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시대
● 일본 열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었나?
2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등장한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는
긴 다리와 짧아진 털 때문에
'달리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사냥감을 쫓다 보니,
어느새 아프리카를 벗어나
150만 년 전에는
히말라야 산맥까지 도착하게 되고
100만 년 전에는
동아시아 지역까지 당도하게 된다.
▲ 호모 에렉투스의 뛰는 모습
이들은 뇌 용적량이
현생 인류의 2/3 정도였을 뿐,
얼굴을 떼어놓고 아래쪽만 보면
영락없이 인간의 모습이었다.
▲ 호모 에렉투스의 다리뼈
"베이징원인, 자바원인 등은
모두 호모 에렉투스였다능."
경기도 연천에서 발굴된
주먹도끼도
바로 에렉투스가 쓰던
도구였다.
"어, 그랬어?"
▲ 동아시아에는 100~50만 년 전 쯤 에렉투스가 들어왔다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인)
하지만 에렉투스는
모두 멸종하고 말았다.
"읭?"
그리고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는
또 다른 인류종인
호모 사피엔스(슬기사람)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현생 인류다.
이들 역시
아프리카를 넘어
다른 대륙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데,
"뭐, 사냥감을 쫓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라.."
"스스로는 이동을 하는 지도
몰랐겠지만."
4~5만 년 전 쯤에는
인도와 유럽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들은
동시대를 공존하던
여러 인류 아종을
흡수·멸종시키게 되었고
"어?"
결국 1만 8천년 경 지구상에는
오직 하나의 인류종만 남게 된다.
이러한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가
동아시아에 도착한 것은 약 2~3만 년 전의 일이었다.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막혀
구대륙 중에서는 가장 늦게
도착한 곳이었으니,
2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현생 인류가 살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현생인류가 터를 잡기 시작했다.
"읭? 바다 건너까지 살았다고?"
"당시의 기술로
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100m 이상 낮아
한중일이 서로 육지로 이어져
동해는 거대한 호수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빙하기 시절 해안선 : 녹색
일본에 매머드 화석이
발견된 걸로 보아
매머드 고기를 좋아했던 원시인들이
사냥감을 쫓다가 일본까지 들어갔을 테고
실제로 1만 8천 년 전의 인골이
오키나와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유골을 복원한 모습
하지만 1만 2천 년 전,
지구의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자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졌고
일본은 난데없이
고립된 섬이 되어버버려
"읭?"
일본 열도에 갇힌
구석기인들은
이후 1만년 동안을
고립된 환경 속에서
독자적으로
진화를 모색해야만 했다.
● 정착생활을 하게된 일본의 원시인들
BC 6천년 전, 지구의 기후는
더욱 따뜻해져서
산과 골짜기가 많은
일본 열도에는
내륙 깊은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물고기와 조개를 잡기가
더욱 쉬워져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냥 여기 골짜기만
휘젖고 다녀도 충분하겠네."
"맞아. 뭐하러 힘들게 돌아다녀?"
그리하여 정착지에는
오랫동안 거주할 집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당시의 집은
50~60cm 깊이로 땅을 파서
가운데에 화로를 설치한
수혈식(竪穴:세로로 판 구멍) 주거였고,
"이렇게 하면
겨울에도 제법 견딜만 하다니깐."
정착지에는 보통 5~6가구가 모여
총 20~30명씩 무리지어 살았다.
그렇게 터를 잡고
한곳에 살아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지식을 주고받으며
좀 더 유용한 도구 제작에
골몰하게 되는데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작살이나 화살촉과 같은 정교한 석기였다.
"작살은 이렇게 만들어야
고기가 더 잘 잡힘."
또 좀 더 먼 곳으로
낚시를 가기 위해
통나무를 베어 낸 후,
속을 파내어 만든 배를 만들기 시작했고
배를 두 개 연결하면
보다 안정적이라는 것도 발견하여
더블 카누를 만들어
고래 사냥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이들은
우연히 저 멀리 한반도까지 도착하여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와! 세상은 넓구나."
이후로 여름이 되면
조류와 바람을 타고
한반도까지 건너가
물품을 교환하곤 했었다.
이때 원시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물건은,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 수 있는 흑요석과
한반도 특산의
빗살무늬토기였다.
● 조몬시대 (BC 8000 ~ BC 200)
일본의 신석기 시대를
흔히 '조몬시대'라고 부르고
당시의 신석기인들을
'조몬인'이라 부른다.
▲ 한반도인(좌)과 조몬인(우)
'조몬'이란 '승문(繩文 : 줄무늬)'의
일본말이다.
일본의 신석기 유적지마다
널리 발굴되고 있는
'밧줄무늬'의 토기 때문에
조몬시대라고 명칭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왜 조몬인들은 농경을 하지 않으면서도
토기를 제작했던 것일까?
▲ 여러가지 형태의 조몬 토기
"원래 토기는 곡물을 저장하고
조리해 먹기 위해 만든 것인데.."
그것은 바로 도토리를
가공해 먹기 위해서였다.
"도토리? 그거 떫어서 어떻게 먹어?"
"방법이 있다능."
"먼저 도토리를
햇볕에 바짝 말려."
"그런 다음에 돌로 몇 번 때려주면
껍질이 훌러덩 벗겨지걸랑."
"그러면 알맹이를 돌판에 놓고 갈아.
그러면 가루가 되지?"
"이 가루를 토기에 담고
물을 부어줘."
"그런 다음에 윗물만 따라 버리면
도토리의 떫은 맛이 싹 없어진다능."
그렇게 만들어진
도토리 반죽으로
조몬인들은 경단이나 떡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오! 훌륭한 탄수화물 한 끼!"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 열도는
기온이 상승하여
침엽수림이 활엽수림으로 바뀌면서
밤나무나 도토리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이런
도토리가 있었기 때문에
조몬인들은 겨울철에도
음식을 보관해서 먹을 수 있었고,
심지어 도토리 과다 섭취로
충치도 여럿 가지고 있었다.
"원래 고대인들의 충치는
식생활이 윤택해져야 나타나는 현상인데.."
하지만 그렇더라도
일본 열도에는 신석기 내내
농사와 목축 기술이
전래되지 않아
수천 년 동안을 계속
수렵과 채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의 보급이 없었기 때문에
조몬시대 일본의 인구는 매우 적어서,"
"2천 년 전 일본의 인구는
한반도 인구의 20% 수준밖에 안 됐었다능."
때문에 불안정한 식량 수급은
조몬인들에게는 언제나 큰 걱정거리였으니,
그리하여 자연 숭배 신앙인
'애니미즘'이 발달하게 되고,
"오! 태양신이셔!"
"오! 바다의 신이셔!"
여성들이 아이들을
순풍순풍 낳길 바라는 마음에서
엉덩이가 유난히 큰
여성 토우를 만들기도 했다.
"오호! 조몬 비너스?"
한편 조몬시대에는,
남방계 폴리네시아인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폴리네시아인들은 배를 잘 타서
태평양 구석구석을 누볐던 해양민족임."
▲ 폴리네시안 배
당시 조몬인들은
성인이 되면 앞 이빨을 뽑고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팔과 다리를 구부리는 굴장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폴리네시아인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야요이 시대
● 야요이 시대 (BC 200 ~ AD 300)
BC 3세기 ~ AD 3세기 무렵을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도쿄의 야요이 마을에서
처음 발견된
괴상한 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와! 이 토기는 조몬 시대 토기보다
두께는 얇으면서 더 단단하네.."
"맞아! 화려하진 않지만
훨씬 더 실용적이야."
"높은 불에서 구웠을 테니,
분명 조몬 토기보다 발전된 것이네."
"그렇다면 이 토기가 발굴된
2천 년 전 시기를 '야요이시대'로 하자능."
▲ 야요이 토기
그런데 야요이 시대야말로
일본 열도를 기나긴 잠에서 깨게 한
엄청난 변혁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바로 '농경'과 '금속기'의 사용이
시작되던 때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생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한반도에서 이주한
이주민에 의해서 전래된 것이었으니,
당시 한반도에서
이주한 이들을 가리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흔히 도라이진(渡來人 : 도래인)이라 부른다.
"똘아이진?"
도래인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증거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북 규슈지방에서
야요이 문명이 시작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곳으로 BC 200년 경
벼농사가 처음 전래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계급사회도
함께 시작되게 된다.
어떻게 말인가?
벼농사는 다른 작물보다
수확량이 많지만
땅을 개간하고
김을 매는 등,
많은 사람의 협동이
필요한 작업이다 보니
누군가 나서서
농사에 필요한 물을 배분하고
작업을 지휘해야만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일은 흔히 평소 덕망이 높고
경험이 많은 자가 맡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 '농업리더'는
임무가 막중했지만,
농업리더
"에헴!"
"농사 망치면
모두가 쫄쫄 굶어야 했으니.."
수확이 괜찮을 경우
그만큼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으니
성공한 농업리더는
곧 족장으로 추대되었고
자연스레 농사짓다 남는 곡식은
모두 족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족장
"그럼 누가 가져?
내가 갖는 게 맞지."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잉여생산물은
곧 권력의 탄생을 의미했다.
"에겅, 족장님 나 좀 살려주세요."
족장
"왜?"
"이번에 흉년이 들어서리 쌀이 없어요.
제발 쌀 좀 나눠주세요. 족장님."
족장
"에헴!"
도래인들에 의해
금속 도구도 전파되게 되는데,
때문에 일본은
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건너뛰고
단번에 철기 시대로 이행되게 된다.
물론 당시 청동기도 사용됐지만,
그것이 시대를 대표하지는 않았다.
"청동기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제기와
장신구로 사용됐다능."
철기의 사용은 무엇보다
농업 생산성을 배가시켰는데,
"와! 철제 농기구로 땅을 파니깐
훨씬 깊게 파헤쳐 지네.."
"원래 한번 농사지은 땅엔
5년이 지나서야 농사가 가능했는데.."
"철제 농기구를 써서 흙을 갈아주면
3년에 한번 씩 농사를 지을 수 있겠네."
때문에 야요이 시대의 인구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증가된다.
● 성읍국가, 구니(國)들의 출현 (0~200)
수확량이 늘어나
잉여농산물이 쌓여가자
이를 약탈하려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이라는 게 생겨나게 된다.
이때부터 마을은
낮은 언덕 위에 형성되어
주변 지형과 적의 침입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지어졌고
마을 주변으로는
거대한 목책이 둘러쳐지고
망루가
세워졌으며,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목책 주변으로 깊이 3미터 폭 6미터의
거대한 도랑(해자)을 만들어서
적의 출입을 막았다.
"물론 해자가 있으면
여름철에 모기 서식지가 되어,"
"마을 사람들은
밤잠을 설쳤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견고한 마을도
거대한 힘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니
▲ 야요이 시대 병사
강력한 철제 무기를
앞세운 집단이라면,
손쉽게 주변 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지배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전쟁에서 패한 집단을
노예로 부릴 수도 있었다.
족장
"에헴!"
그러면서 사회는 점차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고
한때 부족장이던 지배자는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군장(王)으로 성장하여
곧 성읍국가의 수장이 되었다.
그 결과 일본열도에는 여기저기서
구니(國)라는 성읍국가들이 출현하게 되었으니,
야요이 시대가 도래하고 400년이 지난
AD 200년 경 일본 전역에는
약 100개 정도의 구니(國)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마을 안에는 수혈식 가옥과, 창고(고층건물), 망루로 이뤄졌다.
이들 중에는 한반도와 중국과 왕래를 하며
무역을 하던 이들도 있어서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이들을 통칭하여 '왜'라고 불렀다.
3세기 후반, 중국 사서에 기록된
이들의 생활상은 이러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국에는 30여개의 성읍국가가 있고
인구는 총 35만명이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말하고 있는, 3세기 각국의 인구
남자들은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하고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고,
모자는 쓰지 않고
머리를 양옆으로 땋았다.
반면에 여자들은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헤치고 다녔다.
사람들은 바느질을 할 줄 몰라
천 조각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어서 입었고,
식사할 때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었다.
기후가 따뜻하여
겨울에도 생 야채를 먹었고
소, 말과 같은
가축이 없었다.
법이 엄격하여
도둑이 거의 없었지만,
만약 법을 어기면,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처자식을 노예로 삼았고,
무거운 죄를 진 자는
일가족을 몰살했다.
|
"읭? 한반도의 문화를 전수받았을텐데,
뭔가 좀 이색적인데?"
"400년이 지났으면 이미 양쪽 문화는
달라도 한참은 달라졌을 때임."
사실 그렇다.
사람들은 두 세대(50년)만 지나도
이전 역사는 까맣게 모르고 산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문자도 없었을 때니 더욱 그러했을 게다.
▲ 전형적인 야요이 시대 읍락의 모습 : 다만 논은 있었지만, 그림에서처럼 모내기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연맹국가 야마타이 국의 출현 (200~300)
AD 200 년 무렵,
수많은 성읍국가들끼리
치고 박고 하면서
이합집산을 계속하는 가운데,
규슈 지방에는
30개국의 수장들이 연맹을 맺어
야마타이 국을 세우고
히미코 여왕을 맹주로 삼았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도
거대한 연맹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고.."
"한반도 북부에서도 부여·고구려 등이
연맹왕국으로 존재하고 있을 때임."
이때 연맹의 군주로
여왕을 추존한 것은
당시 일본 사회가
'농경사회'로 전환했기 때문에
지배자는 가능하면 '천재지변'을
다스를 수 있는 이가 맡아야만 했는데,
그런 면에서 무당 출신의
히미코 여왕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무당인 히미코는
여느 군주처럼
강력한 전제 왕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불만이었던
히미코 여왕은
중국에 책봉을 받아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었으니,
239년 경,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게 된다.
당시 중국 대륙은
위촉오 삼국시대가 전개됐을 때였다.
▲ 야마타이 국 사신의 사행길
사신
"폐하, 저는 왜국에서 온 사신이옵니다."
사신
"공물을 가지고 왔으니 받으시고
우리 여왕께 책봉을 내려주셨으면 하옵니다."
위황제 조예
"읭? 왜국? 왜국이면
만 리(4000km)나 떨어진 변방 아님?"
위황제
"하하하. 그 먼 곳에까지
우리나라가 소문이 난 건가?"
당시 위나라 황제는
무척이나 흡족했다고 한다.
삼국이 치열한 국력 경쟁을
펼치고 있을 때였으니,
머나먼 변방의 사신까지
조공을 바치러 왔다는 것은
위나라가 중국의 정통임을
단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당시 왜국 사신은
삼한(三韓) 출신의 사신들보다
더 큰 우대를
받았다고 한다.
삼한 사신
"아놔, 내가 저 촌뜨기보다
찬밥 신세라니.."
그런데 당시 야마타이 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이유는
히미코 여왕의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히미코
"에헴!"
그만큼 선진문명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당시 왜국 사신이 위나라 황제에게 받아온, 청동거울과 금도장
사실 당시 일본은
철기 시대였다지만,
무늬만 그랬을 뿐
철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어서
쇳덩어리를 전적으로
한반도의 남부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 변한의 수출품 '덩이쇠'
당시만 해도, 일본 열도에서 철은
채굴할 수 없는 자원이었고
6세기 이후에야
겨우 철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가야(변한)의 철 생산
때문에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야말로
철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 당시의 국제 교역로
또 철을 얻어야만 강력한 군사력으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으니
그만큼 한반도와의 교역은
국가적인 중대사였다.
아래는 6세기무렵 중국 양나라의 화공이 그린
일본 사신의 모습이다.
일본 사신 외에도
12개국의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신라, 고구려, 백제 사신
하지만 일본 사신의 그림은
'상상도'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21)
당시 일본에서는
사신을 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양나라의 화공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사를 참고로
그린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다.
"사실 의상이나 머리 스타일도
야요이인들의 방식과는 거리감이 있다능."
|
고분시대 전기 : 야마토 연맹 국가
● 고분 시대의 시작
3세기에 반짝하다 사라진
연맹국 야마타이 국과는 달리,
AD 300년 경 간사이(관서) 지방에서
시작된 야마토 정권은
이후 빠르게 일본 전역을
통합하게 되고
간사이에서 규슈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지배하게 된다.
갑작스레 일본이 통합된 데에는
'한반도의 변화'가 그 원인이었다.
"읭?"
4세기 초 중국을 지배하던 서진이
북방 유목민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중국 북부는 '5호 16국'이라는
혼돈의 카오스 시대가 도래하는데,
이때 수많은 중국인들이
한반도로 망명을 하여
중국의 선진 문물이
대거 유입되게 되어
한반도 이남의 삼한은
백제, 신라, 가야라는 이름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 이 시기 한반도에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가 사회를 통합하게 된다.
때문에 한반도에서
철을 수입하던 일본인들은
당시 변화된 모습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헐! 이젠 철을 구입하려면
예전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달라고 하네.."
"그러면 윽박을 질러보지."
"그게 예전만큼 쉽지 않아.
예전에 없던 군졸들이 지키고 있으니.."
"젠장, 우리는 여전히 약한데
상대는 저리 강해졌으니.."
그리하여 일본의 성읍국가들은
유리한 조건으로 교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둘씩 야마토 조정 밑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호족끼리의
단순한 연합 조직이었으므로
정권은 불안했고
군신관계라기보다는 동맹관계에 가까웠다.
▲ 이때부터 오키미(대왕) 칭호가 사용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야마토의 대왕(大王 : 오키미)은
거대한 무덤을 통해
왕족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했기 때문에
축구 경기장 넓이 20개가 넘는
거대한 무덤을 짓기도 했으니,
▲ 앞쪽은 사각형 모양이지만 뒤쪽은 둥근 형태인게 특징이다.
이는 하루에 1천여 명이 동원되고도
15년 이상 걸린 대규모 공사였다.
"헐!"
야마토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대형 고분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지역이
바로 야마토(지금의 나라현)이기 때문이다.
▲ 고분의 흔적들
하지만 한반도의
고대사에서도 보듯이
거대 무덤이 강력한 왕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신라의 고분
오히려 왕권이 부실할 경우,
연맹 왕국의 수장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무덤을 짓고
무리한 '순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왕권이 강하다면,
굳이 백성들의 원성을 살 필요가 없지."
때문에 야마토 연맹의 고분은
300년 ~ 500년까지 존재하다가,
"그래서 이 시기를
고훈시대(고분시대)라고 한다능."
왕권이 강화되는
500년 이후에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고,
대신 한반도의 '석실무덤 양식'으로
바뀌게 된다.
▲ 고분시대 후기의 한반도의 석실무덤
"괜히 무덤 만드는 데
국력을 낭비하지 말라능."
"그렇게 해야만
군주의 권위를 높일 수 있지 않겠음?"
"대신 한반도에서 온
선진 무덤을 사용해보라능."
"알았어."
● 백제와의 동맹
고훈시대 때 특징이라고 하면
일본은 중국과 거의 교류가 없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위나라가 일찍 망해서
이후의 중국 왕조는
왜국 사신을
호의적으로 대할 가치를
전혀 못 느꼈기 때문이고,
대신 일본은 한반도의 국가들,
특히 백제와 긴밀히 유착하여
여러 선진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일본이 백제와 친해진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왜국 사신
"폐하 저희 왜나라가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왜국 사신
"저희는 예전에 대방과 교섭하여
중국의 문물을 얻을 수 있었는데.."
▲ 3세기 당시 대방과의 주요 교역로
왜국 사신
"지금 대방은 고구려가 함락해
없어져버렸고,"
왜국 사신
"신라를 통해서 얻어보려고 했는데
신라 넘들 하고는 도통 얘기가 안됩니다."
근초고왕
"그래서 무슨 부탁을 하려고?"
왜국 사신
"저희에게 백제의 우수한 문물 좀 어떻게.."
근초고왕
"대신 너희들은 무엇을 줄 건데?"
왜국 사신
"저희는 가진 게 없습니다만..
대신 몸으로 때우겠습니다."
왜국 사신
"지금까지 신라를 약탈하면서
얻은 군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왜국 사신
"언제든지 불러만 주시면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달려가겠습니다."
근초고왕
"오! 그거 괜찮은데"
이후 근초고왕은
369년 마한 정벌 때
왜국 군대를 파견캐 해서
군사력을 테스트해보기도 했었다.
▲ 당시 왜병의 무장한 모습
근초고왕
"하하하. 그동안 왜인들이
신라를 괴롭혔다는 소문을 자주 들었는데.."
근초고왕
"이제 보니깐 제법 쓸만하구먼."
그리고 흡족한 근초고왕은
크게 치하했다.
근초고왕
"왜병 장수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왜국 사신에게는 보물을 헌사하도록 하라."
그중에 야마토 왕에게 헌사한
유명한 보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칠지도였다.
당시 보물을 받은 야마토의 대왕은
이렇게 감격해했었다.
대왕
"오! 귀한 보검이로다!"
대왕
"선왕이 이 좋은 물건을 보시고
눈을 감으셨어야 했는데.."
이런 일본의 '몸빵 외교'는
가야에게도 통용됐다.
왜국 사신
"우리한테 철 좀 싸게 파세요."
가야왕
"맨 입으로?"
왜국 사신
"대신 신라가 약탈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무조건 달려갑니다."
이런 식으로 당시 일본은
백제와 가야에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선진문물'과 '철'을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p.24~25)
군사적으로 치열하게
대치하던 삼국시대에
일본의 군사적 원조를
마다할 한반도의 국가는 아무도 없었기에
백제와 일본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좋은 시절은
50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먼저 400년 경,
일본은 백제의 부추김을 받고
가야와 함께 신라를 치기 위해
연합 공격을 했다.
▲ 신라를 침공한 왜병들
그러자 신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니,
신라 사신
"뜨아! 살려주세염."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일본군은 무참히
박살이 난 것이다.
"당시 일본군 출병이
엉뚱하게 해석되어,"
"임라일본부설이
만들어지기도 했었다능."
(요즘은 일본 학계에서도 폐기처분됐다)
그리고 404년,
이번에는
한강 이북의 백제 영토를
고구려군에 털리면서
백제의 요청에
일본은 서둘러 군사를 파견했지만
또다시 고구려군에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후로 일본의 외교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백제가 신라와
동맹을 맺은 것이다. (나제 동맹)
"어? 신라랑..?"
그러자 이후 백제는,
구태여 왜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잃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 왜국은
백제에 대한 서운함이 매우 컸다.
"젠장! 이게 다 망할 놈의
고구려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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