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서 규슈까지
● 조선통신사의 출발
① 통신사 발탁 : 슬퍼하는 사람들
통신사는 항상
일본에서 방문 요청을 받은 후
6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서
떠나게 되는데
"짧게는 8개월,
길게는 1년이나 걸리는 여행길."
당시는 현해탄의 거친 파도로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차출된 사람들 중엔
절망과 슬픔에 빠지고
떠나기 전에
'유서'를 써두는 이들도 있었다.
1719년 수행원으로 발탁된
39세의 문인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1월)
신유한
"나라에서 통신사를 파견한다는
명이 내려진 뒤.."
신유한
"내가 글재주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나에게 제술관의 직책을 맡기려 했다."
신유한
"나는 어머니가 늙으셨고
집이 가난하다고 사양도 해보고,"
신유한
"재주가 둔하여 막중한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고 사양도 해보고,"
신유한
"겁이 많고 약하여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도 해보았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신유한
"아! 누구를 탓하랴.
국법이 지엄한데 사양할 수도 없는 일."
② 부산에서의 해신제
조정에서 하직 인사와
송별식을 마친 후
통신사 일행은
부산에 집결하고
떠나기 전에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를 올리게 된다.
(해유록 1719년 6월 6일)
신유한
"목숨 걸고 가는 길.
해신제가 치러지기 3일 전부터.."
신유한
"사람들은 목욕재계 후
술, 고기, 파, 마늘을 금했다."
그리고 대마도에서 선단이 도착하면
통신사 500여 명은
배 3척에 나눠타고
나머지 3척에는 식량 등을 싣고 떠났으니,
이때 통신사는
정사(당상관급), 부사, 종사관을 축으로
군관, 역관, 의원, 화원(화가),
마상재, 소동(심부름꾼 아이) 등이 따라갔다.
● 일본의 첫인상
① 대마도 : 의외의 모습들
처음 본 일본은
복잡한 느낌이 엄습한다.
가기 전에는 '원수의 나라',
'섬 오랑캐'라는 적대감 강했으나
실제로 본 모습은, 법령이 엄준했고
질서를 잘 지키는 백성들이었다.
(강혜선, 조선 선비의 일본견문록 p.66)
보잘 것 없을 것만 같았던
대마도만 해도 의외였다.
▲ 대마도의 전경 : 경작지가 불과 3%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일찍이 교역과 약탈에 눈을 뜨게 된다.
1624년 통신사로 파견됐던
강홍중의 글이다.
강홍중
"섬 오랑캐의 질서가
우리 하인들보다 더 나았다."
강홍중
"대마도 구경꾼들은 모두들
배를 땅에 납작 엎드려 조용히 구경했는데,"
강홍중
"우리 하인들은 아무리 주의를 줘도
시끄럽게 떠들었으니.."
강홍중
"왜인들의 법령이 준엄하여 그렇다고는 해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 대마도의 왜인들
또 사는 모습들도
의외로 부유했으니,
강홍중
"시장에는 물화가 산같이 쌓였으며
백성들의 살림집에는 곡식이 널려 있으니,"
강홍중
"백성의 부유함과 풍성함이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되었다."
② 등골이 휘어지는 다이묘
대마도 선단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대마도 사무라이들의
안내와 호위를 계속 받게 되었으니,
이들을 포함하면 통신사 일행은
약 80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빠이 고생 많았스무니다."
그런데 이러한 호위, 안내는
대마도번뿐만 아니라
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번의 사무라이들이 추가되어
그 인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헐! 또 와?"
그만큼 이들을 접대해야 할
각 번주(다이묘)의 접대 책임은
에도(도쿄)로 향할수록
늘어나게 되었으니,
"도로정비, 숙소의 신축, 증축
배 만드는 사전 준비만도 6개월 이상 걸렸음."
다이묘
"에겅, 등골이 빠지는구나."
한 번 통신사를 맞이하는 데에만
1년 국가 예산을 모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한다.
▲ 통신사에게 대접했던 요리상 재현 : 귀한 식재료를 사용했지만,
정작 통신사들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NHK 방송에서는 현재가치로
1천억 엔(8천억 원)이 들었다고 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 쌀 수확량의 12%가 소요되었다고 함."
하지만 막부의 강력한 지시로
다이묘들은 접대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군
"번주는 보아라.
명령이노라!"
쇼군
"조선 통신사 접대와 안전에
만전을 기할 것이며,"
쇼군
"만일 소홀하여 실례를 범하거나
사고 발생 시 모든 책임을 너에게 묻겠노라!"
● 도자기와 조선인 피로인
① 통신사가 후쿠오카에 머물지 않았던 이유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의 무역관이 있었고
정몽주를 비롯한 사신들이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 후쿠오카.
▲ 에도시대 후쿠오카 항
하지만 일본은 임진왜란 후에는
조선통신사를 후쿠오카에 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그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에
새로이 숙소를 짓고 통신사를 맞았다.
(정장식,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p.27~28)
▲ 당시 통신사를 맞았던, 후쿠오카 앞바다의 아이노시마
왜 그랬을까?
바로 후쿠오카에는
많은 수의 조선의 포로가 있었고
이들 포로들 중에서는
'도공(도자기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통신사의 길
② 임진왜란은 도자기전쟁
왜 그리 '도공'을
보호하려는 것일까?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6세기까지 도자기 제조 기술은
중국과 조선만이 갖고 있던 기술로
차(茶)문화가 발달하여
도자기에 목말라 있던 일본으로선,
도자기 제조기술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일본은 '자기'가 아닌
'도기'만이 있었을 뿐이고.."
"그것도 옹기류가
주류를 이루었음."
때문에 일본은
'도자기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조선인 도공들을
포로로 붙잡아와서
규슈 지방의 번마다
집단 거주지를 설치했던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어
일본 하면 '도자기 왕국'이라는
이미지를 낳게 했던 것이다.
▲ 17세기 유럽으로 팔려나간 일본의 도자기
③ 돌아가지 않으려는 조선 피로인들
임란 후 조선통신사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는
포로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당시 끌려간 포로들의 총수는
약 7만~10만 명 사이로 추정되지만
그중에 통신사가 데려온 포로는
모두 합쳐봐야 8천 명이 될까 말까 했고
17세기 후반 이후 포로 쇄환 문제는
아예 흐지부지하게 된다.
▲ 당시 쇄환사
가장 큰 이유는 다이묘들이
포로들을 철저히 숨기고 막았기 때문이지만,
정작 피로인(조선인 포로) 스스로도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임란 후,
첫 통신사가 온 것이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던 때였으니,
이때 종사관 이경직의 글이다.
(부상록, 1617년 8월 27일자)
돌아가자고 하면
얼른 따라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뭉그적거리며
당최 나서려고 하질 않았다.
이경직
"자네들 모두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네."
"거참, 난감한데요."
"여기서는 대접도 받고 살만한데
조선에 가봤자 다시 밑바닥 생활.."
"싫은데요. 전 안 갈꺼에요.
조선 땅이라고는 기억조차 없어요."
"거기 가면 뭘 해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데요."
|
때문에 피로인들은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정착하게 된다.
또 피로인 사이에는
이런 소문도 퍼져 있었다.
(정장식,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p.45)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혹은 사신들이
자기 종으로 부려먹는다나 뭐라나."
게다가 한때 일본군을 도와
부역을 했던 이들은
처벌이 두려워서라도
귀국을 꺼렸던 것이다. ☞ 참고
(정장식,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p.46)
④ 일본에서의 '장인(匠人)' 대우
무엇보다 '도공'들은
더욱더 고국으로 가기 싫었다.
조선에서야 도공들은
천한 일을 하는 '천민'에 지나지 않았지만
장인을 우대하는
전통이 있었던 일본에서는
도공들은 다이묘들의 보호도 받고
막대한 수익을 얻고 있어서
굳이 조선으로 돌아가서
힘든 생활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진병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걸으며 한국을 본다)
▲ 당시 일본에서도 아무나 얻지 못했던, 성 씨까지 도공들은 하사받았다.
또 다이묘들은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서였지만,
도자기의 품질향상과 대량생산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아
도자기를 하나 만드는 데에도
체계적인 분업을 꾀하고 있었다.
연구 및 체계적 기록 담당
불만 다루는 사람
도안 전문
색칠 전문
포장 전문
그러니 도공들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기(利己)가
물질문명을 발달시키는 법"
● 왜성
① 통신사들을 놀라게 한 거대한 왜성
후쿠오카번 다음 목적지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을 때,
통신사 일행은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높은 성의 모습에 모두들 감탄하게 된다.
"와!"
바로 고쿠라성을 본 것이다.
(진병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걸으며 한국을 본다)
▲ 고쿠라성
"바다 너머 육지에서
기이한 성이 보였다."
"돌담 위로 쌓은 5충 문루와 푸른 기와가
구름 앞에서 찬란하게 비췄다."
반대로 임란 때에는
일본군이 조선의 성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헐! 저걸 믿고
쟤네들은 싸우겠단 말인가?"
② 일본은 왜 철옹성을 쌓았던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외세의 침입을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원정 때 말고는
▲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지만,
'내란'은 밥 먹듯이 일어났다.
그런데 섬나라 특성상
도망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서,
일단 싸움이 붙으면
어중간하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좋아!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이판사판 싸우는 거야."
때문에 사생결단의 의지로
철옹성을 쌓게 된 것인데,
성은 초기에는
순수한 군사적 목적만으로 세워졌지만
▲ 왜성의 발전 과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교통의 요지나 도심에도
권력의 상징으로 쌓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성은
주위는 해자로 둘러쳐져 있고
지하에는 식량, 무기, 탄약을 비축해 두고
우물을 파놓은 곳도 많았다.
여기에 보병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20~30 미터 높이의 천수대를 쌓고
성문도 부서지지 않게
철갑으로 만들었다.
③ 사라진 왜성
하지만 이러한 왜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 많이 줄어들었고,
도쿠가와
"번주가 머물며 잠자고 먹는 성 이외의
군사용은 모두 허물어 버려라."
메이지 유신 후 봉건잔재로 지목되어
132개의 성이 철거되고
또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공습으로 다수가 파괴됐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성들은
대부분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들이다.
④ 세토 내해
시모노세키를 출발한 일행은
일본 속의 에게해라 불리는
'세토 내해'를
항해하게 되는데,
▲ 세토 내해
이곳은 풍랑이 잔잔하다지만
그래도 바닷길은 험했고
간혹 해적이 나타나
통신사 배를 약탈한 적도 있었다.
오사카에서 에도까지
● 오사카
①오사카의 모습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4일)
오사카부터는 바다를 벗어나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하천 전용 배로 옮겨 타기 위해
처음으로 배가 육지에 정박했다.
그런데 육지에서 본
오사카의 모습은 실로 놀라왔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많은 다리들,
시가지의 건물들 모두가
화려하고 현란했고
길은 넓고 평평하고
티끌이 없을 정도로 깨끗했며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길을 가득 매웠다.
신유한
"아! 흙으로 빚은 인형(일본인)에게
이런 번화와 부귀라니 애석할 일이도다!"
|
그로부터 45년 뒤,
오사카를 본 김인겸의 글이다.
(일동장유가, 1764년 1월 22일)
수많은 집들 모두가 기와집이다.
굉장하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 권세가의 저택'의 10배 이상의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으니,
이런 사치스러움은 가히 비정상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40km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 오사카 성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말은
바로 오사카를 두고 한 말이다.
어쩜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의 천 배의 발전이다.
일행 중에 북경을 접해본
역관이 있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
라고 말했을 정도다.
김인겸
"아! 금수와 같은 인간들이
이토록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도다."
|
② 오사카 시내 구경
신유한의 기록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5일)
오사카는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장으로
물산이 집결하는 도시로
이곳의 화려함은
도요토미가 재물을 탐하여
백성의 고혈을 긁어다가
사치스럽게 꾸몄기 때문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강물을 끌어 인공 운하를 만들고
그 위에 다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오사카에는 이런 다리가 200여 개이고
절은 300여 개나 되고,
귀족들의 저택은 400~500 가구,
좋은 집들은 수천, 수만을 헤아린다.
▲ 물의 도시 오사카
또 거리에는 온갖 서적들이 쌓여 있는
서점가가 있고
식당, 술집, 약방이 있는가 하면
화원(花園)도 있었으며
창녀와 기생들이 거주하는
화류 거리도 있었다.
왜인들의 풍속은 음란한 것을 좋아하고
예쁜 것을 숭상하여
거리의 남녀가 모두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칼싸움을 배워서
녹봉을 먹는 관료(사무라이)들이 많았고,
유도를 무술로
배우는 이들도 많았다.
또 온갖 종류의 장인과 상인들이
온 나라에 퍼져 있어서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고 있었다.
상업으로 소문난 서역과 파사(페르시아)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
③ 오사카의 조세
신유한은 오사카의 번영을
높은 세금에서 찾았다.
(해유록 1719년 9월 5일)
신유한
"오사카는 매년 높은 세금을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있기 때문에.."
신유한
"풍부한 재정으로 궁실과 관청 등을 수리하고
호화롭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이다."
|
④ 놀라운 출판 문화
평소 책 읽기를 즐기던
조선의 선비들은
무엇보다 일본의 출판 문화에
충격을 받는다.
중국의 책은 물론이려니와
조선의 책까지 모두 구비해 놓은 서점에는
국가기밀인 '징비록'과 '간양록'까지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내가 쓴 비밀 일기를
남이 봤을 때의 그런 기분.."
특히 통신사행 도중에 쓴 시문이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깐
벌써 책으로 묶어져
출판되고 있었으니,
그 엄청난 속도에
통신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강혜선, 조선선비의 일본견문록 p.244)
● 요도강
① 담벼락 같은 군중들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길은
요도강의 물길을 따라갔는데,
▲ 요도강 뱃길 : 파란색 화살표
막부와 번에서 준비한
화려한 누선으로 갈아타고 가는 길에는
강변마다 환영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떠들거나,
한 사람도 자리에서 움직이거나 하지 않아
통신사들은 마치 '담벼락'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시끄럽고 활기찬
조선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 정조의 행차도 : 중간에 엿장수들도 보인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이토록
순종적이고 법질서가 잡힌 것은
그만큼 당시 일본의 법이
참혹했기 때문이니,
통신사들은 가끔씩 길가에서
처형된 시체가 세워진 것을 보곤 했다.
(강혜선, 조선 선비의 일본견문록 p.66~67)
▲ 울타리를 쳐서 시신을 전시했다
"조선에서 죄를 지으면
보통 매질을 하는데.."
"왜국에서는 죄의 경중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참형으로 다스린다."
"아무래도 칼의 문화라서
순종적인 문화가 발달한 듯."
② 농촌 풍경
신유한이 본
요도 강가의 농촌 풍경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10일)
요도 강변에는
대나무 숲이 빽빽이 들어찼고
기와집, 초가집, 나무껍질로 덮은 집 등이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과실은 귤과 유자를 많이 심었고
들판에는 오곡이 자라고 있었다.
땅이 비옥한데다
농사에 주력하기 때문에
아직 추수를 하기 전인데도
벼 이삭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목화밭을 지날 때면
구름처럼 화사했다.
그런데 도중에 '진주도(晋州島)라'라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해유록 1719년 9월 11일)
신유한
"진주도라, 지명이 왠지
낯설지가 않은데?"
"아! 진주도는 임진년 전쟁에서
경상도 진주 사람을 포로로 잡아 와서 살게 한 곳으로.."
"지금도 마을에는
오직 조선인 후예들만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당시를 생각하니 털끝이 쭈뼛 솟았다.
|
● 교토
① 교토를 본 통신사들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100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왕이 살고 있는
교토가 나온다.
▲ 17세기의 교토
일왕이 거처하는 곳이라서 그럴까?
김인겸의 글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일동장유가, 1764년 1월 28일)
교토의 발전된 모습은
오사카에는 미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왜왕이 사는 수도로서
호화롭기는 마찬가지다.
산의 모습은 장엄하고
강은 평야를 둘러싸고 흐르고
비옥한 농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이 풍부한 낙원을 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분하다. 분하다.
이 개와 같은 왜인을 모두 소탕하고 싶다.
이 토지를 조선의 영토로 하고,
조선 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
|
반면에 신유한의 글은 차분하다.
(해유록 1719년 9월 11일)
교토의 밤거리를
왜인과 함께 구경나왔다.
이곳의 사람들의 옷은
오사카의 비단옷보다 갑절은 더 눈이 부셨다.
길 옆에는 이층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달빛과 등불 빛이
위아래로 끝이 없어
밤 길을 수십 리를 걸으며
천만 가지 기이한 구경을 했다.
▲ 불야성의 나고야 초밥 식당
모두 세상에서 일찍이 보던 것이 아니요,
황홀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따금 거리에서
'쨍쨍'하는 쇳소리가 들리기는 게 아닌가?
신유한
"이 소리가 무엇인고?"
"밤이 깊으면 거리에 순라를 도는 자가
쇠막대기를 가지고 땅을 쳐서 야경을 합니다."
|
② 일왕의 위상과 생활
유교적 군신 관념을 갖고 있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왕과 쇼군의 관계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11일)
왜국의 천황은
정사에 간여하지 않고
쇼군(관백)으로 하여금
정무를 통솔케 했다.
또 천황은 맏아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아들들은 출타해서 중이 되게 하고
딸들은 모두
비구니가 되게 했다.
때문에 천황은 권력은 전혀 없고
오직 의복과 음식의 부귀를 누리게 할 뿐이었다.
|
③ 일본이라는 국호
일본은 이미 8세기 때
국명을 '일본'으로 고친 뒤
이를 줄곧 공식적으로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통신사들은 한사코 일본을 왜라 칭하고
일본인들을 서슴없이 왜인이라 불렀다.
신유한의 글이다.
(신유한, 문견잡록)
"왜 조선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을 부를 때
왜인이라고 하는 겁니까?"
신유한
"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 이미 오래인데,
그대가 무슨 유감이오?"
"당나라 역사 책에도
왜가 국호를 고쳐서 일본이라 하였다고 했으니.."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신유한
"그러면 귀국은 왜 우리 조선인을
당인(唐人)이라 부르는 겁니까?"
"그건 귀국의 문물이 중화와 같다고 하여
당인이라고 칭하니, 이것은 사모하는 것입니다."
|
④ 비와호 (비파호)
일본이 자랑하는 절경 '비와호'는
교토 인근에 있었으니
이를 본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14일)
교토에서 6,7리쯤 가자
'비파 호수'가 나타났다.
▲ 비와호에서 조선 통신사
호수의 모양이 비파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둘레가 400리의 끝없이 넓은 호수는
가히 중국의 동정호와 비교할 만하고
호수 주변으로 갈대와 대나무 숲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신유한
"아! 어찌 오랑캐 주제에
이 좋은 강산을 맡았는가?"
|
● 나고야와 후지산
① 육지의 행렬
통신사 행렬은
교토에서 에도(도쿄)까지는
1500리(600km) 길을
육로로 가야만 했으니,
▲ 1500리의 육로 : 보라색 화살표
들판을 지나 산을 오르내리기도 했고
도시에 이르면
특별히 통신사를 위해 마련된
'조선인가도'를 걷기도 했다.
▲ 조선인가도
이때 행렬단의 규모를 보면,
보통 조선인 400~500명에
일본인 수행원까지 더해져
대략 3천여 명 정도의 규모였다.
행렬단 제일 앞에는
일본 호위무사들이 보호를 했고
행렬의 선두에는
조선 국왕의 사신임을 알리는 기수와
조선 국왕의 국서가 담긴
가마가 지나갔다.
그 뒤를 통신사 행렬을 지휘하는
고위 관리들이 따랐갔고,
그 곁을 문무 관료들이 따랐다.
그 뒤에는 악대가 따랐으며
행렬 후미에는
화공, 마상재, 소동들이 뒷따랐다.
이때 악공들은 이동 중에
신명나게 풍악을 울렸으니,
당시에는 이런 귀한 구경거리도
없었을 것이다.
② 나고야의 모습
교토에서 400리 길을 가다 보면
경유하게 되는 도시가, 바로 나고야였다.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16일)
저녁 무렵 나고야에 도착했다.
이곳의 모습도 오사카 못지않았다.
거리에는 황금빛 가옥과
백화점이 있어서
눈부시고 기이한
구경거리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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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인겸은 이곳에서
예쁜 게이샤라도 발견한 모양이다.
(일동장유가, 1764년 2월 3일)
거리의 번영, 아름다움은
오사카와 비슷했다. 굉장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인구의 많음,
토지의 풍부함, 가옥의 사치스러움 등은
중국의 중심지에도
찾기 힘든 풍경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용모도 아름다웠다.
특히 여성이 아름답다.
나고야의 미인이
길을 걷는 우리를 보고 있는데,
우리 일원도 나고야의 미인을
한 명이라도 놓칠세라
머리를 좌우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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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키소강의 배다리
나고야에는 통신사가 강을 건너기 위해
길이 855m에 달하는 배다리가 만들어졌으니,
이때 사용된 배가
무려 300여 척에 이르렀다.
▲ 키소강의 배다리
사실 이러한 배다리는
쇼군이 천황이 있는 교토를 왕래할 때와
조선통신사가 왕래할 때
딱 두 차례만 이용했다 하니
당시 일본이 통신사 맞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 키소강의 배다리
강의 배다리를 설치하는데
걸리는 시간만 꼬박 5개월,
동원된 인력만도
7천여 명이었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지방 다이묘의 몫이었으니,
쇼군이 다이묘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④ 후지산의 장관
나고야에서 다시 400리 길을 가다 보면
하마마츠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300리 밖에 있는
후지산이 보였다.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19일)
가마를 멘 왜인이
갑자기 동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후지산이다!"
신유한
"뭐?"
내가 가마를 멈추게 하고 바로 보니
가히 꽃 한 송이가 빼어나서
마치 하얀 옥잠화가
푸른 하늘에 바로 꽂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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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의 풍경은
가까이 갈수록 장엄하게 나타났으니,
후지산을 100리 안팎에서 바라봤을 때
신유겸은 이렇게 감회를 전하고 있다.
(해유록 1719년 9월 23일)
왜인이 말하기를 후지산은
산 밑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는 100리인데
위에는 둘레가
수십 리에 걸친 연못이 있고
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큰 구멍이 있는데,
따뜻한 기운이 구멍 가운데서 피어올라
안개와 연기가 된다고 한다.
또 산 정상의 눈은
여름에도 녹지 않기 때문에
멀리 바다 가운데서 왜국 상인들은
눈 덮인 봉우리로 방향을 분별한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치에 맞는 이야기였다.
산이 높으면 기후가 차고
기후가 차면 눈이 쌓이는 것은
우리나라 북방의 장백산(백두산)과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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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의 진면목을 본 신유한은
이윽고 이런 시를 지었다.
신유한
"누가 옥을 쪼아 비녀를 만들었나?
항아(달나라 선녀)의 살결인 양 희고도 곱구나."
신유한
"아아! 너는 어찌하여
오랑캐의 땅에 서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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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후지산의 얼음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23일)
왜인들은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후지산 상봉에는
사계절 내내 얼음이 있으므로
▲ 후지산 얼음 채취
단옷날에 그것을 캐다가
천황과 관백의 궁궐에 바치는 것이다.
하지만 서민들은
그저 얼음 모양의 떡을 만들어
그것을 먹으면서
더위를 막고 있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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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랑캐의 예물은 받을 수 없다!
① 통신사들이 금을 던져 버린 강, 금절하
당시 일본에게 있어
중국과 네덜란드는 무역 상대국일 뿐
▲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
조선은 유일한 수교국이었으니
접대에 성의를 다 했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호의를 사신들은
마냥 편안해 즐길 수만은 없었으니,
막부가 사신들에게
막대한 은자를 예물로 주곤 했는데
사신들은 명분이 없는 은자라며
한사코 사양했던 것이다.
"오랑캐에게 예물을 받다니
이건 상국의 예가 아니오!"
때문에 1634년 은화를 받은 사신들은
한참을 궁리하다가
하마마츠 인근의 호숫가에
버리기로 작정했다.
▲ 1747년 금절하 (화공 이성린의 그림)
다만 버릴 때
옆에서 수행하던 대마도 사람들도
전부 알게끔
물에 풍덩 빠트렸으니,
나중에 대마도 사람들이
이 은화를 건졌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여, 막부의 얼굴도 세워주고
사신들의 체면도 지키고
중간에서 애쓰는
대마도 사람들에게도 이득이 될 수 있었다.
② 하지만 조선 왕실은 돈이 궁했다
그보다 먼저, 1617년
통신사 파견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나라 사정은 몹시도 궁했다.
임란 이후라 농촌이 몰락했고,
명나라 사신들은
재조지은을 갚으라면서
막대한 은화를 요구한 탓에
나라에는 돈이 텅텅 비었다.
그런데도 당시 사신들은
국가의 체면과 예의를 따지면서
일본이 건네준
막대한 은화와 금병풍 등의 예물을 마다하고
▲ 금병풍
전부 대마도 왜인들에게
양도했던 것이다.
"수행하느라 수고했네.
예물은 전부 가지시게."
그러나 얼마 후 대마도는
받은 은자와 금병풍을 전부 왜관으로 보내
조선 조정이
인수해 가기를 바랐다.
그러자 광해군은 뜻밖에도
실리적인 판단을 했다.
광해군
"오! 그런가?
내 요긴하게 잘 쓰겠노라."
(정장식,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p.49~50)
③ 가파른 고갯길
도쿄로 입성하는 길목에서
높은 고갯길을 넘어야 했는데,
▲ 고갯길의 초입, 시즈오카
이 구간은 높고 험준한데다
아래에서 고갯마루까지 거의 40리가 되었다.
때문에 낑낑거리는 가마꾼들이 가엾고,
또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이 구간에서 통신사 관료들은
전부 가마에서 내려 걸어갔다.
그렇게 고갯길을 지나려는 데,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21일)
밤새 눈이 내려 고갯길이
눈에 푹푹 빠지므로
대나무를 베어 눈을 덮었는데
마치 마른 땅을 밟는 듯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40리 길을 전부 마련하였다니,
왜인들의 물력의 풍부함과
행정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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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군의 도시 에도(도쿄)
① 에도 입성
에도에 입성하기 전
통신사들은 다시 의관을 정비하고
군인들은 활집과 활통을 갖추며
군대의 위용을 차렸다.
이윽고 통신사 일행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몰렸으니
기록에는 에도 주민 3명 중 1명이
환영 인파 속에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에도의 인구가 100만 명이었으니
무려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를 매웠던 셈이다.
"참고로 당시 에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음."
이때 통신사 행렬이
어찌나 긴지
선두부터 후미까지 모두 지나가려면
5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진병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걸으며 한국을 본다)
그런데 당시 막부는 에도 시민들에게
통신사를 '조공 사신단'으로 홍보했기 때문에
구경꾼들 중에는 통신사를 보면서,
낄낄거리며 웃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② 에도의 거리
에도를 본 통신사들의 느낌은 어땠을까?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27일)
에도의 길가에 있는 긴 회랑은
모두 상점이었다.
거리는 넓고 사방으로 통하며
모두 직선으로 반듯했다.
거리 양 편에는
2~3층 건물들이 즐비했고
서로 잇달아 있는 지붕은
마치 비단을 짜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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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겸의 글이다.
(일동장유가, 1764년 2월 16일)
좌측에는 집이 줄지어 있고
우측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평평한 땅이 광할하게 펼쳐지고 있다.
누각이나 저택의 사치스러움,
사람들의 활기참, 남녀의 화려함,
성루의 아름다움, 교량과 배
모두가 오사카와 같이 뛰어나고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나고야와 같았다.
이 훌륭함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
③ 에도에서 본 일본 정치가들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28일)
내가 이곳에서
쇼군 이하 여러 고관들로부터
일반 관료들까지
수천 명의 인물을 보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사납고 꼼꼼하면서도 민첩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체구가 작은 것이
기품이 약해 보였다.
또 말과 행동은 거칠고
천박한 것이 많았다.
따라서 한 사람도
걸출하고 웅장한 호걸상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오늘날 왜국은
국토가 통일되고 군사가 강성하고
인구는 많고 국고가 풍성하기 때문에
요즘보다 융성한 적이 없었다.
▲ 에도시대의 극장
추측하건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이
이 땅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왜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침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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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국서전달
통신사의 에도 체류 기간은
통상 20~30일.
도착 하루 이틀 이내에
환영연이 베풀어지고
환영연이 끝나면
대리인이 와서 예물을 준다.
(18세기가 되면 예물은 주는 대로 받아 갔다.)
그리고 다음날 국서를 전달하게 되는데,
이때 통신사들은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쇼군에게 예물로 내놨다.
그런데 가끔 종(鐘)이나 동상을
예물로 가지고 오기도 했으니,
▲ 통신사들이 조선에서 가지고온 종과 동상
이런 걸 조선에서 에도까지 끌고오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
⑤ 마상재
조선통신사 행렬단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달리는 말 위에서
갖가지 재주를 펼치는 '마상재'였다.
마상재는 고려시대까지는
기병이 익히는 무예 중 하나였는데
무기가 발달하면서 그런 기술이 필요없어지자
'기예꾼'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상재가 조선통신사 행렬에 포함된 것은
일본의 요청에 의해서였으니,
마상 곡예가 없었던 일본인들에게
마상 곡예는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한다.
"스고이!"
● 개방적인 성풍속
① 에도시대와 현재 일본의 공통점
통신사의 글을 보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일본과 현재 일본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비슷하다는 것이다.
(진병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걸으며 한국을 본다)
화려하고 발전된 도시
깨끗한 거리
출판, 서적의 발달
독서열
유흥가의 발달
개방된 성풍속
② 개방적인 성풍속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9일)
나라 안에 인구가 매우 번성한데
여자가 남자에 비하여 더 많다.
결혼은 동성을 피하지 않아서
사촌남매끼리도 서로 혼인을 한다.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또한 데리고 살기 때문에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곧 금수와 같다.
집집마다 반드시 목욕탕의 설비가 있어서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을 한다.
대낮에 서로 정사를 하기도 하고
밤에는 반드시 불을 켜고 정사를 하는데
각기 색정을 돋우는 기구를 사용하여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또 사람마다 춘화도를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데
▲ 에도시대 포켓용 춘화도
화려한 종이 여러 폭에
각기 남녀의 교접하는 모습을
백 가지,
천 가지로 묘사했으며,
또 춘약(정력제) 몇 가지가 있어
그 색정을 돋운다고 한다.
또 각 지방마다 사사로이 창녀를
접할 수 있으므로
이름난 도시의 큰 객점에는
모두 홍등가가 있는데,
홍등가 안에는 화려한 병풍, 장막,
이불, 베개가 모두 비단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의 남자들은 여자와 정분을 나누는 데
천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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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홍등가 내부 모습은
어찌 알았지?"
③ 남창
통신사 일행을 가장 놀라게 한 일본의 풍속은
남창이 성한 것이었다.
신유한의 글이다.
(해유록 1719년 9월 9일)
남창의 곱기는
여색보다 배나 되고,
그것을 사랑하여 탐하는 것이
또 여색보다 배나 된다.
이곳에서는 사내아이가 14~15세 이상으로
용모가 특수하게 아름다우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양쪽으로 땋아 늘이고
연지분을 바르고
채색 비단옷을 입히고
진기한 패물로 꾸미니
그 가치가 천금에 해당된다.
귀족들은 그런 남창을 사다가
추행을 실컷 하는데,
혹시라도 자신의 남창이
다른 남자와 통하면 질투하여 죽인다.
그들의 풍속이 남의 처나 첩을
몰래 통하는 것은 쉬워도
주인 있는 남창에게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고 웃지도 못한다.
이처럼 왜인들의 풍속은
참으로 괴이하다.
▲ 남창이 있는 유곽
남녀의 정욕은 본래
천지 음양의 이치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양만 있고 음은 없이
서로 느끼고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
● 소중화사상 : 미혹되지 말지어다!
① 미혹되지 말지어다
소중화사상이 만연하던 당시
이런 일화도 있었다. ☞ 참고
일본에는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을 번역한
해체신서가 있었다.
▲ 해체신서
일본의 의원이었던 기타야마 쇼우가
조선 의원인 남두민에게 물었다.
기타야마 쇼우
"우리나라 어떤 의원이
죽은 사람의 배를 갈라.."
기타야마 쇼우
"장기를 자세히 살피고,
책도 지어냈스무니다."
그러자 남두민은 이렇게 꾸짖었다.
남두민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남두민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지어다."
② 일본 최고 지성인과의 필담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 최고 학자와 필담으로 맞붙었다.
(정장식,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p.155~158)
종사관
"일본에 선진책이 전해졌다고 들었는데
왜 그것을 등사하여 세상에 내놓지 않소?"
하쿠세키
"..."
하쿠세키
"나는 대서양, 이탈리아, 네덜란드, 오키나와 등의
사람들을 접하여 넓은 세상을 알고 있소."
하쿠세키
"혹시 조선에 만국전도가 없다면
한 장 줄 수도 있는데.."
종사관
"..."
하쿠세키
"그런데 왜 조선은 여전히
망한 나라 명나라를 붙잡고 있는 것이오?"
하쿠세키는 1715년에 '서양기문'이라는
서양 연구서를 낼 만큼 서양 사정에 나름 박식했다.
때문에 그는 사신들의 중국 일변도 지식이
매우 고루해 보였던 것이다.
종사관
"조선은 그래도
청나라가 인정하는 예의지국이오."
종사관
"왜국도 유학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종사관
"앞으로 왜국도
중화의 예를 따를 희망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유학의 나라답게 핀잔을 줬다.
종사관
"일본의 시문을 보면 종종 선왕의 옛 이름을
거론하는 불경한 짓을 하고 있는데.." ☞ 참고
종사관
"대체 왜 그러는 것이오?"
하쿠세키
"문자는 뜻 전달이 중요한 것인데,
문자 자체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종사관
"..."
하쿠세키의 반론에
사신들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화제를 중국의 제도로 돌리며
조선이 중국 예법에 우등생임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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