세금 안 내는지?"
귀족
"우리는 원래
막부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싯켄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
돈을 한 푼도 안 내시겠다?"
싯켄
"그럼 님들이 전쟁을 치르던지.."
귀족
"..."
반면 고케닌들은
크게 몰락하고 말았다.
원래 막부의 쇼군은
고케닌(고급 무사)에게
땅을 하사하는 조건으로
충성을 받게끔 계약을 맺었다.
때문에 몽골군의 침입을 받자
쇼군의 대행인 싯켄은,
고케닌들에게
동원 명령을 내렸고,
싯켄
"자! 전국의 고케닌들은
모두 소집하라!"
싯켄
"싫어? 그럼 땅 내놔!"
고케닌들은 군말 없이
전쟁에 참여해야만 했다.
▲ 땅을 받고 충성을 맹세한 계약관계
이때 고케닌들은
자신의 부하들을 병력으로 동원하는 것은 물론,
전쟁의 비용까지 모두
자기 부담으로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고케닌들이
기꺼이 이를 감수했다.
부하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닌가요?"
고케닌
"좋은 장비와 보급품이 있어야
전투력으로 직결되는 거 몰라?"
부하
"그래도, 이렇게 영지까지
몽땅 저당잡히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고케닌
"뭐가 위험해?
다 막부를 위해서 쓰는 건데.."
고케닌
"두고 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막부에서 이까짓 빚은 다 책임져주고.."
고케닌
"크게 포상도 내려줄 테니.."
바로 이런
보상심리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적에게 침략을 받아
치르는 싸움인데
전리품은 어딨고
적의 영지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국 고케닌은
전선에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부하들의 목숨을 잃고
돈도 잃으면서도
땡전 한 푼
보상받지 못하게 된다.
고케닌
"헐! 막부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임?"
그렇게 빈털터리가 된
고케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은 화폐경제의 발전이 빚어낸
비극이기도 했다.
"워낙 땅을 담보로
돈을 대출해주는 금융업이 발달해서리."
결국 그렇게 고케닌들은
상당수가 영지를 잃게 되었고
땅의 주인은 대부분
세도가인 호조 가문이 차지하게 되었다.
고케닌
"이런, 된장!"
● 악당의 횡행
결국 몽골의 침략 이후
일본의 장원제도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고케닌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자
막부는 몰락한 고케닌들을
구제하려는 방편으로
1297년 특별 칙령을
발포하게 된다. (덕정령 : 德政令)
싯켄
"빚을 갚지 못해 땅을 털린 고케닌들에게
본래 땅을 돌려주도록 하라!"
하지만 이는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고케닌
"들었지? 내 땅 돌려줘!"
금융업자
"누구 맘대로?"
금융업자
"땅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한테 꿔간 돈부터 일단 내놔!"
결국 막부는
1년 만에 칙령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고
싯켄
"에겅. 무리수였어.."
이랬다저랬다 하는 통에
오히려 막부의 신뢰도만 크게 떨어지고
막부에 대한 충성도는
바닥을 치게 된다.
▲ 막부에 대한 지지도
고케닌
"젠장!
앞으로 막부에 충성 따윈 없다!"
그러자 막부에서는
저항세력들을 '악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싯켄
"이런 악당같은 놈들!"
이후 악당들은
막부에 비협조적인 것은 물론이고
고리대금업, 도박,
도적질도 서슴지 않았고
악당
"뭐가 어때?
먼저 우리를 배신한 건 막부인데.."
심지어 막부로 갖다 바치는
세금까지 강탈하며
막부 체제를 크게
위협하게 된다.
▲ 가마쿠라 시대 反정부 세력, 악당
한편 이렇게 전란으로 소란스럽고
사회적으로 불안이 팽배하던 당시,
민간에서는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말신앙'이 강타하게 되었으니,
"아! 세상이 말세야, 말세!"
어려운 불경 대신에
'염불'만 외워도 된다는 식의 사상이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배우지 못해
불경을 읽지 못해도.."
"돈이 없어
불당에 들어가 수행할 수 없어도.."
"신앙심만 있으면
부처님이 구원해 주신다능."
"헐! 정말요?"
"그럼!
'아미타불' 이렇게 염불만 외우면 됨."
무로마치 시대 전기 : 남북조 시대
●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1333)
막부와 고케닌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보며
덴노는 몹시나
흐뭇했다.
▲ 고다이고 덴노
고다이고 덴노
"하늘이 주신 기회다!"
고다이고 덴노
"이럴 때 막부를 무너뜨리고
다시 황권을 강화해야겠다."
덴노는 전국에
공문을 보내
막부를 타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일을
치르기도 전에
계획이 탄로 나
거병은 실패로 끝났고
덴노의 측근이 책임을 지고
유배를 당하게 됐다. (1324년)
싯켄
"아놔, 님 왜 그러셈?"
고다이고 덴노
"..."
그리고 7년 후 덴노는
또다시 거병을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이번엔 자신도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1331년)
싯켄
"더 이상 안 봐줍니다.
오키도로 가세요."
고다이고 덴노
"..."
하지만 일단 불이 붙은
反막부의 봉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각지로 번져 나갔으니,
고케닌
"호조 가문의 독재는
이젠 지긋지긋하다!"
"무사들은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자기들만 배를 채울 수 있는거냐!"
이때 반란에 앞장서던 이들은
신흥 무사들, 즉 '악당'과 '해적'들이었다.
"악당은 고리대금업·금융업·유통업을
주로 했었고.."
"해적들은 무역이나 해운업을
주로 했었다능."
어느 쪽이든,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대두된
반체제 무장세력으로
이들은 평소
주민들에게 통행료를 강요하는 등
깡패 짓거리도
서슴지 않던 이들이었다.
악당
"장사하다보면
싸움질도 할 수 있지 뭐."
그런데 그런 악당과 해적들이,
막부에 대한 반감으로
오키도에 갇힌 고다이고 덴노를
구출시켜 준 것이다.
악당
"하하하. 혹시 모르잖아?"
악당
"덴노가 나중에 나한테
쇼군 자리라도 하나 내어줄지."
그리고 덴노의 탈출 소식에
막부는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진압군을 파견했다.
이때 진압군 대장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였다.
▲ 아시카가 다카우지
싯켄
"어서 악당 넘들을 진압하고
덴노를 다시 가둬라!"
다카우지
"넵!"
하지만 이게 웬걸!
다카우지는 막부를 배신하더니
오히려 칼을 거꾸로 돌려
막부를 공격한 것이다.
싯켄
"뜨아! 다카우지 이넘이
이성계 코스프레를 하네!"
다카우지의 배신은
막부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동안 덴노 편에 설지, 막부 편에 설지
고민을 하던 많은 무사들이
反막부 편에 가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보라구! 다카우지도
저렇게 막부를 배신하고 있잖아."
때문에 막부의 위세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反막부 세력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아! 150년의 가마쿠라 막부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 무로마치 막부의 탄생 (1336)
덴노는 승리에
도취되었다.
고다이고 덴노
"하하하. 내 세상이다!"
그러면서 몰수한 토지를
대부분 황족과 귀족들에게만 나눠줬다.
때문에 여기저기서
덴노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무사
"젠장! 전쟁에서 피를 흘린 건
우리들인데.."
무사
"막부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왜 귀족들에게만 나눠줘?"
악당
"아놔, 내가 뭐 때문에
이 고생을 한 건데!"
사실 가마쿠라 막부를 물리치는 데
협력한 무사들은
덴노 중심의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덴노 편에 선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전리품(토지)을 생각해서
칼을 들었던 것인데,
덴노는 그런 무사들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고다이고 덴노
"하하하. 그냥 다 내 세상!"
오히려 덴노는
황권의 위엄을 과시하려
새로운 궁전을
짓겠다고 했으니
고다이고 덴노
"덴노의 위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야 하는
농민들과 무사들의 불만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뭐? 또 세금을 내라고?"
"이런! 더 이상 못 참는다."
이때 불만을 품은 무사들을 결집한 인물이,
바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였다.
다카우지
"나도 덴노한테 속았다고!"
다카우지
"누구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은 건데.."
다카우지
"나한테 주겠지 했던, 쇼군 자리도
덴노의 아들한테 줘버리다니.."
무사
"다카우지 님,
차라리 덴노를 칩시다."
다카우지
"열받는데, 확 그래 버릴까?"
다다요시 (다카우지의 동생)
"형님, 그건 안 됩니다."
다카우지
"왜?"
다다요시
"아무리 그래도 덴노는 덴노입니다.
덴노에게 맞서면 역적이 된다고요!"
다카우지
"하긴. 그렇지?"
다다요시
"대신에 다른 황족 중에서 한 놈을 꼬드겨서
새로운 덴노로 앉힙시다."
다다요시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반란군에서
관군이 되는 겁니다."
다카우지
"옳거니! 관군이라..
하여간 내 동생은 똑똑해."
그리하여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덴노를 가두고
1336년, 덴노 가문 중 하나를 골라,
새로운 덴노로 앉혔다.
고묘 덴노 (당시 14세)
"헐! 뜬금없이 덴노가 됐다."
고묘 덴노
"그럼, 아저씨가
쇼군이 되어주세요."
다카우지
"하하하"
그리하여 무로마치 막부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왜 무로마치 막부임?"
"쇼군의 저택이 있는 곳이
교토의 무로마치여서.."
● 남북조 시대 (1336~1392)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군사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
교토 남쪽의 요시노로 탈출한 것이다.
고다이고 덴노
"하하하. 내가 탈출에는 일가견이 있나봐."
고다이고 덴노
"차라리 신창원할까?"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조정을 세우고
다카우지에 맞서자,
한 나라에 두 명의 덴노가 존재하는
황당한 상황이 빚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흔히
남북조시대라고 한다능!"
하지만 경기도 면적보다 작은
'기이 반도'만을 가지고
남조가 거대한 북조에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 간이나 존속했다. 이유가 뭘까?
일단, 고다이고 덴노가
숨어들어간 요시노라는 곳은
천혜의 요새에
자리 잡고 있었고,
▲ 요시노의 전경
해상 루트를 통해
동쪽과 서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덴노의 정통성 측면에서도
덴노를 급조한 북조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다.
고다이고 덴노
"내가 정통이라고!
저쪽은 사이비!"
더욱이 북조는
심각한 내부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어떻게 말인가?
다카우지는 쇼군에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으나
실제로는 1인 통치체제가 아닌
동생과 정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다카우지
"내 동생은 똑똑하니깐."
그런데 다카우지는
정이 많고 포용심이 많은데 비해
다다요시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성격이었다.
때문에 성격차이로
형제는 자주 다퉜으니,
다다요시
"형, 왜 자꾸 그렇게
인정에 사로잡혀서 정치를 해요?"
다카우지
"너야말로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결국 동생이 반기를 들면서
전쟁이 터지기 시작했다.
다다요시
"속 터져서
형님하곤 같이 정치 못 해!"
다카우지
"이런 고얀 놈!"
이때 다카우지를 지지하는 세력은
악당과 해적 등의 신흥 무사들이 많았고
다다요시를 지지하는 세력은
전통 귀족들이 많았다.
하지만 전쟁은 치열했기 때문에,
이럴 때 남조가 쳐들어오면 골치 아팠던 것이다.
다카우지
"고다이고 덴노님,
우리는 남조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고다이고 덴노
"하하하. 아쉬우니깐 슬슬 기네.
뭐, 그러던지."
때문에 그틈에 남조는
야금야금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형제 간의 10여 년에 걸친 내분은
결국 다카우지의 승리로 끝나고
그동안 체력을 키운 남조는
북조가 함부로 손을 봐줄 수 없게되어
결국 60여 년이나
분단 상태를 유지해오다가
1392년, 마침
조선이 건국했을 무렵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에 의해
북조가 남조를 흡수 통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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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중세사 ② : 한·일 국력의 역전은 언제부터였을까? + 몽골의 일본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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