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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고대사 ③ : 천황의 권력 약화 + 장원의 등장, 신라 정벌 계획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486929250



나라 시대 전기

● 나라 시대의 개막 (710)

694년에 당나라의 
장안을 본떠 만든

후지와라쿄(藤原京 : 등원경)
겉보기에는 괜찮았지만,

도시 계획이 
매우 엉성했다.

쓰레기장이며 
화장실 시설이 열악해서

거리 곳곳에 쓰레기와 배설물을 마구 버려
오염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야먀모토 히로후미, 교양인을 위한 일본사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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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더러워서 못 살겠네."

여기에 후지와라쿄가 있었던
아스카 지역이

백제계 호족들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덴노가 꿈꾸는 새로운 정치를 하기에도 
여러모로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겐메이 덴노
"당나라 황제처럼 
황실의 위엄을 보이려면.."

 겐메이 덴노
"여기서는 어렵겠어." 

게다가 율령제를 실시한 이후로
관청과 공무원이 증가하고 있어

인구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후지와라쿄는 점점 미어터지고 있었다.

또 전국적으로 기근이 발생하고 
역병이 창궐하여 민심도 흉흉했다.

 겐메이 덴노
"안되겠어. 터가 좋지 않아.
수도를 천도해야겠음!"

그리하여 수도를 세운지 
16년만인, 710년도에 

다시 '나라 근방'으로 
새 수도를 옮기게 되니

이름하여,
헤이조쿄(平城京 : 평성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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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를 
나라 시대라고 한다능."

헤이조쿄 역시 
당나라의 장안을 모방했기 때문에

바둑판처럼 
깔끔하게 구획되게 하였고
▲ 장안성과 헤이조쿄(노란선)의 크기 비교

도시 중앙에는 
거대한 주작대로를 배치하고

중국풍의 호화로운 궁궐과 사원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무엇보다 화장실을 여러 군데 만들어,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했다.
▲ 헤이조쿄의 화장실 유적

"이제 아무 데나 
싸지르지 말라능!"

▲ 나라시대의 화장실 : 밑으로는 물이 흘러갔다.

또 세금을 
원활히 징수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도로를 정비하는가 하면

16km마다 역(驛)을 만들어
역참제 비스므리한 것도 실시했다.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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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 백제로부터 도입한 (馬)이 
크게 번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또 헤이조쿄 안에
'시장'도 설치하였으니,

관리들은 녹봉으로 지급받은
'삼베'나 '실뭉치'를 화폐 대용으로 하여


지방에서 운송된 특산물과
교환할 수 있게 됐다.
▲ 헤이조쿄의 시장 (재현)

이때 당나라의 화폐를 모방해서
엽전을 만들기도 했지만,
▲ 나라시대의 화폐

화폐의 인식이 미비한 나머지
제대로 유통되지는 않아

화폐 유통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게 뭐야? 쇠붙이는 필요없어.
그냥 삼베로 달라고."

한편 정부는 세금을 
좀 더 많이 징수하기 위해

각지로 기술자들을 
파견해서

'철제 농기구' 사용법과 '관개농법'을 알려주어 
수확량을 늘리고자 했고,

광산을 개발하는가 하면,
양잠 기술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자, 비단은 
이렇게 만드는 거임."

그리고는 해마다
비단을 조정에 진상토록 했다.


● 선진문물의 습득, 견당사 파견 

8세기 당시 당나라는
세계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며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면면을
만방에 과시하고 있었고,
▲ 당나라의 각국 사신단 

덕분에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당나라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통된 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 8세기 당나라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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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라, 발해에서도 당나라 풍이
크게 인기하고 있었다능."

이러한 트렌드에
일본도 합류하고자 했으니,

630년부터 정기적으로 
견당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여

"많이 배우고 오라능."

발달된 문물과 기술, 제도를 
대거 일본으로 수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견당사의 항해는 
목숨을 내건 여정과도 같았다.

먼 바다를 항해하기에 선박도 후졌고
항해술도 조악해서,

바다 한가운데서
물고기밥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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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3~4번에 1번 꼴로
조난 사고가 있었다능."

7세기 경만 해도
한반도 연안을 따라가는 항해였던 지라,

그나마 안전하고 수월하게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 랴오닝반도와 산둥반도 사이에는 섬들로 연결되어 있다

적대국인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로

더 이상 한반도를 통해서는
중국과 왕래할 수 없었으니,

 신라왕 
"우리 땅을 지나가고 싶다고?"

 신라왕
"택도 없는 소리!"

중국을 가려면 얄짤없이,
'망망대해'를 건너야만 했다.

때문에 이때부터 목숨을 건 
항해가 시작됐던 것이다.

"쳇! 치사한 신라 놈들!"


그런 위험한 항해를
20년에 한 번 꼴로 했던 일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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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0년에 한 번 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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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가 그렇게 명령했으니깐.."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38)

한번 떠날 때마다, 보통 150명이 
네 척의 배에 나눠 타고 갔다.

때문에 견당사로 파견된 
관리, 유학생, 유학승들은

한 번 가면, 
다음 배가 오는 20년 동안은 

중국 현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고

그러한 고된 여정을
극복하면서 

이들은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일본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귀국 인터뷰

"이것이 중국의 서적과 불교 경전"

"페르시아산 글라스"

"인도 악기 비파"

"버마의 보석으로 만든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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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하지만 견당사 파견은
9세기 후반에 전면 폐지되고 만다.

"지금 당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함."

"그러게. 
곧 망할거라는 소문도 있고.."

"정부도 돈이 부족한데
앞으로 보내지 말자능."

"맞아. 이제는 우리도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잖아."

"어차피 요즘은 
신라와 교역하는 상인들을 통해서,"

"중국 물건이든 신라 물건이든
쉽게 구입할 수 있잖아."

▲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기, 활발했던 신라의 해상무역


● 천연두의 창궐과 대불 건립 (752)

나라시대가 시작된 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일본은 경제적·사회적으로
커다란 곤궁을 맞게 된다.

인구가 증가하자
토지가 부족해졌기 때문에

세금 부담에 못 이겨
땅을 버리고 도망가는 농민들이 늘어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연두가 창궐했던 것이다.

천연두란 인류가 소를 가축으로 키우면서
얻게 된 질병이다.

하지만 6세기까지 일본인은
개를 제외하고는 가축이라곤 없었기 때문에

천연두와 같은 질병에 대한
내성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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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대부분이
도래인 출신자들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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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거치면서 
내성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임."

그리하여 8세기 초
규슈지방에서 시작된 천연두로 인해

순식간에 일본 열도에는
엄청난 희생자가 나타나게 되었고,

737년에 창궐한 
천연두로 인해 

헤지조쿄의 인구 1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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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가들도 
이때 천연두로 여럿 죽어나갔다능."


국가는
비상사태와도 같았다.

이럴 때 덴노는 부처의 공덕으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으니,
▲ 쇼무 덴노와 대불 건립의 주역들

 쇼무 덴노
"안 되겠어! 전국 곳곳에 절간을 만들어
불심을 드높여야만 되겠음."

 쇼무 덴노
"일단 헤이조쿄부터  
화려한 절간과 불상을 만들어 보자능."

그래서 추진하게 된 것이
동대사(도다이지사)와 대불(다이부쯔)의 축조였다.

전국적으로 
42만 명에게 자재를 기부 받고

"금 가락지 있으면 
어서들 내놓으라능."

218만 명의 
부역자들을 동원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대불을 완성하게 되었으니,

완성된 불상의 개안 공약식이 있었던 날
동대사 절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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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 공약식이 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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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에 눈을 그려 
혼을 불어넣는 의식."

중국·인도 등 각국에서 온 
사절단과 승려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 개안 공양식

신라에서 온 사절단만 해도 
700여 명에 이르렀고

1만여 명의 문무백관이 
참여했다고 한다.

"자! 드뎌
대불을 공개하겠슴돠."

그렇게 장막을 벗기고
모습을 드러낸 대불!

앉은키 16m, 얼굴 길이 5m, 귀 3m에 
손바닥에만 16명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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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사용된 구리와 주석이 259톤, 
도금에 쓰인 금이 60kg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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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그게 다 얼마야?"

덴노는 천연두를 이겨보고자
그토록 국력을 결집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대사와 대불 건립을 필두로

일본에서는 전국적으로
절간과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덕분에 불교는 
빠르게 민간에 보급되게 된다.

그리하여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화장의 풍습, 
육식을 꺼리는 풍습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 고대에 비해 중세 일본인들은 신장이 작아졌다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는
불교의 인기에 편승해

부처를 신도의 신으로 
끌어들이며,

불교를 믿는게 어차피 신도를 믿는 것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하게 된다. (신불습합)



나라 시대 후기

● 토지제도의 몰락 : 덴노의 권력 약화

7세기 무렵, 
신라와 당이 손을 잡고

한반도에서 
한창 전쟁을 벌일 때에는

나당 연합군이 언제 
일본을 침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덴노를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었다.

"헐! 백제가 망했어.."

하지만 한반도가 통일되고
외세 침입의 위험성이 사라지자

덴노의 영향력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그 틈을 이용해 귀족과 불교계가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하하하"

반대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다.


당시 농민들은 국가로부터 '구분전'이라는
토지를 받아 생계를 유지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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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전(口分田)은 인구(人口)에 따라
나눈(分) 밭떼기(田)를 말한다능."

▲ 구분전의 흔적

그 대가로 토지 수확량의 
일정 퍼센티지를 세금으로 바치고

더불어 특산물을 바치고
연간 10일간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다.


"징용 끌려가기 싫으면
대신 삼베로 대납해도 된다능."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연간 60일 이내의 
잡다한 부역이 추가되었고

병역의 의무도 
더해졌던 것이다.
▲ 끌려온 농민들

게다가 농민들에게서 
징수한 세금들은 

농민들이 직접 
운반하도록 했기 때문에,

동북 지방의 농민의 경우,
수도까지 운반하는 데 50일이나 걸려

▲ 고대의 관로(파란색), 운반 일수(숫자)

돌아가는 길에 굶어죽는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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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도 스스로 부담해야 했었기에.."

 







"골병들겠어.
농사지을 시간도 없다니깐."

"그래도 요즘은 수도를 옮긴다고 
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하긴 천도 한번 할 때마다
죽어나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민들은 땅을 버리거나

공사 현장에서 도망치는 경우들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그렇게 도망친 농민들은
귀족들이나 사원으로 들어가

몸을 의탁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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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자진해서 
농노가 되었다능."

이때 농민들은 
토지를 바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토지는
날로 커져갔고

반면에 덴노의 세력은
날로 약해지게 되었다.


● 덴노의 개혁과 실패 

귀족의 힘은 넓은 사유지, 
즉 장원에서 나왔다.

▲ 장원의 모습

가뜩이나 귀족들은 권력을 이용해
장원의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으니

"하하하"

귀족에게 
땅을 바치는 농민들이 늘면서

당연히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었다.

 덴노
"이거 안 되겠어. 
무슨 방법 없나?"

"토지를 새로 개간하게 하여
땅을 늘리는 겁니다."

 덴노
"그런다고 하겠어?"

"대신 개간한 토지는 본인부터 3대까지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겁니다."

 덴노
"오호! 그거 괜찮겠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라!" (723년)

하지만 농민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쳇! 쌔빠지게 개간하면 뭘 해.
3대가 지나면 가져가겠다는 건데.."

결국 정부는
수정 발표를 한다.

 덴노 
"좋았어! 토지를 개간하는 자는
영구히 그 땅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음." (743년)

농민의 도망을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농민들도 귀가 솔깃해졌다.

"어? 그러면 정말 
내 땅이 생기겠네.."

하지만 커다란 실수였다.
무엇보다 왕토사상의 원칙이 무너졌다.

"뭐야? 언제는 모든 땅은
덴노의 땅이라더니.."

"새로 개간하면
사유지로 인정해주겠다고?"

귀족은 오히려 그걸 빌미로
농민들을 시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한 뒤에
자신의 땅을 크게 늘리게 되었고,

농민들이 
개간한 땅조차

갖은 방법을 동원해 
빼앗아 버렸다.

"여긴 우리 조상 땅이라고. 나가!"

그 결과 귀족과 호족들의 땅만
더욱 커져갔고,

왕토사상의 원칙이 무너져
'토지 사유제'의 부활만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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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귀족들은
자신의 땅(장원)을 크게 늘려나가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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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경에는 전국 땅의 60%를
귀족들이 독차지하게 됨."

그중에 당대의 실세가
후지와라 가문이 

차지한 땅만
전국 땅의 10%나 됐다.
▲ 후지와라 가문의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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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후지와라 가문?
어디서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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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카 개신 당시에
친위 쿠데타를 주도했던 나카토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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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성공 후, 
덴노에게 하사받았던 성씨였잖아."



● 신라 정벌 계획 (760~764)

720년, 신라 사신이
일본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신라 사신
"왜국이 우리 신라와 
국교를 맺고 싶거든,"

 신라 사신
"먼저 조공사신단을 보내 
입조하십시오."

 덴노 
"뭣이라?"

 덴노 
"이런 건방진..
이넘을 당장 추방시켜라!"

이후로 일본은 신라의 대안으로 
발해와 적극적으로 통교하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발해도
당나라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적극적으로
통교를 모색하고 있던 때였으니,

두 나라는
급격히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753년,

이번에는 일본 사신이
신라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일본 사신
"우리는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신
"그러니 신라는 사신을 파견해서
덴노에게 조공을 바쳤으면 합니다."

 경덕왕
"뭣이? 조공? 
이런 간땡이가 부은 놈들!"

 경덕왕
"당장 꺼지지 못할까!"

그렇게 사신이 쫓겨나게 되자
일본의 조정은 크게 분노하게 된다. 
(야마모토 히로후미, 교양인을 위한 일본사 p.86~87)

"무례한 신라를 
이참에 쳐야 합니다.."

"글쎄요. 당나라가
신라를 얼마나 예뻐해 주고 있는데요.."

▲ 당나라 황제는 인사를 받는 자리에서 각국의 서열을 정하곤 했는데,
신라는 티벳과 함께 제일 앞자리를 차지했다.

"우리가 신라를 치면
당나라 원군이 달려올게 뻔합니다."

"우리 힘으로 
당군을 막을 수나 있습니까?"

"..."

그런데 758년, 귀국한 견발해사가
귀에 솔깃한 얘기를 한다.

"어허, 참!
소식 못 들었어요?"

"지금 당나라에는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황제가 피난가 있어요."

"만약 신라를 치려거든
지금이 적기입니다."

"헐!"

그런 소식은 당시 일본의
실세가였던,

후지와라 가문의 
나카마로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나카마로는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덴노를 폐하고
허수아비 덴노를 앉혔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반발세력의
불만이 컸기 때문에

관심 전환이 필요했던 찰나,
신라 정벌의 여론을 듣게 된 것이다.

 나카마로
"좋았어. 이걸 이용해봐야지."

그리하여 나카마로가 
진두지휘하며 

적극적으로 
신라 정벌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나카마로
"내 생각해보니, 이참에 신라를 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듦."

"그러면 군사는 
얼마나 징발할까요?"

 나카마로
"예전 백촌강 전투 때는
3만 명 가지고도 힘들었으니깐.."

 나카마로
"이번에는 한 4만 명 정도
징발하고.." 

 나카마로
"앞으로 3년 동안
병력을 수송할 배를 만들어 보자능."

▲ 신라 정벌 계획

이어서 나카마로는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

 문왕
"그래, 왜 왔능고?"

 일본 사신
"이번에 우리가 
신라를 치려고 하옵니다."

 일본 사신
"발해도 이참에 우리랑 같이 
협공을 하는 게 어떠신지요?"

하지만 당시 발해는
신라를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문왕
"글쎄?"

때문에 일본의 침공계획은
뭉그적거릴 수밖에 없었고,

또 신라 정벌 계획만 가지고는
나카마로에 대한 반대 여론이 

쉽게 사그라들지도 
않았으니,

결국 나카마로는
반대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고

도망가던 도중에 
참살되고 만다. 
(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이로써 신라 정벌 계획은
없던 일로 됐다.



헤이안 시대 전기

● 헤이안 시대의 개막 (794)

나카마로를 처단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던 것은 

도쿄(道鏡)라는 
괴승이었으니,

이후 권세가가 된 도쿄는
권력의 요직을 자신의 일족들로 채우더니

스스로 덴노가 되려는
욕심까지 부리게 된다.

 도쿄
"에헴!"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고
그 또한 반대파에 의해 척결되고 말았고,

781년 새롭게 즉위한 
간무 덴노는

그간 불교 세력의 전횡에 
치를 떨며,

아예 수도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간무 덴노
"헤이조쿄는 너무 불교 세력이 강력해.
이참에 수도를 옮겨야 겠음."

"천도를 하시겠다면
어디가 좋겠습니까?"

 간무 덴노
"교토 쪽이 수운 시설도 좋고 하니
그쪽에 수도를 지으면 낫지 않을까?"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원들은 
떼어다가 옮기시렵니까?"

 간무 덴노
"미쳤어? 땡중들 보기 싫어 
수도를 옮기는 건데.." 

 간무 덴노
"절간은 모두 
그냥 여기에 두라능."

이전까지만 해도 수도를 옮기면
절간도 떼어다가 옮겨놓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절간은 그대로 두고
정치 기능만 이전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교토 인근에
새 수도를 만들었는데,
▲ 나가오카쿄

아뿔싸! 막상 와서 보니 
안 좋은 일만 득실거렸다.

 간무 덴노
"아놔, 너무 강가에 바짝 붙여 
수도를 만들었더니, 여름마다 물에 잠기네.."


"홍수 때문에 전염병도
장난이 아니옵니다."

"또 요즘 귀신이 출몰한다는 
말도 많고.."

 간무 덴노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웬만하면 버텨보려고 했는데, 이거 안 되겠다능."

그리하여 794년 
다시 천도를 단행했으니,

새로운 수도는 '평안해지라'는 뜻에서
헤이안쿄(평안경 平安京)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하여 794년,
일본의 고대와 중세의 과도기라는

400년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그렇게 야심 차게 출발한
헤이안 시대.

간무 덴노는 그동안 준비해온
개혁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가게유시(勘解由使)의 
파견이었다.

 간무 덴노
"고쿠시(도지사)와 군시(군수) 이넘들이 
하라는 일은 제대로 안 하고.."

 간무 덴노
"아무래도 호족들과 작당하고
삥땅을 치고 있을거라능."

 간무 덴노
"앞으로 가게유시를 파견할테니
지방관들의 비리를 낱낱이 감시하도록!"


이어서 쓸데없는 관직들을 
대거 없애고

법에도 없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었으니,

바로 덴노의 친위부대인
'게비이시(非違使)'였다.
▲ 게비이시

"이제부터 우리가 신주류."

하지만 율령제를 파괴하면서까지
편법으로 만든 친위체제는

자연스레 국가의 기강을 
흩트리고 말았다.

"우리가 법을 
왜 지켜야 하는데?"

"덴노 스스로도 
지키지 않고 있는데.."


● 변방의 오랑캐 토벌

일본은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나라인지라,

중앙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동북지방의 '에미시(에조)'와

규수 남부의 '하야토'라고 불리는
오랑캐들이 늘 골칫거리였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빌미로

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노고 뭐고
여기서는 내가 왕임."

"기분 나쁘면 여기까지 
군대를 보내라 이거야!"

하지만 8세기, 
나라 시대 이후

일본의 국력이 
충실해졌기 때문에

이들 변방 부족을 토벌하기 위해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했으니,

이때 규슈의 하야토가
재빨리 항복을 했고,
▲ 하야토

"잘못했어염."

북쪽의 에미시도
대거 세력을 잃고 복속되고 만다.
 

 덴노
"새로 확장한 동북지역으로
농민들을 이주시켜 개간하라!"

하지만 8세기 말,
에미시는 다시 

스리슬쩍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니,
▲ 에미시 (에조)

이들을 토벌하려고
조정에서는 

무려 1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때 동북 오랑캐 토벌의
직책을 맡은 최고 책임자를

 덴노
"오랑캐를 토발하고 오라!"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 정이대장군),
즉 '오랑캐를 토벌하는 대장군'이라고 칭했으니,

이게 나중에 말을 줄여 
쇼군(軍 : 장군)이라 부르게 된다.

794년의 대대적인 토벌로
동북지역은 일시적으로 진압됐지만,

워낙 재정이 많이 드는
원정이었기 때문에

9세기 이후로는
전면 중지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에미시 부족들은
차츰 일본에 흡수 동화되었고

일부만이 동화를 거부하여
홋카이도로 넘어가 아이누족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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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도 동북지역은
유난히 조몬계 비율이 높다능."


● 국풍과 가나문자

고대국가의 발전이란,
'왕권의 강화'와 관련된 역사였다.

부족국가들이
강한 외세와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연맹왕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운영의 효율성을 좇아

지휘자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빵시키게 되고

대신 군주는
부족장들에게는 관직을 하사하며

그들의 권위를 
지켜주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초기 국가는,
여러 모순과 분란을 극복해나가면서

왕권을 안정화시키는 장치로
'왕위 세습제'를 실시하게 되고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율령'을 반포하게 되고

사상의 통합을 위해
'고등 종교(불교)'를 장려하게 된다.


여기까지 도달하게 되면,
흔히 고대국가의 완성단계라고 말한다.

백제의 경우
3세기 후반 ~ 4세기 중엽,

'고이왕'과 '근초고왕' 집권기 동안
고대국가의 틀이 완성되었다.
 고이왕

고구려의 경우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완성되었고
 소수림왕

신라의 경우 6세기 초,
'지증왕'과 '법흥왕' 때 완성된다.
 지증왕 

일본의 경우 
'쇼토쿠 태자'와 '덴지 덴노'를 거쳐

7세기 후반
고대국가의 틀이 완성된다.
 쇼토쿠

그런데 고대국가가 완성되면
수십 년 뒤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으니,
바로 '대외 정복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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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안에서 차면
밖으로 넘치는 법!"

4세기 후반 
백제의 '근초고왕'
 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장수왕

6세기 후반 신라의 '진흥왕'
모두가 예외 없었다.
 진흥왕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섬나라인 특성상 대외진출은 쉽지가 않았다.

그러니 어찌 되었겠는가?
스스로 도취되고 만다. 즉 국뽕에 취하게 된다.

 덴무 덴노
"캬~!"

그리하여 8세기 초
덴무 덴노 때,

일본은 국호를 
왜에서 일본,

오키미(대왕)를 
덴노(천황)으로 고치고

덴노의 신격화를 위해
'고사기'와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풍토는
이후 '국풍(國風 : 고쿠후) 문화'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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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 문화?"

 
"대륙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 식대로 재창조하자능!"

 
▲ 와곤(和琴 : 일본 거문고)을 키고 있는 헤이안시대의 악사

국풍 문화의 대표적인 유산은
9세기 경에 만들어지는, '가나'라는 문자였다.

다만 가나 문자가 
처음 만들어질 때,

귀족들은 '가짜 문자'라고 해서
한자만을 고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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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나(假名)라는 말이 
가짜 글이라는 뜻임."

어려운 한자를 통해 문자를 독점하여
백성을 지배하려 했던 

조선 양반들의 모습이
일본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나 문자는

서민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으니,

특히 여성들에게 
가나 문자는 인기가 있어

가나로 쓴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헤이안 시대에는 여류 작가들이 탄생하고 있었다.
 
▲ 무라사키 시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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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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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4권의 소설로
아직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능."

 
 
▲ 겐지 이야기를 소재로한 그림

한편 여성들이 주로 쓰던 
'히라가나'와는 달리

절간의 승려들은 
'카타가나'를 만들어 썼다.
▲ 카타가나는 신라 이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무사의 탄생

10세기에 이르자
지방관인 '고쿠시'와 '군시'가 관리하는
 

국가의 영지도
장원처럼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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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로 따지면
고쿠시는 도지사, 군시는 군수에 해당."

세금만 꼬박꼬박 갖다 바치면
정부에서는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쿠시와 군시는 마치 
고을의 군주처럼 군림하여

세율을 마구잡이로 올려서
농민의 고혈을 빼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군시를 도와 
구실아치를 하던 이들이 

'고초'라는 하수인으로서,
이들의 횡포가 어찌나 심한지,

농민들은 
세금 부담에 못 이겨

귀족이나 사원에 땅을 바치고
장원의 농노로 들어가기 일쑤였는데,

그러면 장원의 영주가 된
귀족들은
▲ 헤이안 시대의 장원

지방의 유력 호족이나 황족·외척에게 
뇌물을 바치는 식으로

국가에 낼 세금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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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조선시대가 연상되는 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장원의 부를 노리고

무력으로 빼앗으려는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되었기에

"아놔, 부럽네.."

이에 대응해, 영주들은 
수하의 농민들을 무장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사무라이의 전신이 된다.

다만 당시만 해도 무기나 전술이
세련되게 발전하지 못한 탓에

전투는 거의 무조건 
머릿수가 많은 쪽이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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