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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고대사 ② : 백제 유민들의 집단 이주 + 중앙집권국가로의 성장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480735862



고분시대 후기 : 백제 유민의 이주

● 4~5세기 격동의 동아시아

동아시아 역사에서 4~5세기는 
격동의 파노라마였다.

변화의 신호탄은
4세기에 불어닥친 소빙하기였다.

지구가 갑자기 추워져
초원의 풀들이 말라죽자,
 

유라시아 대륙 북방에 살고 있던 
배고픈 유목민들은

저마다 눈이 뒤집혀
농경국가들로 쳐들어가게 되는데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

그런 와중에 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이,
인도에서는 굽타제국이 망해버렸다.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를 정리하고 
중원을 통일했던 서진이

불과 50년 만에 
유목민에 의해 쫄딱 망하고


남쪽으로 피신해 
내려와야 했던 것이다.

"에겅.."

이때 한반도를 택한 
피난민들도 많았다.

"젠장, 흉노족이 쳐들어왔으니
어디로 피해 있어야 할 텐데.."

"강남은 너무 멀고.."

"고구려 어때? 요즘 그쪽이 
살만하다던데."

당시 고구려는 
나름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다.

고구려를 괴롭혀왔던 선비족이 
중원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소수림왕
"하하하. 이제 좀 
다리 뻗고 자겠네."

반면에 중원 대륙에는
한가닥 하는 유목민들이 죄다 몰려서

서로 대륙의 주인이 되겠노라고
앞다퉈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흉노족 vs 선비족 vs 티벳족"

때문에 중원의 중국인들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아놔, 헬대륙"

그런 와중에 거물급 정치인들이
줄줄이 망명을 해왔고

수십만 명의 중국인 유민들도 
덩달아 집단 망명을 해왔다.

▲ 당시 고구려로 망명 온 유명인사 : 유주자사 진(좌), 동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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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구려의 인구를 100만 명으로 추산해 보면 
엄청난 외래인이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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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나중에 중국의 요구로
유민 2만 5천 명을 돌려주기도 했었다능."

그렇게 수많은 
중국 유민들이 유입되자,

소수림왕은 이들을 
잘 다독거리기 위해

보편적인 
율령을 반포하고

사상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가적으로 육성했었다.

 소수림왕
"자, 이러면 큰 불만들이 없겠지?"

때문에 유민들은 안심하며
터를 잡고 살 수 있었고,

그러면서 선진 기술이
보급·전파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국력은 
급격히 향상될 수 있었다.

moon_special-27 
"우경이 시작되고
종이가 만들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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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능."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소수림왕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한반도 남쪽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moon_special-28 
"4세기 때만 해도 백제에 밀려
왕이 전사하기도 했던 고구려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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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세기 만에 
상황이 역전되어버린 것."

반면에 고구려의 
막강한 공세에 밀린 백제는

한강 유역의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고,

이때 발생한 
수많은 백제 유민들은

살 곳을 찾아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결국 4~5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의 남하로 

중국은 물론
고구려, 백제, 신라

나아가서 일본에까지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 2차 도래인 (5세기)

2천 년 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도래인들이 건너가자

조몬인들은
급속도로 사라졌고
▲ 조몬인 : 오늘날 아이누족의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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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대부분 
질병으로 인해 궤멸됐을 듯."

그 자리를 도래인들이
차지하게 된다.
▲ 도래인(좌)과 조몬인(우)

이들은 일본에 
농경과 금속기를 전파했고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한반도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하게 됐다.

다만 당시 도래인들은
철을 생산할 줄 몰랐기 때문에

쇳덩어리를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수입해야만 했었고,

문자도 없었고
소와 말 등의 가축도 없었다.

때문에 국가로의 발전까지는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급격히 
개화가 되는 시기가 도래하는데, 

바로 백제 유민들이 이주하는
5세기 무렵이었다.

"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말'과 '소'라는 가축이군!"


"이게 글자라고?"

"비단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로군."

"이게 바늘이라고? 그럼 앞으로 우리도
바느질한 옷을 입을 수 있겠구나."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인들을 기쁘게 했던 것은, 
제철 기술이었다.

"뭐?! 철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고? 정말??"

그리하여 이때부터 일본은
철을 직접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그동안 한반도에 '철을 달라고'
굽신거리던 모습에서 벗어나,

백제를 향해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울 수 있게 된다.

 왜국
"에헴!"

때문에 백제는 
속이 뒤틀릴 일이었지만

 백제 
"짜식들, 많이 컸네."

치열하게 삼국이 
대치하는 시기였던지라,

유사시 일본의 군사적 원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백제왕들은 여러모로 호의를 베풀게 된다.

그중에는 태자를 
볼모로 보낸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백제왕 
"태자야, 때가 되면 부를테니
일본 가서 잘 놀다가 오너라."


또 기술자 등을 파견해서
선진기술을 전수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기와를 굽는 와공 파견"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쳐줄 학자 파견"

"절간에 그림을 그려주는 화공 파견"

"공예가 파견"

"건축기술자 파견"

이리고 이들 전문 직업인들은
현지에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호족의 일원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게 된다.

"에헴!"

다만 당시 야마토 정권은
중앙집권체제가 미약하고

왕권이 약했고,
호족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에

오키미(대왕)는 호족들의 권리를 
그대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고,


 오키미 (=덴노)
"너희들이 가진 영토의 수확물과 백성들은 
모두 너희 맘대로 차지해도 좋다능."

대신 오키미는 
호족에게 '성씨'를 하사하면서

호족들을 조정 아래에 
놓으려고 했다.

 오키미
"자, 자네는 ○○ 씨, 
자네는 △△ 씨를 하사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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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출신의 유민들도
여러 성씨를 하사받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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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계로 추정되는 소가 씨와
신라계 하타 씨가 그 대표라 할 수 있음."


● 불교의 수용 (587년)

철기와 함께
일본을 급격히 변화시켰던 것은

6세기 초 백제를 통해 
전래된 '불교'였다.

불교는 자연신이나 
동물 수호신에서 벗어나

모든 부족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적 종교였다.

부족 간의 종교적인 차이는
국가를 통합하는 데 걸림돌이었으니

토착신앙이 유난히 강했던
당시의 일본을 통합시키는 방법으로

'불교'는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백제 유민들이 중심이 되어
'국교화'하자는 공론이 일게 되는데,

이때 소가 씨는, 백제 유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호족이었다.

 소가 씨
"나라가 번성하려면 
종교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소가 씨
"지금 중국이며 백제며
모두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는데," 

 소가 씨
"우리는 여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어서 불교를 받아들입시다."

하지만 토착 세력을 대표하는
모노노베 씨는 결사반대했다.

 모노노베 씨
"쳇! 그렇다고 그동안 모셔온
조상신을 버리자는 말이요?"

 모노노베 씨
"부처를 믿게 되면 
조상신의 노여움을 사서,"

 모노노베 씨
"오히려 전염병이 돌고 
재난이 일어날 겁니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전쟁의 승자는 
소가 씨의 차지였다.

 우마코 (소가 씨 수장)
"하하하. 이로써 우리는 
불교 국가로 간다!"


그리고 소가 씨의 수장,
우마코는

내친김에 자신의 외손자를
왕으로 날름 앉혔다.

 우마코
"네가 오늘부터 왕이 되라능."

 스슌
"넵"

하지만 외손자가
말을 잘 듣지 않자,

 우마코
"왜 불교를 국교화하랬더니
말을 안 듣는 거야!"

 우마코
"이 나라에서는 
내가 곧 법이라고!"

외손자를 죽여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딸을 앉혔다.


 우마코
"그래, 고분고분한 여자인
네가 왕이 되거라."

▲ 우마코의 딸 스이코 덴노

하지만 우마코의 딸은
당최 정치를 몰랐기에

자신의 외손자인 
'쇼토쿠'를 태자로 내세워

딸을 대신해서
섭정을 맡도록 했다.

 우마코
"너가 대신 
왕 노릇 좀 해주라능."

 쇼토쿠
"넵!"

이로써 야마토 정권은
소가 씨 천하가 됐고,

 우마코
"하하하"

정치 일선에 선
쇼토쿠 태자는 

외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아스카 시대 전기 : 쇼토쿠의 개혁

● 쇼토쿠 태자의 개혁

정치 개혁에 나선 
쇼토쿠 태자의 목표는 

중국의 황제처럼, 강력한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 쇼토쿠 태자

 쇼토쿠
"호족들이 날뛰면
나라가 잘 될 수 없음!"

때문에 쇼토쿠는,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이러한 '칙령'부터 발표했으니,

 쇼토쿠
"앞으로 호족끼리 싸우지들 말고
서로 화합하면서 살자능."

그리하여 강조하게 된 게
바로 '와(和 : 화합)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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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일본 국민들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와 사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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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그런 다음에는 
'관등'을 제정했다.

 쇼토쿠
"이제 우리 왜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관등제를 실시하겠다능."

 쇼토쿠
"관직은 총 12등급으로 나누고
신분에 맞게 관리들의 복색도 달리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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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등급에 맞는 옷을 입으라고?"


▲ 12관등과 그에 따른 관복 색깔 (흑→백→황→적→청→자)


왕과 호족들이 정사를 돌보는
'조정'이란 기관도 만들었다.


 쇼토쿠
"앞으로 나라의 정사는 
귀족 회의를 통한 구닥다리 방식이 아닌,"

 쇼토쿠
"조정이라는 공적인 기구를 
거쳐서 하겠음."

 쇼토쿠
"중국이나 백제에서도 
다 이렇게 하고 있다고.."

▲ 여왕과 쇼토쿠

또 백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문화 수입선에서 다변화를 꾀하게 된다.

 쇼토쿠
"앞으로 고구려, 신라와도 
친하게 교섭하자능."

"고구려, 신라라뇨?
거긴 적대국 아닙니까?"

 쇼토쿠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
좋은 것이 있으면 기꺼이 취하는 게 맞지."

 쇼토쿠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고구려, 신라와 벽을 쌓을 건데?"

다만 그렇더라도, 
가장 주력한 교역 대상국은 중국이었다.

당시(600년) 중국은
300년의 혼란을 깨고

수나라에 의해
다시 하나로 통일되었을 때였으니,
 

그런 시기에 쇼토쿠는
첫 견수사(수나라에 파견하는 사신) 파견하고

이후 20여 년 동안
다섯 차례나 파견하게 된 것이다.

"가서 많이 많이 배우고 오라능."

다만 이때 쇼토쿠가
수나라 양제에게 보낸 편지가 말썽이 되었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하노니,"

"그동안 별고 없었는지요.?"

편지를 본 수양제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양제
"천자? 나 말고 천자가 또 있어?
이런 무례한지고.."

 양제
"감히 변방에 듣도보도 못한
오랑캐 골목대장 따위가 이럴 수가 있어?"

 양제
"뭐? 해 뜨는 곳의 천자? 아놔.."

 양제
"여봐라! 당장 편지를 갈기발기
찢어버리라능!"

"폐하, 고정하옵소서.
왜국이면 워낙 촌구석 오지라.."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런 실수를 한 듯 하옵니다."

그렇게 신하의 만류로 애써 화를 참고 
일본 사신을 맞았던 양제였다.

 양제
"..."

사실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있었던 지라,

수나라 입장에서는
괜한 적을 살 필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 당시 일본 사신의 배

어쨌든 쇼토쿠 태자의
이러한 개혁으로

연합 왕국의 태를 벗어나지 못 했던
야마토 왕조는

어느 정도 국가로서의
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몸소 실천한,
남의 것이라도 좋다면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정신은

이후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은 
일대의 전환점이 되었으니, 

상대가 강하면
깨끗이 승복할 줄 알고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단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는 
이러한 '실용정신'은

일본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빠르게 근대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준 근간이 되었다.
 
▲ 1871년 서구 문명을 배우기 위해 떠난, 일본의 구미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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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중국이나 조선은
중화사상과 정신승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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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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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1984년까지 1만 엔짜리 지폐 모델이
쇼토쿠 태자였던 게 아니라능."



● 아스카 문화의 시작 (593년)

이전까지 야마토 정권의 왕들은
수도라는 개념이 없어서

매번 필요한 곳에 궁을 지어
옮겨 다녔지만,

적극적으로 선진 해외의 
문물과 제도를 모방하기로 한

쇼토쿠 태자는 최초로 
일본의 수도를 정한 인물이기도 했다.

 쇼토쿠
"이제부터 아스카가
정치의 중심지라능."

아스카는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였고

백제 이주민들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했다.
▲ 아스카의 전경

그런데 바로 이곳에
정치적 공간(궁궐)
▲ 아스카 궁궐

불교 진흥을 위한
사원을 짓도록 결심하고

주변 나라들에 기술자와 승려를 
파견해 줄 것을 두루 요청했던 것이다.
▲ 아스카 복원도

 백제
"알겠음. 목수와 화공,
기와를 굽는 와공들을 보내줄테니.."

 백제
"한번 멋지게 
사원을 만들어 보라고."

 신라
"뭐? 사원을 짓고 싶다고?
좋아. 공예 기술자를 보내주지."

 고구려
"우리는 스님을 보내줄게.
그분이 그림도 아주 잘 그려."

참고로 고구려 승려 담징은
일본에 종이와 

먹 만드는 기술,
맷돌 쓰는 법을 가르쳐준 장본인이다.

다만 이때, 각국이 일본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었다.

 백제
"이니, 신라 놈들! 
동맹을 맺자면서 감히 뒤통수를 쳐?"

 신라
"아놔, 백제, 고구려 이놈들이
쌍으로 달려드네."

 고구려
"수나라의 공격을 막느라
국력이 바닥나 버렸다능."

한반도의 삼국은 모두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이 간절했었고,

최소한 자신을 공격하지 않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었던 것이다.

 쇼토쿠
"하하하. 요즘 우리나라
인기가 엄청 좋구먼."

그리하여 607년
호류지(법륭사)가 완성된다.

백제의 건축술로 
만들어졌고, 

여기에 백제의 기술자가
목조 관음상을,

고구려의 담징은
내부 벽화를,
▲ 담징이 그린 벽화는 1948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신라의 석공은
탑을 만들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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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호류지는 일본 최고(最古) 목조건축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능."

삼국의 도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승려 혜자와 혜총,
백제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는

모두가 쇼토쿠 태자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어쨌든 당시 
한반도의 삼국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던 것이고,

덕분에 일본은 
선진문물과 

불교·유교 등의 사상을
손쉽게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소가 씨의 몰락 (645년)

쇼토쿠는 중국의 황제를
동경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의 권력기반이기도 한
소가 씨의 전횡은 늘 골칫거리였다.

그런 쇼토쿠가 죽자
소가 씨의 세도는 더욱 극심해져

급기야 소가 씨는 
왕위 계승이 유력했던

쇼토쿠 태자의 아들마저 죽이고
권력을 독차지하게 된다.

 소가 씨
"하하하"

조정의 그 누구도, 
소가 씨에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소가 씨
"내 말 안 들으면
오키미(대왕)고 뭐고 그냥 안 둬!"

그러는 동안, 
당과 고구려 사이에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소식 들었는가?"

"뭔 소식?"

"글쎄, 당나라가 고구려를 시작으로
백제, 신라를 모두 접수하고.."

"그 다음 차례가 우리라잖아."

"뜨아!"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지금 국력을 집중할 때인데, 뭐 하는 겅미?"

이를 위해 소가 씨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특히 당나라를 유학하고 온 이들에게 
그런 생각은 더욱더 팽배했다.

"자고로 외척이 설치면
나라가 망한다능!"

"맞아! 지긋지긋한
소가의 세도정치를 타파해야 됨!"

그리고 결국,
왕족과 귀족들이 결탁하여

소가 씨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결행하기로 결심했으니,
▲ 태자와 나카토미 

 나카노오에 태자 (덴지 덴노)
"소가를 없앤 뒤, 당나라 스타일로
나라를 개혁해야 겠다능!"

 나카토미 
"암요. 그래야죠, 왕자님!"

645년 여름, 궁궐의 조정에서
덴노가 지켜보는 가운데

쿠데타 세력들은
소가 씨의 우두머리를 단칼에 베어 죽였다. (을사의 변 : 645년)
▲ 장막 뒤에는 고교쿠 덴노(여왕)이 있다

▲ 목이 날아간 소가 씨의 수장, 소가노 이루카 



아스카 시대 후기 : 중앙집권국가로의 성장

● 다이카 개신 (646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나카노오에 태자는

친위 쿠데타를 도왔던 귀족에게
후지와라 성씨를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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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늑대를 몰아내니
호랑이가 온다고.."

moon_special-28
"소가를 제거하고 
새롭게 득세한 후지와라는,"

moon_special-26
"앞으로 수백 년간을 
일본을 주무르는 세도 가문이 된다능."

어쨌든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개혁에 착수했다.

 나카노오에 태자
"이제부터 진짜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겠다능."

그리하여 646년,
새로운 법령이 선포되었으니, (다이카 개신)

 나카노오에 
"모든 토지와 백성은 
국가의 소유!"

 나카노오에
"앞으로 '호적'을 만들고 
그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겠다능!"

이는 호족의 부와 권력의 원천인
'땅'과 '백성'을 빼앗아

국가가 직접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포고령이었다.

 후지와라 
"너희 '왕토사상' 못 들어봤어?
원래 땅은 모두 덴노의 소유라고!"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지방에 고쿠시(도지사)와 군시(군수)를 파견했다.
 

 나카노오에
"가서 공무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라능."

"넵!"

그리하여 지방관을 통해
나라 곳곳에 어떤 땅이 있는지

인구는 얼마나 되는지의
정보를 입수했고,

이를 바탕으로 농민들에게게 
일정한 면적의 땅을 주어 (구분전 : 口分田)

그 대가로 해마다 농민들에게
곡식과 특산물을 징수하여, 재정을 충당하는 한편
(반전수수법 : 班田收受法 땅에 비례하여 세금으로 바치는 것)


덤으로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하였다.

 후지와라 
"이게 바로 당나라에서 최신 유행하는
'조용조'라는 과세 체계임!"


이때 노비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이들이 소유했던 땅은
곧 주인에게 모두 귀속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빈부 격차가 
커지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아놔, 실수했나?"

다만 이러한 개혁이 
당장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권력 기반'과 '재산'을 잃게 될
호족들의 반발이 어떠했겠는가?


하지만 급변하는 해외의 사정이
이런 불만을 잠재워버렸으니,

바로 660년, 오랜 동맹국이던
백제가 멸망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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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지금 토지개혁에 
반발할 때가 아니라능."

"맞아. 이럴수록 덴노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지."
(당시 내부적으로 오키미(大王) 대신 덴노(天皇) 명칭이 사용됐다)

그리하여 덴노에게 충성을 약속하는
호족들의 서약이 줄을 잇게 되었으니,

 나카노오에 태자
"하하하."

기분이 흡족해진 덴노는
당나라의 연호를 모방해서

'다이카(大化:크게 되다)'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되고

수도를 지금의 
오사카 인근(후지와라쿄)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 후지와라쿄의 전경 : 3만명 정도의 계획 도시였다

 덴지 덴노 (나카노오에 태자, 668년 즉위)
"아스카는 너무 좁아. 바다가 맞닿아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기자능."


● 백촌강 전투 (663년)

하지만 다이카개신이
크게 실효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660년 백제가 망하자
곧바로 일본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지원군 모집을 하게 되는데,

당시 규슈에 '임시 정부'를 설치하고
나카노오에 태자가 직접 진두지휘할 정도였다.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국력을 총 동원하라!"

때문에 내정 개혁은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호족들은
큰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일단 다행.."

어쨌든 당시 일본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국력을 총동원했다.
전체 인구가 약 400만 명이던 때에

성인 남자 인구의 3%인
3만 2천여 명의 군사를

두 차례로 나눠 
출병을 시켰으니 말이다.
▲ 당시 일본군의 함선 : 당나라 군대에 비해 매우 부실했다 ☞ 참고

하지만 당나라의 군대는 
정예부대로서 매우 강했다.
▲ 당시 당나라의 함선

때문에 3만여 명을 태운
일본의 함선은 

백촌강(금강) 하구에서
당나라 군함과 맞닥뜨려,

용을 써봤지만,
당나라 함선의 불화살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말았으니,

배는 모두 타버리고
강은 새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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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전멸!"

당시 일본은 왜 그토록 
망한 나라 백제 부흥에 집착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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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다음에 자신들의 차례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만으로는, 

자진해서 달려간 행위까지는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663년 9월 기사)
(정혜선,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p.56)

"아! 백제의 최후 거점인 주유성마저
무너졌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갈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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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본인들에게 백제는
단순한 외국이 아니었구나!"

어쨌든 백촌강 전투의 패배 이후
일본 조정에는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고

신라와 당이 침입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이후 3~4년 동안 
쓰시마섬, 규슈 일대에

성을 쌓고 봉화대를 세우며
침략에 대비해야만 했었다.


● 율령국가의 완성 (701년)

다이카 개신으로 
새로운 나라의 틀을 짜긴 했지만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제대로 시행하기에 무리가 많았다.

또 백촌강 전투의 패배로
귀족들의 불만이 상당했다. 

"쳇! 전쟁터로 끌려가서
젊은이들은 죄다 죽고.."

"무지막지하게 쓸어간 전쟁 비용은 
한 푼도 보상받지 못하게 생겼어!"

이런 불만이 있던 가운데, 
덴노 자리를 놓고 벌인

조카(덴지 덴노의 아들)와 삼촌(덴지 덴노의 아우) 간의 
전쟁이 한바탕 터지자, (진신의 난 : 672년)

불만 귀족들은 
대거 삼촌 편에 서게 되고


전쟁의 결과는,
간토 지방(도쿄 부근) 귀족들의 후원을 입은

삼촌 '덴무 덴노'의 
승리로 돌아가,

이후 기존의 간사이(오사카 부근) 출신의 귀족들이 
대거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놔, 줄을 잘못 섰네.."

전쟁을 기점으로 덴노는 
동일본에까지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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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영토 확장!"

그렇게 귀족들을 물갈이하고,
영역을 넓힌 덴무 덴노는

예전의 야마토 왕조의
낡은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오키미(대왕) 호칭 대신에
'덴노(천황)'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국호도 왜 대신에
'일본'으로 바꿨다.

하지만 덴무 덴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으니,

덴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토속종교인 '신도'를 정비한 것이다.

신도란 일본의 토착신앙에
유교와 불교를 짬뽕시킨 것으로,


토착신앙 중에서
인기가 많았던 '태양신'을

덴노의 조상신으로 
둔갑시킨 뒤,

태양신의 아들인 '덴노'를
충성을 다해 섬기라는 종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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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지진·태풍 등의 
천재지변이 많았던 일본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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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애니미즘을 믿는 
성향이 강했었다능."
(반면에 우리 민족은 동물을 섬기는 토테미즘이 강했다)

 덴무 덴노
"불교에만 너무 집착해서
우리 고유의 민족 종교를 등한시하고 있다능."

 덴무 덴노
"앞으로 전국에 신사를 만들어
조상신과 덴노를 기리도록 하자능."

▲ 신사

여기에 '덴노의 신격화'를 
더욱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서를 
편집하도록 하였다.

 덴무 덴노
"덴노는 하늘의 자손이니
절대 복종하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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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있어?
그걸 누가 믿어."

 덴무 덴노
"하긴, 증거가 필요해!"

 덴무 덴노
"중국 역사서들도 천자가
얼마나 위대한지 업적을 남기고 있으니.."

 덴무 덴노
"그래! 나도 한번 
멋지게 만들어 봐야겠다능."

그리하여 712년에
건국 신화를 그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지키(古事記 : 고사기)가 만들어지고

720년에는 일본서기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덴노의 권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본 따 만든 '율령'이었다.

"율(律)은 죄를 지은 이를 
다스리는 법."

"령(令)은 행정 조직을 위한 법."

 덴무 덴노
"앞으로는 법대로 처리하겠음!"

그렇게 법률을 제정하게 되니 
저절로 신하들의 권력이 제한되게 된 것이다.

 덴무 덴노
"이런 방법이 있었는데
왜 진작 몰랐을꼬.." 

이로써 일본은 법 제도를 정비한 
'율령국가'로서 출범하게 되었으니,
▲ 덴무 덴노

마침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틀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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