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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중세사 ① : 무사들은 어떻게 정권을 잡았나? + 막부시대의 도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489031119



헤이안 시대 중기

● 헤이안 시대의 탐관오리

중앙 정부가 강력해지려면
전국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수확물을
 

정부의 창고에
잘 쌓이게 하면 되는데,

그러자면 지방 관리들이
세금 징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야만 했다.

그게 제대로 이뤄질 때
모범적인 '중앙집권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발달된 도로망도 없고, 행정력도 없었는데

생각처럼 중앙집권 시스템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혁신적인 통치 시스템으로
7세기 동아시아 국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모두가 이상향으로 따라 했던
'조용조' 시스템은

 

8세기 후반 이후,
한중일 3국에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심각한 모순점을 드러내며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20세기 후반, 공산주의가 무너졌듯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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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3국 모두가 
이 시기에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졌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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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우연이 아님."

이럴 때 중앙정부는 
지방에 지차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타협노선을 
찾곤 했다.

헤이안시대 
일본도 그러했다.

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할 때면
이렇게 당부하곤 했었다.

 덴노
"어차피 네놈들이 
삥땅칠거라는 건 다 알고 있음."

 덴노
"다른 건 다 필요없고
매년 일정한 세금만 잘 갖다 바치라능."

 덴노
"나머지는 너희들 맘대로
구워먹든 삶아먹든 노터치!"

 고쿠시 
"어익후! 감솨합니다."

그러했으니 '고쿠시'로 파견되면
현지에서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누리면서
 

백성들을 쥐어짜면서
막대한 부를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쿠시 
"하하하"

그런데 이러한 고쿠시는 
누가 임명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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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시대의 최고 세도가였던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후지와라 氏 
"에헴!"

때문에 고쿠시가 되려고
귀족들마다 치열한 로비가 벌어졌다.

쌀을 1만 섬을 
갖다 바쳐도 괜찮았다.

현지에 가서 
그보다 더 많이 뜯으면 그만이었다.

 후지와라 氏 
"좋았어. 자네를 
야마구치 구니(國)의 고쿠시로 임명하지."

 고쿠시 
"어익후 감솨합니다."

하지만 이때 
고쿠시로 임명된 자는

임지로 내려가는 법이 거의 없었고, 
대리인을 내려보냈다.

 고쿠시
"자네가 나 대신 내려가
일 좀 해주게."

moon_and_james-31대리인 
"넵!"

중앙에 머무르면서 
계속 로비활동에 전념해야

고쿠시 임기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으리,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세도가에게 
온갖 아부를 떠는 고쿠시라도

지방에만 내려가면 
단번에 지엄하신 왕이 되어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착취하게 된다.
▲ 고쿠시가 머물던 관청

 고쿠시 
"내가 그동안 
뇌물로 꼬라박은 돈이 얼만데."

 고쿠시 
"그거 채우려면 
열심히 더 털어야 됨."


● 늘어가는 장원, 줄어드는 국영지

8세기 중엽, 
일본 정부는 이런 발표를 한다. (743년)

 덴노
"앞으로 토지를 개간하는 자는
영구히 그 땅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러자 땅을 소유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영주들이 

수하의 농민들을 시켜
땅을 개간하며 재산을 늘리리 시작했다.

특히 새로 영토로 편입된
동부 지역에서는 

그만큼 불모지가 많아
개간으로 인한 재미가 쏠쏠했다.

 영주
"얼른 개간해서
좋은 땅을 선점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개발한 영주들의 땅은
곧 지방관리나 귀족들이 눈독을 들이기 십상이었다.

 고쿠시
"이것 봐!"

 영주
"왜요?"

 고쿠시
"자네가 여기 땅의 영주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영주
"합법적으로 땅을 개간해서 차지한 건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고쿠시
"어쨌든 세금은 꼬박꼬박 잘 내라고.
내 지켜보겠어."

 영주
"..."

이때 고쿠시의 위협에 못 이겨
영주들 중에서는

세도가를 찾아가
땅을 갖다 바치는 일이 잦았다.

 영주 
"고쿠시 등쌀에 살 수 없어서
나리께 땅을 바치고자 왔습니다."

 후지와라 氏 
"오호, 그래?"

 후지와라 氏 
"좋아. 그러면 자네를 
장원의 관리인으로 임명하겠네."

 후지와라 氏 
"이제 내 소유가 됐으니깐
국가에 낼 세금은 면제라능!"

이렇게 하면 영주들은
정기적으로 세도가에게 뇌물만 바치면

나머지 세금은
모두 면제받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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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버린 땅을
영주가 차지하게 될 때에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영주들은 세금 회피를 도모했다.

 영주 
"이번에도 땅을 바치러 왔슴돠.."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화가 나는 건 고쿠시였다.

 고쿠시
"아놔, 나한테 바쳐야 할 세금을 안 내려고, 
이런 수작질을!"

그러나 이미 땅의 소유가
세도가로 바뀌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때문에 영악한 고쿠시 중에는
다른 이들이 개간을 하기 전에

먼저 개간을 해서
스스로 장원을 소유하거나

농민이 버린 땅을
잽싸게 낚아채 가져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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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공무원이 
이래도 되는 거야?"

"노후 보장 몰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헤이안 시대 일본의 국영지는

점점 더 쪼그라들게 되었고
11세기가 되면 전체의 2/3를 장원이 차지하게 된다.
▲ 국영지(파란색), 하늘색(고쿠시 권한으로 면세된 토지), 주황색(장원)

상황이 어찌나 심했던지, 
1025년 어느 대신은 이런 기록까지 남길 정도였다.

"천하의 땅은 
송두리째 귀족들의 소유가 되어.."

"국영지는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게 됐다."


● 무사단의 탄생

영주들 중에는
땅을 세도가에게 바치지 않고

스스로 지켜보려는
이들도 있었으니,
▲ 헤이안 시대 영주의 장원

이들의 방법은 
스스로를 무장시키는 것이었다.

 영주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능."

그리하여 
수하의 농민 중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캐스팅해서
무장을 시키고

평소 무술을 연마하게 하면서
'전문 싸움꾼'으로 만들어 갔다.

 영주
"이래야만 고쿠시나 다른 영주들로부터
내 땅을 지킬 수 있음!"

그런 방식으로 
영주들은 장원을 지킬 수 있었고

그 대가로 힘 있는 농민들에게 
'무사'라는 칭호를 주면서 우대했다.

 영주
"이제부터 무사들은 농사일 하지말고
무술 연습에만 매진하라능."

▲ 이때부터 무사들은 농민들보다 계급이 높아지게 된다

하지만 무사들의 싸움 실력이 늘어가자 
영주들 중에서는 흑심을 품고

만만한 다른 영주의 땅을 골라
무력으로 흡수하는 일도 잦아졌다.

 영주
"하하하."

하지만 강력한 중앙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재산을 털린 영주들을
구원해줄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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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습니다. 
제가 땅을 빼앗겼어요."

"낸들 알어. 
나도 힘이 없는 걸.."

그러니 유력 영주들은
더욱 더 흥성하게 되었고,

그렇게 무력 집단으로 
성장한 영주들은

대규모 무사 집단을 지닌
'무사단'으로 성장하곤 했다.
▲ '가자' 계급은 대부분 일가 친족이 맡았다


● 해적의 습격과 소탕 : 무사계급의 출세

통일신라 말기에서
후삼국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는 

한반도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기였다.

▲ '도적들의 난'을 순화해서 말하면 '농민 봉기'가 된다

신라의 왕권은 경주 인근을 제외하고는
지방까지 미치지 못했고, 

호족들은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리느라

약탈과 전쟁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도적들이 우글거리는 
무법천지였다.

때문에 신라인들 중에는
규슈섬으로 이주한 이들이 많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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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초 일본 전역을 강타했던
천연두도 규슈에서 시작됐다능." 

개중에는 해적이 되어 
규슈섬을 약탈하기도 했으니, 

이들 신라 해적들을 
'신라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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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구가 온다!"

당시 신라구는 한 번에 수백 명씩
떼를 지어와서는 

재산을 약탈하고
마을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기 때문에

한때 규슈섬 해안가에는
사람이 못 살 정도로 황폐했었다.

하지만 중앙집권체제가 붕괴된 
당시 일본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덴노
"아놔.."

다만 다행히도, 
신라구는 

고려가 세워지는
10세기초부터 종적을 감추게 된다.


그러나 신라구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일본 해적들이 설쳤다. 

당시 가장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했던 곳은,

선박들이 자주 왕래하는 
세토 내해였다.
 
▲ 세토 내해 : 섬으로 둘러싸인 일본의 내해

 덴노 
"아놔, 세곡선까지 다 털어가네."

해적들이 설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덴노
"어찌하면 좋겠는가?
정부군으로는 소탕이 어려울 것 같은데.."

"지방의 영주들에게
부탁을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덴노
"걔들이 뭔 힘이 있다고?"

"아닙니다. 요즘 영주들 사이에서는
무사단을 양성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덴노 
"뭐? 사병을 양성해?
이것들이.."

"고정하십시오. 그러니 이참에
걔네들 힘 좀 빌려보자는 겁니다."

그리하여 정부는 해적 토벌을 
무사단에 맡기게 되었는데,

"너희들이 나가서
해적들 좀 손봐주고 오라능."


과연 무사단은 
성공적으로 해적들을 토벌하게 된다.

 
▲ 당시 사무라이의 전투 모습 : 기러기의 움직임으로 복병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적을 격퇴시키는 장면

"오! 굉장하군."

이후 정부에서는
무사단을 치하하기 위해

수도인 교토(헤이안쿄)로 불러들여
관직을 하사하는가 하면

궁중 경비와 
성내 치안을 맡기기도 하고,

"이넘들, 참으로 든든해."

고관들의 보디가드(시종)로 
채용하기도 했다. 
▲ 헤이안 시대 말기의 하급 무사

시종이라는 뜻의 '사무라이'란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하하. 출세했네."

이런 무사단의 성장이 있었기에,
11세기 여진족 해적(도이)이 

규슈 지방으로 쳐들어왔을 때에는
재빨리 격퇴할 수 있었다.




헤이안 시대 후기

● 섭관정치 : 세도가 후지와라 가문

장원의 증가와 
귀족들의 세력 확대에 따라

헤이안 시대는 귀족의 힘이
덴노를 능가하는 시대로 변해갔다.

귀족의 힘이 
워낙 기세등등하다 보니

아예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 
덴노를 허수아비로 만들기도 했으니,

덴노가 어리면 대신 정권을 맡아 정사를 보는 
'섭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주로 덴노의 가문,
즉 황족이 섭정을 맡았지만

귀족의 세도가 드세지면서
외척이 섭정의 자리에 오르는가 하면

왕이 성인이 되어도 정권을 내놓지 않고 
스스로 '관백'이 되어서 

정치를 마음껏 주무르는 
실질적인 왕 노릇을 계속했다.

이러한 섭정(셋쇼), 관백(간바쿠)의 정치를 줄여
흔히 섭관정치(셋칸 정치)라 하는데,

'섭관정치'야 말로
헤이안 시대를 상징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가마에 탄 덴노가 섭정을 찾아가는 모습 : 당시 덴노와 섭정의 지위를 실감할 수 있다

외척의 섭관정치는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9세기 중반 처음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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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후지와라 가문은 
7세기 중엽 다이카 개신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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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가 무너질 때까지
무려 550년 동안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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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후지와라 가문의 요시후사가
덴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섭정을 시작하더니

덴노가 크자, 관백이 되어 
뒤에서 덴노를 조정했던 것이다.

 요시후사
"덴노는 내 집에서 태어나서
쭉 내 집에서 자라왔음."

 요시후사
"덴노의 외할아버지인 내가 
덴노를 도와주겠다는데 뭐가 잘못임?"


사실 요시후사가
이러한 월권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후지와라 가문이
대대로 딸들을 덴노 가문에 시집보내 

외척을 독점하며
권력을 다져온 결과이기도 했다.
▲ 덴노(좌)와 후지와라 氏 관백(우)

 덴노
"할머니도, 어머니도, 마누라도, 며느리도
모두 후지와라 가문.."

 덴노
"우리 집안은 어차피
후지와라 집안하고만 결혼해야 한다능."

당시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멋대로 황태자를 폐위시켰다는 것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후지와라 氏
"후지와라 피가 안 섞였으므로
덴노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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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권력을 누린 외척 세도 가문이

바로 헤이안 시대의 
후지와라 가문이었던 것이다.
▲ 후지와라 가문의 연회


● 장원정리령 : 덴노와 귀족의 분쟁

그런데, 귀족에 눌려 뒷전으로 밀려 있던,
덴노가 일대 반격에 나섰다.

1068년 '고산조 덴노'의 즉위와 함께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 고산조 덴노

이전 덴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바람에

이복동생인 고산조가 
덴노가 된 것이 큰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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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조의 어머니는 
후지와라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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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년 만에 후지와라의 피가 섞이지 않은 
덴노가 등장했던 것임."

때문에 고산조는
이참에 후지와라 가문을 몰아내고

그동안 짓눌렸던 
황권을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고산조 덴노
"앞으로 섭정이며 관백이며
이딴 거 싹 다 없애버리고,"

 고산조 덴노
"이제부터 내가 직접 
통치하겠음."

 고산조 덴노
"전국의 정원도 모조리 정리해서
국가 소유로 돌리겠다능."

그리하여 1069년 덴노는
'장원정리령'을 내리게 된다.

moon_and_james-13귀족 
"뜨아!"

 고산조 덴노
"싹 다 정리해!"


하지만 300년 넘게 이어져 온 
장원 체제를 한 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

그 효과가 컸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귀족들은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고,


반면에 허수아비와 같았던 덴노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산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라카와 덴노는,

아예 '장원정리'에만 
몰두하기 위해

자신의 7살 난 어린 아들에게 
덴노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上皇 : 조우고)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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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전문용어로 
'원정(院政 : 인세이) 정치'라고 한다능."

▲ 원정(인세이) 정치는 이후 70여 년간 계속된다

 시라카와 상황
"자질구레한 정치는
덴노한테 맡기고,"

 시라카와 상황
"난 귀족들에 빼앗긴 땅을 
되찾는데 주력하겠다능."

하지만 그럴수록
귀족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불만 귀족들은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묘책으로

자신의 장원을 
절간에 상납하기 시작한다.

"장원을 상황에게는 
상납할 수 없다!"

"맞아. 우리를 탄압하는 
상황에게 상납하면,"

"상황의 세력만 커져
우리를 더욱 탄압하게 될 거라능."

"에잇. 어차피 빼앗길 바엔
차라리 절간에 갖다 바치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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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하필
절간에다 땅을 바치려 했던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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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이 소유한 땅에는
국가가 세금과 부역을 거둘 수 없었으니깐!"

때문에 귀족들은 
사원에 땅을 상납하는 조건으로

스님들과 이권을 
나눠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원은
갑자기 엄청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동시에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다만 이때 사원의 장원은,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승려들을 무장시켜 
만일에 대비해야만 했었다.
▲ 얼굴을 흰 천으로 감싼 승병들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들 못지않게
스님들의 파워가 셌다.

승려는 법적으로 
일반 농민들과는 달리

세금과 부역의 의무가 
면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노려 
11세기 무렵부터

세금을 피하기 위하여
사원에 들어가 중이 된 농민들이 증가했다.

물론 이들은 애초부터 
불교 수행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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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땡중들!"

사원 입장에서는, 사원 소유의 장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승병이 필요했다.
▲ 승병들

그러니 땡중이 될지라도
사원은 열심히 유랑민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대신 무술을 가르쳐 
강력한 승병 집단을 조직하게 된다.
▲ 낚시꾼들을 쫓아내고 있는 승병들 : "살생 금지 몰라?" "스님부터 살생 금지 지키세요."

다만 승병의 세력이 커지자
사원은 점점 조정을 무시하기에 이른다.

"덴노고 뭐고
우리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어!" 

 정부
"어서 땅 내놔!"

 귀족
"못 줘!"

 스님
"나도 못 줘!"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덴노와 귀족들은 누구를 쳐다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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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칼을 쥐고 있던
무사단이었다.


● 칼자루를 쥔 무사들

무사 계급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가

영주가 영지를 지키기 위해
힘 센 농민을 차출하면서

'전문 싸움꾼'이 된
케이스가 많았고,

이들 중에는 
해적과 반란군을 토벌한 대가로

중앙 귀족으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헤이안 시대의 말기가 되면

권력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계급이 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여기저기서 
세력 간 반목을 하고 있었다.

특히 1156년, 덴노의 자리를 놓고
상황과 덴노가 다투고 있었다.

 스토쿠 상황
"내 아들을 
덴노로 앉히겠음."

 고시라카와 덴노
"아니, 출생도 불분명한 사생아 주제에 
이제 내 자리까지 넘봐?"

 스토쿠 상황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고시라카와 덴노
"사생아 출신이라고 했다, 왜?"

 스토쿠 상황
"너, 이 자식이!"

동시에 관백 자리를 놓고서도
후지와라 집안끼리 다투고 있었다.

 요리나가 관백
"형님, 내가 관백이 된 게 
그리 아니꼬우세요?"

 요리나가 관백
"그러게 평소 아버지한테 
미운 털이나 박히지 말 것이지."

 다다미치
"뭐야? 너 말 다했어?"

 요리나가 관백
"어허, 예의 지키세요. 
난 관백이라고요."

 다다미치
"너, 이 자식이!"

이렇게 집안끼리
반목을 하던 때,

상황 편에
요리나가 관백이 손을 잡고

덴노 편에 다다미치가 
손을 잡아서

결국 덴노파와 상황파로 
서로 맞붙게 되었으니,

이들은 서둘러
무사 계급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스토쿠 상황
"나를 도와주게.
성공하면 엄청난 포상을 하겠네."

 고시라카와 덴노
"아냐, 나를 도와주게.
내가 더 큰 포상을 해주겠네."

그런 와중에 
무사 가문 내에서도

서로 덴노파, 상황파로
나눠지게 된다.

"난 덴노파!"

"난 상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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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여기저기서 집안싸움이네."

그리고 곧 피 튀기는 싸움이 
한바탕 쓸고 지나가는데,

결과는 덴노파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상황은 유배를 가고,
상황파 세력들은 모두 목이 날아가게 된다. (호겐의 난, 1156)
 

다만 참전한 무사들은 
오직 미나모토 가문과 다이라 가문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해서 전사한 것도,
전쟁에 이겨 최고의 공신이 된 것도

모두 이 두 가문에서 
나오게 된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3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고시라카와 덴노가

자기 아들에게 덴노직을 주고 
자신은 상황에 앉게 된 것이다.

 고시라카와 상황
"상황에 앉아있으면
자질구레한 일에서 벗어나 몸이 편하지."

하지만 그걸 아니꼽게 본 주변 세력들이 
덴노를 이렇게 꼬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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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 시절, 상황을 꺾으신 분이
스스로 상황이 되시겠다니.."

moon_mad_angry_edition-11
"이게 말이 됩니까?"

 니죠 덴노
"하긴.."

그렇게 덴노와 상황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지기 시작하자,

무사 집안의 라이벌인 
미나모토 집안과 다이라 집안도

각자 최고의 무사 집안을 꿈꾸며
또다시 덴노파와 상황파로 나눠 대립하게 된다.

 다이라 가문
"우리 가문은 덴노 지지!"

 미나모토 가문
"우리 가문은 상황 지지!"

그리하여 1159년, 
또다시 전쟁이 터지게 되는데, (헤이지의 난, 1159)
▲ 헤이지의 난

전쟁은 다이라 가문의 승리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

패장 미나모토 요시토모는
죽임을 당하고

그의 두 아들은 
멀리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가마쿠라 시대 전기

●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1185)

결국 1156년 호겐의 난,
1159년 헤이지의 난, 두 사건은 

무사의 힘에 덴노의 자리가 좌우됨을 
만천하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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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무사가 실세야!"

그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권력의 최고 자리에

무사 출신인 다이라 가문이
우뚝 서게 된다.
▲ 다이라 가문의 수장, 기요모리

 기요모리 
"하하하"

권력을 잡은 기요모리는
딸을 덴노의 부인으로 들여보내

그 아들이 두 살 되는 해에 
서둘러 덴노에 앉히더니,

자신은 최고 권력을 움켜쥐며
'다이라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일본의 무인정권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기요모리
"하하하. 이제 세상은 내 것이다!"

그리고는 막대한 장원을 차지하며
권력과 재력을 동시에 채워나갔다.

▲ 다이라 가문의 토지 (파란색) : 전국의 절반이나 되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황족·귀족·승려들의 반감만 높아졌으니,

"아놔, 다이라 집안이 
나라를 다 망쳐놓네."

"저런 역적을 
그냥 둘 수 없음!"

전국적으로 反 다이라 여론이
크게 대두되고 있었고,

여러 차례 
쿠데타 음모도 발생했는데

배후 조종을 한 게
실권을 빼앗긴 상황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moon_and_james-24기요모리
"상황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기요모리는
상황(上皇)을 아예 유폐시켜버렸다.
▲ 고시라카와 상황

 기요모리
"이제 아무도 나한테 
딴죽을 걸지 못하겠지?"

하지만 당시 상황(上皇)
불교에 이미 귀의한 몸이었기 때문에

그의 유폐는 
불교계를 크게 격분시켜서

"감히 우리를 업신여겼겠다!"

反 다이라의 목소리만 
오히려 더욱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다이라를 쫓아내자!"

그리고 결국 反 다이라 토벌군이 
결성되었으니,

그 선봉에 선 것은
헤이지 난의 패배로, 

유배생활을 했던 
미나모토 가문의 요리토모였고, (겐페이 전쟁 1180~85)

 요리토모
"내 반드시 
아버지의 복수를 해주겠다."

 요리토모
"역적 다이라를 토벌하자!"

요리토모가 선봉에 서자 
곧 불교 세력이 합세하여

수 만의 대군으로
교토로 쳐들어가게 되었으니,

다이라 가문은 이를 
막아내기가 역부족이어서
 

화들짝 놀라며,
어린 덴노와 '3종 신기'를 챙겨

서둘러 교토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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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종 신기가 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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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슬, 거울, 신검.
이걸 가지고 있어야,"

▲ 실제 3종신기는 아니다. 실제는 공개되지 않는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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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의 정통성을 증명받을 수 있다고
과거 일본인들은 생각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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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중국 황제의 
옥새와 비슷한 거네."

하지만 다이라 가문은
도망가던 중 최후를 맞고 말았고,

7살 난 어린 덴노는
3종 신기를 품고 

그만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짧은 삶은 마감하고 말았다.

"아놔, 3종 신기는 두고 가시지.."

그렇게 다이라 가문은 
사라지고 말았고 (1185년)

그 뒤를 이어, 토벌군의 대장이었던
요리토모가 집권하게 되었으니

 요리토모
"헤헤.."

그는 스스로 오랑캐 때려잡는 직책인,
세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 : 줄여서 쇼군)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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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쇼군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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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당시 무사 직책 중
가장 높은 벼슬이었으니깐."

▲ 미나모토 요리토모

군사 거점이던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희대의
한 나라 두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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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정부인 조정은 교토에
군사정부인 막부는 가마쿠라에.."

그렇게 헤이안 시대가 끝이 나고
가마쿠라 막부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 막부시대의 행정 조직

막부 정권이 들어서자
귀족들은 크게 동요했다.

"귀족들의 허드렛일이나 봐주던
무사들이 정권을 세우다니.."

"말세로군, 말세야!"

"무사들이 우리가 소유한 
장원을 빼앗아 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역정을 낼 것은
또 뭔가."

이때 무사들은 
귀족과는 대립하기 싫었기 때문에,

덴노에게 일본 통치를 허가받는
모양새를 취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정권인, 막부를 세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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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인들은
아예 조정을 독차지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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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사들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 했던 것."

▲ 고려 무신정권은 '조정'을 점령했기 때문에 
막부(야전텐트)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이때부터 일본은
조정과 막부의 이중 지배 체제로 운영되게 된다.

막부 정권기
쇼군의 통치방식은 이러했다. 

먼저 무사들에게
충성의 서약을 받았다.

"충성!"

그렇게 서약한 무사를
고케닌(御家人 : 어가인)이라 불렀고

쇼군은 코케닌에게
영지를 나눠주고

고케닌은 그 대가로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군사력을 제공했다.


그런 고케닌의 수가
당시 2천 여명에 이르렀다.

쇼군은 고케닌을 통해
덴노의 궁궐과 막부를 경비하게 했고

국경을 수비하게 했으며,
대규모 토목 공사도 지휘하게 했다.


또 고케닌 중에서
슈고(守護 : 수호)와 

지토(地頭 : 지두)를 임명해서
지방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슈고'는 과거 고쿠시를 대신한
도지사로서,

전국 각 구니(國)
치안과 경비를 담당했고

'지토'는 과거 군시를 대신한
군수로서,

고을의 치안을 유지하고
세금을 걷는 것을 주 업무로 했다.

때문에 슈고나 지토는 
평상시에는 고을 '관찰사'나 '사또'로 군림하다가도
 

전쟁 시에는 
관할 지역의 무사들을 지휘했던 것이다.

"자! 나를 따르라!"

이러한 슈고나 지토는 
세습이 보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 지토의 임무 : 치안과 세금 징수

다만 막부가 처음부터
국가 전체를 통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토의 덴노와 귀족들이
여전히 위세를 부렸기 때문에

초기에는 조정은 서일본을,
막부는 동일본을 지배하는 양상이었고

점차 막부의 힘이 강화되어
전 일본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 막부시대 무사들의 삶

그렇다면 무사 정권 시기
평소 무사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당시 그려진 무사(고케닌)의 저택을 보면
많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 승려 잇펜이 방문한 무사의 저택

보통 무사들의 집은
교통의 요지에 지어져

높은 담이나
울타리를 두르고 

집 둘레로는
해자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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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의 도랑은
경작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도 했다능."

또 대문은 망루로 만들어져
그 위에 활과 화살을 놓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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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집은 외부 침입에 대비한 
방어 시설이기도 했음."

집 앞에는 경호 무사들이
지키고 앉아있었다.

본채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고,

마당 주변에 있는 개와
장대 위에 있는 매는

사냥을 즐기기 위해
기르는 것이었다.

한편 마룻바닥이 깔린 마구간에는 
말이 두어 필 보이고,

그 주위에 말의 수호신인
원숭이를 기르고 있어,

당시 말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짐작게 하고 있다.

또 집 뒤편에는 무사가 말을 타고
활쏘기 연습을 하는 마장이 있었다.

당시 무사의 무예는 
칼싸움이 아닌

말타기와 활 쏘기가
기본 무예였으니,
▲ 초기 사무라이 : 기마궁술을 주로 연마했다

무사들은 영지를 지키기 위한
전투 기술을 

일상적으로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 말 탄 무사

이러한 무예 단련 외에도 
무사들은 영지를 가진 영주로서,

영지의 농민들을 경작시키고 
여러 가지 사역을 시키기도 했는데
 
▲ 무사들의 음식을 차리는 모습

원체 말보다 주먹이 앞선 
무사들인지라 

그만큼 농민들의 
고충도 컸다고 한다.

"에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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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무사의 직영지는
세금이 일체 부과되지 않았다능."

한편 무사들 중에서는
막부에서 파견한 지토(군수)도 있었으니,

이들은 같은 무사의 영지는
터치하는 법이 없었지만,

다른 영주들의 영지에는
심심하면 딴죽을 걸었다.

 지토
"왜 세금을 안 내는 겅미?"

 영주
"원래 그동안 세금을 안 냈는데요?"

 지토
"아놔, 세상이 달라진 걸 
여태 모르시네."

 영주
"..."

1257년에 작성된, 한 장원영주의 고소장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67)

▲ 당시의 고소장

지토가 내 영지의 농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토
"이놈들아. 내 토지에 가서
보리씨나 뿌려라."

 지토
"안 뿌리면 너희 놈들 처자를 잡아다가
귀를 자르고 코를 베고,"

 지토
"또 머리를 갂아서 
비구니로 만들어 놓겠다." 


때문에 장원영주는 
어쩔 수 없이 

지토에게 땅을 모두 넘기고
자신은 일정액의 수입만 챙겨먹거나,
▲ 장원의 1/3을 지토에게 내주고, 그 대가로 소금을 받겠다는 계약서

아예 땅을 반땅하여 지토에게 나눠주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도 했었다.
▲ 장원을 지토와 나눠가진 증분도

 영주
"에겅, 힘든 세상이야.."

하지만 그럴수록 장원의 지배권은
지토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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