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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현대사 ⑤ : 태평양전쟁 '지쳐가는 국민들' + 전사자의 60%가 굶어 죽었던 일본군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578031420



태평양 전쟁 초반 : 현혹된 국민들

● 전과에 현혹된 일본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으로 

일본 해군은 
미 태평양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당분간 미국의 방해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군이 조만간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첩보 통신에 의해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진주만이 될 것이라는 것은
미쳐 알지 못했다.

 루스벨트 
"이 놈들이.."

하지만 미국이 
마냥 손해 본 일도 아니었다.

"어?"

흔히 미국은, 대공황을
뉴딜 정책 덕분에 벗어났다고 말하지만,

뉴딜은 400만 명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을 뿐,

여전히 미국에는 900만 명이나 되는 
실업자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2차 세계대전'이었고

더 확실히 전쟁에 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건이

바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의 
얍삽한 선재공격 방식은

미국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기에

고립주의가 만연했던 
미국인들의 정서를 한방에 흔들어 놓아,

참전 여론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미국 
"요놈들 이제 죽었쓰."

한편 일본군은 
겉으로 보기에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위기의 징조는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 있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때, 
전투기만 출전했던 게 아니었다.

보유 잠수함의 총 4할이나 되는 
25척의 잠수함을 끌고 갔지만

미군의 대잠부대에 제압당해
힘 한번 제대로 못쓰고 

6척이나 
수중 격침을 당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서구의 첨단 무기를 
비슷하게 흉내 낼 수는 있었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
여전히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미국의 잠수함이
해안 깊숙이 침투하며

상선, 유조선 등에 공격을 집중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줄 때에도

일본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의 잠수함은
이후 제대로 된 전과 한번 못 올리고

매번 엄청난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말레이반도 상륙 때도
일본 전투기는 

영국의 방공포에 출전 전투기의 40%나 
피탄을 당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지만

큰 전과에 현혹되어
이런 부분들은 완전히 묻혔고,

이후로 연합군의 방공 능력은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에

대낮에 일본 전투기로 공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와도 같아진다.

필리핀에서의 상륙전도 그랬다.
미군의 전차와 맞붙은 전차전에서

일본군의 주력 전차는 
미국의 장갑차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너희 탱크 맞어?"

장갑과 관통력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일본군의 전차는 시쳇말로
'철로 만든 관(棺)'과도 같았다.

"잠수함, 전투기, 전차 모두
질적인 수준에서 현격히 떨어졌던 것임."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위험이 있었다.
유럽 정세의 변화였다. 

히틀러의 대소 공격은
11월 말까지 

모스크바의 코 앞까지 도달하고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막혔고,
12월부터는 오히려

소련군의 반격으로 양상이 바껴
독일군을 되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은, 
하필 그런 시점에서

태평양전쟁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국 전선의 변화 : 진멸작전과 문란한 군기

중국 전선에서 일본은 
점과 선을 연결한 

괴이한 모양으로 
전선을 형성할 정도로
 

병력의 절대 부족을 
겪어야만 했는데,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가뜩이나 모자라는 병력에서

남방으로 
병력을 빼돌려야 했으니

이후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의 병력밀도는 더욱더 낮아지게 된다.

1940년 시점에서 
일본군의 병력밀도는 

화북을 1이라 했을 때 
강남은 3.5~4 정도였다.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78)

주로 공산당이 
게릴라전을 펼쳤던 

화북지방에서는
분산 배치가 가능했지만,

국민당의 정규군과 대치하던
강남에서는 나름 집중배치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병력 밀도가 너무 낮았다.

화북 지역의 경우
1㎢당 0.37명에 불과했으니

서울만한 면적을 
고작 1개 중대가 맡은 격이었다.


▲ 1942년 일본군의 배치 현황 :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79

때문에 이 당시 
화북 지방의 일본군은 

부족한 병력에 대한 자구책으로
공산군이 점령한 해방구 지역에 쳐들어가서

부락 전체에 불을 지르고
식량과 물품을 모두 약탈·파괴하는 식으로

마을을 완전 없애버리는 식의
'진멸작전'을 시행하게 되는데,

 
"진멸작전!"

 
"적에게 쌀 한 톨도 주지 못하게
마을을 모조리 없애버린다."

이러한 작전은
곱게 이루어질 리 만무해서,

수많은 주민들이 살해되고
강간을 당해야만 했다.

"난징대학살과 같은 참상은
중국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임."

그리고 진멸작전으로 인해,
화북 지방의 해방구(항일마을) 인구는

1941년 4천만 명에서
2500만 명으로 급감하여

공산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게 된다.

한편 중국 전선은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 당시 중국 전선에서의
일본군의 군기란 
 

그야말로 
개판오분전과 같아서

강간·약탈·탈영·상관 폭행·
총기 분실·행방불명 등이 비일비재했고,

일본군의 점령지마다
일확천금을 좇아 

불나방처럼 
조선인들의 이주가 급증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도합
7만여 명에 달했고,
▲ 조선인 군속 (모형)

이들은 법적으로 일본인으로서 
치외법권을 누리며 

중국인을 상대로 
아편과 각종 마약을 팔았고, 
(박강,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 ☞ 참고)

"조선 상인의 70%가 
마약 밀매업에 종사했었음."

일본군을 상대로는
매점업과 위안소업(매춘업)을 행했다.


● 도조 독재의 완성

진주만 공습에 성공하자
대본영에서는 이런 뉴스를 발표했다.

"와야 할 것이 드디어 왔다.
언젠가 올 것이 드디어 왔다."

"청년들은 피가 끓어오를 뿐이다."

"모두가 나라를 생각할 뿐,
개인주의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이후 전황의 뉴스는
'대본영 발표'라는 형태로 국민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 대본영 발표

싱가포르 함락, 필리핀 점령, 
인도네시아, 버마 점령의 뉴스가 전해질 때마다

국민들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만세 삼창을 했고,

"천황폐하 만세, 만세, 만세"

이런 날에는
판매가 엄격히 제한됐던 술이 

배급되는 날이기도 했으니,
국민들은 잔뜩 전승에 취했다.

"하하하"

정부는 이런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전쟁 영웅을 만들어 냈는데,

진주만 침공 때 
조악한 잠수함을 타고 격침당한 

9명의 승무원들을
'군신(軍神)'으로 추앙한 것이다.

▲ 9 군신

"이때 1명의 장교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그런 사실은 덮은 채,"

 
"잠수함의 열악한 성능 때문에
격침을 당했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한 채."

이런 승리의 분위기 속에
도조 수상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그는 중국에서 아편을 재배·밀매하여
막대한 정치자금을 모아

군부에 뿌리는 식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국민생활을 통제하고

툭하면 무리한 동원령을 
남발하고 있었지만,

 도조 
"기업들에게 국채 강매"

 도조 
"국민들에게 저축 강요"

 도조 
"절간의 종에서, 가정집의 숟가락까지
필요한 금속은 모조리 공출"

▲ 사찰마다 회수된 종

 도조 
"출정하는 병사의 환송식 참여"

 도조 
"전사자의 장례식 참여"

희한하게도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매스컴을 이용할 줄 알았고
라디오 연설을 많이 했던 탓에,"

"친숙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임."


참고로 가구당 라디오 보급률은
1934년 15.5%에서, 1941년 45.8%로 급증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중반 : 미국의 반격과 불안한 징조

● 연합군의 반공 :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

일본 군부는
동남아를 신속히 점령한 이후

석유, 고무 등의 자원 채취와 
본토로의 수송에 힘을 쏟으면서
 

장차 있을 미국의 반격에 대비해
장기전의 태세를 갖추고,

남방 작전이 모두 종료되면
북방에서 대소전을 치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이 언제 쳐들어올까요?"

"진주만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깐.."

"1943년은 돼야 
반격이 시작되겠지."

그런 자신감으로 
동남아를 모두 접수한 1942년 3월,

일본은 뉴기니를 공격했다.
이곳을 먹으면 바로 호주였다.

하지만 미국은
그대로 지켜보지 않았다.

호주, 뉴질랜드 병사들을 데리고
적극적으로 막아 

일본군의 전진을 
저지시킨 것이다.
 


"아놔.."

때문에 일본은
일본 본토의 '초계 라인'이라도 더욱 넓힐 겸,

진주만 공습 때 섬멸하지 못한
미 해군의 잔여 병력을 완전 소탕할 겸,

태평양 외곽에 있는
외딴섬, 미드웨이를 치기로 했다.

 일본
"우리가 가면 
미군 놈들도 응수를 하겠지."

하지만 당시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어서

작전을 모두 간파하고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일본 해군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

"뜨아!"

일본은 그간 대승에 취해 
교만해져 있었지만,

미국의 능력이란
일본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전력에 있어 미군에 근소하게 앞서있었으니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참패를 
만회해볼 심산으로

다시 시선을 
뉴기니로 돌려,

이곳(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만들어
호주를 불바다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과달카날 섬. 사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어디에 붙어있는 지도 몰랐던 듣보 섬."

하지만 일본의 계획은
또다시 미군의 저지로 실패하고 말았고
 
 

이때 양측 모두 비슷한 물적 피해를 입고 
전쟁을 끝마쳤지만,


똑같은 손실이라면
사실상 미국의 승리였다.

"어?"

당시 미국은 전시경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해

전력을 급속하게 
증강시키고 있었지만,

없는 살림에 모든 걸 쥐어짜내고 있던
일본에게 있어서는

전력을 회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1943년 2월에 종료된
과달카날 전쟁은

가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었다.


▲ 미일간 전력 비교 : 일본의 전력을 100이라고 했을 때, 미국의 전력


● 병력 동원의 모순

태평양 전쟁은
중일전쟁과는 사뭇 양상이 달랐다.

일본은 연일 숙련된 조종사와
장교들을 상실했고

때문에 엄청난 인력난에
시달리게 되어

조종사와 간부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온 장교라고?
사회에서 뭐하다 왔는데?"

"직장 다니다 왔는데요."

병사들의 사망도 
크게 늘어나서

1942년 5월 
병역법을 개정하여

웬만한 질병이 있거나
신체 이상이 있어도

병업에 지장이 없으면 
모두가 입대하는 것으로 개정되게 된다.

때문에 지적장애자, 정신장애자가
입대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발생했다.

"혼자서 걸어 다니고 
밥 먹을 수 있지?"

"네."

"통과!"

이렇게 보면
일본은 전 인구를 상대로 

쥐어짜듯 엄청난 군인들을 
동원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내지인(일본인)만 8천만 명이었으니,
거의 2천만 명은 동원한 거 아님?"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인구 대비 병력의 수를 보면 이렇다.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123)

 
▲ 2차대전 당시 인구와 병력수 비교 :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포함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123)

당시 일본의 공업 기술력은
서구 열강에 비해 낙후했기 때문에

탱크와 비행기를 만들더라도
사람 손이 많이 필요했다.
 

농업 생산도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인구를 부양하려면
역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즉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은 
서구 열강에 비해

훨씬 많은 공장 근로자와 농민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여성을 동원하고
식민지로부터 동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여성 동원력은
상당히 저조했다.

일본이 여성 노동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한 것조차

전쟁 막판인 
1944년 8월부터였고

만 14세~40세 미만의 여성들 중
'미혼 여성'에 한해서만

1년간의 노동 의무를 
지웠을 뿐이다. (1944, 여성정신근로령)

"이때 군수공장에 동원된 여성들을
'정신대'라고 불렀다능."

가부장제의 
전통이 강했던 일본에서는

여성의 노동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공장 출근 모습

때문에 일본이 동원한 
여성 정신대는

일본에서 47만 명, 
조선에서 20만 명 정도였다.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125)

하물며 병사로서의 
여성 동원은

군부의 강한 반대로 
통신대가 소수 편성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반면에 국가총력전 양상을 띠었던
당시 세계대전에서

모든 참전국들은
남자는 전선, 여자는 군수공장이라는
 

기능 분화가 
이뤄지고 있어서

미국만 하더라도 4,300만 명의 여성들이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소련의 경우 여군의 숫자만 
80만 명에 달했고

간호병은 물론, 조종사·탱크 승무원·
저격수·유격대원 등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 조선과 만주에서의 동원

식민지로부터의 병력 동원도 
그 시기가 늦춰져,
▲ 2차세계대전 당시 영연방 소속의 인도군

조선의 경우
육군 지원은 1938년, 해군은 1943년

대만의 경우 육군 1942년, 해군 1943년부터 
지원이 가능해진다.
 
▲ 조선의 지원병들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외지인(조선인·대만인)에게
총을 쥐여준다는 것은.."

그러다 전황이 악화된 
전쟁 말기에 가서야 

식민지인에 대한
'징병제'가 이뤄져

조선에서는 1944년부터
대만에서는 1945년부터 실시되게 된다.


원래 계획으로는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징병제를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전선이 무척이나 다급했던 까닭이다.

대신 일제는 
병역의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1946년부터 조선인들에 대해
'참정권' 부여하기로 약속하게 된다.

"일본은 위계질서가 뚜렷한 
형제 관계를 원하고 있었지만,"

"조선과 대만인들은
모든 면에서 평등한 관계이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급박한 전황이 
그런 시기를 앞당기게 했던 것임."

이렇게 징병된 조선 청년들이
총 17만 명이 있었는데,

일본은 이들에게 
총과 총검 대신에

삽과 곡괭이를 쥐여주며
보급·토목·노무 등의 후방 근무를 하도록 했다.
 
▲ 남양군도에서 토목공사를 하고 있는 조선 출신의 노무병들

한편 조선에서의 징용령은
일본보다 1년 늦게 시행되어서 (1939)


중일전쟁 당시만 해도
'모집'에 의한 방식을 취했지만

"월급 많이 줄 테니 
어서들 지원하라능."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부터는

관의 '알선' 방식을 거쳐
단계적으로 강제성을 더하게 되다가

"아, 글쎄 지원만 하면
돈 많이 준다니깐, 어서들 지원하게."

태평양 전쟁의 말기(44년 9월)에는
완전한 '강제 동원' 체제로 변모한다.

"징용은 황민의 의무!"

이때 해외로
이송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주로 광산·토목 공사·
군수 산업에 투입되었고

국내에 배치된 
조선인들은

주로 댐 건설과 공장 건설 등에
동원되었다.


▲ 1939~1945년 동원된 조선인의 행선지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131)

그렇게 징용된 수가
합계 400~413만 명이었으니,

당시 조선 전체 인구의 15%가
전시 노동으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한편 만주국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넓은 영토 탓에 
농산물의 증산과

철강, 석탄 증산을 
도맡아 책임지게 되는데,

"만주의 농산물로
일본은 물론, 조선까지 먹여 살려야 했음."

덕분에 만주의 농촌은
농산물 공출로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 일제 치하의 동남아

동남아에서는 군인 사령관이
현지를 통치하는 '군정(軍政)' 방식을 취했는데,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치안 유지였고,

이는 곧 반일감정이나 항일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남아 현지에서
어떤 이들을 최우선적으로 관리해야 했겠는가?

바로 
화교였다.

이들 중에는 중국 국민당을
경제적으로 원조해주던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일본 군정은
가혹할 정도로 탄압을 자행했고

싱가포르에서만 
대대적인 숙청 작업으로

5천 명이 넘는 화교가 
처형되었다.

치안 유지 못지않게 중요한 임무는
'자원'을 본국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특히 석유와 고무는
중요한 군수 자원이었다.

식량을 조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일본 본국은 
병력을 현지에 툭 던져 놓고는

나머지 물자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 현지조달
 
현지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재앙과도 같았다.

그동안 동남아는 원료를 가지고
종주국의 공산품과 교환해 먹고살았는데,

일본은 그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일본 육군성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육군성
"도대체 남방의 1억 현지민들을
무슨 수로 먹여 살린단 말인가."

 육군성
"과연 일본이 미영란(美英蘭)을 대신하여
이들에게 지급할 여력이 있는가!"

게다가 전황의 악화는
동남아 경제를 더욱더 파탄에 빠뜨리고 있었다.

연합군의 잠수함과 전투기들이
제 집 드나들 듯이 출몰하며

물자를 실은
일본의 선박들을

시도 때도 없이 
격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과 동남아 사이의 
수송로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역 간의 수송로도 
가는 곳마다 절단되어

현지에서는 자원을 수출 못해
공산품의 품귀현상이 심각해졌고
 

"젠장, 비누가 없어
목욕 한 번 제대로 못해보네."

반대로 일본에서는
심각한 쌀 부족, 원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젠장, 원료가 없어
공장을 제대로 돌릴 수가 없네."

때문에 일본은, 동남아의 식민지들을 
대거 독립시킬 계획까지 하게 된다.

"앞으로 제국 경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필리핀, 베트남을 독립시켜 버리고,"

"고무와 주석 생산지인 말레이와
석유의 생산지인 인도네시아의 보존에 힘써야 되겠음." 



태평양 전쟁 후반 : 총력전으로 지쳐가는 국민들

● 절해고도에서의 옥쇄

과달카날 섬에서 
패퇴한 이후에도

일본은 광대한 점령지를 
확보하려고 고집을 피웠다.

원칙대로라면, 국력의 한계를 넘어 
확대되어 버린 점령지를 

과감히 축소하여 
전열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하지만 패배를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대본영은

뉴기니 섬에서의 공세로 
이를 만회하고자 했다.

"돌격 앞으로!"

그러나 연합군의 어뢰정에 
일본의 수송선과 보급선은 침몰되기 일쑤였으니,

뉴기니 전선에서
일본군의 운명이란 뻔했다.

보급이 두절됨에 따라 
10만 명 중 9만 명이 굶어죽은 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보고자 했던 이들은
동료의 시신을 먹으며 버텨봤지만.."

이후로 태평양전쟁은
공수가 교대되어 

미국이 공격을 하면, 
일본은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는 식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 첫 무대는
알류산 열도의 애투섬이었고 (1943년 5월)
▲ 알라스카를 바라보고 있던 애투섬

미군의 상륙으로
일본군 2500명 모두가 전멸을 하게 되는데

대본영은 이를 두고 
"전원 옥쇄"라는 표현을 썼다.

옥쇄란 '옥이 아름답게 부서지듯' 
마지막까지 싸워 깨끗이 산화했다는 의미다.

이후 '전원 옥쇄'는 
미국이 절해고도를 탈환할 때마다 발생하였고

그때마다 언론은 
시도 때도 없이 '옥쇄' 드립을 치게 되는데

너무 남발하다 보니 
그것도 문제였다.

"뭔, 허구한 날 옥처럼 부서져?"

"그러게. 일본군이 무력하다는 
인상만 주는 듯."

때문에 1943년 12월, 
타라와 섬을 지키던 수비대가 전멸당했을 때부터

'전원 옥쇄' 대신
'전원이 장렬히 전사했다'로 표현이 바뀌게 된다.
▲ 타라와섬의 포로들 : 일본군은 대부분의 전선에서, 병력의 1%만이 투항을 했다

절해고도에서
전원 옥쇄가 반복됐던 것은

군부가 애초에 이들을
시간 끌기용 '미끼'로 삼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은 전쟁 초기,
초계라인을 넓히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고

병사들에게는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최후까지 싸우다 
명예롭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고

설령 이들이 포위되더라도
결코 구원해 줄 생각이 없었다.

 도조 히데키
"어쨌든 우리는 
시간을 벌었다."


● 남양군도 함락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던진 미끼에 넘어가주지 않았고

'징검다리 작전'을 통해
주요한 섬들만 공략하는 전법으로 맞섰기에

보급선이 끊어져 
굶주림에 직면한 

일본 수비대의 피해만
급격히 불거지고 말았다.

그러던 1944년 여름,
미국은 남양군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양군도는 
태평양의 여느 절해고도와는 달랐다.

제법 큰 섬들로 이뤄졌고,
이곳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2,500km

B29 폭격기로 3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다.

때문에 일본은
남양군도의 중요성을 인지해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해군을 투입하고

육상에서도 
전차를 투입하고

최후까지 반자이 돌격으로 맞섰으니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반자이!"

당시 사이판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온 농업 이민자였는데,

미군에게 잡히면
끔찍한 고문 끝에 죽는다는 소문을 믿고

대다수가 해안의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는 주민

▲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투신자살을 했던 사이판의 '만세절벽'

"헐!"


● 갈수록 궁핍해지는 국민들

일본 전시체제의 특징은,
'전시체제'의 강화와 국민 생활의 '궁핍화'가

항상 병행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맹국 독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의 경우 정부가 
생필품을 확보하는 것을 중시하여,

군수품을 희생해서라도
국민의 생활 수준을 어느 정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개인 소비지출에 있어 
1943년 시점에서도

2차대전 개전 시(1939년)의 
8할 수준은 유지하고 있었다.
(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 전쟁 p143)

그에 반해 일본의 경우
전시 물동계획이란,

오로지 군수 생산에만 치우쳐졌기 때문에
민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정부
"민수란 젖은 걸레처럼 짜면 
짤수록 여유가 생기는 것임!"

그 결과 전쟁이 지속될수록
국민 생활수준은 급격히 낮아지는데,
▲ 무를 먹고있는 농촌의 아이들

중일전쟁 당시
GDP의 2할을 사용하던 군비 지출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3할이 넘어가고, 

전쟁 말기에는 4할을 넘어 
5할에 근접하고 있었다.



그러니, 전쟁 말기 
국민들의 소비지출은

중일전쟁 직전의 
절반에도 못미치고 있었다.

생활 수준의 저하는 
식민지·점령지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으니,

전쟁 막판 조선의 생활수준은
구한말보다도 못했을 정도였다.

▲ 조선의 1인당 GDP의 변화 (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p.16)

이러한 모습들은
미국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미국은 전시체제로 이행하고 나서
경이적인 성장을 이뤄

1940년 997억 달러의 GDP가
1945년에는 2199억 달러로 확대된다.

 
"5년 사이에 3배 증가. 
매년 평균 25%씩의 성장!"

"전후 미국의 GDP는 
전 세계의 절반이라능!"


고로 미국은, 전시에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유일한 나라였다.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2차 세계대전은 
좋은 전쟁이라는, 낙관적인 전쟁관을 심어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미국인의 전쟁관을 속박하고 있다능."



● 물자 부족과 배급제

일본은 왜 전시에
그토록 경제가 어려웠던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선박의 상실'에 있었다.

1943년의 선박 보유량은 개전시의 77%
1944년 말에는 40%까지 떨어졌다.

이유는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방에서 일본 본토로의 물자의 수송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일본의 군수공업은
원료 부족으로 극도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 부족한 자원도 군수공업이 일순위였다

그러니 생산된 물자가 
부족해졌고

모자란 물자를 아껴 쓰기 위해서
일본은 '배급제'를 실시하게 된다.

정부가 결정한 
분배량만큼만 

주어진 가격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당시의 표어 "사치는 적이다!"

1940년 6월부터 
점진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국민 생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1941년부터 주식인 '쌀'을 
배급제로 분배하면서부터다.

이때 쌀 배급량은
성인 1명당 하루에 겨우 160g 정도로

밥을 짓게 되면
겨우 밥 두 공기가 나오는 분량이었다. 

"칼로리로 따지면 겨우 600칼로리."

하지만 이마저 1945년부터는
쌀과 함게 잡곡이 혼합되기 시작한다. 

"참고로 쌀과 잡곡의 혼합은 
조선의 경우,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있어왔고,"

"만주의 중국인들에게는
아예 처음부터 전량 잡곡으로만 지급됐었음."
(사실 화북 출신의 중국인들은 쌀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뭐, 쌀이 잡곡보다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것도 아니지만서두.." ☞ 참고

이러한 배급제는 
모든 물품으로 확대되어

생선·의료품·된장·간장·과일 등이 
배급제로 나눠졌고

암거래는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 배급된 물품과 배급이 시작된 시기


● 국민의식의 변화와 격앙된 반미의식

전장에서의 소식은
철저한 언론 통제에 따라

일반 국민들은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었고

전사자가 공표되면 
당국은 전사자의 숫자를 알 수 없도록,

전사자 이름을 
해당 지방 신문에만 공고하도록 했다.

그래도 지역 사회의 동요를 
완전히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 전사자 합동 장례식

어느 농촌에 갔더니 
두 집에 한 집 꼴로

전사자의 집이라는 
표찰이 걸려있다는 식의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 전사자 표찰

유족에게 있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전사자의 유골이 수습되어 있는 
상자 안에서

실제 유골 대신에 
'유혼사'라는 모래를 받았을 때였다.

원격지의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의 시신은

그대로 본국에 송환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여

현지에서 화장을 해서
뼛가루를 전달해주는 것이 통상의 방식이었고,

여의치 못할 때에는
전사자의 손목이나 새끼손가락 등을 잘라 

그것만이라도
화장을 해서 보내주곤 했는데,

그마저 불가능해서
모래나 작은 돌을 거둔 상자를 보냈으니

이러한 유족들의 불만과
지역사회의 흉흉한 소문까지는

도저히 잠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 마을의 합동 장례식

그러는 사이
국민들은 불만이 쌓여갔고,

반전(反戰)적·염세적인 내용으로 개사한
불온가요가 퍼지기도 했다.

"이 놈의 전쟁
모두가 죽어서 돌아오는 전쟁~♬"

한편 그럴수록
미국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해

"무찌르자! 귀축미영!"

미국 영화가 
완전히 금지되고

미국과 영국 가수들의 
레코드 판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도시의 간판에서도
영자 간판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간판에서 영자를 말살하자


재즈 음악의 
연주도 금지되었고

영어 잡지나 회사명도 
어쩔 수 없이 개명을 해야만 했다.

"앞으로 잡지 king의 이름을 
'후지'라는 이름으로 고치겠다능."


언론에서도 연일
미·영국군의 잔학성을 크게 부각하였고

"귀신과 짐승같은 귀축미영!"

포로로 붙잡힌 미군들은
심각한 학대를 각오해야만 했으며,
▲ 미군 포로

"미군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면
사망률은 1.2%였지만,"

"일본군의 포로가 되면
37.3%가 사망했다능."

 
▲ 미군 포로의 사망률

일본 본토를 공습하다 격추되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미군을 

성난 민간인들이 
참살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었다.



일본 패망

● 최후의 전투 :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

전쟁 막판 일본은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만다.

1944년 10월, 미국의 함대가
대만과 필리핀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대본영에서는 
전투기를 급파하게 되는데,

이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뭐야? 적의 항공모함을 11대 격파하고
전함 2척 등 총 28척을 격침했다고?"

 
"그게 사실이야?"

일본 국민들은
오랜만의 전과에 열광했다.

 
"하하하. 하늘이 우릴 버리지 않았구나.
이 전쟁, 잘 하면 이길 수도 있겠어!"

하지만 실제로는 
중형 군함 2척을 격파했을 뿐,

일본군은 300대 이상의
전투기를 상실해야 했다.

그런데도 대본영은
끝까지 그런 사실을 모르고,

44년 12월 미군이 
필리핀을 상륙하려 하자

모든 군함을 총 출동시켜
과감히 미국과 맞짱을 뜨고 말았다. (레이테 해전)

"괜찮아. 지금 미군의 해군력은
크게 상실된 상태라고!"

그랬으니
어찌됐겠는가?

이곳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등 총 29척을 상실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해군의
절반을 날려버리고 만다.

"에겅.."

이후 미국의 침공은
일본 본토의 코 앞까지 펼쳐졌으니,

1945년 2월,
미국은 이오지마에 상륙했다.

미국
"1주일 정도면 끝나겠지 뭐."

하지만 이번만큼은
일본도 단단히 준비했다.
 

섬 전체를 땅굴로 연결된
거대한 방어망을 조성한 까닭에

미군은 지옥과 같은
십자포화에 시달려

1미터를 전진하는 데에만
평균 4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한 달간의 전쟁에서
미군은 참전 병사의 37%인

2만 6천 명의 
사상자를 배출하게 된다.

반면에 일본은 
21,800명이 전사하여

처음으로 사상자 교환에서 
일본이 미국을 이겨보게 된다.

이어서 벌어진
오키나와의 전투에서도

미군은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다.

일본군은 
전쟁을 치를수록

미군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호와 땅굴을 파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뚫리면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하는 식이었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맞서싸운 중공군의 전법과 비슷했다.

미군
"아놔.."

한치의 땅을 전진하기 위해
무수한 피를 흘려야만 했다.
▲ 땅굴 속에 숨어있는 일본군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고 있는 미군

전쟁은 지루해졌고
결국 3달만에 섬을 함락했지만,

미군은 도합 1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이 중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10만명이 죽고, 
민간인 12만명이 사망한 것이다.

오키나와는 군부가 생각하기에
'버림돌' 작전을 해줬으면 하는 곳이었다.

 도조 히데키 
"오키나와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면,"

 도조 히데키 
"그 사이 우리는 
본토 방어의 시간을 벌 수 있다!"

때문에 주민의 피난 계획이나
안전 확보 대책이 미비해서

주민들이 입은 피해가 
실로 막대했다.

특히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현지 주민이 살해당했는데,

오키나와는 1872년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 복속된 영토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있어 
오키나와 주민은

여전히 자신들보다 열등한
피식민지인들일 뿐이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주민의 거동이 수상하다 싶으면

미군의 스파이로 간주해
현장에서 바로 처형했을 뿐 아니라,

장교용 참호를 확보하기 위해
주민들을 참호밖에 쫓아내어

많은 주민들이 미군의 폭탄 세례를 맞고 
사망하도록 방치했다.

또 미군에게 발각될까 봐
우는소리를 내는 아기를 살해하는가 하면
▲ 그림에서는 강아지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이도 살해했다

미군에게 투항하려는 주민을 
사살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 드라마 '더 퍼시픽' 中

더 심각한 것은 
집단 자결이었다.

미군에게 압도 당해 
자포자기한 일본군 장병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주며

황국신민으로 자결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 비참한 병사들

전쟁 말기, 병사들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장비가 부족했다.

대본영은 최후까지 
전투기 생산에 몰두했기 때문에

소총 생산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병사들은 소총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구식 소총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 러일전쟁 때 사용하던 구식 총을 여전히 사용했다

1945년 6월, 
관동군의 신설 부대의 경우

소총을 가진 병사가 40%,
총검을 가진 병사가 30%에 불과할 정도였고

중국 전선의 
후방 병참 부대의 경우

죽창을 병기로 
휴대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군복과 군화의 부족도
심각한 문제였다.

중국 전선에 배치된 한 부대의 경우
1년 동안 아예 보급이 끊겼고,

버마에 파견된 부대는
군화를 아끼기 위해 

평소에는 맨발로 다니라는 
상부의 지침을 받을 정도였다.

신참의 경우 
현지에 도착하면

하사관과 고참들로부터 
신품의 군복, 군화를 모두 빼앗기고

"오! A급!"

대신 너덜너덜한 군복과
'폐급' 군화로 갈아 신어야 했던 게 일상적이었다.

"이런 일본의 군대문화가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군대에 파고들었다능."

더욱이 제공권을 상실하여
차량 운반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1인당 40~50kg씩의
군장을 짊어지고

수백km의 거리를 
야간을 틈타 행군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군의 전사자 수는 갈수록 늘어 갔다.

중일전쟁 이후
전사자의 수는 총 230만 명.
 

이 중 굶어죽은 병사가
전체의 60%인 140만 명이었다.

굶주림에 처한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에 핏기가 전혀 없었고

복부에는 물이 가득 차
임산부처럼 부어오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주워 먹다가

나중에는 전신 권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그대로 죽는 것이었다.

선박 격침에 의한
해몰사의 피해도 컸다.

군함 650척, 상선 3000 척이 침몰해서
사망한 전사자 수만 40만 명을 넘었다.

집단 자살과도 같았던
'반자이 어택'으로 

무수한 생명들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고,

가미카제 
자살폭격으로

4천 명의 조종사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일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1인승 자폭 잠수정을
대량생산하여

바닷속의 가미카제라는 
'가이텐'을 운용하기도 했다.
 
▲ 잠수함에 장착한 1인용 자폭 잠수함, 인간 어뢰 '가이텐'


▲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일본군 사망 원인 (단위 : 만 명)


● B29의 본토 공습

1944년 6월 미군은 
국민당의 임시수도였던 충칭을 거점으로 해서

B29를 띄워
처음으로 일본 본토(규슈)를 공습했다.

B29는 최대 속도 600km,
항속거리가 무려 6천km가 넘었고

고도 1만m 상공을 
날아갈 수 있어,

당시 일본의 기술력으로는
B29에 맞설 수 있는 

전투기나 고사포가 
전혀 없었고,

그저 레이더를 통해
본토 접근을 알리고

미리 방공호로 
대피하게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런 B29의 발진이
사이판, 이오지마가 함락되면서
 
▲ 충칭 비행장에서 출격했을 때, 사이판에서 출격했을 때의 유효 반경 비교

일본 본토와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할 수 있게 되어,

일본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 이오지마를 함락하면서 B29는 일본 전역을 사정권으로 두게 됐다

"일본 열도 전역이 
B29의 밥이 된 것."

당시 B29는 일본의 군수 산업단지,
대도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폭탄의 반경 내의 것은
모두 다 불태워 없애버리겠다는 심보로

섭씨 4천 도의 고열을 발산하는
'소이탄'을 무차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 소이탄 공격으로 잿더미가 된 도쿄 

그러니 
공습 예보가 울리면

"애애애앵~"

주민들은 서둘러서 
자전거, 리어카에 세간살이를 싣고

교외 방공호로
도피를 해야만 했다.
 

"에잇,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거 불안해서 어디 살 수가 있나."

"그래도 집이라도 안 날아가면
다행인줄 아쇼."

이러한 공습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국민들은 그간 
대본영이 떠들었던 말들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미일 간의 전력 차이를
뚜렷이 지각할 수 있었고

그것이야 말로,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전의 상실을 가져온 결정타였기 때문이다.

"에라! 이놈의 전쟁.."

그러면서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이

군국주의적 명분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결사항전? 좋아하시네. 
나부터 살고 봐야지."

"국가가 우리들한테 
그동안 해준 게 뭐 있다고?"

일본인들은 차츰 
사생활을 우선시하게 되었고

풍족한 삶을 갈망하는
물욕적인 자세로 사고를 전환하게 된다.
 
 
▲ 전쟁 말기에 만연된 에고이즘을 잘 나타낸,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을 통해
개인주의가 크게 만연하게 되는데,"

"이런 개인주의는, 한일 양국의 고도성장을 일으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능." ☞ 참고


● 원자폭탄과 종결

일본의 패배는
이미 2년 전부터 기정사실된 것이었다.

때문에 1943년 11월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중국 장제스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나
이런 선언을 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미영중 3국은 공동으로 싸우겠다."

"일본은 약탈한 식민지를
모두 반환해라."

"만주, 대만은 중국에게 반환하고
조선을 독립시켜라."

그리고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서 만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이러한 얘기들을 나눴다.

 루스벨트
"곧 일본 본토를 상륙할까 하는데
좀 도와주삼."

 스탈린
"대신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우리한테 넘겨준다면야."

원래 영토 거래는
대서양 헌장 정신에 위반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세계 대전 중에
그런 사소한(?)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스벨트
"OK"

"때문에 오늘날 쿠릴열도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는 거임."

이 무렵 일본의 군부와 정부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45년 3월)

 고노에
"패전은 유감입니다만,
이러고 있다가 공산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고노에
"천황제를 보존하려면 
이쯤에서 적당히 종전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쇼와 덴노
"글쎄.."

그리고 두 달 후,
독일이 무너졌다. (45년 5월)

이제 일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은 
더욱더 불안해졌고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미국과 교섭을 하고자 했다.

 일본
"저기, 미국한테 내가 좀 보잔다고
얘기 좀 해줬으면.."

하지만 독일을 굴복시키고
대일전을 준비하던 소련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45년 6월)

 소련
"흥!"

 일본
"..."

그리고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연합국의 정상들이 만나

일본에 이런 요구들을
들이밀었다.

"무조건 항복하고, 
식민지·점령지 모두 뱉어내고.."

"군국주의자들 모두 제거하고,
군인들을 모두 무장해제 시키고,"

"전범을 처벌하고, 덴노제를 폐지하고, 
배상금도 지불하라."

"그러면 
이 전쟁을 끝내주겠음."

일본 
"뭐?"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무리한 요구였다.

일본 
"에잇!"

하지만 그게 
마지막 요구가 될 줄이야..

3주 뒤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불과 폭탄 두 방에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중에 조선인도
4만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소련이 만주로 침공했다.
무려 150만의 대군이었다.

"뜨아! 무조건 항복.
포츠담 선언 수락할게염."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공문서부터 잽싸게 소각했다.
▲ 소각 명령을 받았던 문서 중 일부

이로써 4년에 걸친
태평양 전쟁이 막을 내렸고

15년에 걸친 중국과의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15년간의 전쟁으로
일본은 최소 300만 명이 사망했고

중국인 1500만 명, 인도네시아 100만 명,
필리핀인 50만 명, 조선인 50만 명 등

총 2천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 참고
 

일본이 싸운 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아시아의 민중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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