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앞서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1860~1927)는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의 화법에 매료됐다.
조르주 비고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사실 우키요에는 당시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었다.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반 고흐다.
반 고흐
"그런 기법도 있나!
대단해.."
▲ 반 고흐의 초상화 : 뒤에 우키요에 작품들이 있다
그런데 '비고'는 직접 우키요에를 배우기 위해
1886년 직접 일본에 오게되었고
조르주 비고
"직접 가서 배우고 오겠어."
이후 18년 동안을 거주하면서
다양한 일본인들의 생활사를 그려낸다.
조선과 관련된 풍자 그림도 여럿 그렸는데,
이런 그림들이 있었다.
누구나 한번 쯤은 보았던 그림으로 사료된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자주 실리는 그림들이다.
맞다. 그는 캐리커처로
당대에 꽤나 유명했던 화가였다.
여기서는 그가 그린 그림들과
캡션과 해설을 통해서
19세기 말 일본의
세세한 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 외국인을 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개항장을 통해서
서양 상인이나 선교사들이
장사나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유입하고 있어서
일본인들은 점차
서양인들을 진기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된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까지
일본인들에게 서양인들은 여전히 흥미의 대상이었다.
▲ 1897년 골동품 상점
그림은 '비고'가
골동품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키가 작은 일본인들이 전부
신기하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를 비고는
이렇게 회고했다.
비고
"이 가게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여주인이고,"
비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구경꾼' 정신은 현대의 일본인들에게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런 광경은
'유곽'이라는 사창가에서도 나타났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사창가에서는
아주 흔하게 동성애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특히 성적소수자들을 위해
'창부'라는 남자 종업원들이 유곽에서 일하고 있었다.
▲ 1888년 유곽
그림은 유곽에서 프랑스인 '비고'를
신기하듯 쳐다보고 있는 창부들의 모습이다.
당시 비고는
유곽의 단골손님이었지만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매춘녀였지 창부는 아니었다.
때문에 창부들의 뜨거운 시선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 일본인들의 인사 모습
▲ 1890년 정월 초하루
그림은 세들어 사는 이가
주인집에 선물을 들고 신년인사를 하는 장면이다.
"주인 어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올해도 잘 부탁합니다."
"오, 자네도 새해 복 많이 받게."
당시 도쿄는 상경민들로 인해
세입자들의 수요가 넘쳤기 때문에
세입자들은
늘 주인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서 집주인은 한 손만 들어 올려
과장되게 환영인사를 표시하고 있고
세든 사람은 황송해하는 표정으로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 있는데
이런 장면은
일본인 특유의 '손 표정'이다.
"헤헤.."
그런데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일본은 전통식 인사법과 서양식 인사법이 혼존하고 있었으니,
▲ 1892년 군인 장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절은
일본의 전통식 인사법으로
서양인들이 보기에
그런 모습은 매우 굴종적이다.
그림에서는 군인 장교가
하사관에게는 군대식 경례를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장교의 집에서 온 하인에게는
전통식 인사를 받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남녀노소 안경 마니아
▲ 1895년 안경 마니아 일본인들
외국 만화에서 보면 일본인들은
자주 '안경을 쓴 뻐드렁니'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19세기말부터
서양인들에게 각인된 모습이었다.
특이한 것은 일본인들은 색안경을 자주 썼는데,
물론 이런 광경은 조선에도 있었고
외모에 신경쓰던 사대부들에게는
필수 아이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본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남녀노소 색안경을 즐겨 썼고
굳이 시력이 나쁘지 않더라도
패션 아이템으로 안경을 착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프랑스인 비고는
이렇게 분석했다.
비고
"일본인들은 외모 컴플렉스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 1899년 역 대합실
그림은
역 대합실의 모습이다.
나이 많은 남자는
방울 달린 털모자에
망토를 기모노 위에 걸치고
게다(나막신)을 신고 있다.
그 옆에는 그의 정부로 보여지는
젊은 여자가 있다.
남자는 상인으로 추정되고
여자는 게이샤로 추정된다.
여자를 데리고
온천 여행을 가려는 것이다.
이런 은밀한 여행에서
색안경이나 모자는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꽤 적절한 아이템인 것이다.
● 여름철의 일상, 훈도시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여름만 되면
훈도시 한장만 걸치고
거리를 걷는 남자들의 모습이 아주 흔했다.
특히 인력거꾼들의 차림새는
거의 알몸과도 같았다.
▲ 1898년 무더운 여름날
그림은 찌는 듯한
어느 여름 날
강을 따라 난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어느 남자의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남자는 버선과 게다를 신고
부채질을 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데
걷는 도중에 가랑이 사이에
땀이 차서 불쾌한 듯
연신 훈도시 틈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기묘한 동작은 메이지 시대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서
일본 사람들은
굳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서양인의 눈에는 무척이나 진기하고
기묘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 1896년 여름 바닷가
그런가하면
더 기괴한 모습도 있었다.
그림의 남자는,
상반신만 보면 그야말로 신사다.
멋들어진 중산모를 쓰고
와이셔츠에 양복을 걸치고 있다.
또 한손에는 양산을 들고
다른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다.
이번에는 밑을 보자
세련되게 양말을 신고 구두를 신고 있다.
하지만!
훈도시 차림이다.
서양식 복장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이 모습은
당시 여름철 일본인들의
일상적인 패션이었다.
특히 여름날의 시골이나 해변은
가히 '훈도시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1883년 연극장
심지어 전차와
연극장, 공연장에서도
여름철이면 공공연하게
훈도시 차림의 남성들로 넘쳤다.
또 그런 곳에는 거리낌없이 가슴을 노출하며
젖을 물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어느 집 안방을 연상케 하지만,
실제로는 연극장이라는
공공장소의 모습이었다.
프랑스인 비고는
훈도시와 관련하여, 이런 그림도 그렸다.
▲ 1899년 유곽의 영업 종료
19세기 말 일본의 유곽(매음굴)은
밤 12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영업을 마쳤고
영업 종료 시간이 되면
남자 일꾼이 나와서 딱따기로 신호를 보냈다.
그림은 동성애를 전문으로 하는
유곽의 모습으로
창부가 퇴장하자, 묵묵히 훈도시를 입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정력을 다 쓴 후의 노곤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훈도시를 차는 남자의 손이
왠지 힘이 빠져 보인다.
● 자전거 타기의 유행
1865년 일본에서는
최초로 삼륜 자전거가 들어온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널리 이용되는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 이유는?
가격이 너무 비싸기도 했지만
보급시키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전거가 실용화 되는 데에는
19세기 후반 생겼던 '자전거 대여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876년 도쿄에 최초로
자전거를 대여해주는 찻집이 생기자
전국적으로 자전거 대여점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887년부터 일본에서
직접 자전거 제작하게 되어서
1890년대 후반이 되면, 자전거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된다.
▲ 1898년 자전거 클럽 회원
이들은 모두 부유한 계층으로
자전거를 탈 때면
양복과 색안경을 쓰면서
잔뜩 멋을 부리고 다녔다.
그리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자전거 소유자들은
흔히 자전거 클럽을 만들어서
동호인들과 함께 자전거를 즐기곤 했었다.
다만 당시 자전거의 가격은
무척이나 비쌌다.
1890년 자전거 한대의 값은 200엔이나 했는데
당시 순사의 초임 월급이 12엔이었다.
때문에 자전거는 오늘날로 치면
거의 고급 자동차 수준의 가격과 맞먹었다.
▲ 1893년 자전거 대여점
그림은 대여 자전거를 타고
잔뜩 흥에 겨운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당시 이용료는 1시간에 2전이었는데
10년 전에만 해도 1시간에 4, 5전이었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자전거 대여 사업이 성행하고
경쟁원리가 작용하여 요금인하가 된 것이었다.
▲ 1898년 게이샤의 자전거 삼매경
이런 유행에
여자들도 동참했다.
다만 당시까지 일본은 보수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탄 여성은 그리 흔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서 위의 그림은
일본에서도 레어템으로 여긴다고..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는
자전거로 우편 배달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 1893년 자전거를 탄 집배원
그림은 맹렬한 스피드로
우편을 배달하는 자전거를 그리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의 모자가 홀라당 벗겨질 정도로
빠른 속도임을 강조하고 있다.(물론 오바다)
특이한 건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는 매우 작다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기를 주입하는 타이어가
아직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를 낼 때의 승차감은
그닥 좋지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 대화 나누는 모습
▲ 1898년 길거리
길에서 만난 두 남자가
담소를 즐기는 모습이다.
처음에는 서서 이야기하다가,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 듯
쪼그리고 앉아 얘기하는 모습이다.
오른쪽 남자는 양손으로 고개를 받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인만의 독특한 포즈다.
당시 일본에는
다방도 공원도 벤치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쪼그리고 앉아
얘기를 나누는게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요즘 북한도 그러하다)
그런데 쪼그려 앉은 모습이
왠지 좀 힘들게 보인다.
하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이런 자세에 익숙했다.
왜냐?
당시 일본인들이 애용하던
'쪼그려쏴' 변소에 익숙한 포즈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좌변기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저런 포즈로 오랫동안 앉아있기는 무리다.
한편 상류층의 담소 모습은,
꽤나 서구적이다.
▲ 1887년 사교계 방문
위의 그림은
어느 상류층 주택의 실내 풍경이다.
다다미 위에 모피를 깔고
그 위에 긴 다리가 달린
'개량'난로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아있다.
오른쪽의 남자는 버선을 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게다를 신고 왔을 것이다.
왼쪽 하단에 가정부가
브랜디를 가지고 왔는데
일본에서는 1879년부터 브랜디를,
1888년부터는 맥주(기린 맥주)를 제조했다.
그런데 가정부의 발끝 모습이
뭔가 좀 부자연스럽다.
프랑스 화가가 제대로 그리지 못한 탓이다.
원래는 이렇게 앉아야 한다.
● 부유층 남성의 모습
▲ 1883년 인력거를 탄 신사
인력거에 앉아 궐련을 피우며
중산모에 턱시도를 입은
당시 잘나가는
'차도남'의 모습이다.
차림새로 보아
사업가나 고급 관리로 사료된다.
아래는 당시 잘나가는
상인의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 1890년 정월초하루
단골 손님에게
신년 인사를 하러 다니는데
뒤를 따르는
어린 사환은
수건이나 고급 과자 같은 선물이 든
큰 보자기를 목에 걸고 있다.
특이한건 상인은 모자를 쓰고
양말과 구두를 신고 있는데,
사환은 높은 게다를
신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대중들에게 있어, 복식의 서양화는
머리와 발끝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고
모자와 구두에서 시작한 서구적 패션은
점차 의복으로 이어졌다.
그림에서 상인의 옷차림은, 그런 과도기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어린 사환은
가게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소년이다.
이러한 사환은
대개 10세 정도부터 시작하는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가게에서 읽기와 쓰기, 주판을 배웠으며
교육, 의식주 등의 제반 비용은
모두 주인이 부담했다.
그 대신 사환은 급료가 없었고
그저 명절 때 옷과 용돈을 지급받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17,8세가 되면
정식 사환(데시로)으로 승진하고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 밤의 세계, 화류계
▲ 1899년 귓속말
요정에 놀러 온 단골손님과 종업원이
친밀하게 귓속말을 나누는 장면이다.
평상시 종업원은 남자 손님으로부터
팁을 받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종업원은 남자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매춘부(오이랑)들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중이다.
▲ 1897년 요정의 외국손님
요정의 고객으로
서양손님도 빠지지 않았다.
이들은 씀씀이가 좋았기 때문에
이른바 '큰손'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림은 술에 취한 외국인에게
매춘녀를 알선하고 있는 장면이다.
포주는 교활하게도 술이 곤드레하게 취한
외국남자에게 무리하게 여자를 들이대며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뜯어내려고 하고 있다.
● 남녀 관계
▲ 1898년 바람피는 부인
프랑스인 화가 비고가 친절한 캡션까지
곁들여가며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다.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이
다리 위에서 증기선을 바라보고 있는데
남편은 지팡이를 짚을 정도로 늙었고
여자는 마치 딸 자식처럼 젊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
해프닝이 벌어졌다.
전부터 젊은 아내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남자가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연애 편지를 쥐여주고 지나간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젊은 아내는 어리벙벙하고 있는데
늙은 남편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고 멀리서 외간 남자는
젊은 부인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일본의 자유로운 연애 세태를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가하면 아래 그림은
일본만의 독특한 상황을 그린 모습이다.
▲ 1890년 하네츠키 놀이
젊은 남녀가 정월을 맞아
하네츠키 놀이를 하는 장면인데
▲ 하네츠키 놀이
남자는 상점의 사원이고
여자는 성점 주인의 딸이다.
이들은 곧 결혼할 사이인데,
당시 상점 주인들은 사원이 맘에 들면
이런 식으로 자기 딸을 사원에게 주어
사업을 이어가게 했었다.
젊은 남녀의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바로 상점의 주인 내외다.
프랑스 화가는
당시 정치인의 불륜 현장도 포착하여 그림으로 남겼다.
▲ 1891년 고위 관직자의 불륜
국회의원이 대낮부터 게이샤와
인력거를 타고 즐기는 장면이다.
● 남녀 혼탕의 목욕탕
1855년 10월 2일, 에도(도쿄)를 습격했던 대지진으로
사망자가 7천명이나 발생했는데
▲ 당시 지진
이 대지진 상황에서
목욕탕의 안의 혼란을 그린 그림이 있다.
혼욕 목욕탕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알몸의 남녀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여성들은 비명을 지르며
갈팡질팡했지만,
그 중에는 싱글벙글 구경하는 남성들도 있었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진은 큰일이지만,
여자가 나한테 찰싹 매달려 주는 것은 아주 고마운 일."
어쨌든 전통시대의 목욕탕은
남녀혼탕인 경우가 많았고
19세기 말에는 단속령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혼욕탕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급기야 1872년 도쿄에서는
혼욕 금지령을 선포했으나
욕조에 나무판자로 된 칸막이 하나를
걸쳐 놓는 정도였고,
그런 나무판자도
바로 치워버리곤 했다.
그런 혼욕탕이 도시에서 없어진 것은
1870년대 후반 이후였는데
그래도 지방의 온천 등에서는
여전히 혼욕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 1898년 남녀혼탕
그림은 지방의 온천탕에서
그림은 지방의 온천탕에서
남자가 여성을 힐끔 쳐다보면서
품평을
논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도시의 목욕탕에서
혼탕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여탕에서는 여전히 남자 때밀이(산스케)가
여자 손님들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 1891년 때밀이
● 서양식 의복
▲ 1898년 해수욕장
이 그림은 드레스를 입고
해수욕을 즐기는 여성의 모습이다.
당시 수영복은
저랬다.
멀리서 수영하고 있는 이는
서양인처럼 보이는데
여자는 아마도
서양인 남자가 선물해 준 드레스를 입고
해변에서 레져를 즐기고 있는
게이샤인듯 하다.
▲ 1887년 서점 앞 풍경
이 무렵 일본에는 영어 붐이 일어나고 있어서
영어 학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림에서 여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서점에 온 모습인데
아이들에게까지 양복을 입힌 것으로 보아
부유한 계층임에는 틀림없으나,
완벽한 양복 차림이 아니라는 점에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거나,
과거 외국인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한게 아니었나 추측을 하게 된다.
▲ 1887년 양복차림의 두 부녀
그림은 휴양지 여관에서 본
두 부녀를 그린 것이다.
양복을 입은 아버지와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딸의 모습이다.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딸의 모습이다.
두 사람은 여관에서도 화젯거리가 되어
숙박객이 그들의 방을 힐끗힐끗 들여다볼 지경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남자가 양복 차림을 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여자가 양복을 입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이들은 사람들이 방을 엿보면
영어로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인 비고는
이들에게 접근했고
아버지가 월급 80엔을 받는
고위 관직자라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월급 80엔은 연봉으로 하면 960엔으로
국회의원의 연봉인 800엔을 넘는 수준이었다.
▲ 1887년 우산을 쓴 두 연인
위의 그림은 비오는 날 우산을 쓴
젊은 연인을 그린 것인데,
젊은 남자는 모자를 착용하고
서구적인 느낌의 양말과 구두를 신고 있다.
그의 가방에는
KM이라는 이니셜이 보인다.
여성의 경우는 모든 차림이 전통식이지만
머리 모양만은 서구식이다.
당시 일본에는 전통식 머리 모양(시마다마게)이
통풍이 나쁘고 습기가 차서, 비위생적이라고 해서
▲ 전통식 머리, 시마다마게
서구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사회운동이 불고 있었다.
● 여러 직업군들
오늘날 일본인들은 부지런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19세기 후반만 하더라도
일본에 왔던 서양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와그먼
"일본인들은 참으로 게으르다."
와그먼
"일본인들이여,
제발 잠에서 깨어나서 일 좀 하라!"
산업혁명 이후 일찍이 근대 사회에 진입하여
임노동자로 일했던 영국인들이 보기에
전근대를 갓 벗어나기 직전이었던
일본인들은
마냥 느긋하고,
게으르기까지 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인들이
일상에서 일하는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러 직업군들을 통해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사채업자
▲ 1890년 섣달 그믐날 사채업자의 방문
일본인들에게 섣달 그믐날은
1년을 마무리하는 중대한 날이다.
이때 1년 동안 빌려준 돈과 빚을 청산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신년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때문에 한 채권자는 오랫동안 빚을 갚지 않고있는
채무자의 집을 방문했는데,
채무자는 집에 없는 척 하다가
결국 들켜서,
채권자가 방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와
큰 소리로 빚을 독촉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런 비참한 남편의 모습을
그저 참으며 듣고만 있는
아내와 어린 자식의 뒷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단칸방이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그저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이다.
교사
▲ 1898년 학교
제복과 제모를 차려 입은 학생들이 보이고
그 앞에는 교사가 서있다.
그런데 교사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
중산모에 프록코트,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있지만
등에는 보따리를 매고 있기 때문이다.
비고는 이렇게 비꼬아 말했다.
비고
"선생은 왜 양복을 입고 있는가?
비고
"보따리를 등에 걸쳐 매고 싶으면
전통 옷차림이 훨씬 잘 어울릴텐데.."
비고
"양복에 보따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비고
"아마도 이런 모습은, 일본인이 급하게 근대화를 서둘렀기 때문에
근대 정신의 흡수가 뒤쳐진 탓이리라."
외교관
▲ 1890년 정월 초하루
외교관이 신년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막 집을 나서는 장면이다.
가족 전원이 그를
정중히 배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닥에 머리를 붙이듯이 인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부인을 포함해 자식과 그의 고용인들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다다미 위에서 구두를 신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서구화의 유행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다다미 위에서 구두를 신게 했던 것이다.
한편 고용인 중에 한 사람은
여전히 상투를 틀고 있는데
이는 1890년대에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문명개화운동'에 반발하는
완고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닐까 싶다.
외교관은 턱시도를 입고 있는데
당시 만찬회에는
꼭 이런 복장을 하고 가야
제대로 입장할 수가 있었다.
군인
▲ 1899년 면회
육군 병사가 면회온 숙부와
병영기지 앞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3년간 의무적으로 복무를 해야만 했었다.
참고로 일본은 개항 이래
가장 먼저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것은 군대였으며,
서양식의 군복은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군대는
근대화의 상징처럼 여겨졌었다.
그런데 숙부는 상투를 여전히 틀고 있었으니
그런데 숙부는 상투를 여전히 틀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왠지 대조적이다.
사진사
일본에서는 1862년
최초로 직업 사진사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사진을 찍으면 수명이 단축된다.'는 미신 때문에
직업 사진사들의 돈벌이는
그리 좋지 못했다.
▲ 1899년 공원의 사진사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이 되면
차츰 사진 찍기가 보편화되게 된다.
그림은 공원의 사진사가 견본을 보여주면서
촬영할 것을 거듭 권유하고 있는 모습이다.
▲ 1890년 정월 초하루
위의 그림은
설날 사진관의 풍경이다.
어린 아이와 함께 나들이 복장을 한
젊은 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남자는 파이프를 물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데, 당시 지팡이는 일종의 장신구였다.
외국인 가정의 메이드
▲ 1899년 유모차
개항기 이래
많은 서구인들이 일본에 살게 되자
하녀도 외국인 가정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서양문화와 접촉하면서
서구 문물의 합리성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유모차의 편리함은
일본 여성 중에서 이들 하녀들이
가장 먼저 인식하지 않았을까?
그림에서 보면, 전통식 방법으로 아이를 등에 업고있는
일본 가정의 하녀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데
유모차를 끄는 하녀의 모습과
사뭇 대조적인 풍경이다.
참고로 당시의 유모차는
오늘날의 사륜과 다른, 삼륜식이었다.
건널목 철도원
▲ 1899년 건널목 철도원
철도원이
여성이라는게 흥미롭다.
19세기 후반부터 여성들도
일상적으로 직업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굽 높은 게다를 신고,
뒤에는 아이를 업고 있고
철길을 건너려는 사람들은
억새로 만든 우비를 입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로는
안성맞춤인 아르바이트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열차의 통행수는 매우 적었다.
하루 3번 왕복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6번, 시간을 보고 건널목으로 달려가면 됐다.
그러나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급료 수준은 그닥 높지 않았다.
간호사
▲ 1898년 간호사
일본에서는 서양식 간호사가 등장한 것은
1868년이 시초다.
이후 1884년부터 전문 간호사 양성소가 생기게 되어
간호사가 전문 직종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웨이트리스
▲ 1887년 레스토랑
서양식 레스토랑의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여성 종업원이
구두나 슬리퍼도 신지 않고
양말만 신은 채 서빙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어물장수
▲ 1899년 어촌
어촌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중앙에 선 여성은
어린 코흘리개 딸과 시어머니에게
각각 어린 아이를 맡기고
해산물 행상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여인은 수건을 머리에 쓰고
허름한 옷은 허리 수건으로 동여매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또 다리에는 각반을 하고
버선 모양의
작업화를 신고 있다.
도시에는 근대화의 물결이 불고 있었지만
당시 시골의 모습은 대부분 이러했던 것이다.
경찰
▲ 1891년 유곽
유곽의 매춘부들은 부모의 빚 대신 팔려온
일종의 '물건'이었다.
때문에 만약에 그녀들이 도망쳐 버린다면
유곽 주인은 재산을 잃어버리는 꼴이 됐다.
그래서 메이지 시대의 경찰들은
매춘부들이 도망가지 않게 감시하는 역할도 했었다.
▲ 1891년 파출소 앞
위의 사진은 외국인이 파출소 앞에서
경찰에게 길을 묻고 있는 장면이다.
경찰은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손짓발짓으로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기타 각 직업의 사람들
좌측부터 철도 개찰원, 무 장사, 행상인, 쌀가게 배달부, 소방수 순서
농민(구식 변발), 농민의 아들(신식 머리), 공무원, 국회의원, 기자의 순서
게이샤
게이샤
▲ 1887년 무도회장
당시 게이샤들은
매일 밤 펼쳐지는
고관들의 연회나 무도회에
남성들의 파트너로 곧잘 동원됐다.
물론 이들은 평소 댄스 교습을
빈틈없이 받고 있었다.
그림은 무도회가 끝나고
한 편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담배를 피는 모습이
그다지 품위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 사건으로 본 메이지 시대
● 사건으로 본 메이지 시대
1871년 일본은 대규모 사절단을
구미 각국에 보내고 서구 문명 배우기에 전력한다.
그리고 그 해답을
독일의 근대화에서 찾았으니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 헌법까지 카피하며
메이지 헌법을 완성했을 정도였다.
▲ 1887년 도쿄
하지만 당시 프랑스인 화가 비고는
하지만 당시 프랑스인 화가 비고는
이런 독일 열풍을 경계했고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당시 프랑스는
오랜 기간 독일과 앙숙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1887년 독일 황태자가 일본을 방문하자
이런 풍자화를 그렸다.
독일 황태자 일행은 말을 타고 있고
행렬단의 선두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환영하는 일본인 가운데는
큰 절을 올리는 사람도 보이고
양복을 입은 일본 여성은
꽃다발과 화분, 맥주를 들고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 1898년 도쿄
그림은
일본 최초의 자동차 모습이다.
당시 프랑스인 테브네는 이 자동차를
6천엔에 판매할 계획으로 시범운행을 하고있다.
신기한듯 사람들은 모두
뚫어지게 자동차 주행 모습을 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동차를
6천엔이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5천 3백엔에 사겠다는
사람만 있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은 서구인들의 생각보다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테브네는 화딱질이 나서
자동차를 가지고 그냥 귀국해 버리고 말았다.
참고 문헌 : 메이지의 알몸을 훔쳐보다 (시미즈 이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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